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2018년도 한국에 출판된 책 중에 많이 읽힌 책 목록에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2019년도에도 여전히 많이 읽힌 책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에 세속(secular)’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죠. 대개 세속적이라는 말은 속물적이라는 뜻으로 통하거나, ‘신을 믿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든지, 종교적 신념을 토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를 일컬어 세속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세속적인 사람들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종교 없는 삶>에서 세속(secular)’라는 용어는 가치 중립적인 용어로서 무종교적인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책의 저자 필 주커먼(Phil Zuckermann)은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에 위치한 피처 칼리지의 사회학과 교수입니다. 그 자신이 무종교인입니다. 그는 종교 없는 삶을 택한 사람들이 늘어가는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면서 종교 없는 삶의 의미를 찾아내서,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덜어내려고 연구를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책 서문에서 연구를 통해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 가치를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신뢰와 생각의 자유, 지적인 탐구, 아이들의 자율성 함양, 진리 추구, 황금률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공감적 호혜를 도덕성의 바탕으로 삼기, 죽음의 불가피성 받아들이기, 내세가 아닌 지금의 세상을 기초로 하는 온건한 실용주의로의 삶을 항해하기, 그러면서 설명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이 심오한 존재의 한가운데서 때때로 깊은 초월감을 만끽하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24).

그는 이어서 무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활력과 의욕, 열정, 끈기를 갖고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또 이 세상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므로 세상을 더욱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것신이나 구원자보다 가족과 친구들을 더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타인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것또 갓난아기나 폭풍우, , 눈물, 조화와 내적인 것들, 대수학, 용서, 오징어, 아이러니 같은 삶의 설명할 수 없는 경이들에 어떤 초자연적이거나 신적인 보호테이프를 붙이지 않고 이것들 속에서 기쁨과 충족감을 발견하는 것…”(24-25).

저자가 연구를 통해 밝혀낸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 가치들을 보면 종교를 가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이 세상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므로, 이 세상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독교 신앙인들은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혀를 차거나 그들의 삶을 혐오하거나 불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을 가짐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구원 받은 의인으로 포지셔닝을 하며, 구원 받지 못한 그들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과 정죄의 마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적어도,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이렇게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혐오와 불신의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대림절(또는 대강절, Advent)을 맞았습니다. 기독교 교회력은 대림절부터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약속하신 구세주가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부터 기독교의 신앙은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종교 없는 삶>에서 말하는 핵심 주장은 종교 없는 삶도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다!”입니다. 그러니 종교 없는 삶을 산다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함부로 혐오와 불신의 마음을 갖지 말라고 외칩니다. 이처럼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말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연구하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말하기 위해서 어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설마, <종교 없는 삶>에서 말하고 있는 것에 긍정하며 신앙을 떠나 종교 없는 삶의 반열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혹시, 아직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 함께 그 의미를 발견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종교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외치는 이 시대에, 우리도 부지런히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함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우리의 삶을 던져 보죠.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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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보아스 헌금

 

보아스 헌금이라고 이름을 정했습니다. 이름을 정해 놓고, 참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도했고, 간구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이름이냐고요? 우리가 지난 임원회 때 결정한 교회 Loan Payoff 헌금에 대한 이름입니다.

 

참 의미 있는 이름입니다. 보아스의 마음으로 헌금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보아스!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요? 룻기서를 보면, 보아스는 어려움에 처한 룻과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합니다. ‘기업 무를 자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 일 처리를 얼마나 똑부러지게 하는지, 보아스를 보고 있으면, 이렇게 반듯한 사람이 있나 싶습니다.

 

나오미는 가뭄이 든 유대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끼니 걱정하지 않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게 뜻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이국 땅에서 여자의 몸으로 살아남기 힘든 환경과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며느리를 남겨두고 고국 땅으로 돌아오고자 했습니다. 두 며느리 중, 한 며느리는 제 갈 길을 갔고, 다른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땅에 함께 왔습니다. 그 며느리의 이름이 룻입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기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마라는 쓰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인생이 고달팠기 때문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나오미를 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모압 여인이었기 때문에 나오미의 고향에서 그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공동체가 지켜주지 않으면 꼼짝 없이 굶어 죽을 처지에 놓인 신세였습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느끼고 있지 못해서 그렇지, 공동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공동체가 한 사람을 잘 품어주지 못하면, 한 사람의 인생은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한 사람의 생명을 잘 돌보아주면 공동체 전체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방 여인 룻과 고단한 삶을 산 여인 나오미의 운명은 공동체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룻과 나오미는 드라마틱하게도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바로 보아스 덕분입니다. 보아스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하다는 뜻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보지 않고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다고 해서 모두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기업 무를 자의 법을 지키기 싫으면 그만입니다. 실제로, 룻과 나오미에 대하여 기업 무를 자의 법을 지켜야 하는 촌수가 더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 법 지키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룻과 나오미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교회의 부채(loan)를 갚기(payoff)하기 위하여 드리는 보아스 헌금룻과 나오미 같은 교회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우는 기업 무를 자같은 헌금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보아스와 같은 따스한 마음으로, 보아스와 같은 믿음의 마음으로 뜻과 정성을 다해서 헌금하면, 거기에 하나님이의 무한하신 은혜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보아스가 지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거기에서 맺힌 열매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믿음으로 지켜낸 룻을 통해서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우리가 드리는 보아스 헌금을 통해서도 그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리라 믿습니다.


주님, 우리의 이 작은 보아스 헌금을 받으시고, 보아스에게 내리신 하늘의 축복을 우리에게도 부어주소서. 보아스의 헌신을 통하여 이 땅 위에 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1. 25. 15:44

바나바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기도

(4:23-37)

 

주님,

우리도 바나바와 같은 은혜를 입고 싶습니다.

우리도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사도들의 증언이 있고,

기사들과 표적들이 따르고,

은혜가 지배하는 교회,

그래서 누구도 핍절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를

세워 가고 싶습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바나바와 같이

종말론적 실재에 참여하여

탐심으로부터 해방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무엇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요?

