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6. 11. 27. 16:30

파도 2

 

눈물이 눈 밖으로 나오려고 합니다

뚝 떨어지지 않고

비명을 지르려고 합니다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눈물은 모두 당신의 손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오릅니다

 

해지는 것을 보고 서쪽 인줄 알았습니다

하늘과 맞닿은 곳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밀려옵니다

 

몸 속 어딘가에서 침삼키는 소리가 들립니다

석양이 부서지는 쪽을 향해 앉았습니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습니다

 

따뜻한 입술

덜어주는 입술

다문 입술

용감한 입술

 

그날 나는 그만

입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회  (0) 2016.12.10
혐오  (0) 2016.12.10
세월  (1) 2016.11.26
파도  (0) 2016.11.25
꽃과 벌  (0) 2016.11.18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1. 26. 14:41

세월

 

왜 안 보이나 했더니

뒤에서 따라왔구나

나만 몰랐구나

뒤에 눈이 달렸다면

뒤돌아 너를 응시했을 텐데

 

자식이 등 뒤에서 찍어준

사진을 보고 이제서야 알았구나

내 등이 저렇게 굽었구나

내 다리가 저렇게 휘었구나

내 머리가 저렇게 빠졌구나

 

그동안 뒤에서 나 몰래 따라오느라

고생했구나

가는 것 중에

나와 함께 끝까지 가는 것이

너 밖에 없구나

이제는 나란히 가자 꾸나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혐오  (0) 2016.12.10
파도 2  (2) 2016.11.27
파도  (0) 2016.11.25
꽃과 벌  (0) 2016.11.18
아들의 얼굴  (1) 2016.11.14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1. 25. 14:33

파도

 


처럼,


거침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부서질지언정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도 2  (2) 2016.11.27
세월  (1) 2016.11.26
꽃과 벌  (0) 2016.11.18
아들의 얼굴  (1) 2016.11.14
그리스도의 얼굴  (0) 2016.11.1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22. 12:35

최고의 감사

(렘 23:1-6 / 23:33-43 / 1:15-20)

 

오늘은 추수감사절이기도 하지만, 교회력에 의하면 그리스도 왕 주일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왕 주일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교회력인데, 반기독교 정권이나 세속적 정부에 의해 핍박 받는 교회를 위하여 제정된 교회력이다.

 

이라고 하는 개념은 현대 헌법적 민주주의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1789714일에 촉발된 프랑스대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된 민주주의의 권력에 대한 기본 개념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을 받아들여 민주주의국가를 이룩한 나라에서는 더 이상 왕권의 개념은 없다.

 

민주주의의 개념이 발전되기 전의 왕권의 기본개념은 왕권 신수설이었다. , ‘왕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사상을 근간 삼아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대표적인 왕이 프랑스의 루이 14세이다. 그런데, 이것은 민주주의의 권력개념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개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은 대의제도와 선거제도를 통해 권력을 대표(President, 대통령)에게 양도한다. 대통령의 임무는 국민이 양도해준 권력으로 나라의 살림을 국가의 모든 국민이 만족하도록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 대통령은 국민을 섬기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헌법과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왕권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으로 고백하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 기독교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속적 왕권과 헷갈리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세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타락한 왕권이 아니라, 예레미야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는 우리의 공의이시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거룩한 왕권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공직을 잡긴 했으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직을 수행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그들은 이방 신 숭배를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우상숭배 방관 및 조장). 이게 전부가 아니다. 왕은 모든 사람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정의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정의 구현 실패). 그들은 자신의 삶이나 백성들의 삶 가운데서 의로운 삶을 보여주지 못했다(본이 되지 못했다, 성결 실패). 그들은 군사적, 정치적 수단으로 국토를 방어하는 데서 만 약간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백성들의 유익보다 자신의 이익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이 왕들은 백성들을 돌보는 데 게을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고 삼켜버렸다.

 

왕들이 자기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을 갖는 것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들었고,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자기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왕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23:5-6).

