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5

잔치는 시작되었다(The feast has just begun)

(아가서(Song of Songs) 2:10-13)


한국(동양문화권)에서 결혼은 인륜지대사(major life event)’라고 한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큰 일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인륜지대사인 결혼은 개인이 감당하지 않고 집안이 감당한다. 그런데, 서양문화권에서는 인륜지대사인 결혼은 결혼 당사자들(개인)이 감당한다.

In Korea (Asian culture), marriage is called 'major life event'. It means 'one of the big things that people have to do while living.' In the Asian culture, the marriage is not covered by the individual but the family. However, in the American cultures, the marriage is held by the married couple (individuals).

 

이것은 각 문화권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륜지대사를 공동체가 감당하는 것이고, 서양문화권에서는 공동체보다 개인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륜지대사를 개인이 감당하는 것이다.

This reflects the ideas of each culture. In the Asian culture, the community carries the 'major life event' because it cares more about the community than the individual. In the American culture, the individual cares for the 'major life event' because it cares more about the individual than the community.

 

여기서 무엇이 더 낫다, 옳다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일을 감당하느냐 보다, 그 일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큰 일 중에 하나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It is pointless to ask 'what is better, right' here. The important thing is that it is one of the big things that people have to do while living.

 

성경에 나오는 결혼에 대한 가르침은 이렇다.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성경 중간 어디쯤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나온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그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한다고 판단하시고, 아담(사람)을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신다.

The Bible teaches the marriage like this. The Bible's teaching about marriage does not appear anywhere in the middle of the Bible. It is in Genesis, the beginning of the Bible. Genesis 2 tells us that after God created Adam(human), it is not good for him to live alone, and he made a helper for Adam(human).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의 돕는 배필을 지으실 때 다른 무엇에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돕는 배필을 만드신다. 이것은 여자(하와)가 남자(아담)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와(여자)는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아담(사람)에게서 왔다.

By the way, when God makes the helper suitable for Adam, he does not make it from anything else, but makes a helper for him by taking one of Adam's ribs. This is not a verse that says that a woman (Eve) is a subordinate to man (Adam). This tells us that Adam and Eve are essentially the same. Eve (woman) came not from another, but from Adam (human).

 

(사람)의 돕는 배필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를 아담 앞으로 이끌고, 아담이 그 돕는 배필의 이름을 짓게 하신다. 아담은 그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뜻으로 여자라고 부른다. ‘여자라는 의미는 남자, 여자라고 부르는 성적인 구별 이전에 사람이라는 의미가 먼저 앞선다. 그 말은, 남자와 여자는 사람으로서 평등하다는 뜻이다.

God, who made the helper of Adam (man), leads him to Adam, and Adam makes the name of the helper. Adam calls it "a woman" in the sense of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 meaning of 'woman' means 'human' before the distinction between men and women. That means man and woman are equal as human.

 

그 후에,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는다( 3:20). 이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 아담은 자신의 돕는 배필인 여자를 자신의 생명처럼 생각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결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25).

After that, Adam names the woman Eve (Genesis 3:20). It means 'life'. What is this? Adam meant that he thought of the helper 'woman' as his own life. The Bible tells this story and says about marriage as follows. “For this reason, a man wi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be united to his wife, and they will become one flesh. The man and his wife were both naked, and they felt no shame”( 2:24-25).

 

 

그렇다. 남편와 아내는 부모를 떠나 결합한 한 가정이고 인격체이다. 이제 그들은 한 공간에서 벌거벗고 있어도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벌거벗으면 부끄러운 법이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 앞에서, 아내는 남편 앞에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Yes. A husband and wife are a family and a personality that leave their parents. Now they are naked in one space, but they are not ashamed of one another. Isn’t it? It is a shame if a person is naked. By the way, a husband is not ashamed of his nakedness in front of his wife and the same with the wife in front of her husband. It is very strange if husband and wife are ashamed of being naked.

 

우리 시대는 결혼을 선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결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말씀)이다. 그야말로 인륜지대사이다. 그러나, 이것을 공동체가 감당하느냐, 개인이 감당하느냐가 문화마다 다를 뿐이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선택의 문제는 우리 인류에게 달려 있다.

Our time tends to think of marriage as an option. However, the Bible does not. Marriage is not a matter of choice but an order of God. It is indeed a major life event. Of course,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to obey God's command depends on our humanity.

 

오늘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말씀)에 따라, 결혼하기로 결단한 줄로 믿는다.

Today, I believe that both of you are determined to marry to each other according to God's command (Word).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들은 모두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생명을 헤치는 법은 하나도 없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 중에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서로 사랑하라!” 나는 이 법의 최고의 결과물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은 All the laws God has ordained enrich life. There is no law in God's law to harm life. In the Bible, the best law that God has ordained is the law of love. "Love one another!" I think that the best result of this law is "marriage." Marriage is the greatest fullness among the fullness of life. So marriage is called a feast.

생명의 충만함 중에서도 최고의 충만함이다. 그래서 결혼은 잔치라고 부른다.

 

잔치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잔치 때 아끼는 사람은 잔치를 모독하는 것이다. 결혼은 사랑의 잔치이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은 무엇보다 사랑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결혼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아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랑을 왜 아끼나? 아낌 없이 쏟아 부어야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부부끼리 사랑만큼은 탕진해도 된다.

What is the greatest feature of the feast? It does save nothing. The person who save things in the feast is blaspheming the feast. Marriage is the feast of love. Therefore, married people should not save love more than anything else. It is strange that married couples save love one another. Why do you save love? You have to pour out love for one another. You can squander love for one another as you are married.

 

요즘 미국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 중 한 명인 팀 켈러 목사가 쓴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팀 켈러 목사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분석하면서 ‘prodigal’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하여, 하나님을 탕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There is a book <The Prodigal God> by the Rev. Tim Keller, one of the most famous pastors in the American church, There, Rev. Tim Keller analyzes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of Luke 15 and applies the word "prodigal" to God, calling God "The Prodigal God".

 

‘prodigal’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이다(탕부 하나님, 20). 누가복음 15장의 소위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아버지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게사랑하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 그래서, 하나님은 탕부 하나님이시다.

'Prodigal' do not mean 'recklessly extravagant', but rather 'having or giving something on a lavish scale'. It means 'having spent everything'. (The Prodigal God, p. 20). As you see in the so-called Parable of the Prodigal Son in Luke 15, the father loves his little son and his great son like 'having or giving something on a lavish scale’, and he 'has spent everything' in order to save them. So, God is 'the prodigal God'

 

결혼은 잔치다. 찬치에서는 무엇이든지 아껴서는 안 된다. 결혼은 사랑의 잔치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을 하면서 사랑을 아껴서는 안 된다. 탕신랑이 되고, 탕신부가 되라.두 사람은 이제 한 몸이 된다. 두 사람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잔치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되는 사랑의 잔치에서 두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무한대로 풍성해지기를 소망한다.

Marriage is a feast. You should not save in the feast. Marriage is the feast of love. Therefore, you should not save love while married. Be a prodigal husband and be a prodigal wife. Both of you are now one body. Both of you have just begun the feast in the fence of family. At the beginning of the love feast, I bless that the lives of you two will be enriched as infinitely as God wants.