우리의 감사는 무엇에 대한 감사인지요?

해방에 대한 감사인지요, 아니면 탐욕이 채워진 것에 대한 감사인지요.

우리의 감사를 바르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바나바처럼

해방에 대한 감사가 터져 나오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1. 25. 15:42

바나바는 왜 그랬을까?

(사도행전 4:23-37)

 

바나바는 바울의 동역자로 알려진 초대교회 인물이다. 바나바는 바울이 사도와 제자들의 서클에 들어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로 유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전도하여 교회 공동체에 정착시키는 사역을 바나바 사역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만약 누군가 사도행전을 바탕으로 TV 드라마를 제작한다면, 바나바의 등장을 어떻게 그릴까, 궁금하다. 내가 드라마 PD였다면, 한 회의 마지막 장면에 멋지게 등장하는 바나바를 그리면서, 다음 회를 궁금하게 만들 것 같다. 실제로, 본문을 보면, 바나바의 등장이 심상치 않다.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지, 상상력을 가지고,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36-37).

 

상상이 되는가? 드라마 마지막 씬으로 이 장면이 등장하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생각만해도 짜릿하다. 그렇게 강렬하게 등장하는 바나바의 모습을 보고 시청자들은 앞으로 발생하게 될 바나바의 활동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바나바는 왜 그랬을까? 바나바는 왜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까? 바나바도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의 한 명이었던 것 같다. 그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베드로와 사도들이 설교를 통해 증언한 것을 믿었던 것 같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그는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사도행전을 드라마로 만든다면, 첫회는 반드시 십자가 사건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사건의 발달은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베드로와 사도들의 증언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십자가 사건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이다. 그 당시 평범한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한 유대의 시골뜨기 사내가 하나님 나라 운동하다가 당국의 눈 밖에 나서 체포되어 죽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건으로 봤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들의 증언은 그들이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사건에 대하여 강력한 클레임을 걸고 있다. 십자가 사건은 평범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에 대한 클레임 중의 하나가 본문에 담겨 있다.

 

공의회의 심문과 재판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와서 그간 되어진 일에 대하여 보고하며, 어려움 가운데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기도를 드린다. 본문은 그 기도가 주된 내용이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 사건을 매우 특별하게 해석한다. 아니, 아주 정당하게, 진리로 해석한다. 사도들의 해석이 맞다는 뜻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사도들은 기도 속에서 시편 2편의 말씀을 인용하며, 십자가 사건이 메시아 대적 사건,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반란 사건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지 이해하기 위해서 시편의 말씀을 잠깐 들여다 보자. 시편 2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편 21-3).

 

사도들은 시편 2편의 말씀을 인용하며, 십자가 사건을 해석한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집결하여, ‘기름 부름 받은 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는 것이다. 시편 2편의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메시아 대적 사건,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반란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이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대적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렇게 무지 가운데 사람들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그들의 무지와 불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게 정말 중요한 메시지이다. 이것을 모르면, 기독교 신앙은 한낱 반역과 죽음의 잔치로 끝나고 만다.

 

사도들이 말하고 싶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진리의 메시지는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재라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여셨다.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죄악과 폭력과 죽음을 눈으로 보고 경험하지만, 하나님은 그 안에 용서와 화해와 구원과 생명을 감추어 놓으셨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죄악과 폭력과 죽음을 보느냐, 용서와 화해와 구원과 생명을 보느냐, 무엇을 보는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도들은 간절히 기도한다. 그들은 십자가 사건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재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담대하게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폭력과 죽음은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폭력과 죽음을 넘어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게 우리에게도 보여야 한다. 이것이 보이지 않으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우리는 신앙의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그들의 위협을 보고 주의 종들을 도와 주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소서. 주의 손을 펴서 주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을 통해 병을 고치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소서”(29-30, 우리말성경). 이것은 단순히 기적을 베풀어 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종말론적 실재가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을 증언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행할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이것을 이렇게 질문해 보면 좋겠다. 사도들은 기도하면서, 왜 그리스도의 부활(십자가 사건)을 증언하는 데 큰 능력과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를 간구했을까? 그냥 말로 전하면 안 되나? 꼭 능력과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가 필요한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사도들이 기도를 통해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간구한 이유는 그들이 권위를 얻고, 사역을 수월하게 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함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된다.

 

그들에게 큰 능력과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적이 필요한 이유는 십자가 사건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고 있는 종말론적인 실재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를 따라 논증하거나 확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큰 능력과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적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재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도 십자가 사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바나바는 왜 그랬을까? 그는 왜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까? 단순히 사도들의 말씀에 은혜받아서가 아니다. 그의 행동은 심리적인 심경의 변화에서 온 게 아니다. 그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사도들이 십자가 사건에서 본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재를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에 따라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갔다.

 

십자가 사건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참 된 해방을 누리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한다.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바나바의 자세한 심경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장면을 드라마로 만드는 작가는 반드시 바나바의 심경을 묘사해야 할 것이다. 바나바는 분명히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밭(/재산/)으로 인해서 곤경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바나바를 그 탐욕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된 것이다. 더 이상 그는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떤 세상의 질서와 논리를 따라 삶을 살아가는가. 우리가 오늘 감사절을 맞아,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는데, 우리의 감사는 무엇에 대한 감사인가.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감사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의 탐욕이 채워진 것에 대한 감사인가. 우리는 바나바처럼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 왔는가.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1. 21. 10:42

변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2:6-8)

 

주님, 우리에게 지혜를 주소서.

우리 삶 가운데는

필요치 않은 것,

가슴을 설레게 하지 않는 것,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

나 자신을 없어지게 만드는 것이

무덤처럼 쌓여 있습니다.

어떤 것을 남기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지요.

지혜를 주시고,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도 주옵소서.

