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8'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4.02.08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2. 2024.02.08 교회가 다시 살려면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이라는 말 대신 '통치'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가 주조한 '통치성'이라는 용어는 '통치와 관련된 것'을 말한다. 푸코는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 권력은 빼앗고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통치성 안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이었다. 권력을 관계로 보면 자유의 개념이 바뀐다. 권력을 실체로 보면 자유란 자기실현을 위해 타자들의 저항이나 비판이 없는 '평온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권력을 관계로 보면 자유란 사람들 간의 경쟁이나 대항, 그리고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의 연대 등의 역동적 관계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자유란 권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서로의 배려이다.

 

푸코에게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유연성을 잃고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고착되어 버릴 때, 이것을 지배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견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그 균형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푸코의 권력론(통치론)의 핵심은 '비판'과 '저항'의 문제이다. 통치자의 핵심 역량 중 하나는 비판적인 직언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이다. 통치는 상호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없다. 정부가 통치권을 가졌다고 해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없다. 국민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수행에 대하여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이 정부의 통치에 대응하는 '통치'이다. 그러므로 비판과 저항은 통치 행위이다. 권력은 관계적이기 때문에 정부도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고, 국민도 정부를 향하여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지배 상태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자기배려'이다. 자기배려는 권력관계(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기의 힘을 조절하는 실천이며, 자기의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의 지속적인 비판과 문제화이다. 즉, 권력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개인에게 필요한 자질은 끊임없는 자기 비판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여는 행위.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정부(대통령)의 통치를 보면서 답답해 하는 이유는 권력이란 관계적이라는 것을 이해 못하는 권력자의 모습 때문이다. 자신의 통치만 중요하고, 자신의 통치만 일방적으로 강요할 뿐, 국민 쪽에서 정부(대통령)을 향해서 하는 통치에 대해서는 수용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인데, 일방적인 통치만 실행되고 있으니, 민주주의의 후퇴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마음에는 분노만 쌓여 가고 있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푸코의 통치성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싫어할 것이다. 푸코 공부는 피통치자들만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피통치자들은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푸코의 통치성을 공부해야겠지만, 더불어 권력자들도 '이런 식으로 통치하지 않기'위해서 반드시 푸코의 통치성을 공부해야 한다.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통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통치는 양방향에서 서로 주고 받아야 바른 통치이다. 이것을 알고 국민의 통치를 수용할 줄 아는 정부(대통령)가 바른 통치자이다.

 

대통령의 KBS 대담을 들은 국민들의 입에서 탄식 소리가 들린다. 대한민국은 불행하다. 권력의 자리에 좋은 통치자가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을 물같이, 저항을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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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다시 살려면]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가 분석한 현대사회의 현상.

 

ㅡ 스펙타클은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무기력한 수용이다.

ㅡ 스펙타클은 현대의 수동성의 제국 위에 머물고 있는 결코 지지 않는 태양이다.

ㅡ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경제의 첫 번째 국면은 인간이 실현하는 모든 것을 존재로부터 소유의 관점으로 규정하는 명백한 퇴행을 초래한다.

ㅡ 인간의 특권적 감각은 다른 시대에는 촉각이었다. 스펙타클은 그것을 시각으로 대체한다.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신비화되기 쉬운 감각인 시각은 현대사회의 일반화된 추상과 일치한다.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우리 시대가 '스펙타클 사회'인 것과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모두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구조로 돌아간다. 그래야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정치. 이 두 분야만 봐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스펙타클의 사회인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펙타클 정치, 스펙타클 종교.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정치와 종교만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런 곳만이 부흥을 한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스펙타클을 일으키는데 귀재이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부흥하는 교회는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것을 잘하는 교회들이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본과 인력이 있는 대형교회는 상대적으로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쉽다. 반대로 자본과 인력이 없는 교회들은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못한다. 결국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대형교회로 교회들은 흡수되어 간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현상이 정치를 망가뜨리고, 교회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포퓰리즘 정치, 포퓰리즘 종교. 위에서 기 드보르가 지적하고 있느 것처럼,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정치와 종교를 통해 사람들은 점점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스펙타클의 위력에 일방적으로 그들이 강요하는 것은 수동적으로 수용할 뿐, 저항하지 못한다.

 

이는 고도로 발달된 상품 사회, 즉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베오울프의 그렌델일 뿐이다. 스펙타클은 그렌델의 엄마 물의 마녀이다. 원래는 추악한 모습이지만, 물의 마녀이기에 자기의 모습을 스펙타클하게 변형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꾀어낸다. 그 꾀임에 넘어간 사람들은 모두 희생자가 될 뿐이다.

 

교회가 스펙타클을 일으킨다는 것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세속에 물드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신비한 현상은 교회에서 그토록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교회 자체가 세속에 물들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데 혈안이라는 것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생명의 힘을 지키려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수동적으로 수용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상품 사회의 무력한 소비자로 전락시키며 소비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리는 스펙타클 사회에서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지, 오히려,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스펙타클 사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 자명하다.

1)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교회에 가지 않기

2)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기

3)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목회자 조심하기

4) Indication 해서 쉽게 말하면, 대형교회 가지 않기

5) 대형교회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기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이렇게 두 종류의 교회 밖에 없다. 목사도 마찬가지. 대형교회 목사와 대형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이렇게 두 종류의 목회자 밖에 없다.' 물론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스펙타클 사회의 교회/목회자 현상을 잘 지적한 듯하다.

 

교회가 다시 살려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우리 사회에 저항해야 한다. 쉽게 말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해야할 일을 하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배 조용히 드리고, 진실한 교제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길을 내밀되, 그냥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하는 것이다. 흑탕물을 맑게 만드는 법은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이처럼 스펙타클이 너무 심해 흑탕물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 우리 삶, 우리 신앙을 다시 맑게 만드는 방법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어려운 이유는 무슨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해서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 사회의 요구를 따라가면서 가뜩이나 스펙타클 사회 때문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더 지치고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