 

오늘 우리가 읽은 아가서의 말씀처럼, 두 사람의 결혼, 이제 시작된 사랑의 잔치를 통해, 두 사람의 인생 가운데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며, 비가 그치며, 그 삶 가운데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며, 열매가 익고 향기를 발하며, 그 입술에서 사랑의 속삭임이 끊이지 않는 아낌없는 사랑의 축제가 되기를 소망한다.

Through the marriage of you two, the feast of love that has just begun, as in the Song of Songs we read today, I bless that the winter is past, the rains are over and gone, flowers appear on your married life, the season of singing has come, the cooing of doves is heard in your land, the fig tree forms its earl fruit, and the blossoming vines spread their fragrance in your love.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속삭여 보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의 은총을 빈다.

Whisper to each other like this. “Arise, come, my darling; my beautiful one, come with me.”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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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2

빛은 어둠을 이긴다 

(요한복음 8 12-20)


이스라엘에는 7대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가 있다. 유대인의 절기는 유월절에서 시작해서, 초막절에 끝난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 있고, 오순절(칠칠절)은 곡식의 첫 수확과 관련 있고, 초막절은 광야에서 장막에 거한 것을 기념하며 곡식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절기는 기본적으로, 감사의 축제이다. 눈을 떠서 제대로 보면, 이 세상은 감사할 일 천지다. 불평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늘 말씀의 시간적 배경은 초막절이다. 초막절을 맞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가셨고, 그곳에서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결을 펼치며 가르침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에고 에이미의 형식을 빌어 세상에 드러내시는데, 오늘은 특별히 자기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예수님이 뜬금없이 자기를 빛으로 소개한 것은 아니다. 초막절 축제 때 행하던 빛의 의식에 빗대서 자신을 빛으로 소개한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초막절 축제 때 젊은 제사장은 사다리에 올라 여인의 뜰에 있던 4개의 황금 촛대에 불을 붙였다. 이 빛은 온 예루살렘을 비춘다는 것을 상징했다. 시편 27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스라엘에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대적자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현현하실 때 빛으로 나타나신다. 빛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특별히, 이사야서 60 19-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성경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빛이라는 상징은 매우 강력한 상징이다. 요한복음 1장은 빛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한다. 특별히 요한복음 1 5절 말씀은 이렇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과 어둠이 대비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어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빛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고 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빛과 어둠이라는 상징을 통한 성경의 메시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에 오기 전 겨울의 끝자락, 그러니까, 2003 2월 어느 날, 나는 사촌형과 함께 설악산 등산을 했다. 우리가 설악산 등산을 하기로 마음 먹는 날은 대설주의보로 인해 흰 눈이 온 산을 덮었던 때였다. 산행금지가 풀린 시간은 오전 11시였고, 사촌형과 나는 계획대로 설악산을 올랐다. 오색 약수터 쪽 등산로를 이용하여, 죽을 고생을 하며 설악산 정상인 대청봉에 올랐는데, 그때는 이미 시간이 오후 5 30분 경이었다. 너무 추워서, 정상에 5분도 못 머물러 있고, 곧바로 하산 했는데, 산을 내려오면서 그만 해가 지고 말았다. 그런데, 너무 감사한 것은 그날 반달이 하늘에 떴다. 설악산 꼭대기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앙상한 나뭇가지로 비추는 반달의 빛 때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빛의 위력은 대단하다. 생명을 살린다.

 

위에서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도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에서 는 애굽을 의미하고, ‘은 바벨론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질곡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은 이 뜻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주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힘 센 애굽에 붙었다, 더 힘 센 바벨론에 붙었다 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애굽바벨론을 빛으로 여기며,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서 고된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라!” 빛이 되어 줄줄 알았던 애굽과 바벨론은 이스라엘에게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빛은 그들을 괴롭히고 멸망시켰다. , 그것은 참빛이 아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빛이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슬픔의 날을 끝내실 수 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다!”

 

요한복음 1 5절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깨닫지 못하더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람바노이다. 이 말은 붙잡다, 깨닫다, 이기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새번역은 이 구절을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 어둠은 빛을 붙잡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빛과 어둠은 어울릴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초막절에 세상을 비추는 등불에 빗대어, 자기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님을 빛으로 증언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갈망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빛으로 오시는데, 빛으로 오신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은 언제나 구원의 은혜가 임한다. 슬픔의 날이 물러가고, 기쁨의 날이 온다. 그 기쁨이 지금 이곳에 임했다. 왜냐하면, 빛이신 예수님이 바로 이곳에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이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하다. 어둠은 빛을 붙잡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빛은 누구(무엇)인가? 애굽인가? 바벨론인가? 우리에게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인 것이 깨달아지는 자에게는 구원의 빛이 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마음에 붙들고, 어둠을 이기며 살 것이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빛인 것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 세상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빛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구원의 빛을 날마다 비추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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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6. 07:24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마가복음 15:33-41


십자가 상에서의 칠언 (가상칠언)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들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23:34)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 19:26-27)

4)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27:46, 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5) 내가 목 마르다 ( 19:28)

6) 다 이루었다 ( 19:30)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23:46)

 

마가복음에는 십자가 상의 칠언 중, 4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만 나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외치고 죽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시편 22편에서 왔다. 극한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그만큼 말씀이 내면화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에 걸쳐 이루어 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얼마큼 말씀이 육신이 되는 내면화 과정에 들어서 있는가? 희로애락의 상황에서,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무엇인가? 세상적인 신음과 욕설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시편 22편의 1, 2절은 이렇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옛날에 짚신 장사를 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짚신은 잘 팔리는데, 아들 짚신은 잘 팔리지 않았다. 아들은 자기가 만든 짚신이 왜 잘 팔리지 않는지, 잘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됐다. 아들은 죽어가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울며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 짚신은 잘 팔리는데, 내 짚신은 왜 잘 안 팔려요? 아버지 짚신과 내 짚신의 차이는 뭐에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이라고 한 마디만 남겼다. 아들은 아버지를 고이 묻어 드린 뒤, 아버지가 남기신 한 마디 이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아버지 짚신과 자기 짚신의 차이점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흐린 뒤, 아들은 아버지가 남기신 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바로, 아버지의 짚신은 털 한 가락 나오지 않은 부드러운 짚신이었고, 아들의 짚신은 털이 삐쭉빼쭉 튀어 나왔던 것이다. 그 이후, 아들을 아버지가 만든 짚신처럼 털 한 가락 나오지 않은 부드러운 짚신을 만들어 내다 팔아, 잘 먹고 잘 살았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이 시편 22편의 첫 번째 구절만 외치신 것은 시편 22편의 말씀 전체를 하나님 앞에 아뢴 것과 똑같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시편 22편의 말씀 전체를 외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한 구절, 또는 한 단어만 외쳐도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담기는 법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어가면서 짚신 잘 만드는 법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라마 라마 사막다니를 외치신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것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시편 22편은 원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건지실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여호여와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19-21).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송의 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라마 라마 사막다니를 외치신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자기를 버리신 듯한 하나님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은 믿음과 찬송의 외침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응답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닌 구원의 죽음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나타내 보이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를 본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 놓여 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간다. 그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구원사라고 한다. 그냥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 놓여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한마디로,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른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구원자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이루신 그분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름 부음 받은 자인데,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단순히 구원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의 깊은 차원을 만난다. 구원이라는 말이 세속적으로 바뀌면 번영이라는 말이 된다. 사람들은 번영하기 위하여 아우성 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자체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다른 말로, ‘순종이라고 한다. 구원은 순종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신적인 은혜이다.

