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23. 09:21

2012 2 22일 참회의 수요일 예배 설교

본문: 요엘 2:1-2, 12-17

제목: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독교의 신앙이나 예식, 그리고 절기는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있은 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두고 묵상하는 가운데, 긴 시간에 걸쳐 기독교라고 하는 신앙형태가 형성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진행형 동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기독교는 끊임없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재의 수요일(참회의 수요일, Ash Wednesday)은 주후 6세기 정도에 생긴 기독교 전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우리의 삶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만들어진 전통입니다. 이제 이 전통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지키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을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진지하게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는 어떠한 연유에서 이 자리에 나오셨던지 간에 기독교 영성의 중심에 들어오시게 된 겁니다.

 

사순절기는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즉흥적으로, 임기응변 식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닥트릴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은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어떤 일보다 놀라운 일이요, 이 세상의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기에 들어서는 오늘, 신앙의 선조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신앙의 선조들은 회개를 상징하는 베옷을 입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전년도 종려주일에 흔들었던 종려나무를 잘 보관해 두었다가 이날 꺼내서 그 나뭇잎을 태워 나온 를 이마에 바르며 참된 회개를 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물론 구약 성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꿇어 앉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면서 예배 드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만, 오늘 말씀이 전해 주고 있듯이, “마음을 찢고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 드릴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는 왜 마음을 찢어야 할까요? 그리고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요엘서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이 세상에 일어났던 그 어떤 재앙의 날보다 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함이란 어떠한 잔인함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위협하는 두 가지 는 전쟁과 기근입니다. 모두 인간의 생명과 관련이 있는 문제입니다. 적어도 제 1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요즘 전쟁과 기근의 공포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로 국지적 전쟁은 끊이질 않고 있으나, 적어도 제 1세계의 나라에서는 전쟁이 억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옛날처럼 기근이 와서 굶주리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엘서에서는 전쟁과 기근을 메뚜기 떼가 공격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1 4절에 보면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메뚜기 떼가 공격하면 농산물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메뚜기 떼는 공격해 들어오는 적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합니다. 적군이 밀려 들어오면 도시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됩니다. 둘 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때 인간은 극도의 공포심을 느낍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은 이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을 압도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을 압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기근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신 존재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 하라”( 12:4-5).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음모에 의해서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레위기서 24장에 보면,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을 죽일 요량으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씌워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죽기까지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본인이 말씀하신 대로,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시지 않고,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끝까지 운명을 맡겼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시키셨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이상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사순절기 동안에 부활을 온전히 준비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였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일컬어 부활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살아났지만 나중에 다시 죽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행위에 우리의 온 존재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는, 어떠한 완전히 다른 현실이 우리에게 오고 있는데,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부활의 현실을 먼저 맛보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부활의 첫 열매라고 증거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어떠한 잘못을 하고서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전혀 다른 현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행위에 우리의 온 존재를 맡기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참여하기 위해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외적인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이 지금 내적으로 회개하고 있다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금식하는 것도 우리 마음의 표현일 수 있으나,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행위에로 이끌어 준다고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확실한 길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온 세상에 드러난 길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감추어져 있는 길입니다. 믿을 때만 보이는 신비로운 길입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기를 시작하면서 이 진리와 맞닥트리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의 현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세상은 구원의 현실을 소유와 소비, 그리고 자기확대에서 찾으라고 합니다. 많이 소유하는 것, 마음대로 욕심나는 대로 갖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는 소비력, 그리고 남보다 더 돋보이는 삶의 조건들이 곧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는 것처럼 살게 하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가져다 준다고 허위광고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현실이라고 증거합니다. 오늘날,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 시대가 추구하고 있는 풍요로운 삶과는 정반대인 십자가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꿩도 먹고 싶어하고, 알도 먹고 싶어합니다. 예수도 믿으면서 소유와 소비, 그리고 자기확대도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맘몬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기는 그 어느 때보다 도전이 되는 그리스도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구원의 현실을 찾고 있습니까? 무엇이 나에게 실질적으로 생명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습니까? 이는 쉽게 결론 낼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현실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기는 바로 성경에서 부활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구원의 현실을 우리의 온 존재를 다하여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구원의 현실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옵니다. 그러니 사순절기 동안 어떠한 경건행위를 하던, 그 경건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그 경건행위를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그리고 높이 부르십시오. 오늘 요엘서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기도하면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한 것처럼, 사순절기 동안 기도하시면서 여러 가지 말보다는 이 말 한마디에 집중해 보십시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활이라고 하는 구원의 현실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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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