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4'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1.03.24 예수 그리스도를 ‘승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2. 2021.03.24 나를 따르라
  3. 2021.03.24 창과 방패의 존재론
기도문2021. 3. 24. 01:52

예수 그리스도를승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2:20-26)

 

주님,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어떠한 모양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호가호위하는 것처럼

주님의 권세를 빌리기 위하여 졸졸 따르고 있기만 한 것 아닙니까?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존재가 변화하는 것이요,

주님의 존재 자체를 계승하는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은 주님의 권세를 우리에게 승계하게 하시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처럼 영광 받을 것이지만 동시에 필연적으로 고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 우리의 마음에 내키는 일,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일만 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 모든 일,

비록 그것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순종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승계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이요,

고난을 당하여도, 비록 죽임을 당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위에 굳세게 하시고,

용기와 자부심을 가지고 이 타락한 세상에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며 살아가는

주님 나라의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나를 따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시며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12:20-26)

 

여기서 ‘명절’은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며 예배하고 감사하는 절기다. 인류에게 ‘기억’은 모든 문화의 근간이다. 기억이 없다면 인간도 없다. 기억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사람이 아닐 정도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치매다. 그런 병리적 현상 말고, 인격적 현상으로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짐승’이 된다. 누군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짐승 만도 못한 놈!’이라 하며 욕한다.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치매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이다. 인류문화에서 ‘쉼(일하지 않음)’은 언제나 하나님(신)과 관련 있었다. 우리가 쉰다는 것은 단순히 일 하느라 힘든 육체를 쉬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육체의 피곤함을 회복하기 위하여 쉰다. 그리고 쉼이 끝난 뒤 회복된 몸으로 다시 일하러 나간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쉼을 허락하는 이유는 우리의 육체를 최상의 조건으로 만들어 우리의 노동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서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쉴 때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서, 또는 누구를 위해서 쉬는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쉬면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육체를 쉬게 해서 다시 일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쉰다면,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일 또는 돈, 또는 나의 고용주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 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주신 쉼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하여 쉰다.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에 유대인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헬라인들, 즉 이방인들이 예배하러 올라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원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빌립을 소개할 때, ‘갈릴리 뱃새다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방인들이 여러 사람 중에 빌립에게 찾아가 예수님 만나기를 청한 이유는 빌립이 갈릴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천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성경을 통해 ‘갈릴리’를 접하는 우리들은 ‘갈릴리’라는 말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갈릴리’라는 말을 들으면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던 장면을 떠올리며 낭만적이고 은혜로운 마음으로 이 찬양을 부른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지순례 가서 갈릴리 바닷가에 들러 베드로 고기를 먹어봐야 지라는 충동에 휩싸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전혀 아니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갈릴리는 유대인들에게 ‘문제적 지역’이었다. 예루살렘에 살던 주류 유대이들은 갈릴리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천대했다.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면 아주 재밌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의 이야기가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펼쳤다. 팔도에서 모여든 애국자들은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꾸리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길 원했다. 그 중에 도산 안창호도 있었다. 그런데, 안창호는 임시정부 내에서 신임이 가장 두터웠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수장 자리를 맡지 않았다. 그는 임시정부의 수장 자리를 (우남) 이승만에게 늘 양보했다. 그 이유는 안창호는 그 당시에 한국인들에게 천대받던 관서지방(평양) 출신이었고, 이승만은 왕족의 후손으로 주류세력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안창호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맡으면 사회통합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하며 그 직을 이승만이 맡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방인들이 주류세력이 아닌 갈릴리 출신 빌립에게 예수님 만나기를 청한 사건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갈릴리 출신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 제자들과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이 찻잔의 폭풍을 벗어나 이스라엘 전역의 주류 운동으로 파급효과가 커졌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갈릴리 출신이 아닌 사람은 딱 한 사람, 가룟 유다 뿐이었다. 가룟 유다는 그의 이름이 일러주고 있듯이, 가룟 출신인데, 가룟은 예루살렘 남단의 도시였다. 한국으로 따지면 분당쯤 되지 않을까 싶다. 즉, 가룟 유다는 다른 열 한 제자와는 달리 식자층에 중산층에 주류층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가 회계를 맡아보기도 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중에 가룟 유다가 예루살렘의 주류 권력층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도 한 것이다. (서로 말이 통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헬라인들(이방인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또는 갈릴리 시골 촌뜨기들의 운동)에 관심을 가진 이 시점을 ‘하나님의 때’로 분별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는지에 대한 기사는 없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만남성사의 여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데, 헬라인들의 요청을 빌립에게 전해들은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말씀을 하신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도 ‘영광’이라는 맥락이랑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래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니리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4-26절).

 

멈춰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주옥 같이 심오한 말씀이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말씀을 하신 후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영광과 수난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이다. 영광과 고난은 이질적인 것이다. 우리는 영광을 받고 싶어하지 고난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영광을 받으려고 일부러 고난 받는 사람은 없다. 영광 받으려고 일부러 고난 받는 사람이 받는 영광은 동생 흥부처럼 부자가 되기 원해 일부러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행위와 같이 야비하거나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영광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영광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질적인 영광과 고난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왜 영광과 고난은 이질적임에도 한 몸일수밖에 없는가?

