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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2.03 멈추지 않기를 간구하는 기도
  2. 2019.12.03 하나님 나라는 멈추지 않는다
기도문2019. 12. 3. 07:00

멈추지 않기를 간구하는 기도

( 5:1-11)

 

주님,

초대교회에 닥친 첫번째 위기를 기억합니다.

더불어 출애굽 세대가 가나안 땅 진입을 앞두고 겪었던

첫번째 위기도 기억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온 이들이

옛 시대의 질서와 논리를 따르느라 탐욕에 갇혀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속이고

‘온전히 헌신하지 못한 일 때문에

행진을 멈추어 선 일을 기억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행진을

멈추게 하는 일이 지금도 우리 삶 가운데 발생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주님,

쟁기를 잡은 자가 뒤를 돌아보면 안 되듯,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자로서

행진하는 일을 멈추지 않도록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3. 07:00

하나님 나라는 멈추지 않는다

(사도행전 5:1-11)

 

사도행전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촉발되었고, 성령 강림을 통해서 발생한 일들이다. 사도행전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성령 강림을 통해서 탄생하게 된 교회 공동체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공동체임에 틀림없다.

 

성령 강림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공동체, 교회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교회는 성령이 통치하시는 공동체이다(2:3).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활동하시는 공동체이다(3:16). 셋째, 교회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공동체이다(4:28). 다시 말해,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오롯이 드러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성령이 통치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처럼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이 각 사람에 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얼마나 성령의 임재에 대하여 간구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성령을 부어 주소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활동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을 일으키면서 한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 일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합니다. 그 이름이 이 일을 이루실 줄 믿나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도들이 공의회에서 놓임을 받은 후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뜻을 구하는가? 무엇을 하든,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예정하신 그 일들을 이루소서!”


성령 임재를 통해 새롭게 세워진 공동체, 교회에 위기가 닥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위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매우 당혹스러운 내용을 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촉발되고, 성령 강림을 통해서 전개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행진이 갑자기 멈춰 설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여호수아 7장의 이야기와 더불어 해석되어 왔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이고, 그래서 기독교인은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경을 볼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단이라기 보다는 무식한 이라고 부르는 게 낫다. 아이러니컬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기독교를 깊이 이해하려면 신약보다 구약에 대한 지식을 깊게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신약은 하늘에 뚝 떨어진 문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구약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1세기와 2세기의 기독교가 헬라문화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헬라철학을 염두에 둔 것은 사실이나 신약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개념과 용어, 그리고 상징들은 모두 구약성경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 신약에 등장하는 상징은 모두 구약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구약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의 이야기와 병렬적으로 배치했을 거라고 말한다. 출애굽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을 드디어 끝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드디어 입성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고, 그 무엇도 그 행진을 막을 수 없었다. 가나안 입성 전에도 주변 나라들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전투에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셨다. 그리고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밟게 되었을 때, 처음 치른 여리고성 전투에서도 하나님은 그 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그런데, 그 승리의 기쁨도 잠시, 여리고 성과 비교도 되지 않을 작은 성, 그래서 이름도 아이성인 바로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한다. 행진을 멈추어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승리할 줄 알았던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36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며 퇴각했고, 무엇보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됐다. 36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성 전투를 통해, 백성의 마음에 담대함이 사라지고, 절망이 싹 튼 게 문제였다. 절망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줄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이 아이성 전투에서 멈추어 섰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겪은 첫 번째 위기였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하나이까”(수 7:6-9).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응답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용어가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헤렘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헤렘법을 어긴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며, 그 헤렘법을 어긴 당사자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과 함께 멸절하지 않으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7:15).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서 만난 원수들을 모두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군대가 강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호수아는 모든 이스라엘이 그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제비를 뽑아 헤렘법을 어긴 자가 누구인지를 색출해 낸다. 그가 바로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었다. ‘헤렘법을 어긴 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다. ‘헤렘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고, 믿음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의 행진의 원동력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 그들이 가진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었다. 헤렘법에는 그 마음과 정신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바로 여호수아서의 아간의 이야기와 연결한다. 누가가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한 물질 문제가 아니라 헤렘 개념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 없으면, 교회 공동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죽은 거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 없으면,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행진은 멈춰 설 수밖에 없다.

 

탐욕을 버려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더니 탐욕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는 탐욕의 원리로 돌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탐욕만큼 필요 없는 것도 없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자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을 흉내만 냈을 뿐, 실제로는 아직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가 사람(사도들)에 의해 세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 그 땅 판 값 중 얼마를 자신을 위해 떼어두고(노스피조마이)’서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이 전부인 양 속인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을 두지 않는, 아간이 보였던 헤렘범의 위반과 같은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아간이 죽었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또한 죽게 된다.

 

남편 아나니아가 죽고 나서, 세 시간쯤 뒤에 영문도 모르고 사도들 앞에 선 삽비라는 남편과 함께 지식을 공유(쉰오이다)’했기에 남편과 동일한 대답을 늘어 놓는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삽비라를 꾸짖는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 여기서 함께 꾀하다서로 같은 목소리를 내다’, ‘함께 일치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내 삽비라는 남편 아나니아와 같은 운명을 맞닥뜨리게 될 수밖에 없다. 그녀도 남편처럼 죽게 된다.


아나이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개인에게 주는 교훈이 아니다.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속이면 죽게 된다는 협박도 아니다. 아간의 이야기가 아간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는 교훈이었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또한 교회 공동체에 주는 교훈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회는 성령이 통치하시는 공동체이고, 예수의 이름이 활동하시는 공동체이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과 같다. 교회 공동체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을 두지 않는다면, 한걸음도 행진할 수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보았듯이, 그 무엇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멈추지 않는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거나 막을 힘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대림절(Advent),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다. 이것은 강요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최고의 갈망이고, 구원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다. 멈추지 않고 기어이 오시는 하나님 나라를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기다리고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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