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6. 10. 18. 01:54

과부의 기도를 간구하는 기도

(18:1-8)

 

주여, 우리는 모두 연약한 과부들이니이다.

우리는 힘이 없어 불의한 일에 노출되어 있나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불의한 일을 당해 억울하나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원수들 때문에 못살겠나이다.

주여,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옵소서.

주께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기까지

우리는 결코 기도하기를 멈출 수 없나이다.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여,

주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시오니

낙심하지 않고

끊임 없이 주께 기도하는 과부와 같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기도하는 한,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겠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17. 02:38

예수 그리스도와 안식일

(마가복음 2:23-3:6)

 

오늘 말씀은 안식일에 관한 두 가지 논쟁을 다루고 있다. 하나는 안식일에 밀이삭 자른 것과 다른 하나는 안식일에 손 마른 자 고쳐 준 것이다. 안식일에 두 가지의 행위를 한 것이 왜 논쟁거리인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지키는 것은 모세 언약(시내산)언약에 대한 징표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확인했다. , 안식일을 통해서 그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키는 언약백성으로 스스로를 이해했다.

 

게다가 바벨론 포로의 경험을 안고 있는 예수님 시대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조상이 겪은 질곡이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조상의 실패를 번복하고 싶지 않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집착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 입방에서는 이 문제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일이 이해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삶의 질곡(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조상에 대한 제사는 그들에게 꼭 지켜내야만 하는 집착이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복음 저자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마가복음 저가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법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몰랐을 리 없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실제로 벌어졌던 것처럼 죽음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일어난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고수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안식일 제정 원리는 이렇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사실, 유대인들이 이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도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악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을 알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나은 지 알았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킴으로 해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예수님과 초대교회 공동체에 따르면 이것은 안식일 법에 대한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단순히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으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일까?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의 안식에 있다. 출애굽기는 안식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8, 10).

 

안식일 법 제정을 선포하는 출애굽기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안식은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기 보다, 창조의 완성이다. 창조의 완성은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끝내고 안식하신 것이다. , 창조의 완성은 안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안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인가? 하나님이 일을 끝내고 쉬셨으니까 우리도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이 안식일의 뜻인가? 그렇지 않다.

 

안식은 행복한 상태이다. 죄가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복이 충만한 상태이다. 하나님과 합일된 상태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안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한마디로, 안식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상태이다.

 

우리는 오늘, 현실을 말해 주고 있는 두 가지 이야기 접했다. 첫째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이야기이다. 왜 이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랐는가? 배고픔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다.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모든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먹이시는 생명의 빵으로 묘사된다.

 

둘째로, 현실을 말해주는 이야기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마른 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전도여행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님은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배고픔과 질병은 안식을 헤치는 요소이다. 이것이 존재하는 한 안식이 없다. 배고픈 자에게는 빵이 필요하고, 질병 때문에 고생하는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죄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는 용서가 필요하다. 배고픔, 질병, 죄가 존재하는 한 안식은 없다. 그러나, 반대로 배고픔과 질병과 죄가 없으면 안식을 누린다. (죄의 삯은 죽음이다.)

 

마가복음은 안식일 논쟁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배고픔과 질병을 없애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분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겼다는 것은 죄를 없애셨다는 뜻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공동체는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의 완성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안식을 누리는 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중요하다.

 

주일에 일 안 하는 것이 안식이 아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단순히 안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안식은 다시 노동으로 복귀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교회 와서 노동한다. 노동의 자리를 일터에서 교회로 옮기는 것을 안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는 노동의 자리에서, 그것이 일터가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그 노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면서 산다. 감사하면서 산다. 행복하게 산다.

 

여전히 안식을 가로막는 질병이나 배고픔 같은 근심 걱정과 시기 질투 가운데 살면서, 주일(안식일)에 일 안 나가고 교회 나오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면 바리새인의 믿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참된 안식이란 일 안하고 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종교적 의무를 행하면서 종교적 보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참된 안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고픔의 문제, 질병의 문제, 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 가운데 여전히 사로잡혀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서 안식일에 쉰 것을 통해서 구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원을 싸구려로 만드는 불경한 행위에 불과하다.

