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3. 12. 27. 12:24

마음을 지켜주시는 은총을 간구하는 기도

(민수기 21:1-9)

 

주님,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주님의 은총만이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배웠사오니,

주여, 주님의 은총을 사모하여

우리의 마음을 잘 지켜내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주신 이 구원의 기쁨을 빼앗기지 말게 하시고

기도와 간구로

주님의 은총을 받아

마음을 잘 지켜내어 주님께 영광 돌리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주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12. 27. 12:21

주의 사자를 만나기를 간구하는 기도

(민수기 22:21-35)

 

주님,

겸손하기를 원합니다.

발람처럼, 마리아처럼,

우리의 마음이 겸손해져서

주의 사자를 만나게 하시고,

그리하여 주의 구원을 입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가장 간절한 신앙고백

 

요즘 한국 드라마 중에 ‘고려-거란 전쟁’이라는 게 있습니다. 배우 최수종이 오랜만에 사극 주인공으로 출연했어요. 최수종이 고려의 충신 강감찬으로 분해서 나옵니다. 한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면 낙성대역이 있는데, 강감찬 장군의 집터 입니다. 서울대 옆에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또다른 대학교인 줄 알죠.

 

고려 시대 고려를 괴롭히던 제국은 거란입니다. 거란족의 득세 때문에 고려는 늘 숨죽이며 살았습니다. 고려의 왕은 거란 황제에게 허락을 받아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한국 역사를 보면 늘 주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그늘 아래서 살았죠. 지금은 미국의 그늘 아래 살고요. 약소국의 설움입니다.

 

구약의 열왕기를 보면 이스라엘도 동일한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의 등살에 늘 괴로워합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우방국가이지만, 애굽이 이스라엘에게 늘 살가웠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애굽도 앗수르와 바벨로에 밀려 결국 이스라엘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들 이야기를 보면 국제 정세가 더 안 좋아집니다.

 

요시야 왕이 애굽 왕 느고와의 전투에서 죽고, 그 뒤를 이은 여호아하스는 애굽 왕의 재가를 받은 왕이 아니라 애굽 왕에 의해 3개월만에 축출당하고 맙니다.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습니다. 대신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릅니다. 여호야김의 통치도 아주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애굽에 의해 왕위에 올랐기에 친애굽 정책을 썼지만, 바벨론의 침공으로 어쩔 수 없이 바벨론에게 줄을 서게 되죠. 그러다 애굽과 바벨론의 전투에서 애굽이 승리를 거두자 다시 애굽에 손을 내밀었다가 바벨론에게 괘씸죄가 걸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죽습니다. 그 이후, 국운이 다하여,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을 거치며,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 당합니다.

 

요즘에 발생하는 전쟁을 보아도 전쟁은 온 나라를 초토화시키고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요즘보다 더 비참했습니다. 인류 사회는 전쟁을 막아보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쟁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비참함 가운데 최고였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지 않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요시야가 죽고, 남유다의 마지막 네 왕은 격동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매우 박합니다.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정치를 해도 살아남을까 말까 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남유다는 안타깝게도 좋은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멸망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렇게 멸망 당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 사가들은 상식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기록을 남깁니다. 그 기록을 보면, 그렇게 남유다가 멸망 당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기록과 거리를 두고 보아서 그렇지, 감정을 이입해서 보면, 이러한 고백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셨어요!’라고 신앙고백 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러한 어려운 일이 나에게 닥친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어요!’라고 고백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열왕기 사가들(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의 기록은 그야말로, 처절한 기록이고, 가장 간절한 신앙고백입니다. 열왕기 사가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신앙의 교훈은 준엄합니다. 1) 망하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망해야 다시 살 수 있다. 2)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는 생명이다. 3)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라. 이 신앙이 옳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건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열왕기 사가들은 나라가 망한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망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살아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실 거라는 강력한 소망입니다.

