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6. 11. 9. 04:14

인생

 

세월은 가고

붙잡아 둘 수 없어

하늘을 쳐다보니

닭 쫓던 개 신세구나

만물은 돌고 돌아

영겁을 이어가는 것 같으나

떨어진 잎새 들여다보니

이들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구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야속하여

고개를 떨구는데

바람은 저만치 뒹굴며

한량처럼

세월을 까먹고 있구나

그림자만

발걸음을 따라오니

담장 아래를 서성이며

갈 데 없는 것이

별과 별 사이를 헤매는

외계인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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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1. 9. 03:36

기도


멈춥니다 

무릎을 꿉니다

눈을 감습니다

고개를 숙입니다

입을 다뭅니다

겨드랑이를 엽니다

칼을 꺼냅니다

허공을 자릅니다

피를 받아 마십니다

토해냅니다

미친듯이 웃습니다

우스워집니다

미안해집니다

속상해집니다

뜨거워집니다

꿈을 꿉니다

눈을 뜹니다

고개를 듭니다

입을 엽니다

손을 흔듭니다

두 손을 모읍니다

붉은 혀를 훔칩니다

무릎을 폅니다

비틀거립니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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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1. 9. 03:20

성도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하박국 2:4)

 

주여, 우리는 성도이니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가 충만한 성도이니이다.

주의 인자(헤세드)가 우리를 구원하셨사오니

우리 안에 주의 인자가 가득하나이다.

신실하시고 변함 없으신 주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직 죄악이 가득한

온 세상에 드러났으니,

우리가 어찌 주를 보지 못했다고

부인할 수 있으리이까.

우리는 지복(Visio beatifica)에 이른 성도이오니

성도답게

인자(헤세드)를 세상에 드러내며

주의 거룩한 백성으로

빛을 발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1. 9. 03:05

(Gene)

 

너는 히스토리다

동시에 히스테리다

너는 모두 우성은 아니지만

너는 모두 현상이다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새겨진다

너의 안식은 쉼이 아니라

진화다

너는 같은 사건을 두 번 겪지 않아도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

너는 용서가 아니라

트라우마다

영원성은 네 안에서 탄생한다

죽은 사람이 네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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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9. 02:55

우리는 성도입니다

(하박국 2:1-4)

 

교회력이라는 게 있다.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25번째 주일이기도 하지만, ‘만성절(All Saints Sunday)’이기도 하다. 교회력은 단순히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1:23).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다른 것이 충만해서는 안 된다. 오직, 교회는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한국에는 차례라는 풍습이 있다. 고조부까지 4대의 신주를 모셔 놓고,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려 드리는 풍습이다. 차례를 지내는 과정 중 합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조상님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참사자들(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제청 밖으로 나가고 문을 닫거나, 제상 앞에 병풍을 가린 후 모두 엎드린다. 그러면 조상님들이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조상님들께 차례를 지내는 이유는 조상님들의 영혼을 잘 달래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야 조상님들이 살아 있는 자손들의 만사를 잘 돌봐주어 모든 일이 형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제사는 한 달에 두 번, 초하루와 보름에 드렸고,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 때마다 드렸다. 물론 요즘은 명절 때만 차례를 드리는 풍습으로 바뀌었지만, 옛날에 종갓집 며느리는 제사상 준비하느라 인생을 모두 보낼 정도였다.

 

우리 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문명이든 돌아가신 조상들에 대한 예법이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켈트어 문화권(오늘날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지역)에서 지켰던 삼하인(Samhain)이 그것이다. 고대 켈트인들의 달력에 의하면, 새해는 111일에 시작한다. 그리고 새해를 시작하면서 어둠의 6개월이 전개되는데, 바로 이 때 영적인 존재들이 땅으로 내려와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조상의 영혼이 다시 집을 찾아오는 날이라고도 생각했다. 이들이 심술을 부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막아낼 방법들도 고안해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1031일날 지키는 할로윈의 유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말이 할로윈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할로윈 데이할렐루야 데이’ (우리교회에서는 Saints Night)라고 바꿔 부르며 그날을 지킨다. 그런데, ‘할로윈은 세속적인 언어가 아니고 매우 기독교적인 용어이다. 켈트어로 할로우(Hallow)성인(Saint)을 가리킨다. 여기에 전야라는 뜻의 ‘eve’가 붙어서 할로윈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로윈이란 크리스마스 이브처럼 무엇인가를 기리는 날의 전야제라는 뜻을 담고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전야제를 갖는다. 분위기가 최고조다. 할로윈은 성인들을 기리는 전야제를 갖는다. 물론 전야제이기 때문에 분위기 최고이다.

