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6

창조와 신앙

(창세기 1:1-5)

 

요즘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성경과 관련된 배경지식이 엄청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창세기의 말씀만 해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전된 창조신화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아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통치하던 지역의 문명을 말한다. 요즘의 이란, 이라크 지역이다. 그 지역에서 발전된 문명을 이해하지 않고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요즘 학계의 정설이다.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발견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와 관련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를 담고 있는 에누마 엘리쉬, 구약성경의 최고본인 사해사본’, 그리고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가 그것이다.

 

이 문서들은 20세기 성서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에서 에누마 엘리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잠깐 살펴보면 이렇다.

 

위로 하늘이 아직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고 아래로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때 태고의 압수, 그들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 모두를 낳은 모체, 티아맛이 그들의 물을 하나로 섞고 있었다. 그때에는 들판도 형성되지 않았었고, 갈대밭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신도 나타나지 않고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았고, 운명도 결정되지 않았을 때 신들이 그들 가운데서 창조되었다.

 

에누마 엘리쉬를 보면 마르둑과 티아맛이라는 신들이 등장하는 데, 그 이야기에 의하면 세상은 이 두 신의 전쟁을 통해 창조된다. 창조와 질서의 신 마르둑이 혼돈의 신 티아맛을 물리치며 탄생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마르둑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다. 마르둑을 통해서 그들은 세상의 지배를 꿈꾼 것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기 때 문서화되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에 굴복된 유대인들(이스라엘)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의 신, ‘야훼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 굴복된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이스라엘)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마도, 많은 이들(일반인들, 대중들)은 바벨론의 질서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바벨론이 힘에 의해 재편한 세상에 순응하면서 사는게 상책(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부류가 있었다. 특별히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그들을 P문서 그룹이라고 한다. P문서는 Priest, 즉 제사장 문서이다. 이들은 바벨론이 이 세상의 질서, 절대적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던 때에, 그들을 향해 “NO”를 외친다. 그들의 용감한 외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태초에 마르둑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하며 세상 질서를 편입한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이다.

 

이러한 일은 오랜 세월이 지나 또 한 번 일어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고, 헬레니즘 문명이 왔을 때, 세상은 로마라는 나라의 힘에 의해서 질서가 재편되었다. 그들은 그 세상을 팍스 로마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낸 이는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로 불렸다. 그는 온 세상의 신으로 불렸다. 그는 주피터(제우스) 신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았다.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이 생산한 문서 중에 복음서가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는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1-3).”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똑 같은 고백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창세기에서도 그렇고, 복음서에서도 그렇고, 이 세상은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고백이다. 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단순히 과학적 사실의 근거로만 삼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이 세상(하늘과 땅)에 대한 긍정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그냥 아무렇게 존재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존재는 신적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는 거룩한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것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거룩하게 보지 못하고, 폄하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창조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어떠한 면 때문에 그 존재를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불경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국제사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IS 대원들의 테러를 보면, 그들은 테러를 저지르기 전에 알라 아크바를 꼭 외친다. 이는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뜻이다.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테러를 저지르면서 그가 예수는 위대하다, 예수 믿으세요!’라고 외친다면, 그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증오속에는 구원이 없다.

 

우리가 상대방(존재)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그 존재를 보면서 꼴보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떠한 존재(생명)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그 일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지더라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때문이다. 자연재해나 질병, 인간의 이기심, 탐욕, 배신감, 잔악성 등은 세상을 선하게 바라보기 참 힘들게 하는 요소들 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일을 통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가? 바로 창조신앙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것 외에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은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창조되었다는 고백이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세상의 절대화에 대한 거부이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 그들의 힘과 문명을 경험하면서 바벨론 세계의 절대성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중 대부분은 바벨론에 동요되어 그들의 힘을 숭배하고 그들이 심어준 가치관에 순응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똑 같은 일이 로마제국 시대, 즉 예수님 시대에도 반복되었다. 유대인들(이스라엘)은 로마제국(황제)의 힘에 압도되어 그들에게 순응하면서 살았다. 지도자 그룹(사두개인)도 있지만 그보다 서민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사케오이다. 사케오는 로마의 세금징수법에 순응해서 그들의 세금징수원으로 살았다. 그것이 그의 삶을 안락하게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케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 그러한 삶의 방식(로마제국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따라 살게 된다.

