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1. 3. 29. 18:39

미움을 몰아내고 사랑의 역사를 이루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11:1-10)

 

주 하나님, 간절히 바랍니다.

미움이 물러가고 사랑이 오게 하옵소서.

미움으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서 죽어야만 했는지를 묵상하며

아버지의 집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해지는 악한 일들을 보고

비겁하게 도망치거나

사악하게 악한 이들의 편에 서거나

무관심하게 하지 마시고,

사랑의 아버지의 마음, 그 떨리는 심장을 몸에 지니고

악한 일들에 맞서 싸우게 하옵소서.

각종 혐오범죄와 악한 일들에 맞서 싸우다 죽은 이들을 기억합니다.

저들은 미움으로 역사를 만들어 가려 했으나

이들은 미움에 맞서 사랑으로 역사를 만들어 가려 했으니

그 사랑으로 만들어 가려고 한 그들의 역사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품에 안으사

부활의 영으로 위로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들,

주님께서 마신 잔을 받아 마시고

주님계서 받으신 세례를 받았으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양편에 함께 달리게 하시고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그 영광 중에 함께 부활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집,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우리에게 아버지 집에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랑과 정의를 가져다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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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29. 18:36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서 죽으셨나?

(마가복음 11:1-10)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가 미국 전역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산업은 총기산업이다. 나는 이 뉴스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미국 내에서도 아시안 커뮤니티는 별로 총기 구매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언론에서 조사한 총기 판매 통계를 보면, 20 퍼센트 정도의 아시안들이 총기를 처음 구매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아마 여러분들도 아시아 혐오 범죄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총기 구매에 대한 욕구가 증가했을 것이다.

 

불과 3년 전만해도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총기규제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위가 무색할 정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을 거치면서 미국인의 총기 구매율을 급증했고, 급기야 총기 구매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아시아인들도 총기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법은 멀고 총은 가깝기 때문이다. 혐오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법을 제정하여 시행하여도, 법이 직접적으로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총기 소지를 선택한다.

 

미얀마에서 들려오는 쿠데타 군부의 강경진압으로 인한 미얀마 시민들의 사망자 소식을 듣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가뜩이나 전세계가 바이러스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 미얀마 사태를 놓아두고 국제사회가 분열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일도 너무 힘들다. 우리는 매일 같이 촛불을 켤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던 것처럼,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가슴 찢어지게 외칠 수밖에 없다.

 

네 개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사역을 그리는 방식에서는 각각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 얼개는 같다. 예수님의 사역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길’, 또는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가신 길(또는 여행)의 시작은 갈릴리였고, 그 길(여행)의 끝은 예루살렘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삶 자체가 길을 걷는 것, 여행이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복음서의 처음 부분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시는 말씀처럼, 그 길을 따라 나서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길 가는 자의 삶, 여행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는 여행처럼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여행의 끝은 결국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일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길래, 예수님의 길은 끝, 여행의 끝은 예루살렘이었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우리의 삶의 길, 여행의 끝도 예루살렘일 수밖에 없는가? 예루살렘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천년을 이어온 거룩한 땅이었다. 그곳이 거룩한 땅인 이유는 그곳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단순한 신전이나 건물이 아니었다. 구약에 전개되고 있는 성전신학을 보면, 성전은 이 세상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세상의 중심. 세상의 배꼽. 옴팔로스라고 불린다. 그리스 신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의 중심이 어딘지 알고 싶었던 제우스가 독수리 두 마리를 다른 방향에서 날렸는데, 그 두 독수리가 만난 지점, 그곳이 바로 델포이였다. 그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델포이 신전이 세워져 있다. 그 세상의 배꼽은 인간이 신과 만나는 거룩한 장소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단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매개해 주는 곳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중심지였고, 순례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기쁨의 길이었다. 그들은 늘 그곳에 가는 것을 동경했다. 그러한 마음들이 시편 120편에서 134편에 아주 잘 담겨 있다. 그 중 우리에게 익숙한 시편 한 편만 보면 이렇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무주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로다

(시편 121편)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어떤 여행이었을까? 아주 따스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집에 가는 길이었다.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 집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멋지고 좋은 곳에 여행을 갔다 할지라도, 결국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집이다. 우리는 늘 그 길을, 그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여행.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서 ‘내 아버지(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가 계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계신 곳, 예루살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버지가 계셔야 할 집에 강도가 든 것이다. 예루살렘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기에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생명을 지켜주며,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야 하는 곳인데, 불의한 자들(강도 같은 자들)이 권세를 쥐고 가족들을 억압하고 못살게 굴고 있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소위 성전 정화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자.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마가복음 11:15-18)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간 이유와 예루살렘에서 죽은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예루살렘은 ‘내 아버지가 계신’ 집이기 때문에 간 것이고, 그곳에서 죽은 이유는 아버지 집을 차지하고 온갖 나쁜 일을 벌이고 있는 강도 같은 세력들하고 싸우다가 죽은 것이다. 예루살렘, 아버지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정의와 사랑에 힘써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정의와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이 인간의 불의/죄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 고발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미가서와 이사야서 두 군데만 보자.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며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미가 3:1-3)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이사야 1:21, 23)

 

