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7. 10. 10. 20:51

벧아웬에서 돌이켜 벧엘로 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아모스 5:4-6)

 

주님, 불의한 길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그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님을 찾지 못하고, 벧아웬의 길로 갔던 우리들 용서하옵소서.

이 시간, 허무한 것, 무가치한 것을 따라갔던 우리들이

벧엘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자 마음을 돌이켜 왔사오니,

우리를 만나 주옵소서.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순간이고,

우리의 인생에 가장 큰 위로이고 힘이라는 것을 깨닫는 하옵소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을 찾으면,

주님께로 돌아가면

반드시 살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졸혼풍조와 교회

 

'졸혼'이라는 용어는 2004년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책 <졸혼을 권함>에서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졸혼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부부가 이혼하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졸혼'이 유행인 듯 하다. 이혼의 상처가 만만치 않기에 차선책으로 졸혼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에서 오는 정서적인 불안도 줄일 수 있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함으로 인해 오는 여러가지 법적 이익도 계속 누릴 수 있으며, 법이 정해준 테두리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마음 껏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졸혼의 가장 큰 장점은 '별거'와 사생활'을 보장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 받으려는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그래서 오랜 세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심하게 침해당해온 '개인'에게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 주는 유용한 통로도 쓰이고 있는 듯 하다.

 

모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인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풍조처럼 느껴진다. 이것의 가치평가를 따지는 일은 매우 깊은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로 하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는 교회 공동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는 공동체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제한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가 '믿음' 또는 '구원'이라는 신앙공동체적 요소 때문에 때로는 개인의 자유가 얼토당토 안 하게 침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가나안교인' 현상은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 현상에 반발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가나안교인' 현상은 교회공동체 생활에 대한 '졸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선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체감하는 현실은 매우 난감하다. 교회공동체를 떠난 '가나안교인'이 없다 하더라도, 교회공동체 내에는 대개 두 부류의 교인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전통적인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신앙인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모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며 신앙생활 하고 싶어하는 신앙인 부류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 보면,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부류도 저변에는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싶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개 공동체를 강조하는 부류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자신들이 공동체에 희생하는 만큼 희생을 보이지 않는 부류들에 대한 불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인들도 자신들이 희생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어선다 싶으면 저항한다. (이것은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현대(신앙)인들이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못하는 목회자는 공부를 더하거나, 목회현장을 떠나야 한다.)

 

요즘 목회현장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졸혼'의 저변에 깔린 것과 같은 '별거' '사생활'의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의 유행 때문이다. 요즘 신앙인들은 교회에 출석하긴 하지만 교회에 소속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사생활의 일부분 일뿐이지 자신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개방하는 것만 수동적으로 교회가 받아들이길 바랄 뿐, 교회(또는 목회자)가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그래서 요즘은 사생활의 대표적인 공간인 가정집 심방은 극도로 드물고, 대신 전화심방이나 다른 형태의 심방이 선호된다.

 

교회공동체성의 회복은 단순히 공동체를 강조하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을 통해서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시키기 원하는 요즘 신앙인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 또는 자유에 대한 구속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라고 말한 스텐리 하우워즈의 말처럼, 공동체를 지향할 수 밖에 없는 교회가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길은 올바른 개념의 확립을 통해서이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지력을 통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교회공동체의 운명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신앙인들)을 위한 현대적인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서 그 명암이 갈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공동체의 과제일 뿐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 자신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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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7. 10. 5. 10:30

묵상을 간구하는 기도

(시편 1편) 


주여,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악인들의 꾀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게 하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하지 마옵소서.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멸망 받을 자들이니이다.

주여,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비둘기처럼 읊조리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말씀으로 삶을 빚어가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우리의 삶에 파도처럼 밀려드는

고통, 허무, 불안, 두려움을 물리치고

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생명력과 풍성함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을 믿나이다.

주여,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복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7. 10. 5. 10:29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하는 기도

(민수기 21:4-9)


주님, 트라우마가 우리를 꼼짝 못하게 두려움 속에 가두었나이다.

우리는 고개를 들지못하고 트라우마 불뱀에 물려 죽고 있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장대에 높이 달리 놋뱀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고개를 들어 주께서 준비하신 또다른 부활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메타노이아의 용기를 내게 하옵소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각종 트라우마를 물리치고

다른 삶을 살기로 결단하오니,

주께서 준비하신 생명의 길을 보여 주옵소서.

우리는 그 삶으로 메타노이아 하겠나이다.

주께서 반드시 살 길을 열어 주실 줄 믿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5. 09:34

복 있는 사람

(시편 1:1-6)

 

나는 쇼팽을 좋아한다. 쇼팽의 녹턴이나 왈츠를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까지 든다.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꺼야!’ 언제 이러한 메시지를 집사람한테 보냈더니, ‘유구무언이라는 답장이 왔다. (아마도, ‘그래서 뭘 어쩌라구?’이런 의미였던 것 같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쇼팽의 음악은 음악계의 시편과 같다.

 

성경이 마르지 않은 샘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단연 성경에 시편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은 히브리어로 테힐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찬양의 노래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는 ‘Psalms’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현악기인 프살테리온(psalterion)에서 왔으며, ‘현 반주를 곁들인 노래라는 뜻이다.

 

노래(찬양)는 기본적으로 예술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적 장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와 같이 시편은 노래(찬양)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적(문학적) 장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편 1편의 예를 들자면, 시편 1편의 첫 단어는 아쉬레이고 마지막 단어는 토베드이다. ‘아쉬레복 있는 자이고, ‘토베드망하리로다이다. 그런데, ‘아쉬레는 히브리어의 첫 알파벳인 알레프로 시작하고, ‘토베드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인 타우로 시작한다. 이는 멸망하게 될 악인을 알레프에서 타우까지 먼 것처럼멀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이 대조를 이루어 전개된다.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을 구성하는 시편으로서, 원래 한 쌍을 같이 봐야 한다. 시편 1편이 아쉬레로 시작하는데, 시편 2편은 아쉬레로 끝난다. 이러한 것을 수미쌍관(인클루지오)기법이라고 한다.

 

아쉬레복되다!’라는 뜻이다. 일단 아쉬레를 들으면, 그 다음이 궁금해진다. ‘무엇이 복되다는 것인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자,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자,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는 복되다!

 

구약성경에는 이라는 단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바라크( בּלק)’이고, 다른 하나는 '아쉐르'(אשר)이다. 나의 이해에 따르면, ‘바라크는 일종의 선행은총이고, ‘아쉐르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축복이다. 그러니까, ‘바라크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이고, ‘아쉐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무엇인가를 응답적으로 반응했을 때 얻게 되는 복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라사), 죄인들(하타임), 오만한 자들(레침)과 함께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유죄로 정죄 받은 자들을 말하고, 죄인들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가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자들을 말하고,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들을 말한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로 갈수록 그 상태가 더욱더 악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 있는 사람(의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독야청청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주위에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이 세상에는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의인 곁을 우는 사자와 같이맴돌며 의인을 넘어뜨리려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다음 구절이 그 대답을 주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서 보고자 한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이다. 하가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읊조리다, 으르렁대다, 그리고 꾸민다(plot, device)’이다.

 

우선, ‘읊조리다는 비둘기가 구구대면서 반복적으로 내는 소리를 연상하면 된다. 시편은 눈으로 읽으면 안 된다. (사실, 성경 말씀 전체가 그렇다.) 시편(성경)은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내서 읽어야 한다. 원래 성경은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내어 읽어서 마음에 새겨 외울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잘하지 못한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말씀 중에 시편을 인용한 것이 많은 이유는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시편(구약성경)을 암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시간에 다같이 성경을 소리내서 봉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예배의 과정이다.)

 

둘째, ‘으르렁거리다는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좋아서 그렇다. 이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와 같다. 우리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움켜잡고 으르렁거리며 즐거워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두 번째 이유는 주변에 경고하기 위함이다.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자에게 다가서는 동물은 없다.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사라처럼 으르렁거리며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과 싸워야 한다.

 

사실, 이것도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사자가 으르렁거리지 않으면 주변의 하이에나가 와서 먹이를 덥석 채 간다. 우리 주변을 맴도는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을 향해 으르렁거리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와서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곁을 지나다 그 곁에 서게 되고 그들과 함께 앉게 된다. 이는 첫 말씀 복 있는 사람은 악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의 반대로 가는 것이다.