 

우리가 흔히 이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흔히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일례로, 요즘 부모들이 왜 그렇게 자녀들 교육에 신경을 쓰고, 자녀들을 소위 명문대에 들여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가?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들이 경험한 절대적인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때에 아버지와 함께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구속되면 안 된다. 우리는 다분히, 현재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으로 바꿔 놓는 것이다(속회공과 2).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여기며,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못살게 구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한 고백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활동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어느 것도 무시하거나 차별하고 증오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는 세상에 함몰되어 그것이 절대적인 양 얽매이지 않는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창조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 우리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속회공과 2과 질문)”,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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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4

들으라

(신명기 6:4-9)

 

주룩 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비가 안 오다, 이렇게 비가 계속 오니, 사람들의 생활은 불편할지 모르나, 만물들은 얼마나 좋겠는가? 산들이 기뻐 푸르게 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푸르름은 그들의 기쁨이다.

 

아모스서의 이 말씀이 생각났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니리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12).

 

요즘 시대를 말해주는 말씀이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다. 요즘, 먹거리가 풍부하다고 그것이 인간의 건강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먹는 게 풍성해서, 오히려 비만과 암이 옛날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늘었다. 정말 안전한 먹거리를 우리가 생산해서 먹는가? 대기와 땅과 바다가 모두 오염되어 버렸는데?

 

요즘, 기독교 신자들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에 널린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가지고 말씀이 풍성하다고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만 늘었다. 육신의 건강이 먹거리가 풍성해져서 음식을 많이 먹는 데서 오는 게 아닌 것처럼, 심령의 건강이 설교말씀을 전자기기를 통해 아무 때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데서 오지 않는다.

 

이렇게 물어보자. (속회공과 1과에서도 묻는 질문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고 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 자녀들에게 막상 신앙을 가르치려고 하면 걸리는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교회도 오래 다녔고, 말씀도 많이 들은 것 같 같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려니,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들통날까봐, 말씀을 못 가르친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막상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되어 있는데, 왜 우리는 놀러가?”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왜 아빠, 엄마는 맨날 욕만해?” 사실, 이런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게 겁난다. 자기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기갈이, 다른 게 기갈이 아니다. 요즘,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설교)말씀에의 접근성이 쉬워졌다 할지라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설교가 인터넷에 모아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다가와, 히브리서 412절의 말씀처럼, 나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못하고, 내 마음이 생각과 뜻을 주님의 생각과 뜻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말씀의 기갈을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풍성함에 빠져, 온전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동사가 나온다. 처음에는 들으라(hear)’는 동사가 나온다. 그리고 사랑하라(love)’, ‘새기라(be upon your heart)’, 가르치라(impress), ‘강론하라(Talk about them)’, ‘(손목에) 매라(Tie)’, ‘(미간에) 붙이라(Bind)’, ‘기록하라(Write)’가 나온다. 이 동사들은 모두 일맥상통하는 단어들이다. 이중에서, ‘새기라는 것은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고,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것은 자녀에게 각인시키라는 뜻이다. 강론은 언제든지 말씀에 대하여 토킹라는 뜻이다.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세 가지를 잘 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듣는 행위는 귀로 하는 게 아니다. 듣는 행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말씀은 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머물러야 한다. 엔터테인먼트와 훈련의 다른 점은, 엔터테인먼트는 귀를 즐겁게 하지만, 훈련은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나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 말씀을 듣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곳)’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말씀을 듣는가! 누가복음 645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과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들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않으려면, 우리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아이들은 먹을 게 너무 많으니까, 음식 귀한 줄 모른다. 누가 먹을 것을 줘도 감사할 줄 모른다. 너무 흔해서 탈이다. 똑같다. 말씀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지니까, 말씀 귀한 줄 모른다.

 

둘째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뉴스를 보니, 소비부진의 주범이 사교육비라고 한다. 한국 가정은 애들 공부시키기 위해 사교육비 지출을 최대한 확보하느라, 먹고, 입고, 노는 것을 다 줄인다고 한다. 고등학생 자녀 둘을 둔 가정에서는 사교육비가 한 달에 평균 500만원 정도가 지출된다고 한다.

 

그만큼 세상이 힘들어졌다는 뜻이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기 힘든 환경이라는 뜻이다. 대입시험에 성경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적으로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기회와 명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디모데 후서의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시절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아이들 세대의 기독교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아이를 덜 낳아서 인구가 감소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사는지, 아니면 말씀의 풍요로움 가운데서 사는지를 판단해 보려면 현재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가정 일이니 일일이 알기는 힘드나, 여러분 각자가 판단해 보면 알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또는 내가 지금말씀의 기갈이 아니라, 말씀의 풍성함 가운데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려면,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는 말씀은 바깥으로 보이는 행동을 말한다. 더욱이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써서 불이라는 말씀은 신앙을 드러내 놓는 것을 말한다.

