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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30 새언약: 에클레센과 엑케오
  2. 2018.03.30 죽음은 생명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30. 12:37

새언약: 에클라센과 엑케오

(마가복음 14:22-25)

 

우리는 종종 농담으로 이런 질문을 주고 받는다. “만약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된다면 무엇을 먹고 싶은가?” 참으로 낭만적인 대화다. 실제로는 우리가 언제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될지도 모를 뿐더러, 마지막 식사는 우리의 바람처럼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먹게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먹고 싶은 것 많이 먹으면서 사는 게 좋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라기보다는 신학적 만찬이라고 해야 옳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율법을 토대로 한 언약을 체결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셨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명절인데, 유대인들은 그날 온 가족이 모여 유월절 만찬을 먹으면서 그날 어떻게 하나님의 그들을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월절 만찬과 출애굽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였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특수한 역사의식을 가졌다.

 

유월절 만찬에서 유대인들은 세 가지의 음식을 먹었다. 누룩 없는 빵, 양고기, 그리고 쓴 나물이 그것이다. 유월절 만찬에서 가장은 포도주 잔을 들고 4번에 걸쳐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들이 출애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교를 한다. 그렇게 그들의 신앙은 세대와 세대에 걸쳐 전수되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날,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요즘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유산을 많이 잃어버렸다. 유대교 회당에는 친교실이 없다고 한다. 밥은 집에 가서 가족들과 먹으며, 가정에서부터 신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는 특수한 상황이 있어 교회에서 함께 식사하며 친교를 나누지만, 가정에서 식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실행하는 신앙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만찬은 새언약을 제정한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세워질 새로운 언약에 대하여 유월절 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설명하신다.

 

우선, 22절의 말씀 중,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에서 떼어라는 말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떼어는 헬라어 에클라센을 번역한 것이다. ‘에클라센깨다, 부수다, 조각으로 부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채찍질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창에 찔리시는 몸을 가리킨다. 이 고난은 언약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24절의 이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흘리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엑케오의 원뜻은 쏟아내다, 부어주다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로 번역된 휘페르 폴론많은 사람 위에로 번역 가능하다. 이 원뜻을 살려 위의 말씀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이것은 많은 사람 위에 쏟아 부어 주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구약에서 말하는 구원은 법()적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 백성이 된 것은 언약(covenant)’ 때문이다.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법이다. 그 법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되어, 구원 받게 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미국에서 불법체류자들이 고통 받는 이유는 그들이 미국의 법 테두리 안에 들어오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불법체류자들을 영어로 ‘undocumented immigrants (서류가 미비된 이민자)’라고 한다. 여기서 서류는 법적인 서류를 말한다. 구원은 매우 법적인 용어이다.

 

신약의 대표적인 복음인 사도 바울의 로마서 또한 법적인 용어를 이용하여 구원을 설명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가장 중요한 용어는 칭의(Justification)’이다. 이것은 법적인 용어이다. ‘칭의란 의롭지 못한데, 의롭다고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한다. 불법체류자로 예를 들면, 그들이 서류를 제대로 구비하지 못했는데, 구비가 됐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면서, 새언약을 체결하신다. 그의 살과 그의 피가 새언약의 법전이다. ‘새언약즉 예수 그리스도의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옛언약인 율법과 새언약인 그리스도의 법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증한다. 바울의 요점은 이것이다. 율법은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낸다. 그래서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만든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법은 사람을 죄인 만들지 않고, 의인을 만든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칭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8:1-4).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칭의로 구원 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2:8)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살과 피로 맺은 새언약은 옛언약과 비교해 하나님의 급진적인 은혜와 긍휼(자비, 사랑)(Radical Grace and Mercy(Love))을 보여준다. ‘은혜는 햇볕과 같은 것이다. 죄인이나 의인이나 동시에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공공재를 말한다. 은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때로는 의인처럼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없는 죄인의 자리에 설 때가 많다. 만약, 우리가 의인이었을 때 누리던 하나님의 돌보심을 죄인이 되었을 때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은혜는 그런 것이다.

 

긍휼(자비,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을 말한다. 일반적인 관심이 친절함과 애정은 다르다. 우리는 살면서 애정을 갖게 되는 상대를 만나기 쉽지 않다. 우리가 결혼하게 되는 이유는 애정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애정을 갖게 되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일들을 하게 된다. 거의 100세를 사신 김형석 교수가 어느 방송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람이 평생 젊을 때 서로에게 갖던 애정을 가지고 살지 못한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배우자에게 애정은 사라지고 인간으로서 동포애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우리를 영원히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긍휼(Mercy)라고 한다. 처음에 애정을 가질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거나,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애정이 사라진다. 흔히 우리는 그것을 정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정 떨어진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끝까지 책임지신다. 이것을 사도 바울의 법적인 용어로 옮기면, ‘칭의라고 하는 것이다. ‘의인이 아니지만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 이것이 애정이다. (내 자식이 죄를 지었는데, 남들은 다 손가락질해도, 부모는 내 자식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새언약을 제정하시고, 그 새언약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살과 피로 이루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살이 찢겼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쏟아 부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새로운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그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구원 받았다라고 하는 것이고, 그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에게 효력이 발생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공동체로서 나누는 성만찬은 새언약의 갱신이다. 우리는 성만찬을 나누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새롭게 세우신 새언약을 생각한다. 그 언약은 에클라센(살이 찢기고)과 엑케오(피를 쏟아 부으신)’의 행위를 통해서 세워진 값비싼 것이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유월절 식사를 하며, 출애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목요일(유월절 만찬 나누던 때)에 성목요일 만찬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위에서 찢기신 살과 쏟으신 피의 의미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리를 가지면 좋겠다. 더 나아가, 매 식사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언약을 세우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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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30. 05:25

죽음은 생명이다

(마가복음 14:1-11)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죽음은 인류 최후의 원수이다. 인류는 죽음이라는 실존과 함께 살아 왔고, 살아가야 한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죽음에 대한 대항 또는 저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나,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르는 것이 죽음이다.