 

기독교인들은 켈트족에게 복음을 전한 뒤, 영적인 존재나 죽은 조상들을 기리는 삼하인이라는 풍습을 받아들여, 그날을 기독교의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로 삼아 할로윈을 만들었다. 그것이 7세기와 8세기에 걸쳐서 생겨난 기독교의 전통인 만성절(All Saints Day)’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만성절 예배를 드리며 그와 연관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워낙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켈트문화와 연관된 기독교 전통이다 보니, 한국교회에는 생소한 기독교 절기일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미국에 살고 있다 보니, 한인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할로윈 데이를 맞아 사람들이 기괴한 데코레이션과 기괴한 분장을 하는 것은, 그날의 분위기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유령 또는 우리 말로 귀신을 표현할 때 우리는 흔히 기괴한 상상을 하게 된다. 기괴한 분장과 함께 각 집을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을 말하는 것은, ‘맛 있는 거 주지 않으면 장난칠거야라고 하는 것인데, ‘영혼을 달래주지 않으면 네 인생에 장난칠거야라는 영적인 존재의 위협이 담겨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미신적인 요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재미로 그렇게 할 뿐이다.

 

할로윈(만성절)도 성탄절처럼 세속화되었다. 할로윈을 맞아 장사치들은 한 몫 챙기려는 마음만 있지, 할로윈(만성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와 관련된 프랙티스(practice)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할로윈을 단순히 재미로만 보낼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의미에 충실해서 기독교의 성인을 기리는 엄숙함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에 휩쓸리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을 거슬러 신앙의 가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성인의 규정은 기독교 전통(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마다 다르다. 우리는 개신교회이기 때문에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성인(Saint)’ 또는 성도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만성절을 지킬 때에 과거와 현재의 모든 크리스천들을 기념한다.

 

감리교 전통에서는 성인(聖人)들뿐 아니라 그 교회에서 돌아가신 분들 역시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로 지키기도 한다. 할로윈으로부터 시작되는 만성절은 이 땅을 걸어간 믿음의 선조들, 지금도 순교의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성도의 삶을 기념하며 격려하는 날이다.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성도라고 부른다. ‘성도라는 말에는 신실한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성도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말이다. 구약의 언어(히브리어)로 이들을 하시딤(hasidim)’이라고 부르는데, 하시딤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헤세드(hesed)’에서 왔다. 헤세드는 영어로 ‘steadfast love’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인자라고 번역한다. ‘성도(Saint, 하시딤)’란 인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물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뜻인데, 특별히 인자(헤세드)’의 성품을 닮는 것이다.

 

인자란 신실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실신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실하고 변함없으신 사랑을 궁극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그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향한 우리의 믿음이 신실하고 변함없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성경에서는 신실하고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의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도를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을 일컫고, 의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성인)’의인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성도의인과 다른 차원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 알아, 요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보편적인 성도의인의 의미와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의 거리감을 좁혀나가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지복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지복이란 궁극적인 복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인간에게 궁극적인 복이란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은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지복을 받은 사람들로 묘사된다. 모세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 사무엘도 엘리의 문하생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신약시대로 넘어와서 구약의 성도의인의 개념은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성도의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본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고백했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성도의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 즉 성도답게, 의인답게 살았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 보자.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성도의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는 하나님의 직접 대면한, 즉 예수를 믿는 성도의인의 삶과 많은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 같다. 다른 것이 세속화가 아니라, 이것이 가장 궁극적이고 가슴 아픈 세속화이다.