 

안식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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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17. 02:33

과부의 기도, 우리의 기도

(누가복음 18:1-8)


나는 녹차를 좋아한다. 커피를 안 마신다. (물론 스타벅스의 바닐라 라떼 같은 달달한 커피는 가끔 마신다.) 중학교 때 커피 마셨다가 밤새 잠을 못 잔 경험이 있은 후로는 커피에 손이 잘 안 간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 속도 아프다. 요즘엔 커피가 너무 자본주의적이라서 싫다. 스타벅스 등 커피를 시장에 팔아 이윤을 남기는 거대 기업들이 커피를 너무 현대인의 필수 음료로 띄워 놓은 경향이 있다.

 

한 동안 메스컴에서는 커피의 좋은 효능에 대하여 연일 기사를 띄웠다. 정작 커피를 재배하는 가난한 농부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고생은 가난한 농부가 하고, 돈은 거대 기업이 버는 불의한 사회 구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커피 뿐만이 아니라,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를 재배하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농부들은 카카오가 그렇게 맛있는 초콜릿으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커피를 안 마신다. 대신에 나는 녹차를 즐겨 마신다. 녹차에는 카테킨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쌉쌀한 맛을 낸다. 녹차는 이 쌉쌀한 맛 때문에 먹는데, 카테킨이라는 성분은 항암효과도 있고, 체내의 노폐물도 배출해 주고, 카페인 흡수를 억제해줘서 중독효과도 막아 준다. 녹차를 마시면 피곤함도 덜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춰준다. 다만, 이뇨작용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는 단점은 있다. 그리고 몸이 차가운 사람들(음 기운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지 못한 음료이다. 몸을 더 차갑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양 기운이 강한 사람이라 녹차가 몸에 잘 맞는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기도이다. 기도의 주제를 듣는 순간, 귀를 닫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들은 기도에 대하여 하도 많은 설교를 들었든지, 아니면 기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기도를 통해 어떠한 좋은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내가 녹차의 좋은 점에 대하여 아무리 이야기를 했어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커피만 고집하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 나처럼 녹차의 효능을 깊이 경험한 사람은 녹차를 마시듯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절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지 않는다.

 

오늘 말씀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이야기는 비유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이야기하시는 목적은 기도와 낙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다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낙심 하는 이유는 기도 안 하기 때문이고, 기도하는 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삶은 낙심 거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낙심하고 싶어서 낙심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나의 능력과 상관 없이 낙심하게 되는 상황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는 즐비하게 널려 있다.

 

나는 영어 때문에 매일 낙심한다. 물론 미국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일상 영어에는 별 문제 없지만, 모국어인 한국어로 깊은 사유를 하는 것만큼 영어로 사유하지 못해 공부하면서 토론을 하거나 페이퍼를 쓸 때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낙심한다. 그래서 때로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한탄까지 섞여 나올 때가 있다.

 

미국에 살다보니 낙심하게 되는 게 언어 이외에도 많다. 특별히 인종차별을 당하거나, 사회참여를 깊이 하지 못하는 현실이라든지, 이 나라가 나의 조국(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나 살다 묻혀 있는 땅을 조국이라 한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곳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 거기에 묻혀 계시기에 나의 조국은 한국이 될 수 밖에 없다.)이 아닌 것 때문에 느끼는 이방인의 느낌 같은 것이 현실 속에서 벽으로 다가올 때 많은 낙심을 하게 된다.

 

이런 것뿐만이 아니다. 사업의 실패 또는 경제의 불황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여러 가지 삶의 환경들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얻게 된 정신적 질병이나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노화에서 오는 약해진 신체와 마주하게 될 때와 병 때문에 고생하게 될 때 우리는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낙심의 상황들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화 때문에 오는 육신의 연약함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낙심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겪게 되는 낙심들, 즉 불의한 낙심들에 대해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끊임 없이 탄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라고도 하고,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라고도 한다.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든, 이 비유의 핵심은 끊임 없는 기도이다.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과부의 끊임 없는 기도 때문에 그의 간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끊임 없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상황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다. 하나는 생활인의 입장에서,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우선 생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살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 없고, 능력을 벗어나는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냥 자포자기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주께 아뢰며,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한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사무엘의 엄마 한나이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엘가나였는데, 엘가나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는데,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회(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에 여자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없는 여자는 사회적 사형을 당했다.