 

마음 속으로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하면 뭐 하겠는가? 마음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사실 이게 가장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요한1서에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 3:18).

 

<아빠의 한 시간을 사고 싶어요>라는 웹툰이 있다. 아이가 아빠한테 묻는다. “아빠, 아빠는 한 시간에 얼마를 벌어요?” “?” “그냥요!” “아빠는 한 시간에 20달러 벌어.” “아빠, 10불 있으세요?” “?” “그냥요, 뭣 좀 사려고요!” “쓸데 없는 것 사면 안 돼!” 얼마 후, 아이가 20불을 들고 아빠에게 왔다. “아빠, 20불 드릴 테니, 아빠의 1시간을 저에게 주실 수 있죠? 아빠랑 1시간만 놀고 싶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것 같지만, 실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살 때가 많다.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산다는 것은, 1) 말씀을 듣는 것, 단순히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에 새겨서, 그 말씀으로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 2)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 3) 말씀대로 행하는 것, 이 세가지가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기갈 가운데 있으면서 풍요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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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1

세례와 시험

(마태복음 3:13-4:11)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다. 16일이 주현절인데, 주현절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드러난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세상에 드러나는 일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성경은 동방박사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 드러났는지를 알려준다. 왕의 별을 보고 헤롯 대왕을 찾아가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냐고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세상에 드러냈지만, 그 일 때문에, 아기 예수님은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천사의 현몽으로 인해 위기를 모면한다.

 

주현절기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이다.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은 누구인지 그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모순된 일이다. 세례는 일반적으로 죄 씻음의 행위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았다는 것도 굉장히 모순된 일이다. 시험은 일반적으로 연약한 피조물이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시험을 받으셨을까?

 

우선, 다른 이들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와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에 차이가 있다. 다른 이들은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지만,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은 이유는 15절 말씀 때문이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죄 씻음을 위한것이 아니라,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그 분의 뜻을 가리킨다. 그게 무엇인가? 구원이다. 예수님은 세례 받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이제 그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를 행하시는 분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건 사람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말하는데,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과 동일한 한계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표시이다. 세례는 단순히 죄의 씻김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결단해야만 한다. 그 운명은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를 뜯어 말린 이야기를 보도한다. 그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례를 거부할 수도 있었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십자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 그런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했다. 그래서, 세례는 순종과 똑같은 말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 바로 뒤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세례를 통하여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세상에 정체가 드러나면 시험을 당한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서 많은 시험이 닥치는 것을 종종 본다. 조그마한 일에서 감당할 수 없는 큰 일까지 일어난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교회 가다 큰 사고를 당해서 두 딸은 잃은 분도 있다. 그분은 교회 가다 그런 일을 당해서 무서워서 더 이상 교회를 못 다니겠다고 말한다. 처음에 말했듯이, 예수님도 아기 예수 때 동방박사를 통해 세상에 정체성이 드러났을 때 죽을 위기에 처해졌었다.

 

교회 오는데 아무 일 없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적어도 여러분은 예수 믿는데 있어 마귀의 극심한 방해를 벗어난,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 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평생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시험 받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본다.

 

첫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배고플 때,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생각나게 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픔을 느끼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그들을 죽이려 한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면, 우리는 쉽게 신앙을 포기하려 든다. 그러한 유혹은 우리의 신앙을 끊임 없이 괴롭힌다. 그럴 때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둘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였다. 우리도 끊임 없이 이러한 유혹을 받는다. 특별히 예수를 잘 믿는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오류이다. 주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수도 없이 하나님을 시험한다. ‘하나님, 내가 주님께 헌신했으니까, 나한테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요구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을 안 들어 주면, 교회를 떠나겠다고 협박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 또는 헌신을 빌미 삼아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오지만, 시편 9111절과 12절에서 하나님은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신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편 91:11-12). 이것 뿐만이 아니다. 주님께서 해 주신 약속도 있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시험한다. 그러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세 번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이다. 예수님께 드리운 시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의하지만 손쉬운 길을 택하느냐, 아니면 그 길을 단호하게 거부하느냐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은 끊임 없이 이러한 시험을 받았다.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신을 택할 것을 끊임 없이 유혹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이야기 이다. 그들의 제사장과 하나님의 제사장 엘리야가 한 판 대결을 벌이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이 아닌 것에 경배하도록 유혹 받고 강요 당한다.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자꾸 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 보겠다는 놀부 심보에 불과하다. 그런 마음이 들면,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물어보자.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런가? 정말로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인가?