 

22. 이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신앙은 귀신놀이가 아니다. 신앙은 교양도 아니다. 죽은 조상님들에게 차례 지내는 것 같은 미신적인 풍습도 아니다. 신앙은 신적인 존재를 통하여 세속적 이익을 취해보려는 얄팍한 처세술도 아니다. 신앙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려는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즉 인자를 경험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생명의 몸짓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행위이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또는 의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성도란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자한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신실하고 변함없는 삶을 사는 존재이다.

 

만성절 주일(All Saints Sunday)을 맞아,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성도(Saint)’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실하고 변함없으신, 즉 인자하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내가 얼마나 실제적으로 느끼고 깨닫는가가 다를 뿐이지,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복, ‘지복을 받은 사람이다.

 

못 봤는데, 봤다고 우기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봤는데 본 줄도 모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다.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어리석은 자로 살면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3b). 그리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복된 자이므로, 복된 인생을 살아야 한다.

 

만성절 주일(All Saints Sunday)’을 지키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지복이 다시 한 번 넘치길 축원한다. 우리는 만성절을 맞아 서로가 서로를 축하해 주고, 복을 빌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성도의 삶이, ‘의인의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자. “우리는 성도입니다.” “당신을 축복합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복된 인생을 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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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3. 17:0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비유 - 수수께끼)

(마가복음 4:1-20)


지금까지 (3장까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주로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이적을 통해서 전해졌다. 그것 때문에 바알세불 논쟁까지 벌어졌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음해하는 세력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수하로 몰아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왜 어떤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거부하는 것일까? 이제 예수님은 치유와 이적을 넘어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다.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비유의 말씀이다. 이 첫 번째 비유는 앞으로 전개되는 예수님의 가르침, 특별히 비유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제 역할을 한다. 비유(parable)는 감추는 효과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비유의 중요한 기능은 기존의 지식과 전통을 전복(뒤집어 엎는 것)시키는 것이다.

 

비유는 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를 해도 부족한, 심원한 주제이다. <비유의 위력>이나 <어두운 간격>, 이런 책을 함께 읽으며 공부하면 참 좋은데, 그게 쉽지 않다 (적당한 때에 기회가 있을 것이다). 비유는 Metaphor(은유)Narrative(이야기)가 합쳐진 형태의 이야기이다. , 뭔가 감추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말해서, 그것이 드러나고, 전복시키는 문학 형식이다.

 

비유는 일종의 수수께끼와 같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수수께끼의 일종이다. 우리는 어릴 적에 친구들과 수수께끼를 하며 놀았다. 아이들 세계에서는 수수께끼가 가벼운 놀이일지 몰라도, 실제 인생에서 수수께끼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담보한 지식과 무지사이의 투쟁이다.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비극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비극작품을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인간의 머리를 한 사자인 스핑크스를 만난다. 테베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스핑크스와 한 판 겨루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었다.

 

스핑크스는 테베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이와 같은 수수께끼를 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오후에는 두 발로 걷다가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 이 수수께끼의 답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이 수수께끼를 맞히면 목숨을 건지게 되고, 이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수수께끼는 인생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쥐고 있는 중요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이렇게 답한다. “사람이다. 어려서는 네 손과 네 발로 기어다니며, 어른이 되어서는 두 다리로 걸어다니고, 늙어서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대한 정답을 말했다. 그 순간 스핑크스는 스스로 죽고, 오이디푸스는 안전하게 테베에 입성하게 된다.

 

구약성경 중 사시기에도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수수께끼를 둘러싼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삼손 이야기이다. 삼손은 블레셋의 딤나 여인과의 결혼 잔치에서 잔치 자리에 함께 한 30여명의 친구들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그러면서 자기가 낸 수수께끼를 맞히면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삼손은 반대로 수수께끼를 못 맞히면 똑 같은 것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한다. 삼손이 그들에게 낸 수수께끼는 이런 것이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불행하게도 아무도 삼손이 낸 수수께끼를 못 맞힌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블레셋 여인인 삼손의 아내(딤나 여인)를 협박하여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올 것을 요구한다. 삼손의 아내는 울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달라고 삼손에게 구걸하고, 삼손은 가엾은 마음에 그 답을 아내에게 알려준다.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낸 블레셋 친구들은 잔치가 끝나기 전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이 답을 들은 삼손은 자신이 아내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하여 아스글론에 내려가 블레셋 사람 30명을 쳐죽이고, 그들에게 옷을 빼앗아 수수께끼의 답을 맞춘 블레셋 친구들에게 주고, 또한 그 블레셋 아내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수수께끼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고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중요한 삶의 질문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러한 기능을 한다. ,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내시는 것이다. 그것을 맞히면 천국에 들어가지만, 그것을 못 맞히면 천국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1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수수께끼와 같다. 수수께끼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온전히 반응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오늘 말씀 중, 12절 말씀은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는 말씀이다. 잘못 이해하면 매우 배타적인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특별히 한국말 성경은 이것을 조금 애매모호하게, 잘못 번역한 듯싶다. 영어성경을 보면 12절 말씀이 전하고 싶은 뜻이 좀 더 잘 드러난다.

