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24. 2. 28. 09:49

[소판 세상]

 

실리콘밸리의 상징

미션픽 정상에 오르는 길

협곡을 따라 오르다

굽이치는 바람을 만난다

고개를 숙이고 바람을 거슬러

오르다 오르다 보면

소 한 마리

또 소 한 마리

소 서너 마리

그리고 소

또 소

내 평생 개판인 세상을 보아왔어도

소판인 세상은 처음 본다

풀 뜯으며

지나가는 행인을 무심히 바라보는 소

평화로운 소판 세상을 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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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 신학과 전망]

ㅡ 한국인이 삼위일체 신학을 어려워 하는 이유와 해결방안

 

삼위일체 신학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낯설어 하고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리스 철학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특별히, 플라톤 철학과 그 철학이 발전해서 생긴 신플라톤주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현대 한국인이 조선 시대 성리학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고대 시대의 그리스 철학을 잘 알 수 있겠는가.

 

삼위일체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왜 삼위일체 신학이 그러한 언어로, 그러한 형태로, 그러한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깊이 파악할 수 없다. 기독론(Christology)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sus) 논쟁을 만나게 된다. 동일하게, 플라톤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에 대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또한 역사적 플라톤과 철학적 플라톤의 주제도 만나게 된다.

 

역사적 예수는 2천년전 팔레스타인 땅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간 예수’에 대한 논의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고 실제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를 탐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 예수를 만나기 쉽지 않다. 우리가 예수를 접하게 되는 자료는 ‘신학화된’ 예수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만나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다. 신학화된 예수다. 소크라테스도 그렇다.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있지만,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제자 플라톤이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자신의 저서에서 ‘등장인물’로 전해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소크라테스이지만 실제로는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 철학은 서양 사상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플라톤 철학을 모르면 서양 철학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 사건이 헬라 지역에 전파되고, 결국 기독교가 로마를 통해서 서양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 이상,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가 되었다. 특별히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 플라톤 철학은 일종의 신학 문법으로의 역할을 감당한다.

 

역사적 플라톤은 당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역사적 플라톤은 정치적 관심과 열정으로 당대 사회를 개혁하고자 정치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플라톤은 그 당시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소피스트들과 한 판 대결을 벌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괴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플라톤은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철학 사상을 펼쳐 나갔다.

 

그런데, 후대에 플라톤의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관심은 좀 달랐다. 특별히 신플라톤주의를 꽃피운 플로티노스에 이르러서 플라톤 철학은 플로티노스의 신비적 형이상학을 펼치는데 활용된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철학을 사용하여 자신의 철학 사상을 주조해 가지만, 역사적 플라톤의 관심사였던 현실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잘 알아야 한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티누스에 의해서 발전했는데,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특징은 ‘범신론적 일원론’과 ‘철학의 종교화’였다. 플라톤 철학은 이원론의 구조를 지닌다. 이데아를 상정하고, 육체와 영혼을 구별하여, 사상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형상계(이데아)와 현상계(현실계)에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중간 단계를 설정해서 플라톤의 이원론을 범신론적 일원론으로 재설정한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의 현실 정치적 색채를 현실을 초월한 신비주의적 색채로 탈바꿈시킨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저서 『엔네아데스』를 통해 '일자'(The One) 또는 '성선'(The Good) 사상을 펼친다. 플로티노스가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이러한 사상을 전개시킨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출현과 영지주의 신학의 만연 때문이었다. 영혼의 구원과 신에 대한 추구라는 당대의 종교적 분위기는 플로티누스로 하여금 플라톤 철학을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으로 발전시키도록 이끌었다. 다시 말해,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러한 시기에 발전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일례로, 일자에 대한 생각, 누스(지성)의 개념, 그리고 관상의 개념 등은 삼위일체 신학과 기독교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플로티노스와 더불어 신플라톤주의의 부흥을 이끌었던 프로클로스(Proclus)도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이다. 프로클로스의 일자의 ‘삼위일체적 구조’는 그리스도교 신학자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플로클로스의 ‘삼위일체 구조’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삼위일체’ 개념을 형성하는데 깊은 영향을 미친다. 삼위일체 신학을 급격하게 발전시켰던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드러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 신학을 신플라톤주의에서 발전시킨 철학들과 용어들을 통해서 정립한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어느 신학자가 발명한 개념이 전혀 아니다. 삼위일체론을 인간이 발명했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신학은 발명하는 게 아니다. 신학은 계시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신학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 고유의 존재 방식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가 정확하게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학이란 계시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인간이 임의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사건이 발생하고, 그 예수 사건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그리스도교는 헬라 문명에서 꽃피고 있었다. 그때 그리스 문명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되고 있을 당시 헬라 문명은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있었고, 그들의 용어는 어떠한 사상을 보편적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한 철학/신학 용어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신플라톤주의의 철학과 신학을 발판삼아 그들의 사고구조와 용어를 통해 정립되었다.

