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16. 06:36

2012 2 1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삼상 3:1-10, 1:43-51

제목: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부르심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의 말씀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고, 요한복음의 말씀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은 이미 나실인으로서 실로에 있는 제사장 엘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제사장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부르심은 제사장으로서의 부르심은 아니었습니다. 나다나엘의 부르심 또한 무슨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부르심이 아니었습니다. 빌립과의 관계 속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생각할 때, 무슨 직분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목사, 선교사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포함되기는 하나,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전부는 아닙니다. 부르심이란 그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목사직은 그것을 감당할만한 자격과 자질이 갖추어진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의사직이 그것을 감당할만한 자격과 자질이 갖추어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오히려 자격과 자질이 되지 않는데, 소명(부르심)을 받았다고 달려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꾸 성직과 세속직을 구분하는데, 하나님 안에서 성직과 세속직의 구분은 없습니다. 이점을 종교개혁자 칼빈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르심(calling)이라는 단어를 직업에 쓰고 있습니다. 어느 직업이든지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는 천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계시던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충분히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천직
(calling)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나누어 놓은 직업의 높고 낮음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천한 직업도 없고 귀한 직업도 없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찾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자신의 일에서 소명을 찾는 자는 그 일을 하면서 즐겁고 기쁘겠죠. 그렇지 못한 자는 그 일이 아무리 세상적으로 칭송을 받는 직업일지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해는 없어져야 합니다. 목사나 선교사 등 소위 주의 일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이 천직(calling)이 아니라, 각자 하는 일 안에서 소명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바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작업이 이미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정리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성이 아직도 16세기에도 못 미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의 부르심을 보십시오. 사무엘은 처음에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저 자신의 스승인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엘리 제사장이 그렇게 훌륭한 제사장으로 역사에 남지는 못했지만, 이것 하나만은 괜찮았습니다. 아무나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무엘은 몰랐지만, 엘리 제사장은 그 부르심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령 받으면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령 받는 것도 무슨 무당이 신 내리듯이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으면 못 치던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시는데, 그것이 성령의 역사의 보편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통계에 의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저절로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신앙훈련을 위해서 목사 같은 교회의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고요. 그래서 성경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훈련 없이 신앙의 성장은 오지 않습니다. 혼자서 독불장군식으로 열심히 믿는 기독교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한 신앙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사무엘이 처음부터 훌륭한 제사장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 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애송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부르심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받은 결과, 그것을 잘 소화하고 연습하고 습득한 결과,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을 제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 훈련이 교회에서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현대교회의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만 해도 기독교인이 되려면 3년 동안의 훈련을 꼭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교회의 멤버가 되려면, 기독교인이 되려면 3년 동안 훈련 받아야 한다고 하면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꺼려 합니다. 세상 살기도 힘들고 바쁘고 죽겠는데,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여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삶 속에서 자신을 귀찮게 한다 싶으면 아예 신앙에 대해서 마음을 닫아 버리는 것이 요즘 세태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받은 부르심은 참 곤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셔서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 제사장의 가문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애송이 제사장 사무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사무엘은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이 그를 안정시키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셨는지 말해 보라고 합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물론 그것이 자신의 가문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그 말씀을 듣고 사무엘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이런 말로 응답합니다.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그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망하고 맙니다. 그 일의 사정이 사무엘상 4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예언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예언은 미래를 보는 능력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을 뜻합니다. 인디언에게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것과 성격이 좀 다릅니다. 우리가 보통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갖기 원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능력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좀 평탄케 하려는 욕심인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의 예언은 내가 들어설 자리가 사실상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예언은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실 지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린 것이죠. 엘리 제사장 가문에 내려진 예언을 보십시오. 여기에 나의 욕심이 또는 내가 들어설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냥 그렇게 망하고 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인 겁니다. 함부로, 섣부르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겠다고 선뜻 나설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메시아를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진리에 목말랐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그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다나엘이 찾고 있던, 기다렸던 그 메시아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빌립의 전도에 나다나엘은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메시아를 기대하긴 했으나 뭔가 특별한 방법으로 메시아가 오실 거라고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죠.

 

빌립은 이렇게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나다나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와서 보라고 끝까지 권면합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권면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예수께 나아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분이 바로 자기가 그토록 갈망하던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 사이에 오갔던 몇 마디 말로 어떻게 나다나엘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50절과 51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신 부르심의 핵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나다나엘에게만 일어난 부르심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리시는 부르심이라는 데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면 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첫째, “하늘이 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둘째,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현재의 세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지금 이 세상이 돌아가는 상태로만 세상을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이 세상은 죄와 악과 죽음이 편만한 것 같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으신다는 것,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게 숨쉬고 사는 것 같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사실상 태어나자마자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이 우리의 전부를 말해 줍니다. 우리 인간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덧없고 허무합니다. 결국 죽게 될 인생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옹다옹 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누구는 조금 더 살고 누구는 조금 덜 살고, 누구는 조금 더 건강하고 누구는 조금 더 건강치 못하고, 누구는 더 많이 가졌고 누구는 덜 가졌고 하는 것 때문에 희비가 갈릴 것 같지만, 사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로애락은 그러한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은 인간의 아주 본질적인 문제에서 오는데, 그것이 바로 죄, , 그리고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배타적인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개입해서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는 문제들입니다. 조금 더 산 사람이라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건강하다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가졌다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현실에 놓여진 굴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 , 죽음)이 이 세상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 같고, 이것 때문에 인간의 삶이 좌우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개입하셔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들(, , 죽음)을 해결하시고 바로 잡으시고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야곱의 벧엘 체험과 같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 땅으로 도망가던 중 한 곳에 이르러 유숙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거기서 야곱은 꿈에서 사닥다리를 통해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봅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곳이라고 깨닫고 돌단을 쌓은 뒤 예배 드리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께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신앙고백이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나다나엘에 대한 부르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부르심이란 근본적으로 어떠한 사역으로의 부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르심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 목사도 나오는 것이고 사이비 교회도 나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그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의 사역(부르심)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부르심이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부르심이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진리에 나를 매는 것, 바로 그것이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을 알고 믿을 때, 우리의 인생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값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면서, 여기에 모든 인생을 걸지도 않으면서 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아무리 성직이라고 불릴지라도 바람의 나는 겨와 같은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하늘이 열리는 것이 보이십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새창조의 능력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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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