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1. 8. 23. 12:57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후 3:1-18)

 

주님,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사역을 하고 어떠한 일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지

밝히 깨달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 가기 위하여

옛 언약을 벗어버리고 새 언약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문자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자유케 하는 주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정죄하고 죽이는 문자에 사로잡혀

우리 자신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후패하는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정죄하고 미워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옵소서.

우리는 문자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하시고

살리는 영, 자유케 하시는 영이신 주님의 영을 마음에 새기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

풍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감을 잃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과 자유케 하는 일을 하면서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슴 벅찬 복음을 마음에 품고

삶의 형편이 어떻든지, 승리의 깃발을 들고 전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자유케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3. 12:55

그리스도인, 성령의 사람

(고린도후서 3:1-18)

 

1. 나이가 들면 생기는 현상 중 하나는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이다.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힘도 떨어져 가고, 살결도 탄력을 잃어가고, 외모도 매력을 잃어가니,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또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자신감을 잃어간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읽다 보면, 통상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것, 즉 나이가 먹어가면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현상과는 아주 대조되는 이야기를 한다. 바울은 대표적으로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공동번역성서).”

 

2. 이뿐만 아니다. 본문의 마지막절도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공동번역성서). 바울에 의하면, 우리가 통념적으로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즉 나이를 먹어가면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고,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3. 바울이 본문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레토릭(수사법/화법) 지식과 두 가지의 구약 지식이 필요하다. 두 가지의 레토릭 지식 중 하나는 이미 지난 시간에 배웠다. Self-commendation 레토릭(자기칭찬/자화자찬 화법). 2장 12절에서 17절 사이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문구는 전형적인 ‘self-commendation’ 수사법(화법)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를 품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이러한 진술을 할 때 사용되는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5절의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4. 맞는 말이긴 하나, 이것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맥락에서 조금 떨어진 이야기다. 고린도후서 2장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과 일행)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화자찬’ 수사법이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화자찬 수사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주장하는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다짜고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나,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전혀 경청하지 않는 태도이다.

 

5. 지금은 ‘바울(Paul)’하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도 중의 사도이지만, 그 당시 바울의 사역(ministry)은 많은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특별히 유대인들(또는 그리스도 사건을 유대인의 종교 안에서만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많이 받았는데, 고린도교회에도 여느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대적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바울서신에서는 대개 그러한 사람들을 ‘거짓 교사’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잘못 해석하거나,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왜곡해서 가르치고, 신앙생활의 실천을 율법적으로 전락시키는 일들을 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파는 잡상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견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6.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바울은 대적자들과 맞서고 있는 중이다. 어떤 거짓 가르침, 아주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뒤틀어서 그것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장사치 같은 이들에 맞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향기’는 로마의 군사문화의 배경을 가진 용어이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정복 전쟁에서 이기고 다시 부대복귀 할 때,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정복한 나라의 향품을 피우면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결기가 묻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것이다.

 

7.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두 번째 레토릭은 ‘칼 와호메르’라고 불리는 수사법이다. 영어로는 ‘from the lesser to the greater’ 용법으로 불리고, 한국어로는 ‘하물며 논리’라고 한다. 이것은 가벼운 차원의 진리(the lesser)를 무거운 차원(the greater)의 진리와 대비시키는 화법인데, 이런 것이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하물며) 주 얼굴 뵈올 때에에야 얼마나 좋을까.” (생각-좋음 -à 대면-더좋음) 이러한 레토릭은 성경 곳곳에 쓰이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 4:10-11)

 

8. 바울은 3장에서 전형적인 ‘하물며 논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다.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구약의 두 이야기를 가져오는데, 그 두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바울의 주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두 가지 이야기이다. 하나는 예레미야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의 이야기이다.

 

9. 바울은 자신의 적대자들이 바울의 사역의 신빙성(Authenticity)을 공격하며 그에게 자격을 물어왔을 때, 자신은 다른 누군가에게 소개장(recommendation)을 받을 필요없이, 고린도교회 교우들 자체가 소개장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레미야 31장의 말씀을 근거 삼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입니다.”(3절)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가져다 쓴 예레미야의 본문은 이렇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1, 33).

 

10.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변호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바로 예레미야의 예언과 연결 짓는데,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일컬어 ‘새 언약의 사역’이라고 하고,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 칭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모세의 사역과 대비하면서 자신의 사역의 성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11.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모세의 사역과 대비시키는 이유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아직까지도 모세의 사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8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즉, 모세의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모세의 영광스러운 사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다. 즉, 모세의 사역은 옛 언약의 사역이고, 바울 자신의 사역은 ‘새 언약의 사역’이라는 주장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가?