 

지도력의 부재로 인해 나라가 어려울 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악행을 저지르는 지도자는 심판하시고, 대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지도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우리가 어디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누가복음의 말씀은 이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약속의 말씀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고 고백한다. 예수는 다윗에게서 난 한 의로운 가지이다. 그를 통하여 유다와 이스라엘이 구원 받았고, 온 인류가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 예수의 이름은 바로 임마누엘’,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는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에서는 예수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가 등장한다. 해골(골고다 언덕)이라는 곳에 십자가가 세 개 세워진다. 예수님은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시고, 두 행악자 중 한 명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다른 한 명은 예수님의 왼편에 달린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던 관리들과 군인들은유대인의 왕이라 써 있는 패를 보면서 예수님을 희롱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메시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명도 예수님을 희롱했다. “네가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님의 왼편 행악자와 오른편 행악자 중 누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른다. 다만, 우리는 오른편 행악자가 구원 받았다고, 다른 말씀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와 대화한 이야기도 누가복음에만 나올 뿐이다.)

 

이들은 여전히 세속적 왕권의 틀에서 예수님의 왕권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힘의 구원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왕권의 개념은 로마 황제를 통해서 획득한 것이었다. 로마 황제는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고, 메시아로 불렸고, 왕으로 불렸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힘과 폭력에 의해서 성취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보며 예수도 로마 황제처럼 힘과 폭력에 의해서 자기들과 자기 자신을 구원할 것을 기대하고 요청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왕권은 그들이 생각한 힘과 폭력에 의한 왕권이 전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매달았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이유는 예수님의 양 옆에 달린 행악자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한 명의 행악자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23:41).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죄를 위한 죽음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의한 폭력적 죽음이 아니라, 죄의 폭력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죽음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누가복음 본문에서 확인한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를 이렇게 구원하신다. 행악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간구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은 그의 간구에 이렇게 응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어떤 어린 아이가 빵을 주워 먹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문제를 냈다고 한다. “다음 그림을 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그림 속의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5분간 그림을 보며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생각해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명쾌하게 대답한 아이의 답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같이 아픔을 해결해 주려 하고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될 것이다.” 정말 멋진 대답이다.

 

우리의 감사는 어떠한 감사인가? 생각해 보면, 우리의 감사는 다른 이와 비교해서, 비교 우위에 선 것에 대한 감사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심각한 경쟁사회이다. 그렇다 보니, 경쟁에서 이긴 것에 대한 감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어떤 교회의 감사헌금봉투에 적힌 내용이다. 1) “수습 잘 끝내고 정식 계약하게 하심 감사합니다.“ 2) “그 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LG트윈타워 통합물류 입찰에 주님의 회사인 당사를 선정케 해주신 나의 주님께 감사 또 감사 드립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 없는 자연스러운 감사이다. 그러나, 뒷면을 잠시 들여다보면 얼마나 심각한 감사인지 금방 알게 된다. 수습을 잘 끝내고 정식 계약을 하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나, 수습직원들이 이 사람 한 명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사람과의 경쟁에서 져서 정식 계약직을 얻지 못한 탈락자가 있을 것이다. 입찰 건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가 독점 입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경쟁회사를 물리치고 입찰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자기 회사는 입찰에 당선되어 좋겠지만, 입찰 경쟁에서 진 회사는 회사 운영이 힘들어졌을 것이다.

 

나를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우리의 왕이신가? 물론 힘과 폭력을 쓰는 로마 황제 같은 구세주와 왕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고, 우리를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분이 왕이 아니시다. 만약, 여러분 중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고,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분이 있다면 예수님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낸 문제 중에 이런 문제도 있었다. 1) “옆집 아주머니께서 사과를 주셨습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가요?” 답은, “감사합니다.”이다. 그러나, 한 초등학생은 이렇게 답을 적었다. “뭘 이런 걸 다~” 2)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답은, “우리를 낳아주셨으니까.”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 초등학생은 이렇게 답을 적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것은 요즘 사람들이 감사해야 할 것에 대하여 얼마나 온전히 감사하고 있지 못하며 사는지를 보여주는 풍자이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왜 감사하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이와 비교해서 내가 우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다른 이와 경쟁해서 내가 이겼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그러한 감사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감사는 아닌 것 같다.

