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2. 2. 8. 00:59

아내는 성자다

아내는 하루하루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밥짓기

설거지

빨래

방청소

현대인들이 시간낭비라며

끔찍이도 싫어해서

감정이 없는 기계들에게 맡겨버리는 그 일들을

아내는 몸소 감당하느라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지 못해 바보가 되어 가고

예배를 드리지 못해 영성이 바닥나고 있다고

때로는 투덜거리지만

아내는 여전히 집안 일 하느라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누가 인생을 보람차게 사는 사람일까

누가 영적인 삶을 풍성히 누리는 사람일까

 

사람들은 인생을 보람차게 살기 위해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다가

실증 나면 금새 집어치우고 만다

사람들은 밀려오는 인생의 허무함을 달래보려

영적인 삶을 추구해 보지만

인내를 가지고 진짜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어찌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한다고

보람찬 인생이 될 수 있으랴

인생의 허무함이 어찌 한 두 번의 영성 수련으로

극복되고 가려질 수 있으랴

 

인생은 어차피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 아니던가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그것과 공명을 이루어내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나는

밥짓기

설거지

빨래 방청소

처럼

소소해 보이는 일들을 위해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성실히 감당하는 아내를 보며

인생의 참된 보람이 무엇인지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성실히 살아내는

아내야 말로 다름아닌 성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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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