 

세번째, ‘꾸민다(Plot, Devise)’라는 말은 시편 21절에 표현된 것과 같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Plot, Devise)?” 내가 보기에는 ‘devise’라는 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Devise’‘plan or invent by careful though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심사숙고해서 어떤 것을 계획하고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 가진 깊은 의미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묵상이란 단순히 읊조리며 외우고, 기뻐하며 또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삶을 빚어가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읽을 때 두 가지 자세가 있다. 하나는 informational reading이고, 다른 하나는 formational reading이다.  Informational reading은 성경을 읽으며 그저 거기서 어떠한 정보를 얻으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고, formational reading은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을 새롭게 빚어가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내 삶의 당면한 문제,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새롭게 하는 강력한 능력(power)이다. 시인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항상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말한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여기에는 미완료형 동사가 쓰였다. 영어로는 “He will be like a tree firmly planted by streams of water”라고 되어 있다. 시인은 미완료형 동사를 써서 복 있는 사람의 생명력과 풍성함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순간, 삶이 죽어 있는 것 같고 메마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신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게 복 있는 사람의 자리를 떠나, 즉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악인들의 자리, 죄인들의 자리,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인으로 추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빗나간 화살처럼 내 마음대로 길을 가고, 추악한 말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어느덧 나의 인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한 없이 가벼워진다. 고통이 밀려오고, 허무가 밀려오고, 불안이 밀려오고,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꼭 받아야 한다. 그래서 생명력과 풍성함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가)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읊조리고, 사자처럼 으르렁대고,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빚어가야 한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무엇이 여러분을 생명력과 풍성함 가운데 거하게 한다고 믿는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긴다면, 왜 우리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가? 어떠한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기도드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또는 강퍅하게 살고 있으면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자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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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5. 09:32

메타노이아 트라우마 넘어서기

(민수기 21:4-9)


메타노이아(metanoia)는 헬라어인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회개(repentence)’이다.  내가 굳이 우리나라 말인 회개를 쓰지 않고, 헬라어를 쓰는 이유는 회개라는 말이 오염됐기 때문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회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언어는 역사와 컨텍스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언어가 지시하고 있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회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죄를 뉘우치는 것정도가 떠오른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를 그 정도로만 축소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죄의 뉘우침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메타노이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트라우마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다. 어떤 일을 겪고 나서 얻게 되는 심적외상을 말한다. 사람은 외적인 손상이나 어려움을 경험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외적인 손상을 복구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마음의 손상을 복구하는 일이다.

 

오늘 말씀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받은 트라우마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일명 불뱀사건이다. 그들이 불뱀사건을 겪게 되는 데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그들은 출애굽하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가면서 계속해서 일련의 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불뱀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들이 겪은 네 가지의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미리암의 죽음 신광야 가데스에서 일어난 일

2) 므리바 물 사건 물이 없어서 원망: 모세와 아론이 엎드려 기도해서 반석에서 물을 얻는 은혜를 얻지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면서 반석을 두 번 치는 행위를 통해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됨)

  3) 홍해로부터 다메섹에 이르는 왕의 길로 통과하지 못하게 됨: 에돔에게 정중히 부탁했으나 거절당해서, 배신감과 실망감을 안 게된다. 그들은 에돔이 이스라엘의 형제(에서의 자손)로 생각하고 당연히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으나 거절당한다.

  4) 아론의 죽음: 호르산에 이르러 초대 대제사장이요 모세의 평생의 동역자이자 친형인 아론이 죽는다. 상심이 얼마나 컸는지, 30일 동안 애곡한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트라우마를 안고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여 가고자 했는데, 길이 너무 험해서 그것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게 극심한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마음이 상하고, 지쳐 있었다. 계속적인 실패와 죽음의 경험으로 인해, 고개가 숙여진 상황이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라는 책을 보면,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1) 우월감 트라우마: 사람대접 못받을까봐 외향에 치중하는 사회

2) 분단 트라우마: 빨갱이 전략, 어떤 모략에 걸릴지 몰라 두려워하는 사회

3) 변방 트라우마: 권력의 이익으로부터 소외되어 차별 받을까봐 몸사리는 사회

 

여기에, 세대별 트라우마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1) 1940,50년대 생: 좌절 트라우마 (너는 이 아버지처럼 살지 마라, 국제시장)

2) 1960년대생: 미완성 트라우마 (내 욕심만 좇느라 민주와 정의를 후퇴시겼구나)

3) 1970년대생: 혼돈 트라우마 세계화시대 – (신자유주의 체제내에서는 나의 개인적 꿈(소망)이 실현될 수 없다)

4) 1980년대생: 공포 트라우마 (당장 먹고사는 일이 걱정 낭만을 잃은 세대)

 

이스라엘은 에돔의 비협조로 인해 왕의 대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험한 길을 통과해야 하는 슬픈 현실을 맞닥뜨렸다. 그들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마음이 상하니라 (the people grew impatient on the way).”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향하여 이렇게 성난 함성을 질렀다. “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5).

 

이것은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표출이다. 그들은 절망했고, 불안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다. 트라우마가 가져다 주는 절망과 불안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실제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불뱀의 등장이다. 불뱀의 등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목숨을 잃는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음악이 있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씌어진 소설이 있다. 음악은 작곡가 라벨이 지은 곡인데, 그는 '옛 스페인의 궁전에서 작은 왕녀가 춤을 췄을것 같은 파반느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소설은 박민규가 지은 것인데, 제목은 라벨의 음악에서 따왔고, 그의 소설 책 표지는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이란 그림에서 추녀 시녀에게 조명을 비추고 있다. 

 

박민규는 그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한 트라우마에 대하여 고발한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한 트라우마는 한 마디로, ‘인정욕구이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속에서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인정 받지 못한 자는 사회의 낙오자로 여겨져 도태되고 목숨을 잃는다. 20대 사망 원인의 제 1 순위는 자살이다.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하고, 일년에 14,000명 정도가 자살한다.


불뱀의 등장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때,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메타노이아였다. 메타노이아는 죄에 대하여 단순히 용서를 갈구하는 마음이 아니다. 죄 지은 것에 대하여 단순히 용서만 갈구하면 뭐하는가? 다음에 또 똑 같은 죄를 짓게 될텐데. 메타노이아는 현재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마음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전부가 아니다. 다른 길은 반드시 있다. 다른 인생, 너머의 인생이 반드시 있다.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 부른다. 메타노이아란 현재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는 트라우마를 넘어서서 다른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삶의 도약을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본다. 탕자는 어느 순간 돼지같이 비천한 삶에서 괴로워하다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현재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탕자는 메타노이아를 통해 새로운 삶,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삶이 있다! 불평과 원망, 트라우마 속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나가는 삶이 아닌, 생명을 얻는 삶이 그들에게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장대에 높이 걸려 있는 놋뱀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일이다. 장대를 보려면, 필연적으로 고개를 들어야 한다.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쳐다본 즉 모두 살더라!”(8, 9).

 

여러분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절망, 불안, 인정욕구 등,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내 눈에 보이는 이 현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고통, 어려움이 전부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놋뱀’, 즉 주님이 준비하신 또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트라우마는 우리를 두려움에 꼼짝 못하게 가두지만, 메타노이아는 그 두려움을 깨뜨린다. 현재 여러분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있다면, 눈을 들어 놋뱀(십자가)을 바라보라. 그리고 믿음을 가지라. 주께서 반드시 살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고개 들고, 어깨 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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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28. 17:43

노동의 의미 

(데살로니가후서 3:6-15)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 3:10)

 

이 말씀은 참으로 좋은 말씀이지만, 역사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서는 매우 악용되어 온 구절이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은 권력자가 피권력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가령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서구사회는 노예들에게 이러한 성경의 구절을 들이대며, 그들이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구절은 정말로 그런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이 구절만 뚝 떼어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쓰이는 것은 그야말로 성경을 더럽히는 신성모독 행위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일까?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l)이라는 영국의 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20세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데, 그의 이력은 매우 다채롭다. 특별히 이 사람은 수학과 논리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여러가지 공헌한 바가 커서 1950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지도교수로서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며 인류 학문의 발전에 공헌하도록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쓴 유명한 저서가 많으나(<수학논리> 화이트헤드와 공저), 그 중에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과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왜 무신론자인지, 특별히 왜 기독교인이 아닌지에 대하여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그 중의 한 부분을 보면 이렇다.