사람은 무엇인가에 정신이 팔리는 이유는 그것을 할 때, 그것을 통해서, ‘살아 있다고 느끼지 때문이다. 마약하는 사람이 왜 마약하는가? 그거 할 때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돈 버는 데 미친 사람이 왜 돈돈하는지 아는가? 돈을 셀 때, 돈 냄새 맡을 때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라. 왜 그 일을 하는가? 그거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기 때문이 아닌가? (~ 살 것 같아.)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와 광야에서 시험 당하신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과 그 이후에 우리가 어떠한 일을 겪게 되는 것과 그 결과가 무엇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정체를 밝히면, 시험을 당한다. ‘저는 시험을 안 당하는데요라는 분은, 두 가지 중 하나다. ‘귀신이거나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거나.’

 

시험을 당하거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보다 먼저 시험을 당하신 주님께서 도우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1)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2)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3)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했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를 세례를 받은 것이고, 시험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긴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것에서 구원을 경험시켜 주겠다고 하는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언제나, 어느 때든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선포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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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 16:57

세례 요한의 죽음

(마가복음 6:17-29)


이것은 피에타 상이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의 시체를 안고 있는 조각상이다. ‘피에타는 라틴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25세 때 제작한 작품이며,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새겨진 작품이다. 그 후로,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세상 어디에도 그분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는데…”라며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보다 젊다는 것이다. 이는 신성한 처녀인 동정녀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이다.

 

지금, 어머니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했다. 자식을 잃었다. 피에타상을 바라보며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한 어머니 마리아에게 위로를 받으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신학적으로 비판 받는 일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군가의 위로 없이는 살 수 없는 큰 슬픔을 저마다 안고 살아가는 가냘픈 생명이다.

 

죽음은 언제나 슬프다. 오늘 말씀도, 죽음이 등장한다. 세례 요한의 죽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례 요한의 죽는 장면을 볼 때다, 그의 탄생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더 큰 슬픔과 안타까움과 의문이 몰려든다. 물론, 마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마가복음만 읽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죽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덜 슬플 수도 있다. 그러나, 4개의 복음서를 받아 든 우리들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뒤늦게 아들(늦둥이)을 얻는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해 보라. 금이야 옥이야 키웠을 것이다. 특별히, 사가랴는 요한의 탄생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아들 요한의 탄생을 놓아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가까지 지어 불렀다. 그 중에서 아기 요한을 이렇게 말하는 장면은 가슴 찡하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니리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1:76-78, 80).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요한이 태어났을 때 너무 기뻤으며, 그가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존귀한 자라고 믿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물론, 나이 많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들의 자식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는 것을 목격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허무한 죽음을 보면서도, 여전히 요한이 태어날 때처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릴 수 있었을까?

 

세례 요한의 죽음은 허무하다. 그의 탄생과 그의 사역에 비추어 보면 정말로 그의 죽음은 허무 그 자체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비참한 죽음, 참으로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말씀에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이다. 이 사람은 헤롯 대왕과 말타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다. 이 사람에게는 큰 윤리적 잘못이 있었는데,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의 아내와 이혼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에게서 아내를 빼앗아 결혼했다.

 

이 일로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부도덕한 일을 비판하는데,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나마 헤롯 안티파스는 요한을 참 선지자로 생각하여 그의 메시지를 무서워했는데, 오히려 헤롯의 부인이 된 헤로디아는 요한에 대하여 이를 갈았다. 그래서 그를 죽일 명분을 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헤로디아는 헤롯의 생일을 맞아 음모를 꾸민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자신의 딸 살로메가 신명나는 춤을 추게 만든 뒤, 헤롯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는 약속을 받아 낸다. 이때를 기회로 삼아, 헤로디아는 살로메에게 주문하기를 헤롯 왕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라고 지시한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큰 소리 뻥뻥 친 헤롯은 차마 자신의 체면을 구길 수 없어,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요구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가져다 준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자신을 미워한 한 여인의 음모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에서 이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신 이야기에 삽입되어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전도 여행에 나설 것을 주문하신다. 사실 가진 게 많으면, 그거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칠 수가 있다.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하나님 나라) 전파에 있지,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지 않다. 물론 너무 없어도 그거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굴의 기도를 날마다 드려야 한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 30:8).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짐들을 최대한 간편하게 하는 게 좋다. 이게 좀처럼 쉽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한 자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서 간편한 삶(simple life)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영성으로 여겨져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말라 고쳤다”.

 

여기서 회개하라고 전파한 것은 단순히, ‘회개하시오!’라고 말한 게 아니라, 복음을 전파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왕 되심과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왕 되심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그분을 따라 그 나라를 사는 자들은 삶이 간편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은 먹고 마시는 것’, ‘소유하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이 주신 계명의 핵심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 ‘는 쉽게 말해,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고, ‘평강은 쉽게 말해,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희락이 온다.

