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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01 종교의 핵심은 도덕과 윤리인가 2
  2. 2019.11.01 외래어

종교의 핵심은 도덕과 윤리인가?

 

도덕과 윤리가 종교에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들을 종교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종교를 도덕과 윤리에 가두어 놓는 결과를 범하게 될 수 있다.

 

도덕과 윤리는 절대적이 아니고 가변적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도덕과 윤리는 달라진다. 가변적인 것에 종교를 가두어 놓으면, 종교는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한다.

 

종교의 핵심은 도덕과 윤리라기 보다는 '생명'이다. 생명이 도덕과 윤리에 봉사하는 게 아니라, 도덕과 윤리가 생명에 봉사해야 한다. 종교가 도덕과 윤리를 핵심 과제로 삼을 때, 종교는 생명을 도덕과 윤리에 봉사하도록 희생시킬 수 있다. 종교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생명(인간)을 인간 취급 하지 않을 것인가? 다른 말로 해서,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선언할 것인가?

 

기독교,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 말하는 '믿음의인'에서의 믿음은 '사람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담고 있는 성품의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믿음을 도덕성과 윤리성, 그리고 성품의 변화와 연결시키면 믿음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을 도덕성과 윤리성에 옭아매 놓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믿음의 문제를 도덕성과 윤리성에 결부시키면, 그것은 어거스틴에게 정죄당했던 도나투스주의로의 회귀 일 뿐이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성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결국 믿음을 통한 인간의 알량한 도덕적/윤리적 구원만 남는다.

 

종교의 핵심을 도덕성과 윤리성으로 규정하는 일은 구원을 개인에게 책임지우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는 매우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논리이다. 모든 결과를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주체(다른 말로, 능력이 없으면, 그것이 실력이든 도덕이든)가 발붙일 공간이 없다.

 

종교의 핵심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종교의 핵심은 생명이어야 한다. 도덕성과 윤리성이 생명에 봉사하게 해야지, 생명이 도덕성과 윤리성에 봉사하게 하면 안 된다. 도덕성과 윤리성을 통해 우리의 성품을 바꾸는 '믿음'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다.

 

충분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 못한 것, 성품의 변화가 없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어서 그렇지, 믿음이 없어서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강화하는 쪽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쪽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옳다.

 

"주여,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는 기도도 좋지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도이다.

 

* 이 글은 박충구 교수님이 쓰신 '몇 가지 생각'(10 27일 페이스북에 쓰신 글)에 대한 일종의 반론입니다. 마침, 제가 고민하던 주제에 관한 글을 올리셔서 반론을 펴 봅니다. 제가 고민하던 주제는 '종교의 핵심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아니다'인데, 박충구 교수님의 글은 제 생각과 반대의 주장을 펴시는 것 같아, 글을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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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외래어

 

요즘 한국 신문을 보면 외래어 표기법이 달라진 것을 본다. 가령, 할로윈을 '핼러윈'이라고 쓴다던가, 산호세를 '새너제이'라고 쓰는 경우를 본다.

 

원어의 발음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으로 보이나 매우 어색하다. 원어를 그대로 표기할 것 아니라면, 굳이 원어의 '발음'을 따라서 표기할 필요가 있나 싶다.

 

외래어는 우리 나라 말에 없는 단어를 그 나라 말에서 가져다 쓰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버스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 그래서 버스를 가져다 쓴다. 택시도 마찬가지다.

 

외래어를 가져다 쓸 때, 단순히 외래어를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지칭하는 것을 잘 표현해 주는 한국어를 구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결국 외래어도 한국어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이다.

 

'산호세'라는 외래어는 단순히 영어의 발음을 옮겨 적은 것을 넘어 '산호세'가 지칭하고 있는 도시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고 산호세가 영어 발음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영어 발음과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요즘 한글의 외래어 표기법을 보면, 산호세가 아니라 '새너제이'라고 함으로써 외래어 발음을 최대한 살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외래어 발음을 살리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그럴거면 그냥 외래어를 적지 왜 한글로 옮겨 적는가. 산호세라는 외래어는 산호세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떠올려 주는 동시에 외래어의 한글화가 된 것 같지만, 새너제이는 왠지 그냥 외래어 발음을 적어놓은 것 같다.

 

외래어인 '오렌지' Orange의 발음 표기를 넘어서, 그것이 지칭하고 있는 과일을 떠오르게 만들어 준다. 굳이 Orange의 영어 발음을 최대한 구현하겠다고 '오륀지'라고 표기하면, 왠지 어색하다. 한국어 느낌이 안 나고 그냥 번역투 느낌이 날 뿐이다.

 

Halloween '핼러윈'이라고 표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어 발음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 사람들은 '핼러윈'이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영어 발음을 완벽하게 한국어로 표기할 수 없다. 'San Jose'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새너제이'라고 표기한다고 영어 발음을 완벽히 구현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미국 사람들은 San Jose '새너제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래어를 한국어로 표기할 때는 우리 말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언어적 특성을 살려 외래어를 한국어화시켜서 창조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핼러윈'보다는 '할로윈'이 더 좋은 한국어 표기라 생각하고, '새너제이'보다는 '산호세'가 더 좋은 한국어 표기라 생각한다.

 

언론사들이 외래어에 대한 한국어 표기를 조금 더 창조적이고 주체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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