 

12. 바울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 언약(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6절). 옛 언약은 율법이다. 그것은 문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돌판에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은 성령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와 성령의 결정적인 차이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문자(율법)과 성령’의 차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보통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고 알려진 <예수를 시험하는 유대인들> 이야기를 볼 것이다.

 

13. 예수와의 극한 대립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조항을 들이대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처리를 말한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요 8:4-5). 바로 이 구절에 대한 바울의 코멘트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율법은 석판에 새겨진 문자로서 결국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7절).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모세의 율법대로 처리하면, 그 여인에게는 오직 죽음 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14. 율법의 기능은 매우 분명하다. 사람들을 모두 정죄하는 것이다. 율법을 들이 댔을 때, 죄인이 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이 말하기를, 모세는 바로 이러한 일의 심부름 꾼이었다. 그러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들이댄 유대인들과 다른 모습을 취하신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에 있으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으냐?”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씀하셨다. (요 3:10-11).

 

15. 이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문자)은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왜 ‘새 언약의 사역’인지, 그리고 자신이 왜 ‘새 언약의 일꾼’인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대적자들의 사역은 ‘새 언약의 사역’이 아니라 ‘옛 언약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옛 언약의 사역을 따르지 말고, 새 언약의 사역을 따르라고! 옛 언약의 일꾼이 되지 말고, 새 언약의 일꾼이 되라고!

 

16. 물론, 바울은 모세가 율법을 통해서 했던 ‘옛 언약의 사역’을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터라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고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자신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건을 두고,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이유는 그 영광이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문자로 된 율법을 통한 ‘옛 언약의 사역’이 가진 한계였다.

 

17. 바울은 문자로 된 율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율법, 돌에 새겨진 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법이 더 영광스러운 사역이라는 것을 위에서 말한 ‘칼 와호메르 수사법 / 하물려 논리’를 사용하여 주장한다. “이 문자의 심부름꾼(모세)도 그렇게 영광스러웠다면, 하물며,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람을 단죄하는 일(문자로 된 율법의 기능/사역)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하물며, 사람을 무죄 석방하는 일(성령의 기능/사역/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18.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의 사역’을 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모세보다 더 영광스러운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직도 모세의 사역을 강요하여 사람들을 ‘죽음과 정죄’ 아래에 가두어 꼼짝 달싹 못하게 하려는 바울의 대적자들,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이자 일침이다. 그렇게 문자로 된 율법에 갇혀 ‘죽음과 정죄’ 안에 가두는 행위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가증스러운 일인 것이다.

 

19.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문자(율법)는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였다. 그런데, ‘옛 언약’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을 통해서 선물로 받은 ‘자유와 생명’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주님께 선물로 받은 자유와 생명을 잘 지켜야 한다.

 

20. 바울의 편지가 기독교의 성경(경전/canon)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주장하고 있듯이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문자의 법(율법) 아래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또한 사람들을 죽음과 정죄(죄책감) 아래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성령의 법을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18절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듯이,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라는 것은 죽음의 일, 정죄의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일, 자유케 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몸 바쳤듯이, 우리도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의 대적자들의 가르침이 성경이 되었을 것)

 

21. 이 복음이 전해진지도 벌써 2천년이 되었는데, 우리는 성령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여전히 문자로 된 율법 아래 있는 것을 본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차별하고, 누군가를 억압하며 산다. 또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생명력 있는 삶,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성령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마음에 두고 그것으로 인하여 짓눌리면서 산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나이 먹어가면서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힘도 떨어져 가고, 살결도 탄력을 잃어가고, 외모도 매력을 잃어가니,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또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서, 자신감을 잃어갈 뿐이다.

 

22. 그런 모습들은 바울이 그토록 경계하던 ‘옛 언약’에 붙들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옮아가지 못한 어린 아이의 믿음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성령을 마음에 품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마음에 새긴, 성령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마음에 품고 생명력 넘치게 삶을 살고 하나님 아닌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며 살 뿐만 아니라(내 마음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고, 나는 지금 무엇에 매어 힘들어하는가 가만히 살펴보자),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케 하는 일(지금 내가 하는 일은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케 하는 일인가? 아니면 그저 나 먹고 살려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인가?(이익을 취하려는 장사치))을 하면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과 구원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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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8. 21. 08:49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후 2:1-11)

 

주님,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가 눈물로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황하지 않고

예배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싶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너무도 사랑하여

눈물로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교회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믿음입니다.