 

그런데, 하나님과 잘 지내고, 이웃과 잘 지낼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데서 온다.

 

세례 요한의 죽음과 관련하여 꼭 인지해야 하는 말씀은 다음 구절이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12-14).

 

복음을 전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친 것은 제자들인데, 이름이 드러난 것은 제자들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다. 이것을 기독교적 도덕(미덕)으로 보지 말라. 제자들(우리들)의 이름은 없고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은 단순히 도덕적인 일, ‘미덕과 겸손이 아니다.

 

우리는 겉말로는, “우리의 사역을 통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정작 속으로는 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내가 행한 사역을 통해서 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가 그토록 가볍게 시험에 드는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드러내고 싶으면 드러내라.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데 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면 어떤가! 괜찮다. 서로 이름을 드러내고 많이 칭찬해주시라. 지금 나는 기독교의 도덕(미덕)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런 말씀, 너무 식상하지 않나? “집사님, 권사님, 집사님(권사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마시고,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세요!” 이렇게, 예수의 이름과 나의 이름 드러내는 일을 경쟁이라도 하듯 동일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은 단순히 겸양과 겸손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면, 우리는 겨우 우쭐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에서만 끝나지만,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즉 예수의 이름은 구원 사건이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으로보았을 때 매우 허무한 죽음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의 죽음을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그린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남과 연관되어 묘사된다. 앞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제자들의 파송 이야기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의 이름, 즉 하나님 나라의 드러남 앞에서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어떤 죽음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인 슬픈 죽음,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 것에 대한 복음 증거의 죽음인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허무해보여도, 하나님 안에서는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죽음이다.

 

요한복음에서 묘사되고 있는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제자도의 마지막 길은,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예수의 이름은 흥하여야 하고, 나의 이름은 쇠하여야 하는것이다. 나의 이름은 아무리 드러나고 흥해 보았자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수의 이름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구원하는 이름, 예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내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과는 비교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드러내며 사는가?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내 이름만을 드러내고 죽는 것만큼 허무한 인생은 없다. 내 이름이 비록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나를 통하여 예수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면, 그렇게 세례 요한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구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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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2. 20. 05:38

현몽을 간구하는 기도

(마태복음: 1:18-25)

 

주여, 현몽하여 주옵소서.

꿈 속에서든, 어디에서든

주의 뜻을 밝히 보여 주옵소서.

우리는 어리석어

사건의 실체를 알지 못하나이다.

갈팡질팡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마리아의 혼전 임신 소식을 듣고

그를 가만히 끊고자 했던

의로운 요셉에게 현몽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기대어 사는

우리들에게도 현몽하여 주셔서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시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가르쳐 주옵소서.

현몽의 은혜를 통하여

요셉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주의 뜻을 역사에 드러냈던 것처럼

우리도 현몽의 은혜를 입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하나님 나라를 역사에 드러내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20. 05:26

현몽

(마태복음: 1:18-25)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아예 없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이 땅에 오신 일)을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묘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1-4 ㅡ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공부가 필요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조차 일관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잘 된 일이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다각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전해진다. 마리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마리아 주변에서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말해준다 (세례요한과 그의 엄마 엘리자베트, 그리고 그의 아버지 사가랴). 그 뿐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붙들고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도 보여준다 (시므온).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인 마태복음은 마리아의 남편요셉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오늘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은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 단계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부모(아버지)에 의해서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는 신랑과 신부가 어렸을 때 진행되는 일이다. ‘네 딸하고, 우리 아들하고 결혼시키자.’  둘째, 신랑과 신부가 성인으로 성장해 실제 결혼이 가까워졌을 때, ‘약혼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때부터는 서로의 관계가 법적 구속을 받는데, 이 관계를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적인 약혼 파기로만 가능하다. 약혼 기간은 대개 1년 정도 되며, 약혼 기간에 신랑과 신부는 육체적 접촉을 하지 않으며, 서로의 순결을 지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실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다. 이때 신랑은 큰 잔치를 벌이며,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이 문구에서 성령으로라는 말을 빼면,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에서 요셉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임신했다는 뜻이 된다.

