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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9. 13:41

돌아온 레퍼(Leper)

(눅 17:11-19)


공교롭게도 오늘은 한글날이다. 한글 창제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중국(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한국(조선)은 한자를 빌어 그 음을 표시했다. 그것을 차자표기라 한다. 문자를 빌어서 표기한다는 뜻이다.

 

한문차자표기의 가장 큰 문제는 한문은 뜻 글자이기 때문에 어휘(Vocabulary)가 엄청 많아서 일반백성들이 한자를 모두 습득하여 문자를 표기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근본적인 이유에는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칭하였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훈민정음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중세국어

현대국어

나랏말ᄊᆞ미中듀ᇰ에달아

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서ᇰ
니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
몯ᄒᆞᇙ노미하니라
내이ᄅᆞᆯ爲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ᆯ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
便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나라의 말이 중국과 서로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한글의 창제는 변방, 변두리의 한 작은 국가에 불과한 조선이 큰 국가(중화민국)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나게 만든 해방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말할 수 업는 질곡 가운데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현재 이렇게 세계에 우뚝 선 국가로 존속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한글이라는 언어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종대왕은 하나님께서 한민족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혜 중 하나이다.

 

주변부로 밀려나 존재감 없이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모멸감이란 죽는 것보다 힘든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해서든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고 중심에 서서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자기 힘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행복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자기 힘으로 아무리 싸워도 공동체(사회)의 중심부로 들어서는 게 전혀 불가능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레퍼(Leper)이다. 그 당시 나병환자들은 절대로 유대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나병이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차라아트로 표기하는데, 이는 ’, ‘징계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성경에서는 대개 차라아트나병(문둥병, 한센병)’이라고 표기하는데, 사실 이는 광범위한 피부질환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차라아트에 걸린 병자들을 모두 나병환자로 볼 필요는 없다. 다만, 피부병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도 난치병인 것이 많아서, 그 당시에는 피부병(차라아트)’하나님께 맞아서 생긴 병으로 생각했다. 다른 말로, ‘차라아트는 죄로 인해 징계 받는 것이는 생각이 고대유대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통념이었다.

 

죄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낙인은 파급력이 엄청나다. 우선 차라아트에 걸린 당사자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일만큼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책망하면 화(anger)가 나지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되면 고통(suffering)’이 온다. 고통은 죽음보다 무서운 거다. 고통에 처한 자는 누구든지 죽기를 갈망한다. 고통 당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낙인이 가져오는 두번째 파급력은 타인(다른 이들, 이웃)에게서 오는데, 그들은 차라아트를 지닌 자들을 멀리하게 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해치는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보호본능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차라아트를 지닌 자들과 가까이 하면 그들의 차라아트가 자신들에게 옮을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환자들을 멀리했다.

 

결국, 나병환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지역, 즉 변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그러한 곳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11). 우리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기가 어떠한 곳인지 전혀 눈치를 못 채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 다 알았다. (일례로, ‘예수께서 미아리를 지나시다가라는 표현을 외국인이 들으면 무슨 뜻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한국인들은 미아리가 어떠한 곳인지 다 아는 것과 같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우연히 만나신다.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변방의 나병환자촌에까지 퍼진 모양이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에 나병환자 열 명은 멀리 서서 예수님께 이렇게 외친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간청이었다. 기독교의 기도 전통에서 주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가장 위대한 기도는 바로 이것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Lord, have mercy). 주님께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게, 그분의 자비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나 많은 것을 간구한다. 그러나 최고의 기도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것을 안다면,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매우 겸손해질 것이다. 많은 말을 하여야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거라는 잘못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짧은 기도를 간절하게 드리기만 해도,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라. 나병환자들의 그 짧은 간청에 주님께서는 응답해 주신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에게 별다른 말씀 없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 이것은 이해하기 힘든 치료방법이다. 병자의 입장에서, 또는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적절한 반응은 자비를 구하는 나병환자들을 불러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별다른 치유행위를 하지 않으시고, 그저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항하여 예수님께 어떠한 치료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들에게 자신들의 몸을 보이러 길을 떠난다. 사건은 그 길을 가는 중에 발생한다. 오늘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

 

바로 여기에서부터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본문은 그 어떠한 일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15). 열 명의 나병환자가 길을 가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중 한 명의 나병환자만이 돌아왔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은 왜 돌아왔으며, 나머지 아홉 사람은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이 이야기를 통해서 누가복음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오늘 말씀에 대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낮은 수준의 해석은 이것이다. ‘은혜를 입으면 감사해야 한다.’ 물론 본문에서 그러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만은 않다. 은혜를 입었으면 감사하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은혜를 입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겨나는 거다. “아무튼,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야!” (사랑하는 여러분,) 최선을 다해서, ‘머리 검은 짐승이 되지 마시라.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중에 한 명만 돌아와 주님께 엎드려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나머지 아홉 명은 머리 검은 짐승이 되고 만다. 어떤 이들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이유를 그들이 자신들의 나병치유를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가한다.