 

그렇다고, 헬라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된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론의 전부이거나 가장 정확한 계시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을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사회, 또는 한 역사적 시대가 독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에서 한국인이 삼위일체론을 어렵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온다. 헬라 철학으로 표현된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론의 표준이고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자신의 언어로 열심히 표현해야만 한다. 이미 표현된 계시만이 계시가 아니다. 우리의 언어, 나의 삶의 자리에서 표현된 계시가 우리에게는 더 쉽게, 편안하게, 그리고 간절하고 진실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한국인이 삼위일체 신학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삼위일체 신학이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처음에 정립되어 있다보니, 플라톤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전혀 익숙하지 않고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또다른 하나의 이유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하나님을 경험을 풀어내는 데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해놓은 것을 가져다 하나님 경험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내가 내 삶의 일상언어로 하나님 경험을 표현하는데 서툴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한다는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이것을 신학적 사대주의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인이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신학을 쉽게, 그리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좀 어렵지만 힘을 내서 플라톤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다. 교부들이 성경을 통해 계시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용어를 어떻게 활용하여 표현하고 있는지를 공부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했는지 알 수 있게 되고, 더불어, 두 번째 과제도 수행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부들이 그들의 일상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했던 방식을 모범삼아,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인간이, 어떠한 사상이, 어떠한 시대가 독점적으로 표현하고 가둬놓을 수 있는 분이 전혀 아니시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남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내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하나님이 더 소중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진정 내것이 될 때, 우리는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남이 표현해 놓은 하나님을 내가 따라 표현하려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나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하게 될 때, 하나님은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비로소 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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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2. 15. 10:00

[사순절로 들어가는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는 이제 사순절로 들어갑니다.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이 시대에

우리도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어대야만 이익을 취하는

수많은 세력들에 의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마치 노예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닙니다.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내어놓아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 사랑으로

세상을 좀 더 따스한 곳으로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하옵소서.

 

사순절로 들어가

그곳에 임재하며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몸으로 느끼며

기도와 봉사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대면하고(기도)
이웃과 대면하고(봉사)
나 자신과 대면하며(금식)

부족함이 없는 영혼으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사순절 동안

주님이 기뻐하시고

이웃에게 칭찬받고

자기 자신에게 뿌듯한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을 넉넉하게 행하게 하셔서

우리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주의 백성이라는 것을

온 세상이 알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사순절 동안 무엇보다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깊어지게 하시고

사랑할 때만 알 수 있는 주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셔서

신앙이 자라고 삶이 풍성해지는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이제 사순절로 들어가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총을 비오니,

사십일 동안의 여정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 주소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58:6-7)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2. 15. 06:02

강하고 담대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수 1:1-9)

 

주님,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순종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그 길을 잘 걸어가면 삶에 형통이 있을 거라고

약속하신 그 말씀을 우리가 믿고 따르오니,

주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주소서.