 

요즘과는 달리,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혼 기간에 여인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임신하는 일은 통탄할 일이었다. 이것은 모세율법에 의하면 간음죄에 해당하는데, 이 죄는 죽음으로 다스려진다. 그 당시 약혼 기간에 간음죄를 저지른 여인은 돌에 맞아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하여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상식과는 다른 행동을 선택한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 이 문장 자체는 매우 비논리적이다. ‘의로운가만히 끊고자 하여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구절이다.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킨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그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간음한마리아를 돌로 쳐 죽였어야 한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간음한 마리아를 돌로 쳐죽이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그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의로움이란 단순히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은 율법의 문자를 넘어서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이다.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법이지, 생명을 죽이는 법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살릴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성이라고 증거한다.

 

그의 의로움의 절정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이 엄청난 일을 앞에 놓아두고, 요셉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마리아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정말 의로운 사람은 어떻게 살릴까를 고민하지, 어떻게 죽일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진실과 지혜는 바로 그 때 뜻밖으로하나님의 선물로 다가온다.

 

요셉은 이 일로, 아마도, 잠 못 이루며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고민에 지쳐 잠들었을 것이다 (영어로, drift off to sleep, 스르르 잠들다). 바로 그때, 요셉은 꿈을 꾼다. 성경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20). 요셉의 꿈 속에 주의 사자가 나왔다. 그리고 현몽한 사자는 요셉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니리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0-21).

 

문제적 심리학자, 프로이트라면 이것은 요셉의 무의식에 대한 표출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곤혹스러운 일에서 해방되고 싶은 요셉의 욕망이 표출되고 해방된 순간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경건한 심리학자, 융이라면 이것은 집단무의식에 대한 표출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최근에 발전한 뉴로사이언스는 이것을 잠자는 동안 일어난 마리아 임신 사건에 대한 요셉의 기억 통합 작용(memory consolidation process)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요셉의 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어떠한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다. 우리는 늘 실체를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 실체가 드러나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가령,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최순실 국정논단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그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한국의 역사는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이다.

 

현몽을 통해 마리아 임신 사건에 대한 실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간음 사건이 아니라, 성령 사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건이다. 이것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보충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

 

마리아 임신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뜻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은 꿈 같은 일이었다. 구약성경을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다. 구원은 그들에게 언제나 꿈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꿈 같은 일이 꿈을 통해서현실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이제부터 벌어진다. 꿈을 통해 진리가 드러났다. 그리고 요셉은 잠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24).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잠에서 깨어난 요셉이 이제 어떻게 행동하게 할까라는 것이다. 요셉의 의로움은 그러한 계시(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일)를 받은 것이 아니라(물론 의로운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계시도 받았겠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시가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 계시를 받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서 완성된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행동했다.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25). 참 조마조마한 이야기이다. 만약,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참 이상한 꿈이 다 있군하면서 그 꿈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그리고 율법대로 마리아를 돌로 쳐 죽였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역사가 바뀌지 않는 건, 또는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는 건, 꿈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는데도, 그것을 우리가 삶의 현실에서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책임공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힘들고, 사는 게 힘든 것은 모두 너 책임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로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약속 따로, 믿음 따로,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요셉은 행동의 근거를 경건(율법 또는 자기 의)이나 문화에서 찾지 않고, 믿음에서 찾았다. , 그는 믿음으로 행동했다. 그는 하나님에게 믿음을 두었고,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마음을 바꿨고, 행동을 바꿨고, 역사를 바꿨다. 믿음은 내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도 바꾸는 일이다. 만약 요셉이 마음만 바꿨다면, 그는 마리아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요셉이 마음은 바꾸지 않고 외적인 행동만 했다면, 그는 마리아를 데리고 왔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살다가 마리아에게 무슨 짓을 했을 지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믿음은 마음과 행동을 모두 바꾸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평화의 촛불을 켰지만, 왜 우리는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없이 하는 행동은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이고, 상대방에게도 상처가 된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새로운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교회 공동체니까 교회 공동체 내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왜 교회 공동체 내에 평화가 없는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5:23-24).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진리이고 실체이고 하나님의 계시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요셉은 진리가 드러났을 때, 실체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 마음(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역사를 바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진리의 말씀을 듣고, 형제에 대한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서, 역사를 만들며 사는가? 말씀을 통해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하는 행동만큼 허무하고 공허한 게 어디 있는가? 마음을 바꾸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행동으로만 마리아를 데리고 오니까, 평안도 없고 역사도 안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나와서 예배드리는 행위만 하니까 예배 드린 후에도 여전히 삶의 문제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고민 가운데 있고, 그 고민을 놓아두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어떠한 현몽(말씀, 계시, 실체)’을 받으셨는가? 성경에서 요셉은 현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지만, 우리는 일차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 삶의 문제가 있고, 구원이 간절하시거든, 우선 성경을 보시라.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뜻밖에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셨거든, 요셉과 같이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 보시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인,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시라. 주님께 마음을 두고, 주를 의지하는 자, 주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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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신앙, 시각과 청각의 미학에서 촉각과 후각의 미학으로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신앙인들)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현대(개신)교회에서 매우 부정한 것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지, 교회 와서 또는 매체를 통해 목사의 설교를 듣는 행위가 아니다.