예루살렘, 옴팔로스, 우주의 배꼽, 하나님 아버지의 집. 이곳에서 발생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정의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고아를 신원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다. 한마디로, 서로의 생명을 아껴주고, 서로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며, 서로의 삶을 보듬어주는 일이 있어야 한다. 왜? 그곳은 아버지의 집이니까. 예루살렘이니까. 그런데, 집에 간 예수님은 기대와는 달리 정반대의 상황을 목격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다. 1) 도망가든지, 2) 집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과 한통속이 되든지, 아니면 3) 그들과 맞서 싸우든지.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집(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면서 계속해서 물었다. “어떻게 할꺼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여기서, 잔과 세례는 죽음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정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고, 예수님의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좌우편에 강도들 대신에 야고보와 요한이 달렸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 그렇기에 본인의 집이기도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지금 강도가 불의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 강도들 때문에 가족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도망을 치거나, 그 강도들과 연합하여 가족들을 헤칠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족이 아니거나 가족으로서의 자격이 없거나,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즉, 아버지의 집, 본인의 집에 도착하여 행하신 일은 아버지 집에 마땅히 있어야 할 정의와 사랑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지를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키면서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이다. 사도행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 모여 있으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정의와 사랑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위에서 선지자들이 비난한 예루살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소개된다. (예루살렘의 회복)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3-47)

 

초대 교부 중 한 명인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소개할 때 그들의 합리적 논증의 힘을 보라고 외친 게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를 보라!”고 했다. 그들이 얼마나 미워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라는 이 말, 너무나도 마음에 사무치는 말이다. 지금 세상을 보면, 또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 말이 거꾸로 들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이 얼마나 서로 미워하는가를 보라!”

 

“Hate Crime!” 미워함의 범죄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미움이 가득한 세상). 2천년전 예루살렘, 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예수가 목격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Hate Crime’(미움 자체)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의 삶 속에 가져다 주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Hate Crime’을 발생시키는 세력들과 싸우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서로 미워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공동체를 예루살렘, 아버지의 집에서부터 다시 세워나갈 것을 부탁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우리들, 우리는 어떠한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으며,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Hate Crime이 판을 치고 있으니까,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가? 또는 본인을 지키기 위하여 총기 구매를 고려하고 있는가?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다른 곳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집이고, 나의 집이라는 생각, 우리의 이웃들이 그냥 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실제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인 것을 고백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라와 민족이 구분되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이 세상, 우리의 집에서, 우리들의 형제자매들, 우리 가족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불의한 일에 대하여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얼마나 서로 미워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는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가. 우리의 사랑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우리의 사랑을 보고 사람들이 우리처럼 사랑하기 원하는가. 우리는 사랑의 히스토리(역사)를 써나가고 있는가.

 

Hate Crime의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리고 Hate Crime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한 사람으로서, Hate Crime에 맞서 싸우며,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 어려운 시대를 건너기를 다짐한다. (혹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끝까지 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것이다.) 우리 서로 사랑하며, 함께 그 길을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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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국가]

 

근대국가(Modern State)는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 근대성은 자율의 영역을 확보하여 신 없이 인간이 스스로의 창조성을 통해 스스로 존재하는 '신 같은 존재'로의 고양을 추구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근대가 주조한 '주권'개념인데, 근대성이 인간에게 선사한 '주권'은 '절대주권'이다. 즉, 신(God)도 건들지 못하는 주권이다.

 

이 엄청난 파워(power)는 '사유재산(private property)'라는 개념으로 현실화된다. 눈에 보이는 사물(자연)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근대성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신적인 지위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근대국가이다. 근대국가는 하나님의 신적인 힘, 또는 신 자체로서 개인이 자율적인 이성을 사용하여 자율적인 삶을 향유해 나가는데 있어 일종의 보증으로 작용한다. 그야말로 인간은 국가의 은혜를 통해 삶을 향유한다.

 

이제 현실에서 '국가'를 능가하는 '힘/권세'는 없다. 민족국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한 민족이 동일하게 하나의 신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동일하게 섬기는 현상이 바로 민족국가이다. 근대성의 종교적 기능은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애국'에서 드러난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은 국가를 향한 종교적 순교이다. 신앙의 극단(마지막 끝)이 순교이듯이, 국가에 대한 신앙의 극단도 순교(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준 열사의 동상엔 이런 문구도 새겨지는 것이다.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 목숨을 바친 애국자는 이제 국가에서 성인으로 추앙을 받고, 그의 인격과 행위는 신성화된다. 하나의 윤리가 된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국가적 성인을 욕보이는 자가 있다면, 그는 국가에 의해 또는 그 국민에 의해 처형당한다.

 

신이 된 국가는 자신의 은총을 국민에게 베풀기 위하여 각종 사회적인 제도(교회와 같은 역할을 하는)를 세운다.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경찰과 군대 제도를 만들고,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하여 사법체제를 만든다. 교육시키기 위하여 학교제도를 만들고, 삶의 번영을 위하여 경제제도를 세운다. 특별히, 요즘 국가는 성례전적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복지제도'를 세운다. 공공복지 제도는 보이지 않는 국가(신)의 보이는 은총(복지혜택)이다. 공무원 또는 사회복지사를 통해 성례전을 받는 국민은 기뻐하고, 은총을 베푼 국가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국가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근대성이 만들어낸 국가라는 신, 이제 우리는 이 신(God)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며(국가가 내면화된 상태), 국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 세력과 기꺼이 맞서 싸운다. 우리의 생명은 그렇게 소모되어 간다. 그러나, 국가라는 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은 결국 통증 없이 죽게 만들어주는 '진통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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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3. 23. 09:52

예수 그리스도를승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2:20-26)

 

주님,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어떠한 모양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호가호위하는 것처럼

주님의 권세를 빌리기 위하여 졸졸 따르고 있기만 한 것 아닙니까?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존재가 변화하는 것이요,

주님의 존재 자체를 계승하는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은 주님의 권세를 우리에게 승계하게 하시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처럼 영광 받을 것이지만 동시에 필연적으로 고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 우리의 마음에 내키는 일,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일만 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 모든 일,

비록 그것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순종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승계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이요,

고난을 당하여도, 비록 죽임을 당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위에 굳세게 하시고,

용기와 자부심을 가지고 이 타락한 세상에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며 살아가는