주님, 변하고 싶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1. 21. 06:44

열망과 절망

(욥기 23:1-14)


수능일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길 기도한다. 고등학교 입시 시험 때, 시험 당일 아침 내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나랑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덕에, 우리 아버지한테 기도 받고 가서, 답안지 밀려 썼는데, 오히려 시험을 더 잘 봐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기도 받는데 엄청 신비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런 결과를 낳았다고, 엄청 고마워하고, 좋아했다.

 

종교적 체험은 참 신비할 때가 있다. 페북에 딸이 수능을 보는 것에 대한 글을 올린 친구가 있어, 이렇게 복을 빌어줬다. “찍은 거 다 맞아랏!” 모두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소망한다. 언제쯤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없어질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 지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 그 지옥이 없어질 텐데, ‘자기의 노력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지옥을 삶으로 들이는 것 같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욥은 처절한 지옥을 경험하는 중이다. 부인만 빼고, 삶의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송두리째 사라졌다. 부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욥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축복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보면, 욥은 다시 회복하여 자식을 낳아 더 큰 복을 누리며 살았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애굽 왕이 모자란 것은 유대 민족의 부흥을 걱정했다면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하면 안 되고, 여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했어야 한다. 한국이 인구절벽을 경험하고 있다. 이번에 수능시험 치르는 학생이 55만명 정도 되는데, 이 중에 고3 재학생은 40만명 정도다. 정확히는 39424명이다. 역대 가장 적은 수험생이다. 이러한 인구절벽을 극복하려면, 여성에 대한 정책과 복지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은 모든 생명의 희망이다.

 

욥기는 장대한 지혜문학이다. 구약성경 중 가장 심오한 철학과 신학을 담고 있다. 구성도 드라마틱하다.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소발, 빌닷은 그 당시(지금도 여전히 우세한 생각이지만) 만연했던 사상을 대표한다. 그 사상은 보상교리이다. ‘라고 하는 요소를 통해서 인간론을 생각하는 히브리인들의 사고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 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들은 모두 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대조적인 사고를 지닌 문명은 헬라문명이다. 그리스/로마신화를 통해서 보듯이, 인간과 신은 한 데 어우러져 세상의 악을 구성하고, 악과 맞서 싸운다. ‘라고 하는 개념이 인간론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도덕적이고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운명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 운명을 극복하고 신적인 경지에 오른 사람을 영웅이라고 한다. 지금도,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과 헬라인들의 사고방식은 지구인들의 사고방식 안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보상교리는 매우 실존적인 고민이다. 욥의 재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욥의 세 친구(엘리바스, 소발, 빌닷)는 욥을 정죄한다. 니가 이렇게 고통에 처하게 된 것은 너가 의롭지 못하고, 너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굉장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런 와중에 나오는 말씀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말씀이다. 빌닷이 욥을 정죄하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하면서 한 말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싶어한다. 지금 이렇게 힘들고 어렵지만, 내가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아 의인이 되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심히 창대해 질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런데, 실제의 삶 속에서는 회개를 통한, 의로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죄 용서함을 받고, 심히 창대해지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인가? 이러한 신앙의 갈등, 아이러니, 역설 등으로 인해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무엇보다, 정죄 당하는 아픔, 밀려오는 죄책, 흔들리는 믿음, 이러한 삶의 요소들이 우리를 사납게 흔들어 댄다.

 

욥은 보상교리에 온 몸을 다해 저항한다. 욥의 세 친구는 보상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욥을 온 몸 다해 정죄한다.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까? 당연히 하나님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본문은 열망과 절망을 담고 있다.

 

욥은 절망 속에 있다. 세 친구들에게 사납게 당하고 있는 정죄가 절망이다. 사람은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 때문에 죽는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상대방을 가리키는가. 그 행위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인지 모르고,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너무도 쉽게 한다.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질이 아니라, 따스한 마음이다. 내가 손가락질 하지 않아도, 죄는 그 속성상 심판을 이미 담고 있다.

 

욥은 죄가 없다. 손가락질 당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는 지금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절망이다. 그런데, 그는 절망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절망 속에서 열망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하나님과 대화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가 하나님을 움직여 복과 저주를 내리게 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욥은 하나님의 자유/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고백한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절망 가운데 있는 욥의 열망이다.

 

욥의 처절한 열망은 이 구절에 오롯이 담겨 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12). 우리는 보통 말씀이 밥 먹여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죽을 처지에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내 앞에 밥과 말씀이 있다. 무엇을 먹겠는가? 밥을 먹겠는가? 말씀을 먹겠는가?

 

엘리야의 이야기가 오버랩 된다.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모두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살리기 위하여 보낸 곳이 사르밧 과부의 집이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아들과 더불어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한 끼 밥을 해 먹고 굶어 죽을 작정이었다. 그때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도착하여, 그들이 먹고 죽으려 했던 음식을 자신에게 달라고 한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의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3-14).

 

보통,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양식을 택하지, 말씀을 택하지 않는다. 만약 사르밧 과부가 말씀을 택하지 않고 양식을 택했다면, 그와 그의 아들은 한 끼 음식을 먹고 죽었겠지만, 사르밧 과부는 말씀을 택함으로, 그 어려운 가뭄의 때에 구원을 경험한다. 매우 도전적인 놀라운 말씀이다.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양식과 말씀 중, 무엇이 더 귀한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 즉 진리를 아는 사람은 욥의 고백처럼 정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여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진리의 경지, 신앙의 경지에 오르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신앙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유를 줄까?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어하는 열망 가운데 있는 욥에게는 또다른 절망이 있다. 그 절망은 바로, 욥의 그러한 열망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숨어 계신하나님 때문에 발생한다. 그 절망은 이 구절에 담겼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뵐올 수 없구나”(8-9).

 

욥에게는 꽉 막힌 절망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절망이 욥의 열망을 막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열망은 희망으로 피어나고 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He knows the way I take, when He has tried me, I shall come forth as gold.”

