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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0. 1. 23. 09:16

순종을 간구하는 기도

(삼상 15:10-23)

 

주님,

주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일은 위계질서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사랑의 역사를 이루는 일임을 믿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에게

날마다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순종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높이 올림을 받아 주님 곁에 섯듯이,

우리도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23. 09:13

샤마 – 순종

(삼상 15:10-23)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 사무엘은 이 말씀을 듣고 밤새껏 기도한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괴로웠다. 사울 왕에 대한 연민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 사이에서 고민했던 것 같다. 근심 되는 일이 있으면 밤새껏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기도하고 나면 뭔가 마음에 응답이 오기 때문이다. 밤새껏 기도하고 났을 때, 사무엘은 어떤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12).

 

이것은 사무엘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소식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벌인 사울의 행동은 하나님이 후회하실 만 한 것이었다. 사울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손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자신의 손 또는 능력을 기리기 위한 것이 기념비였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그의 마음에는 온통 자기 자신만이 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일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증을 얻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3).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웠어야만 한다.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것은 헤렘법을 말하는데, 헤렘법의 목적은 진멸에 있지 않고, 진멸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있다. 사무엘의 질문은 이것이다.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하셨거늘, 샤마하지 않았는가?

 

샤먀라는 히브리어는 듣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청종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순종이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사울에게 묻는 것은 이것이다. “왜 순종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사울은 이렇게 변명한다.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5). 사울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인데, 사울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사무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울의 잘못된 생각을 질타한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

 

번제와 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사무엘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함(순종함)이 없이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지 않은데, 하나님께 번제와 제사를 드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면서 사무엘은 이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신(邪神) 우상이란 사악한 거짓 신을 말한다. 사울이 한 행위는 신앙행위가 아니라, 우상숭배 행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 순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부터 바르게 가질 필요가 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두고 그가 말씀하시는 것에 온 존재를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순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위계질서적인 생각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종이니까, 위계질서적인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마님이 돌쇠에게 명령할 때 순종해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마님이 말씀하신다. “얘 돌쇠야 나무도 좀 해 오고 물도 좀 길어 오고 마당도 좀 쓸어 놓거라!” 그러면 돌쇠는 네 마님~”이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돌쇠의 입장에서 마님의 말씀은 주인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직 위계질서에서 나오는 명령과 복종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이란 이처럼 위계질서에서 나오는 명령과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과의 관계는 위계질서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순종을 생각할 때 이점을 놓쳐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다면 왜 순종을 해야 하는가? 이것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사랑의 관점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하신다. 사랑이 담긴 말은 언제나 생명으로 이끈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사람은 없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는 모두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결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곳에서 이끌어 잔잔한 물가로 쉴만한 물가로, 즉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순종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생명을 이끄는 사랑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순종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다. 순종은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혼나지 않기 위한 것도 아니다. 순종은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공덕 쌓기가 아니다. 순종은 우리를 위한 일,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이다. 순종할 때 생명을 얻고 이로운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는가?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응답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가끔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6-17).

 

요한복음은 또한 이렇게 증거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끊임 없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 말씀을 육신이 되게 하여우리에게 보내셨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울의 가장 큰 잘못, 그것으로 인해서 왕위를 박탈당하게 되는 이유는 그가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지 않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기념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순종이란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증거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의 인생을 세워 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세상의 빛이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성례전(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생명의 빵이시며 생명의 물이신,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공기 중에 떠돌아 다니는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고도의 수련을 통해서 분별하고 잡아낸다는 뜻이 아니다. 잘 들리지도 않고 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말씀(음성)을 듣느라 시간 낭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우리 가운데 육신으로 오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이 순종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순종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분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여,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나서는 것이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는 강제적이고 위계질서적인 요구가 아니라, 사랑의 요구이다. 사랑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랑의 역사에 응답하는 길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요, 우리가 사는 길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3-24).

 

사울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말씀으로 인생을 세우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그래서 그는 버림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으로 인생을 세우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즉 그리스도께 삶을 드리면 생명을 얻지 아니 하겠는가?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온 존재를 집중하여 생명을 얻는 것, 바로 이것이 순종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