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생명이고 사랑이다

 

최근 미국에서 <The Great Dechurching>이라는 책이 발간됐습니다. 한국어로는 ‘대규모 탈교회’ 정도로 옮길 수 있을 듯합니다. 영어에서 ‘de’자를 붙이면 ‘분리나 이탈’을 의미하니까, ‘de-churching’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입니다. 이런 신조어가 생겼다는 것이 참 안타깝고 마음 아픕니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성장경제에서 ‘떠나야 한다’는 의미로 ‘Degrowth’(de-growth)/탈성장’라는 신조어가 생겼고, 이것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뜻의 신조어인데 반해, de-churching(탈교회)라는 용어는 교회의 위기를 표현한 신조어이기에 그리 좋은 뜻은 아닌 거죠.

 

책의 저자들이 조사(research)를 해보니, 지난 25년 동안 미국에서 자그마치 4천만명 정도가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미국 성인의 15% 정도에 해당되는 규모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한 가지로 설명될 수 없겠지만, 주된 이유는 ‘소련 붕괴’, ‘극우에 결부된 기독교’,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 등이 제시됐습니다. 구소련과 미국은 악과 선의 체제 대결로 미국인들에게 비춰졌는데,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 악의 축이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극우세력과 복음주의 교회들이 영합하게 된 것도 사람들이 교회에서 관심을 멀리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정보통신)의 발달로 누군가의 간섭없이 기독교 세계관 바깥의 세계관을 접하게 된 것도 기독교를 떠나게 된 요인입니다.

 

미국의 탈교회 현상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이유들이지만, 제 생각하는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탈교회 현상 문제는 좀 더 심층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중 하나가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심층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복음주의권 학자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자체가 기독교의 자본주의화를 통해 부흥을 일군 미국 특유의 기독교 신앙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탈성장(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 복음주의권 교회에서는 아직도 자본주의성장신화를 비호하며 탈성장을 오히려 비판하고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탓을 자본주의 체제에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미국의 탈교회 현상(또는 한국 교회의 탈교회 현상)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문화 때문인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고, 이윤과 이익을 남기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는 자본주의 문화는 인간의 생명 현상을 말도 못하게 축소시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동료를 동료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 이익을 취하는 사이로 만듭니다. 삶의 모든 부분을 시장화(market)시켜, 이윤과 이익을 위해 생명을 소모시키는 장으로 삶을 변환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은 생명을 나누는 사이가 더 이상 아니게 됩니다. 인간의 삶은 고립되고 파편화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에 무관심합니다.

 

생명현상이 줄어든 것은 고스란히 비혼과 저출산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서로의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회성이 줄어듭니다. 소통하지 않습니다. 무반응과 무관심으로 인해 사회가 삭막합니다. 사람들 사이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동일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이윤과 이익을 위한 착취의 대상일 뿐이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 ‘생명’이 전혀 아닙니다. 이렇게 생명력은 말도 못하게 축소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명백한 병폐입니다.

 

생명현상이 줄어든 사회에서 탈교회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교회는 생명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사건은 생명현상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생명력이 넘칠 때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고, 생명력이 축소될 때 교회는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생명현상인 성령으로 인하여 이 땅에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확장된 가족(extended family)입니다. 비혼과 저출산 사회에서 교회가 함께 생명현상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 결혼이나 출산이 발생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이 없는 곳에서 교회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책에서 아주 실질적인 사회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비영리단체 경영컨설팅업체 브리지스팬그룹에서 “미국 주요 6개 도시에서 신앙에 기반을 둔 비영리기관이 해당 지역 사회안전망의 40%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2021년에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사회안전망이 사라지는, 아주 실질적인 위협이라는 지적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어려운 사람들은 더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사회안전망이 줄어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 사회에 ‘사랑’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게 더 큰 문제입니다.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 뿐인데,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은 세상을 이길 힘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지옥이 되어 갑니다.

 

교회는 세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교회는 세력을 키워 누군가를 지배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랑을 키워 세상을 섬기는 생명체입니다. 교회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습니다. 교회 하나가 없어지면, 사랑이 줄어듭니다. 교회를 여느 사회 집단으로 보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숫자가 아니라 능력입니다. 생명이 형편없이 축소된 우리 시대, 그래서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우리 시대, 우리는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 숫자가 줄었다고, 교인 숫자가 줄었다고 아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음을, 사랑이 없음을, 그래서 사람들의 고통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파해야 합니다. 교회는 생명이고 사랑입니다. 이 악한 시대를 이기고 견딜 힘입니다. 교회를 사랑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 28. 16:55

최고의 사랑, 순종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신명기 11:26-32)

 

주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가서

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것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그들이 도달하게 될 그 복과 저주의 자리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도달해서

처음 정착하여 예배를 드린 곳입니다.