 

온전히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를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교우위에서 떨어졌을 때, 경쟁에서 졌을 때, 우리는 어떠했는가? 그래서 감사한 적 있는가? 그럴 때 하나님께 감사하다며 감사헌금봉투에 감사의 이유를 적어 헌금을 드린 적이 있는가? 비교우위에 올라섰을 때, 경쟁에서 이겼을 때 감사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 비교우위에서 떨어졌을 때, 경쟁에서 졌을 때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무시당하고 핍박당하고 죽어도 괜찮다. 우리에겐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쩨쩨하게 우리를 남과의 비교우위에서 올라서게 하시고,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골로새서가 증언하고 있듯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모든 왕권들과 주권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보다 먼저 계신 분이고, 교회의 머리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고,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분이시다. , 주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감사이시다. 이 최고의 감사를 모르면서, 이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면서, 다른 감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최고의 감사이신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라는 찬양이 저절로 나올 것이지만,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감사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로 인해 일희일비(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은 일 있으면 막 감사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나쁜 일 있으면 절망했다)하며 감사를 모르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여호와 우리의 공의라는 이름의 왕을 주셨다. 그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왕이신 것을 고백하고 선포한다.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는 구원을 받겠고 평안히 살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감사 또 감사가 넘치게 될 줄로 믿는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0) 2016.12.06
믿음이 있다는 것  (1) 2016.11.30
들을 귀  (0) 2016.11.17
주님께 비스듬히 기대기를 간구하는 기도  (0) 2016.11.13
비스듬히  (0) 2016.11.13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1. 18. 07:24

꽃과 벌

 

윙윙

어지럽다

더이상 허공을 날 수 없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비상착륙유도장치가 켜지고

난데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활주로를 살랑살랑

흔들어 놓는다

윙윙

메스껍다

활주로에

고꾸라지는 순간

목구멍까지 차오른

열병은 터지고

토사물이 쏟아져 나온다

비로소

꽃은

피어난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월  (1) 2016.11.26
파도  (0) 2016.11.25
아들의 얼굴  (1) 2016.11.14
그리스도의 얼굴  (0) 2016.11.12
인생  (0) 2016.11.0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7. 10:26

들을 귀

(마가복음 421-29)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의 비유가 나온다. 등불비유와 부지중에 자라는 씨 비유다. 앞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22절 말씀은 번역을 어렵게 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이것을 쉬운 말로 옮겨 보면 이런 뜻이다. “무엇이든지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무엇이든 감추어진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조금 역설적이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숨겨져 있는 것 같고, 감추어져 있는 것 같으나, 결국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 말씀은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경우를 말한다. 두 문장이 그것을 밝히고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리고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이다. ,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귀 없는 사람은 없다. 특별한 문제를 가지고 타고난 사람이 아닌 이상, 모두 귀가 있다. 그런데,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뜻이 무엇인가?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 안 된다. 쉬운 말로 옮기면 이런 말이다. “너희는 듣는 말을 새겨들으라. Take care what you listen to”. 우리의 일상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건성으로 듣는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듣더라도 새겨듣지 않는다.

