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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3. 04:05

우리 인생의 부림절

(에스더 7:1-10)

 

에스더 이야기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갈린다. 사건을 대처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지혜와 신앙을 알 수 있다.

 

아하수에로 왕은 페르시아(바사)의 크세르크세스 1세를 히브리어 일컫는 것이다. 다리오 왕의 아들로서 자신감 없고, 충동적이며, 벌컥 화를 내는 성격을 지닌 자였다.

와스디 왕후 폐위 사건을 보면 왕과 신하들의 얼마나 비열하고 우둔한지 알 수 있다. 아하수에로 왕은 술 취한 뒤, 자기의 소유물처럼 왕후 와스디를 사람들 앞에 보이려 했고, 왕후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어쭙잖게 남성의 권위를 지키려는 신하들의 간사한 조언에 넘어가 와스디 왕후를 폐위시킨다.

 

와스디 왕후 폐위 사건 때문에 에스더 (하닷사)가 역사에 등장한다. 에스더의 히브리 이름은 핫사다인데, ‘도금양(Myrtel, 꽃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고, 에스더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에스더는 와스디 왕후를 대신하여 왕후가 되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사촌지간이다(삼촌의 딸). “부모가 없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2:7). 그러나, 둘 사이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대개 모르드개를 에스더의 삼촌으로 부르기도 한다. (둘 사이의 촌 수 관계는 그렇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목숨을 구한다. 왕궁 문지기였던 모르드개는 어느날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우연히 알게 되는데, 그 일을 왕에게 알려 왕이 죽음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일이, 궁중 일기에 기록되고, 그 기록은 나중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르드개와 유다인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

 

하만과 모르드개의 악연은 하만의 교만과 모르드개의 신앙의 기개 사이의 충돌 때문에 시작된다. 하만은 왕 다음의 권력자였고, 모든 이들은 그가 지나갈 때 꿇어 엎드려 절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하만 앞에서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다인인 것을 대외적으로 밝혔다. 그가 자시 자신의 민족을 알린 것은 자신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신앙의 절개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절개가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 얼마나 많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가. 특별히 우리는 맘몬 신에 무릎 꿇고 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만은 자신에게 절하지 아니하는 모르드개에게 적의를 품고 그와 그의 동족 유다인들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살해 위협을 많이 당했고, 실제로 대량 학살이 일어난 적도 있다.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의 유다인 말살 계획이 실제로 옮겨진 사건은 20세기 2차대전 중에 일어났던 홀로코스트 사건이다. 홀로코스트 학살 생존자인 엘리 위젤(Eli Wiesel)이 만든 연극 <하나님의 시험>에서 에스더서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부림절 전날 밤, 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그 연극 속에서, 부림절 전날밤, 그 마음의 모든 유다인들은 학살을 당한다. 연극에서 시인 아브레멜은 이렇게 말한다. “부림절의 기적 없는 부림절을 나는 상상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에스더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런데, 홀로코스트에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들은 부림절을 지키며, 에스더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에스더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여전히 희망일까, 아니면, 허튼소리일까. 홀로코스트는 하나님의 부재를 나타낸다. 우리도, 인생의 한 가운데서 때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는가?

 

모르드개는 왕후가 된 에스더와 생명을 살릴 지혜를 강구한다. 이것은 계속해서 등장하는 아하스에로 왕과 그의 신하들이 보이는 비열함과 우둔함에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 쪽은 생명을 죽이려 하고, 한 쪽은 생명을 살리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누구 편일까? 우리는 쉽게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는 편일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낙심을 경험한다.

 

모르드개가 고난을 당한 이유는 그가 공개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기의 신앙을 지켰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무릎꿇고 절하지 아니한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진 이유도 비슷하다.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을 것이다는 왕의 조서를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부당한 일로 폐위된 와스디 왕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에스더의 왕후 즉위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로 묘사된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는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4:14).

 

그들이 생명을 보전한 것은 믿음과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때문이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왕 앞에 나아가서 왕을 잔치에 초청하여,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는 과정에서도, 에스더는 믿음과 지혜와 은혜 안에서 그 일을 진행한다. 그리고,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집 앞에 세워놓았던 나무에 자기 자신이 매달려 죽는다.

 

이 보다 더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을까.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보면, 하만이 살던 궁궐 같은 집은 에스더에게 주어지고, 모르드개는 하만이 차지하던 지위를 갖게 된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핍박하던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고, 자신들의 원수들을 물리친다.

 

이 사건이 유다인들에게는 명절이 된다. 죽임 당하는 날이 명절로 바뀐,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아달월(지금의 2-3) 십사일, 유다인들은 그날을 부림(Purim)절이라고 부른다. ‘부르는 제비를 뽑아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기 좋은 날 택한 것을 말한다.

 

에스더 이야기에서 일어난 반전보다 더 큰 반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래서 궁극적 반전이라 부를 수 있다. 에스더 이야기는 죽음을 모면하는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이야기이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여전히 에스더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이야기 삼는 이유는 그들이 비록 홀로코스트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더 더 확실한 믿음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부림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믿음과 지혜와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놓여 있는 어려움들을 이겨 나갈 수 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에스더의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다. 최후 승리를 믿는가? 그렇다면, 내 삶에 있는 부림절, ‘믿음과 지혜와 은혜를 통해 누리게 되는 승리의 순간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더욱더 신앙안에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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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