 

스펄전 목사는 타 도시에서 자기가 돌보는 런던의 고아들을 위해 300 파운드를 모금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그 돈을 조지 뮬러 목사에게 갖다 주라는 음성을 들었다. “! 주님, 저희 고아들도 이 돈이 필요한데요그러나 그 음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그 돈을 들고 뮬러에게 갔다. 뮬러는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지, 하나님께서 내가 모금한 300파운드를 당신에게 주라고 해서 가져 왔소.” “스펄전 목사님, 저는 지금 바로 300파운드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뻐했다. 스펄전 목사가 사무실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와 있었는데 300기니의 헌금이 들어있었다. “주여, 300파운드에 이자까지 보태서 주시는군요!” 그는 감격하여 감사를 드렸다.

 

이것은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언 19:1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순종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그것에서 구원의 은혜가 나왔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면,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가 넘쳐나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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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6. 07:21

예배 - 주께 돌아옴

룻기 1

(룻기 1:1-14) 


5월 한 달 동안 진행되었던 세화하늘축제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우리 모두가 경험했다. 나경화 선교사 초청 집회, ‘지금은 세화시대를 외치며 출전했던 북가주 지역 교회간 친선 탁구대회 (응원상), 브라이언 킴 초청 집회, 그리고 장윤식 목사 초청 부흥성회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보았고, 세화의 미래를 보았다.

 

특별히 부흥성회에 큰 은혜가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부흥회 시작하는 날, 핸드폰과 지갑을 분실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방해도 있는 법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내가 초보 목사였으면, 핸드폰과 지갑을 분실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부흥회를 그르쳤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부흥회에만 집중했다.

 

이 세상에는 빛도 있지만, 어둠도 있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자꾸 까먹는다. 도시의 불빛은 이 세상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도시의 불빛에 너무 취해 있으면 안 된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방해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멀쩡히 주님 앞에 나와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연어와 같다. 세상과 같은 망망대해로 나갔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 연어의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강 상류이지만, 우리의 고향은 그리스도의 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돌아온다.

 

연어가 강 상류로 돌아가 그곳에서 알을 낳고 죽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다. 돌아가는 일은 모험이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연어가 위험을 떠안고 모험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삶의 이유이고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이유이고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이것을 깨달은 상태이다.


이것에 대해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찬미함으로써 향유하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합니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합니다라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쉴 때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는 우리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즐비하다. 이런 노래가 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잔치에 갈 수 없어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도 많아 내 어이 하리 죄송해요 한 어느 마을에 멋진 집에 살던 사람이 큰 잔치를 벌여놓고 손님 청했네 그가 널리 이웃더러 오라 했더니 그때 모든 사람들이 대답하는 말~”(14)

 

우리는 오늘 나오미의 삶의 여정을 본다. 룻기 1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사시들이 치리하던 때가 어떤 때인지, 우리는 사사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살아가기 쉽지 않은 시대였다. 무질서하고 혼탁한 시대, 삶의 터전이 매우 빈약한 때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국가로서의 어떠한 문화와 정치적 체계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때였다. 그때,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그때에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다.”

 

베들레헴은 집을 의미하는 베트와 떡을 의미하는 레헴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다. ‘떡집이라는 뜻이다. 떡을 굽는 마을로서 베들레헴은 양식의 집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양식의 집을 떠나 모압 땅으로 거류하러 갔다. 거류한다는 히브리어의 구르라는 말인데, 이는 이방인, , 난민으로서 눌러 앉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2절에는 한 사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었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였고,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었다. ‘엘리멜렉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이고, ‘나오미는 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이들의 신앙과 삶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던 엘리멜렉 가정에는 기쁨이 넘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의 삶에 시련이 닥친다. 우리는 그것을 그의 아들들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 엄마의 이름과는 달리, 두 아들이 이름 말론과 기룐은 그렇게 좋은 이름이 아니다. 말론의 뜻은 병약한 자이고, 기룐은 폐결핵, 또는 멸망이라는 뜻이다.

 

이 두 아들의 이름에서 풍기는 불길한 기운이 모압 땅에서 현실화 된다. 푸른 꿈을 안고 어렵게 결심한 이주인데, 모압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는다. 그리고 나오미의 두 아들은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 첫째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인데, 그 뜻은 목덜미라는 뜻이고, 둘째 며느리의 이름은 인데, ‘원기회복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10년 후에 두 아들도 마저 죽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오미는 모압 거류민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오늘 말씀에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6).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다. 돌봄과 양식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양식의 집베들레헴을 떠난 이유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거류민이 되었다. 그런데, 양식을 구하러 간 곳에서 양식을 구하지 못하고, 그들이 얻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오미는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되돌아 오려고 하고 있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1절의 라구르(거류하기 위해)7절의 라슈브(돌아오려고)가 대비되고 있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 떠났던 나오미가,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실제로 이민생활(거류민)을 하고 있는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아주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거류민으로 이곳에 살면서, 양식을 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거류민으로 살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그래서 한인이민자들은 교회를 다니는 비중이 매우 높다.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단순히 신앙의 장소가 아니라, 쉼과 우정과 회복의 장소이다. (이민자들의 교회는 종교집회 장소의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물리적인(physical) 마음의 고향이다. 고향의 언어와 문화와 사람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이민교회는 매우 중요하다.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거룩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주께 돌아와 있기 때문이다. 피터 셰퍼의 연극 에쿠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예배하지 않으면 움츠러들게 될거야. 그만큼 잔인한 일은 없지.” 여러분은 어떤 음성을 듣고 이 자리에 돌아와 있는가? 나오미가 들었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도 날마다 들리시길 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예배는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경험하는 것이고,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반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를 쓰고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놓여 있더라도, 이겨내고 기를 쓰고 돌아오라. 그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굴복하지 말라.

 

왜냐하면, 양식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생명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예배는 그러한 신앙고백이 담긴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거기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이다.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양식이 있습니다. 주님께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돌아옵니다.”

 

록펠러의 십일조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성실한 신앙인이 된 데에는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아들 록펠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너는 예배 30분전에 도착하여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가장 정성껏 예배를 드려라.”

