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23. 09:04

나는 걷는다

(창세기 5:21-24)

 

나는 다시 길을 떠났고, 조금 가다가 멈춰서 휴식을 취했다.

눈을 들어보니, 거북이 한 마리가 비탈길

위쪽에서 둥그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친구여. 미리 말해두지만,

난 너와 경주하지는 않을 거야.

-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중에서

 

오늘 말씀은 아담의 계보(족보)를 말하는 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담의 계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을 파악하려면 창세기 4장의 내용을 언급해야 한다.

 

창세기 4장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얻은 그의 자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죄가 들어온 후, 아담, 즉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해졌는지 알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인정 받기 위해 사람은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고단한 삶을 살았는데 인정 받지 못하면 사람의 마음은 악해진다. 독일의 대 철학자 헤겔은 일찍이 이러한 삶의 모습을 인정투쟁이라고 명명했다. 헤겔은 인간들 사이의 모든 갈등이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인정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고 봤다.

 

그런 측면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가인은 인정투쟁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 아벨을 죽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인정투쟁이 매우 나쁜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이며 그의 뒤를 이어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끌고 있는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을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자기 긍정의 좋은 심리적 조건으로 본다.


가인과 아벨 사건 이후, 가인은 저주 받고 추방당해 떠돌이(나그네)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새겨진 주홍글씨였다. 형별의 가혹함을 호소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배로 복수를 당할 것이다는 표식을 주신다. 그리고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게 된다.

 

창세기 416절 이하의 말씀은 가인이 놋 땅에서 꾸린 가정 이야기가 나온다. 가인은 결혼하여 애를 낳는데, 에녹이라 칭하고, 성을 쌓은 후 아들의 이름을 붙여 에녹 성이라 부른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에녹과 다른 인물이다. ‘에녹의 뜻은 시작하는 자, 봉헌된 자이다.

 

가인의 족보는 우울한 이야기로 끝난다. 가인의 6대손 라멕의 악하고 음란하며 잔인한 삶이 펼쳐진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4:23-24).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떠나보낸 후 세번 째 자식을 낳는 이야기이다. 아담의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은 이다. 셋째 아들이어서 이 아니다. 히브리어의 ‘Seth’를 우리 말로 옮긴 것이다. 그 이름의 뜻은 임명하다이다. 그리고 은 에노스를 낳는데, 에노스 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부른다.

 

5장에서 시작되는 아담의 계보에는 가인과 아벨의 이름이 빠져 있다. 이것이 5장에 등장하는 아담의 계보의 첫 번째 특징이다. 앞서 보았듯이, ‘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씨인데, 아담의 계보는 아담에서 곧바로 으로 건너 뛴다. ‘다른 씨를 통해서 다른 세상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그리고 아담의 계보의 또다른 특징은 일정한 패턴으로 계보가 소개된다는 것이다. 그 패턴을 이루는 동사가 세 개 있다. “낳았다.”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이다. 특히, “죽었더라는 말은 217절에서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아담의 계보에서 이 패턴이 깨지는 부분이 있다. 그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에녹의 삶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낳고, 사는 부분까지는 같다. 그러나 죽었다는 부분이 다르다. 에녹에게는 죽었다는 표현 대신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이 쓰인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두 명을 말할 때, 에녹과 엘리야를 꼽는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 곳은 해당 인물이 등장하는 성경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히브리서이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11:5).

 

이것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인가? 아니면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우리가 만일 호사가들이라면 여기에 관심을 두겠지만, 우리는 믿는 자들이기에 우리의 관심은 다른 데 있어야 한다. 창세기 기자는 왜 에녹에게 죽었다는 표현 대신에 다른 표현을 써서 그의 마지막을 말하고 있는가?

 

아담의 계보 중, 에녹에 이르러 시선을 머물게 되는 표현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이다. 우리 말로는 동행이라고 옮겼지만, 영어 성경은 히브리어 할라크의 본 뜻을 그대로 옮겨, ‘Enoch walked with God’이라고 쓴다. 히브리어 할라크는 구약성경에서 무려 1,562번이나 나온다.

 

할라크는 기본적으로 걷다, 가다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할라크는 어떤 말과 함께 쓰이느냐 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하게 변하는 동사이다. 그런데, 특별히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아담의 계보가 나오기 전 이야기와 비교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뜻이다. ‘함께 걷는다는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함께 걷다는 굉장히 신앙적인 표현이다.

 

어린시절(학창시절)을 생각해 보면 참 많이 걸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말죽거리에 있는 언주초등학교(5학년 2학기 때 양재초등학교가 생겨서 그곳으로 집단 전학을 가서 양재초등학교를 1회로 졸었했다.)를 다녔는데, 그때는 차비로 오락을 하거나 떡볶이나 순대 같은 거 사 먹고 말죽거리에서 우면동 집까지 걸어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니까 집까지 걸어가려면 족히 1시간 30분 정도는 걸어야 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친구들과 강남역에서 놀다가 집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수도 없이 걸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힘들거나 시간이 길다고 느끼지 못했다.

 

목적이 같지 않거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함께 걸을 수 없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거니셨다는 말이 나온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실 때를 표현하는 말로 할라크를 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오신다. 그런데, 창세기 3장과 4장의 이야기를 보면 오시는 하나님을 나가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고, 모두들 자기들이 가고 싶은 데로 가는 이야기들만 나온다.

 

아담은 하나님이 오셨는데, 심지어 숨는다. 가인은 하나님이 오셨는데,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그리고 가인은 하나님과 동행하기는커녕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산다. 그의 6대손 라멕은 아예 대놓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악한 짓만 일삼는다.

 

그러는 중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 이것만큼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아담의 계보이후 나오는 이야기도 모두 사람들의 죄악이 얼마나 세상이 뿌리 깊게 퍼져나갔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노아 때에 가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의인이라고 소개된다.

 

실제로, ‘걷는 행위는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다. 고속도로를 한 번 걸어본 적 있는가? 걸어가면 빠르게 지나가며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인다. 차 안은 안락하고 편리하지만 걸어서 가는 고속도로는 엄청난 소음 때문에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걸으면서 보는 세상과 무언가를 타고 빠르게 지나며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가장 해 보고 싶은 것이 아이들과 함께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이다. 서두에 소개했던 <나는 걷는다>의 기행문을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비행청소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목적으로 쇠이유(Seuil)’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그들과 함께 걷는 것을 통해 인생을 알아가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 책에는 이런 말도 등장한다. “존재 자체가 일종의 행군 아니던가.”