 

기독교 전통의 영성훈련에 기도어린 경청(Prayful listening)”이라는 말이 있다. 영성가들이 한결 같이 강조하는 것은 영성훈련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자기의 마음과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 ‘기도어린 경청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기도하는 심정으로 듣는 것을 말한다. 기도어린 경청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자기의 자아를 죽이면서 듣는 것을 말한다. 기도어린 경청이란 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라기보다도, 타자가 오롯이 나에게로 다가 올 수 있도록 나의 전 존재를 온전히 개방하는 것을 말한다. <에큐메니안,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③> ‘기도어린 경청김오성 목사>

 

성경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기도어린 경청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그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지식에 예수님의 말씀을 비추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거부한다. ,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예수님께 온전히 개방하지 못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들음은 단순히 귀를 상대방의 입에 가져다 대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존재를 여는 행위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지금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그림을 보면서 설명하면 좀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음 그림은 Giovanni Battista Caracciolo(지오반니 바티스타 카라촐로)가 그린 <The Young Saint John in the Wilderness, 광야의 젊은 세례 요한>이다. (그림)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이로다”(1:29).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이것은 라틴어로 “Ecce Agnus Dei”(Behold the Lamb of God)라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젊은 세례 요한은 “Ecce Agnus Dei”라는 글자가 써 있는 지팡이를 발 앞에 내팽개치고,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원래 세례 요한의 영성은 이 한마디로 표현된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세례 요한의 손가락 또는 삶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그림에서는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이것은 배교나 다름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 그림을 보고 추적하기 쉽지 않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들음에서 멀어지면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의 세상에 갇혀 산다. 자기 자신의 세상에 갇혀 사는 자들은 정의와 평화, 사랑과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지 못하고, 그 나라가 자신의 삶에 임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그는 그렇게 멸망 당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그 나라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구원이 임한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비유는 부지중에 자라는 씨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부지불식 간에 씨에서 싹이 트고 이삭이 나고 곡식이 맺히는 것처럼 부지불식 간에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의 삶 속에서 임한다. 농부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싹이 자라고 열매가 맺는 것은 전적으로 땅의 힘에 달려 있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가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의 삶에 임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만을 사모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는 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우물 안 개구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그러나, 마음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삶 속에 임하는 소망을 꿈꾼다.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기도 하지만, 현재적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귀신을 내어쫓고, 죄를 사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나의 삶에 임하기를 소망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축귀와 용서, 그리고 치유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야 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는가? 예를 들어, 1) 암 병 환자는 암 병이 없는 몸을 기대할 것이다. 2) 마음이 아픈 자는 눈에 눈물 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3) 가난한 자(돈이 없어 고통 받는 자)는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할 것이다(돈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았으면 할 것이다). 4) 이런 저런 이유로 차별 받는 자들은 차별 없는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5)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는 죽어서라도 그 자식을 다시 만나기를 기대할 것이다. 6) 땀흘려 일군 농작물을 빼앗기는 가난한 농민에게는 자기가 땀흘려 일군 농작물을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고 가족들과 배부르게 먹는 것을 기대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하나님 나라, 물론 우리의 좁은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귀 있는 자만 그의 말씀을 듣고 이러한 소망을 품고 살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한다. 존재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고, 그 안에서 기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거라고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태도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기대를 품고 희망 가운데 사는 자와 자기 자신에게 갇혀 아무런 기대도 없고 희망을 갖지 못하는 자의 삶은 같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소망이 가득하길 바라신다. 소망이 가득한 삶, 생명이 가득한 삶의 첫 발걸음은 들을 귀를 갖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도어린 경청을 꼭 실천하고 실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부지중에 반드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각자의 삶 속에서 경험하며 사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이 있다는 것  (1) 2016.11.30
최고의 감사  (0) 2016.11.22
주님께 비스듬히 기대기를 간구하는 기도  (0) 2016.11.13
비스듬히  (0) 2016.11.13
우리는 성도입니다 (만성절)  (1) 2016.11.09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1. 14. 16:47

아들의 얼굴

 

어둠의 결을 따라 고이 잠든

아들의 얼굴에

점이 하나 둘 들어와 박힌다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일까

 

아버지는 어릴적

내 얼굴에 난 점을 센 적이 있다

 

네 얼굴은 밤하늘과 같다고

네 점은 별이라고

 

명랑한 눈을 지그시 감은

아들의 얼굴은 초롱하다

 

