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6. 12. 11. 12:58

토요일 오후

 

아픈 귀,

만지면 고장 날 것 같다

차마 손바닥을 갖다 대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눈은 손가락에 갇힌다

구름이 지나며

비웃음을 뿌린다

이 세상에 괜히 왔다

누구든지,

나무에 오르면

떨어지는 관성을 잊는다

바람이 콧등을 살짝 건드린다

분노는 심장을 뚫고

머리카락의 최전방까지 돌진한다

나뭇잎이 한가롭게 떨어진다

말 걸기도 힘든 노인네가

젓가락처럼 서 있다

세발 자전거를 탄 아이가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곳에서

기억이 탄생한다

노을이 새털구름에 스민다

손바닥에서 자꾸 아픈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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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12. 10. 15:46

후회

 

간다고 해 놓고

몇 걸음 못 가서 주저 앉았다

눈시울이 붉어졌을 땐 이미

심장에 금이 간 후였다

강물은 흘렀고

그림자는 멈췄다

가야하나

말은 숨어버렸고

생각은 밀려왔다

입술은 말라버렸고

피는 체온에 갇혀 증발했다

잘못 온 것이다

아니, 아직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바꾸지 못하는 건 마음이 아니라

신이 이미 진행시켜버린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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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2. 10. 15:46

혐오

 

지붕이 뜨겁다

새 한 마리가 지붕 위를 날다

날개 한 쪽이 꺾인다

꺾인 건 새의 날개인데

추락하는 건 구름이다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괴팍한 햇살이

심장까지 침투한다

피는 우주를 한 바퀴 돌고

눈은 열광하며 집을 나간다

이건 누구의 거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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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2. 9. 13:12

나라를 위한 기도 2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주님,

주께서는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주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나이다.

우리의 고국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주님과는 달리

국민의 울부짖음을 전혀 듣지 않으려 하나이다.

아마도 그는 국민이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국민은 대통령 앞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믿는 듯 하나이다.

이 얼마나 큰 반역이니이까?

주께서도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건만,

주의 권세 아래 있는 한 명의 위정자에 불과한 대통령이

어찌 국민의 울부짖음을 무시하며

자기 자신을 내어놓지 않을 수 있나이까?

이것만큼 불의와 불경이 어디에 있나이까?

이것은 신성모독이나 마찬가지이니이다.

공의로우신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그를 심판하옵소서.

그의 귀를 여시고 돌같이 굳은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어주사,

주의 섬김을 본받아

하루빨리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위해 국민의 뜻에 순복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2. 9. 13:11

나라를 위한 기도 1

 

주님, 새날이 밝아오고 있나이다.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역사의 주인이 되신 주님,

십자가에서 이 땅의 모든 불의와 악을 심판하셨던 주님,

이제도 오셔서 우리의 고국 대한민국의 불의와 악을 심판하옵소서.

오늘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펼쳐진 날이옵니다.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정의를 헌신짝처럼 버린 위정자들과 장사치들을

주께서 종말에 높이 세워주실 '작은 자들(국민들)'의 이름으로

심판하게 하옵소서.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며,

불의가 정의를 이기지 못함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계시하신 주님,

새로운 역사를 열어젖힐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 주옵소서.

새날을 보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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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2. 8. 18:41

사랑을 간구하는 기도

(누가복음 2:25-33)

 

주여, 사랑하느라 눈물을 글썽이게 하옵소서.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없나이다.

사랑은 도덕이 아니라

주의 존재방식이니이다.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사랑은 우리를 영원 속에 거하게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니이다.

사랑은 시간과 몸을 주는 것이기에

주께서는 우리들과 같이

몸을 가지고 시간 안으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 주셨나이다.

삶을 살며 우리가 왜 눈물을 글썽이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다른 것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느라

시간과 몸을 내어주며

눈물을 글썽이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는 고백이

삶의 마지막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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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16. 12. 8. 18:27

건강한 믿음을 간구하는 기도

(5:21-34)

 

주여, 건강한 믿음을 주옵소서.

열 두 해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처럼

주의 옷자락만 만져도

죽음으로 치닫게 하는 병이 나으리라는

절박한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피의 유출이 있는 부정한 여인이

정결법을 어기면 처벌 받을 것을 알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옷자락을 만진 것은

주만이 죽음으로부터 건져줄

구원자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니이다.