 

너무 비참한 일을 겪으면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내리신 거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비참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그 비참함에서 나를 건지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처절한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도 배웁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배신하거나 욕하거나 신세한탄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이 삶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좋을 때는 누구나 ‘할렐루야 아멘’ 할 수 있지만,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우리의 입술에서는 과연 어떠한 말이 나올까요? 사실, 좋을 때 ‘하나님께서 하셨다!’라고 신앙고백 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힘들고 지칠 때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늘 기쁘고 즐거운 가운데 찬송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길 소망합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유익이 있습니다. 좌절금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신앙의 깊이에 들어간 이들의 실제 상황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어보세요. 무덤 문을 열고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신앙의 무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존 로크: 기독교의 합리성]

ㅡ 로크에게서 배우는 기독교

 

중세를 벗어나 근대의 문을 열었던 정치 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 홉스, 그리고 루소와 더불어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인물이다. 서구 근대 사상가들은 단순히 정치 철학을 펼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종교(기독교)를 비판했다. 그래서 근대 사상가들의 저술은 눈여겨봐야 할 신학 서적이기도 하다. 중세의 사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종교 기반 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까지 국가는 종교(교회)의 시녀였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과 비슷하다). 가부장제를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유교의 종교적 이념을 통해서 설명해 보자면, 국가는 왕을 보존하는 기구로 기능한다. 모든 국민은 왕을 받들어 모시는 일에 동원된다. 국민의 개별적인 삶은 모두 왕을 위한 헌신으로 표현된다. 가정은 이러한 왕정제도의 미니어처 역할을 했다. 집안의 어른,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는 가정의 왕으로 군림했다. 가정은 ‘가장’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가정의 모든 활동은 가장을 보존하는 데 헌신된다. 가장을 좀 더 확대하면 ‘가문’이 된다. 가문의 모든 식솔들은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 희생된다.

 

서구 중세는 종교가 사회의 기반이었다. 국가도 국민도 모두 종교를 보존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중세의 왕이 왕권 신수설을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왕은 신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다. 왕은 종교(교회)를 지키고 번성하게 하는데 특별한 임무를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왕은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교회를 보호했고, 교회는 왕에게 신적인 능력을 부여해 왕을 신성화시켰다. 그래서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고, 교회는 온갖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근대 정치사상은 바로 이것에 제동을 건 것이다. 그래서 근대 사상가들의 저술들은 모두 국가와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또한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국가와 종교의 역할을 정의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 중에 존 로크가 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 언뜻 보면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다. 이 말은 국가와 교회가 이방인들의 개종을 위해서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도 된다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기독교는 진리이고,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에 있다.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에서 멀어진 이방인들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서라도 그들을 구원받게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로크를 비롯한 근대 사상가들은 이러한 논리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로크가 펼친 사상은 ‘관용론(toleration)’이다.

 

로크의 사상적 배경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로크는 엄격한 칼빈주의적인 배경에서 성장을 했고, 유명한 청교도 설교가인 오웬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로크는 연인 마다리스 마샴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 물론, 여자도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 서로 잘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로크도 그랬다.) 로크의 연인 마샴의 아버지는 그 당시 유명했던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자인 랄프 커드워쓰(Ralph Cudworth)이다. 로크는 연인 마샴의 권고로 성경과 신학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특별히, 로크는 마샴의 아버지 랄프 커드워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것은 로크가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캠브리지 플라톤주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Radical Orthodoxy’(급진적 정통주의)로 알려진 사조이다. 물론 오늘날 급진적 정통주의는 로크 당시의 캠브리지 플라톤주의를 보완, 발전시킨 신학사상이지만, 그 기조는 같다. 이들은 당시에 새로 시작되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사회가 세속화되는 것을 반대하고, 고전적인 기독교 신앙, 즉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적 기반, 또는 세계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오늘날 급진적 정통주의 신학을 이끌고 있는 존 밀뱅크, 캐서린 픽스톡, 그레이엄 워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신학의 틀에서 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세속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신학의 영역 안에 있다는 뜻이다. (급진 정통주의 신학을 조금 더 알고 싶으면, 바이블 오디세이에서 ‘급진적 정통주의’를 검색해 읽어 보시라.)