 

엘가나는 두 아내 중 한나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 제사 드리러 갈 때 엘가나는 한나에게 브닌나에 비해 분깃을 두 배나 더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한나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두 배 사랑이 아닌, 자식이었다. 그 일로 한나는 매일 같이 펑펑 울었다. 이에 대해 엘가나는 한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한나여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

 

여러분 같으면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하는 엘가나(남편)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고마워할 것인가, 아니면 남편을 향해 광선을 쏘며 도끼눈을 뜰 것인가? 남녀관계가 그렇다. 처음에는 너 없이는 못살아하다가 나중에는 너만 없으면 살겠다한다.

 

어느 부인이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구박했다. "당신이 뭘 알아요?"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부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 이였다. 부인은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부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남편이 죽어서 하얀 천이 뒤집어 씌워져 있었다. 허구한날 남편을 구박 했지만 막상 죽은 남편을 보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부인은 죽은 남편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었다. 부인이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하얀 천을 내리면서 말 했다. "여보!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러자 깜짝 놀란 부인은 울음을 뚝 그치면서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뭘 알아요? 의사가 죽었다는데!"

 

남편 엘가나가 부인 한나의 마음을 뭘 알겠나. 한나는 실로에 있는 성전으로 기도하러 갔다. 그 당시 제사장은 엘리였는데,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성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말거나, 괴로운 마음을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로 아뢰었다. 한나는 오랫동안 끊이 없이 기도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속으로 말하고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한나가 취한 줄로 생각하고, 한나에게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한다.

 

한나는 기도하되, 남들이 보기에 술 취한 것처럼 간절히 기도했다. 이렇게 기도했던 사람들이 또 있다. 예수님이 승천 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시길 기다리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던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이다. 그들이 성령을 받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비아냥댔다.

 

이렇게 기도해 봤는가? 여러분의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술 취한 것처럼기도해 봤는가? 내가 지금 겪는 문제가 불의하다고 생각이 들거든, 내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간절히 필요하거든, 그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술 취한 것처럼 기도해 보시라.

 

두번째로, 우리는 생활인에 이어,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기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말씀은 누가 공동체의 상황 중, 재림의 지연 문제 가운데 놓여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재림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낙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주변 세계(로마와 유대공동체)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러한 핍박을 견뎠던 첫 번째 이유는 예수께서 곧 재림하여 자신들을 영원한 생명에 들이시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불의한 세력들을 혼내주실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재림은 지연되었고, 그들은 핍박(박해) 속에서 죽어갔다. 사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재림 지연의 문제 가운데 살고 있다. 예수의 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의와 사랑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인데, 그 나라를 살다보니 세상의 불의와 부대낄 수 밖에 없다. 세상에 창궐하는 엄청난 악 때문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는 세상의 창궐하는 악을 보며 쉽게 절망하고 실망한다. 하나님이 안 계시나보다, 라는 불경한 생각까지 들 때가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구별돼서 사느니,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적당히 살고 싶은 유혹이 몰려든다. 그래서 우리는 한 쪽 발은 세상에, 한 쪽 발은 하나님 나라에 은근슬쩍 들여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산다.

 

한국에서는 최근 6살짜리 입양 딸의 시신을 훼손해 야산에 묻은 혐의를 받는 양부모가 아동이 숨지기 전 온몸에 투명테이프를 감아 놓고 17시간 동안 방치한 것으로 드러난 사건 기사가 언론을 도배했다. 세상에 얼마나 악이 창궐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가! 이런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악이 창월하는 불의한 세상을 심판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주님은 우리가 끊임 없이 기도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 졸라서 원하는 것을 받아내라는 뜻이 아니다. 험한 세상, 악이 창궐하는 세상을 보더라도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나의 의도나 의지와 전혀 상관 없는 일, 나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일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끝까지 기도한다는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러시아 속담에 희망은 맨 나중에 죽는다는 말이 있다. 희망은 우리를 부활케 한다. 내가 죽었다고, 내가 과부처럼 힘 없는 자라고, 희망까지 죽고 힘 없나? 십자가를 보라. 죽었다고 끝이 아니다. 희망을 끝까지 붙든 자는 부활한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개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 벼락이 치더니 그 나무를 반으로 쪼개는 게 아닌가. 이것을 보고 놀란 다른 짐승들이 그 딱따구리에게 와서 물었다. ‘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이 큰 나무를 쪼갤 수 있니?’ 그러자 딱따구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단지 나에게 맡겨진 일을 매일 성실히 했을 뿐이야.’