 

위에서 나는 함께 걷는다는 말이 굉장히 시적이고 신앙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몇 마디의 말로 정의 내리기 보다는 그냥 각자의 상상력에 맡겨 두는 게 훨씬 풍요로울 거라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우리는 실제로 너무 걷지 않는다. 운동 삼아 약간 걸을 뿐, 어떠한 것을 하기 위하여, 어떠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하여 걷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우리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깨닫지 못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만약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러 오기 위해서 30분이든 1시간이든 걸어서 왔다면, 바로 이 시간 이렇게 예배 드리며 하나님 만나는 시간이, 그리고 이 예배를 함께 드리는 지체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다가오겠는가!

 

하나님과 함께 걸으시라. ‘걷는다는 것이 주는 풍성한 의미 안에 머무시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의 삶은 풍성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의 삶은 죽음을 맛 볼 겨를이 없다. 하나님은 분명 에녹처럼 그를 데려가시기 때문이다. 천국은 어느 찬양에서처럼 구원 열차타고 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해서, 즉 주님과 걸어서 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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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7. 2. 22. 07:51

희망

 

내 잘못이구나

형벌이 내리겠구나

긴 고통의 시간을 지나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해야겠구나

멀미같이 시간을 앓겠구나*

기억의 지층이 두꺼워지겠구나

넋이 처용처럼 춤추겠구나

운명에 고인 고름이 터지겠구나

주어 담지 못하니 그냥 흘러가겠구나


* 박경리의 [사마천]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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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13. 17:13

가까운 말씀

(신명기 30:11-20)

 

내가 살던 조지아 컬럼버스 근처에는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생가가 있다. 언젠가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프로그램의 하나로 아이들과 함께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거기에 가면 한 가지 생각 밖에 안 든다. “정말 개천에서 용났네.”

 

거기는 아직까지 시골이다. 지미 카터 생가를 가면 그의 삶에 대하여 여러 가지 장식과 스토리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의 학창시절에 관한 것이다.

 

우선, 교장은 학생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강조했다고 한다. 그 교장의 이름은 Julia Coleman인데, 그는 이런 말을 했단다. “Readers make Leaders.” 굉장히 훌륭한 표현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뭐 이 정도의 뜻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학생들에게 한 말 중 지미 카터를감동시켰다는 말이 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Always do your best, someday one of you may grow up to become president.” ‘언제든지 최선을 다해라, 그러면 언젠가 너희 중 누군가는 자라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의 뜻이다.

 

나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머리가했다. 내 일찍이 미국에 살면서 한국의 많은 문화가 얼마나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인가를 깨달았는데, ‘장래 희망: 대통령이라는 것까지수입된문화였는지를 몰랐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어린 시절, 그네들의 장래 희망은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정서가 한국 땅으로 건너왔고, 1948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한 이래로 대통령이 뽑혔고,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제일의 장래 희망은 그때부터대통령이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우리는 초등학생 시절 (1970, 1980년대)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에 단연 위인전기가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위인처럼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때 어떠한 위인에게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가장 좋았고, 커서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처럼, ‘아버지가 된 것에 대하여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목회하고 있는 것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아버지처럼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게 꿈이고, 아버지처럼 사랑의 목회자가 되고 싶은 게 꿈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셨던 말씀이나, 또는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행동이나 모습을 떠올리면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다. 누구든지,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기억에 남고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러한 영향력을 끼치던 훌륭한 인물, 영도자가 있다. 그가 바로 모세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인물이 두 명 있다. 한 명은 모세이고, 다른 한 명은 다윗이다. 이 둘 중에서, 모세에게 훨씬 더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에서 간접적으로 모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뿐 만이 아니다. 신약에서 모세는 예수님과 비교되는 인물로 등장한다. 마태복음 같은 곳에서는 예수가 누구냐를 논증할 때 모세를 들어서 비교한다. 이는 모세에게 익숙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어떠한 인물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함이다. 모세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도자인 것처럼, 예수는 죄(죽음)의 종살이에서 인류을 구원한 영도자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가 궁극적인 구원자라는 뜻이다. 아마도, 2천 년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와 예수를 비교한 복음서를 마음 깊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 생명보다 사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 당부의 말씀을 전한다. 상상컨데, 전하는 자의 마음도 절절했고, 듣는 자의 마음도 절절했을 것이다. 사실, 말씀은 이렇게 선포되고 받아야 한다. 절절한 마음으로 전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서 생명을 꽃 피우게 된다.

 

모세가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제 곧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모세는 두 가지 삶이 있다고 말한다. “생명과 복의 삶, 그리고 사망과 화의 삶. 이 둘 중, 어느 삶을 살고 싶으신가? 당연히 생명과 복의 삶이다. ‘사망과 화의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지금 모세는 이 두 가지 삶 중에서 너희가살고 싶은 삶을 택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생명과 복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절절한 마음으로 그 삶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실, 모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생명과 복을 주기 위하여 애쓴 것 밖에 없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든 말씀은 이스라엘이 생명과 복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전부이다.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생명과 복을 얻기 위한 삶의 가르침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핵심 말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말씀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16절 전반부). 그러면 생명과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여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라”(16절 후반부).

 

이 말씀은 이미 신명기의 핵심 말씀이라고 하는 64절에서도 나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토요일 새벽기도회 때 함께 나누는)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 또는 그들의 아버지, 그들의 지도자(영도자) 모세가 절절히 전해준 말씀을 어떻게 지키고 순종하여 생명과 복을 얻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계속 들여다 봤지만, 거기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씀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전쟁을 수행하고, 땅을 분배한다. 여기에서 벗어난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게 바로, 아이성 전투다. 말씀에서 벗어나 행동한 아간때문에 온 이스라엘에게 사망과 화가 미쳤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교훈 삼아, 이전보다 더욱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수행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다.

 

모세는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의 율법(명령)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하늘에 있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가서 가져와야 할 것도 아니고, 바다에 있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우리에게 가져와야 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에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담긴 말씀이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4).

 

어떠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 또는 바다처럼 멀리에 있는가? 아니면 입과 마음처럼 가까운 곳에 있는가? 모세의 이 당부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우리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모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입에 그리고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신영복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깝게 있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입과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뜻은 바로 이런 것이다.

 

중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한다. 한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다, 남자가 직장 때문에 멀리 떠났다고 한다. 그 둘은 서로의 애달픈 마음을 전하고자 매일매일 서로가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서로의 편지를 매일같이 전해주던 우체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총각이었다. 결국, 이 여인은 누구와 결혼했는지 아는가? 멀리 떠난 애인이 아니라, 매일 본 우체부 총각과 결혼했다고 한다.

 

가까움이란 이런 것이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저 하늘에 있는가? 저 바다에 있는가? 아니면, 여러분 가까이, 입과 마음에 있는가? 그 말씀을 매일 같이 만나는가?