"생각건대, 종교는 인간의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종교는 부분적으로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곤경과 분쟁에 있어 내 편을 들어줄 든든한 형의 존재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좋은 세계는 지식, 온정, 용기가 필요하지, 과거에 대한 애석한 동경이나 아주 오래전 무지한 사람들에 의한 자유로운 지성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Religion is based, I think, primarily and mainly upon fear. It is partly the terror of the unknown and partly, as I have said, the wish to feel that you have a kind of elder brother who will stand by you in all your troubles and disputes.... A good world needs knowledge, kindliness, and courage; it does not need a regretful hankering after the past or a fettering of the free intelligence by the words uttered long ago by ignorant men

 

한 사람이 어떠한 신념을 가지기까지는 다양한 영향이 미치지만, 그가 무신론자로 자신을 지시하기까지 그의 삶 속에도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나라에서 활동한 C. S. 루이스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이 어떻게 다른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그들의 삶을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책은 그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이다. 그냥 책 제목만 보면, 그가 게으름을 예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책 내용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는 평가절하 되어 있는 게으름과 평가절상 되어 있는 노동의 가치를 뒤집어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노동은 선한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게으름은 악한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 노동은 미덕이고, 게으름은 악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러한 관념을 뒤집어 보려고 시도한다. 그 책에서 러셀은 인간에게 삶을 향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노동의 시간은 대체로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4시간의 노동 이후의 남는 여가의 삶을 게으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칼 마르크스가 세상에 기여한 부분이 노동 해방이라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등장하여 노동자 해방 운동을 벌이기 전까지, 노동자는 자본가에 의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살았다. 노동자는 여가(게으름)’를 꿈 꿀 수 없었고, ‘여가는 자본가(권력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 이후에,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에 사회는 노동자들(일반 시민들)에게 여가를 선물해 주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여가를 사장님의 전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노동자는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가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버트런드 러셀이 경험한 20세기의 세상보다(그는 1872년에태어나, 1970년에 죽는다.) 훨씬 레디컬한 세상이 되었다. 웬만한 노동은 점점 사람이 아닌 로봇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노동력보다 로봇의 노동력이 점점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세상 사는 우리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특히,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는 말씀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가뜩이나 로봇에게 노동의 자리를 빼앗겨 가는 인류에게 이 구절은 로봇보다 못한 인간은 나가 죽어라!’는 말처럼 들린다.

 

성경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오늘 말씀을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지침과 같은 의미로 보면 안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 이것은 굳이 성경을 안 읽어도 자기계발서에서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내용이다. 스티븐 코비의 불후의 명작,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나, 한 때 유행했던 <아침형 인간>(일본작가가 주장했던 것 같은데 작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이라는 책 같은 것을 보면, 성공하기 위한 핵심 사항은 위의 말 그대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라는 것이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 그리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라는 말씀 등이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나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전후서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게으름의 문제가 발생한 정황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극단적인 신학을 견지한 일부 사람들은 어차피 곧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세상이 끝날텐데, 무엇하러 이렇게 일하노!’라며 일하지 않는 사람이 생겼고, 또 다른 문제는, 교회 공동체가 베푸는 선행을 악용하는 무리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 말미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살았다. 이것이 악용된 것이다. 공동체 내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실천을 악용하여 악한 게으름이 생겨났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게으름은 현대 교회에서도 빈번히 발생한다. 특별히 소위 대형교회에서는 자주 발생하는 문제다. 대형교회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게으름이 있다. 교회에 가서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그냥 교회 문턱만 드나들어도 대형교회가 제공하는 온갖 영적인 상품들을 힘들이지 않고 혜택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명백한 현대판 게으름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게으름에 대해서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신학에서 온 것이든, 교회 공동체가 제공하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를 악용하는 것이든, 그 어떠한 것도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한 번 물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누구인가?” 그리스도는 당신을 이미 구원한 구원의 완성자인가, 아니면, 이제 우리를 구원하러 올 미래의 구원자인가? 재림은 구원의 완성이지, 단순한 시간의 종말이 아니다. 재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오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새로운 창조이다.

 

종교개혁사 학자인 카터 린드버그는 루터의 신학을 진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이해한 복음의 핵심은 구원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기초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쏟았던 힘과 시간을 이제는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도록 자유케 되었다는 것이다”(유럽의 종교개혁, 203).

 

우리가 왜 수고해야 하는가? 왜 일하기 실어하거든 먹지도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삶의 토대이다.

 

여전히 구원이 삶의 목표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삶의 목표가 되어 그것만 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기대감에 현재의 삶을 도외시하며 게으름을 피우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을 이루고 구원을 삶의 토대로 삼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사도에게서 받은 전통대로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기 위하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자기계발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그렇게 해야만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은 구원의 완성을 세상에 증거하는 복음의 빛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토대로 한 노동은 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한다. 우리의 노동이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의 열매, 또는 노동의 질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어떻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정말로 자신의 삶의 토대라면,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오늘도 게으르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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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23. 07:35

나는 일한다

(요한복음 5:9b~18)


데카르트의 대표저서 <방법서설>에는 이런 명제가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그리고 후일, <철학원리>라는 책에서 이것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한다.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명제를 다시 제시한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dubito, ergo cogito, ergo sum.” (근대철학의 인식론 문제)

 

나는 존재하는 존재일까?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이렇게 질문해 보자.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자기 인식을 의심을 통해, 결국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 인식의 근거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자기 인식에 도달 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은혜의 집) 연못에 날마다 기거하던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시는 이야기이다. 이 사건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더욱 죽이고자 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예수는 안식일을 범했고,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주장하여 신성모독(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다)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한 것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맞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My Father is always at his work to this very day, and I, too, am working.”(17).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의 명제를 만들어 보면 이렇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아버지(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인식, ,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한 근거는 바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처럼 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제를 통해서, 이러한 명제를 다시 만들 수 있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아버지(하나님)가 일하신 것처럼 일 한 것을 본받아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일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하고 실행했던 성경의 인물은 단연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일했다.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결코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3-4).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 명확해 진다.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믿음을 가지면 해야 할 일이 보인다. 사랑하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소망이 있으면 인내하게 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었다. 믿음을 가지니까, 해야 할 일이 보였다. 38년이나 된 병자를 그냥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 병자를 사랑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수고를 아까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이루게 될 줄 믿었기에,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자기의 길(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인내하며 걸어가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데살로니가 교회나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각각 그리스도로, 사도로, 교회로 택하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처럼 일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몸으로 택하심(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간다.

 

내가 33살에 집사람과 단 둘이서 컬럼버스 조지아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 만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여기에 어떻게 오셨어요?” 이 질문의 뉘앙스는 이런 것이었다. ‘젊은 부부가 이런 시골에 와서 고생이 많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와서 목회를 할까?’ 그것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의외로 매우 간단했다. “, 저희는 보내심(파송) 받아서 왔습니다!” 보내심(파송) 받아 온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견디고 그 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를 깊게 체험하고, 열매를 맺는다

 

나는 부르심(파송) 받아 이곳에 왔다고 믿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교회 생각 뿐이다. 내 목표는 우리 교회를 영적으로(Spiritually), 그리고 물리적으로(Physically) 안전하고 평안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더위가 좀 가시고, 기분 좋은 가을 날씨가 찾아 왔다.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목회자로서 (도의적으로) 많이 죄송하고 속상했다. 이상하게 주일마다 폭염에 시달렸다. (그래서 날씨가 마귀인가 했다. 조지아에서 102개월 동안 목회하며, 주일에 비가 온 적은 기억에 세 네 번 밖에 없었다. 그곳은 비가 자주 온다.)

 

주일에 부르심을 받고 교회로 모인 우리들이 예배드리며 예배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며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날씨가 더운데다 에어컨이 없어서 예배 드리며 더위와 소음(문을 열어 놓다보니)과 싸우며 예배 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주님 제가 돈을 좀 벌어서 에어컨 살 수 있는 헌금을 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냥 내 생각에 우버를 해서 돈을 좀 벌까?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좀 해 볼까?’ 하며 별생각을 다 했다. ‘이젠 교회에 바칠 금도 없는데…’ 우리 애들 돌반지 받은 거 이미 컬럼버스교회 건축할 때 다 드렸다.

 

주님께서는 목사로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응답해 주셨다. 그게 바로 뉴비전 청년부 수련회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제가 얼마 되지는 않지만 돈을 벌어 왔다! (기도 응답이 너무 기뻐서, 사진 찍어놨다.)

 

조지 뮬러 목사님의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뮬러는 400명의 고아와 함께 빈 식탁에 둘러앉아 손을 맞잡고 식사기도를 드렸다. 그의 기도가 끝났을 때, 한 대의 마차가 고아원 앞에 도착했다. 그 마차에는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했다.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들 야유회에 쓰기 위해 주문했지만, 폭우로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식으로 그는 평생 5만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조지 뮬러가 따로 있나? 기도해서 응답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특권이다. 믿음이 없고, 사용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는 누구나, 조지 뮬러가 될 수 있다!