 

우리가 기도를 끊임 없이 하느냐 아니냐는 끈기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비유의 불의한 재판장처럼 불의한 분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는 분이고, 우리의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 주시는 분이고, 우리를 올바르게 판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창궐하는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약함을 아시며, 우리에게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거나 예상치 못한 기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과부는 그 시대에 가장 힘 없는 약자였다. 단순히 남편을 잃은 여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과부와 무엇이 다른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우리는 여전히 약하다. 힘 없는 과부와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가 기도할 때 듣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끊임 없이 기도하라. 주께서는 분명 우리의 끊임 없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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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10. 16:12

돌아온 레퍼(Leper)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17:11-19)

 

주여, 돌아온 레퍼(Leper)가 되게 하옵소서.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구원에 방해되는 것들을 차별하며 사는

영적 레퍼(Leper)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어,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는

참 구원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돌아온 레퍼(Leper)들이니이다.

가다가 깨끗함을 입어 영광 돌리며

주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 드리오니,

우리에게 말씀 하옵소서.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여,

우리는 이 말씀에 힘 입어 평안히 가겠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9. 13:41

돌아온 레퍼(Leper)

(눅 17:11-19)


공교롭게도 오늘은 한글날이다. 한글 창제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중국(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한국(조선)은 한자를 빌어 그 음을 표시했다. 그것을 차자표기라 한다. 문자를 빌어서 표기한다는 뜻이다.

 

한문차자표기의 가장 큰 문제는 한문은 뜻 글자이기 때문에 어휘(Vocabulary)가 엄청 많아서 일반백성들이 한자를 모두 습득하여 문자를 표기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근본적인 이유에는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칭하였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훈민정음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중세국어

현대국어

나랏말ᄊᆞ미中듀ᇰ에달아

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서ᇰ
니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
몯ᄒᆞᇙ노미하니라
내이ᄅᆞᆯ爲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ᆯ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
便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나라의 말이 중국과 서로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한글의 창제는 변방, 변두리의 한 작은 국가에 불과한 조선이 큰 국가(중화민국)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나게 만든 해방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말할 수 업는 질곡 가운데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현재 이렇게 세계에 우뚝 선 국가로 존속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한글이라는 언어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종대왕은 하나님께서 한민족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혜 중 하나이다.

 

주변부로 밀려나 존재감 없이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모멸감이란 죽는 것보다 힘든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해서든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고 중심에 서서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자기 힘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행복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자기 힘으로 아무리 싸워도 공동체(사회)의 중심부로 들어서는 게 전혀 불가능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레퍼(Leper)이다. 그 당시 나병환자들은 절대로 유대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나병이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차라아트로 표기하는데, 이는 ’, ‘징계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성경에서는 대개 차라아트나병(문둥병, 한센병)’이라고 표기하는데, 사실 이는 광범위한 피부질환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차라아트에 걸린 병자들을 모두 나병환자로 볼 필요는 없다. 다만, 피부병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도 난치병인 것이 많아서, 그 당시에는 피부병(차라아트)’하나님께 맞아서 생긴 병으로 생각했다. 다른 말로, ‘차라아트는 죄로 인해 징계 받는 것이는 생각이 고대유대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통념이었다.

 

죄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낙인은 파급력이 엄청나다. 우선 차라아트에 걸린 당사자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일만큼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책망하면 화(anger)가 나지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되면 고통(suffering)’이 온다. 고통은 죽음보다 무서운 거다. 고통에 처한 자는 누구든지 죽기를 갈망한다. 고통 당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낙인이 가져오는 두번째 파급력은 타인(다른 이들, 이웃)에게서 오는데, 그들은 차라아트를 지닌 자들을 멀리하게 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해치는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보호본능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차라아트를 지닌 자들과 가까이 하면 그들의 차라아트가 자신들에게 옮을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환자들을 멀리했다.