세겜, 그곳은 순종의 자리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바로 이 자리로 되돌아 가는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의 여정도 이것 아니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그의 삶의 여정을 기록한 <고백록>에서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 평안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의 선조들을 따라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 자리는 최고의 사랑의 자리요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곳인 줄 믿사오니,

주여,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의 삶이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순종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최고의 사랑, 순종이 무엇인지 십자가에서 몸소 보여주셔서

모든 만물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성경 읽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

 

4세기에 활동했던 사막의 교부 에피파니우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절벽이요 깊은 심연이다.”

 

기독교 영성가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 대한 탐구를 진지하고 처절하게 했습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오롯이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그 중에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c.345-377)라는 사막의 교부가 있습니다. 이 수도사가 개발한 영성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산만하게 방해하는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 유형을 밝히고, 그것을 이 길 힘인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한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가 밝힌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탐식’

(2) ‘음욕’

(3) ‘탐욕’이 그 뒤를 잇고,

(4) ‘슬픔’

(5) ‘분노’

(6) ‘아케디아’가 있고,

(7) ‘헛된 영광’

(8) ‘교만’이 있습니다.

 

1)~3)은 인간의 기본 욕구입니다. 4)의 슬픔은 인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느끼는 좌절감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이 슬픔은 시기나 질투의 감정으로 나타나 인간을 괴롭힙니다. 5)의 분노는 슬픔의 시기가 지나면 오는 것인데, 인간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처음에는 슬픈 감정에 휩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슬픔이 분노로 바뀝니다. 대개 타자(other people)를 향한 폭력은 이 감정에 휩싸이게 될 때 발생합니다.

 

6)의 ‘아케디아’는 한국말로 옮기기 힘든 용어인데, 권태, 절망, 무기력, 우울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아케디아가 무서운 것은 이 감정은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치명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슬픔과 분노의 시기를 지나면, ‘아케디아’의 상태, 즉 우울한 상태가 되고, 이때는 타자를 해치는 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7)의 헛된 영광은 ‘자기애, 자기의(self-righteousness), 인정욕구’를 의미합니다. 자기애가 강하고, 자기의를 표출하며, 인정욕구를 갈망하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조차 모릅니다. 불쌍한 인생이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Narcissus)가 가졌던, 그런 욕망이죠.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 부릅니다. 나르키소스는 물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에 매혹되어 결국 그 환영을 쫓아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8)의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위에 올려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교만은 단순히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기는 행위가 아닙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 그것이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겸손한 척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교만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최고의 악한 행동인 것이죠.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을 제시하고, 이것을 이길 힘은 성경을 읽은 데서 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악한 생각에 대응하는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위의 악한 생각 중에서 ‘아케디아’에 대한 대응 말씀을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아케디아’의 사례 중 ‘아케디아에 빠졌을 때 형제들에게 얼른 가서 위로를 받고 싶다는 유혹’에 맞서 주님은 시편 77편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영혼은 위로도 마다하네. 하나님을 생각하니 즐거워지네. 내가 이 말을 하니 내 얼이 아뜩해지네” (『안티레티코스』 VI, 24).

 

우리는 성경 읽는 법을 배우는 것, 성경 읽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스마트폰이나 다른 전자기기가 없어 그냥 성경책을 손수 펴서 보아야 할 때보다 성경을 더 안 읽는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을 열어서 성경을 읽을라 치면 그보다 재밌어 보이는 온갖 자극적인 기사나 영상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왕도는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좀 내려놓고, 아날로그식으로 종이 성경책을 곁에 가까이 두고 수시로 성경을 들여다 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경을 왜 읽어야 하는 지 모르겠다고, 혹시, 투덜거림이 내 안에서 올라오는 분이 있다면, 신앙의 선배로부터 배워보세요. 성경은 하나님께로 가는 그 험난한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안내자입니다. 성경은 힘입니다. 이 힘을 잃지 마세요. 힘이 있어야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인 성경을 가까이 두고, 자주, 펴서 읽어보세요. 성경이 힘을 주고, 길이 되어 줄 겁니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최종병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 17. 03:03

[용어 통일 기도문]

 

주님, 헷갈립니다.

당신의 명칭은 '하나님' 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입니까?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한 개의 용어 'God'으로 당신을 부르고 있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당신을 부르는 용어가

이렇게 둘이나 됩니까?

