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0'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12.10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
  2. 2019.12.10 증인으로서의 삶을 간구하는 기도
  3. 2019.12.10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

 

20년 전, 미국과 한국을 강타한 책 한권이 있었습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입니다. 얇은 책이었는데, ‘스니프스커리라 불리는 두 마리의 생쥐와 라고 불리는 두 명의 꼬마 인간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치즈를 찾기 위해 복잡한 미로를 헤매 다니면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치즈가 어느 날 사라지자, 그들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이에 대해 두 마리 생쥐는 지체하지 않고 치즈를 찾아 나서지만, 두 명의 꼬마 인간은 치즈가 사라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연자실하여 외칩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이 책은 치즈가 사라져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과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나는 의 대조되는 모습을 모여주면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개이나 조직은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하는 세상에 발맞춰 변화를 꾀하려면 현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부정만 하면서 세상 탓만 하다가 실패한 인생, 또는 실패한 조직이 되기 십상입니다.

21세기의 기독교를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시대는 끝났다!” 미국의 유명한 두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윌리엄 윌리몬(William H. Willimon)은 이러한 상황을 일컬어 교회를 위한 무료입장권, 무임승차권은 사라져 버렸다라고 표현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교회의 시대가 끝나고,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교회가 죽음에 이를 지경에 처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 정체성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가!”에 대한 정체성 말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걱정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교회에는 과연 새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모델의 교회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기존 교회에 실망감을 피력하며 교회를 떠나고 있는 세대들에게 다시금 신앙의 용기와 헌신을 유도할 수 있는 창조적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가? 교회에 대한 분신과 조롱으로 가득 차 있는 세대들을 향해 참된 신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통로가 만들어지고 있는가?”(이상훈, ReThinkChurch, 57).

그동안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함께 말씀을 나누고 성경공부를 하고 회의를 하면서 나눈 교회의 가치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세워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시대를 따라가기 급급한 교회가 아니라, 시대를 선도하는 교회가 되려면,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새롭게 깨닫고, 말씀에 근거하여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의식입니다.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종교 없이도 삶을 의미 있게 살수 있다고 외치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세상에 외치고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라는 것을 구상해 보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주도적 인생을 살기 원하며, ‘워라벨(Work+Life Balance)’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현대인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매우 강합니다. 일만 하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삶을 가꾸어 가며 인생의 의미와 공동체의 가치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강합니다.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는 그러한 현대인들의 바람과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회 공동체의 만들기 위해서 고안된 소그룹 모임입니다.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성장(spiritual growing)을 위한 통합적 소그룹 모임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지닌 ‘good spirit’의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집니다. ‘Mission’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세상을 향하여 부여 받은 사명을 말합니다. 그 사명은 소그룹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의논해서 정한 ‘Project’를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삶의 흥미와 신앙의 흥미를 가지게 되고,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삶과 신앙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자기주도적인 신앙을 형성하며, 자립적인 생각과 판단력을 향상시키며, 실제의 삶과 밀착된 신앙생활을 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결국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교회 공동체는 요엘서에서 예언한 성령의 임재가 사도행전에서 성취된 것을 보는 것처럼, 성령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 몸의 세포가 살아 숨쉬는 교회, 사람 냄새 나는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고자 합니다.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에 대한 개념을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313, 로마의 콘스탄티노플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의 박해가 그치고, 그 이후 로마의 공식 종교로 기독교가 채택된 후 세월을 거듭하며 기독교는 이 세상의 왕좌의 자리를 누려왔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서 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상황처럼 소수자와 거류자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지닌 그 엄청난 사회변혁의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려면 제도적인 교회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선교적 상상력을 지닌 역동적인 성령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역사를 이루는 데,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가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2. 10. 07:11

증인으로서의 삶을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5:27-42)

 

주님,

사도들이 보여주는 예루살렘에서의 행보를 보면서

성령의 역동성을 실감합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증언하시듯이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의 모든 제자들이 성령과 더불어

‘증인으로서의 삶을 거침없이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실제적인 권력이었던 공의회도 그들의 증언을 막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이 공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듯이,

사람에게서 난운동(movement)’이면 사라지겠으나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우리도 그 일에 증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 믿습니다.

우리도 성령이 충만하여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과 더불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상관하지 않고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외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10. 07:08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사도행전 5:27-42)

 

200611월에 시작하여 2007년도 7월에 막을 내린, MBC<거침없이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이 있다. <순풍산부인과> 이래 최고의 인고를 끈 시트콤으로 기억되는 TV 프로그램이다. <순풍산부인과>를 통해서 송혜교가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면,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 박민영, 정일우, 김범 등이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특별히 정준하와 박해미의 부부역할, 그리고 야동순재로 이름을 날린 이순재의 연기가 돋보인 드라마다. <거침없이 하이킥>이라는 제목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지만, 이 시트콤은 한마디로 유쾌하고 통쾌하고 상쾌한이야기를 들려준다. 많은 이들이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서 함께 웃고 울며 즐거워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거침없이 하이킥>을 연상케 한다. ‘유쾌통쾌상쾌의 코드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활동에 중점을 둔 성경이고, 바울서신은 본인이 개척한 교회를 잘 세워 나가려는 복음과 교훈에 중점을 둔 성경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신약성서 내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의 승천(부재) 이후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어떻게 성령과 더불어 역동적으로 복음을 전했는지에 대한, 활동이 담겨 있다.