주님 나라의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나를 따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시며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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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12:20-26)

 

여기서 ‘명절’은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며 예배하고 감사하는 절기다. 인류에게 ‘기억’은 모든 문화의 근간이다. 기억이 없다면 인간도 없다. 기억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사람이 아닐 정도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치매다. 그런 병리적 현상 말고, 인격적 현상으로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짐승’이 된다. 누군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짐승 만도 못한 놈!’이라 하며 욕한다.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치매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이다. 인류문화에서 ‘쉼(일하지 않음)’은 언제나 하나님(신)과 관련 있었다. 우리가 쉰다는 것은 단순히 일 하느라 힘든 육체를 쉬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육체의 피곤함을 회복하기 위하여 쉰다. 그리고 쉼이 끝난 뒤 회복된 몸으로 다시 일하러 나간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쉼을 허락하는 이유는 우리의 육체를 최상의 조건으로 만들어 우리의 노동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서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쉴 때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서, 또는 누구를 위해서 쉬는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쉬면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육체를 쉬게 해서 다시 일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쉰다면,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일 또는 돈, 또는 나의 고용주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 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주신 쉼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하여 쉰다.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에 유대인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헬라인들, 즉 이방인들이 예배하러 올라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원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빌립을 소개할 때, ‘갈릴리 뱃새다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방인들이 여러 사람 중에 빌립에게 찾아가 예수님 만나기를 청한 이유는 빌립이 갈릴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천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성경을 통해 ‘갈릴리’를 접하는 우리들은 ‘갈릴리’라는 말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갈릴리’라는 말을 들으면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던 장면을 떠올리며 낭만적이고 은혜로운 마음으로 이 찬양을 부른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지순례 가서 갈릴리 바닷가에 들러 베드로 고기를 먹어봐야 지라는 충동에 휩싸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전혀 아니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갈릴리는 유대인들에게 ‘문제적 지역’이었다. 예루살렘에 살던 주류 유대이들은 갈릴리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천대했다.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면 아주 재밌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의 이야기가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펼쳤다. 팔도에서 모여든 애국자들은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꾸리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길 원했다. 그 중에 도산 안창호도 있었다. 그런데, 안창호는 임시정부 내에서 신임이 가장 두터웠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수장 자리를 맡지 않았다. 그는 임시정부의 수장 자리를 (우남) 이승만에게 늘 양보했다. 그 이유는 안창호는 그 당시에 한국인들에게 천대받던 관서지방(평양) 출신이었고, 이승만은 왕족의 후손으로 주류세력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안창호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맡으면 사회통합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하며 그 직을 이승만이 맡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방인들이 주류세력이 아닌 갈릴리 출신 빌립에게 예수님 만나기를 청한 사건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갈릴리 출신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 제자들과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이 찻잔의 폭풍을 벗어나 이스라엘 전역의 주류 운동으로 파급효과가 커졌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갈릴리 출신이 아닌 사람은 딱 한 사람, 가룟 유다 뿐이었다. 가룟 유다는 그의 이름이 일러주고 있듯이, 가룟 출신인데, 가룟은 예루살렘 남단의 도시였다. 한국으로 따지면 분당쯤 되지 않을까 싶다. 즉, 가룟 유다는 다른 열 한 제자와는 달리 식자층에 중산층에 주류층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가 회계를 맡아보기도 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중에 가룟 유다가 예루살렘의 주류 권력층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도 한 것이다. (서로 말이 통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헬라인들(이방인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또는 갈릴리 시골 촌뜨기들의 운동)에 관심을 가진 이 시점을 ‘하나님의 때’로 분별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는지에 대한 기사는 없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만남성사의 여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데, 헬라인들의 요청을 빌립에게 전해들은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말씀을 하신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도 ‘영광’이라는 맥락이랑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래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니리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4-26절).

 

멈춰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주옥 같이 심오한 말씀이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말씀을 하신 후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영광과 수난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이다. 영광과 고난은 이질적인 것이다. 우리는 영광을 받고 싶어하지 고난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영광을 받으려고 일부러 고난 받는 사람은 없다. 영광 받으려고 일부러 고난 받는 사람이 받는 영광은 동생 흥부처럼 부자가 되기 원해 일부러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행위와 같이 야비하거나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영광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영광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질적인 영광과 고난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왜 영광과 고난은 이질적임에도 한 몸일수밖에 없는가?

 

영광과 고난의 그 신비로운 한 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 중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를 따르라”는 용어를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곳은 군사박물관이다. 조지아의 Fort Benning에는 Infantry Museum(보병 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의 입구에는 아주 멋진 조각이 세워져 있다. 한 군인이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전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이러한 조각들을 보며 애국심을 키운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면 “나를 따르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군인을 떠올리기 보다 예수님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따라 나선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크리스천(Christians):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기독교 신앙에 좀 더 깊이 들어간 사람은 “나를 따르라”는 용어를 들으면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저서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따르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영광과 고난의 관계를 좀더 깊이 이해하려면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를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라는 책의 독일어 원어는 <Nachfolge>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제자도(discipleship)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그는 기독교의 제자도를 한 마디로 일컬어 “Nachfolge”라고 말하고 있다. 독일어 ‘Nachfolge’는 영어로 ‘Succession’이다. 그리고 한국어로는 ‘계승/승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Succession에 대한 해설은 이렇다: the act or process of following and taking the place of someone or something else.