십자가의 길을 먼저 걸어가시며

우리를 은총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어른 모세

 

한국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 받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대개 한국의 무속신앙인들이 그들을 추앙합니다. 대표적으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등입니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고, 강감찬은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습니다. 이순신은 명량, 한산, 노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습니다. 요즘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주목 받고 있는 강감찬만 보더라도 수많은 신화적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강감찬이 태어난 곳을 ‘낙성대’라고 부릅니다. 서울의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또다른 ‘대학교’로 오해합니다. 낙성대는 강감찬의 탄생 설화에서 생긴 이름입니다. 강감찬이 태어나는 날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별은 문곡성인데,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이랍니다.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입니다. 그래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을 일컬어 낙성대, 즉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부릅니다.

 

강감찬의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라 여우라는 설화도 있습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이 강감찬이라는 겁니다. 영웅설화의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강감찬에 대한 신화 중 벼락설화도 있습니다. 강감찬이 벼락을 부러뜨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쟁 중에 벼락에 맞아 죽는 병사가 많고, 걸핏하면 일반 백성들이 벼락에 맞아 죽자 강감찬은 벼락을 분질러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하늘에서 벼락칼이 내려와 강감찬을 치려고 했답니다. 그때 강감찬은 벼락을 얼른 잡아서 분질렀다고 합니다. 그후부터 벼락 치는 횟수도 줄어들고 부러진 벼락은 얼른 나왔다 다시 자취를 감추게 되어 사람들이 벼락에 맞는 일이 훨씬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인물은 이렇게 신화적으로 승화되어 칭송을 받는 법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 받던 인문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단연 모세가 돋보입니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모세오경은 ‘모세 이야기’로 바꾸어 불러도 됩니다. 모세오경의 중심 사건은 ‘출애굽 사건’인데, 그 출애굽 사건의 중심은 모세입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표현해 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오경에 그려진 모세의 모습을 보면 모세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던 사람이고, 온유했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모세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또한 후계자를 세워 공동체를 든든하게 하고 후일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모세는 자기가 우상화 되는 것, 즉 자기가 신적인 인물로 높임 받는 것을 방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끝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모세의 인생 마지막을 보여주는 신명기 34장은 모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한 마디로, 전무후무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한국 역사의 영웅적 인물이나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언급하는 이유는 요즘 우리 시대에 들리는 탄식 소리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탄식합니다. “어른이 없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는 시절입니다. 강감찬이나 모세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진 어른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 삶의 자리에서 작게라도 어른이 된다면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가 얼마나 평안해지고 따스해질까, 상상해 봅니다. 어른이 없다는 탄식 소리가 들리는 이 때, 우리 함께 조금씩만 더 어른이 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이라는 말 대신 '통치'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가 주조한 '통치성'이라는 용어는 '통치와 관련된 것'을 말한다. 푸코는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 권력은 빼앗고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통치성 안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이었다. 권력을 관계로 보면 자유의 개념이 바뀐다. 권력을 실체로 보면 자유란 자기실현을 위해 타자들의 저항이나 비판이 없는 '평온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권력을 관계로 보면 자유란 사람들 간의 경쟁이나 대항, 그리고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의 연대 등의 역동적 관계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자유란 권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서로의 배려이다.

 