 

욥의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열망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삶은 이런 저런 절망이 너무 많다. 그 절망을 우리가 일일이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절망 투성이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절망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우리에겐 욥과 같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겠다는 그 열망! 말씀이 정말 밥 먹여 준다! 그 열망이 우리에게 있는 한, 절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희망적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 우리를 단련하소서. 우리가 정금같이 나오겠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1. 12. 15:14

[시론] 허수경의 시 수박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ㅡ 허수경의 시 '수박'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로 시작하는 이 시는 둥글지 못해 겪었던 사랑의 상처에 대하여 말한다. 이제는 둥글어졌기에 이런 아픔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진술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도 그렇다. 둥글지 못할 때, 자신에게서 벌어지는 '불행한 일들'에 대하여 날을 세워 존재를 비관하고, 신에게 삿대질을 해대는 날이 있다. 그렇게 살았던 인물이 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의 아버지, 미카엘 키에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가 그랬다. 미카엘은 힘들고 어려운 젊은 날을 보냈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던 어느 날, 그는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하나님을 저주했다. 그런데 그 이후 그의 삶은 생각과는 달리 풍요로워졌다. 하나님을 저주했으니, 죽거나 망해야 하는데, 오히려 부자가 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자기를 떠났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평생 이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죄책감은 아버지의 예언’(그는 자신의 자식들 모두가 저주를 받아 33살을 못 넘길 거라고 생각했다.)보다 오래 살아남은 자식, 쇠렌 키에르케고르에게 유전됐다.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저주스런 과거를 알게 된다. 하나님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사건 외에도, 아버지가 하녀로 일하던 여성과 혼외정사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고, 그 하녀는 본부인이 죽기 전에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바로 자신(쇠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충격적인 사건들로 인해 쇠렌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이 가진 죄책감과 평생 싸우게 되는데, 그 죄책감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던 연인 레기네 올젠과의 약혼도 파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부여받았다고 믿는 영적이고 실존적 자산을 통해서 제도화되고 굳어져가는 국가 교회 체제(Christendom)에 맞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길고도 험한 철학적, 신학적 여정에 나선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의 존재 자체가 둥그러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러면 위의 싯구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있는 겸손한 존재가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그 치열한 여정의 한 복판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천재가 아니다. 그들은 항상 넘쳐났다.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순교자, 즉 사람들로 하여금 복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그 자신이 먼저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각성이다. 그러므로 미구에 나의 글뿐만 아니라 나의 전 생애까지도, 기계의 흥미를 자아내는 모든 신비로서 연구되고 또 연구될 것이다. 나는 신이 나를 어떻게 도우셨는지 결코 잊지 않으며,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바람은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다”(일기, 18471120).


신의 존재는 언제나 저만치 가 있는 마음같다. 그러나 마음이 둥글어지면 왜 신은 저만치 가 있는 마음일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된다. 둥글지 못했을 때, 신이 이만치 가까이 다가왔다면, 아마 우리의 존재는 멸망했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여정은 이것을 깨닫는 여정이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주님, 저 만치 가 있는 당신의 마음을 사모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1. 8. 03:52

[시론] 허수경의 시 '연필 한 자루'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허수경의 시 '연필 한 자루'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강렬하다. 연필이 무엇인가를 쓰면서 짧아지듯, 우리의 인생도 닳아간다. 짧아진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곧 종말이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짧아지면서 남기는 생의 열매들이 지닌 잠재력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인생은 짧아진다. 매순간 목숨의 한 순간을 어딘가에 내밀기 때문이다. 목숨의 한 순간을 내밀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에 있는가. 심지어 변을 보는 일도 목숨의 한 수간을 내밀어야 가능하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밀기 때문에 짧아진다는 거, 짧아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목숨을 떠밀리듯 내밀어야 한다는 거, 허무하다고 생각하기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해야 맞다. 다만, 내밀 수 밖에 없는 한 순간의 목숨이 무엇을 향해 있는 가가 중요하다.

 

시인의 표현은 대단히 강렬한 영성이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는 가슴 시리도록 강력하게 다가오는 고백이다.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윤동주의 고백이 오버랩 된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이유는 정치도 박애도 깨달음도 아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민다. 짧아지면서 내민 목숨의 한 순간이 당신을 위한 거라면, 연필 같이 닳아서 없어질 우리의 '모든' 목숨은 모두 '당신'의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남기기 위해 버리기

 

곤도 마리에(Kondo Marie)를 아세요? 넷플릭스에서 그녀를 앞세운 프로그램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Tidying Up With Marie Kondo>를 통해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된 일본 여성이에요. 평범했던 그녀의 삶은 바꾼 것은 정리의 기술입니다. 2014년도 세상에 내놓은 그녀의 정리 노하우를 담은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 베스트 셀러가 되자, 미국까지 진출하여 넷플릭스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죠.

 

그녀의 정리법이 인기를 끈 가장 큰 이유는 풍요에 지친 미국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가난만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게 아닙니다. 풍요도 우리를 지키게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풍요에 지쳐 있는지. 너무 풍요로워서 우리는 지쳐 있습니다. 무기력증에 걸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죠. 그 풍요의 무기력증을 일깨워준 인물이 곤도 마리에입니다.

 

그녀가 가르쳐 주는 정리법의 핵심은 버리기 기술입니다.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한 곳에 모아 보면 지붕을 뚫고 나갈 정도의 더미가 생깁니다. 그 물건들 하나하나에 손을 대서, 그 물건이 나의 마음을 설레게하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녀의 정리법의 핵심입니다.

 

그녀의 정리법이 얼마나 강력하게 미국인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는지, 그녀의 이름 ‘kondo’는 영어 신조어가 되어 정리하다의 뜻으로 쓰일 정도입니다. ‘Konvert’라는 신조어도 생겼는데, 이는 곤마리 정신으로 개종한 사람을 뜻합니다. 거의 종교 수준이죠.