 

예배는 단순히 우리가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해산하는 모임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뒤, 세상으로 파송 받는 의식(Ritual)이다. 우리는 예배로 부르심을 받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뒤, 세상으로 파송 받는다! 예배의 구성이 그렇다. 예배의 부르심 찬양 말씀 파송

 

파송 받은 자와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의 마음 가짐은 같을 수 없다. 여러분이 하는 직장의 일, 교회의 선교사역, 그리고, 각자의 삶에 자리에서 하는 확장된 사역(어머니학교, 빛과소금중창단, 히엘, 독서모임)은 모두 파송 받아 하는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어야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

 

우리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해서, 우리 공동체의 Spiritual 한 부분과 physical 한 부분을 조금씩 reformation해 나가고 development 해 나가자. 급하지 않게, 조금씩,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가랑비에 옷 젖듯이 ….

 

중요한 것은 반드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교회로 모여, 예배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고 파송 받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는 말씀처럼, 주님께 보냄을 받지 않고 하는 사역은 모두 무면허 사역이다. 그런 사역은 성령의 열매를 절대로 맺을 수 없다. 자기의 의만 드러날 뿐, 자기의 의는 죄의 냄새만 나게 한다.

 

돈을 내지 말라. 교회는 돈 내는 곳이 아니다. 믿음을 드리는 곳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해 보라. ‘내가 돈을 드렸는데, 시간을 드렸는데, 헌신을 드렸는데, 왜 나한테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그러면서 시험에 든다. 믿음을 드려야지, , 시간, 헌신을 드리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아버지(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믿음의 일이고, 사랑의 수고이고, 소망의 인내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어떻게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 증명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가, 믿음의 일,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가운데, 아버지가 일하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을 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나와 세상에 증명할 수 있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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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14. 14:53

잃어버린 질문

(데살로니가전서 5:1-11)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바울의 서신 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기록시기가 앞서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진 성경책이라 쉽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게다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보고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탄생부터 다룬 일대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대개 기원전 50여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대략 20년 정도 후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 관심사가 당연하다라는 말을 썼다.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가 성경을 봐서 알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에는 아래와 같이 8군데에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1) 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2) 계시록 1 7

보라,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느니라.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

 

3) 베드로후서 3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4) 야고보서 5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5) 히브리서 9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6) 골로새서 3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7) 사도행전 1 10~11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으니라

 

8) 마태복음 26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이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죽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믿었던 성도들이 한 명씩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던져진 심각한 도전이었다. 첫째, 재림에 대한 믿음에 도전이 왔고, 둘째,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은 신앙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왔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궁금증을 사도 바울에게 질문했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그리고, ‘재림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지탱해준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재림의 소망 때문에 그들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고, 재림의 소망 때문에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소망 가운데 그들은 재림을 기다리며 세상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자매들이 한 명씩 죽어갔다. 당연히 믿음이 흔들리고, 소망이 수그러들어갔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였던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라는 질문은 이제 현대기독교인들에게는 잃어버린 질문이 되었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 때문에 현대기독교가 점점 소망과 긴장을 상실한 채 죽어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재림을 질문하면, 사이비 집단인 것처럼 호도되기도 한다. 하기야, 워낙 사이비 집단들이 재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흐려 놓은 면이 많다.

 

초대교회 전통에 부활절 전야제(Easter Vigil)라는 것이 있다. 개신교는 예전과 의식이 많이 약해서 교회 전통을 지키지 못하는 면이 많다. 이러한 부분은 반성하면서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기독교 전통이 강한 교파에서는 아직도 부활절 전야제를 지킨다.

 

에모리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학교에 있는 캐논채플에서 열렸던 천주교의 부활절 전야제에 참석한 일이 있다. 나는 그때의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예배는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특별히 화려한 포퍼먼스는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읽고, 독창 또는 중창의 찬양이 이어졌다. 때로는 함께 부르기도 했다. 3시간 동안 자리를 뜨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진지했다. 자정까지 이어진 3시간 동안의 예배를 마친 뒤, 세례(세례성사)자들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세례반에 모여 세례 받은 이를 축하하고 환영하고 축복했다. 참으로 거룩하고 엄숙한 시간이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재림이 밤에 있을 것이고, 특히 부활절 전야에 주님이 오실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절 전야에 함께 모여서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소망했다. 이러한 전통은 유대인들의 전승에서 온 것인데, 기록은 보면 이렇다. “메시아는 애굽에서 유월절을 축하할 때 멸망시키는 자가 그들 위에 지나간 것처럼, 한밤중에 오실 것이라는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 유월절 철야제의 날, 성도들은 주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자정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Jerome on Matt. 25:6: 생명의 삶 Plus에서 인용).

 

이러한 전통은 살려야 마땅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절대로 지키기 어려운 전통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는, 세상을 이기는, 세상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교회는 이러한 거룩한 전통을 회복해 가는데 힘 쓰면 좋겠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이렇다. “알 수 없다.” 이 대답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책임한 대답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재림의 시기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 주권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재림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재림이 돌연히 임할 것이라는 경고는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재림이 돌연히 임할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두 개의 은유를 들어 말한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것이다.”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갑자기 이를 것이다이다.

 

구약성경에는 주의 날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구약에서 주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과 보복의 날을 의미한다(1:15, 2:12, 30:7, 13:5, 5:18). ‘주의 날이 임하면 믿는 자(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지만, 믿지 않는 자(불의한 자)에게는 심판과 죽음의 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은 춘향전에 많이 비유한다.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난 이몽룡, 그의 사랑하는 여인 춘향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날이지만, 포악을 일삼은 변사또에게는 심판과 죽음의 날인 것과 같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에서 평안과 안전은 로마시대의 정치적 슬로건이었다. Pax Romana! (로마의 평화!)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다시피, 로마의 정치적 슬로건은 얼마 가지 못했다. 5세기경 서고트인들(게르만족)에 의해서 로마는 점령당하여 불타고 만다. 그때, 로마가 이 땅의 천년왕국(하나님의 도성)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꿈꾸고 소망해야 할 하나님의 도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집필한 책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이다.

 

재림은 이렇게, ‘도적같이’, 그리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방심할 때에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처럼 갑작스럽게 온다. 이것은 주권을 쥐고 계신 하나님의 갑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는 재림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메타포는 빛과 어둠이다.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고, 도둑은 밤에 온다. 6절에 나오는 이라고 하는 단어는 헬라어의 카쓰유데인이다. 이것은 도덕적 해이를 가리킨다. 단순히 도덕적 해이라기보다도,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세 가지 덕에서 멀어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 세 가지 덕은 믿음의 일’, ‘사랑의 역사’, ‘소망의 인내이다(13).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정신차리고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며 산다. 여기서 정신 차리다라는 말은 군대용어로, ‘밤에 깨어 보초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군대용어를 빌어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경심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8).

 

호심경투구는 로마 군대의 전투 장비를 말한다. 사도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을 여기에 비유한 이유는 그만큼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함이다.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흐물흐물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이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어느덧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벗어 놓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처럼, ‘평안하다, 안전하다를 외치며 살고 있는 듯 하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재림에 대한 소망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야 우리는 벗어 놓은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위하여,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루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세상을 이기는, 세상을 넘어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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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8. 07:17

성령, 혹은 성령처럼

(갈라디아서 5:16-26)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에 제기한 질문은 이것이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3:2).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질문이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자.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인가, 아니면 믿음으로인가?

 

이렇게 바꾸어서 물어보자.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는가?” 받았으면 왜 받았고, 못 받았으면, 왜 못 받았는가?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신앙고백)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을 못 받은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과 율법을 착각한다는 것이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통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이 가시적이고, 매력적이고,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율법적인 신앙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한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남들보다 한계 수준이 높은 이들은 남들보다 자기가 신앙이 좋다고 착각하고, 교만해진다. 일례로,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녀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한 기도에서,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고, 금식을 하고, 자신의 한계 상황 안에 있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잉여의 재산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그들이 금식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잘 먹어서 그런 것이고, 그들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죄를 범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반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생활이 궁핍했고, 금식 하나 안 하나, 평소에 굶는 것을 밥 먹듯이 하기 때문에 금식의 의미가 없을 뿐더러, 금식하다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죄를 짓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불안정한 환경에 내 던져져 있었다.