눈물로 쓴 편지 안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들이 즐비합니다.

그 절절한 사랑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사랑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주님 안에서 평안하길 소망합니다.

주님, 우리가 날마다 먼저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겠사오니,

우리의 삶을 돌보아 주옵소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1. 08:46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 2:1-11)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큰 봉변을 당했던 것 같다. 편지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봉변을 당했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냈던 편지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군지, 어떤 일인지 자세히 서술하지 않아도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모두 그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방문 때 당했던 봉변으로 인하여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그 사건은 다른 사건을 불러오는데, 바울이 원래 고린도교회를 또다시 방문하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려고 했던 약속을 어긴 바울의 행동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비난 거리를 제공한다. 바울이 방문하기로 했던 약속을 어기자 고린도교회에 있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을 ‘말 바꾸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바울을 비난한다. 이 소식도 바울의 귀에 들어갔고, 바울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고린도교회에 항변하지 않을 수 없어, 편지를 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고린도후서이다.

 

고운정도 있지만 미운정이라는 것도 있다. 고운정보다 미운정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다. (지도 참조) 바울은 소아시아(Asia minor)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아가야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생겨났다. 소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에베소교회이고, 마케도니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빌립보교회이고, 아가야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고린도교회이다. 바울에게는 모두 깨물면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바울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교회는 고린도교회였다. 그만큼 고린도교회와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고린도교회는 고운정, 미운정 모두 깊이깊이 든 교회였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착과 사랑은 1장 14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전 1:14). 이것을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너희가 우리의 자랑인 것처럼 우리가 너희의 자랑일 것이다.”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그 일행(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에게 자랑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신실하게 전했는데, 그 복음을 통해 고린도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교회는 순전한 복음에 의해서 탄생한 교회였다. 금으로 따지자면, 순도 99.99%의 순도를 자랑하는 금인 것이다. 그러니 자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를 방문했다가 그 교회의 어느 한 교우로 인해서 큰 상처를 받은 바울은 상심이 컸다. 그 일로 인하여 사도 바울만 상심이 컸던 게 아니라 고린도교회 전체가 술렁였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방문하겠노라’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될지 바울은 몰랐다. 바울의 사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탄하거나 형통치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목회’가 바울에게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적대자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아킬레스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하여 늘 시비를 걸었다.

 