 

종교는 죽음에 질문을 통해서 탄생했다. 그러므로, 어느 고등 종교이든지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답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그리고, 신은 죽음을 경험하는 인간과는 달리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의 신 이해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우리가 증거하다시피,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서 발생한 종파도 있다. 대표적인 종파가 영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더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그러한 도전과 난점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발전된 교리가 삼위일체교리이다. 삼위일체교리는 신의 죽음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다. 삼위일체교리로 인해, 기독교는 신이 죽었다는 것신이 살아 있다는 두 가지의 주장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는 온통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예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까 음모를 꾸몄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이름 모를 여인의 행동에도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것이었고,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가룟 유다도 죽음의 음모에 동참하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모두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다. 이 말에 빗대서 죽음을 설명해 본다면, ‘죽는다는 본질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이해는 저 마다 다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는 크게 네 사람이 등장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향유를 부은 여인, 가룟 유다, 그리고 예수님이다. 우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죽음은 어떠한 의미일까?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이 그러한 음모를 꾸민 이유는 예수가 자신들의 삶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자기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냥 도구일 뿐이다. 이런 자들에게 죽음은 폭력의 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들에 의하면, 죽음은 폭력에 불과하다. 죽음에 대한 최고의 저급한 이해이다.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여인은 값비싼 나드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다. ‘나드는 인도산 최상품 발향성 기름이다. 매우 값비싼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머리에 나드를 부은 이유는 예수님의 설명대로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이다. 그녀에게 죽음은 매우 신성한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신성한 것이다.

 

이것은 보통 인간들이 죽음에 대하여 갖는 마음이다. 죽음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성함이 들어 있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에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22권에 보면,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 나온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의 시체를 내어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은 장례를 지내는 동안 전쟁을 멈추기로 협의한다. 그들이 전쟁을 멈춘 이유는 그것이 죽음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을 숙연하게 한다. 넘어설 수 없는 신성함이 죽음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에게 죽음은 다른 의미를 지녔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의 음모에 가담하여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 한다. 가룟 유다가 음모에 가담한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같아서가 아니다. 가룟 유다는 젤롯당원이었다. 젤롯당은 무력을 통해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민족을 구원하길 바랐다. 가룟 유다가 희망한 메시아 상은 예수가 스스로 드러낸 메시아 상과 달랐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죽음에 몰아 넣음으로 예수가 자신들의 원하는 메시아 상의 모습을 보이기 바랐다. , 가룟 유다에게 죽음은 어떠한 일을 추진하기 위한 동기(Motive)로 작용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도 사람들이 보통 갖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무슨 일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또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큰 동기를 불어 넣어 준다. 대개 인류 역사에서 큰 업적을 이루어 낸 위인들은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넘어섰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그 죽음과 같은 열악한 신체 조건을 넘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곡들을 작곡했고, 모차르트는 생활고에 시달려 굶어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악보를 썼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음악을 낭만적으로 듣고 있지만, 그들이 지어낸 음악은 낭만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죽음은 어떠한 의미였을까?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왜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고,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그게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불가사의 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이 삶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이해를 가지고 살아간 것을 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고난과 죽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우리에게 건네 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아니 그야말로 새창조의 사역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기 전까지, 제자들이 죽음에 대하여 보인 반응은 일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죽음을 무서워했고, 그들은 죽음을 이용했고, 그들은 죽음을 신성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도망쳤고, 그들은 배반했고, 그들은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을 때, 그들은 죽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죽음은 단순히 인간의 삶과 분리된 부정의 영역, 즉 하나님의 통치 바깥에 있는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영역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위에서 말했듯이,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과 죽음은 상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자리를 피해서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의 한 가운데서 그 죽음을 당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말은 죽음 또한 하나님에게 속한 생명의 활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은 여느 사람이 비방하듯 자살행위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가장 부정적인 것(죽음)을 가장 긍정적인 것(생명)으로 새롭게 창조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 이후,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죽기 때문에 부정으로 떨어지지 않고 긍정으로 승화되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지 않았다. 죽음을 불의하게 이용하지도 않았고, 죽음 때문에 배반하지도 않았으며, 죽음을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여 멀리서 바라보지도 않았다. 사도행전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어떻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꼭꼭 숨어 있던 제자들은 광장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2:14). 제 삼시는 오전 9시다. 이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생계를 위하여 부지런히 움직일 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에게는 죽음도 생명이다.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을 더럽게 이용하지도 않을 뿐더러, 죽음을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새창조에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죽음으로 불리지 않고 생명으로 불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참 자유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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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