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4'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12.14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
  2. 2019.12.14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다른 질문을 먼저 던져보자. "우리는 왜 영어 공부를 하는가?"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 공부하는 이유를 물으면, '입시 시험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일차적으로 '소통'을 위한 것이지 '시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배울 때, '소통'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시험'을 위해서 배운다.

 

이제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를 물어보자.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대부분, '구원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위에서 언어의 존재 이유를 '시험'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존재 이유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소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소통'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을 간과하면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시험'으로 오해되고 만다.

 

한국에서 영어가 '시험'을 위한 도구로 쓰이니, 한국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지 영어로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어는 시험이기 때문에, 소통 위주의 영어가 아닌 '시험' 위주의 영어를 배우다 보니, 영어가 어렵게 느껴진다. 실제로, 시험에서 다른 이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일단 시험 문제가 어렵게 출제되어야 하고, 그 어려운 문제를 맞혀야 한다.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읽으면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성경의 언어를 배워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는 일은 중요하지 않고, 성경의 지식을 통해서 구원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과제만 안을 뿐이다.

 

그렇다보니, 성경은 온통 현실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 현실을 보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면서 천국을 보려 한다. 구원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자꾸 죽음 후에 있는 것으로 현실에서 밀려나기만 한다. 성경읽기가 구원에 대한 '시험'으로 전락할 때 발생하는 일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언어'. 그리스도인은 언어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한다. 사실, 소통하는 것 그 자체가 구원이다. 내 삶의 현실에서 성경의 언어, 언어 그 자체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면, 우리의 현실은 이미 구원에 이른 것이다.

 

성경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우리가 일반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옹알이에서 시작해, 어려운 것을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성경 언어도 그렇게 배운다. 물론 옹알이만으로도 부모와 아이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부모는 아이가 '생명'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이처럼 성경 언어의 옹알이 만으로도 하나님과의 소통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장성하며 옹알이 수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인은 장성하며 옹알이 수준에만 머물 수 없다. 성경 언어 능력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소통이 깊어지면,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은 가히 폭발적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이 그 '소통'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구원'이라는 '시험'의 관점에서 성경 읽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소통'의 관점에서 읽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성경 언어의 능력이 깊어질수록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그 부요한 신비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신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무수한 '창조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한 그 창조성의 발현,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osted by 장준식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초월'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구원과 초월을 섞어 말하자면, 구원은 초월하고 싶은 욕구다.

 

우리는 대개 구원을 이렇게 '초월'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 있다. 몸이 아픈 것에 대한 초월,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에 대한 초월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무엇보다, 죄에 대한 초월을 구원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한성을 못 견뎌 한다. 그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조금이라도 자신의 유한성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수단으로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이 ''이다. 돈은 사람들에게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데, 돈이 많으면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선 '초월자'가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구원을 '초월'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욕망이 강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욕망 덩어리이기 때문에, 구원을 '초월'로 생각하는 데 쉽게 마음이 끌린다. 그러나, 구원을 '초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파멸에 이르게 한다. 구원인 줄 알았는데,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감은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구원을 초월로 이해하며, 결국 비참한 인생을 맛본다.

 

기독교의 구원을 '초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정말 오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이 '초월'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굳이 '성육신(incarnation)'할 필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초월'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종말론도 이 세상으로부터의 초월이 아니라, 이 세상의 완성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은 '성육신'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앙의 출발점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 또한 놓치면 안 된다. 성육신과 십자가는 '초월'을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의지이다.

 

악이 판을 치는 것 같으나, 결코 이 세상은 그 악에 의해서 멸망당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아름다움이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이, 기독교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깊이 이해한 사람은 초월적 욕망을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외를 가지고 자신의 삶과 이웃의 삶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힘껏 끌어안는다. 초월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악과 진실하게 대면하며, 자기의 생명을 긍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가 진정 구원 받은 자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