 

매일, 가까이 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분 말마따나, 우리들, 얼마나 서로 자주 보는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보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본다. (이곳에 이사 와서, 뉴비전에 있는 내 친구는 두 번밖에 못 봤다.) 남들이 보면, 이런 말 할 정도다. ‘니네 사귀냐?’ 그렇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다. 누구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사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귐이라고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라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만나서 무슨 일을 하는가? 교회는 뭐 하는 곳인가? 싸우는 일? 미워하는 일? 먹는 일? 아니다. 교회는 사랑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는 모여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모여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려고 모인 것이다.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아시나 모르겠어요!)

 

나는 부교역자를 맞을 때 한 가지만 당부한다. ‘맡은 일 열심히 해주세요!’ 이런 말 안 한다. ‘전도사님, 저를 사랑해 주세요. 교회를 사랑해 주세요!’ 저도 전도사님을 사랑할게요!’

 

성경에서 모세를 보니까, 무슨 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한 사람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니까 무슨 일을 하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한 분이다. 그렇다 보니, 모세는 출애굽 역사를 이룬 것이고, 그렇다 보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출애굽 역사, 십자가, 그것은 사랑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말씀이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는 것,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 그래서 생명과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은 뜻과 맘과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게 되는 데, 이것이 교회의 어떠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모은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먼저 세상을 떠난 가룟 유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새로운 사도 한 명을 뽑는 이야기가 나온다. 두 명이 후보에 오르는데, 한 명은 요셉(유스도)이고 다른 한 명은 맛디아였다. 그들은 기도했고, 제비를 뽑았는데, 맛디아가 뽑혔다. 이들은 이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안 뽑힌 요셉이 기분 나빠서 깽판을 치거나, 요셉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기분 나빠서 깽판을 친 일이 없다. 왜 그랬을까? 맛디아가 뽑힌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사랑이다. 우리도 우리가 얼마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주님의 제자들인지 오늘 회의를 통해서 보여주자.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복을 더해 주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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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사건, 갈등, 그리고 성장

 

나는 군대에서 장군 운전병을 했다 (육군본부 작전처장). 최상위 부대에서 최고 고위급 인사를 모시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 여지껏 잊혀지지 않는, 목회에도 큰 도움이 되는 교훈이 있다.

 

모시는 분의 보직 상 장거리 운행이 잦았다. 장거리 운행을 하기 전에 운전병이 꼭 해야 할 일은 정비대에서 차량을 점검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거리 운행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차량 정비를 받지 못한 적이 있다. 게다가 얼마전 차량 정비를 받았던 터라 별 문제 없겠거니 생각했다.

 

그때가 여름 가까웠던 것 같다. 사건은 그때 터졌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하고 있는데, 천안 쯤에서 갑자기 차가 서 버린 것이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일이 벌어지자 장군은 나에게 차량 점검 여부부터 물었다. 점검을 못 받았다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러면서 수송대에 전화해 빨리 일처리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이후의 사건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시간이 많이 흘러 정확하게 기억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때 견인차에 끌려 이동 도중 차 안에서 장군이 나에게 했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장군 그 때 나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사건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진 후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그러니, 앞으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조속히, 그리고 잘 수습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라."

 

인생을 더 살아보니, 그리고 적지 않은 세월 목회를 해 보니 그때 장군의 교훈이 얼마나 지혜로운 것인지 알겠다. 사건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터진다. 갈등은 우리의 뜻과는 반대로 발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은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사건과 갈등이 있어야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빈공간, 또는 어긋난 공간을 매울 수 있는 기회도 온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는다. 괴로운 일이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사건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사람의 인격과 자질은 바로 그곳에서 드러난다. 사건과 갈등을 통해 더 나은 인간관계, 공동체를 만드느냐, 아니면 사건과 갈등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자질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살다보면 원치않는 사건과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사건과 갈등을 습관적으로 만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건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무책임하게 회피하거나, 사건과 갈등을 통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 또한 매우 큰 문제이다. 아픔 없이 성장하는 생명은 없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10. 17:16

장자의 명분과 복

(창세기 28:10-22)

 

(퀴즈: 야곱 이야기는 창세기 몇 장부터 시작되는가? 쉽게 외우는 방법은?) 창세기는 네 명의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의 50장 중 반은 아브라함 이야기, 반은 야곱 이야기이다(야곱 이야기는 그래서 창세기 25장부터 시작된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 이론에 따르면,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이야기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비범한 탄생, 갈등, 떠남, 성장, 되돌아옴. 야곱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화적 영웅의 서사 구조를 담고 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탄생은 범상치 않았다. 그의 태생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이 말씀을 듣고 태어난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야곱이 된 것이다. (발꿈치를 잡았다.)

 

에서와 야곱의 성장과정을 보면, 성향 상 우두머리(장자)는 에서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 에서는 장성해서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성격이어서 그냥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일을 했다. 아버지 이삭은 장자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유약해 보이는 야곱을 사랑했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보이지 않게 시작된다. 하루는 사냥에서 집으로 돌아온 에서가 너무 배가 고파서 야곱의 떡과 팥죽을 요구한다. 야곱은 평소에 자신이 쌍둥이 동생으로서 장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야곱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만든 떡과 밭죽을 에서의 장자권을 사는 데 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25:32). 그리고, 이어지는 진술은 이렇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5:34).

(우리는 인동 장씨인데, 우리 집에는 족보가 없다. 할머니께서 백령도에서 피난 나오시면서 가지고 다니기 힘들다시며 족보 없는 이에게 파셨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사회 시간에 족보 조사해 오는 숙제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우리는 그냥 인동 장씨, 예수파로 써가라 하셔서 그렇게 숙제를 해 간 적이 있다.)

 

그 이후에, 에서와 야곱의 삶을 보면,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2634절과 35절 두 절에 에서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데, 참 안타까운 장면이 나온다. 에서는 이방인 아내들을 맞이한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이것이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을 성경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26:34-35).

 

에서의 이방인 아내들이 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을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당연히, 에서의 이방인 아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을 것이고, 자신들이 섬기던 신을 그대로 섬겼을 것이다. 가정에서 신앙적인 충돌이 일어났을 것이다.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갈등이 증폭된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죽을 날을 얼마 안 놓아두고 마지막으로 축복을 해주려 한다. 이 축복은 일반 축복과 달리, ‘유언이고 상속이다. 요즘도 부모가 죽기 전에 유언과 상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싸움 하는 집안이 심심치 않게 있다. 부모에게 를 더 많이 물려 받기 위해서 자녀들이 경쟁한다. 그래서 노인들 사이에서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자식들에게 먼저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고 한다. 그래야 자식들이 끝까지 잘한다고 한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도 아버지의 축복을 두고 경쟁이 벌어진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승자는 야곱이었다. 야곱은 변장을 하여, 형 에서에게 내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다. 아버지 이삭이 내린 축복은 이것이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만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7-29).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는 물질과 명예와 형통의 복이 이 말씀에 다 들어 있다. 자녀들에게 물질을 직접 주지 말고 (줘 받자 탕진하거나 싸움 할 가능성이 크다), 날마다 이 말씀을 주면 좋다. 인간은 복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라고 베푼 것이 나중에 큰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심으로 변질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야말로 복이 된다. (오늘 밤, 자녀들에게 이 복을 빌어주고 주무시라.)