 

보상 받으려 순종하는가? 바로 앞에 나오는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 보듯이, 순종은 보상의 개념에서 보면 안되고, 순종은 겸손의 개념에서 봐야 하는 게 맞다. , 우리는 보상 받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익한 종이기 때문에 생득적으로(naturally)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누가복음의 저자가 돌아온 레퍼(Leper)’의 이야기를 통해서 머리 검은 짐승이 되지 말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 실마리는 16절 말씀이 가지고 있다.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아홉 명은 유대인이었고,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여기에는 매우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구원 메커니즘이 들어 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데 익숙하다.

 

레위기에 보면 정결의식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레위기에 보면, 부정한 자는 제의(제사,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정결한 자 뿐이다. 그들에게 제의(제사)’에 참여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는데, 그들은 제사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구원을 확보하고 확인했다.

 

그런데, 만약 부정한 자 또는 부정한 것에 접촉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일은 생명처럼 소중했다. ‘차라아트’(나병환자)’는 정결한 자의 구원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었다. 그래서 정결한 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부정한 자(차라아트)를 공동체 밖으로 쫓아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기적이고 차별적인 신앙이다. 자기의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쫓아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쉽게 말해, 나 살자고 다른 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옳은 일인가? 인간의 죄된 본성의 측면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측면, 기독교의 진리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괴변에 불과하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레퍼(나병환자)는 분명 길을 가다가 자신들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들의 몸을 보이고,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는 것을 확인 받은 뒤, 유대공동체로 복귀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유대공동체로 복귀된 뒤,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서 (분명, 또는 아마도) 자신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다른 차라아트(나병환자)’들을 차별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냥 일반 사람들보다 나병환자들을 차별하는 데 더 열심을 보였을 지 모른다. 어떻게 얻은 구원인가? 갖은 모멸감을 참아내며 얻어낸 구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사마리아인 레퍼(나병환자)는 달랐다. 그는 깨끗함을 받고,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감사드렸다. 사실, 사마리아인 레퍼는 아홉 명의 유대인 레퍼보다 그 아픔이 두 배인 사람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죄인으로 낙인 찍힌 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공동체에서 원래 제외된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인 레퍼는 두 번 죽은 자와 같았다.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한 번 죽고, 사마리아 공동체에 의해 두 번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사마리아인 레퍼가 제사장에게 가서 그의 몸이 깨끗함을 입은 것을 보여 보았자, 그는 여전히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방인에 머물 것이 뻔했다. 다른 말로 해서, 사마리아인 레퍼는 나병에서 깨끗함을 얻었다 한들, 여전히 구원 받지 못한, 구원공동체에서 제외된, 버림 받은 자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바로 그 돌아온 레퍼(Lper)’에게, 돌아와 엎드리어 감사드리는 레퍼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생각해 보라. 누가 참으로(진정으로) 구원 받은 자인가? 제사장들에게 깨끗함을 입은 것을 확인 받고 공동체로 복귀하여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하여 여전히 자신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들을 차별하며 사는 아홉 명의 레퍼들이 구원 받은 자인가, 아니면, 주께로 돌아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선포를 가슴에 안은 한 명의 사마리아인돌아온 레퍼(Lepere)’가 구원 받은 자인가?

 

도대체 우리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 다른 이들보다 깨끗해지는 것’, ‘우위에 올라서는 것이 구원인가? 참된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정결해지고 구원받아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완전한(fully)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돌아온 레퍼가 어떻게 살았을 것 같은가? 그가 나병에서 깨끗함을 입고 공동체로 복귀되어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 자신의 구원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차별하며 살았을 것 같은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된 구원을 받은 자 답게, 공동체의 다른 레퍼들(구원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기의 형제로 받아들이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참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레퍼이다. 우리는 모두 깨끗함을 입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보혈로 우리를 깨끗케 하셨다. 깨끗함을 입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깨끗함을 입은 것을 확인 받기 위해 제사장(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에게 가서 굽실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자신의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차별하며 사는 것을 아닌가.

 

우리는 모두 돌아온 레퍼가 되어야 한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해야 한다. 구원에 방해되는 것들을 차별하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 같은 자들이 되면 안 된다. 우리는 구원 받은 자로서 세상에 나아가 구원에 방해되는 것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돌아온 레퍼(Leper)’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주님께서 돌아온 레퍼인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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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