그 여인이 구원 받은 것은

병 낫기를 바라는 욕망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아는믿음 때문이니이다.

진리이신,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주를 아는 것이

건강한 믿음이오니

일생동안 주를 힘써 알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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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6. 14:50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누가복음 2:25-33)

 

작년에 한창 화재가 되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여자 선교사 두 명이 있었다. 소록도에서 평생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과 마가레트(70) 수녀다. 그들은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피다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났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에 헌신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그런데,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다.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했다

 

그들은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 오후엔 손수 죽을 쑤고 과자도 구워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마을을 돌았다. 10여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 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70세가 된 마리안 수녀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 왔을 땐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된 것이다.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40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 봐 조용히 떠났다고 한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가 고향 오스트리아는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낯선 땅이 되었다. 두 사람의 방문 앞에는 그들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다고 한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신문 기사에서 발췌 및 편집)

 

존경스러운 사랑의 삶을 사신 이 두 분들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사랑에 대한 이런 찬양이 생각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

 

어떤가? 사랑은 이런 것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런 것에 머무는가? 이것은 굉장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오해할 요지가 있다. 사랑을 도덕으로 생각할 요지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도덕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도덕적인 삶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Love is eternal. No matter how short it was. That's the mystery of love." - Reverend Junsik Chang *

“사랑은 영원하다. 그것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 장준식 목사

 

* 이것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한 후배의 문병 중에 내가 말씀을 전하며 한 말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던 후배에게사랑의 영원성이 가슴에 와 닿았던 모양이다. 후배는 이 문구를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기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오늘 말씀을 보자. 유대인은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은 난지 팔 일 만에 할례 받으러 성전에 간 것이다. 그때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약속하신 구원을 보는 장면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래서, 도덕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 자체가 구원이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한 아기가 태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핵심 중의 핵심 교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은 상대방에게시간을 기꺼이 내주는 행위요, 상대방의 시간을 침범해도 된다고 허락 받은 일종의 자격증이다. 그러므로 남의 시간을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 상대방의 시간에 침범하려면 먼저 그를 사랑하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의 시간에 침범하는 것은 그의 자유를 빼앗는 범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은)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영원을 경험하게 한다. 즉 초월을 일구어 낸다. 초월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통로이다.

(요즘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면,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라.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가? 부인을 사랑하고 있는가? 자녀를 사랑하고 있는가? 또는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친구나 이웃이 있는가?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얼마나 많은 미움 가운데 사는가.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합일의 상태로 인도한다. 영생 (하나님의 생명), 영원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말에서 (spirit)’은 하나님을 말한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이고, 영원은 하나님의 시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그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다가선다. 그래서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 사랑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한다. 그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실천한다. 물론 우리의 사랑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때론 성공하고, 때론 실패한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

 

우리가 위의 소록도 수녀님들의 사랑의 삶을 보면 그냥 멋지기만 하지만, 본인들은 그렇게 멋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엄청난 인간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목원대학교를 세우신 Charles Stokes(도익서 박사)의 사모님(이명은, Marilyn Stokes)이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선교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늘 고향이 그리워서 갈등하고, 삶의 환경이 힘들어서 갈등하고, 그렇게 인간적 갈등 가운데서 선교 사역을 하다가 은퇴하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위의 소록도 수녀님들도 똑 같은 고백을 한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빕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고, 무엇보다 위험한 일이기까지 하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어두운 면이 보이는데, 그것을 껴안고 보듬어 주는 일은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얼마나 많이 먹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달라진다. 어릴 적 사랑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어린 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주라.

 

나는 목회자로서 누군가에게 잘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맡겨주시고 만나게 해주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잘 해주는 일은 굉장히 힘들고 어렵다. 그런데 사랑하면, 그 사람의 필요가 보이고, 그 사람을 위해서 무슨 기도를 해줘야 하는지 보이고, 해야 할 일이 보인다.

 

나는 부교역자들에게 늘 이런 주문을 했었다. ‘교회 일 잘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일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담임목사를 사랑해 달라.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보일 거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서 일 하려 들지 마시라. 일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면, 문제가 생긴다. 일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남이 나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꼴보기 싫고, 내가 한 일에 대하여 기대했던 리워드가 안 오면 시험에 든다. 교회에서 일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말고, 교회를,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시라. 사랑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눈에 보인다. 그리고 유익을 구하지 않기에 시험에 들 일도 없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가 그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일을 하려고 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했다. 예수님이 무어라 하시는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한 가지가 무엇인가? 사랑이다.