바울 서신의 특징 중 하나는 그가 ‘self-commendation(자기칭찬/자화자찬)’ 레토릭(수사법)을 자주 구사한다는 것이다. 대적자들에 맞서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러한 정황이 반영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 방문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대적자들을 향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self-commendation(자기칭찬)’ 화법을 사용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육체의 지혜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고 강변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전 1:12절).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했다”라고 자기칭찬(self-commendation)을 하고 있다. 거룩함과 진실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하플로스테’와 ‘에일리크리네이아’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뜻이다. 하플로스테(거룩함)’은 ‘생각이나 마음을 두 번 접어 다르게 표현하지 않고 한 겹으로 진솔하고 솔직하게 드러냄’을 뜻한다. 에일리크리네이아(진실함)’은 ‘태양 빛으로 비추어 보아도 가려지거나 숨겨진 부분이 없을 정도로 명백하고 진실함’을 뜻한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기칭찬’이다.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이것을 적용하면, 바울은 지금 자신이 ‘방문하겠다고 했다가 방문하지 않은 것’은 변덕쟁이처럼 말을 바꾼 것이 아니라(그의 언어로 표현하면, 한 입으로 Yes와 No를 내뱉는 것이 아니라), 즉, 인간의 지혜로 그런 것이 아니라(그곳에 가면 또다른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 하는 염려 같은 것),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바울의 믿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wisdom)도 소중하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지혜가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인간의 지혜는 참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지혜를 먼저 내세운다면, 거기에서는 선한 열매가 맺어지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일의 출발점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기 위하여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아브라함/이삭/야곱)의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행동이 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쌓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새롭게 무엇인가 시작되는 그 시점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제단을 먼저 쌓고 시작했다. 이것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삶의 여정을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신앙 행위였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시간과 공간은 나에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다. 지금 맞닥뜨리게 될 시간과 공간 앞에서 제단을 쌓는다는 것, 즉 예배 드린다는 것은 이제 내가 경험하게 될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게 될 거룩한 시간, 공간으로 내어드린다는 뜻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일들을 하고, 수많은 일을 겪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일들 가운데서 어떠한 열매(결과)가 맺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맡기면서 무엇이든지 시작한다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거룩한 시간과 공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은 주말(한 주간의 끝)이 아니라 한 주간의 시작이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반복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기억한다. 우리가 일주일 단위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행위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바로 이렇게, 무엇을 시작하기 전, 구체적으로는 일주일의 삶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주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그 행위 자체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다.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 외에,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황하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주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삶을 보듬어 주기 위해서이다. 어려운 일, 답답한 일을 만나거든 혼자서 괴로워하지 말고 교회의 지체들과 그 문제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라.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으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3-16).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교회의 지체들을 청하여 함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것’은 나쁜 일 한 것을 이실직고 고하라는 뜻이 아니라(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연약하다. 즉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의도하지 않고 뜻하지 않았던,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함께 기도할 줄 아는 신앙이 우리가 인간의 지혜로 모든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방문계획을 취소한 이유는 1절에 진술되어 있다. 이제 나는 또다시 근심 가운데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우리말성경). 대신 바울은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4절).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약 본인이 약속한 대로 방문했더라면 근심과 아픔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픔은 바울의 아픔이요, 그들의 기쁨은 곧 바울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영적으로 긴밀히 묶여 있다는 뜻이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이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했다는 뜻이다. 고운정, 미운정이 듬뿍 들어 깊이 사랑했던 고린도교회를 생각하며, 바울은 눈물로 편지를 썼다. 가만히 감정 이입을 해보자. 우리는 지금 눈물로 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는 중이다. 바울의 그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가. 아마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했던 문제가 우리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직접 경험했던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두 손에 받아들고 읽어내려가면서 울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문제의 발단이 된 ‘어떤 사람’을 치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문제를 다룬다. 그들은 사랑과 온유로, 즉 눈물로 이 문제를 다룬다. 바울과 고린도교회에 아픔을 가져온 사람에 대한 치리를 언급하는 6절에서 8절을 개역개정으로 읽어보자.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6-8절).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바르게 번역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더 잘 번역한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다. 뜻이 더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여러분은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가 더 큰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기를 권면합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마음 아프게 ‘그 사람’은 이미 충분한 벌을 받은 것 같다. 그 벌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형벌 같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교회 공동체로부터 특별한 제재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가 받은 벌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용서와 위로의 단계로 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과 온유로 내리는 벌은 그 사람을 온전케 하는 데 목적이 있지 그 사람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를 용서하는 이유,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그를 이제 용서하고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이유, 모두가 다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를 읽다보면 그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던 것처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처럼 사랑했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교회와 영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아픔은 자신의 아픔이었고, 교회의 기쁨은 자신의 기쁨이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교회에서 발생한 마음 아픈 일도 모두 사랑과 온유로 치리하려고 했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받아 들고 읽는 우리도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하면 좋겠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사랑했던 이유는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신앙고백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우리가 교회를 단순히 ‘다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신앙고백에 의하면,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물론 사도신경에서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를 구분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in’의 전치사를 쓰고(credo in Spiritum Sanctrum), 교회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in’이라는 전치사를 쓰지 않는다(credo ecclesiam).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185쪽). 교회 자체가 곧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한다.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눈물로 쓴 편지를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그리고 교회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신앙의 충분한 표준이 되는 가르침들을 만나게 된다. ‘이래서 고린도후서가 성경이 될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본문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우게 된다. 첫째,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있는가. 둘째,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라고 고백할 만큼 사랑하고 있는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는 우리들, 주일예배는 일주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어려운 일을 만나거든 혼자서 힘들어하지 말고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자.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니 우리 서로 더 사랑하자.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8. 9. 13:57

주님 뜻 안에서 주님만 의지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후 1:1-11)

 

주님,

우리의 생명을 짓누르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은 어느 순간 지쳤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주 작은 일에도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일쑤이고

악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도 합니다.

하나도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척 살아가느라 우리는 너무도 가식적이고 힘듭니다.