 

‘나를 따르라’는 말은 단순히 누군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승계(succession)’의 의미를 지난다. ‘호가호위’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여우가 호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치 호랑이의 권세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며 남의 권세로 위세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는 아주 흔하게,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를 이 정도 선에서 이해하고 만다. 예수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권세(이득, 또는 영광)를 누리려고 한다. 그런데, 본회퍼의 <Nachfolge>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나를 따르라”의 진정한 의미는 호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누리는 여우의 권세가 아니라, 호랑이의 권세를 계승하는 것 자체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계승한 사람이다. 본회퍼는 ‘Nachfolge(나를 따르라)’가 어떤 삶인지를 직접 보여주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뒤에 숨어서 ‘주님, 저 나쁜 히틀러를 무찔러 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했다. 이것을 신앙의 육체성이라고 하는데, 구원은 가짜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본회퍼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한 행동을 이렇게 신학적으로 볼 줄 알아야지, 다른 방식으로 보면 그저 그의 행동을 또다른 폭력으로 보일 뿐이다.

 

“나를 따르라”는 승계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예수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만다면,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영광은 모두 가짜가 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승계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처럼 고난당할 수밖에 없고, 또한 예수님이 영광 받으신 것처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왕의 자리를 승계한 사람은 왕이 누리는 권세와 영광도 누리지만, 왕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난도 함께 겪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광과 고난이 이절적인 것이지만 한 몸일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힘든 일, 어려운 일은 하기 싫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할래. 이럴 수 없다.

 

“나를 따르라!”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호가호위의 여우처럼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승계(succession. Nachfolge)한 사람인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승계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생명을 기꺼이 예수님처럼 내어놓아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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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과 방패의 존재론]

 

RO(Radical Orthodoxy/급진적 정통주의)에 의하면, 존 스코투스에 의해서 발생한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피조물도 존재한다는 주장. 이 주장에 의하여 피조물은 존재의 자율성을 얻는다. 즉, 피조물은 창조주에 기대지 않고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을 통하여 근대의 자율적 주체가 탄생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율적 주체(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무성(허무/nothingness)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무주의(nihilism)은 생명을 축소시키고 삶의 의미를 빼앗아 인간을 평면에 가두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계몽주의의 기획은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에게서 발흥한 '존재의 일의성'을 밀어부쳐 인간 존재에게 신적인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이 신의 간섭이나 신에 대한 의존 없이 '자율적으로' 삶을 구축해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자율적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와 자율적 이성(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부여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RO는 존재의 일의성에 근거한 근대(modernity)가 허무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비판하며,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의 의존성을 인정하는 참여의 형이상학(participatory metaphysics)을 주장한다. 존재의 일의성과는 달리 참여의 존재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신에게 의존되어(suspended)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여(participation)'은 존재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국 RO가 주장하는 참여의 존재론은 플라톤 철학으로의 귀환이다. 화이트헤드가 일찍이 말했듯이,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였다. 다시 말해,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에 동의하든지, 아니면 플라톤 철학을 반대하고 극복하든지, 이 둘 중 하나의 작업이었다.

 

플라톤 철학을 극렬하게 반대한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의 대중화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플라톤 철학이 서양 지성사, 또는 문화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표현했는데, 결국 니체가 하고 싶었던 작업은 플라톤 철학과 그 철학의 대중화라고 생각되는 기독교를 동시에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서양철학의 존재론(ontology)를 보면서, '모순'이라는 말을 생성한 '창과 방패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창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두 손에 들고 동시에 장사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 서양철학사는 마치 그와 같이 보였다.

 

인간 존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플라톤 철학이 말하고,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인가.

 

니체는 인간이 가진 자율적 이성을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로 표현하며, 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또는 신에게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또는 신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에게 의지할 수 없는 인간 존재를 말하며, 자율적으로 존재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안되었지만, 결국 허무에 이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존재론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 존재론에 대한 전제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그 다음 단추를 아무리 정교하게 끼워도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RO가 귀환시키려 하는 플라톤 철학은 '참여의 존재론'을 통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신에 대한 모든 피조물의 의존성을 설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철학적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플라톤 철학이 주장했던 '존재의 동일성(모든 존재는 존재를 넘어서는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개념은 언제든지 폭력이나 억압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오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론적 일의성과 참여의 존재론은 창과 방패 같은 싸움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기독교가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살육을 저질렀는가. 그런 측면에서 신 없이, 인간들끼리 자율적인 나라를 세워보겠다는 기획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의 기획은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들여다볼 때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다. 신을 배제한 자율적 이성, 자율적 주체가 만든 이 세상은 말할 수 없는, 끔찍한 폭력과 배제가 발생하고 있고, 생명이 형편없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여의 존재론에 바탕이 되는 플라톤 철학의 귀환과 평면적으로 생명을 축소시킨 근대의 존재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적 귀환은 불가피해 보인다. 다만, 이러한 작업을 해 나감에 있어, 근대 이전에 플라톤 철학과 그를 바탕으로 발전한 기독교 신학/체제가 저질렀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방식으로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공적 귀환을 기획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RO의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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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詩論)2021. 3. 17. 14:09

[시론] 강성은의 시 ‘어떤 나라’

 

어떤 나라에서는

아무도 살지 않는데

날마다 조종(弔鐘)이 울렸다

(강성은의 시 ‘어떤 나라’ 부분,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에 수록)

 

시인이 펼쳐 놓는 ‘어떤 나라’는 마치 마르크 폴로의 여행기 같다. 시 속에 펼쳐진 여섯 나라의 풍경은 모두 각자의 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상하다, 이해가 안된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슬프다. 시인이 경험한 첫 번째 나라는 ‘청바지 입는 것이 금지된 나라’다. 거기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청바지를 밀수입하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바지를 입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은 막지 못하는 듯, “집집마다 옷장 깊은 곳에 청바지”가 숨겨져 있다. 두 번째 나라는 ‘부모가 늙으면 산에 버려야 하는 나라’다. 아들은 늙은 부모를 버리러 산에 올라간다. 아들은 부모를 버리러 가며 ‘새처럼 운다.’ 그러나, 늙은 부모를 산에 버릴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몸에 밴 늙은 냄새는 버릴 수 없었다.

