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30'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1.30 매트릭스에서 나오기를 간구하는 기도
  2. 2020.01.30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기도문2020. 1. 30. 05:52

매트릭스에서 나오기를 간구하는 기도

(1:45-51)

 

주님,

우리도 나다나엘처럼 무화과 나무 아래서

주님의 나라를 공부하고 갈망하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에 갇혀

그 세상이 전부인 양 불쌍한 인생을 사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성경읽기와 공부를 통하여

나를 넘어서게 하시고

매트릭스를 깨치고 나와

참된 자유를 가지고

진짜 현실을 살게 하시며

아직도 매트릭스에 갇혀 사는 불쌍한 인생들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를 써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30. 05:50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요한복음 1:45-51)

 

건유가 한창 말을 배울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네 살쯤 됐던 것 같다. 어떤 변신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변신을 해야하는데, 잘 안 되자 힘들어 했다. 힘을 아무리 써도 잘 안 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서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건유야, 힘을 쓰지 말고, 머리를 써!” 그랬더니, 건유는 머리를 장난감에 갖다 대었다. 자기 딴에 알아들은 대로 행한 것이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가 지니고 있는 속뜻을 배운다는 뜻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머리를 써의 속뜻을 알지 못하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 물론, 똑같이 속뜻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속뜻을 아는 사람이 보기에 머리를 써했는데 머리를 갖다 대는 행동을 하면 얼마나 웃기겠나. 언어를 잘 이해한다는 것은 성숙해졌다는 뜻인데, 성숙한 사람은 언어가 말하고 있는 속뜻을 알기 때문에, 그 속뜻을 파악해서 행동하고 말한다.

 

이런 웃지못할 일이 신앙의 세계에서 아주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성경의 언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위에서 본 것처럼 네 살짜리의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 발생한다. 유명한 언어학자인 소쉬르나 비트겐슈타인 등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언어는 어떠한 실체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언어 능력은 하루 아침에 길러지는 게 아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언어 능력의 성숙과 병행하여 일어난다. 언어, 말의 힘은 곧 존재의 힘이다.

 

가령,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11:6-8). 어떤 이는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무슨 사자 풀 뜯어 먹는 소리냐.’ 또 다른 이는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자신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니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독사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 미국의 어떠한 기독교 신자가 믿는 자에게는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며, 독사를 가지고 놀았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독사에 물려 죽었다. 2014217일자 연합뉴스에 실린 기사다.

 

미국에서 '뱀 목사'로 불리는 제이미 쿠츠 목사가 독사에 물려 사망하는 변을 당했다.

16(현지시간) CNN AP 통신에 따르면 쿠츠 목사는 전날 오후 830분께 자신이 목회하는 켄터키주 교회에서 뱀에 물린 채 귀가했으며 오후 10시께 결국 집에서 절명했다.

 

지역 경찰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대가 쿠츠 목사에게 병원에 가자고 설득했으나 거부당했다고 밝혔다.

 

뱀 다루는 능력을 지닌 그는 일부의 성경 해석을 토대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믿음만 있으면 독사에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이른바 뱀 구원설을 신봉해왔다.

 

그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전문채널인 내셔널지오그래픽에도 출연해 방울뱀 등 온갖 종류의 독사를 다루는 시범을 보인 바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웹사이트에서 쿠츠 목사에 대해 "뱀에 물려 자기 손가락의 절반을 잃고 다른 사람들이 예배 중에 죽어가는 것을 보더라도 뱀들을 계속 움켜쥐면서 성령의 믿음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뱀 물림 등 신비주의 현상을 이용한 개신교의 전도 행위는 미국의 대부분 주에서 법으로 금지돼 있으나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켄터키주 등 중부 내륙과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쿠츠 목사는 2008년 뱀 74마리를 집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체포됐으며 지난해 2월에는 독사를 소지한 채 테네시주에 들어갔다가 체포돼 1년 보호관찰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테네시주는 1947년 교회에서 5명이 뱀에 물려 사망하자 뱀을 이용한 목회활동을 금지했다고 CNN은 전했다.