 

나는 지금 록펠러 이야기를 하면서 예배 잘 드리면 록펠러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를 사랑하는 자, , 주님께 돌아올 줄 아는 자는 주님께서 돌보시고 그에게 양식(생명)을 주신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복음이 여러분의 귀에 들렸으면 좋겠다. 우리 서로 귀에 들리게 이렇게 말해보자. “예배 잘 드립시다! 주님께로 돌아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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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5. 8. 14:59

나와 당신 (I-Thou)

(눅 10:25-36)

 

비와 벌

 

처마 밑을 맴돌던 벌 한 마리가

주저 앉다 말고 갑자기

빗속으로 뛰어 들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곤충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른다

 

다만 빗속에서 비 맞고 돌아다녔다고

나처럼 그 벌도 엄마한테 혼날까봐

그것이 걱정된다

 

빗속으로 뛰어드는 벌을 보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나도 앞뒤 가리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비를 흠-뻑 맞고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혼나고 싶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고, 스승의 날도 있다. (물론 미국에는 어린이 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어린이에 대한 인권이 충분히 확보되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어린이 날이 생긴 계기는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한 것이었고, 또한 3.1운동을 시작으로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

 

국제적으로 어린이의 인권 보호 운동은 1925년 제네바에서 있었던 아동 복지를 위한 세계 회의(World Conference for the Well-being of Children)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각 나라에서는 어린이날을 지정하여 지키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나라가 어린이날을 지정하여 지키고 있지는 않다. 그 중에서 특이한 것은 한,,일 세 나라에 어린이날이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세 나라는 문화적 영향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의 어린이날도 실제로 소파 방정환을 비롯한 일본의 유학생들 중심으로 제정되었다. 이들은 1923 5 1, 색동회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어린이 운동을 펼쳤다.

 

동양문화권에서 어린이의 인권이 이슈가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 말에서도 어린이라는 낱말이 등장한 것도, 소파 방정환 선생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젊은 사람을 젊은이라고 하듯이 나이가 어린 사람도 어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린이'라는 용어를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다.

 

어린이날이 아동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제정된 것과는 달리,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은 인권 향상의 의미보다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제정된 날이다. 19565 8, 원래는 어머니 날만 시행되었다. 그러다, 아버지들의 반란 때문에 1973년부터 어머니와 아버지의 날이라는 뜻으로 어버이날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날 제정이 일본의 영향이라면, 어버이날 제정은 미국의 영향이다. 게다가, 어버이날이 되면 부모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풍습도 미국에서 온 것이다. 100여 년 전, 어느 한 소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어느 모임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그러한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카네이션의 꽃말은 건강을 비는 사랑이라고 한다.

 

스승의 날은 상당히 자생적인 기념일이다. 그리고, 그 날짜 지정도 굉장히 특이하다. 처음에는 국제연합 가입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했다가, 1965년부터 세종대왕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 지키고 있는 5 15일은 스승의 날이지만, 세종대왕 탄신일이기도 하다.

 

지금 시대를 보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인권이 없어 특별히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인권을 외쳐야 했던 어린이는, 현재 처럼 대우 받는다. 그러나, 인권의 최상위에 있었던 부모님과 스승님의 인권은 날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어린이날을 없애고,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의 취지를 바꾸어야 할 판이다.

 

우리는 관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관계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부부의 관계, 그리고 나와 이웃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모든 것이 위태롭다. 어린이날, 부모가 자식을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어버이날, 자식이 부모를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스승의 날, 제자가 스승을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신앙인으로서, 주일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어느 날,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을 다른 말로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이런 것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교사와 예수님 간의 대화에 의하면, 구원을 얻는 길은 이렇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10:27, 19:18, 6:5).

 

이 말씀에 의하면, 구원의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구원은 사랑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우리가 얼마나 구원에 가까이 살고 있는지, 아니면 구원에서 멀리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율법교사는 더 나아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 주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집으로 가려고 여리고 쪽으로 내려 가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발가벗겨진 채로(그 당시에는 옷도 귀해서 옷도 빼앗아 갔다) 거반 죽은 상태가 되어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그때 마침, 세 종류의 사람이 그곳을 지나친다.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거반 죽게 되어 길가에 버려져 있는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친다. 결국, 강도 만난 자를 구해 준 것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별다른 설명이 없는 것을 보니, 강도 만난 자는 유대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 만난 자를 구해주어야 마땅한가? 같은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 제사장 또는 유대인인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구해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형제,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그들이 평소에 원수로 생각하고 사람취급 안 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해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처럼,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관계의 위태로움을 목격하게 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 것과 같다. 자신이 제사장이고 레위인이고, 특별히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이고, 유대인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관계를 물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해 주었을 것이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관계를 질문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자각했던 사람이다.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바라보았을 때,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겼. 이 능력(상대방을 인식하는 능력)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능력이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존감을 상실했다는 데서 온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 일본의 소설가 나스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난 죽기 전에 단 한사람이라도 좋으니까 남을 믿어보고 죽고 싶어요. 학생은 그 단 한 사람이 돼 줄 수 있겠습니까?” 자존감의 상실은 나도 못 믿고, 남도 못 믿는 비극을 불러 온다.

 

자존감을 상실하는 이유는 마땅히 받아야할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마땅히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자식은 마땅히 부모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사회에서는 이게 잘 안 된다. 부모는 자기 자신을 높여주는 자식만 사랑한다. 엄마의 학대(공부학대)에 참다참다 못참아 엄마를 죽이고 감옥에 간 한 학생의 글이다. “부모는 멀리 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하고 학부모는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부모인가, 아니면 학부모인가?

 

자식은 마땅히 부모님을 사랑해야 한다. 부모는 마땅히 자식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자식은 부모가 경제력이 없으면, 부모 취급도 안 하고, 그마저 부모가 늙으면 갖다 버린다. 얼마 전, 신문에서 버림 당하는 치매노인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기사는 이것을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명명했다.

 

요즘 사회를 능력 사회라고 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사람 취급 받는 사회라는 뜻이다. 능력 있는 자식이 사람 취급 받고, 능력 있는 부모가 사람 취급 받고, 능력 있는 스승이 사람 취급 받고, 능력 있는 남편, 아내가 사람 취급 받는다. 능력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예일대학교의 생화학자인 헤롤드 J. 모로위츠는 인체의 화학물질을 계산해 보면, 인간생명은 600만달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헤모글로빈은 그램당 285달러, 인슐린은 그램당 47달러, 효소 트립신은 36달러, 탑즙색소 빌리루빈은 12달러, DNA 76달러, 콜라겐은 15달러, 알부민은 3달러, 덜 알려진 물질로 효소를 활성화시키는 아세테이트 키나아제는 그램당 8,860달러, 알칼리 포스파타테는 225달러, 이할루론산 교착물질은 175달러, 브래디키닌아미노산 12,000달러, 젖샘의 젖 생산을 자극하는 호르몬 프로클랙틴은 그램당 175만달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체중 1그램의 가치는 평균 245달러라는 결론을 내린다. 모로위츠 박사는 자신의 체중이 168파운드인데 68%인 물을 빼고 계산하면 24,436그램으로 24,436×245달러는 6,000,015.44달러가 된다는 것이다.

 

안구 하나 구입하려면 1억 이다. 눈 두개를 갈아 끼우려면 2억이 들고, 신장 바꾸는 데는 3천만원, 심장 바꾸는 데는 5억원, 간 이식 하는 데는 7천만원, 팔다리가 없어 의수와 의족을 끼워 넣으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다. 지금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몸에 약 51억이 넘는 재산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을 물로 보면, 인간은 5리터의 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값어치는 3달러 정도 밖에 안된다. 사람을 물로 보면 안 된다.