 

실제로, 그녀의 정리법에 따라 집을 정리한 사람들은 단순히 좋았다의 감정을 넘어, ‘인생이 바뀌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정리법은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라 마음가짐이고, 인생철학이며, 영적인 행위로 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하죠. 단지 집에 있는, 어지럽혀 있는 물건들을 정리만 했을 뿐인데, 삶이 변한다는 것이 말이죠.

 

그녀의 정리법의 핵심인 버리기 기술설레지 않는 과거를 떠나 보내고, ‘설레는 기억은 남기면서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일종의 의식(ritual)입니다. 사실 이러한 의식(ritual)은 종교에서 행해지는 것이고, 종교의 역할이지요. 그런데, 그 종교의 역할을 한 여성이 넷플릭스라는 대중매체를 등에 업고 대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대단하죠.

 

곤도 마리에는 종교의 핵심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그녀가 종교인은 아닙니다만, 자신의 정리법을 통해서 종교의 핵심을 무의식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녀의 정리법이 말하는 것처럼, ‘남기기 위해 버리기기술(art)을 배우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느덧 풍요에 물들어, 우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신앙을 사용하는 데만 그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처음에 얘기했듯이, 가난만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게 아니라, 풍요도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지친다는 뜻은 가난이나 풍요 때문에 나 자신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가난도 존재를 존재치 못하게 하지만, 풍요도 존재를 존재치 못하게 합니다.

 

기독교 영성에 케노시스(kenosis)’라는 게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케노시스란 자기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내고 버리는 목적은 무엇인가를 남기기 위해서 인데, 그 비워낸 자리에 오롯이 남는 것은 하나님과 나입니다. 그것이 곧 구원인 것이죠.

 

저는 곤도 마리에의 책을 보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녀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님에도 누구보다 기독교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냥 입으로 예수를 라 시인하면 기독교인일까요?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경계하셨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우리는 무엇을 남기기 위해서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버려야 하는 것과 남겨야 하는 것을 잘못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일단, 모든 것(외적인 것, 내적인 것)을 꺼내 놓고, 그 앞에 무릎 끓고 앉아 심호흡을 하고, 경건한 기도를 한 뒤, 그것에 손을 올려 놓아 보세요. 그리고,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면 버리고, 마음을 설레게 한다면 남기세요. 그리고, 그 설레는 것들 위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 보세요.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내 삶이 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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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1. 6. 03:06

[시론] – 허수경의 시라일락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허수경의 시 '라일락' 부분, 시집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 수록)


라일락의 향기는 중독성이 짙다. 봄이 오는 길목을 가득 채우는 라일락의 향기는 웃음기 없는 사람의 마음도 활짝 열리게 한다. 내 어린 시절을 온통 물들인 것은, 봄의 라일락 향기와 가을의 국화 향기다. 봄의 향기와 가을의 향기는 그 결이 다르다. 봄의 향기는 이제 시작되는 인생의 환희가 묻어 있고, 가을의 향기는 이제 저물어 가는 인생의 애환이 묻어 있다.


교회 앞 공터에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그 향기를 발하던 라일락, 그래서 봄이 오는 것을 몹시도 그리워하게 만들었던 라일락, 그 나무. 나는 그 라일락 나무가 무참히 뽑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있던 그날을 기억한다. 라일락 나무는 쓰러져 있으면서도 향기를 뿜었다. 마치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온통날 속인 바람의 향연인지 모르겠다. 행복을 찾아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인생의덧없음’, 정말 바람 맞은 기분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마냥 허무로만 채워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날 속인 바람을 향해한 방 멋지게 복수하려면, 우리는 그날의 라일락 나무처럼,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것밖에 없다.


푸쉬킨은 말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그의 말은 거짓이다. 그러나 참이다. 삶은 우리를 바람처럼 속인다. 그렇다고 슬퍼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참고 견딜 수만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것밖에 없다.


허수경은 그녀의 다른 시 연필 한 자루에서 이렇게 말한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이 시는 자연스럽게 윤동시의 시 십자가를 연상케 한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예수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내뱉을 때, 하늘은 어두워가고, 몸은 축 늘어져갔지만, 그의 영혼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생동감이 넘쳤을 것이다. 그의 육체는 십자가 위에서 몰락하는 듯 보였으나, 그의 생명은 신나게 웃고 있었을 것이다.


몰락은 피할 수 없다. 원래 이 세상이 몰락을 부추기는 세상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슬픔을 보이며 몰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너무도 소중하고, 너무도 신비롭고,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몰락할 것을 알지만, 몰락해가지만, 몰락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신나게 웃을 수 있다. 아무것도 나의 웃을 수 있는 자유를 빼앗을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우리,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자.

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9. 11. 5. 03:33

쏘나타(Sonata)

 

우리 차 이름이 뭔지 알아? 등굣길, 아들에게 물어본다. 몰라(고개만 가로저었다. 전형적인 중학생의 반응). 쏘나타(Sonata/영어 발음으로 스나라’). 현대 쏘나타. 아들의 무반응(거의 , 어쩌라고의 수준).

 

나는 쏘나타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버지는 이렇게 아침마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게 기쁘다. 왠지 알어?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이렇게 데려다 주셨거든(물론, 가끔 내가 힘들어할 때였다. 우리 때는 그냥 버스타고, 걸어서 학교 다녔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데려다 주실 때, 그때도 쏘나타였어. 그래서 아버지는 이렇게 쏘나타로 너를 데려다 줄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나서 행복하다. 아들에게 물었다. 아버지 말 이해하지?(Do you understand my story? Right?). 또 고개만 끄덕였다.

 

한국인의 국민차, 쏘나타는 1985년부터 생산된, 한국 자동차 브랜드로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소중한 추억인 담긴, 나의 최애(favorite) 자동차이다. 나의 아버지는 1990년부터 1994년까지, 5년간 쏘나타를 타셨다. 아버지가 목회하시면서 타신 처음이자 마지막 승용차였다. 아버지는 평생 교회 봉고차를 타고 다니셨다(그때는 거의 모든 목회자가 그랬다.).