 

결국, 나병환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지역, 즉 변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그러한 곳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11). 우리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기가 어떠한 곳인지 전혀 눈치를 못 채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 다 알았다. (일례로, ‘예수께서 미아리를 지나시다가라는 표현을 외국인이 들으면 무슨 뜻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한국인들은 미아리가 어떠한 곳인지 다 아는 것과 같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우연히 만나신다.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변방의 나병환자촌에까지 퍼진 모양이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에 나병환자 열 명은 멀리 서서 예수님께 이렇게 외친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간청이었다. 기독교의 기도 전통에서 주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가장 위대한 기도는 바로 이것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Lord, have mercy). 주님께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게, 그분의 자비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나 많은 것을 간구한다. 그러나 최고의 기도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것을 안다면,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매우 겸손해질 것이다. 많은 말을 하여야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거라는 잘못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짧은 기도를 간절하게 드리기만 해도,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라. 나병환자들의 그 짧은 간청에 주님께서는 응답해 주신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에게 별다른 말씀 없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 이것은 이해하기 힘든 치료방법이다. 병자의 입장에서, 또는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적절한 반응은 자비를 구하는 나병환자들을 불러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별다른 치유행위를 하지 않으시고, 그저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항하여 예수님께 어떠한 치료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들에게 자신들의 몸을 보이러 길을 떠난다. 사건은 그 길을 가는 중에 발생한다. 오늘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

 

바로 여기에서부터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본문은 그 어떠한 일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15). 열 명의 나병환자가 길을 가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중 한 명의 나병환자만이 돌아왔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은 왜 돌아왔으며, 나머지 아홉 사람은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이 이야기를 통해서 누가복음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오늘 말씀에 대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낮은 수준의 해석은 이것이다. ‘은혜를 입으면 감사해야 한다.’ 물론 본문에서 그러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만은 않다. 은혜를 입었으면 감사하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은혜를 입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겨나는 거다. “아무튼,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야!” (사랑하는 여러분,) 최선을 다해서, ‘머리 검은 짐승이 되지 마시라.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중에 한 명만 돌아와 주님께 엎드려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나머지 아홉 명은 머리 검은 짐승이 되고 만다. 어떤 이들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이유를 그들이 자신들의 나병치유를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가한다.

 

보상 받으려 순종하는가? 바로 앞에 나오는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 보듯이, 순종은 보상의 개념에서 보면 안되고, 순종은 겸손의 개념에서 봐야 하는 게 맞다. , 우리는 보상 받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익한 종이기 때문에 생득적으로(naturally)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누가복음의 저자가 돌아온 레퍼(Leper)’의 이야기를 통해서 머리 검은 짐승이 되지 말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 실마리는 16절 말씀이 가지고 있다.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아홉 명은 유대인이었고,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여기에는 매우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구원 메커니즘이 들어 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데 익숙하다.

 

레위기에 보면 정결의식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레위기에 보면, 부정한 자는 제의(제사,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정결한 자 뿐이다. 그들에게 제의(제사)’에 참여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는데, 그들은 제사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구원을 확보하고 확인했다.

 

그런데, 만약 부정한 자 또는 부정한 것에 접촉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일은 생명처럼 소중했다. ‘차라아트’(나병환자)’는 정결한 자의 구원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었다. 그래서 정결한 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부정한 자(차라아트)를 공동체 밖으로 쫓아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기적이고 차별적인 신앙이다. 자기의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쫓아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쉽게 말해, 나 살자고 다른 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옳은 일인가? 인간의 죄된 본성의 측면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측면, 기독교의 진리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괴변에 불과하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레퍼(나병환자)는 분명 길을 가다가 자신들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들의 몸을 보이고,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는 것을 확인 받은 뒤, 유대공동체로 복귀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유대공동체로 복귀된 뒤,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서 (분명, 또는 아마도) 자신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다른 차라아트(나병환자)’들을 차별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냥 일반 사람들보다 나병환자들을 차별하는 데 더 열심을 보였을 지 모른다. 어떻게 얻은 구원인가? 갖은 모멸감을 참아내며 얻어낸 구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사마리아인 레퍼(나병환자)는 달랐다. 그는 깨끗함을 받고,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감사드렸다. 사실, 사마리아인 레퍼는 아홉 명의 유대인 레퍼보다 그 아픔이 두 배인 사람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죄인으로 낙인 찍힌 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공동체에서 원래 제외된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인 레퍼는 두 번 죽은 자와 같았다.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한 번 죽고, 사마리아 공동체에 의해 두 번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사마리아인 레퍼가 제사장에게 가서 그의 몸이 깨끗함을 입은 것을 보여 보았자, 그는 여전히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방인에 머물 것이 뻔했다. 다른 말로 해서, 사마리아인 레퍼는 나병에서 깨끗함을 얻었다 한들, 여전히 구원 받지 못한, 구원공동체에서 제외된, 버림 받은 자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바로 그 돌아온 레퍼(Lper)’에게, 돌아와 엎드리어 감사드리는 레퍼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생각해 보라. 누가 참으로(진정으로) 구원 받은 자인가? 제사장들에게 깨끗함을 입은 것을 확인 받고 공동체로 복귀하여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하여 여전히 자신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들을 차별하며 사는 아홉 명의 레퍼들이 구원 받은 자인가, 아니면, 주께로 돌아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선포를 가슴에 안은 한 명의 사마리아인돌아온 레퍼(Lepere)’가 구원 받은 자인가?

