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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3.24 스데반 사건이 말해주는 복음의 핵심

스데반 사건이 말해주는 복음의 핵심

 

스데반 사건의 보편성

스데반 사건은 스데반의 순교에만 너무 집중되어 그 사건이 말해주고 있는 의미를 놓치기 쉽습니다. 일곱 집사의 선출을 마친 뒤, 스데반 순교 이야기가 곧바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스데반의 특별한 사역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른 여섯 집사 모두 스데반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스데반 이야기가 대표격으로 소개되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극적이면서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다 고난 당하는 일이 매우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스데반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모든 ‘보편’ 그리스도인들이 스데반처럼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현상을 계속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스데반과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

스데반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스데반이 전한 복음이 왜 헬라파 유대인 공동체와 충돌을 일으켰는가 입니다. 우리는 ‘왜’를 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은 그 정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자,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합니다. 이 논쟁은 점점 과격해집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지만 스데반의 기세를 꺾지 못하자 불법과 폭력을 통해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아세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무엇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복음의 핵심을 만나게 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고소 이유

스데반이 야비하게 헬라파 유대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막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말 그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유대당국에 고소를 하는데,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했다고 하면서 고소합니다. 스데반은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적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욕을 한 적도 없고 성전을 향하여 침을 뱉은 적도 없습니다. 스데반은 그냥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이 말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하고 있다고, 헬라파 유대인들이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길래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복음이 뭐길래

헬라파 유대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특권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있고, 자신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는 다른 처지의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민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을 통해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정체성과 세계관을 무참히 깨뜨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통해 은혜의 보편성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한 마디로 은혜의 보편화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이유

복음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과 온 우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은혜의 보편성이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가진 특권이 무너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특권의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되자 폭발합니다. 복음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에 대하여 시기(jealousy)가 발생된 것입니다. 시기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시기는 반드시 폭력을 불러옵니다. 스데반이 죽게 된 이유는 복음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희생자가 된 것이죠.

 

복음과 죄악의 보편성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죄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저 사람과 내가 같다는 평등성을 참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차별을 두어야 속시원합니다. 인간은 저 사람이 나랑 같아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내가 저사람보다 못하게 되는 것도 참지 못합니다. 관계가 평등하면 불편해합니다. 오히려 차별이 발생해야 속시원해합니다.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교만, 즉 죄악에 대한 치유입니다. 복음을 삶에 받아들인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이 어떠한 특권을 불러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을 때 자신에게 저질러진 폭력의 책임을 그 폭력의 가해자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이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들은 불의한 자가 되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에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전하고 싶었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과 죄인에게 동일하게 내린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데반처럼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복음은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내는 것입니다.

 

기이한 현상

요즘 (기독교) 교회를 보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헬라파 유대인’이 된 것 같습니다. 마치 복음이 누군가를 차별하는 도구인 양, 그리고 교회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는 양, 복음의 이름으로 다른 존재를 차별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복음의 왜곡입니다. 성경을 신실하게 읽지 않고 자의적으로 읽고 해석하여 자기의 의(righteousness)와 기득권을 보호하고 자랑하는데 사용하는 범죄입니다. 복음은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들과 죄인들에게 동일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녀노소, 자유인이나 종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인데, 교회가 무슨 권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차등 적용하여 사람들을 차별하고 정죄합니까. 우리 모두 복음 앞에서 겸손해지고, 감사하며, 힘껏 서로 축복해주고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