 

나와 당신(I-Thou)’는 유대인 철학자(신학자) 마틴 부버의 용어이다. 그는 인간 간의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나와 그것(I-it)’의 관계로 가지면, 그저 육체적인(physical)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러 착취의 관계 머물게 되지만, 그것을 나와 당신(I-Thou)’의 관계로 발전시키면 영적인 관계에 도달해, 상대방을 착취의 관계가 아닌 사랑(교제, 친교)의 관계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그저 나와 그것의 관계로 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와의 관계를 나와 당신의 관계로 발전시켜 영적인 관계, 사랑의 관계로 그를 바라보게 되어, 그를 바라볼 때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러한 관계가 구원을 가져 온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한 것이지, 우리가 능력 있는 존재라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관계가 위태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관계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올바로 맺는 길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27. 15:46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이가

(마가복음 10:35-45)


한국에서는 권력투쟁이 한창 중이다. 사극 같은 데서 보면, 권력투쟁이 발생하면 피바람이 분다. 권력은 그만큼 생사를 가를 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은 사회제도가 민주화되어 옛날처럼 권력투쟁이 발생한다고 피바람이 불지는 않는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의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현대 사회를 떠 받치고 있는 두 개의 큰 기둥은 정치와 경제이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출세의 길을 가려면, 정치나 경제 분야로 가야 한다. 다른 말로 해서, 권력과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출세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느 분야나, 권력과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속한 세상을 호령한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던 중 발생한 사건이다. 자신이 고난 당할 것에 대하여 세 번째로 말씀하신 뒤, 제자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무엇인가를 청한다. “선생님,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주세요!” 그들이 구한 것은 이것이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

 

이것은 명백하게, 야고보와 요한이 권력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권력의지를 드러냈다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과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권력투쟁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이 옛날의 다윗 왕처럼 (다윗의 자손으로서)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방인들(로마제국)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권력을 다시 찾아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아니라, 그 당시 일반 대중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앞서가고 뒤따르며)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9).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그들은 조상 다윗의 나라가 그의 자손 예수를 통해서 오게 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이 기대하던 다윗의 나라는 오지 않았다(오지 않았다기 보다, 그들이 기대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왔다). 이방인(로마제국)을 몰아내고 다윗의 나라를 세워줄 것으로 기대했던 다윗의 자손 예수는 이방인(로마제국)의 손에 처참하게 죽는다. 이것은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리칠 것으로 기대했던 다윗이 골리앗에게 처참하게 죽게 되는 형국과 같다.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그들이 힘없이 고난을 당하는 예수에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성낸 것이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욕을 해댄 것은, 그들의 기대가 허탈하게 무너진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실망이 커지면 분노가 표출되는 법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에, 그들은 라고 대답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인지 알지 못했다.

 

정치는 개인(공동체)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이고, 경제는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것이 실현된 사회를 정의사회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사회 덕목은 정의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경제적 풍요로움이 불평등하다고, 부정의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교회는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서 어떠한 해결책을 내 놓아야 할까? 우리는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권력의지를 드러내자,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41). 그들은 왜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을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의 무지를 향해 화를 낸 것일까? 아니다. 그들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들보다 먼저 권력의지를 예수님께 전달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시샘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권력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권력의지를 나무람과 동시에 어떠한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신다. 권력을 가지려고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자들은 권력을 손에 쥐고 권세를 부리기 위함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42). 여기서 임으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린다는 뜻은 권력을 잡은 자는 자기 마음대로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맘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자유라고 한다. , 권력은 자유를 극대화시킨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자유를 극대화시키려 할까? 그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크면 클수록 사람은 생명이 커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위해서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자유는 권력을 잡을 때 오는 것이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 방식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물론, 권력을 잡은 자는 최고의 자유를 누려서 좋긴 한데, 권력을 잡지 못한 이들, 권력을 잡은 자에게 부림을 당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를 빼앗긴 박탈감과 상실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사회는 평등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권력의지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말씀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 말씀은 그런 식으로 생명을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생명의 성취는 권력의지를 드러내서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데서 오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상대방을 섬기는 데서 생명의 성취된다는 가르침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44).

 

어떤 목사님이 SNS에 연회 참석 후기를 올렸다. 귀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 공유한다. (비문은 약간 손 봤다.)

 

지난 주 00연회가 있었다. 올 해는 감리사 선거가 있는 연회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연회는누가 감리사가 되느냐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점차 아니 전적으로 연회나 총회의 존재 목적이 감리사나 감독을 뽑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감리교회의 정체성이나 본질은 뒷전이다. 무엇보다 영적 지도자로서 지녀야 할 영성과 믿음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언급도 없다. 오로지 회무처리(그게 그리도 중요한가 보다), 그것도누가 장을 맡고, 누가 중요한 자리에 앉는가가 중요하다(돈이 안 되는 자리에는 관심도 없다).

 

감리교회가 마치 감리사나 감독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감리사와 감독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이 존재하는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감리사와 감독의 조건을 봐도 그 사람(영성) 자체보다 감리사나 감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규모가 되는 교회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성보다 규모가 중요하다. 교회의 규모를 나타내는 재정과 교인수가 중요하고 절대적인 조건이다. 돈이 없는 교회, 즉 돈을 내는 교인이 적은 교회는 감리사나 감독 (자리)에 눈길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재물을 섬기는 감리교회이다. 재물이 곧 능력이고, 재물이 곧 지도자의 조건과 기준이 되었다.

 

이는 마치 서열다툼을 하였던 제자들과 똑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길을 가고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누리게 될 세상적 명예와 출세를 위한 자리다툼을 하였던 것과 같이 현 감리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 따르는 흉내만 낼 뿐, 실상은 제자들처럼 세상적 명예와 출세를 위한 자리다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

 

"나는 메소디스트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단지 능력 없는 종교의 형태만을 갖고 있는 죽은 단체로서 남아 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만약에 메소디스트들이 처음 출발할 때 가졌던 그 교리와 그 정신 그리고 그 훈련을 다같이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 존 웨슬리

 

세상은 권력과 재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세상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력과 재물을 통해 생명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제자도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생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상도를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도를 따르고 있는가!

 

이 말은 정치와 경제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정치이고, 무엇이 올바른 경제인가에 대해서 반드시 물어야 한다. ‘정치와 경제정의가 올바로 세워지고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제자도의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제자도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제자도를 내 삶의 자리에서부터 실천해야 한다.


제자도 관점에서의 정의는 섬김이다. ,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제자는 섬김의 종이어야 한다. 웨슬리의 주장처럼, 이것이 살아 있으면 그리스도의 교회(하나님 나라)이요,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교회(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종교를 세워 나가고 있는가.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7. 4. 24. 15:30

도마처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20:24-29)


주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어떠한 현실이니이까.

우리가 마주한 근본적인 현실은

부활의 현실인 줄 믿나이다.

도마는 자신이 마주한 부활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의심하였나이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의심이 필요하나이다.

거룩한 실증주의자가 되어

우리의 삶 가운데 발생한

부활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믿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도 도마처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여

이렇게 고백하게 하옵소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24. 15:30

도마가 마주한 현실

(요한복음 20:24-29)


도마(Thomas)는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 헬라어로 쌍둥이는 디두모이다. 도마는 쌍둥이였다. 그런데, 도마는 예수님의 열 두 명의 제자 중 한 명으로서 유명한 성경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때문이다. 도마에게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이다. 우리는 도마를 흔히, ‘의심 많은 도마(doubting Thomas)’라고 부른다.