 

So that while seeing, they may see and not perceive,

and while hearing, they may hear and not understand,

otherwise they might return and be forgiven. (NASB)

 

They may indeed look, but not perceive,

and may indeed listen, but not understand;

so that they may not turn again and be forgiven. (NRSV)

 

한국어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매우 배타적인 진술로 들린다. 사람들이 구원 받지 못하게 하도록 알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12절 말씀의 뜻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풀어서 설명하면, ‘그들이 보았어도 인식을 하지 못하고, 들었어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들이 보고 인식했다면, 들은 뒤 이해했다면, 그들은 분명 돌아와서 용서를 받았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중요한 것은 만약 우리가 보았다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고, 들었다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이다. 탕자는 아버지와 함께 한 집에서 살 때 아버지의 사랑을 보았으면서도 인식하지 못했고 들었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뿌리치고 자신의 재산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났다. 그런데, 그는 먼 나라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을 때, 불현듯 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하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은 회개와 더불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이전과는 다른 인식과 이해를 가지고 아버지의 사랑을 보고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흥미와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 ‘구원 받느냐 아니냐의 중차대한 기로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식(perceive)하고 이해(understand)하는 일은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짓는다. 예수님의 사역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처럼,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인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곁은 떠나고 아버지 집을 떠난다. 그러나, 인식하고 이해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남아 있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일상생활(신앙생활,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상생활이 곧 신앙생활이다)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수수께끼를 잘 풀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수께끼에 시험에 들면 안 된다. 그것은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혀 결국 테베에 입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수수께끼를 잘 풀어 생명을 얻어야 한다. 생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시험에 들어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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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1. 1. 14:31

엎드림을 간구하는 기도

(7:1-10)

 

주여, 엎드리게 하옵소서.

아이 성 패배의 아픔이 쓰라리고 부끄럽더라도

고개를 쳐들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 앞에서 엎드려

주의 선하심을 간구하게 하옵소서.

여호수아가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된 것은

그가 전쟁에 능한 용사이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스승 모세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주 앞에 엎드린 것 때문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외적인 전투에서 아무리 큰 승리를 거두었어도

내적인 전투에서 패배하면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러운 쇳소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이 마음이 오직 주를 향하여 엎드린

겸손한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주 앞에 엎드리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꺼이 엎드린 우리에게도

찬란하게 임하게 되는 줄 믿사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 14:30

엎드림

(여호수아 7:1-10)


오늘 말씀은 여리고 성 전투에 이은 아이 성 전투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 전투와 아이 성 전투 이야기는 동전의 양면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라는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여리고 성 전투는 이 노래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여호수아 성을 쳤네 여리고 여리고 여리고

여호수아 성을 쳤네 여리고 성이 무너졌도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여리고 성 주위를 돌았고, 마지막 7일 째 7곱 바퀴를 돈 뒤, 나팔 소리가 나면 모든 백성이 큰 함성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 7일째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다음 세 가지였다.

 

1)    제사장들의 나팔 부는 소리가 들리면 큰 소리로 외치라

2)    라합과 그 가족을 살려주라

3)    전리품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다’ (헤렘법)

 

외양적으로 보면, 여리고 성 전투는 완벽한 것처럼 보인다. 여리고 성 전투를 전하고 있는 6장 말씀은 이렇게 끝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6:27).