 

종교(기독교)에 대한 로크의 생각은 그의 주요 저서 <인간 오성론>, <통치론> 등에 나타나 있지만, 그것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저서는 1695년에 출간된 <기독교의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이다. 중세의 종교(기독교)는 다분히 강제적이었다. 국가가 국민들에게 신앙을 강요했다. 근대 사상가들은 이러한 종교 형태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인간 영혼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외부의 힘에 의해서 결정되면 안 되고, 순전히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의 배경에는 그 유명한 ‘사회 계약설’이 있다. 통치자에게 주어지는 국가 권력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과의 합의에 의한 계약에서 온다는 것이다. 사회 계약설은 개개인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자유를 중시한다. ‘계약’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오는 자유이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 더 이상 외부의 개입이나 강제를 거부하는 근대 사상은 기독교의 전파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 전파는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 종교는 국가의 도움이나 국가의 강제력 없이 스스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힘이 약화된 것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로크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영혼의 문제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사적인 것이기에, 그래서 남에게, 그것이 국가라할지라도, 절대로 남에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에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신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혼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외적인 힘에 의해서 강제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을까? 로크는 여기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한다. 온유, 설교, 그리고 모범적인 삶이다. 이것을 설득(Persuasion)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종교는 설득을 통해서 전파되어야 하지, 힘에 의해서 전파되면 안된다는 뜻이다. 로크는 자신의 저서 <기독교의 합리성>에서 더 이상 국가의 힘에 의지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교회를 향해서 사람들을 설득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크는 기존의 전통이나 신학자들의 의견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여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다. 그래서 <기독교의 합리성>의 부제는 ‘성서에 제시된 대로’(As delivered in Scripture)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로크는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신앙을 이성의 한계 안에 가두려 하지 않고 이성을 넘어서는 계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로크가 신앙을 이성의 한계 안에 가두려 했던 이신론자들이나 유니테리언들과는 다른 신앙의 결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기독교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대개 ‘합리성’은 이성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로크는 이성의 연역적인 관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제안자(계시자)가 신실하면 믿을 만하여 그 명제(주장/복음)에 동의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계시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대한 신뢰가 곧 합리적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계시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로크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인 잘 만난 덕?)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로크가 ‘기적’(miracle)’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기독교의 합리성>에서 기적은 계시나 예언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보면, 기적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로크는 이 점을 들어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의해서 기독교는 외부(국가)의 힘(도움) 없이 전도/선교를 할 수 있는데, 그 능력이 바로 말씀과 기적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로크가 기적을 기독교 전파의 강력한 수단 중 하나로 보는 것은 참 흥미롭다. 로크에게 기적은 사람을 외부에서 강제로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설득하는 도구이다.

 

로크는 기적과 더불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도구 도덕을 말한다. 여기에서 로크는 역사적인 신앙과 구원하는 신앙을 구분한다. 역사적인 신앙은 단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하는 신앙을 말한다. 그것은 참된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삶으로의 도약이다. 이것을 로크는 도덕이라고 일컫는다. 국가의 도움이나 강제력 없이 기독교를 전파해야 하는 입장에서 교회(그리스도인)는 사람들에게 도덕인 삶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이 곧 설득의 도구이다.