아홉 해 동안

아들의 얼굴에 네 개의 별이 떴으니

북두칠성을 보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북극성처럼 분명한

아버지의 아들이건만

 

아들의 숨소리는

별을 데리러 먼 데를 여행하고 있는

우주선 같다

 

잘자라 우리 아들

아버지 눈동자에 박힌 별이여

저물지 않는 샛별이여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도  (0) 2016.11.25
꽃과 벌  (0) 2016.11.18
그리스도의 얼굴  (0) 2016.11.12
인생  (0) 2016.11.09
기도  (0) 2016.11.0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3. 18:11

주님께 비스듬히 기대기를 간구하는 기도

(21:5-19)

 

주여, 주께 비스듬히 기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가 기대어 있는 생명의 토대가 흔들려

우리의 삶도 흔들리고 있나이다.

살아가려면 기대어야 할 것이 많은

연약한 생명이오나,

오직 우리가 영원히 기댈 수 있는 것은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주님 밖에 없사오니

주께 비스듬히 기댄 우리를 밀어내지 마시고

우리를 주의 영원한 생명으로 품어 주옵소서.

생명을 위협하는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며

때로는 혼란스럽고

때로는 겁에 질리지만

주의 약속을 말씀을 굳게 붙잡고

거짓 선지자들의 허황된 유혹을 물리치며

영원한 생명의 토대이신 주께

살포시 비스듬히 기대오니,

주여,

그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여 주옵소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주여,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인내하고 또 인내하겠사오니,

우리의 영혼을 평온케 하시고

생명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고의 감사  (0) 2016.11.22
들을 귀  (0) 2016.11.17
비스듬히  (0) 2016.11.13
우리는 성도입니다 (만성절)  (1) 2016.11.09
씨 뿌리는 자의 비유  (0) 2016.11.0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3. 18:02

비스듬히

(누가복음 21:5-19)


비스듬히

/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1. 생명은 강인하기도 하지만 연약하다. 생명에는 강인함과 연약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존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기대는 것이 많다.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도 실은 땅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이고,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이다. 땅이 흔들리면 나무도 흔들리고, 허공이 흔들리면 나무도 흔들린다. 기대고 있는 것이 삐끗하면 생명도 삐끗한다. 그래서 생명은 연약하다.

 

2. 살면서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참 그렇다. 어느 날은 좋다가도 어느 날은 흐리다. 그럴 때면 마음이 변덕스럽고, 신앙이 변덕스러운 것 같아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믿는 자라면 언제나 맑은 날만 가득해야 하는데, 흐린 날이 오면 믿음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가하고 의심이 들기도 한다.

 

3.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을 목격하고 박해를 경험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사역 중이었고, 특별히 헤롯성전을 중심으로 막바지 사역이 한창 중이었다.

 

4.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5).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성전이라 불렸다. 헤롯성전은 로마 황제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은 헤롯대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지은 어머어마한 규모의 성전이었다.

 

5. 헤롯이 그토록 성전 건축에 공을 들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직 정치적 목적만이 존재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평생 적으로 생각했던, 에돔(이두매) 출신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정치술로 로마의 유력한 정치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그 세력을 등에 업고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6. 헤롯성전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서쪽 벽만 남아 있는 상태다. 현재 예루살렘에서 빛나고 있는 건물은 무슬림 사원(바위 사원)이다. 헤롯성전은 바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예언했듯이, 서기 70년경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무너뜨려졌다. 이것은 참으로 허무한 일이었다. 헤롯성전은 BC 20 년경 공사가 시작되어, AD 63 년경 공사가 완료될 정도로 공사 기간이 80여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완성한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7. 헤롯성전은 오늘 말씀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성전 외부 뜰은 한꺼번에 40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고, 그 치장이 아름다울 데 그지 없었다. 사실 BC 20년에 시작된 외부 공사는 9년만에 끝났지만, 내부 공사 때문에 공사 기간이 80 여 년이나 흘렀던 것이다.