하나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식 이름입니까?

사울과 바울처럼요.

아니면 예수의 아버지가 둘이어서 그러는 겁니까?

신적인 아버지, 육적인 아버지, 이렇게 말이죠.

 

주님, 이 노래가 생각납니다.

"내동생 곱슬머리

개구쟁이 내동생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개

엄마가 부를때는 꿀돼지

아빠가 부를때는 두꺼비

누나가 부를때는 왕자님

어떤게 진짜인지 몰라 몰라 몰라"

 

주님,

남북통일이 되면 주님의 이름도 통일이 될까요?

요즘 남북관계를 보면 통일이 쉽지 않아 보이는데

'하나님'과 '하느님'의 통일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주님, 저는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용어를 통일하면

주님께서 어여삐 보아 주셔서

남북통일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주님을 부르는 용어를

하루빨리 통일하는 것이

남북통일에 기여하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주님,

다르게 불리더라도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하나인 줄 믿습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하느님도 하나이시니"(엡 4:5-6a)라는 말씀처럼,

당신에 대한 명칭은 두 개일지라도,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하나인 줄 믿습니다.

다만, 헷갈리지 말게 하시고, 분열에서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용어를 통일시켜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 17. 03:03

최고의 노동을 간구하는 기도

(신명기 6:1-9)

 

주님,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최고의 노동이고

이 노동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줄 믿습니다.

신앙은 최고의 노동입니다.

이것을 잘 하면 세상의 어떤 일이든지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지켜주사

주를 사랑하는 신앙의 노동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몸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사도행전을 주목하는 이유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서 누가복음을 읽은 후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같기 때문에 두 책의 강조점은 같습니다. 성령과 기도가 강조됩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고, 기도 사역을 배우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주님’으로 묘사됩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예수님은 기도를 먼저 하십니다. 그래서 누가-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주님’이 부재한 상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역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어떻게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서부터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그리고 십자가 죽음, 또한 부활과 승천까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성령 안에서 발생한 일인데, 사도행전은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교회(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사역의 매뉴얼입니다.

 

현대 기독교 신학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비판은 교회가 충분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고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야훼 신앙, 그리고 플라톤의 신학의 영향 아래 기독교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일신론/유일신론’으로만 생각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묵상이 부족하고, 삼위일체적 사고와 실천이 부족하다보니, 기독교 고유의 폭발력 있는 복음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충분히 사유하고 묵상하지 못하면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생활의 구조를 ‘가부장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교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을 일신론/유일신론으로 인식하고 마니,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이해보다는 ‘하나의 힘’에 집중해서 그 권위 아래 굴복하고 굴복시키는 생활 구조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생활 구조를 오히려 편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일찍이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론(Trinity)를 사유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삼위일체론에서의 쟁점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고유한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삼신론이나 다신론으로 빠지지 않고 ‘한 하나님’이 될 수 있을 것인가였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하고 신비로운 것이라,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학이 발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비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신학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말하고 표현하고 싶은지,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왕적 군주의 모습을 가진 폭력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일치를 이루지만 동시에 각자의 위격(고유의 품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사회를 이루어 가고,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데 필수적인 신학적 통찰입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강력한 신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실제 교회생활에서, 그리고 선교활동에서 그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한 하나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삼위 하나님이 위격을 가지고 고유의 사역을 성취하시는지,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역 속에서 몸소 경험하고, 그 경험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여줍니다. 그래서 강력합니다. 하지만, 보여주다 보니,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그냥 우리의 눈에서만 흘러가 버리기도 합니다. 마치, TV 드라마를 보듯이 말이죠. 하지만,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이유는 우리에게 ‘구경’하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보여줄 수 있을 뿐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삼위일체의 역사를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발생하도록 우리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사도행전을 거니는 동안,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양심과 비양심]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양심이란 자기 사랑을 거부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타인을 위해 죽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는데, 소크라테스, 예수, 바울 등을 꼽는다.

 

양심적인 종교 저술가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저술가는 항상 논쟁적이고, 따라서 항상 반대파에 눌려서 고통을 받거나 반대파의 공격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 반대파라는 것은 그의 시대에 있어서 독특한 악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 만일 그 악을 이루고 있는 것이 왕이나 황제, 교황이나 주교들, 그리고 권력자들이라고 한다면, 그가 그들의 공격과 표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로써 종교적인 저술가라는 사실이 인지될 수 있다"(관점, 97쪽).