푸코에게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유연성을 잃고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고착되어 버릴 때, 이것을 지배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견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그 균형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푸코의 권력론(통치론)의 핵심은 '비판'과 '저항'의 문제이다. 통치자의 핵심 역량 중 하나는 비판적인 직언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이다. 통치는 상호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없다. 정부가 통치권을 가졌다고 해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없다. 국민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수행에 대하여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이 정부의 통치에 대응하는 '통치'이다. 그러므로 비판과 저항은 통치 행위이다. 권력은 관계적이기 때문에 정부도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고, 국민도 정부를 향하여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지배 상태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자기배려'이다. 자기배려는 권력관계(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기의 힘을 조절하는 실천이며, 자기의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의 지속적인 비판과 문제화이다. 즉, 권력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개인에게 필요한 자질은 끊임없는 자기 비판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여는 행위.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정부(대통령)의 통치를 보면서 답답해 하는 이유는 권력이란 관계적이라는 것을 이해 못하는 권력자의 모습 때문이다. 자신의 통치만 중요하고, 자신의 통치만 일방적으로 강요할 뿐, 국민 쪽에서 정부(대통령)을 향해서 하는 통치에 대해서는 수용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인데, 일방적인 통치만 실행되고 있으니, 민주주의의 후퇴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마음에는 분노만 쌓여 가고 있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푸코의 통치성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싫어할 것이다. 푸코 공부는 피통치자들만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피통치자들은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푸코의 통치성을 공부해야겠지만, 더불어 권력자들도 '이런 식으로 통치하지 않기'위해서 반드시 푸코의 통치성을 공부해야 한다.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통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통치는 양방향에서 서로 주고 받아야 바른 통치이다. 이것을 알고 국민의 통치를 수용할 줄 아는 정부(대통령)가 바른 통치자이다.

 

대통령의 KBS 대담을 들은 국민들의 입에서 탄식 소리가 들린다. 대한민국은 불행하다. 권력의 자리에 좋은 통치자가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을 물같이, 저항을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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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다시 살려면]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가 분석한 현대사회의 현상.

 

ㅡ 스펙타클은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무기력한 수용이다.

ㅡ 스펙타클은 현대의 수동성의 제국 위에 머물고 있는 결코 지지 않는 태양이다.

ㅡ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경제의 첫 번째 국면은 인간이 실현하는 모든 것을 존재로부터 소유의 관점으로 규정하는 명백한 퇴행을 초래한다.

ㅡ 인간의 특권적 감각은 다른 시대에는 촉각이었다. 스펙타클은 그것을 시각으로 대체한다.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신비화되기 쉬운 감각인 시각은 현대사회의 일반화된 추상과 일치한다.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우리 시대가 '스펙타클 사회'인 것과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모두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구조로 돌아간다. 그래야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정치. 이 두 분야만 봐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스펙타클의 사회인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펙타클 정치, 스펙타클 종교.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정치와 종교만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런 곳만이 부흥을 한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스펙타클을 일으키는데 귀재이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부흥하는 교회는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것을 잘하는 교회들이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본과 인력이 있는 대형교회는 상대적으로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쉽다. 반대로 자본과 인력이 없는 교회들은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못한다. 결국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대형교회로 교회들은 흡수되어 간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현상이 정치를 망가뜨리고, 교회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포퓰리즘 정치, 포퓰리즘 종교. 위에서 기 드보르가 지적하고 있느 것처럼,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정치와 종교를 통해 사람들은 점점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스펙타클의 위력에 일방적으로 그들이 강요하는 것은 수동적으로 수용할 뿐, 저항하지 못한다.

 

이는 고도로 발달된 상품 사회, 즉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베오울프의 그렌델일 뿐이다. 스펙타클은 그렌델의 엄마 물의 마녀이다. 원래는 추악한 모습이지만, 물의 마녀이기에 자기의 모습을 스펙타클하게 변형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꾀어낸다. 그 꾀임에 넘어간 사람들은 모두 희생자가 될 뿐이다.

 

교회가 스펙타클을 일으킨다는 것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세속에 물드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신비한 현상은 교회에서 그토록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교회 자체가 세속에 물들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데 혈안이라는 것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생명의 힘을 지키려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수동적으로 수용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상품 사회의 무력한 소비자로 전락시키며 소비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리는 스펙타클 사회에서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지, 오히려,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스펙타클 사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 자명하다.