 

세 번째 나라는 ‘음악 연주가 금지된 나라’다. 음악 연주가 금지되어 있는 까닭에 연주자들은 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피아니스트는 타이피스트로, 드러머는 대장장이로, 가수는 약장수로 직업을 바꾸었다. 그러나 음악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네 번째 나라는 ‘영토의 시작과 끝을 몰라 지도 제작이 불가능한 나라’다. 지도 제작이 불가능한 나라에 사는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처럼 혼란스러웠을까, 아니면 자유로웠을까.

 

다섯 번째 나라는 ‘죽는 것이 금지된 나라’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허용되는 것도 있었는데, ‘꿈 꾸는 것’과 ‘오래 잠을 자는 것’이다. 죽는 것이 금지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살다가 지루해지면 죽는 대신 오랜 잠에 빠져 그 안에서 꿈을 꾸면 되니까. 그러나 어쩐지, 이런 나라는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가 주연한 <매트릭스> 영화에 등장하는, 프로그래밍 된 나라 같아서 끔찍하다. 여섯 번째 나라는 ‘아무도 살지 않는데 날마다 조종이 울리는 나라’다. 아무도 살지는 않지만 조종이 울린다는 것은 이전에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그곳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으며, 사라져버린 그 사람들을 위한 조종이 울릴 뿐이다.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자. 여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시인에 의해 소개된 여섯 나라가 있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 가서 살고 싶은가. 아마도 우리는 우선 자신의 이해와 상충되지 않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평소 청바지를 입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사람은 청바지 입는 것이 금지된 나라를 택할 것이고, 음악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금지된 나라를 택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가령, 죽고 싶은데 죽을 수 없는 사람은 대신 깊은 잠을 허용하는 나라에게 가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 ‘어떤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나라는 시인이 제시한 여섯 개의 나라와 모습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방문한다면, 시인은 내가 사는 나라에서 무엇을 경험하며 신기해 할까? 나는 또 이런 상상을 해본다. 몇 세대가 지난 후, 어떤 시인이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하여 시를 쓴다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떤 문장으로 표현될까? 이런 문장이 아닐까? “어떤 나라에서는 인간들끼리 사랑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사랑을 나누다 발각되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돈을 사랑하는 것과 돈을 위해 살인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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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3. 15. 12:39

높이 들린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3:14-21)

 

구원의 주님,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주님,

우리는 십자가에 높이 달린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고,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구원 안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한순간도 삶을 포기할 수 없고,

한순간도 구원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진다 할지라도

십자가 위에 높이 들린 예수 그리스도를 잊지 말게 하시고,

일상 속에서 아무리 작은 구원이 발생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말게 하시고,

오직 구원이 십자가에 높이 들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것을 고백하며

구원을 끊임없이 간구하고

받은 구원에 끊임없이 감사하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구원받은 자로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힘입어

일상에서 부지런히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궁극적 구원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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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15. 12:36

높이 들린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3:14-21)

 

작년 12월 14일 첫 백신접종이 시작된 이래, 연일 뉴스는 백신접종 관련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WHO에서 팬데믹을 선언한 날(2020년 3월 11일) 이후 일년이 지나 그동안 바뀐 인류 역사의 풍경을 보면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중에서 언론사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사람 중, 5명에서 1명 꼴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은 고통에 휩싸이는 일과 같다. 그러므로, 지난 일년 동안 지구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이 발생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실, 뉴스 기사는 고통받은 이들에 대하여 숫자적 통계만 낼 뿐이지, 그들이 경험한 고통을 직접 보여주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물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 고통 지수를 100으로 설정해 놓고, 이번 팬데믹을 통해 많은 이들이 경험한 고통을 95정도로 표현한들, 그 고통의 숫자가 고통 당하는 이들의 실제 고통을 전혀 전달해 주지 않는다. 고통은 통계가 아니고 계량화할 수 없는(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이고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범죄도 결국 팬데믹 동안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표출이다. 팬데믹 동안 이래저래 억압된 감정을 나쁜 방식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서, 민수기 21장에 소개되고 있는 ‘불뱀 사건’을 떠올려 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상할 때마다 불평과 불만을 쏟아 놓으며 ‘반출애굽 주제(anti-exodus motif)’를 꺼내 들었다. 불뱀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야 길을 걷는 것이 가뜩이나 험하고 힘든데, 에돔 땅을 우회해서 갈 생각을 하려고 하니 그들의 마음이 상했다.

 

마음이 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어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한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민 21:5).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칭하는 것은 ‘만나’이다. 광야에서 굶지 않고 만나를 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하찮은 것이라 폄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비난한다.

 

팬데믹 기간 동안 혐오 범죄를 비롯해 각종 범죄를 범하는 이들의 마음이 이런 것이다. 미국에서, 거의 3천만명 되는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53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팬데믹 가운데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인데, 죽지 않거나 병원에 누워 있는 게 아닌,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혐오 범죄를 일으킨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불경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죽은 자가 그렇게 많고, 병원 신세를 지는 자가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풍경을 TV를 통해 연일 보는데도 불구하고, 혐오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만나를 하찮게 여겼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불경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 팬데믹 시대에 병원 신세 안 지고 이렇게 건강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 시디에 이렇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죽은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몸이 조금이라도 더 성하거든,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고통을 헛된 것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혐오 범죄’ 같은 죄악을 저지를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본문 말씀은 니고데모와 예수님 간의 대화 속에 담긴 말씀이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은 명백하게 위에서 언급한 민수기에 등장하는 ‘불뱀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민수기 21장의 불뱀 사건은 참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 놓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시고, 불뱀에게 물려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그에 대해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자, 하나님은 놋뱀을 장대에 달라 높이 세우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모두 불뱀에게 물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하신다.

