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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7. 16:40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마가복음 11:12-19)


며칠 전 토이즈러스의 설립자 찰스 라자러스가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8, 25세의 나이로 전후 세대의 장난감 수요를 예측하고 세운 토이즈러스는 그가 떠나기 일주일 전 경영 악화에 따른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영원히 문을 닫게 되었다.

 

참 마음 아픈 소식이다. 자식 같은 사업채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난 것 같아, 그의 부고 기사를 읽고 마음이 짠했다. 토이즈러스(Toysrus)라는 이름은 Toys(장난감)과 그의 성(Last name)인 라자러스에서 ‘rus’을 합해서 만든 것이다. 거기에 R자가 거꾸로 표기한 이유는 아이들이 알파벳을 배우면서 흔히 하는 실수인 ‘R’을 거꾸로 쓰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토이즈러스는 동심을 반영한 사업인 것이다.

 

토이즈러스가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월마트와 아마존의 등장을 꼽는다. 월마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토이즈러스는 장난감을 가장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월마트가 등장하면서 그 명성이 무너졌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 영입된 토이즈러스의 CEO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토이즈러스 매장을 장난감 체험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것을 통해서 토이즈러스는 아이들을 매장으로 끌어모을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토이즈러스 가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갑을 여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였다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들에 비해서 합리적인 소비를 원한다. 물론 아이들이 토이즈러스에서 본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지만, 아이들의 조름에 넘어가는 부모는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 결국, 부모들은 장난감 구입을 토이즈러스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물품을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월마트나 아마존에서 구입한다. 장난감 체험이 구매로 이어지지 않자, 결국 토이즈러스는 적자를 못 이기고 영영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이들에게는 토이즈러스 매장이 문을 닫는다는 것, 그곳에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 장난감 체험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 온다. 일례로, 우리 아이들에게 토이즈러스 파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큰 아이는 그것이 아마존 때문이냐고 반문했고, 그러면서 왜 정부(government)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 치고 꽤 똑똑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큰 아이에게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해주고, 네가 그 해결 방안을 스스로 생각해 보라고 숙제를 던져주었다.) 작은 아이는 내 핸드폰을 잠시 달라고 하더니, 갑자기 아마존 앱을 지워버렸다. 동심에서 우러난 진지한 행동이었다. 아마존 때문에 토이즈러스가 망했으니, 아마존 앱을 지워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안 것이다. 이처럼, 토이즈러스가 망한 사건은 아이들에게 여러모로 매우 심란한 사건이다.

 

본문에 등장한 사건도 매우 심란한 사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사건을 그렇게 심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간극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유대인도 아니고, 그 당시 성전시스템에 혜택을 보던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일단 날이 저물자, 예루살렘 근처 도시인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즉 고난주간 첫째날인 월요일에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못하셨는지, 예수님을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 배가 고프셨다. 그래서 무화과 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따서 먹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에 가까이 가서 열매가 없나 살폈지만 나뭇잎만 무성한 것을 발견하신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신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4).

 

이 이야기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그렇게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 필요 없다. 무화과 나무 이야기와 더불어 등장하는 이야기는 소위 성전 정화 사건 이야기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신다. 그리고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7).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 사건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계시(revelation)이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드러내신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었던 것이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5:4).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어떠한 열매를 맺을 것인지, 기대하시는 분이다. 다른 말로 해서, 주님은 심판자이시다.

 

그리고,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상업적인 행위를 허락한 성전권력자들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현존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 권력자들 위에 세우셨으며, 희생 제사 시스템이 더 이상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선포하신다”(생명의 삶 플러스, 마가복음). 구원을 주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지 종교 권력자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과거나 현재에 머물러 산다. 과거에 매여 있거나, 현재에 파묻혀 산다. 그렇다 보니,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깊은 사유를 하지 못하고 산다. 사실, 그게 인간이 가진 한계이자 연약함이기 때문에 그것을 뭐라고 나무라기 쉽지 않다. 그리스도인을 빛과 소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할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서 철저하게 자각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이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무화과 나무가 저주 받은 것이 열매가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며 열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전이 타락한 것을 개혁해야 한다며 제도 개혁이나 도덕의 함양 같은 것을 강조하게 된다.


열매나 도덕은 매우 외적인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측면을 강조할 때 쓰이는 단어들이다. 물론, 열매나 도덕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인이 다른 이들보다 열매가 풍성하지 않거나 도덕적이지 않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설득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요즘엔 기독교의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전도를 해도 잘 먹히지 않는다. 교회의 안티세력들이 교회를 비난하는 외적인 이유는 교회의 도덕적 타락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대충은 다 안다. 그러면,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으로 기독교의 명성이 회복되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까?

 

열매를 맺지 못하고, 도덕이 타락하는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자각하지 못해서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생득적으로 생명체는 자기 생명의 구원을 갈망한다. 그래서 생명을 지닌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만 정신을 쏟게 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반 사람들과 성전 관리들이 하나가 되어 희생 제사 시스템을 편리하게 구축하여 성전 제사를 활성화 한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을 보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사업이 자신들의 생명을 번성해줄 것이라고 판단하면 그곳에 투자자가 몰리게 되어 있다. 기독교에 관심이 덜 해진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가 그들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하여 더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붙들고 있는가?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새것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새것은 좋은 것이고 헌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아이폰이 나오면 그거 사느라 애플 스토어 앞에 밤새 줄을 선다. 새로운 차, 새로운 집,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먼저 구입하여 그것을 누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회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처럼, 그래서 멀리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이전 기술은 폐기되고, 새로운 것이 발견되면, 이것은 버림을 받게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을 안고 살고,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발명하느라 피곤해졌다. 요즘 기업들의 성공은 누가 먼저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발견했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그래서 기업들은 사람들을 닦달하고, 사람들은 기업의 등쌀에 못살겠다며 힘들어 한다. 기업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면서 그들에게서 노동력을 뽑아 낼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여념이 없다. 경영학과 심리학은 그러한 기업의 프로젝트에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요즘에는 종교도 그러한 프로젝트에 봉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이나 요가).

 

사람들은 그렇게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그 새로움의 종착역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갖는 의미의 궁극성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창조의 시작이며 완성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보다 더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옛 유물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줄기차게 나누는 교회를 구 시대의 유물인 것처럼 오해한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교회의 잘못이 크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새로움의 궁극적 완성이라는 것을 세상에 제대로 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전의 희생 제사를 부정하는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을 종결하신다. 단순한 정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구원에 이르는 데 아무것도 필요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 필요할 뿐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의 삶의 질은 그리스도의 의미를 얼마나 깊이 깨닫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리스도가 궁극적 구원이시고 궁극적 새로움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닫는다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미덕인 현대인들이 무엇을 갈망해야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신상품이나 신기술만을 갈망한다면, 그것 때문에 인생이 피곤하다면,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궁극적 구원이시고, 궁극적 새로움인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직 쓸 만하지만 새로운 무엇인가를 사기 위해 헌 것을 버리고 새것을 살 돈을 더 의미 있는 일에 쓸 것이다. 그렇게 의미 있는 일에 물질과 시간을 투자할 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이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 외에 더 이상의 새로움은 없다. 더 이상의 구원은 없다. 최고와 최선의 새로움을 간직한 그리스도 공동체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최고와 최선의 새로움을 전달하는 새시대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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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