1)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교회에 가지 않기

2)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기

3)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목회자 조심하기

4) Indication 해서 쉽게 말하면, 대형교회 가지 않기

5) 대형교회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기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이렇게 두 종류의 교회 밖에 없다. 목사도 마찬가지. 대형교회 목사와 대형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이렇게 두 종류의 목회자 밖에 없다.' 물론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스펙타클 사회의 교회/목회자 현상을 잘 지적한 듯하다.

 

교회가 다시 살려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우리 사회에 저항해야 한다. 쉽게 말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해야할 일을 하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배 조용히 드리고, 진실한 교제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길을 내밀되, 그냥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하는 것이다. 흑탕물을 맑게 만드는 법은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이처럼 스펙타클이 너무 심해 흑탕물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 우리 삶, 우리 신앙을 다시 맑게 만드는 방법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어려운 이유는 무슨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해서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 사회의 요구를 따라가면서 가뜩이나 스펙타클 사회 때문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더 지치고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2. 6. 11:46

모세처럼 어른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신 34:1-12)

 

주님,

모세라고 하는 걸출한 인물이

우리의 신앙의 선조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의 인생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어른의 모습을 간직한 것을 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어른이 없다’고 탄식하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반성해야 할 탄식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그것을 삶의 원리로 삼았다면

이 세상에는 모세와 같은 어른이 곳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탄식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우리들이 잘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 세상에 널리 알려진 어른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 삶의 작은 부분에서라도 어른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따스해지는 일들이 많아지게 하소서.

모세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과 인생을 돌아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어른 모세처럼

우리도 어른으로 성장해가겠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소서.

십자가 위에서 삶의 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성만찬에 대한 세 가지 생각]

 

기독교 예배의 중심에는 성만찬이 놓여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성만찬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특별히 예배학(Liturgical Theology)의 발달이 더딘 탓도 있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2000년) 전만 해도 한국의 신학교에는 예배학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예배학을 전공한 신학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예배의 중심에 놓인 성만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예배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자는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입니다. 화이트 교수가 쓴 『기독교 예배학 입문』(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은 예배학 분야의 교과서로 널리 쓰이는 책입니다. 이 책은 1980년에 쓰였습니다. 한국에 이 책이 번역 소개된 것은 2000년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2000년대 이후 예배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한국의 각 교단 신학교에 포진하게 되면서 예배에서 성만찬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만찬은 보통 영어로 ‘The Eucharist’(유카리스트)라고 합니다. 성만찬에 관한 명칭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합니다. ‘주님의 만찬’(Lord’s Supper), ‘떡을 뗌’(Breaking of Bread), ‘성례전’(Divine Liturgy), ‘미사’(Mass)’,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 그리고 ‘주님의 기념’(Lord’s Memorial) 등입니다. (화이트, 261쪽) 여기서 ‘주님의 만찬’과 ‘거룩한 교제’는 비교적 우리들에게 익숙한 용어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만찬을 영어로 표기할 때 ‘Holy Communion’이라고 씁니다. 위의 용어에서 ‘미사’도 많이 들어본 용어일 겁니다. 천주교의 예배를 ‘미사’라 부릅니다. 이 말은 곧 천주교에서 예배와 ‘성만찬’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예배를 ‘감사성찬례’의 뜻으로 ‘미사’(Mass)’라고 부릅니다. 천주교 예배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로 천주교는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입니다. 모든 예배에서 성만찬을 합니다. 그들에게 예배란 곧 성만찬이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의 보편적인 용어는 ‘유카리스트’(Eucharist)’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처음 교회(예루살렘교회)의 풍경을 보면, 교회가 세워진 뒤 교회의 구성원이 교회에서 행한 일은 ‘떡을 뗀’ 것입니다. 위의 용어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성만찬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만찬은 교회가 처음 시작된 이래 교회에서 행하여 온 활동들 중 가장 핵심적인 활동에 해당합니다.