 

그런데, 아이 성 전투를 전하고 있는 7장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아직 아이 성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아이 성 전투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사실, 이 부분은 스토리 기법의 전문 용어로 서스펜스라고 한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사용되는 기법인데, 이야기 속 등장인물 중 적어도 한 명 이상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관객에게 누설될 때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서 서스펜스가 형성된다. 이는 모두가 감춰져 있는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인식) 서스펜스가 발생하여 스토리에 몰입한 관객들은 가슴 졸이며 지켜보도록 만드는 강력한 도구다.

 

영화 감독 중, 서스펜스의 대가로 불리는 이가 있다. 알프레도 히치콕이다. 히치콕이 어느 강연에서 서스팬스와 서프라이즈의 차이를 명쾌하게 설명하여 정의 내린 적이 있다. 우리가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앉아 있는 식탁 밑에 폭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갑자기 쾅 하고 폭탄이 터지면 관객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이것은 서프라이즈다. 아무도 모르다가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스펜스는 이와 다르다. 누군가 폭탄을 설치하는 장면을 관객들에게 미리 보여 주었다면, 관객들은 폭탄이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사소한 장면에도 몰입하게 된다. [김정희,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 52쪽]

 

아이 성 전투 이야기를 다 안다고 생각하며 설렁설렁 말씀을 듣지 말고, 서스펜스 기법에 몰두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말씀을 들어보시라. 특별히 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품는 게 중요하다. 왜 아이 성 전투는 이렇게 허무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아이 성 전투는 여리고 성 전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여리고 성 전투나 아이 성 전투를 비교해 보면, 정탐하는 것은 똑같다. 오늘 2절 말씀도 보면, 아이 성 전투는 정탐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2).

 

그런데, 명확히 다른 것이 있다. 아이 성 정탐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 여리고 성 정탐은 매우 어려웠다. 정탐꾼들이 죽을 뻔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생 라합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 아이 성 정탐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정탐하면서 어떤 일이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매우 순조로웠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이 형통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 일도 안 일어 나는 것이 형통인가?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서 그 일 때문에 힘들어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형통인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혹시 그 사건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 어떤 사건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불행한 일이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바라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사건의 연속이다.

 

아이 성 전투의 다른 점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없다는 것이다. 여리고 성을 치르기 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6:2).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령을 주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시고,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며 명령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백성은 여호수아의 음성을 들었다. 그런데, 아이 성 전투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아이 성 전투에서는 정탐꾼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고, 여호수아는 그 말을 따른다. 정탐꾼과 여호수아의 음성만 있을 뿐, 하나님의 음성이 전혀 없다.

 

2016818, 인생의 중요한 사건을 놓아두고 기도하던 중 내가 쓴 짤막한 글이다.

 

일이 잘 안 되어서 고통 받는 것보다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하느라 고통 받는 것이 훨씬,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낫다. 일이 잘 안 되어 받는 고통은 아픔을 주지만, 기도하느라 받는 고통은 기쁨을 준다. 기도의 고통은 치유하는 능력과 감추어진 것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온전해질 수 있고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자기를 굴복시켜 기도의 자리에서 고통 받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만 몰랐지, 7 1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아이 성 전투에 임한 성경의 독자들은 모두 아이 성 전투의 결과를 짐작했다. 결국 아이 성 전투는 패배로 끝난다. 너무 허무하게 끝난다. 정탐꾼의 말대로 3천 명의 군사만 올려 보냈다가 별다른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36명의 전사자만 낸 채 허무하게 패배하고 만다. 그 허무한 전투의 패배로 인해, 여리고 성의 승리의 기쁨은 온 데 간데 없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큰 슬픔에 빠지고 만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5).

 

이에, 여호수아는 절망에 빠져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6-8).

 

여리고 성 이야기와 아이 성 이야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 전투는 외적인 전투의 이야기이고, 아이 성 전투는 내적인 전투의 이야기이다. 외적인 전투(여리고 성)를 아무리 잘해도, 내적인 전투(아이 성)에서 무너지면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사랑하는 여러분, 큰 일, 위대한 일을 이루려 하지 말고, 이 마음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시는 데 전력을 다 하시라. 큰 일, 위대한 일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헤렘법을 지키는 것이다. ,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아간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헤렘법)이다. 아이 성 전투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 패배 뒤에, 하나님께 엎드린다’. 엎드리는 것은 기도의 자세이다. 민수기서에 보면 모세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모세의 제자 여호수아는 모세에게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 배웠던 것 같다. 문제가 발생하니까 여호수아도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린다.