 

믿음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자신이 정해 놓은 한계 상황에서 바르게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계 상황을 뛰어 넘는 순종이고 영과의 일치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

 

믿음을 가지면 성령을 받는다. 이 말은 이제 육체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영의 인도대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36~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이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것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영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영은 어디에 매이지 않는다. 영은 자유롭다. 영은 활발하고, 강인하고, 모험적이다. 영은 생명력이고, 영은 그 어느 것도 잡아 둘 수 없으며, 영은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감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활발하고, 강인하고, 모험적이다.

 

아브라함이 딱 그렇다. 그는 믿음을 가졌다. 믿음을 가졌더니, 그에게 성령이 왔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다. 그는 활발했고(100세에 아이를 가질 정도로), 강인했고, 모험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할 줄 알았고, 그는 남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 일을 감행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바치려 한 사건이다.

 

율법은 자신의 한계 상황 안에서만 움직이지만, 믿음은 자신의 한계 상황을 벗어나는 것도 감행한다. , 모험을 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은 자신의 한계 상황을 벗어난 일이고, 모험이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의 한계 상황에만 갇혀 율법적으로 행했다면, 그는 결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삶을 너무도 잘 알고 잘 행한다. 우리는 율법적인 신앙을 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선물로 받게 된 성령에 따라 사는 법은 잘 모른다. 우리는 대개, 갈리디아 교회 공동체에게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데선수다.

 

믿음이란, 욕구의 충족 기대가 아니라(~ 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다. 그러나, 그 좁은 길, 좁은 문에 참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길, 그 문을 통과하려 들 것이다. (이제 곧 폐기되는 사법시험에 그 동안 수많은 젊은 이들이 매달렸다. 사법시험은 그야말로 좁은 길’, ‘좁은 문이었다. 그런데, 왜 젊은 이들이 거기에 젊음을 바치는 것일까? 그 좁은 길, 좁은 문을 통과하면, 영광스러운 삶이 열릴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좁은 길, 좁은 문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율법의 행위라는 노역의 시궁창에 빠지고, 육체의 일이라는 탐닉의 늪빠진다. 노역과 탐닉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상하게 할 뿐이다.

 

14. 오늘 말씀처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육체의 일을 통해 탐닉의 늪에 빠지고 있는지 우리는 조금만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아도 금새 알 수 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21).

 

탐닉의 늪에 빠진다는 것은 그것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린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육체의 일은 모두 그들을 홀리는 어떠한 영(spirit)과 관련이 있다. , 그들(이방인들)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이 음행을 하는 이유, 원수 맺는 이유, 분쟁과 시기와 분을 내는 이유, 술 취하는 이유 등, 육체의 일을 행하는 것의 뒤에는 그들을 움직이는 어떠한 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탐닉의 늪에 빠지게 하는, 그래서 위와 같은 육체의 일을 하게 하는 영과를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으로 산다. 그래서,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처럼, 모든 한계를 뛰어 넘는 생명력과 강인함과 모험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처럼, 즉 성령처럼 사는 인생만큼 멋진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소망을 담아 를 하나 지었다. ‘선재(仙在)’ – 신선 선, 있을 재. 신선처럼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나에게는 호가 세 개 있다. 희락당, 사현, 그리고 선재. 그 중 선재는 성령을 가슴에 품은 종말론적인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나의 신학적, 철학적 사상이 담긴 호이다.

 

성령, 혹은 성령처럼’,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성령과 일치하여, 그게 힘들면 성령을 흉내라도 내는 삶, 그런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이 될 것이다. 믿음으로 받은 성령,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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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7. 07:49

도전과 응전

(본문: 1:6-14, 2:1-4)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난리가 났다. 북한이 제6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압박하는 노림수가 있는 것으로 본다. 1994년 클린턴 정부 때, 북한 선제공격 시나리오가 북한에 급히 날아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멈춰졌지만, 그때만해도 북한의 핵 무기는 초기 실험단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이제는 최악의 위기까지 치닫고 있는 상황이다. 대한민국이 만난, 최고의 도전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도전과 응전이다. 이 말은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이다. 토인비 - 그는 문명을 발생·성장·쇠퇴·해체 과정을 거치는 유기체로 파악하고, 이러한 문명이도전에 대한응전으로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이 방대한 저작에서 그는 인류 역사상 등장했던 다수의 문명들을 비교·분석하는 데 환경보다는 주체적 대응을 중시했다(김호기, 세상을 흔든 사상 70년, 경향신문). 문명의 발생에서 환경이 중요하냐, 주체적 대응이 중요하냐는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사항이다.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고사성어가 있다. “맹모삼천지교” – 맹자의 엄마가 맹자를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기 위하여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성어다. (묘지 시장 서당) 환경도 중요하고, 주체적 대응도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도전이 다가왔을 때 그에 대하여 어떻게 응전(response)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교회도 발생, 성장, 쇠퇴, 해체의 과정을 거치는 유기체, 그러는 사이에 도전에 응전한 새로운 교회가 생겨난다. 우리 교회에 다가왔던 도전들에 대하여 우리는 지혜롭게 잘 응전하면서 새로워진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다.

 

오늘 말씀은 초대교회에 다가온 도전을 그들이 어떻게 응전하여 극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초대교회의 큰 도전, 주님이 승천하셨다. 승천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하늘로 들려 올려지셨다는 뜻이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주님이 자신들 곁에 더 이상 있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정말 큰 도전이다. 하나님 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겨진 자식들에게 다가온 도전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큰 도전이었다.

 

이들은 이 큰 도전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주님의 말씀대로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령의 간구를 통해서 극복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면, 눈에 보이는 주님은 안 계시지만, 성령을 통하여 주님은 그들과 영원히 함께 계신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에게 다가온 도전에 적절하게 응전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간다.

1) 가룟 유다를 대신한 맛디아 선출 - 뭔가 잘못했을 때, 죄라는 도전이 왔을 때, 회개라는 응전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러질 못했다. 12명의 사도 중 한 명이 빠진 도전을 초대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한다.

2) 경제적 어려움이 왔을 때, 나눔이라는 응전을 통해서 새롭게 일어날 수 있다. (물건을 통용했다.)

 

초대교회가 도전이 올 때 마다 어떻게 응전했는지 아는 일은 우리 인생의 도전을 극복하는 데 굉장한 영감을 준다. 그들은 도전이 왔을 때마다, 이렇게 했다. 모두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 갔을 때, 초대교회에는 또다른 엄청난 도전이 왔다. 그때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썼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모여 기도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신앙의 사유화이다. 신앙이 사적인 영역으로 전락한 데는 경제사회적 구조의 변화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때문에 생긴 일이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시장경제체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장경제체제의 가장 큰 요점은 사유재산의 강화이다. 개개인이 원하는 무엇이든 시장에서 구입하여 자기의 사적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에 있는 우리들은 돈이 없어서 그렇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신앙적인 영역에도 영향을 미쳐, 신앙도 사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굉장히 크다.

 

그렇다 보니, 삶의 어떠한 문제가 생겨서 도전이 올 때, 그 문제를 사적인 신앙의 영역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크다. ,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역량으로 도전에 대하여 응전하려고 한다. 그러한 요소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허무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가 된다. 교회 와서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지만, 도전에 응전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문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필요에 의해서 찾은 종교시설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은 삶에 도전이 발생했을 때, 성령의 간구하심을 통해서 응전하여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의 역사를 결코 개인이 사유재산 갖듯, 백화점에서 물건 사듯 그렇게 받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는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할 때, 기도할 때’, 교회 공동체 위에 내리는 것이다. 시장 경제 체제에 길들여진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점을 놓치고 있다.

 

성령의 역사를 사적인 신앙의 영역으로 떨어뜨리는 것, 이것이 현대 기독교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에 올바르게 응전해야 한다. “모두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한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의 삶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도전들을 여러분의 개인의 신앙의 역량으로만 해결하려 들지 말라. 도전이 다가올 때, 교회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라. 도대체 여러분에게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교우들은 어떤 의미인가? 같은 종교시설을 쓰는 타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된 지체인가?