 

국가의 강제나 도움 없이 기독교를 전파해야는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통해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다시 정리하면, 로크는 온유와 설교와 모범적인 삶을 제시한다. 이것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해야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신앙을 강요하거나 강제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국가로부터 더 이상 비호를 받지 못하는 교회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영혼의 문제는 국가조차도 개입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정치철학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면서 발전했다. 특별히 근대 정치철학은 국가와 교회(종교)가 결탁한 것 때문에 발생해온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서 반성하며 그것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근대 사상가들은 국가와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국가의 역할과 교회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구별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세속화라고 부르지만, 세속화라는 말이 곧 신앙의 축소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구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모두 종교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로크도 그 당시 영국 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본인이 성경을 직접 연구해 보니 영국 국교회가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크는 성경으로 돌아가자(성서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서로 돌아가자. 정말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게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해석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로크가 말하고 있는 ‘관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로크의 종교 관용론의 핵심은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파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로크의 종교 관용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한 관용이다. 다만,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당시 영국 국교회의 횡포를 겨냥한 것인데, 영국 국교회와 청교도 전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반영한 것이다. 관용이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교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교파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관용은 혐오와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교회의 선교가 어려운 시절이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근대 정치사상가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로크, 홉스, 루소, 그리고 칸트를 비롯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책은 단순히 정치철학 서적이 아니다. 모두 국가와 교회를 비판하는 정치신학서적이다. 그들은 교회를 그냥 무작정 비판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안을 제시한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비판에 눈이 가려져 고개를 돌리지만, 그러지 말고, 그들이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대안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어려움 시절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좋은 지혜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로크가 말하는 설득의 원리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온유, 설교, 모범적인 삶. 그리고 기적.

Posted by 장준식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남유다의 요시야 왕은 한국으로 따지면 구한말의 고종 왕 같은 존재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든 좋게 바꾸어 보려고 노력을 많이 한 왕입니다. 요시아는 아버지 왕, 아몬이 암살을 당한 바람에 그 자리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쉬운 인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왕위에서 31년간 통치합니다. 국운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서 통치를 열심히 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역대 왕 중에서 히스기야와 더불어 최고의 찬사를 받은 왕입니다.

 

요시야 시대에는 예레미야와 스바냐가 활동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나 스바냐를 읽어보면 명확히 드러나고 있지만, 요시야 시대는 국제정세가 매우 안 좋을 때였습니다. 남유다는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해야 했고, 전통적인 우방 애굽과 가까이 지내면서 새로운 제국으로 발돋움은 바벨론의 세력 확장에 대응을 해야 했습니다. 요시야 시대는 뭔가 심상치 않은 국운이 맴돌던 때입니다. 마치 한국의 구한말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요시야는 기울어지고 있는 국가의 운명을 바로 세워보고자 고군분투하면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왕권 강화 정책을 폅니다. 그 중 하나가 성전 수리입니다. 종교를 바로 세우는 일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필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성전 수리를 하는 도중에 율법책 하나가 발견됩니다. 이 사건을 요시야 왕과 더불어 대신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국가의 가장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발견된 율법책이라, 이것을 통해서 뭔가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던 것이죠. 요시야 왕은 율법책 발견을 토대로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의 개혁 정책을 간절하고 처절했습니다.

 