 

도대체 우리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 다른 이들보다 깨끗해지는 것’, ‘우위에 올라서는 것이 구원인가? 참된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정결해지고 구원받아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완전한(fully)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돌아온 레퍼가 어떻게 살았을 것 같은가? 그가 나병에서 깨끗함을 입고 공동체로 복귀되어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 자신의 구원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차별하며 살았을 것 같은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된 구원을 받은 자 답게, 공동체의 다른 레퍼들(구원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기의 형제로 받아들이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참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레퍼이다. 우리는 모두 깨끗함을 입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보혈로 우리를 깨끗케 하셨다. 깨끗함을 입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깨끗함을 입은 것을 확인 받기 위해 제사장(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에게 가서 굽실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자신의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차별하며 사는 것을 아닌가.

 

우리는 모두 돌아온 레퍼가 되어야 한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해야 한다. 구원에 방해되는 것들을 차별하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 같은 자들이 되면 안 된다. 우리는 구원 받은 자로서 세상에 나아가 구원에 방해되는 것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돌아온 레퍼(Leper)’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주님께서 돌아온 레퍼인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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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0. 7. 03:35

길을 걷다가

 

벽이든 낭떠러지든 앗질한 것이 앞에 있는 게 나아

그러면 눈을 감을 수 밖에 없거든

눈을 감으면 상상을 하든 기도를 하든

앗질한 것을 넘어서게 되거든

벽을 뚫고 지나가든 낭떠러지를 도약대 삼아 하늘을 날든 하거든

길을 가면서 눈 감을 일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거야

눈을 감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착각하는 지루한 눈을 갖게 되거든

그것은 길을 끝까지 가보지 않았다는 불성실함을 보여주거든

길을 걷다가 앗질한 것을 만나거든 되돌아 갈 생각 말고 눈을 감아봐

눈을 감고 상상을 하든 기도를 해봐

앗질한 것 뒤에 있는 신세계가 어둠을 가르며 네게로 돌진해 오는 게 보일거야

눈을 감는 건 비겁한 게 아니라 최후의 수단인 거야

최후의 수단이 있는 한,

우리는,

길 걷는 걸,

멈출필요없는거야

 

* 앗질한은 아찔한의 의태어 (, 하고 놀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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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0. 7. 03:34

흔적

 

발자국은 몸이 눌리는 중력만큼 흔적을 남기지만

심장은 사랑의 무게만큼 흔적을 남긴다

돌아서서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축복이다

여기까지 힘들게 온 흔적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없다

네가 지우지 않아도 바람이 지운다

바람은 너를 따라다니는 운명이다

흔적이 깊이 패인만큼 바람은 세차게 분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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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8

상대방이 나를 만족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상대방을 만족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물론 내가 나 자신을 만족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만족에 대한 부담감에서만 자유로워져도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7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시편 99:4)

 

주여, 우리는 불쌍한 백성들이니이다.

정의를 사랑할 줄 모르는

무능력한 왕이

우리를 통치하기 때문이니이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주 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나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7

정말 힘 센 사람은 절대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정말로 힘 센 사람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린다.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