이렇게 힘들고 아픈데도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오기를 주저합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이 과연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좀 더 치열하게 묻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뜻 안에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닥치는 그 어떤 고난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고, 주님이 위로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의지하라고, 사적인 영역을 만들어 그 안으로 빠져들게 하는 이 시대의 외침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젖어 들어,

어느 새 우리는 소라게처럼 그 안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주님의 뜻 안에 있고, 우리는 주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고난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9. 13:55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고린도후서 1:1-11)

 

신약성경에는 ‘바울’의 이름이 등장하는 서신(letters)가 13개 있다. 보통 그들은 ‘바울 서신’이라 불린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중에서 일곱 서신만 실제 바울이 쓴 편지들이고, 나머지는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이름을 빌어 다른 누군가가 쓴 편지들이다. 바울이 직접 쓰지 않았다고 성경으로서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후서가 말하고 있듯이 모든 성경은 교회 공동체가 정경(canon)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직접 쓴 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울은 매우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서신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디아 쎌리마토스 쎄우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디아’는 ‘~에 의해, ~를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이고, ‘쎄우’는 ‘하나님’의 속격’이고 ‘셀리마토스’는 ‘뜻(will)’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사도직은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지로 인하여 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게 은혜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는 표현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며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 선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요즘엔 ‘하나님의 뜻’ 운운하면 ‘꼰대’소리 듣는다. 꼰대 중에서도 상꼰대 소리를 듣는다. 요즘 가장 인기 없는 찬송이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549장)”이다.

 

발명은 과학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에서도 발생한다. ‘사적인 영역(privacy)’라는 말은 근대에 발명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사적 재산(property)의 개념도 동시에 불러왔는데, 사적 재산은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근대에 발명된 ‘사적(privacy)’ 개념에는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신적 존재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사적(privacy)’라는 말은 ‘나만의 고유 영역’이라는 뜻으로,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영역은 다른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도 끼어들지 못한다.

 

이것은 지금도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현대인들은 그것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사적 영역’을 건들면 그 존재가 누구든, 그게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든, 국가든, 하나님이든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에서 보수정치란 바로 이 사적인 영역을 지켜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정치를 말한다. 그 누구도 나의 ‘사적인 영역’ 또는 ‘사유재산’을 건들 수 없다. 이것은 ‘자유’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다. 이것은 법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보수정치의 근간이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사적인 영역이 보장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사적 영역’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바울의 사도직은 사적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에 대하여 이런 의심을 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게 맞어? 그가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야?” 바울은 이러한 의심에 대하여 단호하게,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은 정말 좋고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묻는 것이 쉽게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는 첫째, 우리가 너무 ‘사적 영역’이라는 개념에 매몰되어 있어서 그렇고, 둘째, 자신의 사적 욕망을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말 좋고 중요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 사적 영역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욕망을 쉽게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려는 유혹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고난과 위로를 동반한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독특한 고백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의 하나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경험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영광송을 부르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3-4절).

 

이 구절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울이 의도적으로 단어를 배열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 – 아버지 – 하나님 – 우리”가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며 경험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요, 자비의 아버지, 그리고 위로의 하나님이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경험한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들에게도 경험된다고 고백하는 중이다.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5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에서 쓰인 헬라어 동사 “파쎄마(고난들)”는 복수형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한 모든 고난들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 당한 사람이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될까 싶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셨다. 모욕은 인격적인 모욕을 말한다. 감정이 상하는 모욕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았는데, 이것은 법적인 모욕을 말한다. 법으로부터 버림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법으로부터 버림 받을 때 사람은 쉽게 죽임 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 대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하면서 밝혀낸,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누겠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채찍질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셨다. 이것은 신체에 당하는 모욕(고난)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 죽음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마지막, 결정적인 모욕이다. 이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고난들)을 쉽게 보면 안 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다. 인격적 모욕, 법적 모욕, 신체적 모욕,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 이 모든 것을 당하시고 감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특별한 고난의 이력을 지닌 분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은 이러한 특별한 고난의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고난당하여 죽으신 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의 그 어떤 고난도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깊은 고난과 연결되어 있다. 고난 당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면 고난들(인격적/법적/신체적/생명적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반드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오직 하나님만이 위로해 주실 수 있다.(룻기의 나오미(기쁨): 마라(쓰다) à 기쁨을 회복시켜 주심: 오벳(효도를 위해 태어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으로, 위로의 하나님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고난을 당했는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니, 그저 눈물만 주룩주룩 나올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즘, 현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할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너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너무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만 무엇이든지 하려고 들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보니,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하면서 당하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들어설 여지가, 공간이 없어서 그런 것을 아닐까. 요즘 시대를 돌아보면, 현대인들에게 고난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경험하는 통로일 뿐,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려 하지 않고,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의 뜻, 자신의 의지 안에 머물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도된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불평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한 바로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신 이유는 동일한 고난을 당하여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한다. 고난을 수치로 여겼던 그리스도-로마 세계에서 고난을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로 여기고, 자신이 고난 당한 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이다.