요시야 시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마음이 애처로워지기도 하지만, 배우는 게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사람을 살펴보면, 첫째로 요시야 왕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26세의 젊은 나이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성전 수리를 위해서 제사장 그룹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신앙이 깊은 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요시야 왕은 겸손과 회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신앙인입니다. 율법책이 발견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자, 그는 곧바로 옷을 찢고 회개합니다. 말씀을 들으려 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나중에 훌다의 예언을 통해서 그가 유다 멸망의 비극을 경험하지 않고 죽게 되는 은혜를 누리는 원인이됩니다.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 이것은 신앙의 리트머스지 역할을 합니다. 신앙 상태를 평가할 때,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여호야김 왕은 완전히 정반대의 행동을 합니다. 여호야김은 율법책을 손에 들게 되었을 때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불에 던져 태워버립니다. 신앙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교회 나오는 것부터 발걸음을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말씀을 들으려 예배의 자리를 더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어려움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서기관 사반(Shaphan)입니다. 서기관 사반은 요시야 왕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던 인물입니다. 사반은 요시야 왕의 의중을 잘 파악하여 개혁을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사반 가문은 어려운 시대에 빛의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를 보면, 가문 전체가 예레미야를 돕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반의 세 아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돕습니다. 아히감은 예레미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보호해 주고, 엘라사는 예레미야의 목회서신을 바벨론에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마랴는 정부관리로서 자기 방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낭독할 수 있도록 방을 내어줍니다. 사반의 손자 그다랴는 시드기야 왕 후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한 뒤 총독이 되어서 유다를 통치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요시야가 왕권을 강화하고, 제사장 그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성전수리를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반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남유다 백성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반의 가문이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입니다. 사반과 그의 가문이 없었다면, 요시야 왕의 개혁도, 예레미야의 말씀사역도 진행조차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반과 그의 가문은 길이길이 기억될 만합니다. 그리고, 사반처럼 사역을 돕는 신앙인, 그런 집안이 되는 것은 참 영광스러운 일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사반과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중 여선지자 훌다가 있습니다. 훌다는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했던 인물입니다. 예루살렘 둘째 구역은 히스기야 왕 때 확장한 구역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는 이미 북이스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난민들이 남유다로 유입되던 시기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히스기야가 세운 곳이 바로 예루살렘 둘째 구역입니다. 훌다가 그곳에 살았다는 뜻은 그가 북이스라엘 출신 선지자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시야 왕 당시 예레미야와 스바냐 같은 걸출한 선지자들이 활동했음에도, 성전 수리 도중 발견된 율법책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듣기 위해 여선지자 훌다를 찾았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예언자로서 덕망이 높았다는 뜻입니다.

 

훌다는 이미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한 것을 경험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왜 북이스라엘이 멸망 당했는지도 알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훌다의 마음은 애처롭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의 길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데, 그 길로 가는 것 같아 그 누구보다도 애처롭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훌다는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과 요시야가 생전에 유다 멸망의 참상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전하고 있지만, 그 예언을 전하는 심정은 남유다가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멸망을 피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훌다의 예언은 짧지만, 거기에 담긴 간절함은 우주보다 컸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닮고 싶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남몰라라 하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여 더 좋은 상황으로 공동체를 인도하려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는 우리의 마음에 용기를 줍니다. 좋은 공동체는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좋은 공동체는 어려움을 이겨나가려는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힘을 보태고 힘을 합치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뜻밖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요시야, 사반, 훌다 같은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간절한 신앙고백  (0) 2023.12.27
존 로크: 기독교의 합리성  (0) 2023.12.22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0) 2023.12.08
신적인 것  (1) 2023.12.07
자기 반성의 시간  (1) 2023.12.03
Posted by 장준식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우리 시대의 결정적 사건 두 가지.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이다. 이 두 가지 사건 앞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것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종말이라고 한다면, 인류는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으로 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인간을 매우 당황스럽게 만든다. 기후변화와 AI는 인간이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은 인간이 스스로를 종말로 몰아 세운 사건이다.

 

앤서니 레반도프스키(Anthony Levandowski). 미래의 길(WOTF: Way of the Future)의 교주다. 이 교주는 AI를 통해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2015년 설립했고, 2017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팬데믹 기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았다,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종교는 AI를 예배한다. 교주 레반도프스키는 묻는다. “가장 똑똑한 인간보다 10억 배나 더 똑똑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 수 있냐?” AI를 신(God)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AI교는 벌써 수천명의 신도를 모았다. 인간은 머지않아 AI에게 지구 통치의 자리를 넘겨줄 것이다. 이것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재신론(anatheism)이라는 개념으로 현대 신학을 새롭게 구성하고 있는 신학자 리처드 카니(Richard Kearney)는 이렇게 말한다. “재신론은 망각된 것을 향한 미래 내지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신적 역사의 부름을 향한 미래를 제안합니다. 그것은 ‘이후의 사유’ 내지 ‘이후의 정서’ 그 이상의 것으로서 ‘이후의-신앙’입니다. 이후의 신앙은 종말론적입니다”(재신론, 11쪽). 프로이트, 맑스, 니체 이후 서구 사회에서 신 개념은 이들의 비판을 거쳐 살아남은 것만 유통될 수 있었다. 종교(기독교)에 대한 이들의 비판의 그물은 촘촘하여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 신앙은 크게 두 가지이다.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 등이 구축해 놓은 근대의 그물을 통과했거나, 아니면 이들이 만들어 놓은 그물을 우회했거나, 이 두 가지 중 하나이다. 리처드 카니의 재신론은 전자이다. 그물을 통과한 신적인 것을 모아 다시 신론을 구성한 것이다.