 

영광과 고난의 그 신비로운 한 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 중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를 따르라”는 용어를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곳은 군사박물관이다. 조지아의 Fort Benning에는 Infantry Museum(보병 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의 입구에는 아주 멋진 조각이 세워져 있다. 한 군인이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전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이러한 조각들을 보며 애국심을 키운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면 “나를 따르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군인을 떠올리기 보다 예수님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따라 나선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크리스천(Christians):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기독교 신앙에 좀 더 깊이 들어간 사람은 “나를 따르라”는 용어를 들으면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저서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따르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영광과 고난의 관계를 좀더 깊이 이해하려면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를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라는 책의 독일어 원어는 <Nachfolge>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제자도(discipleship)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그는 기독교의 제자도를 한 마디로 일컬어 “Nachfolge”라고 말하고 있다. 독일어 ‘Nachfolge’는 영어로 ‘Succession’이다. 그리고 한국어로는 ‘계승/승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Succession에 대한 해설은 이렇다: the act or process of following and taking the place of someone or something else.

 

‘나를 따르라’는 말은 단순히 누군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승계(succession)’의 의미를 지난다. ‘호가호위’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여우가 호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치 호랑이의 권세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며 남의 권세로 위세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는 아주 흔하게,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를 이 정도 선에서 이해하고 만다. 예수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권세(이득, 또는 영광)를 누리려고 한다. 그런데, 본회퍼의 <Nachfolge>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나를 따르라”의 진정한 의미는 호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누리는 여우의 권세가 아니라, 호랑이의 권세를 계승하는 것 자체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계승한 사람이다. 본회퍼는 ‘Nachfolge(나를 따르라)’가 어떤 삶인지를 직접 보여주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뒤에 숨어서 ‘주님, 저 나쁜 히틀러를 무찔러 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했다. 이것을 신앙의 육체성이라고 하는데, 구원은 가짜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본회퍼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한 행동을 이렇게 신학적으로 볼 줄 알아야지, 다른 방식으로 보면 그저 그의 행동을 또다른 폭력으로 보일 뿐이다.

 

“나를 따르라”는 승계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예수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만다면,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영광은 모두 가짜가 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승계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처럼 고난당할 수밖에 없고, 또한 예수님이 영광 받으신 것처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왕의 자리를 승계한 사람은 왕이 누리는 권세와 영광도 누리지만, 왕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난도 함께 겪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광과 고난이 이절적인 것이지만 한 몸일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힘든 일, 어려운 일은 하기 싫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할래. 이럴 수 없다.

 

“나를 따르라!”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호가호위의 여우처럼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승계(succession. Nachfolge)한 사람인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승계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생명을 기꺼이 예수님처럼 내어놓아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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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창과 방패의 존재론]

 

RO(Radical Orthodoxy/급진적 정통주의)에 의하면, 존 스코투스에 의해서 발생한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피조물도 존재한다는 주장. 이 주장에 의하여 피조물은 존재의 자율성을 얻는다. 즉, 피조물은 창조주에 기대지 않고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을 통하여 근대의 자율적 주체가 탄생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율적 주체(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무성(허무/nothingness)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무주의(nihilism)은 생명을 축소시키고 삶의 의미를 빼앗아 인간을 평면에 가두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계몽주의의 기획은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에게서 발흥한 '존재의 일의성'을 밀어부쳐 인간 존재에게 신적인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이 신의 간섭이나 신에 대한 의존 없이 '자율적으로' 삶을 구축해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자율적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와 자율적 이성(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부여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RO는 존재의 일의성에 근거한 근대(modernity)가 허무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비판하며,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의 의존성을 인정하는 참여의 형이상학(participatory metaphysics)을 주장한다. 존재의 일의성과는 달리 참여의 존재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신에게 의존되어(suspended)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여(participation)'은 존재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국 RO가 주장하는 참여의 존재론은 플라톤 철학으로의 귀환이다. 화이트헤드가 일찍이 말했듯이,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였다. 다시 말해,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에 동의하든지, 아니면 플라톤 철학을 반대하고 극복하든지, 이 둘 중 하나의 작업이었다.

 

플라톤 철학을 극렬하게 반대한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의 대중화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플라톤 철학이 서양 지성사, 또는 문화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표현했는데, 결국 니체가 하고 싶었던 작업은 플라톤 철학과 그 철학의 대중화라고 생각되는 기독교를 동시에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서양철학의 존재론(ontology)를 보면서, '모순'이라는 말을 생성한 '창과 방패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창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두 손에 들고 동시에 장사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 서양철학사는 마치 그와 같이 보였다.

 

인간 존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플라톤 철학이 말하고,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인가.

 

니체는 인간이 가진 자율적 이성을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로 표현하며, 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또는 신에게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또는 신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에게 의지할 수 없는 인간 존재를 말하며, 자율적으로 존재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안되었지만, 결국 허무에 이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존재론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 존재론에 대한 전제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그 다음 단추를 아무리 정교하게 끼워도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RO가 귀환시키려 하는 플라톤 철학은 '참여의 존재론'을 통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신에 대한 모든 피조물의 의존성을 설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철학적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플라톤 철학이 주장했던 '존재의 동일성(모든 존재는 존재를 넘어서는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개념은 언제든지 폭력이나 억압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오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론적 일의성과 참여의 존재론은 창과 방패 같은 싸움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기독교가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살육을 저질렀는가. 그런 측면에서 신 없이, 인간들끼리 자율적인 나라를 세워보겠다는 기획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의 기획은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들여다볼 때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다. 신을 배제한 자율적 이성, 자율적 주체가 만든 이 세상은 말할 수 없는, 끔찍한 폭력과 배제가 발생하고 있고, 생명이 형편없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여의 존재론에 바탕이 되는 플라톤 철학의 귀환과 평면적으로 생명을 축소시킨 근대의 존재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적 귀환은 불가피해 보인다. 다만, 이러한 작업을 해 나감에 있어, 근대 이전에 플라톤 철학과 그를 바탕으로 발전한 기독교 신학/체제가 저질렀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방식으로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공적 귀환을 기획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RO의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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