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4. 6. 5. 06:44

세화의 기도

 

주님
주의 종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사

주님의 몸된 교회를 부흥케 하옵소서.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고하겠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아멘.

 

* 느헤미야에게서 배운 기도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6. 5. 06:43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느헤미야 4:1-14)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것을 주셔서

우리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느헤미야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훼방꾼들을 만나 어려움을 당했지만

주저하거나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백성들과 더불어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일하기.

기도하면서 헌신하기.

이것은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강력한 전략이고 무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느헤미야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도록 전력과 무기를 주셨으니

우리도 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흥의 기회를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헌신하여서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게 하옵소서.

이 모든 일에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6. 5. 06:40

화해 사역

 

요즘 TV 뉴스에서 대학생들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에 대한 반전시위를 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시위 현장이 궁금하여 며칠 전 스탠포드 대학교 캠퍼스에 다녀왔어요. 스탠포드 캠퍼스 중앙에 가면 학용품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자리한 건물 앞 공터가 있는데, 그곳이 시위 현장이었습니다. 우선 눈에 띈 것은 반전시위 하는 학생들이 쳐 놓은 천막이었습니다. 그것은 Pro-Palestine 진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 정부를 향해 전쟁과 학살을 당장 멈출 것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현수막 중에 이런 문구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Silence is violence”(침묵은 폭력이다). “No tech for genocide!”(학살을 위한 테크놀로지 반대!). “Jews say ceasefire now”(유대인들이여, 당장 휴전하라고 말하세요!). “Hands off Rafah”(라파에서 물러나라!).

 

이러한 시위 현장 바로 앞에는 수많은 이스라엘 국기와 미국의 성조기가 함께 꽂혀 있고 그 가운데 이번 하마스의 공격에 납치 희생당한 사람들의 넋과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의자들이 놓여 있는 시위 현장이 보였습니다. 앞에는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이 그동안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행한 테러들을 보여주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같은 구역 안에 이렇게 상반된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여기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축소판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은 극단적인 양극화의 현장이었습니다.

 

현재 지구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양극화(polarization)입니다. 정치권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정치적 갈등이 폭등하고 있고, 경제권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교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가 갈려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볼썽사나운 풍경이 자주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이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단순히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대표하고, 고넬료는 이방인을 대표합니다. 고넬료의 청함을 받은 베드로가 고넬료 일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행 10:8) 매우 유대인 중심적인 생각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고 유대인이 아닌 나머지 민족은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향해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유대인)와 고넬료(이방인)의 만남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4-19)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이었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시고 둘이 하나 되게 하신 화평과 화목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을 일컬어 화해 사역이라고 칭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은 화해 사건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바로 이 화해 사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동일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을 통해 고넬료의 청함을 거절하지 말고 그에게 가서 그와 ‘교제’할 것을 지시받습니다. 고넬료는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을 통해 자신이 지내고 있던 가이사랴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도시 욥바에 유숙하고 있던 베드로를 집으로 청하여 ‘복음’을 들을 것을 지시받습니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의 경건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큰 일(복음)을 들을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한 베드로에게 성령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베드로는 말씀에 힘입어 고넬료의 청함에 거리낌 없이 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이사랴에서 만납니다. 가이사랴는 그당시 로마군대가 주둔하던 곳입니다. 거기에는 로마 총독 관사도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점령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은혜로운 만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매우 영적인 사건입니다. 정말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막힌 담이 허물어진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청함을 받고 그의 집에 가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베드로가 드디어 십자가 사건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왜 하나님은 그 죽은 예수를 사흘만에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는지, 이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화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구원을 단순히 죽음 이후에 천국가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매우 축소시킨 생각이고 여러가지 인간의 욕망을 투영시킨 모자란 생각입니다. 구원은 이보다 훨씬 깊고 넓고, 무엇보다 현실적입니다. 구원은 다른 말로 화해(reconciliation)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구원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의 능력은 화해입니다. 위에서 사용한 용어를 써서 다시 표현하면, 복음의 능력은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막혀 있어서 탈이 납니다. 몸도, 마음도 영도. 몸의 어느 부분이 막히면 병에 걸리거나 죽습니다. 마음이 막히면 인간관계에 탈이 납니다. 관계에 탈이 나면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발생하여 인간이 서로를 헤치고 죽이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우리의 영은 죽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인생이 아주 허무해집니다.

 

복음은 구원인데, 그 구원은 전인적입니다. 몸도, 마음도, 영도, 모두 치유합니다. 막힌 담을 허물어줍니다. 몸이 화해하면 건강해지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마음이 화해하면 화평해지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영이 화해하면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우리의 삶 모든 것에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죽은 다음에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그 구원은 화해입니다.

 

우리가 요즘 경험하는 사회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자연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높이높이 쌓이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아픈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도 자명합니다. 복음은 화해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양극화 현상을 허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 사역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화해 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우리 함께, 복음을 가지고 나가서 막힌 담을 허뭅시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6. 5. 06:36

할 수 있는 일을 간구하는 기도

(학개 2:1-9)

 

우리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학개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긴장감을 늦추지 않도록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포로에서 귀환만 하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고 믿었던 이스라엘이지만,

그들은 귀환하여 성전을 짓다 말고, 자신들의 집 짓는 일에 몰두하다가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으나 성과가 없었고

무엇을 해도 마음이 기쁘고 즐겁지 못했습니다.

