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23. 06:59

2012 1 2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14-20; 3:1-5, 10; 고전 7:29-31

제목: 종말론적 신앙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기독교 사상의 핵심을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기독교 용어로 그것을 표현하면, 종말론입니다. 종말론이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종말론적 신앙을 견지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종말론이 기독교에서 말썽꾸러기가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정통 기독교 때문은 아니고, 이단들 때문입니다. 기독교 이단 교파들은 종말론을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종말론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심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에게서 착취합니다. 실례로 1992년에 있었던 다미선교회사건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어느 특정한 시간에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가 있을 거라고 선동해 놓고,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게 만든 다음, 재림이나 휴거와 상관 없이 성도들이 바친 재산을 가지고 도망치는 겁니다. 재림과 휴거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이미 넋이 나가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속은 지도 모르고 다시 정신 차리기도 힘듭니다. 이렇게 자꾸 종말론이 말썽꾸러기 역할을 하니까, 기독교인들이 아예 종말론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겁니다.

 

둘째로, 시대가 종말론을 필요 없게, 그리고 생각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누가 더 많이 가졌느냐를 경쟁하는 시대입니다. 삶의 토대가 철저하게 소유에 있게 하는 시대입니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말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그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파스칼은 인간을 일컬어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옛말이고 철학적인 골동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시대는 이렇게 인간을 정의합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파스칼 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쇼핑하는 갈대입니다. 소유는 철저하게 이 세상을 생각하게 하고, 이 세상에 토대를 두게 합니다. 그러니 종말론을 생각할 겨를 없게 됩니다.

 

셋째로, 종말론이라는 개념 자체의 어려움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머리 아픈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을 만질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더 갖는 법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 개념을 이해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살기도 바쁘고 힘든데, 종말론 같은 것에 신경 쓸 겨를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에서도 종말론 같이 힘든 이야기는 잘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축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맙니다. 그렇게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눈 가리고 아옹하다.” 영어 표현은 “hide one’s head in the sand” 정도가 되겠네요. 이는 현실을 도피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이 종말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격입니다. 삶의 현실을 도피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죠. 종말론을 모른 채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삶의 자세입니다.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을 못 본채 하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만 마음에 그린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고 싶겠지만,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게 현명한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선포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선포한 이 세상의 현실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15). 이것이 이 세상을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절박하고 유일한 메시지였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온통 이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들여다 보는 우리들은 이 메시지를 애써 외면 합니다. 바로 위에서 열거한 이유들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비겁한 사람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비겁함이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생생하게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이곳 저곳을 다니시면서 줄기차게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에 대해서 전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그 메시지에 반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자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에서도 그 상황이 그려집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그리고 가족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러한 의구심은 우리가 그만큼 종말론에 대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깊이 있게 묵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다름이 아닌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보여줍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본문이 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서의 본문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앗수르였습니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주 명확하고 간결하게 선포합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3:4). 굉장한 임박성과 긴박성을 보여줍니다. 심판의 날이 사십일 밖에 안 남았다는 겁니다. 그날 이후에 모든 생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에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신속하게 즉시 그리고 철저하게 반응합니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가축들까지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자들이나 니느웨 사람들처럼 반응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애써 외면합니다. 외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한 자들에 의해서 고난 당하시고 미움 받으셔서 죽으신 겁니다. 비겁한 사람들은 단순히 숨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이렇게 죽여버리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입니다.

 

사실 종말론이 무엇인지를 오늘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평생 연구해도 다 알지 못할 주제입니다. 다만 종말론이 담고 있는 핵심적인 의미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그 핵심적인 의미는 고린도전서의 본문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종말론의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는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영어로는 “The present form of this world is passing away.” 입니다. 이 세상의 현재 모습(형태)은 영원하지 못하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라는 뜻입니다. 잠깐 그 형태를 갖고 있을 뿐 곧 사라지고 말 거라는 것이죠.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토대로 다시 설명하자면, 결혼생활도 영원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내가 언제 결혼생활을 했는가 싶은 정도로 훌쩍 지나가 버린다는 겁니다. 또한 우리가 울고 기뻐하는 것도 잠깐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울고 기뻐하는 일의 근거도 결국 이 세상의 일 때문인데, 우리를 울게 했고 기쁘게 했던 그것들도 결국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매매하는 자들이나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 타고 있는 차, 그리고 내가 아끼는 물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입니까? 모든 것 다 버려두고 산 속에 들어가서 살라는 것입니까?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 허무주의에 빠져 살라는 뜻입니까? 성경에서 전하고 있는 종말론이 이렇게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복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 그리고 사도 바울의 종말에 대한 교훈은 우리의 삶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요즘처럼 소비와 소유에 물들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더욱더 경종을 치는 말씀입니다. 미국과 같은 주류문화 사회는 인생의 기준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둡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명(, 살아 숨쉰다)의 기운이 소유에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 더 큰 집에서 사느냐, 누가 더 좋은 차를 타느냐, 누가 더 친구가 많느냐, 누가 더 예쁘고 잘 생겼느냐, 누가 더 자존심이 세느냐, 누가 더 성공했느냐, 등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생명의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능력은 오직 소비력입니다. 누가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느냐, 누가 더 원하는 물건, 원하는 것을 차지할 수 있느냐를 따집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돈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돈 때문에 미쳐 날 뛰는 것이지요. 그것이 곧 나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생명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일깨워 줍니다. 현대인이 꿈꾸는 생명, 즉 많이 소유하는 것, 소유하기 위해서 소비를 극대화시키는 것, 그래서 우리가 많이 갖게 되는 그것들은 모두 지나갈뿐이라고 말합니다. , 그러한 것들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토대와 근본이 만약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근거해 있다면, 그것만큼 허무하고 헛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착각 속에서 그것들이 우리를 영원하게 만들어주는 양,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양, 우리를 구원해 주는 양,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린 손을 한 번 떼어내 보십시오. 그리고 현실을 똑바로 보십시오.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고 맙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유하기 원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 생명의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사랑했던 사람들이나 물건들이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도 다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자식도 부모보다 먼저 떠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도 다 떠나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죽고 지나가고 없어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매일같이 경험하면서도 왜 그렇게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에 기대어 삶을 꾸려가려는지, 거기에 생명의 토대를 삼아 살아가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말해 줍니다. 기쁜 소식을 줍니다.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 있다고!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생명의 토대를 삼아 살아가라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갈릴리 해변에서 부름 받은 제자들처럼 즉시 그리고 철저하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에 기대어 살아가느라 정신 없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외형은 다 지나갑니다.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온 존재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시니 내가 흔들리지 않으리로다”(시편 62:5-6).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이 신앙 안에서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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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