가인(농부)과 아벨(목자)의 제사 중,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는가? 가인은 곡식 바치고,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려서? 대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무 것이든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리면 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사랑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아니냐의 문제, 사랑으로 제사(예배)를 드렸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가인은 자기가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리워드가 안 오자, 동생을 죽인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동생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 열심이 결국 살인으로 간다. 그렇다고 뺀질 대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WORK’ 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의 두 아들의 비유로 가르쳐 주신다. 큰 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니, 큰 아들이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고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되,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 뉘우치고 갔으니,” 둘 중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사랑은 말이 아니라 ‘WORK’ 이다. 여러분의 시간과 몸을 주는 행위가 사랑이다.

 

사랑은 ‘WORK’ 이다. 사랑은 시간과 몸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다(성육신).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몸을 주셨다(대속).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몸을 먹는다. (살모사, 사마귀 등)

 

그리스도의 사랑은 도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좌절하고 눈물 흘리는 일이 있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시가 있다.


꽃에 해 둔 메모

- 김용과 김경주의 만남


오래도록 너무 많은 별을 보아서 불행한 꽃,

그 꽃에 해 둔,

웃는 얼굴이 유난히 슬펐던

한 사내의 메모,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느라 눈물을 글썽여야 한다.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슬픔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눈물을 글썽이신다. ?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는가? 사랑하느라, 눈물을 글썽이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사랑하다, 눈물 글썽이며 세상을 떠나는 자가 되자.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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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1. 30. 12:35

믿음을 간구하는 기도

(막 4:30-41) 


주여, 우리의 인생이 광풍을 만났나이다.

우리의 인생이 마구 흔들리나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고

주무시는 것 아니니이까?

주여, 우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나이다.

광풍 앞에서

믿음을 져버리고

주님께 등을 보이고 있나이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옵소서.

믿음 안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우리 앞에 놓인 광풍을 꾸짖게 하옵소서.

당면한 문제 앞에서 두려워

그것으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주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꾸짖으며 끝까지 헤쳐나가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30. 12:34

믿음이 있다는 것

(마가복음 4:30-41)

 

오늘 말씀에는 한 개의 비유와 한 개의 이야기(narrative)가 나온다. 비유는 겨자씨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그 씨에서 나온 나무는 새가 깃들 정도로 커진다.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발과 공격이 심해졌을 때 시작되었다. 비유는 믿음 있는 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장치이다. 믿음 없는 자가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지만, 믿음 있는 자가 들으면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발과 공격때문에 비유로 씌어진 대표적인 책이 <요한계시록>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조작하는 것도 이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기본적으로 박해 상황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한 복음이지, 점쟁이처럼 알 수 없는 미래를 예언한 예지서가 아니다. 한마디로, 요한계시록은 비유와 상징을 이용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이다. 이것을 오용, 또는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 없는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발과 공격을 가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공격한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원형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선포했다.

 

이는 배제와 포용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배제너는 불의하고 나는 의롭고, 내가 너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감사를 말한다.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핀잔을 자주 듣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배제의 공동체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그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 했는지는 바로 이 기도에 잘 나타난다.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

 

이에 반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용은 다음의 기도와 말씀에 잘 드러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8:13-14a).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 나라는 바리새인과 같이 배제의 틀에 갇힌 자들에게 임하지 않고, 오히려 포용의 자세를 갖춘 자들에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자. 우리는 배제하는 사람인가, 포용하는 사람인가? 우리는 너는 불의하고 나는 의롭고, 너와 같지 않음에 감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배제 당하는 이들, 소외 당하는 이들과 연대(solidarity)하며 그들과 친구되는 사람인가? 참 쉽지 않은 자기 판단이고 과제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 가지를 더 배우게 된다. 상황은 이러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중이었다. 배가 바다(호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을 때, ‘광풍이 불어왔다. 갑작스런 광풍에 제자들은 기겁을 했고,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이 상황에서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Do you not care that we are perishing?”(38). 여기서, 우리는 광풍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광풍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원래 일상적으로 지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문자적으로는 흔들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날마다 흔들림(광풍)’을 경험한다. 신앙인들에게 흔들림이란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고, 신앙을 져버리게 되는 흔들림을 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 흔들림은 당연히 박해였을 것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했지만, 박해가 가해져 오자 그들의 신앙은 흔들렸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들 곁에 없으시고, 그저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박해의 상황에서 울부짖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고, 그것 때문에 인생이 망하게 됐는데, 주님, 그것을 신경 쓰지 않으십니까?” 신앙인으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런 울부짖음이 끊이질 않는다. 여러분은, 오늘, 어떠한 일 때문에, 잠 자고 있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시는가?

