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15. 06:59

2012 2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왕하 5:1-14, 1:40-45

제목: 예수님의 소외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외에도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이야기가 복음서에 곳곳에 나옵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나병환자는 공동체에서 분리되어서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소외된다는 것은 늘 마음이 아픈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외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열심히 일하는 것도, 열심히 인간관계를 쌓은 것도 모두 소외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노력입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부정의 개념은 일차적으로 의 개념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부정은 제의적인 부정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상태를 부정이라고 표현합니다. 부정한 자는 진영 밖으로 나가서 그 부정한 상태가 온전히 나아질 때까지 거기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을 꺼렸습니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부정한 사람과 접촉을 하면 자신의 몸도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이 제의적인 부정이긴 하지만, 이것이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제사) 드릴 수 없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굉장히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데, 부정한 상태에서는 그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니까 매우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병 낫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우선 나병환자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면 안 됩니다. 이가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면 안 된다는 율법의 규정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부정한나병환자와 접촉을 하면 안 됩니다. 당신도 부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는 그러한 율법의 규정이 허물어지는 사건을 전개합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와 대면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굉장히 획기적인 것입니다. 이 사건 자체를 통해서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율법보다 크신 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달인데,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 자체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만이 깨닫게 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에 분노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들은 율법에 근거해서 분노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도 그 분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일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이 드러나게 행동하지 못하게 되신 것이 그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간절했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이 병에서 나음을 받아 삶을 회복하고 싶었을 겁니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고 파괴하고 있는 이 병을 고치지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 꿇었다는 것은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 겁니다. 이는 위에서 설명 드렸듯이 율법을 깨는 행동이었으니까요. 병이 나아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싶어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총을 담지하고 있는 율법을 깬다는 것은 거의 자포자기 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마음인 것이죠.

 

율법을 깨고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꿇어 엎드려 간구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여기서 원하시면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willing’입니다. 시행하는 자의 마음상태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마음 내키지 않은데 하는 행동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을 표현할 때 ‘willing’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곧 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반응이 나병환자의 간절함과 맞아 떨어집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불쌍히 여겼다는 것 또한 마음 상태를 알려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겉으로만 고쳐주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된 상태이지요.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위에서 설명 드렸듯이, 이 또한 율법을 깨는 행위입니다. 일반인은 절대로 부정한 사람과 접촉을 하면 안 됩니다. 물론 부지불식 간에 그럴 수는 있습니다만, 대놓고 그렇게 접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무시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는 곧 죄로 간주됩니다. 그러니까 나병환자의 행동이 율법을 깨는 행동이었듯이, 예수님의 행동도 율법을 깨는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이는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옥이야 금이야 생각하는 율법보다 크시다는 뜻입니다.

 

나병환자와 예수님의 사이에 오고 간 사랑의 행위는 나병환자의 병을 낫게 합니다. 예수님은 깨끗함을 입은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무질서 하게 율법을 깨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말씀하시듯이,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시지 율법을 허무는 자가 아니십니다.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지, 율법의 온전한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고자 한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가서 그의 병이 나았음을 보이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이렇게 낫게 된 전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나병환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병이 낫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다시 공동체로 들어가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나병환자의 삶과 예수님의 삶이 역전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소외된 삶에서 회복되었는데, 예수님은 이제 나병환자로 인해 소외된 삶을 사시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회복시키신 그 일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소외 당하십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그 일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행하는 일을통해서 자신이 소외 된다고 한다면, 그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 일,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는 일,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소외 당하더라도 당신이 하는 일이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면 서슴지 않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willing) 소외 당하십니다. 그 소외 당하시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잘 나와 있지만, 복음서에서 전하는 결정적인 소외 사건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외침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 받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소외를 통해서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소외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소외는 우리의 소외를 거머쥐신 구원의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4-5).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소외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없는 구석에 가서 슬피 우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병 때문에 고생하는 자, 마음이 아파 고생하는 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허덕이는 자, 죄악에 매여 삶을 허비하는 자가 없기를 바라십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소외의 문제입니다. 이는 모두 우리를 생명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누구도 생명으로부터 소외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소외를 담당하시고, 대신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당신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에게든지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마시고, 망설이지 마시고,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 나아갔던 나병환자처럼 여러분의 삶에 있는 소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그 문제들, 여러분의 삶(생명)을 괴롭히고 있는 그 문제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기꺼이(willing)’ 짊어지십니다.

 

이방인이었던, 아니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도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삶을 괴롭혔던, 자신을 생명으로부터 소외시켰던 나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이방인도, 적국의 장수도 고쳐주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께 나아갔던 나병환자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의 생명을 헤치는 그것들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에게는 생명’, 즉 사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날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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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