 

jahn@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4/02/17 06:53 송고

 

언어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철학자는 언어의 중요성을 가장 강조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하이데거이다. 그가 한 이 말을 너무도 유명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언어는 어떠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언어를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세계를 살게 되는 것이다. 그 세계를 매트릭스라고 한다. ‘매트릭스자궁이라는 뜻이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매트릭스 Matrix>라는 영화를 보면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하여 만든 영화다. 배경은 2199년이다.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인해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자 기계는 인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인간과 전쟁을 벌인다. 누가 셀까? 당연히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가 세다. 그래서 인간은 점점 삶의 자리를 잃어간다. 기계에게는 단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원은 태양으로부터 왔다. 그래서 인간들은 생각했다. 태양을 차단하면 기계들은 힘을 잃을 것이라고. 인간들은 핵을 터뜨려 핵구름으로 하늘 덮었다. 성공적이었다. 기계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기계들은 똑똑했다. 어떻게 에너지를 얻으면 좋을지 생각했고, 그들은 그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인간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기계들은 매트릭스라는 인공자궁을 만든다. 그리고 인간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인간들을 매트릭스에 집어넣는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한 번에 쪽 빨아 쓰는 게 아니라, 매트릭스에 집어넣은 뒤, 그 인간이 거기에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아있도록 만든다. 기계들은 매트릭스에 갇힌 인간이 나는 지금 매트릭스에 갇힌 게 아니라 나의 인생을 살고 있어라고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매트릭스에 들어간 인간은 그 프로그램을 뇌에 접속하게 되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일상을 사는 것처럼 산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친구랑 놀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가정도 꾸미고, 아픔도 당하고, 그러다 죽는 인생의 사이클이 매트릭스 안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매트릭스 안에서 인간들은 현실의 세계와 똑 같은 아니 그보다 더 현실적인(이것을 하이퍼 현실이라고 한다) 인생을 누린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매트릭스 안에서 지금 누리고 있는 현실이 인생인가?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 매트릭스에 웅크리고 가만히 갇혀 인공지능 기계가 마련해준 프로그램에 의해서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고 싶은가? 아니면, 그 매트릭스를 박차고 나와 진짜 현실, 어렵고 힘들지만, 나의 인생을 자유롭게 살고 싶은가?

 

<매트릭스> 영화의 주인공 니오(Neo)’는 매트릭스 안에서 그게 마치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꾼다. 자신의 인생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것은 인공지능 기계들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버그. 그때 출동하는 요원이 있다. 그게 그 유명한 스미스 요원이다. 그는 버그가 발생할 때마다 가상현실에 나타나서 그 버그를 바로 잡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니오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현실에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온 동지들의 도움으로 매트릭스에서 깨어난다. 그 장면은 너무도 중요해서, 한 번 같이 보는 것이 좋다



성경은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것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잊는다. 언어는 어떠한 현실을 담아내고 가리키고 있는데, 마치 그 언어 자체가 현실인양 잘못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그 언어에 갇혀, 매트릭스에 들어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어떠한 사악한 무리들은 그 성경의 언어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기 위하여 매트릭스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현혹시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한 순진무구한 사람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그들의 사악함과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폭력의 희생자인지도 모른 체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성경공부를 통해 사람들을 매트릭스 안에 가두어 버린다. 성경공부하는 이들은 자신이 매트릭스 안에 갇힌 줄도 모르고 즐거워한다. 안타까운 일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장에 많이 발생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 없다. 성경공부 해야 한다. 그러나, 매트릭스 안에 가두는 성경공부가 아니라, 매트릭스 밖으로 탈출하는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내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은 성경공부의 방향이다. 여러분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지만, 나에게 니오가 매트릭스에서 깨어나오는 것과 같은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매트릭스에게서 빠져나오고 나니, 다시는 매트릭스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트릭스에 갇혀 가상현실/가상신앙을 하고 있는, 노예와 같이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느꼈다. 나랑 같이 성경공부 해 보신 분들은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것이다.)