 

엎드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슨 일을 하기 전의 엎드림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엎드림이다. 둘 다 중요하다. 그런데 무엇이 더 어려운 것 같은가?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런데, 신앙의 선조 여호수아의 위대함은 패배 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는 데 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잘 되기 위한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일이 잘 되지 않아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일이 잘 되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반발심이 일어나 하나님을 욕하고 부인한다. 엎드리기는커녕 고개를 쳐든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계획처럼, 또는 기도한 대로 일이 잘 되지 않거든, 당황하거나 분노하지 마시고, 여호수아처럼 다시 한 번 엎드려 보시라.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에 엎드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1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왜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벌써, 앞으로의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지 이 한 마디를 통해 예상이 되지 않는가?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엎드리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기도는 고통의 자리이다. 쉽지 않다.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엎드리는 일, 기도하는 고통의 자리로 오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일이 잘 안 되어서 고통 받는 것보다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하느라 고통 받는 것이 훨씬,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낫다. 일이 잘 안 되어 받는 고통은 아픔과 부끄러움을 주지만, 기도하느라 받는 고통은 기쁨과 승리를 준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요즘 개신교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개혁개혁을 외친다. 그러나, 개혁은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다. 외적인 전투(여리고 성 전투)에서 아무리 승리했어도, 내적인 전투(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울리는 꾕과리에 불과하다. 시끄럽기만 하지 열매가 없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일을 앞두고(십자가) 엎드리는 일, 기도의 고통의 자리로 들어서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셨다. 그랬더니,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패배)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승리를 온 몸으로 안으셨다. 이제 우리가 여호수아서 8장에서 보게 되겠지만(이것이 궁금하신 분들은 토요일 새벽기도에 나오시라!), 기도의 고통의 자리로 기꺼이 들어간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아이 성의 큰 승리’, 부활의 승리를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부활의 승리는 믿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크고 위대한 일은 우리 주님께서 이루어주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크고 위대한 일이 아니라,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오직, 주님께만 마음을 두라.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엎드린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며 우리와 함께 부활하실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기에, 오늘도 주 앞에 엎드린다.

 

엎드림을 간구하는 기도

 

주여, 엎드리게 하옵소서.

아이 성 패배의 아픔이 쓰라리고 부끄럽더라도

고개를 쳐들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 앞에서 엎드려

주의 선하심을 간구하게 하옵소서.

여호수아가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된 것은

그가 전쟁에 능한 용사이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스승 모세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주 앞에 엎드린 것 때문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외적인 전투에서 아무리 큰 승리를 거두었어도

내적인 전투에서 패배하면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러운 쇳소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이 마음이 오직 주를 향하여 엎드린

겸손한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주 앞에 엎드리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꺼이 엎드린 우리에게도

찬란하게 임하게 되는 줄 믿사옵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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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7. 17:00

주께 보내심을 받은 설교자를 간구하는 기도

( 4:12~13)

 

주여, 저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는

영혼을 팔아먹는 중한 죄임을 깨닫게 하시고,

저들의 양심을 깨부수는 도끼와 같은 설교,

저들의 영혼과 골수를 쪼개는 날 선 검과 같은 설교,

저들의 팔 다리를 부들부들 떨게 하는 천둥 같은 설교를 수행하는

주께 보내심을 받은 설교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통하여

저들의 죄악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7. 16:59

설교하기 전 드리는 기도

( 2:14~41)

 

주여, 오늘 하는 설교가

저들의 귀에 들리게 하시고,

저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시고,

저들의 영혼을 쪼개게 하옵소서.

저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려

회개와 회심과 헌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나의 입술과 마음과 영혼이

성령의 감동으로 벅차 오르게 하옵소서.

성령에 취해

담대함으로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증인으로서의 설교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