 

8.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유대인 신앙의 특징은 성전신앙이다. 그들은 성전에 기대어 살았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성전과 관련된 민족의 크나큰 아픔이 있었다. 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민족적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았다. 그런데, 그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9.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이미 그것을 한 차례 경험한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도 어떠한 재해가 임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10. 2004년도에 인도양에서 쓰나미(지진해일)가 발생하여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지에서 23만 여 명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한국의 어느 설교자는 그 사건을 우상이 판 치는 동남아시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2005년도 뉴올리언즈를 덮쳤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뉴올리언즈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교한 미국과 오스트리엘리아의 설교자도 있었다. 이렇듯, 기독교인들은 자연재해든, 질병이든, 개인이나 가정에 나쁜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11. 재해가 발생하면, (신앙인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불안해지는 법이다. 마음이 극도로 약해지고, 정신적인 패닉이 온다. 거짓 선지자는 그 틈을 파고 든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거짓 선지자를 섣부르게 따라 나선 것 때문에 더 심한 멸망의 길을 걷는다. (요즘 한국사회의 최고 핫 이슈인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다. 엄마 아버지를 잃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박근혜에게 교묘하게 다가선 것이 최태민이라는 사람이고, 그의 거짓 예언에 속아 더 심한 멸망의 길을 걸은 사람이 박근혜이다. 자신만 망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12. <유대 전쟁사>를 쓴 유대인 출신의 유명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헤롯성전이 로마의 침략을 받기 전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전쟁의 소문에 불안해 하던 유대인들에게 그 거짓 선지자들은 성전으로 피신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 성전으로 몸을 피했다가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단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유대인들의 슬픈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13.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8). 재해 뿐만이 아니라, 신변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또는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또는 욕망이 생기면 사람들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법이다. 사탄, 또는 사기꾼들, 또는 거짓 선지자들은 그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마음을 적당한 타이밍에 꿰차고 들어오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14. 대한민국에서 점집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강남이다. 욕심 많은 부자들의 욕망 때문이다. 점집이 가장 잘 되는 시기는 법조인들(,검사)의 승진 심사를 앞둔 시점과 입시를 앞둔 시점이다. 그리고 점집을 간절하게 찾는 모든 사람들은 신변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한 사람들이다.

(한국 다녀와서 표정이 밝아진 어느 교인의 이야기 목사님, 점쟁이가 그러는데, 내년부터 좋은 일이 있을 거래요~).

 

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자연재해나, 신변에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는 못된 습관부터 버려야 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님으로 신실하게 섬겼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신변에 일어나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6. 오늘 말씀은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매우 아포칼립틱(묵시적, 무시무시한 언어)하게 전하고 있다. 우선, 성전이 무너진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가 있으리라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고 말한다.

 

1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게 심판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너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러한 일이 발생하거든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라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

 

18. 그렇다. 우리의 주변, 또는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때로는 이해 안 되는 힘들고 어려운 일’, 우리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일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증거가 되는 일이다. 우리는 그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 두려워 하거나 무서워 하거나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나쁜 일(안 좋은 일, 힘든 일)이 생겨도 두려워하거나, 거짓 선지자들을 따라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불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려움은 내가 믿는 바를 증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19.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박해는 불평의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믿는 바를 증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당하며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간절히 믿는 데 왜 이러한 박해를 당하게 하세요?’라고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박해 앞에서 그들이 믿는 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어떤 것에 기댄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 우리가 매일 같이 경험하는 세상은 악하고 불의하다. 한국의 정치상황이나, 미국의 정치상황, 이렇게 크고 거창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의하고 악한 것들로 즐비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심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계신데,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해? 세상 살기 정말 힘드네. 먹고 살기 왜 이렇게 힘드냐!”