 

이것은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굉장히 낯선 이야기이다. 누군가 성경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놓은 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고통받는 이들에게 그것을 쳐다보면 바이러스가 낫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을 정말로 믿고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놋뱀을 쳐다보기 보다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 비난이 먼저 쏟아질 것이다. 사실, 이러한 연장선 상에서 우리 시대의 복음은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실제로 기독교는 숫자적으로 쇠퇴하고 있다(숫자적 쇠퇴가 곧 기독교 복음의 쇠퇴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기독교에 몸 담고 있는 우리들은 바보들인가.

 

놋뱀 사건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연결시키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들으면 이해가 되는 것 같다가도 이내 미궁에 빠지고 만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자기 자신의 수난을 이미 예고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에서 ‘들림(휩소오)’이라는 말은 ‘십자가에 들려지는 고난’을 말함과 동시에 ‘높이 들려 존귀하게 되는 영광’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들려야’ 하는가?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들림’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를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과학시대를 사는 이들을 오히려 실족시키는 미신을 생산해 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들림은 미신이 아니라 복음이다. 예수의 십자가 들림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들려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인간들의 ‘영생’을 위해서이다. 여기서 우리가 영생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생은 양적 구원이 아니라 질적 구원이라는 것이다. 영생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육신적 생명의 연장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생명의 질적 변화이다.

 

그 질적 변화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은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첫 이야기로 배치해 놓았다. 양적 구원은 물이 계속해서 불어나는 것을 말하겠지만, 질적 변화는 물이 계속해서 불어나는 게 아니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생명의 경험이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 자체를 ‘믿음’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들림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한다.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모세가 장대에 높이 매단 놋뱀(구리로 만든 뱀) 자체에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구원의 능력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믿음은 우리의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게 한다. 놋뱀 자체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하지만 놋뱀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작동하는지, 1972년 남미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얼라이브(1993년 상영)’를 통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우루과이의 한 대학 럭비 팀이 시합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다 안데스 산맥에서 추락한다. 승객과 승무원 포함해 45명이 타 있던 비행기의 추락으로 인해 16명만 살고 나머지 사람들은 죽는다. 식량이 얼마 없던 터라 눈 덮인 안데스 산맥 위에서 살아남은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사의 위기에서 그들은 72일을 버텼는데, 식량이 다 떨어지자 결국 죽은 이들의 살을 떼어서 먹었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는 안 나오는데, 나중에 생존자들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인육을 먹을 때 어떠한 마음가짐이었는지 밝히는데, 그들은 인육을 먹는 것을 하나의 성만찬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죽은 동료의 살이 예수님의 살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남미에는 가톨릭 신자가 많은데, 그들이 가진 가톨릭 신앙, 성만찬을 예배의 중심으로 두는 신앙이 동료의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거룩한 성만찬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들은 동료의 인육을 동료의 인육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살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실제로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믿음’인 것이다. 동료의 살을 예수의 살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인육을 먹을 수 있었겠는가. 먹었더라도 그들의 삶에 어떠한 감사가 있었겠는가. 그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동료의 살을 먹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평안한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를 통해 밝힌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감사하며 살았다.

 

지금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구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백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일 뉴스에서는 백신을 장대에 높이 매달아 백신을 맞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선전을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백신을 맞으면서 백신을 만든 제약회사가 구원해 준 것인 양 생각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백신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공짜로 투약해 주는 국가가 자신들을 구원해 준 것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구원 사건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알 것이다. 백신 접종을 앞두고 그 백신 접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놋뱀 사건과 십자가 사건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은 복되다. 백신 접종을 마친 후, 그것을 놋뱀 사건과 십자가 사건과 연결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얼바이브 영화의 실제 주인공들처럼 자신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구원 사건을 ‘성만찬’화 시킬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복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구원 행위는 모두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현실, 삶의 현장에서 구원을 바라거든 언제나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삶의 현실, 현장에서 구원을 경험했거든 그것이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믿음으로 살 뿐만 아니라, 은혜와 감사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또한 믿음으로 살고, 은혜와 감사 가운데 사는 사람은 본인이 행하는 모든 일이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헤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고 구원이 되는 일이 되도록 선하게 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절). 그러니 우리, 부지런히 구원을 간구하고, 또한, 부지런히 구원을 베푸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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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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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3. 8. 10:16

주님의 삶에 참여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빌 1:9-11)

 

주님,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자기 자신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에 개입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중독과 자살률이 높고, 갑질이 횡행하여 생명이 말도 못하게 파괴되어 고통의 비명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주님,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기도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우리가 우리의 삶에, 그리고 다른 이들의 삶에 섣부르게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가진 ‘참여’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고, 기도를 그저 우리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주님, 기도는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가장 거룩한 통로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 결국 나를 지키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가득한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만이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지키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거룩하고 강력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셔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염려와 걱정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기도로 승화시킬 수 있는 믿음에 도달하게 하셔서,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거룩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나는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이 거룩한 고백과 행동이 주일과 주일을 채우는 달란트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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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8. 10:14

