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사역
요즘 TV 뉴스에서 대학생들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에 대한 반전시위를 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시위 현장이 궁금하여 며칠 전 스탠포드 대학교 캠퍼스에 다녀왔어요. 스탠포드 캠퍼스 중앙에 가면 학용품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자리한 건물 앞 공터가 있는데, 그곳이 시위 현장이었습니다. 우선 눈에 띈 것은 반전시위 하는 학생들이 쳐 놓은 천막이었습니다. 그것은 Pro-Palestine 진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 정부를 향해 전쟁과 학살을 당장 멈출 것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현수막 중에 이런 문구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Silence is violence”(침묵은 폭력이다). “No tech for genocide!”(학살을 위한 테크놀로지 반대!). “Jews say ceasefire now”(유대인들이여, 당장 휴전하라고 말하세요!). “Hands off Rafah”(라파에서 물러나라!).
이러한 시위 현장 바로 앞에는 수많은 이스라엘 국기와 미국의 성조기가 함께 꽂혀 있고 그 가운데 이번 하마스의 공격에 납치 희생당한 사람들의 넋과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의자들이 놓여 있는 시위 현장이 보였습니다. 앞에는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이 그동안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행한 테러들을 보여주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같은 구역 안에 이렇게 상반된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여기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축소판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은 극단적인 양극화의 현장이었습니다.
현재 지구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양극화(polarization)입니다. 정치권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정치적 갈등이 폭등하고 있고, 경제권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교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가 갈려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볼썽사나운 풍경이 자주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이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단순히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대표하고, 고넬료는 이방인을 대표합니다. 고넬료의 청함을 받은 베드로가 고넬료 일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행 10:8) 매우 유대인 중심적인 생각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고 유대인이 아닌 나머지 민족은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향해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유대인)와 고넬료(이방인)의 만남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4-19)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이었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시고 둘이 하나 되게 하신 화평과 화목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을 일컬어 화해 사역이라고 칭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은 화해 사건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바로 이 화해 사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동일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을 통해 고넬료의 청함을 거절하지 말고 그에게 가서 그와 ‘교제’할 것을 지시받습니다. 고넬료는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을 통해 자신이 지내고 있던 가이사랴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도시 욥바에 유숙하고 있던 베드로를 집으로 청하여 ‘복음’을 들을 것을 지시받습니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의 경건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큰 일(복음)을 들을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한 베드로에게 성령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베드로는 말씀에 힘입어 고넬료의 청함에 거리낌 없이 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이사랴에서 만납니다. 가이사랴는 그당시 로마군대가 주둔하던 곳입니다. 거기에는 로마 총독 관사도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점령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은혜로운 만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매우 영적인 사건입니다. 정말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막힌 담이 허물어진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청함을 받고 그의 집에 가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베드로가 드디어 십자가 사건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왜 하나님은 그 죽은 예수를 사흘만에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는지, 이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화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구원을 단순히 죽음 이후에 천국가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매우 축소시킨 생각이고 여러가지 인간의 욕망을 투영시킨 모자란 생각입니다. 구원은 이보다 훨씬 깊고 넓고, 무엇보다 현실적입니다. 구원은 다른 말로 화해(reconciliation)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구원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의 능력은 화해입니다. 위에서 사용한 용어를 써서 다시 표현하면, 복음의 능력은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막혀 있어서 탈이 납니다. 몸도, 마음도 영도. 몸의 어느 부분이 막히면 병에 걸리거나 죽습니다. 마음이 막히면 인간관계에 탈이 납니다. 관계에 탈이 나면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발생하여 인간이 서로를 헤치고 죽이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우리의 영은 죽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인생이 아주 허무해집니다.
복음은 구원인데, 그 구원은 전인적입니다. 몸도, 마음도, 영도, 모두 치유합니다. 막힌 담을 허물어줍니다. 몸이 화해하면 건강해지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마음이 화해하면 화평해지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영이 화해하면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우리의 삶 모든 것에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죽은 다음에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그 구원은 화해입니다.
우리가 요즘 경험하는 사회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자연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높이높이 쌓이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아픈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도 자명합니다. 복음은 화해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양극화 현상을 허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 사역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화해 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우리 함께, 복음을 가지고 나가서 막힌 담을 허뭅시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