 

교회에서 함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베스킨라빈스 31’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예배는 골라서 먹는 상품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예배는 공동체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다. 교회 공동체의 예배에 모두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역사를 통해 우리들 가운데 보내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우리의 삶에 다가온 도전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응전하며 새로운 역사, 새로운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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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1. 11:27

자유

(갈라디아서 5:1-12)


화룡점정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고대 중국 양나라의 장승요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안락사라는 절의 주지스님의 부탁을 받고 그 절에 용을 그리고 마지막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그 용이 벽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점정'은 눈동자를 그려 넣는다는 뜻이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화룡점정이다. 인간은 자유를 얻는 순간, 하나님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자유는 생명의 최고 가치이다. 자유가 없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반대로, 생명의 자유를 빼앗거나 억압하는 것은 최고의 죄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유를 스스로 박차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성경은 생명과 자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셨다. 그런데 불과 두 장 뒤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과 자유를 버리고, 죽음을 선택한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는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죽음을 택하는 인간의 의지가 교차되어 나오는 이야기이다”(유진 피터슨, <자유>, 2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6). 우리는 오늘도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다. 거기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 “네가반드시 죽으리라”( 2:17). 죽음은 어떠한 실체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현실에 대한 충만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이 너무 죄와 죽음에 절어 있다 보니까, 생명과 자유를 얻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며 산다. 이 상황은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오랜 감옥 생활 후에 출소한 모건 프리먼이 한 독백과 같다. “이제 허락 받지 않으면 오줌도 안 나온다.” 또한 이 상황은 오랜 세월 동안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출애굽했지만, 상황이 불편해지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노예 근성을 못 벗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다 보니, 자유를 얻었음에도 자유를 누리며 살 줄 몰라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약속하시고, 복을 주셨다. 이제 그들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복을 누리면서, 믿음으로 살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덧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과 복을 잃어버리고, 애굽이 부과한 일을 통해 그들이 주는 고기와 밥과 국을 받아 먹으며 산다.

 

이제 그들은 일하며 사는 법은 알지만, 믿음으로 사는 법은 잊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 살지 않고, 애굽에 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도 일하며 사는 법은 알지만, 믿음으로 사는 법은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과 복을 믿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고기국과 밥을 얻어 먹으려고 그들이 기획하고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며 산다.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서신이라 불린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만 봐도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한다. 구원은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무엇인가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뜻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유를 누린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유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선물은 자유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인간은 자꾸 죽음을 택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생명을 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행동(구원) 때문이지, 우리의 의지나 마음가짐이나 정치적 행동이나 지성 때문이 아니다”(유진 피터슨, <자유>, 29).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는 건지다(exaireo)’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표현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어디에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권세로부터 구속받는 것을 의미한다”(유진 피터슨, 33). 건지심근본적인 건지심이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창조 세계와 예정된 구원으로부터 분리시킨 죄로부터의 구속이다”(유진 피터슨 33).

 

하나님의 이 건지시는 은혜 (구원)’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그 어떠한 생명이나 자유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 이전에는 먼저 하나님의 건지시는 은혜가 존재한다. 이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밥을 먹을 때도, 일 할 때도, 차를 타고 어디 갈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잠을 잘 때도그래서 우리는 매순 간 그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굳건하게 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유는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지키지 못하고 자꾸 보장된 안전과 바꾸려 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도 그랬다. 그들에게 위협이 된 이단사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할례의 요구였다. 쉽게 얘기해서, 구원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이단사설이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복음을 버리고 할례를 받았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엄중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굳건하게 서라라고 한다. 우리는 복음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는 믿음이지, 할례가 아니다. ‘보상이라는 제도에 절어 있는 인간은 사랑으로써 역사는 믿음’, 즉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겁게 또는 기쁘게 한 결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자유이다. 그렇지 않은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자체가 우리를 얽매이게 한다.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 그 순간 우리는 그저 구원에 볼모 잡힌 노예가 되고 만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이단사설에 대하여 강력하게 규탄을 한다. 우리가 순화된 언어와 순화된 감정으로 읽어서 그렇지 사도바울의 원래 표현은 매우 거칠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2). 이것은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갈라디아는 이교도들의 지역이다. 그곳에는 퀘벨레-아티스라는 종교의식과 거세를 한 사제들이 활동을 왕성한 했다. 위의 구절은 이런 뜻이다.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성기)를 잘라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지키는 일에 이렇게 단호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굳건하게 지키며살고 있는가? 우리가 얻는 자유는 공짜 즉 은혜로 받은 것이지만,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피 값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재는 우리에게 그 자신의 광채를 발산하고,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손으로 얻은 사유재산을 굳건하게 지키는 데는 천재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사도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인가?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굳건하게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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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24. 04:02

하나님이 하신 일

(창세기 45 1~8절)


 

신파극이라고 있다. – (구파극 가부끼): 한일합방 이후 1910년 대에 일본에서 수입돼 유행했던 연극의 일종이다. 신파극의 소재는 가정비극과 사극이 주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일제 강점기에 큰 인기를 모은 한국의 신파극이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부잣집 아들인 광호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만, 결국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남편의 약혼녀까지 살해한 뒤 순사가 된 오빠에게 잡혀가게 된다. 흔히 〈홍도야 울지마라〉로 불린다. 

 

원로가수 故 김영춘 씨가 부른 <홍도야 울지마라>는 한국 가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노래이다. 이서구 작사 / 김준영 작곡의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2.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3.    홍도야 울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 오리라.


<홍도야 울지마라>를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요셉과 관련하여 노래를 이렇게 개사해 보았다. 제목은 <요셉아 울지마라>이다.

 

1.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신앙의 등불

  요셉아 울지마라 주님이 있다

  신앙인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2.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요셉은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신앙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3. 요셉아 울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 오리라.

 

홍도와 요셉 간에는 차이가 있다. 홍도의 인생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요셉의 인생은 은혜로 끝난다. 홍도는 노래의 바람대로 살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자기 손으로 끝내 인생의 비극을 만들어 내고 만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노래의 가사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은 3절이다. “홍도야 울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 오리라.” 이 노래의 가사가 일제시대 때 지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기에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분명 담겨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라를 빼앗기고 힘겹게 살던 한민족에게 <홍도야 울지마라>의 노래는 결심과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눈물을 닦고 굳세게 살아야지!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마음 가짐과 몸 가짐을 흐트러뜨리면 안 돼지! 마음을 높게 갖고, 행실을 바르게 하면, 언젠가 즐겁게 웃을 날이 올 거야! 그래 힘을 내자!” 이러면서 힘들고 어려운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아도 인생의 질곡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홍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셉은 정말 이렇게 살았다. 형들(가족)의 버림을 받고 노예로 팔려 갔으면서도 마음과 행실을 지키며 살았다. 울지 않았다. 신앙인의 갈 길을 갔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가는 길에 낀 구름을 바람으로 걷어 주셨다.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더하신다는 뜻이다. 창세기 3024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것은 요셉의 엄마 라헬이 한 말이다.

 

장자권 사건으로 인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몸을 피신한 야곱은 삼촌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라헬을 아내로 맞이 하기 위해 7년을 하루 같이 일한다. 그런데, 삼촌 라반은 야곱의 노동력을 착취하고자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면 7년을 더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야곱은 라헬에 대한 사랑 하나로 7년을 더 버틴다. 그리고 결국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듯 했다. 그런데, 삼촌 라반은 야곱과 라헬의 첫날 밤 술수를 쓴다. 라헬 대신 그의 첫째 딸 레아를 들여보낸 것이다. 그렇게 야곱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레아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런 후에, 삼촌 라반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을 야곱의 아내로 준다.  

 

1이제 야곱의 아내가 된 두 자매는 자식을 통해 경쟁하게 된다. 그런데, 레아가 아들을 넷이나 낳는 동안 라헬은 한 명의 자식도 낳지 못한다. 그래서 라헬은 자신의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자식을 둘 낳게 한다. 그것에 시샘을 한 레아도 자신의 몸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자식을 둘 낳게 한다. 그 이후 레아는 아들을 둘 더 낳는다. 이렇게 언니 레아와의 치열한 경쟁의 끝자락에 얻는 자식이 바로 요셉이다.


요셉이 라헬과 라헬을 사랑한 야곱에게 얼마나 귀한 자식이었겠는가! 그리고 라헬이 사랑하는 남편 야곱에게 자식을 더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으면 어렵게 낳은 자식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겠는가! ‘주님, 아이를 더 낳게 해주세요! 더 해주세요!’

 

야곱에게 요셉은 아픈 자식이다. 엄마 라헬의 바람대로 라헬은 그 이후에 자식 한 명을 더 얻는다. 그런데, 그 자식을 낳다가 죽고 만다. 그가 바로 야곱의 막내 아들 베냐민이다. 엄마가 죽는 바람에 요셉은 형들의 틈에서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엄마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랐다.