 

내가 세화교회에 부임했을 때(2017430), 교회에서 감사하게도 차를 사주셨다. 교회 리더들이 물었다. 어떤 차를 사드릴까요? 나는 쏘나타를 사달라고 했다. 이유는 너무도 명확했다. “저는 쏘나타를 타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목회를 더 열심히 할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다. 쏘나타를 타면서 나는 매일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거짓없이 진실하게목회할 것을 다짐한다. 그게 바로 내가 아버지를 추억하고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나의 이런 마음을 기뻐하고 계실 것이다.

 

1990, 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은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골목마다 전경들이 쫙 깔려서 조그마한 범죄조차 저지를 겨를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집에 있는 물건 중 나의 호기심을 가장 끈 것은, 단연 쏘나타였다.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쏘나타 안에 머물며 운전하는 것을 시뮬레이션 했다. 그러다 아버지 몰라 쏘나타를 끌고 나가 동네 골목길을 돌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맘 먹고, 아버지 몰라 쏘나타를 끌고 나와 친구들을 태우고 학교에 갔다. 양재동, 언남고등학교, 우리 학교가 바로 눈 앞에 들어왔다. 도로 하나만 지나면 학교에 도착할 찰나, 우리는 전경의 불심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세 명의 전경이 다가왔다. 창문을 내렸다. 면허증을 보여 달라는 전경의 말에 침이 꼴딱 넘어갔다. 전경들은 우리가 고등학생인 것을 알아채고, 우리 모두를 차 밖으로 불러냈다. 전경들은 우리보다 서너 살 많은 형들이었다. 우리는 싹싹 빌기 시작했다. 말이 안 통했다. 그래도 두 명의 후임 전경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려 했으나, 선임 전경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10분을 빌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선임 전경이 서초경찰서에 무전을 쳤다. 순찰차가 모두 바빠 지금 바로 올 수 없다는 회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택시를 잡더니, 운전자인 나를 태워 양재 파출소로 이송해 갔다. 나는 꼼짝 없이 범죄자가 될 신세였다.

 

후일담이지만, 후임 전경 두 명과 남은 나의 친구들은 후임 전경들의 선임 전경에 대한 뒷담화를 말해주었다. 선임 전경이 특박에 눈이 멀어서 저렇게 독이 올라 택시까지 잡아 타고 나를 이송해 간 것이라 했다.

 

양재 파출소에 도착하자 마자, 파출소장님을 비롯하여 그곳에 근무하는 경찰 아저씨들에게 엄청 욕을 먹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무면허 운전을 해?”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그때, 파출 소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받아봣!” ㅇㅇ 경찰서에 정보과장으로 계시던 삼촌의 목소리였다. “준식아, 괜찮냐? 삼촌이 잘 말씀드렸으니까, 파출소장님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고!” . 이런 구세주가 있나. 나는 그때 나를 이곳으로 이송해 온 선임 전경의 눈을 쳐다보았다. 거의 똥 씹은 표정이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하며 파출소를 떠나려 했다. 그때, 아버지가 친구의 아버지(우리 교회 장로님)와 파출소로 들어오셨다. 아버지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파출소장님께 죄송하다며, 나 대신 사과하셨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원래 모범생이었다. 사춘기를 보내며 부모님 속을 썩인 일이 없다. 그런데, 이 사건은 내 학창시절 내가 친 최고의 사고였다. 30년 전의 일이지만, 어찌 생각하면 아찔한 사고이기도 하고, 이렇게 꺼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쏘나타에 얽힌 학창시절의 영웅담 같은추억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러한 일이 중대한 범죄로 분류되지만, 우리 때는 낭만이었다.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물론, 내가 잘 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정말 철없는 시절의 무모한 행동임에 틀림없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운전면허증부터 취득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마음 놓고 쏘나타를 몰고 다녔다. 재수학원(노량진 한샘학원)의 특강이 있는 날(주로 주일 아침에 했다.)도 쏘나타를 몰고 다녀왔다. 대학을 들어가서도 가끔 쏘나타를 몰고 학교에 갔다. 주차를 잘못한 바람에 견인된 적도 있다. 그때도 아버지는 나를 구하러 달려오셨다.

 

쏘나타와 얽힌 또 하나의 추억은 대학 들어가서 죽마고우와 설악산에서부터 경주까지 동해안 여행을 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아름다운 여행이 기억에 생생하다. 설악산에서 만난 교포와 경주에서 또 만난 덕에 그 친구가 묶는 경주의 힐튼 호텔 방에서 함께 라면 끓여 먹던 일도 기억나고, 결국 돈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경주까지 가서 불국사를 구경하지 못했던 아쉬운 추억도 있다. 불국사 매표소 앞에서 경비 아저씨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입장 허락을 받지 못해, 우리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를 추억하며,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경주 불국사이다.

 

쏘나타는 나에게 그냥 차가 아니라, 추억이다. 그냥 추억이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쏘나타를 타며, 교회에 감사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목회를 열심히 할 것을 매일 다짐하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을 잇는 추억을 이어가도록 쏘나타를 34년 동안 출시해준 현대자동차에 감사한 마음이다. 쏘나타 안에서 베토벤 피아노 쏘나타를 들으면, 쏘나타에 얽힌 추억이 샘솟는 듯하여, 이 세상의 모든 쏘나타를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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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1. 4. 13:41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나타내길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2:42-47)


주님,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구별시켜 줍니까?

성령의 은사를 받아

끊임없이 영의 일에 전념하게 하소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데 힘을 다하게 하시고

나눔의 열정을 주시며

떡을 떼는 일에 게으르지 말게 하시고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게 하소서.

