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2. 1. 5. 02:38

민주주의자 김근태

 

주님,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당신 곁으로 불러 가셨더군요.

그보다 더 유명한(?) 인물인 김정일이 죽었을 때는

그냥 조금 놀라기만 했는데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죽음 앞에서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 앞에 붙은 민주주의자라는 수식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두웠던 시절,

희망의 빛을 비추기 위해 어둠과 싸웠던 이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늘 그렇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두웠던 지하실로 끌려가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살을 찢어놓고 피를 거꾸로 돌게 하는 고문을 당하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이 어눌해져서

평생을 아픔 가운데 살아야만 했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치과에서 치아 치료를 위해 밝히는 등불조차

고문대를 생각나게 했답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너무 일찍 당신 곁으로 갔습니다.

이제 64세인데, 요즘처럼 살기 좋은 시대에는 한창 때 아닙니까?

너무 일찍 희망의 빛이 꺼진 것이 아닙니까?

어둠이 가한 공격 때문에 이렇게 빛이 사그라든 것 아닙니까?

그에 반해 어둠의 하수인이었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이 좋은 시대를 너무 만끽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더 당황스러운 것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현재 목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어찌된 노릇입니까?

 

우리는 당신의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빛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어둠은 빛 가운데로 나온 것 같은 이 형국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 사태를 보고 당신의 정의(Justice)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합니까?

 

우리는 당신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도 어립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당신의 정의를 통해서

당신이 하시는 일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러나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한 어둠.

그도 결국 어둠에 무참히 짓밟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오늘의 이 사태는 정의가 아니라 절망으로밖에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어둠에 무참히 짓밟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빛으로 오신 예수, 당신의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정의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 배웁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은 늘 우리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습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이렇게 당신 곁으로 갔지만

그가 뿌린 민주주의 씨앗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대한민국, 아니 온 우주만물에 부활의 꽃처럼 피어나게 될 것을.

그리고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역사적으로 용서한 이근안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 심판 받게 될 거라는 것을.

 

민주주의자 김근태여!

편히 잠드소서.

이 세상에서 빛은 어둠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언젠가는

빛은 어둠을 능히 이긴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거기 그렇게 누워 있는 당신이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우리나

언젠가는

그 진리를 꼭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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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