 

우리는 흔히 요셉을 꿈 꾸는 자라고 부른다. 요셉은 혼자서 공상을 많이 했다. 그래서 꿈도 많이 꿨다. 왜 요셉이 혼자서 공상하고, 꿈을 꾸었겠는가? 형들이 놀아주지 않아서이다. 요즘 말로 하면, 요셉은 왕따였다. 아버지 야곱이 그러한 요셉의 처지를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안쓰러워 요셉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준다. 다른 자식들은 그냥 일반 옷 입힐 때, 요셉에게는 색동옷을 입혔다. 사실, 이러한 모습이 요셉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요셉은 형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꾼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했다. “형님들, 내가 이런 꿈을 꾸었어요!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었는데 내 단은 일어서고 형님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했어요!” “이런 꿈도 꾸었어요!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을 했어요!” 그런데, 요셉의 꿈 이야기를 좋게 받아들인 형제들이 없었다.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은 요셉에 대한 미움만 키워갔다.

 

모든 범죄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미움은 마침내 사고를 친다.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고 있던 어느 날, 형들은 아버지 심부름을 온 요셉을 음모를 꾸며 죽이려 한다. 그때 아버지 야곱에게 큰 죄를 범한 맏형 르우벤과 마음이 따스했던 넷째 형 유다의 만류가 없었다면 요셉은 음모에 말려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만은 건져 요셉은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다.

 

러셀 크로우가 주연한 <글레디에이터>라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당시 노예로 팔려간 사람들의 삶은 짐승 이하의 삶을 살았다.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셉은 처음에 애굽의 장군 보디발에게 팔려갔고, 거기에서 험한 일을 겪고(보디발 아내의 유혹과 모함), 감옥에 갇힌다. 요셉에게는 아무런 인권이 없었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안개 속에 갇힌 인생이었다.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이 아무것도 없었다.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마음과 행실을 높게 갖는 것외에는 없었다.

 

위의 개사한 노래 <요셉아 울지마라>하늘이 믿으시는 네 신앙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가사처럼,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생에 낀 구름을 걷어 주신다. 그리고, 그는 애굽의 총리 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토록 갈망하던 형들(가족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오늘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눈물 나는 신파극장면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장면일 것이다. 형들은 가뭄에 목숨을 구걸하러 애굽에 왔고, 요셉을 그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 자신을 밝힌다. “나는 요셉이라!” 오늘 말씀 가운데서도, 자기 자신을 밝힌 요셉을 보면서 형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셉의 고백은 평범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5, 8).

 

요셉의 고백은 한 마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하셨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게 죽도록 고생해 놓고, 자신들을 이 궁지에 몰아놓은 장본인들(형들)을 앞에 두고, 그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그들의 죄책을 지워주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요셉의 신앙은 전무후무할 정도이다.

 

우리의 인생은 때로, 아니, 자주,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고백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요즘 한국에서 어떠한 장군의 갑질 논란이 한창인데, 장군 운전병(공관병)을 한 나로서 군대에 대한 나의 기억을 여기에 꺼내 놓고 싶다.

 

나는 김영삼 정권 때 (문민정부) 군생활을 했다. 평소에 군대를 가면 장군 운전병을 하고 싶다고 소망하고 기도했는데, 소망대로 육군본부 작전처장 운전병(공관병)을 했다. 군생활 당시, 국군의 날 행사를 계룡대(육해공군 본부)에서 했다. 국군의 날 행사를 지위하는 장군을 제병지휘관이라고 한다. 제병지휘관은 실세 중 한 명이 맡게 되어 있다. 그때 제병지휘관을 맡은 장군은 육군본부 감찰감 이영대 장군이었다. 그런데, 제병지휘관을 맡아 국군의 날 행사를 준비하던 중, 이영대 장군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췌장암이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급히 췌장암을 치료하러 미국에 갔다.

 

국군의 날이 다가오고 있어, 병가를 낸 이영대 장군을 대신 할 제병지휘관을 급하게 새로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9군단 부군단장을 하던 이남신 장군을 급하게 제병지휘관에 임명했다. 9군단 부군단장은 투 스타로서 옷을 벗는 사람이 가는 자리다. 한가한 장군이라 급하게 제병지휘관 자리를 맡긴 것이다. 아무튼, 이남신 장군은 땜빵으로 제병지휘관 자리를 맡아, 국군의 날 행사를 치른 것이다.

 

그런데, 국군의 날 행사를 준비하고 치르는 동안 췌장암을 치료하러 미국에 간 이영대 장군은 그만 죽고 만다. 이영대 장군이 죽자 육군본부 감찰감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그때 국군의 날 행사를 잘 치른 이남신 장군이 별세한 이영대 장군의 후임으로 육군본부 감찰감 자리에 온다. 인생 역전이다.

 

그때 운전병이 9군단에서 함께 왔다. 운전병에게 이남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운전병이 정말 괴로워했던 것은, 장군을 모시고 매일 같이 새벽기도에 가는 것이었다. 운전병이 못 일어 나면, 운전병을 깨우지 않고, 장군 본인 혼자 차를 몰고 새벽기도를 다닐 정도로 신앙에 열심인 장군이었다.

 

이남신 장군은 요직인 육본 감찰감 자리에서 진급을 하여, 기무사령관으로 간다. 그러는 사이에 정권이 바뀌었다.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이남신 장군은 호남 출신이다. 그래서 그 이후, 이남신 장군은 3군 사령관을 거쳐, 합참의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야말로 인생역전이다. 투 스타에서 옷 벗는 9군단 부군단장 자리에 있다가, 우연히 땜빵으로 제병지휘관을 역임하고, 어부지리로 육본 감찰감 자리에 오르고, 그 이후, 정권이 바뀌어 합참의장까지 지내게 된 것은 그야말로 미스터리다내가 아는 한,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내가 지금 기도 열심히 하면 인생역전 된다는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부흥회 같은 데 가면,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 교회 가족들이니까 좀 더 이야기 한다. 그러면 이영대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겠는가? 절에 다니던 사람이었겠는가? 교회 안 다니던 사람이었겠는가? 아니다. 이영대 장군도 이남신 장군 못지않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장군이다. 이영대 장군 운전병도 이영대 장군이 매일 같이 새벽기도 가는 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러면 뭔가?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러니, 요셉처럼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삶을 살자. 마음과 행실을 높게 갖자. 그러면, 우리의 입술에서도, 감사와 찬송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이 흘러 나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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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15. 14:07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한복음 15:1-8)

 

얼마전 나파 밸리(Napa Valley)에 다녀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지척에 있는 지 몰랐다. 요즘 대중들 사이에서는 포도주 마시는 일이 유행이지만, 개인적으로 포도주든 무엇인든 술 마시는 일에 관심이 없다 보니, 지척에 세계적인 포도주 생산지를 놓아두고도 별 관심이 없었다.

 

성경에는 포도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오늘 말씀도 포도나무에 비유한 말씀이다. 이러한 비유를 좀 더 잘 이해하려면, 포도원에 한 번 가서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고 열매의 상관관계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참포도나무라고 한다.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참포도나무가 아닌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포도나무라는 말은 예레미야서 221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예레미야의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이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딱 붙어 있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할 참포도나무 가지인데, 어느덧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에게 딱 붙어 악한 가지가 되어 악한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우리나라 말로 농부라고 번역했지만, 영어로는 ‘vinedresser’이다. , ‘포도원지기이다. 나는 농부라는 말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더 정겹고, 의미가 더 확실하게 다가온다.


요즘은 농경사회가 아니라, 농부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 “農者之天下之大本(농자지천하지대본, 농부가 천하의 근본이다.)”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래서 IT 산업 또는 AI 산업이 대세를 이루고 있어, 우리 사는 이곳 실리콘밸리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농자지천하지대본은 유요한 말이다.

 

나는 강남에서 자랐다. 그런데, 내 어린 시절의 강남, 특별히 내가 성장한 우면산 일대 말죽거리 주변은 논밭이었다. 지금도 어린 시절 논두렁 밭두렁, 그리고 야산(우면산)을 뛰어다니던 일이 눈에 선하다. 요즘 아이들은 생일 때 피자 먹고 놀이기구 타고 게임을 하지만, 우리는 그때 생일 때 모여서 밥, 미역국, 잡채 같은 거 먹고, 밖에 나가서 자치기 하면서 놀았다

 

농번기가 되면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이 바빠졌는데, 친구들과 논두렁에 가서 올챙이 같은 거 잡고 놀다가, 새참 먹을 때 되면 함께 둘러 앉아 새참을 얻어 먹었다. 그리고 동네 농부 아저씨가 태워주는 경운기(딸딸이)는 최고의 놀이기구였다. 한 여름 땡 볕에 벼가 자라고, 장마가 오면 논두렁이 한강물처럼 넘치고, 장마를 이겨내고 가을이 오면 곱게 머리숙인 벼를 수확했다. 그때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놀이기구는 탈곡기이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논에 수북이 쌓인, 탈곡을 마친 볖집들을 이용해 본부라는 것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놀았다. 지금 생각하면 먼지가 엄청 났을 텐데, 그때는 그렇게 놀아도 비염에 걸리지 않았다.