 

매체를 통해 듣는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 있다. 원래 매체를 거치면 매체 건너편에 있는 존재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들의 의식은 그렇게 인식하도록 진화되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TV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존재를 유명인(celebrity)으로 인식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러워한다.

 

롤랑 바르트는 미학을 논하며 미학의 요소를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한다. 미학에는 촉각이나 후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는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는 그들을 오직 시각과 청각으로만 접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없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시각과 청각으로 접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아름답게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촉각과 후각으로 하는 것이다. 남녀가 처음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점점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 있는 관계는 애잔할지는 몰라도 현실성이 없다. 타자의 존재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넘어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갈 때 온전히 파악된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 연인의 사이에는 언제나 불협화음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서로의 실체를 맞닥뜨리며 그 존재를 감당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이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서만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에게서는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힘들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인은 길가요, 돌밭이요, 가시덤불에 불과하다. 귀만 커져 마음이 완고할 뿐 아니라, 박해와 핍박을 한 시도 못 견디고, 염려와 유혹과 욕심에 취약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학의 개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가톨릭의 예배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미사(Mass)에 참석해 사제가 들어올리는 빵과 포도주를 보며, 사제가 읊조리는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의 구원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사제의 그러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 행위를 더 많이 보고자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느라 분주했다.

 

루터는 중세의 그러한 미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가 아닌, 촉각적이고 후각적인성도의 교제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루터는 미사(특별히 성만찬; 개신교에서는 미사를 예배라 한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가 내어 주신 몸을 끌어 안아 그 안에서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 강조했다. 성도의 교제는 멀리서 바라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접촉하는 것이고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피냄새와 땀 냄새를 맡는 것이다.

 

현대(개신)교회의 신앙인들은 매체를 통해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보고 듣는일을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를 가로 막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설교 듣는 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되는 설교 동영상은 본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부득이한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해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지 못한 이들의 영적 조화를 돕기 위한 봉사의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영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듣는 행위는 청각의 작용이 아니라, 존재의 작용이다. 신명기 6장의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4-5). 이 말씀에서 보듯이, ‘듣는 행위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지, 귀만 쫑긋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사실 설교는 성경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약간의 풀이가 필요하겠으나, 성경 자체가선포되고 기록된하나님의 말씀이니 그것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말씀을 잘못 해석하느니 그냥 읽는 게 훨씬 낫다고까지 말한다.

 

신앙은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보고 듣는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신앙생활은 그만 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끌어 안고, 사느라 거칠어진 성도의 손을 마주 잡고 그들의 피냄새와 땀냄새를 맡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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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2. 17. 12:47

그리고, 비가 왔다

 

시선이 마주치기 전까지

구름은 움직이지 않는다

엄마는 신발을 들고

아가는 엄마를 든다

목인사를 건네며

바삐가는 바람에게

길을 묻는다

낙엽이 대신 대답한다

친구가 오지 않아 슬펐던 가을은

장마같은 눈물을 남기고 떠나갔다

가늘어진 목구멍 사이로

저녁은 휘파람 소리를 내고

산등성이에 다다른 하늘은

구름과 시선을 맞춘다

 

등을 더듬는 구름아

그건 산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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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17. 12:45

불신과 믿음의 변증법

(마가복음 5:35-6:6)

 

오늘 말씀은 믿음과 불신이 충돌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본다. 믿음은 한계(불신, 죽음, 친숙함)를 뛰어 넘어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는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 그 사이에 낀 혈루병 여인, 그리고 다시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회장당 야이로는 예수님이 혈루병 여인을 고치는 장면을 보고, 희망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얼른 가시면 우리 딸이 죽지 않을거야.’ 그러나, 가는 도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저 절망에만 휩싸였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곁에선 예수님은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 “두려워하지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à 절망적인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이 위로가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하여, 기억해 두면 좋은 말씀이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 상황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였다.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떠드는 것으로 번역된 말은 원래 훤화함으로 번역되었던 단어이다. 그리고 영어로는 ‘commotion’이라고 번역한다. 이는 마음에 근심이 있거나 두려울 때, 정신적인 동요나 흥분이나 소란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다.