 

기회를 놓친 에서에게는 이런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27:39-40). 참으로 안타까운 축복이다. 에서의 주소는 척박 시 척박 구 척박 동이다. 칼을 믿고 살아야 하고, 아우를 섬기며 살아야 하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는가.

 

이렇게, 에서의 말 대로,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형에게서 두 가지를 빼앗아 간다. 장자의 명분과 복.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나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27:36).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이상하지 않는가? (나만 이상한가?) 야곱이 에서에게서 빼앗은 것은 장자의 명분과 복이다. 장자의 명분과 복은 실물이 아니다. 야곱에 에서에게서 실제로(실물로는)는 빼앗아 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 사건 이후, 더 어려워진 것은 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야곱이다.

 

야곱은 이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다. 고향을 떠나는 일이 쉬운가? 집 떠나면 고생이다. (이민자인 우리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지 않는가?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힘들게 사는가? 서로 위로해 주라. 충청도 사투리로, 고생이 많아유~) 야곱은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만나 적도 없는 하란 땅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다.

 

장자의 명분과 복을 차지한 야곱과 그것을 빼앗긴 에서의 삶이 어떻게 다른 지 보자. 대표적인 예로 결혼 문제를 보라. 이삭은 야곱에게 가나안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 그런지는 위에서 언급했다. 야곱은 아버지의 당부를 지킨다. 그런데, 에서는 지키지 않는다.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에서는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래서 그는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 한다.

 

야곱은 계속 말씀 위에, 복 위에 있고, 에서는 계속 거기서 벗어난다. 결정적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만난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13).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약속은 땅과 자손의 복, 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바로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칭하고, 거기에서 제단을 쌓는다. 예배 드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한다. 서원이란 하나님과의 신실한 약속을 말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20-22).

 

위대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극복을 위한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야곱이 장자의 명분과 복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저절로 장자가 되고, 복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자와 복은 소망이고 약속이다. 야곱에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곱의 위대함은 조지프 캠벨의 말 대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킨 것에 있다. 야곱은 원래 장자가 아니었고, 복을 받을 위치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장자와 복에 대한 소망과 약속을 받고, 그것을 이루어 갔다. 차남으로 태어났고, 유약했고, 엄마 치마폭에서만 놀았던 야곱은 성경의 인물 중 가장 입지전적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소망대로 장자와 복을 일구어 낸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야곱이 받았던 약속과 소망을 똑같이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여러 민족, 여러 사람 중에 장자이며, 하나님의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이렇게 주께 나아와 예배 드리는 이유는 야곱처럼 장자의 명분과 복을 믿기 때문이며, 힘들고 어렵지만, 그 약속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멈추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명분과 복이 여러분에게 임한 줄로 믿는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 임한 줄로 믿는다. 약속과 소망의 말씀을 붙들고, 그 약속과 소망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서로 지치지 않게 격려하며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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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6. 13:54

소금과 빛과 의

(마태복음 5:13-20)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백미라고 불린다. 지금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인류의 삶 곳곳에 베어 있어 그 가르침의 놀라움이 많이 퇴색되어 있지만, 그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많이 들어봐서 낯섦이 덜 할 뿐,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례로, 산상수훈의 첫 가르침은 에 관한 것이데,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복 사이에 많은 차이를 보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이다.

 

유교사상 아래 있는 동양국가에는 오복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 장수하는 것, 2) ():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 3) 강령(康寧):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4) 유호덕(攸好德): 도덕 지키기를 좋아하는 것, 5)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하면 대개 두 가지를 꼽는다. 물질적 부와 건강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를 맞아 세배를 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서로 물질적 부와 건강을 빌어주는 덕담을 주고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보면,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행복)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한다. 명예, 자식, 외모가 그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유교사상이나 서양의 헬라철학사상에 얼마나 물들어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요즘 세상에서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같은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보취급 받는다. 요즘 세상은 자신의 행복 또는 성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 대해 인정사정 안 봐주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처럼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아 먹는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묵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한다. 물론 절대자에 대한 기복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소망이 없고 모르는 자는 결코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자는 참된 복,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복을 사모할 수 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키워드는 세 가지이다. “소금, , 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소금, , 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모두 어떤 현실을 가르쳐 주는 메타포이다. 우리는 빛과 소금에 대하여 많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빛과 소금이 무엇을 뜻하는 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는다. 왜 예수님은, 또는 성경의 저자는 소금과 빛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아이텐티티(정체성)를 말하는 것일까?

 

먼저 소금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성경에서 소금에 대한 이야기는 출애굽기와레위기에 처음 등장한다. 우선 각각의 말씀을 보자.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 30:35)”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2:13).

 

출애굽기 30장은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다. 성막(지성소, 성소, 바깥뜰) 중 성소에는 분향단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그때 향을 만들고 그것에소금을 쳐서 성결하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소금은 일차적으로 성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레위기 2장은 5개의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중 소제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소제(Grain Offering)는 곡식을 빻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소제를 드릴 때는 소제물에 다른 첨가물(누룩이나 꿀)을 넣으면 안 되고, 반드시 소금을 넣어야 한다.

 

누룩은 실제보다 부풀리는 데 사용된다. 꿀은 달콤하지만 불에 타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누룩은 자기과시, 과장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꿀은 달콤하지만 시험이 오면 악취를 내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불에 타면 유향처럼 향기를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꼭 이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번제는 일차적으로 죄 사함을 위해 드려지는 제사이다. 그런데, 소제에는 죄 사함의 의미가 없다. 소제는 다른 제사와 더불어 함께 드려지는 게 일반적인데, 왜 그러냐면, 소제는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신실하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제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제에는 다른 무엇이 아닌 소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소금은 불변성, 방부성,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실함(변함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소금 언약이라고 부른다. 소금 언약을 말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은 두 군데이다. 첫째는 민수기 1819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18:19). 둘째는 역대하 135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5).

 

신실함(변함없음)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로, 빛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이 말씀은 이 단어 때문에 굉장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착한 행실이 그것이다. 여기서 착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칼로스인데, 이는 착한 또는 선한이라고 번역한다. 여기서는 착한 행실로 번역했지만, 요한복음 1011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번역한다.

 

착한 또는 선한은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다. , ‘착한 행실은 사람들 보기에 착한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행실을 말한다. 일례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애를 태우신다. 이게 요즘 계산법으로는 안 맞는 수지타산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한 행실이 아니라, ‘멍청한 행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착한 행실이다. ? 한 사람이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한 생명쯤은 헌신짝처럼 보는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마음이다.