 

의심 많은 도마는 믿음이 없었던 것처럼 호도되어 왔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흔히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의심신앙의 적(enemy)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의심은 나쁜 것인가? 의심은 죄인가? 의심하면 신앙인도 아닌가? 의심하면 믿음이 없는 것인가?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의 부활기사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처음은 막달라 마리아(부활을 경험한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 있었던 마가복음의 기사와는 달리 요한복음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한다)이고, 다음은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요한 추정)’이고, 그 다음은 안수 첫날 저녁 때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몸을 숨긴 곳으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 그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도마가 동료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시 왔을 때,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가 주(예수님)를 보았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도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의 의심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는 그저 나도 너희들처럼 예수를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의심한다.

 

도마의 의심이 있은 후 여드레(8)가 지나 그의 의심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마침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신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그리고 난 후의 도마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제가 제 손가락을 주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넣어 보았으니, 이제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도마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성경은 이 후의 도마의 행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에 생성된 문헌이나 전설을 보면 도마가 그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 준다.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은 짧게 나오나, 기독교 전통에서 마리아 복음서가 생길 정도인 것을 보면 그가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도마복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도마가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도마복음서)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여 인도의 마라폴이라는 곳에 묻혔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인도가 힌두교나 불교가 강한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인도의 기독교는 아주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도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매우 독특한데,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긴 세월(기독교 태동과 역사를 같이 하는)을 보내며 주변 종교(힌두교나 불교)와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대학마다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강의가 있다. 하버드에서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가 유명하여 얼마전 유명세를 탄 일이 있고, 예일대에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철학적 죽음)’에 대한 강의를 한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이 유명하다. 내가 한국에서 다닌 학교에서는 한태동 교수의 강의가 학생들에게 가장 큰 인가를 누렸는데, 그 이유는 이 분이 박사학위가 네 개나 있는 데다가, A 폭격기로 소문 나 있었고, 금요일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라고 수업을 안 하고, 비 오는 날은 비(아닐 비) 온다고 수업을 안 해서 그랬다.

 

에모리대학교에서 신학 공부할 때, 그곳에도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던 강의가 있었다. 토마스 탕가라지 교수의 <Image of Christ>라는 수업이었다. 조기 등록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강의였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에서도 살짝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인도 출신 신학자였는데, 다름아닌,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복음을 전한 인도의 마을 출신이었다. 그분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인도의 전통 악기를 연주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선율이 귀에 선하다.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매우 독특하고 우주처럼 넓고 깊었으며, 그것을 통해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가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도마는 실증주의자이다. 그의 의심은 믿음 없는 의심’, ‘냉소적인 의심이 아니라, 마주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더 잘 믿기 위한 거짓 없는 신앙, 진실한 신앙의 자세였다는 것이다. 일찍이 회의(의심)’는 철학에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적 방법으로 인식되어 왔다. ‘회의의 방법을 써서 상대방이 진리에 도달하게 도운 대표적인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이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다는 이 말, ‘그노티 세아우톤(너 자신을 알라)’이라는 말도 결국 그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질문)’을 가지라는 뜻이다.

 

의심(회의, 질문)을 통해 자신이 마주한 현실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인생의 현실에 파묻혀 의심하는 것을 잊고 산다. 괜찮지 않은데 왜 괜찮다고 현실을 외면 하는가. 문제가 있는데 왜 문제가 없는 듯 태연하게 있는가. 아픈데 왜 안 아픈 것처럼 있는가. 믿어지지 않는데 왜 믿는 척하는가. 그러니까, 불의한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고,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 채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 <미운 오리새끼>라는 것이 있다. 그 동화를 보면, 오리의 무리 중에 유독 미움을 받는 오리 한 마리가 있다. 그 오리는 하도 미움을 받아서 절망에 빠진다. 그래서 미운 오리새끼.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을 우아하게 날고 있는 백조를 본다. 그것을 보며, ‘나도 저렇게 날았으면 좋겠다고 미운 오리새끼는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미운 오리새끼는 성장했고, 어느 날 호숫가에서 백조 한 마리를 만난다. 그 백조는 미운 오리새끼에게 엄청난 사실을 알려 준다. ‘너는 오리가 아니라 백조야!’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미운 오리새끼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의심(회의, 질문)’해보지 않았다. ‘나는 누구일까?’ 그런데, ‘의심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난 후, 미운 오리새끼는 더 이상 미움 받는 오리가 아니라, 하늘을 우아하게 나는 백조가 되었다.

 

도마가 마주한 현실은 부활의 현실이었다.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대개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 반응은 세 가지이다. 1)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주변을 안 보거나, 2) 꿩처럼 두려워서 고개만 파묻고 있거나, 3)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술이나 마약 같은 것에 의존한다.

 

그러나, 도마가 보인 반응은 마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주한 현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진실과 진리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을 잃어 버린 자는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마는 부활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파악하여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지 올바로 깨닫고, 그 현실에 순종하여 이교도의 땅에 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다.

 

여러분이 마주한 현실은 무엇인가? 부활의 현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여기에 와 있고, 몸의 부활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이 선포 앞에서, 이 현실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교육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준비시켜, 현실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마주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 현실을 잘 뚫고 나갈 수 있도록 이런 저런 것을 대비시켜 주면서 살고 있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살 수 없는 현실이 왔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배우도록 독려하고, 대학교를 나오는 것이, 그것도 이왕이면 좋은 대학을 나오면 현실을 더 잘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이제, 세상은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제 4차 산업 혁명 시기로 들어섰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도마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우리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에 대하여 도마처럼 의심(회의, 질문)’을 품고 있는가? 그 부활의 현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수용하기 위하여, 도마처럼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도마처럼, 우리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에 대하여 의심(회의, 질문)’을 통해 진실과 진리를 깨닫게 되면, 우리의 입술에서도 도마와 같은 고백이 동일하게 나올 거라는 것이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현실이 아니라, 바로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고 그것을 깨달아, 진실이요 진리인, 부활의 삶, 하나님의 나라, 몸의 부활을 나의 삶의 현실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 우리도 도마처럼 우리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에 대하여 의문(회의, 질문)’을 가져보자. 거룩한 실증주의자가 되어 손가락을 주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넣어보자. 그리고, ‘부활의 현실을 참으로 믿는 자가 되어보자.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진리요 길이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도마처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어떠한 현실이니이까.

우리가 마주한 근본적인 현실은

부활의 현실인 줄 믿나이다.

도마는 자신이 마주한 부활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의심하였나이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의심이 필요하나이다.

거룩한 실증주의자가 되어

우리의 삶 가운데 발생한

부활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믿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도 도마처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여

이렇게 고백하게 하옵소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24. 15:27

성령님, 예수님, 그리고 우리들

(마가복음 1:9-20)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시험에 대한 마가복음의 기록은 매우 간략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시험에 대한 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것들이다 (특별히 마태).

 

마가복음의 이야기 흐름을 보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신앙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매우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으로부터 복음서는 시작한다. 마가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해, ‘오실 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오실 이를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고 나서, 예언된 그 오실 이가 실제로 등장한다.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다. 그가 바로 그 오실 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그가 세례 받을 때 하하늘부터 들려온 음성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음성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드러낸다. 그는 곧하나님의 아들이다.

 

런 후, 이야기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 받은 나사렛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서 구원을 곧바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로 이끌려 시험을 받는다.