나는 기도합니다

(빌립보서 1:9-11)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님께서는 천국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시며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를 하신다. 90년대부터 한국교회의 주일학교에 유행했던 행사 중 하나가 달란트 시장이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했고, 대학을 들어간 후부터는 주일학교 교사를 했는데, 주일학교 행사 중 달란트 시장 할 때 아이들이 가장 기뻐했다. 지금은 풍경이 좀 달라졌지만(지금 어른들 예배 드리는 시간에 주일학교도 하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 주일학교는 아침 9시에 있었다. 주일 아침 일찍 교회 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생님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그러나 그때는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아주 성실하게 주일학교에 참석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게으른 종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성실하게 주일학교에 참석한 아이들은 달란트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달란트 시장이 열리면 그동안 모은 달란트를 가지고 본인이 원하는 상품을 살 수 있었다. 달란트 시장에서 통용되는 ‘돈’은 달란트였다. 달란트가 없으면 달란트 시장에서 원하는 물건을 가질 수 없었다. 물론 동심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선생님들이 달란트가 부족한 아이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모든 게 풍성하게 넘쳐나는 시절을 살고 있어 주일학교에 와서 달란트를 받는 것에 대한 재미, 모은 달란트로 달란트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시대이지만, 성경의 달란트 비유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질문하고 있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서, 너무 먼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달란트 비유가 죽음 이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가 죽어서 천국 갈 때나 유효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먼 이야기로 생각하다 보니 비유에 대한 현실감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까운 현실의 이야기로 가져오면 된다. 그 방법은 달란트 비유를 매주일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면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매주일은 작은 부활절이니, 매주일은 우리에게 매순간 삶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해준다. 주일을 그렇게 사유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쉽게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는 매주일을 주님께서 달란트를 나눠 주시는 날임과 동시에 한 주간의 달란트를 셈하시는 날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낀다. 주일 예배를 마치면,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다.”(마 25:14-15).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셨다’고 하신 말씀이 중요하다. 신앙의 관건은 이것을 실제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 우리는 주일에 모여, 주님께 달란트를 받는다. 그 달란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기의 소유이다.

 

나는 매주일, 주일이 가까이 오면 긴장이 된다. 그리고 한 주를 돌아보게 된다. 특별히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그렇다. 내가 지난 주일예배를 마치고 주님께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썼는가?(은혜로 바꾸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몇 달란트를 받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본인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달란트를 통해 어떠한 열매를 맺었는지가 중요하다. 주님이 주신 달란트는 ‘땅’과 같다. 농부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땅을 일궜으면 땅은 그 소산을 낼 것이고, 그렇지 못했으면, 땅은 농부에게 소산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한 주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따라, 주님 앞에 나아오는 우리 두 손에 들린 열매의 양이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빈 손으로 오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기쁨의 열매를 들고 올 것이다.

 

나는 목회자로서, 개인적으로, 한 주간을 잘 보내지 못하면, 주일 설교를 하기 너무 힘들다. 설교자의 설교는 말이 아니라, 한 주간 동안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일군 달란트 열매여야 할 텐데, 한 주간을 잘 보내지 못하면 열매로서의 설교를 하지 못하고, 그냥 말로서의 설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혹시 열매로서의 설교를 하지 못하고, 말로서의 설교를 하면 그렇게 공허할 수 없다. 그 공허함에서 밀려오는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언제든지, 말의 설교가 아니라, 열매로서의 설교를 하기 위해, 아주 필사적으로, 다섯 달란트 남긴 종과 두 달란트 남긴 종처럼 한 주간을 잘 보내려고 노력한다. “주께서 내 입에 말씀을 넣어주시길!”

 

우리의 삶이 복되려면, 우리의 삶이 “악하고 게으른 종의 삶”이 되지 않으려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매주일, 주님께 달란트를 받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고, 주일에 주님께 나아올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지난 주 받은 달란트에 대한 열매를 들고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안다. 만약 우리가 일주일 동안 아무런 열매 없이 주님 앞에 나오면, 스스로 자책하게 된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당한 것처럼, 왠지 쓸쓸하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삶의 현실일 것이다.

 

무엇이든지 너무 멀리 생각하지 말고, 짧게 끊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한꺼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주일 예배를 드리며 주님께 수여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종들을 불러”, 주님께서 주일에 우리는 부르신다. 그리고, “자기 소유를 맡기”신다. 우리는 주님의 소유를 맡은 종으로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에, 주님의 삶에 참여(participation)하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의 삶은 주님의 삶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놓고 사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주님께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식으로 주님의 삶에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달란트 비유는 비유이다. 우리가 주일에 주님께 예배 드리면서 실제로 무슨 달란트를 받는 것은 아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종들은 실제로 금 다섯 달란트, 금 두 달란트, 금 한 달란트를 받지만, 우리는 교회를 나서며 어떤 실체가 있는, 어떤 금품을 손에 받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100달러짜리 돈 다발 다섯 묶음, 두 묶음, 한 묶음, 이렇게 실물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어떤 영적인 달란트를 받다 보니, 달란트를 받은 우리가 주님의 삶에 참여한다고 하는 게 무엇인지 손에 안 잡힌다.

 

