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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8. 13:28

거절당한 메시아

(마가복음 12:1-12)

 

우리는 살면서 거절을 하거나, 거절을 당한 경험을 가지고 산다. 거절할 때도, 거절당할 때도 이유가 있다. 그리고,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하다. 그러나, 거절하거나 거절 당한 것 때문에 삶이 평안하기도 하고,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거절은 긍정적인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두번째 날은 온통 거절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은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 이후 성전관리자들(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거절한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 그들은 권위 문제를 들고 와서 예수님을 거절한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러한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간단한 질문 같지만, 권위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이것은 정치학에서도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서구 역사에서 권위 문제를 일으킨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이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 레타 세 모아)’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그러한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왕권신수설때문이다. 왕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은 마땅히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이 14세는 5살 때 왕이 되어, 72년간 프랑스를 다스리다, 7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을 때 아들 루이 15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 루이 14세가 죽자, 국민들 중에 슬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국민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권위는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권위를 가진 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통치를 받는 백성의 삶이 달라진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권위 문제를 들고 나온 이유는 성전에 대한 권위는 자신들의 것이며, 예수에게는 성전에 대한 권위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성전 정화 사건을 벌인 이유는 그들이 가진 권위 대한 부정이요, 권위를 그들이 얼마나 부정하게 썼는지에 대한 고발이었다.

 

권위의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거절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다음으로 세금의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거절한 그룹이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이다. 그들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옳은 것이니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이 질문은 단순히 세금의 문제가 아니다. 매우 정치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햐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중차대한 질문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라라고 대답하면 유대인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라고 대답하면 로마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답하나 저렇게 대답하나 예수님은 누군가에 의해서 반역자로 몰려 죽게 될 형편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12:17). 이 문제는 지금도 핫이슈이다. 특별히 종교인 과세를 시행한 대한민국에서는 세금 문제로 인해 교계에 한바탕 논란이 불었다. 복지국가/선진국일수록 세금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복지국가/선진국일수록 국가에서 국민복지의 문제를 대부분 해결하기 때문에 종교인이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방법으로 세금을 잘 내는 것은 오히려 종교계가 나서서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세 번째로 예수님을 거절한 부류가 등장하는데, 사두개인들로 그들은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과 대결한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두개인들은 다른 정치권력 세력들보다도 훨씬 부유층으로서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대개 이 땅에서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땅에서 특별한 고통이 없으니, 굳이 사후의 평안을 바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질문은 자신들이 믿는 바, 부활의 세계는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계대결혼(고엘법)은 일종의 사회복지법이다. 남편(가족)의 도움 없이 생계를 꾸려갈 수 없었던 고대 여인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그래서 율법에는 자식 없이 남편을 떠나 보낸 여인은 그 남편의 동생(친족)이 거두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그러한 고엘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려 한 것이다. 한 집 안의 남자 일곱이 모두 한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모두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나중에 부활하여서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바래새인과 헤롯당,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질문들이 가진 의미를 아는 것이 먼저다. 그들이 예수님께 그러한 질문을 던진 이유는 그 문제 대한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그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다.

 

그들의 거절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보여 주신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대신 농사짓게 하고 타국에 가 있는 중이다. 때가 이르러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소출을 얻으려고 종을 보낸다. 그런데, 그들은 소출을 내어놓기는 커녕 종을 잡아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한다.

 

이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그리고 주인은 그들이 적어도 아들은 존대하리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농부들은 엉뚱한 생각을 한다. 만약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농부들 자신이 그 포도원을 차지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들을 잡아 죽인 후 포도원 밖에 내던진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농부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축소판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말씀을 전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열매를 맺기 원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성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 이사야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5:1-2)

 

이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의 관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한 이야기로 읽어야 이해가 더 확실해 진다.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마친 후, 예수님은 느닷없이 '머릿돌' 이야기를 하신다. 머릿돌 이야기는 시편 118편의 말씀이 근거이다. 그 말씀을 보면 이렇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118:22-23)

 

버림 받은, 거절 당한 포도원 농부의 아들로부터 건축자의 버린 돌 이야기로 초점을 옮긴 이유는 문학적 비유이다. 히브리어로 아들은 이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돌은 에벤이다. ‘에벤사이에 있는 언어적 유사점을 이용하여, 거절당한 아들이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고,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처럼, 거절당한 아들이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증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편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생각, 기대)를 완전히 뒤엎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에는 말세에 메시아가 와서 악을 심판하고 의인을 신원해야 하는데, 그러한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발생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버리고 죽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온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로 인정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들이 거절하여, 버림받고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시편의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요, 그들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자들은 '거절당한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믿지 못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며, 메시아를 거절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쯧쯧 혀를 차며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시 최고의 권력층이었고 지식층이었다. 그러한 자들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했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낫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메시아의 거절 이야기는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이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구분한 뒤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양 같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4-37).

 

예수님께 이 말씀을 들은 오른편의 의인들은 의아해 하며 예수님께 이렇게 여쭙는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대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25:37-39).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우리가 주리고 목마른 자들, 헐벗고 병든 자들, 옥에 갇힌 자들, 또는 그 외에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섬기는 이유는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메시아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거절당한 메시아를 통해서이지, 환영 받은 개선장군을 통해서가 아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곧 메시아는 아니다. 하지만, 거절당한 메시아를 통해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에서 거절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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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