 

세상의 이 된다는 것은 남들(사람들) 보기에 착한 사람 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라는 단어 또한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메타포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이러한 모습, ‘소금과 빛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 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가 잘하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신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외적인 의즉 외형주의에 그쳤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내적인 의이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잘 지켰다. 그런데, 그들은 외형적으로만 그 말씀을 지켰다. 살인만 안 했지, 마음 속에는 미움이 가득했다. 물론, 살인을 외형적으로 하지 않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미워 죽겠는데, 마음으로는 백 번도 더 죽였는데, 살인만 안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살인만 안 했지, 그 앞에서 또는 안 보는 데서 상대방에 대하여 라가(Raka, 심한 모욕을 주는 욕)’라고 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남을 미워하면 죽음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무디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100명 중 1명은 성경을 읽고, 99명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증언으로 그들이 이끌리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개 우리들,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과 의를 세상에 보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 스트레스가 확 밀려오는 지 모르겠다. 사실, 이것은 육신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으로서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born again)’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는 일은 어렵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소금과 빛과 의를 세상에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born again)는 미움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정욕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원수까지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영원하신, 그리고 신실하신, 참된 복이시고 행복이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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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3. 19:35

아브라함과 가나안 땅

(창세기 12:1-9)

 

창세기 11장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하란 땅에서 죽는 것으로 끝난다. 데라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다. 그 중에서 하란은 롯을 낳았는데,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일찍, 우르에서 죽었다.

 

데라의 둘째 아들 나홀은 우르에 남고자 했던 것 같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아버지 없는 손자 롯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 땅으로 간다. 성경은 데라와 그의 가족이 겪은 인간적인 감정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미루어 짐작하건데, 자식을 잃은 상심이 매우 컸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데라가 우르를 떠나 정착하게 된 곳을 하란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데라가 우르를 떠나 원래 가고자 했던 곳은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 땅에 머물러 살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하란 땅은 우르와 함께 달을 숭배하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데라가 우상을 숭배하던 하란에 그의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는 기록은 그의 어두운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 (두란노 주석 참조)

 

11장의 아브라함 가족 이야기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준다. “사래는 임신을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11:30). 먼저 죽은 데라의 셋째 자식 하란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밀가, 이스가)이 있었다. 그런데, 장남인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향년 205세에 하란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아마도, 먼저 죽은 막내 아들을 그리며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란 땅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 거다.

 

12장에 들어서면, 이야기의 초점이 아브라함에게로 옮겨간다.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떠나.. 가라이다. 이는 너 스스로 가라”, “너 자신을 위해 가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의 떠남은 자발적인 동시에,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것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희생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브라함이 떠나야 하는 곳은 세 가지로 표현된다. “너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그리고 그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표현된다. 떠나야 할 것은 확실한데, 도착해야 할 곳은 불분명해 보인다.

 

사실, 이게 함정이다. 인간의 심리는 확실한 것에 거하고자 한다. 보장된 유익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은 보장된 유익이고,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떠나, 불분명한 곳,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떠나야 한다.

 

그런데, 그의 떠남은 보장된 모든 유익에서 떠나는 것, 손해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종은 그런 것이 아니다. 순종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신다.

1) 큰 나라를 만들어 주겠다.

2) 너에게 복을 주고 너의 이름을 크게 하겠다.

3) 네가 복덩어리가 되고,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첫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사래)가 불임 상태에서 주어진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 땅을 떠난 이유는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동생의 아들이라 큰 아버지인 자신이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둘째는 자식이 없는 자신의 가정에 조카 롯을 아들 삼기 위함이다. 아마, 이 둘 다 이유였을 것이다. 나중에 보면, 아브라함을 아들이 계속 안 생기자 롯을 실제로 자신의 유업 이을 자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떠나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모든 유익을 버리는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에게는 이익이다. 순종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면 거기에서 많은 자식을 얻어 큰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과 관련된 약속을 해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3). 이것은 아브라함의 교만의 요소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교만해지기 십상이다. ‘나 건드려봐! 하나님이 가만히 안 놓아둘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이 말씀은 복과 저주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이후의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어떻게 지키시는 지 보게 된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애굽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아리따움에 반해 그녀를 취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려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하신다. 위기만 모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도록 복을 내리신다.

 

순종은 하나님과의 거래(Deal, 또는 Business)가 아니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고 믿음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뻐함이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핵심 포인트는 4절과 5절 말씀에 있다. 먼저 5절 말씀을 보면 이렇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일단 떠났다. 하나님은 그가 떠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이 그것이다. 그는 그곳을 떠났다. 이것만 해도 정말 잘 한 것이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는 떠나는 것 조차도 못한다. 죄가 관영한 곳에 머물며 영혼이 죽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떠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우울하게 죽어간 곳, 그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곳 하란을 마침내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떠난 아브라함이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느냐 이다. 데라가 가족을 데리고 우르를 떠날 때 그의 목적지는 원래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그는 도중에 자신의 어두운 영적 상태와 어울리는 하란에 그만 주저 앉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신 목적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신앙인은 이 구절을 보며 마음이 조마조마해야 한다.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보여 줄 땅,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까? 5절은 이렇게 전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사실, 여기에서 박수와 아멘이 쏟아져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 바울에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에게 회심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서려는 것을 보며 이렇게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2-3).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증거 삼아 이야기 한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우리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고, 도착해야 할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은 어디인가? 성경은 일차적으로 공동체에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공동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고, 반드시 도착해야 할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은 어디인가?

 

우리 교회 공동체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너무도 자명하다. 지난 몇 년 간 교회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했던 과거의 시간에서 떠나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령을 떠난 육체의 일을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5:19-21).

 

물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분명 회개해야 할 일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일 중, 많은 것들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교회 공동체를 지키신 분들은 참 대단하신 분들이다. 여러분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시라.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려 했던 수많은 날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라.

 

교회 공동체가 왜 어려움을 겪는가?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떠나야 하는가? 교회를 떠나면 되는가? 주님의 몸인 교회를 왜 떠나는가? 우리가 떠나야 할 것은 교회가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교회에서 잘 발생하는 육신의 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 등과 같은 것에서 떠나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육신의 일을 떠날 생각은 안 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한다. 과거의 그 어려웠던 시간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칠 수 없다. 갈라디아에서 제시하고 있는 가나안 땅’, 즉 성령의 열매는 이렇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 5:22-24).

 

우리는 아브라함이다. 우리는 아브라함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성령으로 시작한 일, 끝까지 성령으로 마치는 은혜가 우리 교회, 아브라함 공동체에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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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30. 19:17

라마 나욧 같은 교회

(사도행전 6:1~7, 사무엘상 19:18~24)

 

역동적인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66권의 성경 중 사도행전만큼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성경도 드물다.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 메너리즘에 빠지고 원치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잘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때마다, 우리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면밀히 살펴 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초대교회도 처음에는 매우 순탄하게 성장하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120 여명의 열 두 사도와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에 힘 입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복음을 힘차게 전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했다. 가는 곳 마다 거침 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했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도 고쳐주는 기적을 베풀었다. “금과 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은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내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능력인 줄로 믿는다! 삶에 어려움이 있거든, 능력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라!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일어날 줄로 믿는다!

