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30. 06:18

2012 1 2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8:1-13

제목: 사랑은 덕을 세운다

 

고린도는 우상이 판을 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복음 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역뿐만이 아니라, 평생 우상의 그늘 아래서 살던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한 지역과 개인의 삶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자연스러운 곳, 그리고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 신앙을 갖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는 일, 그리고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을 잘못 이해하면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주고자 했던 교훈을 놓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오늘 말씀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피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말씀의 핵심이 절대로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심각한 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어떠한 교인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인이 그것을 봤습니다. 그 교인이 노발대발 합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어떻게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냐고요. 그러나 우상의 제물을 먹은 그 교인은 이렇게 맞받아칩니다. 고기는 고기일 뿐이지 이게 우상에게 바쳐졌다고 해서 무슨 효력이 있냐고요. 그러면서 이 사람은 그러한 것에 얽매여서 무슨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냐고 오히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그 사람을 나무랐습니다. 이 문제로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와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 이렇게 나뉘어서 죽어라 싸웠습니다.

 

사실 이러한 비슷한 문제가 현재도 교회 안에 편만합니다. 한국교회는 처음에 이와 비슷하게 제사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제사 드린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제사 드리면서 절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등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장례식장에 가서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국문화는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에게 두 배 반의 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주에게는 맞절을 한 배 반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장례식장에 가면 기독교인들은 고인에게 절을 하거나, 상주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앞에서 묵념(기도)하고, 상주와도 목례 정도 나누고 맙니다. 지금은 오히려 이러한 기독교 장례문화가 편만해져서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다시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은 이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먹어도 상관 없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가 승리의 함성을 질렀을까요? “그것 봐!”하면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파를 나무랐을까요? 사도 바울은 문제의 핵심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피력합니다. 그것을 피력하는 핵심 구절이 바로 8 1절의 말씀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 구절을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지식은 나쁜 것이구나, 무식하게 사는 것이 좋구나!’ 사도 바울은 지식은 나쁘고 사랑은 좋은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지식이 없으면 인생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당신들은 못 배웠어도 자식들은 교육 많이 시키려고 뼈빠지게 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지식이라는 것을 잘못 소유하게 되면 오늘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그러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지식은 중요한 것이지만 지식만 쌓는 것은 남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지식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지식이 남을 살리고 이롭게 하는데 쓰여질 수 있습니다. 지식에 사랑을 더해 덕을 쌓은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지성인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결정적으로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지식의 핵심 내용이 6절입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여기서 핵심은 한 하나님, 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라는 뜻은 이 세상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사람들이 행하는 우상숭배는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있지도 않은 신에게 바친 제물에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도 이러한 지식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음식을 먹어도 상관 없고, 장례식장 가서 예를 갖추어 절을 해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제사음식은 그냥 음식일 뿐이고, 고인에게 절 하는 것은 그 고인이 무슨 이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절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예의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지식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은 교만하다는 뜻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공동체에 고집스럽게 적용하면 그 지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최고의 잘못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는 지식이 더 있는 사람도 있고, 지식이 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지식 수준이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 한 편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제가 쓴 시입니다. 제목은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입니다. 부제는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입니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어린 시절 비 올 적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도너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다. 기름에 튀긴 거라 끔찍하고 그런 걸 정신 없이 먹었다는 것이 끔찍하다. 그런데 그 시절엔 그것이 상식이었다.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을 뿐이고 그런 사실에 풍요롭다고 느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나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독을 주신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트랜스 지방이 엄청 들어간 기름에 튀긴 도너츠를 간식으로 주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엄마의 사랑에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엄마의 상식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것이 엄마가 자식들에게 베푼 최고의 사랑이었다. 사랑의 행위는 늘 바르고 정직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사랑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고 상식을 비껴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자신의 상식 선에서만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은 이미 인간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상식만큼만 사랑을 이해하고 받으면 된다. 그래서 난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엄마의 그 끔찍한도너츠가 그립고 또 그립다.

 

저희 어머니가 올해로 76(36년생)이십니다. 우리 어머니 세대에는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 그 당시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치고, 트랜스지방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던 어머니가 사랑으로 만들어 준 도너츠 간식을 보고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는 참 무식하다며 내팽개쳐 버렸다면,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저는 지식이 많은 아주 똑똑하고 훌륭한 자식입니까? 아니면 후려 아들놈입니까?

 

세상적인 지식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충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목사입니다. 제가 아는 것만큼 여러분들을 지도하고 가르친다면, 아마도 여기에 앉아 계실 분 한 분도 없을 겁니다. 제가 아는 것과 여러 분이 아는 것이 달라 수많은 충돌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의학적 지식 만을 가지고 우리를 진찰한다면 우리는 의사 앞에서 얼마나 큰 면박을 받고 상처 받겠습니까? 다시는 그 의사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여기서 자유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온 자유를 말합니다.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안 그리스도인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없는 사람, 아직까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믿음이 약한 자들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우상제물을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이 문제가 단순히 유식과 무식의 문제 아님을 유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유식과 무식의 문제로 보았으면 이렇게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 문제가 거론된 고린도전서가 성경에 포함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하냐면, 이것이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제물을 먹어도 된다파의 경솔한 행동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구나!” 이 마음에 담력을 얻어 우상 숭배를 다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우상을 믿는 일을 어느 정도 병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다시 먹게 되는 일은 그들이 믿음 좋은 사람들처럼 그 우상제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믿으면서 동시에 우상도 섬기고 있었는데, 우상제물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우상숭배를 지속해서 해도 되는구나라는 타락한 믿음을 담대하게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것은 곧 라고 사도 바울을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 문제를 끝맺음 합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것이 믿음인데, 이것만 가지고 신앙생활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믿음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핀잔 주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신앙생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된 자유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면 안 됩니다.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영어로 “Love builds up”입니다. “build”세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up”이 들어가면 세우되 끝까지 온전하게 세운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말로 이것을 덕을 세운다로 번역했습니다. 참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교회를 온전히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가정을 온전히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온전히 이웃을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나 자신을 온전히 세웁니까? 온전한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인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우리가 아는 이상, 우리의 믿음생활은 사랑그 자체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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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