 

성경은 이러한 상황, 사람의 마음을 예수님이 봤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한계 상황에 부닥쳤다. 그들은 더 이상 그 뒤나, 그 이후를 못 본다. 절망은 그때 다가온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이 절망이다. 그들은 야이로의 딸에게 임한 죽음을 보고, 절망했다. 그 뒤나, 그 이후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기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적 혼란을 느끼며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봤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 여기서 떠들며 우느냐는 왜 시끄럽게 우느냐는 뜻이 아니다. 이는 왜 너희들이 한계 상황에 부닥쳐 그 뒤를 보지도 못하고,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왜 그렇게 절망하며 안절부절 못하느냐는 말씀이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정말 멋진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르게 보셨다.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멋진 일이다. 좀 일이 안 되면, 좀 일이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절망하고 실망하고 시험에 들지만, 우리가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을 비웃는다. 그들의 비웃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은 그들의 불신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비웃음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한계를 경험했을 뿐이다. 그들이 경험한 한계는 죽음이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것 때문에 불신에 쌓인다. 그들의 불신은 그렇게 얼토당토한 것만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이것은 먹을 게 없으면 굶어야 했던 노인 세대와 먹을 게 없으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는 젊은 세대와의 간격보다 더 큰 간격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렸을 때는 먹을 게 없어서 굶었어. 손자: 먹을 게 없으면 라면이라도 드시지 왜 굶으셨어요?

 

이러한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한계를 경험한 자들에게 박힌 불신과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행하실 거라는 믿음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40절 말씀을 보자.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은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고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사…” 그렇다. 아이의 부모와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들이 바로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이었다. 아이의 부모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간절함이 있게 마련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간절함이 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벌이실 거라는 간절함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을 간절히 믿었다. (우리도 우리 교회에 대하여, 부모와 제자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드디어, 불신과 믿음의 간격이 메워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예수님의 이 한마디이다. “달리다굼” – ‘소녀야 일어나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소녀를 살리신 일은 단순히 죽은 소녀를 살게 해서 그의 부모를 기쁘게 하고,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복음이다. 12살 먹은 여자 아이가 죽었다 다시 살아났지만, 그는 머지 않아 다시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궁극적인 복음이 될 수는 없다. 12년 사나, 120년 사나,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다른 게 뭐가 있는가? 우리에게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신과 믿음 사이를 메워주는 궁극적인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다음 전개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고향에서의 활동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고향으로 간다. 우리는 거기가 나사렛이란 동네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사람들은 놀란다. 그런데, 그들의 놀람은 믿음의 놀람이 아니라 불신의 놀람이었다.

 

예수에 대한 의문의 서술들이 펼쳐진 후, 마지막에 예수님에 대한 불신의 단어가 등장한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배척하다는 믿음과 반대되는 반응이다.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예수님의 직업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고향 사람들은 그와 어려서부터 함께 컸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6:4).이는 다른 곳에서 존경 받는 선지자라 할지라도 고향에서는 존경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친숙함이 모욕을 가져온다.”는 말이 있다. 친숙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진가를 몰라볼 때가 많다. 특히 가족들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가장 인정을 못 받는 부류가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은 참으로 특이한 집단이다.

 

또한 가족 외에, 나와 더 친숙한 부류가 있다. 누구인가?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도 친숙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어떠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모른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지 말라. ‘못해요, 안돼요하던 사람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을 때 어떤 일을 감당하게 될지, 아무도, 나 자신도 모르는 법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의 한계를 보았다. 그 한계는 불신을 가져왔다. 그것은 죽음친숙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개의 한계는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죽음에 친숙하거나, 또는 친숙해서 죽어 있거나,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토록 깨어 있으라!”고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친숙하거나, 친숙해서 죽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복음이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깨워보자. , 죽음의 한계(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갇히는 것)에 부닥쳐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고 있었다면, 너무나 친숙해져서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죽어 있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면, 그 한계 상황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우리의 존재를 던져 보는 것은 어떨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Do not be afraid any longer, only believe.” 그러면, 분명, 오늘 말씀처럼,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인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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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2. 12. 18:20

시간

 

토끼가 굴에서 나왔다

독수리가 하늘을 유유히 난다

땅거미 질 무렵

길게 늘어진 거미줄에

잠자리 한 마리가 걸터앉는다

붕어가 잠수를 한다

스스로 꼬리를 잘라낸 도마뱀이

칼 춤을 춘다

올빼미가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다

별똥별이 지그재그로 하강한다

나무가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집게벌레가 하품을 한다

모래바람이 분다

시계가 서쪽으로 기운다

창문에 노란색 손수건을 단다

거북이가 총총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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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