 

그가 받은 시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을 떠올리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여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나머지 이스라엘은 모두 출애굽 2세대들이다. 1세대들은 여호와께 불순종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과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고, 천사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사탄을 흔히 나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통 사탄을 표현할 때 뿔 달린 흉측한 모습으로 그린다. 사탄이 하는 기본적인 일은 시험하는 일이다. 욥기서에 나오는 사탄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은 기소하는 일을 한다. , 어떠한 존재의 의로움을 달아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사탄의 기소에 안 넘어갈 사람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때문이다.

 

사실 사탄의 기소를 통해 공격당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기소에 맞서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것보다는, 그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며 그 시험을 이기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마가는 그것을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험 당할 때 실패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험 당할 때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애굽을 바라보았다. 애굽으로 돌아가면 시험에서 벗어날 줄로 잘못 생각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시험 당할 때, 우리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일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험 당할 때,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는 것이 필요하다.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통과하신 예수님은 이제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 복음을 전하며, 제자를 세우시고, 세상의 악(더러운 귀신)과 싸우신다. 이 일련의 이양기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은 우연히, 어쩌다 오신 것이 아니라, 예언에 의해서 오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예언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것을 예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한 자기 인식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제자도의 퀄러티를 가르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 실수로 낳은 자식과 예언, 또는 예정된 자식을 대하는 자세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그 자식이 부모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보자. “너는 실수로 낳은 자식이야! 너는 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 자식의 자존감을 무너질 수밖에 없고, ‘자기 인식에 대한 왜곡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이가 부모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생각해 보자. “너는 예언된 자식이야. 너는 예정된 자식이야. 너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야.”

 

성경에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예가 존재한다. 하나는 가룟 유다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 요한이다. 유월절 만찬 때 예수님은 제자 중 하나가 자기를 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를 일컬어 이렇게 평가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6:24).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가 결국 목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27:3-10).

 

그러나,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그가 하나님의 예언과 예정가운데 태어난 것에 대하여 찬송을 지을 정로도 기뻐했다 ( 1:67-79). 그 찬송 다음에 나오는 세례 요한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1:80).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부르셨다는 자기 인식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퀄러티를 다르게 한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렀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고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믿으시는가?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 세례를 받고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광야에 나가서 시험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0),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1).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의해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여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악과 싸우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우리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된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도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어떠한 일도 감당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어떤가? 성령의 충만함 없이 어떠한 일을 하면, 사탄에게 기소 당하기 딱 쉽다. 거기에는 육신의 일이 가득하게 되어, 우리의 죄된 본성이 드러나게 될 뿐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가룟 유다를 보라. 성령의 충만함 없이 그가 저지를 일을 보라. 그리고, 저지른 후에 그가 행한 처신을 보라. 사악함과 죽음만이 넘쳐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이 가득한 상태에서 행하는 일에는 당연히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일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 충만함을 받았는가?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든 성령 충만함 가운데 행하고 있는가? 무슨 일을 행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들짐승과 함께 있는 적막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천사가 거들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성령 충만함 가운데 머물게 된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때 우리는 담대한 마음으로 나아가 성령의 열매 가득 맺히는 일들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8. 11:36

오늘날 우리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마가복음 16:1-8

(부활주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옛날 사람들은 적어도 일년에 두 번은 교회에 갔다. 그것이 언제인가? 부활절과 성탄절이다. 부활절에는 계란을 줘서 갔고, 성탄절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줘서 갔다. 요즘 사람들은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교회를 가는 게 아니라, 결혼식과 장례식이 있을 때 교회에 간다. 웃픈 현실이다.

 

부활절이 중요할까, 성탄절이 중요할까? 부활절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아예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부활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 아파트에서 지난 주에 부활절 이벤트가 있었다. 그런데, 광고를 보니, 부활절 이벤트를 하면서 특별 손님이 방문한다고 되어 있었다. 누군가 봤더니, Easter Bunny였다. 상업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종교성을 퇴색시키고 그것을 상품화한다는 것이다. 성탄절이 상품화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는 것은 아기 예수가 아니라, 산타 클로스이다. 부활절에 우리에게 오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 아니라, Easter Bunny. 이러한 상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 오는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가 될 수 밖에 없다.

 

성금요일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은 예수의 죽은 시체를 무덤에 장사 지내는 것이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예수가 무덤으로 옮겨지고, 예수가 장사된 것을 확인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안식 후 첫날, 향품을 들고 예수님의 장사된 무덤을 처음 찾은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이다.

 

성경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훌륭한 제자였던 것 같다. 그녀는 예수님이 처형될 때 그 자리에 있었고, 예수님의 장례식에도 함께 했고,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기도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곁에는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수많은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불후의 명작 <지저스 크라스이스 슈퍼스타>의 여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거기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이러한 유명한 노래를 부른다. “I don't know how to love him. What to do, how to move him.” 10여년 전 전세계를 강타했던 <다빈치 코드>라는 책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인으로 등장한다. 그 책에는 그녀가 예수님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고, 그 자손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게다가, 성경(정경)에 포함되지 않는 외경에 보면, ‘마리아 복음서라는 것이 있다. 거기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최고의 제자 자리를 놓아두고 사도 베드로와 대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과 관련된 이런 저런 이야기에 막달마 마리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던, 훌륭한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무엇이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하게 만들었을까?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는 내 인생 가운데 예수님과 관련된 어떠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가? 예수님 때문에, 내 삶의 어떠한 부분이 극적으로 바뀌었는가? 예수님 때문에 내 삶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 있는가? 예수님 때문에 포기하게 된 어떠한 것이 있는가? 그분 때문에 내 삶에 행복이 왔는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기대하지 않았던(못했던) 어떠한 신비로운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때는 고등학교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러 가던 날 아침, 몇몇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아버지의 기도를 받고, 우리 아버지가 태워주시는 차를 타고 시험 함께 갔다(상문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봤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친구는 나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당연히 떨어질 거야라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결과가 나왔을 때, 그 친구는 기쁜 얼굴로 나에게 와서 고등학교 시험에 붙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기를 자기가 시험에 붙은 이유는 딱 한 가지라고 했다. “나 답안지 밀려 썼다. 그래서 붙었다!” 그리고 나서, 그 친구가 해 준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너네 아버지가 기도해 주실 때, 정말 마음이 이상하더라. 그리고, 나한테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어. 그래서 내가 답안지를 밀려 쓴 것 같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 때문에 내 친구는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했고, 나와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다.

 

동일한 일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죽은 시체가 무덤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체에 바르는 향료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덤을 막고 있었던 큰 돌은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 들어가자, 무덤 안에 앉아 있는 흰 옷을 입은 청년(천사)을 보았다. 그 청년이 무덤에 온 여자들에게 말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이 이야기를 들은 여자들은 놀라서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다. 그리고 그들은 무서워서 누구에게도 아무 말 못했다. 왜냐하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기대치 못한 일을 당하면 할 말을 잃는 법이다.

 

무덤은 비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부활이라고 부른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 세워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한 일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이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옳은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갈망했고,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자기의 몸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이 세상의 죄 때문에 불의하게, 그리고 불쌍하게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내어 놓았다.