이 네 가지를 성실하게 행할 때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주의 백성이 될 줄 믿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1. 4. 13:40

그리스도인의 표지 (signs of Christians)

(사도행전 2:42-47)

 

베드로의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이 되었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고, 죄사함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그 결과 초대교회가 태동이 되었다. 교회는 이렇게 성령의 능력 안에 있어야 태동되는 것이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교회 다니는 신앙인들이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 무엇이 나를 일반인들과 구별해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무엇인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을 때, 성경은 초대교회의 처음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They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NASB).

 

헬라어 성경은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프로스카르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εω)’라는 단어를 쓴다. 우리 말로는 오로지힘쓰니라로 번역을 했고, 영어로는 ‘continually devoting’으로 번역했다.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끊임없이 헌신하다, 반복해서 계속하다의 뜻이다.

 

회개하고, 죄사함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어떠한 일에 전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일에 전념하는 사람이 된다. 그것들에 전념하고 있는 지, 아닌 지를 보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에 끊임없이 헌신하고 전념하는존재인가? 본문은 네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사도들의 가르침 Apostles’ teaching (Bible study, Bible Reading)

2) 교제(나눔) fellowship

3) 만찬 breaking of bread (성만찬+성도들 간의 식사 교제(만찬하늘 잔치의 모형)

4) 기도 prayer (pray to God in the name of Jesus Christ)

 

첫째, 사도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다. 그러면서 구약의 말씀을 면밀히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성경공부를 통해서 사도들의 가르침 배우기를 계속하여 전념하고 있다. 성경공부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시간이거나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해 주는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둘째, 교제이다. 교제는 흔히 친교라고 부르는 것이고, 영어로 ‘fellowship’이라고 부른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라고 한다. 그런데, 교제(코이노니아)는 문자적으로 나눔(sharing)’을 뜻한다. 이것은 서로 주고받은 일, 서로 필요한 것들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물질 뿐 아니라 정서적 교감까지도 우리는 모두 나눌 수 있다.

 

본문에서 나눔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44-45). 매우 급진적인(radical) 본문이지만, 이 본문이 오용되기도 한다. 특별히, 이단들은 이 본문을 들어 교인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일까지 벌인다. 이단이 아니더라도, 마치 믿음을 가지면, 그리스도인이 되면 재산을 가지면 안 되고,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오해 받기도 한다.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나눔이 무엇인지는 그 당시의 상황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 각지에서 모여든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이었다. 오순절이 되면,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성문을 활짝 열어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유대인들을 맞아들였다. 그들이 예루살렘 주민이 아니고 세계 각국에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었지만 환영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이었고, 또는 유대인으로 개종을 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엄연히 말하면, 여행객이었다.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집을 개방하여 맞아주지 않으면 묵을 곳도 없고 밥 먹을 곳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들의 위치는 달라졌다. 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환영 받는 순례객이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들의 미움을 받는 이방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집으로 들여 재워주고 먹여주어야겠는가?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갈 곳이 없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하지만 이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된 그들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주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배척 받는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의 집으로 들였고, 거주 공간이 부족하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거주 공간을 마련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공간을 제공했고, 공적인 모임은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의 뜰 같은 곳에서 가졌다.

 

예수 믿으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일은 정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성을 상실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우리도 그렇지 않겠는가? 먼 곳에서 여행을 왔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에게 잠 자리를 제공하고 먹을 것을 내어주지 않겠는가? 그 수효가 너무 많아서 우리들 거처에 수용하지 못하면, 호텔방이라도 잡아주지 않겠는가? 재산과 소유는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아주 이성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나눔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합리적이다. 그 합리적인 나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지금 여기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무슨 나눔을 실천해야 할까? 레위인처럼, 제사장처럼 그냥 지나치는 것은 나눔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기의 손으로 수고하며, 자기의 소유를 들여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나눔이다. 물질의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마음의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믿음의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는 사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 나눔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셋째는 만찬이다. 초대교회는 떡을 떼는 것에 전념했다. 이것은 성찬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성찬을 하지 않는다. 성찬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식사의 원형이다. 그리스도인은 성찬 때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먹는 모든 식사를 그리스도와의 마지막 만찬으로 생각한다. 형식상 일반 식사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먹는 모든 식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을 기억하는식사다.

 

이러한 식사를 종말론적인 식사라고 부른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라는 의미다. 한 번 생각해 보라. 내가 먹는 식사가 이 세상의 마지막 식사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 식사를 허투루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의 식사라는 의미다. 다른 말로 천국 잔치이다. 얼마나 기쁜 식사인가. 그리고 얼마나 복된 식사인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했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그토록 화를 냈던 이유는 예수님이 거룩한 천국 잔치를 더럽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천국 잔치에는 세리와 죄인들은 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종말론적인 식사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식탁 교제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롭고 거룩하겠는가. 이 식탁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우리가 이것을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식탁 기도) 이러한 기도가 저절로 나올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으로 성만찬을 시행하기를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식사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만찬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다.

 

마지막으로, 기도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기도에 끊임없이 헌신하고 있는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왜 이렇게 쉬지 말고 기도해야하는가?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그리스도인이다. 그 뜻 가운데 하나가, ‘쉬지 말고 기도하기이다. 우리는 그 뜻대로 살고 있는가?

 

기도에 관해서라면, 며칠 밤을 새도 모자랄 정도로 할 말이 많다. 우리는 누구에게, 누구의 이름으로 매일같이, 쉬지 않고, 기도 드리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기도하고 있는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기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기도하라. 필요할 때, 생각날 때, 시간 날 때 하는 게 아니라, 기도에 끊임없이 전념하라.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프로스카르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εω/proskartereo)’. ‘끊임없이 헌신하다/전념하다라는 뜻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러한 열정이 생긴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데 열정이 생기고, 나눔에 열정이 생기고, 떡을 떼는 일에 열정이 생기고, 기도에 열정이 생긴다. 다른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열정이 세상을 바꾼다. 이 열정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는 당신,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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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1. 2. 04:07

[시론] – 허수경의 시 포도메기

 

"침 흘리는 어린애에게 구워서 먹이면 약효가 있다."