 

사도행전을 보고 있으면, ‘이게 뭐지?’라는 질문이 저절로 생긴다. ‘복음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성령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들은 이렇게 세상을 향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세상은 여전히 답답하고 악이 판을 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모습은 유쾌통쾌상쾌하기 그지없다.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못하며,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유쾌통괘상쾌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있다.

 

본문은 사도들(제자들)의 예루살렘 사역의 절정을 다루고 있다. 유대인 공의회는 사도들을 협박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일도 하지 마라고 했지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계속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사도들의 행동을 통하여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으며, 교회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성장했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들어가고 결심한 백성들이 줄을 섰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유대 지도자들은 시기(젤로스)’에 가득 찼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또 잡아다가 공의회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주의 천사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성전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사도들을 감옥에서 놓이게 한다.

 

공의회 감옥에 갇혀 있는 줄 알았던 사도들이 감옥에 있지 않고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보고 당황한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들을 잡아 다시 공의회 앞에 세운다. 대제사장이 묻는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온 예루살렘을 너희 가르침으로 가득 채우고 이 사람에 대한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구나!”(28/우리말성경).

 

이에 대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29/우리말성경). 그리고 그 앞에서 유쾌통쾌상쾌한 모습으로 그들이 가르치지 말라고 한 복음을 다시 전한다. “당신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용서를 주시려고 예수를 그분 오른편에 높이셔서 왕과 구세주가 되게 하셨습니다.”(30-31/우리말성경).

 

사도들은 왜 이렇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것일까? 이어지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의 증인이고 하나님께서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 또한 그 일들의 증인이십니다”(32/우리말성경). 사도들이 이렇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증언하시는 분이기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 또한 성령과 더불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증인이 되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이 그들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어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성이 아니라 역동성이다.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여 일어나게 되는 구원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사도들에게 한 방 맞은 공의회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회개대신에 크게 노를 발한다. 사도들의 거침없은 하이킥이 그들의 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곧 무죄한 피를 흘린 죄이다. 지도자들의 불감증이 얼마나 심한 지,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지려는 모습이 전혀 없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태복음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그들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피를 우리와 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7:25).

 

이 구절은 굉장히 논쟁적인 구절이라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다. 그 구절을 근거로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굉장히 사악한 해석이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성경은 복음이 아니라 사람 잡는 살인병기가 된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무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함은 죄에 대한 불감증의 증세도 보인다.

 

자신의 죄를 들추려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죄가 드러나면 사람들은 보통 회개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인 양 변명하고, 오히려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사람을 공격한다. 죄는 이래저래 미움과 다툼과 분열을 낳는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게 은혜다. 그 기회를 회개라 한다. 회개는 대단한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상황을 탄생성(natal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들의 거침없는 하이킥에 한 방 맞은 공의회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반격에 나선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한다. 그때, 바리새인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이 공의회 회원들에게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가말리엘은 덕망 있는 율법학자로서,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의 스승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가 행한 연설은 매우 설득력 있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여러분이 지금 저 사람들에게 하려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언젠가 드다가 나타나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양 공포하고 다니자 400명가량의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났습니다.

그 사람 뒤에도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인구 조사를 할 때 나타나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도모했지만 역시 죽임을 당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경우에 대해서도 내가 한마디 하자면 저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둡시다. 만일 그 목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 비롯된 것이라면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행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35-39/우리말성경).

 

우리 나라 말에는 그 헬라어의 표현 문법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가말리엘의 연설에서 쓰인 첫 번째 문장은 개연조건문(eventualis)이 쓰인다. ‘만일 그 목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은 미래에 있을 가능성을 가정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에서는 사실 조건문(realis)이 쓰인다.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은 사실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물론, 이것은 가말리엘 자신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의도된 문장이다. 누가는 가말리엘의 연설을 통해서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났으므로(사실이다!), 너희는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고, 이들을 박해하므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이어진다. 가말리엘의 설득력 있는 연설에 의해 공의회는 사도들을 죽이지 않고 채찍질 몇 번을 한 뒤 그들을 놓아준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것을 기분 나빠 하거나 불쾌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유쾌통쾌상쾌하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위해 모욕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는 기뻐하며 공의회를 떠났습니다”(41/우리말성경).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복음은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이 증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과 더불어 전하는 복음의 증언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성령 또한 영원하시니, 세상이 아무리 흉흉하고 힘들어도, 이 세상이 아무리 세속에 물들어 교회가 힘을 잃는 것 같고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도,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성령을 받는 한, 성령과 더불어 행하는 우리의 증언이 그지치 않는 한, 교회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성령을 날마다 간구하며, 힘을 내자.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유쾌통쾌상쾌하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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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