 

바울은 8절에서 자신의 일행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은 나오지 않지만, 그 고난이 엄청난 고난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8b-9a).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래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했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 (주의: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가리킴)

 

이 부분을 놓아두고 학자들은 몇 가지 가설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이라는 구절과 사도행전 19장에 등장하는 에베소에서의 소요 사태를 연결한 가설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 일행에게 발생한 에베소에서 활동하던 우상판매 업자 데메드리오와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거대한 아데미 신전이 있던 에베소에서는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파는 상업행위가 성행했다. 데메드리오는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 일행은 데메드리오와 그의 사람들이 은으로 만든 신상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행 19:26).

 

이게 단순히 우상숭배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계를 위협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해하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19장을 자세히 보면, 적어도 그들은 그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9장에 소개되고 있는 일화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바울의 간헐적 질병의 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우리는 바울이 경험한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에서의 환난을 경험하고 나서 바울이 하고 있는 고백이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we would not trust in ourselves, but in God who raises the dead)”(19b절).


요즘 우리가 뉴스 기사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단어는 ‘전례 없는(unprecedented)’이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기에 오히려 감각이 무덤덤한 듯하다. 이전에 경험해 본 것이 다시 발생한다면,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텐데,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적 재난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기에 오히려 무감각한 것 같다. 상상을 초월한 사건이 발생하면 인간은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법이다.

 

기후위기 같은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일들 뿐 아니라, 개인이나 가족에게, 또는 공동체에게 발생한 고난들을 마주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첫째,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나 자신의 뜻, 나 자신의 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신경 써서, 의식적으로, 우리의 인생이, 또는 우리의 어떠한 선택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나 자신의 뜻, 나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 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발생하는 고난들(고통의 일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된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을 괴롭히는 고난들은 단순히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이 신앙의 원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을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도록,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하나님 경험이 드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해 보인다.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 자기의 의지대로 할 뿐이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간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으니, 고난을 경험하더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손해다. 고난이 얼마나 괴로운가. 고난 속에서 괴로움만 당하고 만다면, 그것은 정말 큰 손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고난이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경험은 놀라운, 아주 신비로운 경험과 마주하게 되는데, 당한 고난이 그냥 괴로움으로만 남지 않고 미래를 활짝 열어준다. (성경의 스토리들은 모두 그것에 대한 증언 아닌가. 아브라함, 요셉, 모세, 나오미와 룻, 다윗 등등)

 

둘째, 우리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 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적 영역의 개념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는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유 재산(사적 영역)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여 그것에 의지해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개념은 근대가 만들어낸 허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적 영역, 사유 재산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러한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아, 하나님만이 구원하시는구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그것이 거룩하거나 죄악되거나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힘에 겹도록 심히 고난에 처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하여, 바로 그 한 순간을 위하여 수년간 피땀흘려 노력하듯이, 우리가 평소에 열심히 신앙생활에 정진해야 하는 이유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가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려고 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나의 사적 재산이나 또는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한 번 가만히, 오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를 짓누르는 영적 기운은 무엇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위로인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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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이것이냐, 저것이냐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삶의 방식을 돌이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영혼과 양심의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돌이키지 못하는 사람은 불안에 빠지게 되는데, 불안한 존재는 자기 존재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사이비 신앙을 갖기 십상이다.

 

사이비 신앙을 갈구하는 소비자와 사이비 신앙을 공급하는 업자가 만나면, 거기에는 진리가 상실되고 수치를 모르는 탐욕만이 유통될 뿐이다.

 

이런 일은 대개 부자나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서 일어나기 쉽다. 물론 평범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도 어렵지 않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들은 당대 종교 중 가장 보편적이고 힘이 있고 공신력 있는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 든다. 그들은 사이비 신앙으로부터 위로와 보호를 받으며 그 대가로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나누어 준다.

 

이제 그들은 한 통속이 되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삼위일체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부, 권력, 도덕적 정당성은 아무도 못 당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대단한 힘을 갖는다.