 

본문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장면이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이 고백이 있기 전,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그당시 성경연구하기 가장 적합한 장소로 꼽혔다. 요즘으로 따지면, 도서관인 것이다.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면, 메시아가 눈 앞에 나타나도 그를 알아볼 수 없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열심을 다해 성경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오는 성경공부, 나를 넘어서는 성경공부는 무엇인지 살짝 설명해 보겠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보는 히브리성경과 우리 기독교인들이 보는 구약성경은 약간 다르다. 내용이 다른 게 아니라, 그 배치가 다르다. 이것을 간과하면 아주 큰 것을 놓치게 된다.

 

유대인들의 성경(Tanak/타나크)은 토라(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시편, 욥기, 잠언, 룻기, 아가서, 전도서, 예레미야애가, 에스더서, 에스라-느혜미야서, 다니엘서, 그리고 마지막에 역대기)로 되어 있다. 토라로 시작한 성경은 역대기로 끝난다. 성문서의 마지막 역대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의 이상적인 회복의 모습을 담고 있다(김근주,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90).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읽는 성경은 그 배치가 확연히 다르다. 내용이 다른 게 아니다. 배치가 다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은 오경, 역사서, 시가서, 그리고 마지막에 예언서가 나온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처음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읽지 않았고,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읽었다. 그것이 그 유명한 ‘70인역(septuaginta/셉투아진타)’이다.

 

히브리인들의 구약성경은 그 자체로 안정된 구조를 지닌다. 역대기가 마지막에 오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성경이 끝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구약성경은 아주 불안정하게 끝난다. 성경의 마지막이 예언서들로 배열되어 있고, “말씀을 떠난 현실에 대한 강력한 심판 선포와 더불어 다가올 새롭고도 참된 회복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김근주, 91). 왜 그럴까? 왜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의 배열을 이렇게 불완전하게 마치도록 해 놓았을까? 누구 때문에? 바로, 이제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때문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은 필연적으로 신약성경을 통해 성취되고 실현된다”(김근주, 91).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구약의 성취이시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구약의 마지막에 놓인 예언서들이 전하는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김근주, 92).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를 구약성경을 통해서 알지 못하고, 그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간다는 기독교의 클리쉐(진부한 구호)만 반복하고 만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굉장히 미흡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매트릭스 안에 갇혀, 프로그램밍된 삶을 살면서 평안하다 하며, 자기를 잃어버린 삶, 노예 같은 삶을 살 것인가? (그들이 주는 고깃국과 밥을 먹으며 노예로 살것인가) 아니면, 매트릭스를 박차고 나와, 노예 같은 삶을 사는 이들에게 자유를 건네주기 위해서 투쟁하는 삶,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삶을 살 것인가? (광야 같은 삶이지만, 주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것을 믿고, 바라며,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우리가 성경을 진지하게 봐야 하는 이유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매트릭스에 갇혀 노예 같은 삶을 살지 않고, 매트릭스를 깨뜨리고 나와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하여

 

2) 인생/신앙의 여정 가운데, 만나게 되는 알 수 없는 불행한 일들에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를 경험하여,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3) 지금 하나님께서 복 내려 주시고 계신데, 그것을 모르고, 불평하며 눈 앞에 놓인 복을 차버리거나, 하나님의 선교를 가로막는 어리석고 불행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하여

 

지금도 여전히, 주님께서는 나다나엘과 같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찾으신다. 우리 함께 무과화나무 아래로 가자.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자. 그래서 매트릭스 안에 갇히지 말고, 매트릭스 안에서 빠져 나와, 자유를 누리며, 광야 같은 삶일지라도 거기에 임하시는 깊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그분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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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