 

오늘 우리도 성경을 통해 빈무덤을 본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못 믿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된 것을 간접적으로 들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러분이 다리에서 주워 온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How do you know that you are not a child picked up under the bridge? 이것은 한국의 조크인데, 영어회중이 이해할지 모르겠다. 만약 무슨 말인지 잘 모르면 부모님께 물어보라. 나 다리에서 주워왔어?) 여러분은 여러분이 엄마 뱃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이 세상에 나올 때 엄마의 자궁을 통해서 나온 것을 보았는가?

 

성경 말씀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경험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서라고 하는 장르를 통해 그 당시 최고의 매체라고 불리는 종이에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비어 있는 무덤을 보았다.

 

그 당시, 빈무덤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 이런저런 변화를 겪었다.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노래한 것처럼, "I've been changed, yes really changed. In these past few days, when I've seen myself, I seem like someone else. 나는 변했어요, 맞아요 정말 변했어요, 최근 며칠간 나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나도 다른 사람처럼 보여요.”, 빈무덤을 경험했을 때, 다른 말로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우리는 그들의 변한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본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빈무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여러분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아무 것도 아닌가? 아니면 무엇인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켰는가? 시간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English Version


What does the resurrection mean to us today?

 (Mark 16:1-8)


1. Even if they did not believe in Jesus, people went to church twice at least a year before. When is it? Easter and Christmas. They went to church on Easter Sunday for an egg, and Christmas for a Christmas present. Nowadays, people do not go to church on Easter or Christmas but go to church when they have weddings and funerals. It is a ridiculous reality.

 

2. Is Easter important, or is Christmas important? Easter is more important. Because, without the resurrection, we would not have known about Jesus. No, we would not have been interested in Jesus at all. Because of the resurrection, we are also interested in the birth of Jesus.

 

3. There was an Easter event in our apartment last week. By the way, when I saw the advertisement, it was said that a special guest was visiting at the Easter event. It was Easter Bunny. The biggest problem of commercialism is to fade religiousness and commercialize it. It has been a long time since Christmas has been commercialized. Coming to us at Christmas is not Baby Jesus, but Santa Claus. Coming to us in Easter is not the Lord of resurrection, but Easter Bunny. The question that comes to our Christians living in this era of commercialization is 'what does resurrection mean to us today?'

 

4. The last event on Good Friday was to burial the dead body of Jesus in the tomb. It was Mary Magdalene and Mary the mother of Joses who confirmed that Jesus was buried by a man named Joseph of Arimathea and that Jesus was buried. By the way, as we read today, the first day after the Sabbath, Mary Magdalene was the first to find the burial place of Jesus with the spices.

 

5. In the Bible, Mary Magdalene seems to have been one of the best disciple of Jesus' disciples. She was there when Jesus was executed, at the funeral of Jesus, and on the first day after the Sabbath, she visited Jesus' grave. In other words, there was always Mary Magdalene by Jesus. So, in Christian history, Mary Magdalene has become the heroine of many legends.

 

6. Typically, Mary Magdalene emerges as the heroine in the immortal classic musical, Jesus Christ Superstars. Mary Magdalene calls these famous songs with the love of Jesus. "I do not know how to love him. What do to, how to move him." In a book called <The Da Vinci Code>, which struck the world more than a decade ago, Mary Magdalene appears as the wife of Jesus. The book contains a statement that she had a daughter with Jesus and that her offspring are still alive.

 

7. Furthermore, among the apocrypha that are not adopted as the Bible, there is also ‘the Gospel of Mary’. There, Mary Magdalene comes to the story of competing with the apostle Peter for the position of Jesus' best disciple. It is evident that she was one of the best disciples who loved Jesus when we see the names of Mary Magdalene in the stories related to Jesus in these various forms. What made her so love Jesus Christ?

 

8. Thinking of Mary Magdalene, who appears in so many stories related to Jesus, we look back on ourselves. What kind of life story do I make about Jesus Christ? What part of my life has changed dramatically because of Jesus? Is there something that has been changed because of him? Have you given up on something because of Him? Has happiness come to my life because of Him? To me, what does the resurrected Jesus Christ mean?

 

9. Have you ever experienced mysterious things beyond expectations? When I went to high school, I had to take the exam to go to high school. It was not easy for us to go into a high school then. On the morning of my high school entrance exam, a few of my friends came to my house and got my father's prayer and went to a school (Sang-mun High School) where we took the admission test by my father's ride.  By the way, among them, there was a friend who thought, "Of course, I will fall out of high school entrance examination." When we took the test and the results came out, he was so happy that he came to me and told me that he passed the high school exam. He told me that there was only one reason why he went to the high school entrance exam. "All answers were pushed in writing, so I passed the exam. Then, what the friend told me is still unforgettable. "Your father prayed on the morning of the test, and I was really feeling different. Then, I believe what a mysterious thing seemed to happen. By the way, that was why all answers were pushed in writing." Because of the unexpected thing, my friend passed the exam and went to high school with me.

 

10. The same thing happened in the text we read today. They naturally thought that the dead body of Jesus would be in the grave. So they went to the grave with spices to the body. By the way, an amazing thing happened. The large stone that was blocking the grave had moved, and when they got inside, they saw a young man (angel) in a white dress sitting. He said to the women who came into the grave. "Do not be alarmed. You are looking for Jesus of Nazareth, who was crucified. He has risen! He is not here."

 

11. The women who heard these words were amazed and fled from the grave. And they were terrified and could not tell something to anyone. It was because something unexpected happened. It is a way of losing a word when one meets unexpected event.

 

12. The grave was empty. That means Jesus was raised. In Christianity, this is called the Resurrection. 'Resurrection' does not mean simply that the life is back from death, but 'raised up again by God'. This means that God has justified what Jesus did. This means that the way of the cross that he has walked is the righteous thing that God wanted.

 

13. Something changed happened to those who met Jesus Christ who walked in the right path God recognized. They longed for the justice of the kingdom of God like Jesus, and loved their neighbors just as Jesus did. They did not consider their own bodies theirs like Jesus, but gave up their bodies for many who died unjustly and poorly because of the sins of the world.

 

14. We also see an empty tomb today through the Bible. You do not believe it because you did not see it with your eyes? The person who says it is deceiving himself/herself. Most of what we currently know is not what we have seen. They are all indirectly heard of what was discovered by someone. How do you know that you are not a child picked up under the bridge? Did you see yourself in your mother's womb and when you came to the world through your mother's womb?

 

15. The Word of the Bible is a testimony to the experience of what has happened, not a fictitious story. The disciples who followed Jesus experienced the resurrection of Jesus. So they recorded what they saw and heard in a form of a literary genre called the Gospel on paper, the best medium of the time. They obviously saw the empty grave.

 

16. At that time, people who had seen the empty grave experienced some kind of change in their lives. As, in the Jesus Christ Superstars, Mary Magdalene said, "I've been changed, yes really changed. In these past few days, when I've seen myself, I seem like someone else. I have changed, it is true, it has changed. When I look back at myself for the past few days, I look like someone else.", when they experienced the empty grave, or, after meeting the resurrected Jesus, they had changed someone else. We see their change in the Bible, Acts.

 

17. I want to ask you. What does 'the Empty Tomb' mean to us today? Today, what does the resurrection mean to us? Is it nothing? Or what? How did the resurrection of Jesus change your life? I hope that you will have time to meditate deeply 'the resurrection of Jesus' on your own life.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