 

그렇게 형성된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의 세상은 난공불락이다. 그것을 무너뜨릴 힘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다. 그 일이 그리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들이 못 박아 죽인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오른쪽 보좌에 앉으셨으며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사이비 신앙의 소비자도 공급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삶을 돌이켜 새로운 우주의 질서를 자기의 삶 안에 구현하면서 살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시켜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의 옷을 입고, 새로운 윤리적 세상을 꿈꾸며 세워 나갈 것이고, 그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다짐한다. 사이비 신앙을 유통시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불안을 감춰줄 사이비 신앙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 답게 살든지, 아니면 자기의 욕심에 따라 영원히 죽든지, 둘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21. 8. 3. 05:40

[백신을 이용한 생명정치(biopolitics)]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을 응용하여 적용해 보면, 현재 발생하고 있는 백신 접종 논란은 분명 '생명정치'의 일환이다. 현대 정치는 인간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어 통치 하려는 기획에 몰두한다. 현대 정치는 '정치'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즉, 정치와 자본주의는 '한 몸'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벌거벗은 생명, 즉 몸뚱어리(신체)만 남은 인간은 그 몸이라도 지켜내기 위해 정치와 자본이 만들어내는 백신에 목을 맨다. 정치와 자본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신체를 지배한다. 현재 백신 정치가 정부와 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이유는 백신이 가장 큰 이윤을 남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생명정치에서 신체는 매우 중요하다. 신체가 남아 있어야 그 신체를 통해서 이윤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공중보건은 사회 구성원들의 신체를 보호하는데 집중한다. 신체가 있어야 그 신체에 각종 약물 투여하고 장신구를 소유하게 만듦으로 인하여 지속적인 이윤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말한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사안은 모든 보편적인 신념과 신앙의 붕괴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모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라고만 여기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는 것 같다(<얼굴 없는 인간>, 52쪽).

 

이는 실제로 경험하는 현상이다. 바이러스 팬데믹이 발생했을 때, 모든 종교시설은 폐쇄되었다. 부활절도 성탄절도, 또는 석가탄신일도 지킬 수 없었다. 신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이 신앙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체를 해칠 수 있는 그 어떤 신념이나 신앙도 거부당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명정치'에 얼마나 길들여졌는가를 알려주는 지표이다. 현대인은 어느 새 자기 스스로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몸뚱어리 하나를 지켜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듯하다. 바로 이것이 현대 정치의 통치 기술인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이는 북한과의 대치 국면, 안보 문제를 빌미 삼아 국민들을 길들였던 독재시대의 통치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신체의 건강에 대한 염려, 벌거벗은 생명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신체에 백신이라는 안정제를 주입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현대의 기만적 통치술에 불과하다.

 

자본주의(Capitalism)은 '자본(capital)'을 '최우선(ism)'으로 생각하는 체제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정교화되어 사람들의 신체를 착취하고 있다. 생명정치에 적극 이용되고 있는 제약회사의 최고의 목적은 '자본(이윤)'이다. 결코 인간의 생명이 아니다. 백신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기획된 공중보건이 아니라 이윤(자본)을 위해 고안된 공중보건 방식이다.

 

생명정치에 동원되는 현대 의학은 절대로 '치유(병 자체가 없어진 상태)'를 목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신체적 생명의 연장을 목적으로 활동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신체를 통해 이윤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본가들에게 가장 큰 이익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팬데믹을 통해 가장 우려되는 것은 백신접종을 빌미로 현재 지구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더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들이 가려진다는 데 있다. 경제적 불평등, 기후위기, 생명정치적 기획 등, 현재 지구인들은 엄청난 생명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백신 정치에 의해 가려지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백신 정치로 인하여 사람들은 생명정치에 더 길들여지고 있다.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연적으로 면역력을 높이는 방식을 알려주기 보다 (가령, 비타민 C 나 zinc, 비타민 D, sunshine, 좋은 물, 운동, 기도), 무조건 백신을 맞으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백신을 접종시켜야 이윤이 극대화되기 때문일 뿐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자체 면역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바이러스를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현대 정치는 인간의 생명을 위하지 않고 자본을 위해 봉사한다. 그리고 생명정치는 인간의 생명을 모두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어 신체만을 남겨놓을 뿐, 인간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신체를 통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현대 생명정치의 메커니즘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자발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서 갖다 바치는 자본주의의 신실한 신앙이 될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21. 8. 2. 13:24

위기의 시대에 희망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사람’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에게 또한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에베소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자기 시대를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시대로 만들기 위하여

과제를 잘 수행했던 것처럼,

우리도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우리 시대를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시대로 만들기 위하여

과제를 잘 수행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정말로 거대한 위기들이

피조물의 생명과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감지하고 그러한 위기로부터 희망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을 통해 선물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고백합니다.