 

21.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기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 ‘왜 하나님이 계신데, 이렇게 세상이 악해?’가 아니라, ‘세상은 이렇게 악하지만, 하나님이 계셔서 다행이야가 우리의 희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22.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는 실제로 어디에 생명을 기대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 정치? 가족? ? (건강)? 순실이?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것들이다.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헤롯성전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졌다. 임금과 집권자들이 박해자로 어느 순간 돌아설지 모른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우리를 죽이고 넘겨 준다.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더군다나,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순실이도 구속되고 말았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생명을 기대어 살고 있는가?

 

23.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말 못할 어려움을 안고 산다. 그것 때문에 실제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산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새로운 힘과 소망을 얻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현재 삶의 자리에서 겪는 어려움이 여러분에게 도리어 여러분이 믿는 바에 대한 증거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4.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1-4).

 

25. 오늘 말씀도 같은 것을 증거하고 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9). 환난(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들) 중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 방법은 인내하는 것이다. 이 인내는 무조건 아무 생각 없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한 인내이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는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위에서 살펴본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서,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26. 특별히, 로마서의 말씀 중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에서 우리 말로 연단으로 번역된 것은 영어로 ‘character’이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는 ‘character’를 만들어 낸다. ‘Character’는 우리 말로 성격, 성품, 인격, 신분등의 뜻을 갖는다. , 어떻게 인내하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 성품, 인격, 신분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하며 인내하는 그리스도의 성격, 성품, 인격, 신분은 분명 소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을 기대어 살지 않고,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생명을 기대어 살기 때문이다.

 

27. 내가 좋아하는 폴란드의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쉼보르스카의 시 <지도>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 잔인한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허용치 않으니까.”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라고 한다. 삶의 마지막,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세상을 들여다 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 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삶의 회한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인생의 굴곡과 질곡이 없는 이들에게서 나올 수 없는 고백이다.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

 

28. 우리는 날마다 '잔인한 진실'을 마주하며 산다. 너무 잔인해서 어떤 이는 눈을 감아버리고, 어떤 이는 딴청을 피우고, 어떤 이는 스스로 생명을 마감하기도 한다. 혹시, '잔인한 진실' 때문에 삶이 힘들고 어렵거든 쉼보르스카처럼 지도를 펼쳐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가 이 시의 다른 곳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듯이, 세상은 사실 별개 아닐 수 있으니까. "밀림은 나무 몇 그루로 표시되어 있어 그 속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29. 혹시, 삶의 현실 앞에서 여러 가지 일로 (사업(직장) 때문에, 가정 때문에, 자녀 때문에, 질병 때문에, 정치 때문에, 또는 순실이 때문에)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건너고 있는 분이 있다면, 삶의 지도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눈 앞에 펼쳐놓기 바란다. 그리고 그분께 살포시 비스듬히기대어 보시라.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토대이신 우리 주님께서 비스듬히기대어 있는 바로 당신(여러분)에게 위로와 사랑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속삭여 주실 것이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을 귀  (0) 2016.11.17
주님께 비스듬히 기대기를 간구하는 기도  (0) 2016.11.13
우리는 성도입니다 (만성절)  (1) 2016.11.09
씨 뿌리는 자의 비유  (0) 2016.11.03
엎드림  (0) 2016.11.01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1. 12. 14:33

그리스도의 얼굴

 

우리는 서로 보지 않는 게 좋아요.

내 얼굴은 내 노래를 반영하지 않아요.

나는 손가락조차 휘어져 있죠.

당신은 나를 감당할 수 없을 거에요.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태초부터 인류의 눈은

가장 타락했기 때문이죠.

내가 보고 싶으면

차라리 어린왕자를 떠올려 봐요.

어린왕자가 당신에게

상자 하나를 건네 줄 거에요.

그 안은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죠.

그 안에 내 얼굴이 들어 있어요.

, 이제 마음껏 상상해 보아요.

그게 바로 나에요.

우리,

그렇게 영원히 만나요.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과 벌  (0) 2016.11.18
아들의 얼굴  (1) 2016.11.14
인생  (0) 2016.11.09
기도  (0) 2016.11.09
진(Gene)  (1) 2016.11.09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