주님, 학개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깨우쳐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깨우쳐 주옵소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새로운 예배 처소를 허락하셔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부흥케 하실 줄 믿습니다.

그 놀라운 일에 동참하는 믿음의 자녀들 되기 원하나이다.

주님, 우리가 마음을 조금만 더 열고 주의 일에 동참하게 하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나 자신을 조금만 더 헌신하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무엇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 교회를 부흥케 하실 줄 믿습니다.

교회들이 어렵다고 모두 아우성 치고 있는 이 때에

우리 교회를 들어 써 주옵소서.

우리 교회를 부흥케 하셔서 교회들의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와 설교2024. 6. 5. 06:29

고백적 시와 고백적 설교

 

신학의 언어는 고백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신학은 절대자에 대한 사랑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고백적이다. 한 존재를 향한 언어가 고백적이라면 그 사람은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다. 사랑에 빠진 모든 인간은 고백적인 언어를 쓴다. 고백적인 언어를 쓸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신앙은 절대자를 향한 사랑의 언어를 시도때도 없이 쏟아놓기 때문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고백에는 사랑의 고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시에서 배울 수 있다. ‘고백’(confession)이라는 용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발전시킨 이래 인간의 언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발전시킨 고백의 언어는 신학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문학 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 종교적 고백은 신의 공동체로부의 고립, 자기소외, 불안과 불행, 고통스러운 자각과 죄의식, 회개와 죄의 공언, 신의 공동체로의 복귀와 자기동일성의 회복 등을 표현하는 수단의 성격이 강하다.[2] 종교적 고백시는 신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절대자와의 관계는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에 내적인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문학에서의 고백시는 자신의 내밀한 삶을 토로할 때 “시인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위기에 놓인 문명과 역사에 대해 말하기 위함”이다.[3]

 

1979년 『문학과 지성』을 통해 한국문단에 등단한 최승자의 시는 전형적인 고백시의 형태를 띄고 있다. 김승희는 최승자를 비롯한 여성 시인들의 시가 고백시적인 경향을 띄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1) 개인이 억압을 당하자 내면의 위기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고백적 성향이 부상하였다. 2) 1960년대의 순수/참여 논쟁, 1970년대의 민족문학 혹은 민중문학 논쟁에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개인’의 무의식이 고백적 목소리로 분출되었다. 3) 페미니즘 이론의 소개와 고백시의 번역, 소개 등에서 문화적 자극을 받아서 고백시가 나타났다.[4]

 

최승자 시의 고백적 성격이 담긴 몇 편의 시를 보자.

 

쳐라 쳐라 내 목을 쳐라. / 내 모가지가 땅바닥에 덩그렁 / 떨어지는 소리를, 땅바닥에 떨어진 / 내 모가지의 귀로 듣고 싶고 / 그러고서야 땅바닥에 떨어진 / 나의 눈을 감을 것이다

ㅡ 「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 『이 시대의 사랑』, 15.

 

옛날에 옛날에 / 애매와 모호가 살았는데 / 서로 싸웠다. / 너는 왜 그리 애매하냐고, / 그럼 너는 왜 그리 모호하냐고, / 둘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싸우며 죽어갔다. / 정신분열증과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며 죽어갔다.

ㅡ 「나날」, 『기억의 집』, 51.

 

최승자는 무한한 자기소외 경험하며 그 소외의 내적 심연을 시로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최승자의 고백적 언어는 단순히 자신의 내면 상태만을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내면 상태는 위기에 놓인 문명과 역사에 대한 반영이다. 최승자는 고백시를 통해 자기의 내면과 자기 바깥의 세계가 동일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설교할 때, 설교에서는 내면과 바깥의 동일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설교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고백적일 수밖에 없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를 향하여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에서의 내면은 교회이고 바깥은 세계이다. 설교가 고백적이라면 설교는 위기에 놓인 문명과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아픈 것은 단순히 교회 내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문명과 역사의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참아내고 이겨낸다. 그래서 아프다. 설교는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밝힐 필요가 있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의 삶이 아픈 이유는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문명과 역사가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이것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교회는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어떤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할지, 무엇을 위해서 간구해야 할지 바르게 알 수 있다.



[1] 김정신, 『고통의 시쓰기, 사랑의 시읽기』 (서울: 아모르문디, 2019), 10.

[2] 송무, 「고백시의 성격과 의의」, 『영미어문학연구』 1집, 1984, 96-97.

[3] 김정신, 11.

[4] 위의 책, 15-16.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6. 5. 06:28

갈 만한 교회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에스라 3:8-13)

 

우리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이 우리 교회에 부어주실 은총을 기대합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의 예상치 못한 은총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쓰고

함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교회를 통하여 주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교회가 힘들다, 어렵다 하는 이 시대에

어둠과 풍파를 뚫고 지나가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고전하고 있고 교회들에게 희망이 되게 하시고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 기쁨을 되찾아 주는

그리스도의 숨결이 살아 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갈 만한 교회가 되게 하셔서

우리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에게

푸른 풀밭이 되게 하시고 쉴 만한 물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