 

초대교회의 절정은 432절 이하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2-35).

 

무서운 광경이다. 요즘, 이단들이나 하는 일이,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일어났다. 신천지에 빠져서 재산을 탕진하고, 남편과 자식들까지 모두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요즘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종말론적 신앙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분별이 필요한 말씀이다.

 

아무튼, 이렇게 무섭게잘 성장하던 초대교회에 어려움이 닥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어떻게 교회를 어렵게 했는지,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 한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이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

 

6장에 가면, 초대교회는 또다른 어려움을 만난다. 우리가 읽은 말씀이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교인이 많아졌다는 뜻은, 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하던 일 중에 구제 사역이 있었다. 과부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옛날 과부는 먹고 살기 정말 힘들었다. 성경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 삼인 방(나그네, 고아, 과부) 중 하나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이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 중심의 교회였다. 그렇다 보니, 구제하는 일에 히브리파 과부들이 헬라파 과부들보다 더 잘 챙김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헬라파 과부들의 마음이 상했다. 누구든지, 어떤 이유에서든 차별 받으면 마음이 상하는 법이다.

(일례로, 배식을 하는데, 히브리파 과부 식판에는 찡긋이 윙크하며 고등어 몸통 부분을 놓아주며 맛있게 드세요!’하면서, 헬라파 과부 식판에는 고등어 대가리나 꼬리 부분을 놓아주며 본 척 만 척 하면, 마음이 안 상하겠는가!)

 

무엇이든지, 몰입을 방해하는 3가지의 요인이 있다. 안정성의 위기, 의미의 위기, 활력의 위기가 그것이다. 이것을 신앙에 대입해 보면,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도 다르지 않다.

 

안정성의 위기란 이런 것이다. 직장에서 언제 잘릴 지 모르면, 그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게 쉽지 않다. 예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한국을 강타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명 대사가 나온다. “회사는 전쟁터이지만, 밖은 지옥이다.” 미생은 지옥으로 떠밀리지 않으려고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계약직 직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몰입이 떨어진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이니까, 신앙에 몰입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꾸어 가야할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든든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이다.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고,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면 안 된다.

(<시골교회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읽다 보니까, 시골의 한 교회 목사님이 동네 부녀회 회원들이 교회 일을 잘 도와주어서 교회가 잘 세워져 나가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동네 부녀회 회원들이 교회를 도와주는 이유가 자기들이 안 도와주면 교회가 망할까 봐 불쌍해서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그래서 세상을 걱정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도움을 주는 든든한 교회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사람도 보면, 어떤 사람은 걱정시키는 사람이 있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걱정시키는 사람은 안정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걱정해주는 사람은 안정성을 확보한 사람이다. 이렇듯,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겠는가? ‘걱정시키는 교회’? 아니면, ‘걱정해주는 교회’? 우리는 할 수 있다. Yes, we can!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의미의 위기이다. 의미의 위기는 지금 현재 이 일을 왜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위기도 여기서 온 것이다. 그들이 왜 구제사역을 시작했는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의미를 잃어버리니까,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을 차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춘기 때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의미이다. ‘나는 누구니? 나는 왜 살지?’ 사춘기 때는 엄청 고독하다. 그러면서 성장한다. 사춘기를 보내면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인생이 참 힘들어진다. 부모나 선생님은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다른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잘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의미의 위기가 와서 신앙의 몰입이 안된다. “내가 지금 왜 교회에 나오고 있지? 내가 지금 교회에서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이것에 대한 확실한 의미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지 않으면, 신앙의 몰입은 굉장히 힘들다.

 

오바마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독서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에게 의미는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고대교회 교부였던 제롬은 이런 말을 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여 신앙의 의미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오늘 말씀 7절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의미를 충만히 찾아가는 교회를 세워가자.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세 번째 위기는 활력의 위기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가 구제사역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정확히 나온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2). 제자들이 말씀도 전하고 구제도 하고, , 이것저것 하느라 너무 분주하다 보니,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저것도 제대로 못해서 결국 활력을 잃은 것이다.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것이다. “과도한 업무에 몸과 마음이 지쳤다.”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도 마찬가지다. 교회 사역을 과도하게 하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지친다.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행한 일이 바로 일곱 명의 집사를 세운 일이다. 교회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누구 하나의 헌신으로 세워가는 곳이 아니다. 공동체는 더불어 함께 하는 곳이다. 요즘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헌신이 몇몇 사람들에게만 집중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큰 교회에 몰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큰 교회 가면 헌신 안 해도 되니까. 앉아 있으면 다 해주니까.

 

갈라디아서 6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의 법은 혼자서 성취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질 때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서로 짐을 질 때 교회는 활력이 생긴다.

 

우리가 이제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세워 나가야 할 교회는 안정성 있는 든든한 교회, 세상을 걱정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로해 주는 교회, 그리고, 지금 왜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아는 교회, 또한, 서로 짐을 지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 나가는 활력 있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한 마디로, ‘라마 나욧 같은 교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나와 여러분이 함께 꿈꾸고 세워 나가야 하라 교회의 비전이다. 사무엘상하의 말씀은 다윗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중에서 19장은 다윗을 시기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라마 나욧이라는 곳으로 도망친다. 그는 그곳에서 선지자 사무엘과 함께 은신하여 생활한다. 그때도 정보 기관이 있었다. 사울은 정보통을 통하여 다윗이 라마 나욧에 은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령(특공대, 델타포스, 네이비실)을 보낸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울의 전령들이 라마 나욧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그들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혀 갑자기 예언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전령들은 다윗 죽이기라는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그들의 삶이 변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세 번 연거푸 벌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울 왕이 직접 간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도 라마 나욧에 도착하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런 속담도 생겨났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회만 오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교회! 성경의 말씀이 성취되는 교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우리 모두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나가며 연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라마 나욧같은 교회를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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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8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2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진술이 가장 중요하다. 이 진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뜻과, 하나님의 뜻에 종속된다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모두 선하다(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어떠한 이유에서 건 미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죄의 개념이 생긴다. 죄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의 언어로 다시 옮기자면, 죄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해 보자.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지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는 선악의 판단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악이다.