 

키에르케고르는 외톨이였다. 그 자신이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종교적 저술가였고, 국가와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자가면역질환인 척수병으로 투병을 했다. 그가 외로웠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의 무'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무는 비양심적 상태를 말한다. 존재하는데 양심 없이 존재하는 사람들은 자기 사랑하기에만 바쁘지, 타인을 향한 사랑을 실천/실현하지 않으며 산다. 자기 자신 이외에는 목적을 두지 않고, 타인을 수단으로 삶으로 사는 자들을 비양심적 존재, 즉 존재의 무라고 부른다.

 

키에르케고르는 <집단(군중)은 거짓이다 The Crowd is Untruth>라는 짧은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집단(군중)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집단을 이끄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보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모독하는 자는 없습니다"(생각하는 사람을 빛나게 도와주는 할아버지들, 26쪽).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을 싫어했다. 집단(군중)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겔의 정반합(변증법)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반(Antithese)'을 없애는 방식으로 평등과 평화를 이룬다고 생각을 했다. 이것을 나치에 적용해 보면, 정(독일인), 반(유대인), 합(평화로운 세상)이라고 할 때, 나치는 유대인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지금도 나치식 변증법이 보수 집단에서 통용되고 있다. 반(Antithese)을 없애는 방식으로 사회 통합과 평화를 이루려고 하는 생각은 언제나 '혐오와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비양심적인 행동이다. 자기(These)만 사랑하고 타인(Antithese)을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인가 진보인가는 어떤 변증법으로 세계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가에서 갈린다. 보수는 '반(Antithese)'을 없애거나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 하고, 진보는 '반'을 끌어안고 융합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양심은 타인(반/Antithese)를 위해서 나를 내어놓는 일이다. 비양심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여 타인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반(Antithse)'를 없애거나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 하지 않고, '반'을 끌어안고 융합하는 방식으로, 즉 '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반'을 없애고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는 욕망이 훨씬 더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군중(집단)을 모으고 그 힘으로 '반'을 없애고 굴복시키기에 혈안일 뿐이다. 이에 맞선 양심적인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다. 외로워진다. 양심을 지키며 사는 일은 어렵다. 양심을 지키는 자는 늘 '유혹자'로 산다. 양심을 저버리라는 유혹.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 밤에도 유혹이 거세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 10. 04:41

자녀세대를 위한 기도
(신명기 5:1-21)

 

주님

신명기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사명과 비전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애굽 2세대, 다음세대, 자녀세대들은

부모세대를 통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잘 지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주님, 우리도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고, 선택하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셔서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와 우리 자녀세대에게

그 어떤 것보다

하늘의 복을 물려주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하늘의 복을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영국교회에서 배우라

 

19세기, 20세 초, 영국의 별명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였죠. 이 별명은 특별히 영국에만 붙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국을 이루었던 나라들에게 일반적으로 붙여졌던 별명이고, 이제 이 별명은 미국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국을 주목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발전된 이후 사회가 급변하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점들을 제일 먼저 겪은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농촌 중심 사회에서 도시 중심 사회로의 변경을 가장 먼저 경험한 나라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기계가 발명되고, 기계를 이용한 산업은 농촌을 붕괴시키고 도시 문화를 형성합니다. 농사 짓고 살던 농부들은 더 이상 농촌에서 일 자리를 얻을 수 없어 도시로 몰리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도시 빈민 문제가 영국 사회를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이 18세기입니다. 이때 존 웨슬리 목사님이 벌였던 ‘Methodist’ 운동은 도시 빈민들을 구제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감리회’(Methodist)라는 교파가 탄생합니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문제를 먼저 경험한 영국에서는 정치이론과 사회이론이 발달합니다.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다 보니, 정치/사회 이론이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주자를 받아들였고,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의 사람들이 이주해서 영국 사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면서 각종 사회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특별히, 종교 문제가 컸는데, 이슬람 국가 또는 힌두 국가에서 이주하여 온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사회에서는 일찍이 ‘다원주의’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다원주의는 영국 사회의 통합과 안정을 위해서 채택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폭력사태가 발행하여 나라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죠. 보수 기독교인들은 ‘다원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매우 불쾌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을 단순히 신앙의 타협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은 타협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일찍이 존 로크가 <기독교의 합리성>(1695년 출간)에서 주장했듯이, 신앙은 ‘온유와 말씀선포와 모범적인 삶’으로 ‘설득’해야 하는 것이지, 힘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국 사회는 2차대전 이후에 아주 급격하게 변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종교 지형입니다. 영국국교회(성공회)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인구는 10%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선교형 교회, 91쪽) 이것도 벌써 20년 전 통계이니, 지금은 그 인구가 더 줄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2차 대전 이후에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어린이들의 비율이 매우 급격히 줄었는데, 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교회의 문화와 자연스럽게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신앙의 전수가 잘 되지 않았던 겁니다. 어려서 교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교회에 안 다닐 가능성이 엄청 큽니다. 어린 시절의 교회 경험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아주 낯선 곳으로 받아들입니다.