 

리처드 카니는 자신의 신학을 종말론이라 부른다. 이미 존재했던 성스러운 것을 다시 발견했거나,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에 대한 선취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다시 말해,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은 인간이 스스로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종말의 사건인가, 아니면 성취되지 않은 것의 선취 사건인가.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으로 인하여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 이후 불과 100년만에 종교(기독교)를 향한 그물은 더 촘촘해졌다. 팬데믹을 지나며 그리스도인의 감소가 두드러진 것은 이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촘촘한 그물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리스도 신앙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교회가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을 신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앞으로 교회는 더 많은 사람을 잃게 될 것이다.

 

인간은 종말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종말론을 원한다. 기후변화로 인하여, 그리고 AI의 출현으로 인하여 사라질 운명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기후변화는 인간의 멸종을 가져올 것이고, AI의 출현 또한 인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이렇게 종말이 확실한 시대에 신학을 한다는 것,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 로크: 기독교의 합리성  (0) 2023.12.22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0) 2023.12.10
신적인 것  (1) 2023.12.07
자기 반성의 시간  (1) 2023.12.03
제국과 교회  (0) 2023.11.28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12. 7. 06:36

엘르아살과 같은 은총을 간구하는 기도

(민수기 20:22-29)

 

주님,

우리를 새로운 교회력,

새로운 그리스도의 시간으로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초대와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시간으로 들어온 우리들에게

한없는 은총을 부어 주소서.

아버지 아론의 옷을 물려 받은 엘르아살처럼

주님의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시고,

우리가 입은 옷은 그리스도의 옷인 것을 기억하며

그 옷을 잘 입고,

그 옷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잘 물려주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좋고 복된 인생이 없습니다.

새로운 교회력의 첫 주일에

복음을 듣게 하셨사오니,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처럼

새로운 해에도 우리의 발걸음에 희망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이제 곧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신적인 것]

ㅡ 어떤  존재론적 자율성(Auto)

 

1) 아리스토텔레스 - 부동의 동자(ummoved mover): 모든 사물을 운동하게 하는 원인이면서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것

2) 기독교의 신 개념 - 부동의 동자로서의 신 (스콜라 신학)

3) 데카르트 - 자기의식적인 자아 (코기토 철학)

4) 스피노자 - 자기원인적인 자연

5) 칸트 - 자율성(autonomy): 자기의식적인 자아도, 자기원인적인 자연도 아닌, 다만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6) 마르크스 - 자본

7) 하이데거 - 테크놀로지 (기술의 바깥이 없는 시대)

8) 푸코 - 권력

9) 4차 산업혁명 - 자동화/자율화 (사물 인터넷): 인공지능(AI)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신학의 역할: 부동의 동자, 무제약적인 존재로서 자리매김 한 신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 역할

ㅡ 그것이 정말 구원을 주는가

ㅡ 그것이 정말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해 주는가

ㅡ 그것이 정말 행복을 주는가

ㅡ 그것이 정말 도덕적인 세상을 만드는가

ㅡ 그것이 정말 세계사랑을 이루는가

ㅡ 그것이 정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가

ㅡ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특별히 우리 시대에 신학이 주목해야 할 '신적인 것'은 '자본과 테크놀로지와 권력'이다. 자본과 테크놀로지와 권력에 대한 비판이 정치신학의 과제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0) 2023.12.10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0) 2023.12.08
자기 반성의 시간  (1) 2023.12.03
제국과 교회  (0) 2023.11.28
한국 사회의 두 가지 불행  (1) 2023.11.28
Posted by 장준식