 

(어제 최순실이 특검에 출두하면서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자백을 강요하고 있어요!” 이 뉴스를 접하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페이스북에 한 마디 남겼다. “그러면 자신이 한 짓은 민주주의인가?”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신에게 불리하면 악이 된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했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선은 '내 욕망의 성취'일 뿐이며 욕망이 성취되지 않고 좌절되면 그것이 악이다. 죄는 선과 악의 기준이 사사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악이 판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과 악이 사사로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선을 선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으로 규정한다. 이제 인간은 악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이게 바로 죄이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나온다. 몹시 배고픈 여유가 길을 가다가 포도나무를 발견했다. 여우는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를 따먹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서 결국 그것을 못 따먹었다. 여유는 포도 따 먹는 것을 단념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 포도는 분명 신포도일거야!”)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나는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따먹고 싶은 맛 있는 포도였다가, 자신에게 불리하고 따먹지 못하게 되니까 신포도가 되는 것이다. 포도는 그대로인데,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위치냐에 따라서 그 포도의 선과 악이 갈린다.

 

결국 동산 중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된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져처음 본 것은 자기들이 벗은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보였다는 뜻이다. , 자기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나스키소스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그 이야기에서 나르시스즘이 생겨났다.

 

(나르키소스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모습에 매료되어 결국 우물에 빠져 죽는다. (이 외에도 여러 판본이 있다. 그것이 우물에 비친 모습인 것을 알고, 굶어 죽었다는 판본, 또는 자살했다는 판본) 나르키소스의 뜻은 또는 무감각이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잠을 자는 것처럼 죽은 모습이고, 자기 이외에 타자 또는 사물에 대하여 무감각해진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해져 자기 자신 밖에 안 보인다.)

 

죄에 빠지면, 즉 선악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애에 충만해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불화와 두려움과 죄의식과 핑계가 그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거니셨다. 그들이 죄 짓기 전에는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숨는 행위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가 그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그들은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즉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핑계를 댄다.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죄를 전가 시킨다. 이들이 왜 이렇게 핑계를 댈까? 자기애 때문이다. 자기 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것도 선과 악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선과 악의 판단이 사사로워진 것이다. 자기는 선하고, 남은 악해 보이는 것이다. 아니, 자신은 선하게 판단하고, 남은 악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자기는 잘못 없고, 남이 잘못한 것이다.

 

이게 참 비극이다. 왜 그런가? 아담과 하와가 어떠한 관계인가? 2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시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다. 하나님은 잠이 든 아담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돕는 배필을 보고 아담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결혼식 때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죄가 들어가니까 아담에게서 하와가 분리된다. 이들은 더 이상 한 몸이 아니게 된다. 아담은 자기 살겠다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아내를 팔아 먹는다. 이런 현상이 하와에게서도 발견된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자신은 선한 것으로 판단하고, 뱀은 악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보았듯이,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31절에서도 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죄란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부정하게 한다. 죄는 선한 것을 악하게 만든다.

 

죄는 결국 불화를 조장한다. 죄가 없을 때는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모든 것이 불화가 조성된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하와와 뱀, 즉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구원이란, 화해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 말씀에서부터 시작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 화해란 다른 말로 해서, 자기애 때문에 자기 자신만 보던 눈을 나 아닌 다른 피조물(타자)에게로 돌리는 것, 피조물을 넘어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구원이란, 화해란, 주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물으실 때 숨어서 자기 자신만 보는 게 아니라,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서 그들을 돌보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뵙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회 공과 3과에서 묻는) “네가 어디 있느냐?”의 질문은 위치 정보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 정보를 묻는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구글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필요한 것이다.) 불화 가운데 있냐, 화해 가운데 있느냐.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 있느냐, 나 몰라라 하고 있느냐.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뵙고 있느냐, 숨고 있느냐.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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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6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

(고린도전도1:10-18)

 

에큐메니컬 주일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

 

요즘 굉장히 이 용어가 오해 받고, 잘못 쓰인다. 복음주의의 반대인 것처럼 쓰인다. 그래서 복음주의 진영(WEA)과 에큐메니컬 진영(WCC)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복음주의는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보수주의고, 에큐메니컬은 예수 외에 다른 것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진보주의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2013 WCC 총회가 한국 부산에서 열렸을 때 한국의 보수교단에서는 WCC 총회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오해고 무지에서 비롯된 웃픈일이다.

 

에큐메니컬의 진정한 의미는 복음을 위해’ (분열된) 교회가 연합하고 일치를 이루자는 뜻이다. 공산당처럼 커다란 한 덩어리 조직을 만들자는 의미가 아니다. 연합기구를 만들어서 무슨 조직처럼 힘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계속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교회는 예루살렘교회가 효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유대교의 한 분파였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고스란히 지키며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면서, 유대교 율법과 전혀 상관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문화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유학 와서 에모리에서 수업 듣는데, 재채기 하면 옆 사람이 왜 그랬슈?”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왜 그랬슈가 아니고, ‘갓 블레슈였다. 미국인들은 재채기 하면 영혼이 날아간다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갓 블레슈해준단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재채기를 시원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채기는 힘차게 해야 제 맛이다. 이처럼, 문화가 다른 사람한테,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예루살렘 모교회에서 분리된 교회가 안디옥 교회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모교회이지만 유대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고,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의 한 분파로 머물지 않고, 완전히 분리되어 하나의 종교가 된 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다. 그러한 일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이다. 일부러 분열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유대인들 중심의 복음서이지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이방인들 중심의 복음서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의 복음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이방인들(헬라철학)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용어들이다. (로고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 없이 많은 교회의 분열이 있었다. 그 중에는 곱틱교회와 영지주의 교회도 있다. 곱틱교회는 쉽게 이집트교회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는 곱틱어를 썼는데, 그 때문에 고틱교회라 불린다. 이들은 단성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라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정통교리는 양성론을 주장한다. 이는, 예수는 100% 인간, 100% 신이라는 주장이다. Vere homo, vere deus라고 한다.

 

영지주의 교회의 실체는 이집트의 나그함마디라는 곳에서 발견된 문서 때문에 주목을 받았는데, ‘나그함마디 문서는 복음을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한 문서를 말한다. 이집트 곱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사해문서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발견 중 하나라고 불린다.

 

그 이후, 교회는 계속 분열한다. 가장 유명한 분열은 1054년에 있었던,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의 교회 간의 분열이다. 이것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이다. 그 당시, 동로마제국의 교회와 서로마제국의 교회는 성령이 어떻게 발출하느냐는 논쟁이 한창이었다. 동로마제국의 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발출한다고 주장했고, 서로마제국는 성령이 성부와 그리고 성자로부터발출한다고 주장했다. 서로의 입장을 받아들이 수 없는 나머지, 서로의 교회는 서로를 파문한다. 즉 서로 이단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바, 1517년 로마가톨릭교회는 또 한 번의 분열을 겪는다.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태동인 종교개혁이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년 되는 해인데,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 중이다.

 

개신교는 그 이후에 엄청난 분열을 겪는다. 루터의 신학을 따르는 루터교가 생겼고, 칼빈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주의(우리가 잘 아는 장로교)가 생겼고,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 때문에 생겨난 교파가 바로 영국의 성공회이다. 앤 볼린이라는 여인을 사랑한 헨리 8세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캐서린과 이혼한다. 그것을 교황청이 인정해주지 않자,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여 만든 교회가 성공회이다.