영적인 달란트를 받은 우리가 주님의 삶에 참여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것은 기도생활이다. 기도생활을 보면, 참여를 알 수 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바울은 육신적으로 매여 있는 상태라 빌립보 교회에 직접 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빌립보 교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삶에 참여했다. 어떻게? 기도함으로!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도’로 시작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매어 있는 몸이라 기도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잘 세워져 나가는지 어떤지, 직접 가볼 수 없어 애타는 마음으로 교회를 ‘염려’했다. 그러나 그는 염려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염려를 기도로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삶을 놓아두고,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일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참으로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 하기 때문이다. 온통 들려오는 소리를 염려의 탄식 뿐이다. 직장에 대한 염려, 비즈니스에 대한 염려, 자식에 대한 염려, 가족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등등, 우리의 삶은 전방위적으로 염려에 놓여 있다. 그런데, 그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일은 좀처럼 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나친 염려 가운데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두 가지 삶의 방식에 빠져버린다. 하나는 무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몰두하는 것이다. 염려가 심하면, 사람은 ‘될 대로 되라’고 삶을 포기한다. 모든 것에 무관심해진다. 내 삶이 어떻게 되든, 다른 이들의 삶이 어떻게 되든, 아니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이 없다. 이렇게 세상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반대로, 염려가 지나치면, 너무 삶에 몰두하게 된다. 삶의 모든 것에 너무 집착해서, 자신의 삶에 엄습해 오는 염려를 어떻게 해서든 물리쳐 보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무관심과 몰두가 기도를 지나치게 만드는 변명거리들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주님의 삶에 참여한다는 것은 주님께 삶을 맡긴다는 것과 같다. 맡기는 자는 동시에 맡은 자가 되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염려가 많아서, 맡기지도 못하고 맡은 자가 되지도 못한다. 염려가 너무 많아 삶에 무관심한 자는 심지어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내 삶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염려가 너무 많아 삶에 너무 몰두하는 자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생명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필요 없다. 기도하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의 삶에 있는 염려를 몰아낼 수 있다는 자기확신이 기도를 멀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한 염려가 많았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염려를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염려를 기도로 승화시키고 있다. 나는 기도합니다! I pray!”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에 참여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의 삶에 참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 나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여한다는 것은 나의 삶이나 다른 이의 삶에 함부로 개입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자신의 삶에 함부로 개입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현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성향이 강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남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사람을 일컬어서 ‘사이코패스(Psychopathy)’라고 한다. ‘사이코패스’의 특징은 자신이 상대방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는 ‘네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지금 너를 살려 두어서 그런 것이고, 나는 너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제도적 사이코패스로 발전하기도 한다. – 검찰개혁이 필요한 이유: 니가 감방 안가고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가 탈탈 털지 않아서야! / 군부독재(미얀마사태) / 전체주의 – 집단이나, 정권이나, 국가가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이면 사는 게 힘들어진다. 그래서 조직이나, 집단이나, 정권이나 국가나, 민주적 개혁이 필요한 것)

 

이런 측면(자기 자신에게 함부로 개입하는 상황(자살률이 높다), 남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상황(갑질이 횡행한다))에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이다. 기도를 단순히 목적으로 이루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기도를 그렇게 사용하는데 익숙하다. 뭔가 자기 자신이 이루고 싶은 열망이 생기면, 기도를 통해 그 목적을 이루려 한다. 그래서 기도를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 안 하는 현대인들은 기도를 하면할수록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갈 뿐이다.

 

기도는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내려놓은 수단이다. 기도는 ‘참여’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직접 내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통하여 나의 삶에 참여한다. 상대 방의 삶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상대 방의 삶에 참여한다. 특히나, 사람 문제에는 섣부르게 개입하면 안 된다.

 

조지아에서 목회할 때, 어떤 집사님 한 분이 부부문제로 상담을 해 오신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였는지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분이 상담 끝에 나에게 아주 난감한 요청을 해오셨다. 본인이 곧 법원에 가서 이혼신청을 할 건데, 법원에 갈 때 남편이 자신을 해코지할 것 같으니, 본인을 법원까지 에스코트 해달라는 것이었다.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목회자인 내가 그분을 법원까지 에스코트하는 일은 부부관계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 이후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참 난감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난감한 상황입니다. 00 집사의 청을 거절하자니 상처받을 것 같고, 들어주자니 너무 개입하는 것 같고, 어떻게 합니까. 주여, 주께서 해결해 주옵소서.” 그랬더니, 1주일 후에 그 집사님한테 연락이 왔다. “목사님, 법원에 갈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지난 번에 에스코트 부탁했던 것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염려와 위험으로 가득한 내 삶을 지키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내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만큼 나를 망치기 쉬운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나는 내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보심과 인도하심에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기도합니다. 다른 이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만큼 그 사람을 망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나는 그/그녀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그녀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 자신을 위해, 자식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부모님을 위해, 형제 자매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교우들을 위해, 나에게 염려와 걱정을 안겨주는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의 불의한 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이다. 무관심 또는 몰두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그리고 다른 이들의 삶을 가장 따스하게 보살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돌보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염려와 걱정이 우리를 엄습해 올 때,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기도합니다.”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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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 - 존재의 언어 습득하기]

 

일상의 기능어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읽기'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기능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사람들의 시는 그나마 읽기 어렵지 않으나, 시는 원래 기능의 언어가 아닌 존재의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밥을 먹는다'는 기능어로 읽힐 수 있다. 밥을 먹는 기능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라는 표현은 존재어이다. 현실에서 어둠을 먹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는 말은 '밥을 먹는다'는 말보다 인간 존재를 더 깊이 드러내주고 보여준다.

 

'시읽기'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들은 기능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어를 사용한다. 시의 언어는 존재의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존재의 언어로 씌어진 시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언어로 씌어졌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도 기능어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하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의 일상은 온통 기능어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능적인 말을 하고, 기능적인 관계를 맺고, 기능적인 사랑을 나눌 뿐이다. 기능적인 언어를 통해서만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허무에 이르게 되고, 의미없음에 이르게 된다. 그 허무와 의미없음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기능적인 일에 몰두하는가.

 

존재의 언어를 사용하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존재의 낯선 세계로 들어가 존재를 끌어안는 행위와 같다. 낯설기만 한 존재의 언어, 시를 읽고 또 읽다보면 어느 순간 존재의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존재의 언어인 시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존재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언어는 영원히 낯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기능어와 존재어의 결정적인 차이다. 기능어는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낯설지 않지만, 존재어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의 언어를 습득하는 일은 죽을 때까지 쉬면 안 된다. 존재는 늘 낯설다. 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존재의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존재를 잃어버리는 일만큼 슬픈 일은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슬픈 이유는 우리가 너무도 자주 우리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능어 만을 요구하는 이 세상, 기능어 만을 쓰도록 만들어 자기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하여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는 이 세상에 저항하려면,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존재의 언어인 시읽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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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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