 

영국교회는 기독교의 쇠퇴를 이미 2차 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그리고 기독교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전세계 기독교 국가 중에 영국만큼 기독교의 쇠퇴를 먼저 경험한 나라도 없고, 영국만큼 교회와 신앙을 깊이 고민해본 국가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기독교 신앙의 쇠퇴를 경험하고 있는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의 교회들은 영국 교회에서 배울 게 참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세대가 자녀세대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선교학 연구에 의하면, 어릴 때 교회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가진 사람일수록 일생동안 계속하여 교회를 잘 다닐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더라도 교회로 다시 돌아올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가보았던 동물원이나, 엄마가 해 주신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어린 시절의 경험은 일평생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세대의 책임은 큽니다. 사무엘이 은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3-24).

 

교회의 풍경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여러가지 사회적 요인도 작용했지만, 우리 자신도 우리의 모습을 조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하도록 잘 이끌지 못한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해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한마음으로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조금 더 헌신한다면, 광야에서 길을 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조금 더 힘을 모아, 좋은 교회를 세워보아요.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의 시간: 시간은 인격이다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열왕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고대 왕국에 대한 역사 기록입니다. 그들의 역사 기록은 독특합니다. 한국에도 삼국사기나 고려사, 또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 기록이 있지만, 그 기록 방식이나 내용을 보면 열왕기의 그것과 분명한 차이를 지닙니다. 한국의 함석헌 선생이 성경의 역사서처럼 한국 역사를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그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글이 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12-13쪽).

 

여기서 함석헌 선생이 말하고 있는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기독교는 역사를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인격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사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때문에 시간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력을 지키는데, 교회력은 단순히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라 시간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살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사람과 시간을 그냥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사람과의 차이는 엄청 납니다. 시간을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시간을 그냥 자신의 소유 정도로 생각하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자기의 뜻(욕망)을 이루려 하겠지만,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사람은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보고, 무엇보다 시간 안에서 ‘구원’을 봅니다. 우리의 시간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열왕기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열왕기는 시간을 하나님의 인격이 활동하는 ‘그 무엇’으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시간(역사) 속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그 무엇 하나, 단순한 사건 하나, 그냥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열왕기는 하나님의 인격을 치열하게 대면하여 시간(역사)을 돌아봅니다.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의 참상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반성을 하며 돌아본 역사책입니다. 열왕기하 25장을 보면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이야기가 나오는데,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과 잘 지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왕하 25:24). 사반의 손자 그달리야 총독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유다의 마지막 왕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애굽을 믿고 바벨론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다 결국 멸망 당하고 맙니다. 특별히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포위 당하자 1년 7개월 간 버티다, 결국 성을 빠져나와 도망치다 바벨론의 추격대에 붙잡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려와 험한 꼴을 당합니다. 시드기야는 두 눈을 뜨고 자기의 자식들이 죽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고, 그리고 자신의 두 눈이 뽑히는 치욕을 겪습니다. 놋사슬에 묶여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압송되어 거기서 비참하게 죽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부하 장수 느부사라단이 몇 년 후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성전과 왕궁, 그리고 고관들의 집들과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불사르고 무너뜨립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가고 비천한 사람들만 가나안 땅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이러한 일을 보면서, 남유다 사람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당연히, “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방신)에 의해 죽은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성전과 왕궁,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열왕기는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에 대한 반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끔찍한 일을 경험하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지’ 질문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의문을 품습니다. 그야말로 신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왕기는 무엇이 하나님(신)을 죽였는가에 대하여 강력한 클레임을 겁니다. 하나님을 죽인 것은 이방인(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악을 통해 총체적 파국을 만들어 놓고, 신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처럼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59:1-3).

 

폐부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감히 ‘신의 죽음’을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지런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부지런히 시간을 인격으로 보아야 합니다.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를 구원하고 계신, 그 놀라운 ‘복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한 해가 가서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구원이 가까워 온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텔레스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빼앗기 위해서 파우스트에게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를 외치게 만듭니다. 파우스트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순간의 쾌락에 머물게 끔 타락시키려 했던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인격이라는 것, 우리의 시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된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세월’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그리스도의 인격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지 않고 그 시간으로 ‘구원의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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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