 

영국의 성공회 신부로서 18세기 타락한 영국사회를 변화시킨 메토디스트 무브먼트(Methodist Movement)를 일으킨 존 웨슬리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감리교회다. 원래, 존 웨슬리는 메토디스트 무브먼트를 영국 성공회에 남아서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하나의 교단이 되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크고 발달되어 있다.

 

한국에 개신교는 1884-5년에 들어왔는데, 미국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교회의 아펜젤러가 함께 인천 제물포 항을 통해서 들어왔다. (누가 먼저 땅을 밟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정황을 미루어 보아, 아펜젤러 목사가 먼저 한국 땅을 밟았을 거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아펜젤러 목사는 결혼한 상태여서 부인과 함께 왔다. 미국의 Lady First 문화를 생각할 때, 아펜젤러가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을 것이다.) 아펜젤러는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갔다.

 

이 둘이 서울에 세운 첫 교회가 각각 새문안교회(장로교)와 정동제일교회(감리교)이다(1887). 그후, 한국 감리교는 분열을 안 하는데, 한국 장로교는 수도 없이 분열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WCC 가입 문제로 예장통합(장신대)과 예장합동(총신대)이 나뉜 것이다. 그 후로, 현재 한국의 장로교는 200여개 넘는 교단으로 나눠져 있다.

 

개괄적인 역사를 통해 교회가 어떻게 분열되었는지 살펴보았지만, 교회의 분열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위협으로 다가왔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대표적으로 그것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의하면, 고린도교회는 크게 네 개의 파벌이 존재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베드로파), 그리스도파.

 

이들 파벌은 모두 특징이 있다. 바울파는 유대교 율법주의와 전통적인 헬라 철학 사상에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볼로파는 학문적 성향이 강해서 철학과 수사학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마 이들은 설교 잘하는 목사를 좋아했을 것이다.) 게바파는 유대교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마 율법 전통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파는 쉽게 말해 중도파, 또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파였을 것이다. 특정 인물에게 속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그룹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은 성령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직접 교제하는 삶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름으로 볼 때는 가장 정통 같지만, 성향으로 볼 때는 이단적인 경향이 가장 강한 분파이다. 직통계시 같은 거 하는, )

 

이러한 분파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근본적으로 시끄러웠다. 교회가 시끄러운 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제다. 그러니, 교회가 시끄러운 것 가지고 너무 낙담할 필요 없다. 오히려, 안 시끄러운 게 이상한 거다. 교회가 시끄러운 거 가지고 낙담하고 시험에 드는 사람은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잘 모르고, 성경을 잘 모르는 것이다. 교회가 시끄러운 거 가지고 너무 낙담하지 말고 너무 시험에 들지 마시라. 원래 사람이 모이는 곳은 다 시끄러운 법이다.

 

다만, 에큐메니컬 주일을 맞아,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얻었으면 좋겠다.

 

고린도교회의 분열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 핵심은 이거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따라해 보자.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게 인간인가? 우리가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아니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공산당원인가? 우리가 김일성 어버이 수령님 모시는 북한 주민인가? 도대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일차적으로, 이들의 분열은 단순히 파벌 문제가 아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 정경으로 채택된 복음서도 4개나 된다.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복음서도 엄청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언급한 영지주의 문서(나그함마디 문서)도마복음서이다. 중국집에 가면, 짬뽕 먹고 싶은 사람이 있고, 짜장면 먹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어야 하니까, 우리가 함께 중국집 가면 짬뽕이든 짜장면이든 하나로 통일해서 먹어야 하는가?

 

본문에서 쓰인 분쟁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스키마이다. 이는 , 간격, 분열, 불화를 뜻한다. , 어떠한 이슈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서로 미워하는 것(불화)’이 문제인 것이다. 중국집 갔는데, 짬뽕 먹는 사람이 짜자면 먹는 사람보고, 짜장면 먹는다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짬뽕을 안 먹고, 짜장면을 먹어? 이 상종 못한 놈!”이러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쓰인 합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다르티조이다. 이것은 원문에서 분사 완료 수동태의 형태(과거의 한 시점 표현)로 쓰여졌는데, 이는 그들이 분쟁 이전의 온전했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을 바라는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합하라라는 말은 짬뽕 먹을지, 짜장면 먹을지 통일해서 한 가지만 먹어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리고 이것은, 서로 양보해서 그냥 모두 짬짜면먹으라는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짬뽕 먹는 사람은 짜장면 먹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짜장면 먹는 사람은 짬뽕 먹는 사람 인정해 주라는 뜻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왜 먹느냐는 것이다. 중국집 가서, 짬뽕 먹는 사람이나, 짜장면 먹는 사람이나 왜 그것을 먹는가? 짬뽕을 좋아해서? 아니면 짜장면을 좋아해서?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이 중국집 가서 짬뽕이든 짜장면이든 먹는 이유는, 배고파서이다.

 

, 그리스도인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아주 근본적인 것, 십자가의 도 때문이다. 에큐메니컬이란 그런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는 것이다.

 

엘까미노 리얼에 있는 옛날 짜장면집에 가서 우리 모두가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서로 묻는다. ‘여기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묻는 거 자체가 참 이상한 일이다. 중국집에 왜 왔겠는가? 식당에 왜 가나? 배고프니까 가는 거다. 그런데, 밥을 먹다 보니, 김 집사가 내가 먹는 짬뽕을 안 먹고, 짜장면을 먹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가서 따진다. ‘당신 왜 짬뽕 안 먹고 짜장면 먹어? 정말 웃겨? 웃기는 짬뽕이네!’ 그러면서 둘이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갈라선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렇게 물어보자. 교회에 왜 왔는가? 교회 와서 서로에게 여기 어쩐 일이세요?’라고 물으면 정말 이상한 것이다. 교회에 왜 왔는가? 오늘 말씀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십자가의 도때문에 우리 모두는 교회에 온 것이다.십자가의 도를 위해서, 연합하고 일치하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것이 주님의 뜻 아니겠는가?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은 복잡한 개념이 아니다. 어떤 이념처럼 생각하지 말라. 복음주의 진영, 에큐메니컬 진영, 이런 큰 개념을 생각할 것도 없다.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의 도를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고 협력하고 양보하고 용서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다. 다른 생각을 갖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문제다.

 

짬뽕 좋아하시는 분? 짜장면 좋아하시는 분? 짬뽕 좋아하시는 분들만, “짜장면 맛있게 드세요!” 짜장면 좋아하시는 분들만, “짬뽕 맛있게 드세요!” 다 같이 따라해 봅시다. “우리, 탕수육 같이 시켜 먹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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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