 

농부가 해야 할 일은 엄청 많다. 곡식을 자라게 하는 일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하던 일이 잘 안 되면, ‘다 때려 치우고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나 짓겠다고 말한다. 농사를 우습게 보는 발언인데, 그러한 발언을 하며 농사 지으러 내려간 사람이 있다면, 얼마 안 돼서 후회하며 다시 도시로 상경할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농부이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두 가지 나온다. 가지치기와 가지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농부 아버지는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해 깨끗하게 하신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요즘 회사에서 성과를 내는 직원은 더 밀어주고, 성과가 없는 직원은 정리해고 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다.

 

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다!” 예수님께서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버린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과장법과 강조법을 써 말씀을 듣는 제자들의 마음 자세를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우리도 아이들을 훈육할 때 이런 말을 쓴다. ‘너 또 그러면 맴매 맞을 줄 알아!’ 여기서의 강조는 때리는 것에 있지 않고, ‘아이가 말을 잘 듣는 것에 있다. 위의 말씀은 마찬가지 원리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선포를 믿고 감사한다. “너희는 이미 깨끗하여졌다! (You are already clean!)” 같이 해 보자. “나는 깨끗하다!”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뚜렷한 사람일수록 인생을 값지게 산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흐릿하면, 그때 인생은 방황하게 된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미 깨끗하여졌다!”

 

농부이신 아버지의 할 일은 가지치기와 가지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의 할 일은 깨끗함을 유지하는 일이다. 홈리스피플을 가까이서 만나면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가? 냄새이다. 그들의 몸에서는 왜 그렇게 냄새가 날까? 씻지 않아서이다. 몸을 깨끗이 씻는 일도 쉽지 않다. 몸의 청결은 건강과 직결되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의 일과를 돌아보라. 빼먹지 않고 하는 일 중에 씻는 일은 반드시 들어간다.

 

오늘 말씀의 논리를 보면, 깨끗해진 그리스도인이 그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생기는 결과가 있는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 열매는 사랑과 기쁨의 열매이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사색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한병철, <피로사회>, 36).

 

이 말은 철학자 한병철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요즘 철학자들이 현대사회를 바라보며 가장 염려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과잉활동이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다 보니,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색의 삶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버나드 쇼가 자신의 묘비명에 쓴 이 문구를 자신의 묘비명에 새겨 넣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

 

사실, 농부가 과잉활동’, 즉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다. 농부는 해야 할 일만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기다림으로 보낸다. 농부는 파종할 시기를 기다리고, 비를 기다리고, 수확을 기다리고,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농부는 기다리는 동안 땅을 돌아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자기를 돌아본다. 그래서 농부는 겸손하고 간절하다.

 

내가 좋아하는 김경주 시인의 <인형증후군 전말기>라는 시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나는 간지럼을 타지 않는다. 밖에서 나를 웃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밖에서 간지럼을 타서 웃는 웃음은 참 웃음이 아니다. 그 웃음은 간지럼이 그치면 그냥 그쳐 버리고 말 웃음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심각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TV에서 가장 뜨는 프로그램은 예능 프로그램이다. 가장 인기 있는 연애인도 예능 프로그램을 하는 연애인이다. 요즘 사람들이 예능에 목매는 이유는 예능이 자신들의 삭막한 인생에 간지럼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누가 간지럼을 태워주지 않으면, 웃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능을 보며 간지럼을 타 웃고 싶은 현대인들의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떻게 들려오는 지 모르겠다. 나의 마음에는 내 아버지가 농부이시니 나도 농부가 되어야지라고 들려온다. ,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고, ‘과잉활동에서 벗어나, 땅도 돌아보고, 하늘도 쳐다보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농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거한다는 것은 머무른다는 뜻이다.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공간과 어떠한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우리는 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매일같이 거르지 않고, ‘씻는 일에 머무른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미 깨끗해진우리가 그 깨끗함을 유지하며, 사랑과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즉 머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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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11. 09:35

에바브라

(골로새서 1:1-8)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박지성의 맨유 절친 에브라를 안다. 그 에브라를 생각하면, ‘에바브라라는 이름을 쉽게 기억할 수 있다.

 

성경에는 에바브라와 비슷한 이름이 나온다. ‘에바브로디도이다. 물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이름이 비슷하고 헷갈리는 이유는 헬라어를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해서 그렇다. 에바브라는 ‘ephabras(에바브라스)’이고, ‘에바브로디도‘ephabrotitus(에바브로티투스)’이다.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어느 곳에나 일꾼이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일꾼이다.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 4:18)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다.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쓴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가져다 준 인물이 에바브로디도이다. 그리고, 빌립보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쓸 물건들을 공급해 주었다. 덕분에 바울은 감옥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도움의 손길 때문이다. 서로의 어려움을 돌보는 사이가 되기를 바란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니까 벌어진 일 들 가운데 하나가 그런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2:44-45).

 

에바브로디도에바브라디도가 합쳐진 말로 잘못 아는 사람이 있다. 아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냥 고유한 이름이다. ‘디도라는 사람은 다른 인물이다. ‘디도는 그리스 사람인데, 바울의 또다른 동역자로서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인물이기도하고( 2:1), 무엇보다 그는 고린도와 크레타 섬에서 사역했으며,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에 전달한 사람이기도 하다. 신약성경에서 꼼꼼히 성경을 넘기지 않으면 존재가 있는지도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 두 개의 서신서가 있다. 첫째는 빌레몬서이고, 둘째가 디도서이다. 빌레몬서는 1장이고, 디도서는 3장인데, 짧은 3장이다. 그래서 존재가 확인되지 못할 때가 많다. 디도서의 주인공이, 바로 디도이다. 디도는 크레타(그레데) 섬에서도 목회를 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아주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바울의 동역자 중 가장 힘든 곳에서 목회한 사람이 디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크레타 섬 사람들의 나쁜 습성 때문이다. 크레타 섬 사람들의 가장 나쁜 습성은 거짓말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디도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1:12-13).

 

그런 크레타 섬에서 목회한 디도 (목사님)에 비하면, 내 목회 환경은 양반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물론, 공사다망하셔서 우리가 한 자리에 다 모이기 힘들기는 하지만). (공사다망이란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이 많아서 바쁘다는 뜻인데, 이렇게 쓰이기도 한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이 많아서 바쁘면, 다 망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가 이 일을 왜 하는 지잠시 멈추어 서서 성찰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주일을 지키는 일이 그런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역자이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소아시아와 지중해 지역의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다.

 

에베소라는 곳이 있다. 이 곳은 바울이 소아시아지역 복음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은 곳이다. 에바브라는 이곳에서 사도 바울에게 제자훈련을 받고, 고향(골로새)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운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전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사도 바울은 에바브라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마음이 오늘 말씀에 담겨 있다. “(에바브라)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7, 8).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성령 안에 있는 자”, 이러한 칭찬을 듣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바브라를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성령 안에 있는 자로 인정한다.

 

위에서 소개한 에바브로디도, ‘디도, ‘에바브라는 모두 이방인이다. 유대인의 성경인 구약을 아는 자들도 아니고, 유대인의 율법을 아는 자들도 아니고,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을 아는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의 모든 삶을 바친 사람들이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로마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능력이다.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능력이 나타난다.

어떤 에너지, 알 수 없는 힘이 우리의 인생을 일으키고 새롭게 한다.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 어떻게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와 옥에 갇힌 사도 바울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며 빌립보교회와 사도 바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었겠는가.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 어떻게 디도가 크데타 섬 같이 목회 하기 어려운 곳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 어떻게 에바브라가 자신의 고향 골로새에 교회를 개척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 지역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우리들이 복음을 듣고, 그 능력에 사로잡힌 이 시대의 에바브로디도, 디도, 에바브라인 줄로 믿는다. 우리가 바로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혀, 성도의 쓸 것을 힘써 공급하고, 어려운 상대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성령 안에서 신실한 일꾼이 되어 전도하고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믿음의 자녀인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에바브로디도, 디도, 에바브라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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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