 

제자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깨어나자마자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 믿음 없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두려움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믿지 않음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반대로, 믿음 있는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게 아니라, 어떠한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과 관련된 구약의 대표적 인물은 여호수아이다. 그는 가나안 전투를 앞두고 두려워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이렇게 위로해 주신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1:6).

 

두려움과 관련된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로이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두려워)’ 물에 빠졌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물에서 건져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4:31).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심리를 치료하신 것이 아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하나님, 베드로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그들의 심리를 치료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치료하신다. 심리적 두려움을 치료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은 두려움을 이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믿었어야 했고, 베드로는 물 위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어야 했다. 그들이 두려움에 젖어 든 것은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였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이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두려움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두려움은 불의와 비리를 낳는다. 한국 사회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는 병역비리 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군대 가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는 자는 불의와 비리를 저지른다. a) '귀신이 보인다'며 정신질환 행세하며 병역 기피, b) 커피를 마시고 괄약근과 팔에 힘을 주는 수법으로 순간적으로 혈압을 높여 4급 판정을 받아 병역 기피 c) 소변검사를 조작해 사구체신염 판정 받아 병역 기피 d) 멀쩡한 무릎을 수술하고 병역 면제 판정 받아 병역 기피 (수술 직전까지 스키 타는 거 즐겨)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의 인생에 부는 광풍(흔들림)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삶의 흔들림 속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 앞에서 두려워 그것으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오히려 그것을 꾸짖어야 한다. ‘믿음 있는 자는 광풍(흔들림, 삶의 어려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 그것을 꾸짖으며 헤쳐나가는 자이다. “광풍아, 잠잠하라!”(함께 외쳐보자.)

 

요즘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는 정유라의 이야기에 빗대서 설명해 보자면, 믿음 없는 자는 광풍앞에서 두려워 비리를 저지르게 된다. 대학이라는 광풍 앞에서 믿음 없는 자는 정유라처럼 비리를 저지르겠지만, 믿음 있는 자는 그 광풍을 꾸짖으며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능력에 맞는 학교를 선택하여 겸허하게 그 학교에 들어갈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든가, 자신의 수준에 맞는 학교를 겸손하게 선택하든가)

 

믿음 있는 자는 궁극적으로 이런 자가 아닐까 소개한다. 최근(2015)에 만들어진 영화 <The mountain man>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다스라트 만지가 그이다. 인도의 오지에 살던 그는 아내가 다쳤는데, 그녀를 제 때에 읍내의 병원으로 옮기지 못해 아내가 죽자, 마을을 막고 있던 돌산을 뚫어 길을 냈다. 그는 마을을 가로막고 있던 돌산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가려면 직선거리로는 병원까지 1Km 밖에 안 되지만, 산 때문에 72Km를 돌아가야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물? 눈물도 안 나왔어. 그저, 길이 없어서 그랬다, 읍내로만 갔으면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만 들더구만. 장례를 어찌어찌 치르고 나선 정을 들고 바위를 쪼기 시작했지.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어야 된다는 그 생각 하나로 매달린 거지.” 그는 정과 망치만 가지고 총 915미터의 길을 뚫었다. 그렇게 돌산을 뚫는데 꼬박 22년이 걸렸다. 그는 길이 완공된 뒤 정부에서 수여하겠다고 나선 상도, 그가 살던 비하르주에서 주겠다는 표창장과 상금도 모두 거부했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상을 왜 주는지 모르겠더군, 도통. 내 할 일을 한 거야 나는. 게다가 사지 육신 멀쩡한데 뭐 하러 돈(상금)을 얻어 쓰나. 이제껏 하루 벌어 하루 먹기에 불편한 것 없이 살았어. 더 가질 필요가 뭐가 있나.”

 

오늘 말씀에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두 가지를 배운다. 첫째는,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삶의 흔들림앞에 두려워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꾸짖으며 헤쳐나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려 한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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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