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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3.19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2. 2024.03.19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러시아의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 P. Mussorgsky, 1839-81).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강력한 음악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19세기는 ‘낭만주의’ 사조가 예술계를 휩쓸던 시기입니다. 이성에 경도되어 모든 것을 ‘과학적 사실’로 증명하려고 했던 시대에 사실, 또는 현실을 초월한 공간을 창조함으로 사람의 마음과 삶에 숨쉴 공간을 제공했던 것이 낭만주의입니다. 그런 낭만주의에 가장 가까웠던 예술은 음악이었습니다. 반대로 사실주의에서 가장 먼 것도 음악이었습니다. 음표로 세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림과 비교해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물론 그림도 사진이나 동영상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긴 했지만요.) 그러나 음악의 음표를 통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죠.

 

무소르그스키는 그림(회화)에 비해 음악의 표현력은 제한된다는 생각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음악을 그림처럼 눈에 보이듯이 표현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 무소르크스키의 지위는 독특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던 것,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 시도해 볼 생각조차 못하던 것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무소르그스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절친 빅토르 하르트만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작품입니다.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빅토르 하르트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무소르크스키는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죽은 친구의 유작을 모아 전시회를 엽니다. 전시회의 작품 중 깊은 인상을 받은 10개의 작품을 골라,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의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전람회의 그림>에는 죽은 친구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담겨 있는 동시에 음악적 제약을 뛰어넘은 혁신-창조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후 수많은 음악가들이 원래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된 <전람회의 그림>을 여러 버전으로 편곡하여 연주합니다. <전람회의 그림>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이죠. 그 중에서 모리스 라벨(J. M. Ravel)의 관현악 편곡 연주가 가장 유명합니다.

 

<전람회의 그림> 열 개의 작품 중 여덟 번째 작품의 표제가 ‘카타콤’(Catacombae)입니다. 이 곡은 하르트만이 랜턴을 들고 파리의 카타콤을 조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카타콤(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은 로마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이라 그리스도교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우리는 카타콤교회라 부릅니다. 카타콤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포용하는 공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드리며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주 현실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그들의 신앙을 더 깊고 단단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 이상 신앙의 핍박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죽은 자들과 교통하고,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과 교통하면서 그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줄 알았던 카타콤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의 신앙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세속적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100세 시대를 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영원히 살 것처럼 삶에만 집착하는 우리들의 욕망, 그리고 죽은 자들과 교통하는 영성을 잃은 시대에 살다 보니,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약자들을 향한 우리들의 무관심 등이 우리의 신앙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을 반성하며, 오늘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한 번 감상해 보면 어떨까요.

Posted by 장준식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

 

신약성경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발생한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제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제자는 헬라어의 ‘마세테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disciple’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는 ‘제자’를 ‘배우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시 소피스트들이 철학교사로서 대중적인 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 만들어 스승으로서 자신들이 행한 가르침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금전적인 요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이러한 종속적인 관계가 마음에 안 들었던 소크라테스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민주적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제자’를’ 함께 알아가는 동료(companion)’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세테스’와는 다른 용어, 즉 ‘헤타이로스’라는 용어를 통해 제자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 재정립을 통해 소피스트들을 비판하며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대가를 제자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제자 개념은 이보다 더 깊어집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한창 가르침을 주실 때 예수님의 가족이 방문합니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온 것을 알립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런 후,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위의 소피스트들이나 소크라테스의 제자 개념과는 확연히 다른 ‘제자’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란 ‘가족’입니다. 가족처럼 친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제자의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6장은 이런 가족과 같은 제자들 사이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그들 가운데 헬라파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 사람들에 대해 불평이 생겼습니다. 매일 음식을 분배 받는 일에서 헬라파 유대 사람 과부들이 빠졌기 때문입니다.”(1절b) 한 마디로, 제자 공동체에 ‘차별’(discrimination)이 발생한 것입니다. 일반 사회 안에서 차별이 발생해도 기쁨이 없어지고 삶이 힘들어지는데, 가족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차별이 발생했으니 차별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 지, 그리스도교의 제자 개념에 비추어 보면, 정말 큰 일이 교회 내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지혜를 냅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구제(봉사/디아코노스)하는 일을 전담할 사람들을 선발하는데,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제자들로 칭찬 받는 사람들 중에서 일곱 명을 선출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기도와 말씀 사역이 희미해지면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지 못한 이들이 봉사의 자리에 있으면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리더십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늘 충만하도록 날마다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제자 공동체)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자’는 단순히 ‘배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자는 ‘가족’입니다. 친밀한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제자를 생각하고, 교회를 떠올릴 때 ‘가족 메타포’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가족 메타포를 통해 표현됩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족만큼 친밀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메타포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족이 지닌 친밀한 사랑의 메타포를 떠올린다면,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현저히 부족한 요즘, 사회 곳곳에서 차별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취(미리 맛보기)이므로, 교회는 차별이 늘어가는 세상에서 피난처가 되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별을 물리치고 우리가 서로 더 사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더 많아지고, 세상은 더 따스해질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