(허수경의 시 '포도메기'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 수록)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읽고 허수경이 쓴 시 '포도메기'의 마지막 구절이다. <자산어보>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허수경의 시를 통해 본 <자산어보>는 참 따뜻한 책인 것 같다. <자산어보> 1801년 신유박해 (천주교 박해사건) 때 정약전이 전라도 흑산도로 귀양을 가 살면서 그곳의 해상 생물을 관찰하여 쓴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귀양살이가 고달팠을 텐데, 그 고달픈 귀양살이를 고달프게 보내지 않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정약전 뿐 아니라 그의 동생 다산 정약용도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큰 학문적 업적을 이뤘다. 그들이 귀양살이를 하게 된 원인이 종교탄압이었으니, 어쩌면 그들의 의미 있는 삶은 그들의 신앙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해석이다.


기독교 역사에도 귀양살이 가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한 두 명이 아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아타나시우스이다. 그는 아리우스와의 논쟁으로 유명한데, 그 당시에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아리우스의 주장이 아타나시우스의 주장보다 우세했다. 이에 대해 성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까지 탄식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온 세상을 아리우스파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상을 뒤엎은 인물이 아타나시우스이다. 그는 아리우스의 삼위일체론에 맞서 투쟁의 삶을 살게 된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아타나시우스는 그로 인해 여섯 번이나 추방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마다 정략적 대응을 하지 않고 추방당한 곳에서 묵묵히 몸과 마음을 수련했다. 그때 탄생한 책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이다. 그는 추방을 오히려 자기 수도의 기회로 삼고 추방의 아픔으로 인해 심성이 피폐해지기는커녕, 묵묵한 영성으로 아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을 뒤엎고 현재 우리가 기독교의 정통으로 여기는 삼위일체론을 정립했다.


글에는 한 사람의 삶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그 경험이 고통스러웠다면 글에는 고통이 담기고, 고독했다면 고독이 담기고, 아름다웠다면 아름다움이 담긴다. 글은 손재주가 아니라 영혼의 울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일상을 살면서도 귀양살이 사는 것처럼 살지만, 어떤 이는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산다. 어떠한 삶을 살든, 그 삶에서 의미를 발견한 사람의 말과 글에는 생명을 보듬어 주는 따스함이 묻어난다.


"침 흘리는 어린애에게 구워서 먹이면 약효가 있다." 무미건조하고 담담한 문장 같으나, 나는 여기에서 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경외를 느낀다. 평소 '침 흘리는 어린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면, 그 아이에게 약효가 있는 바다 생물이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은 그 생명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해 줄 수 있는 방도를 신비롭게도 찾아낸다. 이런 점에서 '약효'는 물리적 특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듬는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믿고 싶다.


나의 말과 글, 그리고 나의 미소는 삶에 지친 이에게 어떤 '약효'가 있을까? 따뜻한 문장 한 줄 덕분에,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삶에 지친 이들의 생명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해줄 방도가 신비롭게 다가올 것 같은 희망도 솟아났다. 마침, 아침 메뉴로 '조기'를 구워 먹어서 인지, 오늘은 '침을 흘리지 않을 것' 같다.

Posted by 장준식

종교의 핵심은 도덕과 윤리인가?

 

도덕과 윤리가 종교에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들을 종교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종교를 도덕과 윤리에 가두어 놓는 결과를 범하게 될 수 있다.

 

도덕과 윤리는 절대적이 아니고 가변적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도덕과 윤리는 달라진다. 가변적인 것에 종교를 가두어 놓으면, 종교는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한다.

 

종교의 핵심은 도덕과 윤리라기 보다는 '생명'이다. 생명이 도덕과 윤리에 봉사하는 게 아니라, 도덕과 윤리가 생명에 봉사해야 한다. 종교가 도덕과 윤리를 핵심 과제로 삼을 때, 종교는 생명을 도덕과 윤리에 봉사하도록 희생시킬 수 있다. 종교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생명(인간)을 인간 취급 하지 않을 것인가? 다른 말로 해서,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선언할 것인가?

 

기독교,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 말하는 '믿음의인'에서의 믿음은 '사람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담고 있는 성품의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믿음을 도덕성과 윤리성, 그리고 성품의 변화와 연결시키면 믿음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을 도덕성과 윤리성에 옭아매 놓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믿음의 문제를 도덕성과 윤리성에 결부시키면, 그것은 어거스틴에게 정죄당했던 도나투스주의로의 회귀 일 뿐이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성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결국 믿음을 통한 인간의 알량한 도덕적/윤리적 구원만 남는다.

 

종교의 핵심을 도덕성과 윤리성으로 규정하는 일은 구원을 개인에게 책임지우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는 매우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논리이다. 모든 결과를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주체(다른 말로, 능력이 없으면, 그것이 실력이든 도덕이든)가 발붙일 공간이 없다.

 

종교의 핵심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종교의 핵심은 생명이어야 한다. 도덕성과 윤리성이 생명에 봉사하게 해야지, 생명이 도덕성과 윤리성에 봉사하게 하면 안 된다. 도덕성과 윤리성을 통해 우리의 성품을 바꾸는 '믿음'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다.

 

충분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 못한 것, 성품의 변화가 없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어서 그렇지, 믿음이 없어서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강화하는 쪽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쪽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옳다.

 

"주여,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는 기도도 좋지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도이다.

 

* 이 글은 박충구 교수님이 쓰신 '몇 가지 생각'(10 27일 페이스북에 쓰신 글)에 대한 일종의 반론입니다. 마침, 제가 고민하던 주제에 관한 글을 올리셔서 반론을 펴 봅니다. 제가 고민하던 주제는 '종교의 핵심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아니다'인데, 박충구 교수님의 글은 제 생각과 반대의 주장을 펴시는 것 같아, 글을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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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