 

성만찬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즉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십니다. 그 유월절 식사 시간에 떡(빵)과 포도주를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시며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뒤에 제자들은 그때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만찬에서 나누었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외에 성만찬을 언급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며 그들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만찬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은 세 가지 율법의 조항을 물고 늘어지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습니다. 음식 정결법, 절기법, 할례가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음식 정결법에 대한 문제가 고린도교회에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르침을 주면서 바울은 성만찬을 언급합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교회에서 성만찬이 ‘예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성만찬에 대한 복음서의 구절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쓴 편지에서 예식문을 가져다 썼다는 겁니다. 성만찬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복음서나 고린도전서나 별로 차이가 없지만, 예배의 예문으로 쓰이기에는 고린도전서의 진술이 더 적합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복음서(마 25장, 막 14장, 눅 22자)와 고린도전서(고전 11장)의 성만찬에 대한 말씀을 비교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복음서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섞어서 성만찬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내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성만찬 하나에도 이렇게 재밌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1500년간 성만찬에 대한 논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성만찬에 대한 결렬한 논쟁이 발생합니다. 성만찬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보면, 종교개혁의 갈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때 발생한 성만찬 논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 다른 하나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상징적 기념설(Symbolic Memorialism)입니다. 그냥 기념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화체설은 가톨릭 측의 신학이고, 공재설은 루터의 주장이고, 기념설은 쯔빙글리의 주장입니다. 각 ‘설’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입니다. 좀 크게 이야기하면 헬라철학이 성만찬 논쟁의 바탕입니다. 특별히, substance(실재)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헬라철학에서 substance는 물자체를 말합니다. 어떠한 사물의 그 자체를 substance(실재)라고 지칭합니다. 성만찬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사용합니다. 빵은 빵의 substance가 있고, 포도주는 포도주의 substance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성만찬에 대한 신학이 갈립니다. 1) 가톨릭이 주장하는 화체설이란 substance가 transfer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가 예수님의 살과 피의 substance로 변화(transfer)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2) 루터가 주장하는 공재설이란 substance가 함께(con)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가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로 transfer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는 변하지 않더라도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와 함께(con) 예수님의 살과 피의 substance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직접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빵과 포도주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함께 실제로 임한다(real presence)는 뜻입니다. 3) 쯔빙글리가 주장했던 기념설은 가톨릭이나 루터의 주장을 모두 부인합니다. 성만찬에 덧입혀진 철학적 논의를 다 거두어 내고, 그냥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이지 어떻게 이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고, 어떻게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함께 할 수 있느냐고, 아주 나이브하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냥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성만찬이지,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임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주 심플하게 말합니다.

 

성만찬에 대한 생각은 교회의 분열을 가지고 왔습니다. 루터는 화체설을 거부하고 공재설을 주장하면서 가톨릭에서 분리되었고, 쯔빙글리는 루터의 공재설을 거부하고 기념설을 주장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함께 벌여왔던 루터와 작별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성만찬에 대한 신학 문제는 보통 큰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성만찬에 대한 의견 차이로 루터는 쯔빙글리와 작별하게 되는데, 루터는 갈라설 때 쯔빙글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와 나는 영이 다르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에서 성만찬을 이해하는 세 갈래가 생겼습니다. 가톨릭 입장의 화체설. 루터의 입장인 공재설. 쯔빙글리의 입장인 기념설. 개신교의 주류 교단(감리교,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은 루터의 공재설 입장에서 성만찬을 이해합니다. 루터 이후에 종교개혁 2세대인 칼뱅이 성만찬 신학을 조금 다듬기는 합니다만, 큰 틀에서는 루터의 공재설 입장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침례교는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따릅니다. 우리교회는 개신교 주류 교단의 성향이니, 루터의 공재설을 따르는 입장인 것이죠. 물론 개인마다 다른 입장을 가질 수는 있지만요. 성만찬 하나에도 이렇게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