바나바와 그리스도인
사도행전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각자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재와 더불어 제자들의 독립을 말하고 있고, 성령의 시대가 열릴 것을 예고합니다. 성령 강림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파격적인 나눔의 삶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스데반 이야기는 복음이 유대 땅을 벗어나 이방 나라로 전해지는 계시가 마련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 이르러,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전개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대표하고 고넬료는 이방인을 대표합니다. 이 둘의 만남을 통해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담이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죠.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에게 고넬료와의 사이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보고합니다. 10장에서 발생한 일이 11장에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다시 진술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사도행전에 두 번 반복해서 기록됩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기록했다는 뜻은 그 사건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별일 아닌 것 같고, 이전의 이야기들(성령 강림 사건이나 스데반 사건)에 가려져 별로 깊이 인식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꼽으라면 바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 자신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10장과 11장에 걸쳐 두 번 반복해서 그들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급진적/파격적(radical)인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나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주님(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고백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 사건을 직접 경험했으면서도 복음을 유대인의 울타리 안에서만 전했던 것이죠. 그것은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의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들의 좁은 인식과 한계를 깨뜨려주십니다. 그 사건이 바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입니다. 사도행전 10장과 11장은 복음이 유대인(유대땅)의 울타리를 넘어서 보편적인 것이 되어 가는 과장 중 가장 결정적인 사건을 진술합니다.
현대인들은 복음이 유대인의 담장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인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유대인 중에는 그리스도교인이 별로 없습니다. 현재 그리스도교인의 대다수는 ‘이방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본인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본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실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 복음이 유대인(유대땅)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이방땅)에 전해진다는 것은 개벽 같은 일이었습니다. 절대로 생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상식으로 ‘이것은 절대 있을 수 없어. 이러한 일은 절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실거야.’하는 그런 일이 발생한 겁니다. 복음은 진실로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것입니다.
시대를 지나오며 복음이 우물 안에 갇혀 그 원래의 급진성과 파격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복음이 매우 보수적이고 진부한 것처럼 변해버린 우리 시대를 바라보는 일은 안타깝고 슬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급진성과 파격성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바로 복음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노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복음의 급진성과 파격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진술입니다(행 10:34-35).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지체들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을 때 ‘할례자들’은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행 11:3). 베드로를 비난하는 자들은 단순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이방인과 밥을 같이 먹고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죠. 그런데, 요즘 (한국의) 개신교가 마치 그 ‘할례자들’이 된 듯합니다. 복음의 급진성과 파격성은 온데간데없고, 율법만 남은 듯합니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무할례자들’을 향해서 무차별 공격을 하고, 비난하고 비방하고, 폭력을 가합니다. 마치 자신들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듯, 복음의 잣대로 ‘무할례자들’을 마음대로 정죄합니다. 복음을 들었으나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 반복되어 나오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 사건을 계기로 헬라인(이방인)에게도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 사건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있지 못하던 예루살렘교회(초대교회)의 제자들에게 성령은 그 의미를 좀 더 넓고 깊게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제 복음은 유대인의 담장을 허물고, 그것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가리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제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적으로’ 그리고 ‘급진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해집니다.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통해 수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이것을 인지한 예루살렘교회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리고 좀 더 체계적인 복음 전파를 위하여 안디옥에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안디옥은 이방 지역입니다. 그곳에 바나바가 파송됩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가 파송한 첫 이방인 선교사인 셈입니다. 누가는 바나바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착한 사람이요(he is a good man)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 11:24). 초대교회에서 바나바만큼 칭송을 받은 인물이 드뭅니다. 바나바는 정말 멋지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더 멋집니다. 그는 이방인 사역을 위해서, 다소에 머물고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옵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 첫 파송을 받은 선교사 바나바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하여 이 일에 적합하다고 여긴 바울을 몸소 가서 데리고 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둘이 함께 안디옥 지역에 머물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복음 전파 사역 덕분에 안디옥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안디옥교회를 향해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유대인들에게서 그리고 유대땅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서 그리고 이방땅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a follower of Christ’(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이 용어에는 이미 급진성과 파격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넘어서, 담을 허물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낭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새로움에 열려 있지 않으면,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그것을 넘어설 용기가 없으면, 누구든지 포용할 넉넉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택하겠다는 믿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할지라도 세상에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이 급진성과 파격성이 사라지지 않고 꽃피우도록, 바나바처럼 바울처럼 주님께 쓰임 받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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