자기 반성의 시간

 

구약의 열왕기는 자기 반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은 역사를 돌아보며 자기 반성을 진지하게 합니다. “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멸망 당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왔는가?” 열왕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자기 반성’입니다. 열왕기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게 아닙니다. 철저한 자기 반성입니다. 열왕기를 ‘성경’으로 읽는 그리스도인은 열왕기를 통해서 반드시 자기 반성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 반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기 반성을 잘 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자기 반성에 쏟아부어야 할 시간을 유튜브 보거나 SNS를 확인하는데 빼앗깁니다. 칼 뉴포트(Cal Newport)는 자신의 책 ‘딥 워크’(deep work)에서 무엇인가에 몰입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인하여 현대인들은 어느 한 가지 일에 몰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집중력이 감소됩니다. 칼 뉴포트는 하나의 일에 3-4시간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요즘 시대에, 한 가지 일에 3-4시간 집중하면 큰 성공을 거두는 대가가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만큼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한 가지 일에 3-4시간 집중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그나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적어도 예배 시간만큼은 집중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생활 마저도 안 하는 사람들은 스마트 폰을 내려놓고, 어느 한 가지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일에 더 큰 어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훈련을 할 수 있는 삶의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1장은 므낫세 왕의 치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장에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자기 반성은 열왕기하의 후반부로 갈수록 멸망의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과 반성을 쏟아놓습니다. 므낫세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곳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멸망한 원인을 ‘출애굽 때부터 이스라엘이 죄를 쌓고 쌓은 것’에서 찾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쌓이는지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자기 반성의 시간을 진지하게 갖지 않으면, 어느새 죄는 쌓이게 마련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사함의 표현을 ‘씻다’(wash)라는 말을 통해서 합니다. 몸을 생각하면 죄를 씻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림언어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 몸을 씻지 않고 살면 온갖 질병에 걸려 일찍 죽을 가능성이 큽니다. 홈리스들에 대한 보건의학 통계를 보면, 홈리스들은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질병이 많고 수명이 짧다고 합니다. 물론 가족 또는 사회에서 소외되어 외롭고 힘든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은 위생이라고 합니다. 홈리스들은 잘 씻지 않습니다. 씻을 수 있는 시설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홈리스들은 위생에 어려움이 있어 일반인들에 비해서 질병에 걸릴 확률도 높고 평균수명이 현저하게 짧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 늘 오던 홈리스들이 오랜 동안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잘 씻기만 해도 병에 걸리는 것을 많이 예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씻는다는 것은 죄를 쌓아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죄를 쌓아 두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신앙의 능력, 신앙의 유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 즉 예배는 ‘씻는 행위’입니다. 매일 씻지 않으면 때가 쌓여서 몸이 불결해지고 병약해지기 쉬운 것처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죄를 쌓아 놓게 됩니다. 죄는 영혼의 바이러스와 같아서 제때 씻어내지 않으면, 또는 치료하지 않으면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기 반성은 결국 ‘씻는 행위’입니다. 나의 영혼(soul)에 혹시라도 쌓일지 모르는 죄를 부단히 씻어내는 행위입니다. 씻기만 잘해도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것처럼, 자기 반성만 잘해도 인생을 복되고 값어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영혼이 깃드는 것도 맞는 말이고, 건강한 영혼이 육체를 건강하게 보존하는 것도 맞습니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현대인들의 삶의 성패를 가릅니다. 자기 반성의 시간을 통해 삶이 더 풍성해지기를 소망합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0) 2023.12.08
신적인 것  (1) 2023.12.07
제국과 교회  (0) 2023.11.28
한국 사회의 두 가지 불행  (1) 2023.11.28
감사절 풍경  (1) 2023.11.2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