감당하기 쉬운 과제는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교회의 지체들과 더불어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 과제를 잘 수행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인이,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이 떠난 곳에 하나님의 생기를 다시 불어넣는

이 위기의 시대에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희망의 토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 13:21

선물이며 과제인

에베소서 4:17-32

 

이방인. 심경이 복잡해지는 단어이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방인처럼 살지 말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의 이방인은 유대인과 대조되던 이방인(Gentile)이 아니다. 이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었다는 것을 할 때의 이방인이 이제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교회’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방인은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변한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지칭하는 에베소서의 용어가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시대정신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라는 용어를 잘못 사유하면, 역사 속에서 경험했듯이, 우리는 차별과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무자비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outsider’ 또는 ‘stranger’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방인은 어느 시대에서나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사실, 초기 기독교 시대, 즉 로마시대에 이방인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이방인으로서 엄청난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이방인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차별과 폭력을 가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그래서 ‘이방인’이라는 딱지가 무서운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처지에 놓이지 않기 위하여, 즉 이방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법적 지위를 부여받아 ‘시민’으로서 보호받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면서 기독교인이 로마 사회에서 이방인이 아니고 주류인이 되었을 때 오히려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면서 그들에게 차별과 폭력을 휘둘렀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에베소서에서 ‘이방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에 대하여 복잡한 심경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에 도덕적 심상(image/이미지)을 담는다. 가령 흰색은 좋은 심상(이미지)을 가지고 있고, 검정색은 나쁜 심상(이미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천사는 흰색으로 표시되고(흰옷 입은 천사), 악마는 검정색으로 표현된다. 낮(흰색)은 좋은 것으로 인식되고, 어둠(흑색)은 나쁜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심상은 우리의 실제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심상에 사로잡혀 인종차별에 가담하게 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심상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경의 용어를 정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에베소서에 등장하는 ‘이방인’이라는 용어를 우리는 신학적으로만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방인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현실 사회에서 소비하게 되면 기독교인은 아주 쉽게 차별과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 그렇게 차별과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자가 되었노라고 말하는 무뢰한들이 되기 십상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방인은 신학적인 용어이다.

 

본문에서 이방인과 짝을 이루는 용어는 ‘옛 사람’이다. 이방인’이나 ‘옛 사람’이 가리키는 신학적 상황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이라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가장 드라마틱 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이야기’이다. 또한 룻기서도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탕자의 이야기도 룻기서의 이야기도 아주 눈에 잘 보이게, 드라마틱하게 묘사한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테마인 ‘좀비 이야기’도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삶’(인간성의 상실)이 어떤 삶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얼마전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스윗 홈(Sweat Home)’이라는 드라마는 우리 인간의 내면의 욕망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주 잘 묘사한 웰 메이드 드라마(well made drama)였다. 그 드라마에서 인간이 좀비(또는 괴물)로 변하는데, 그 설정이 매우 독특했다. 드라마 스윗 홈에서의 좀비는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내면의 욕망에 따라 그것이 극대화되는 형상을 가진 좀비로 변한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욕망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을 눈으로 보이게 형상화시킨다면 그처럼 ‘괴물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소위 이방인의 삶, 또는 ‘옛 사람’의 삶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8-19절) 이것을 정리하면, ‘영적 무지, 영적 죽음, 도덕적 타락과 방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어떠한 모습인지, 실제로 알기 쉽지 않다. 이것을 드라마도 눈에 보이게 표현하라고 하면, 작가나 PD마다 다 다를 것이다. 요즘 좀비를 표현하는 것이 드라마마다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소위 이방인의 삶, 또는 ‘옛 사람’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러한 삶이 무엇인지, 에베소라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시대에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은 무엇일까? 그것을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사람마다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이 무엇인지 다르게 말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이 무엇인지 25절 이하에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한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윤리적 지침을 통해서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제시되고 있는 새 사람을 입은, 더 이상의 이방인이 아닌, 더 이상의 옛 사람이 아닌,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되어 새인류가 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돌아와 행해야 할 윤리적 행동들은 대략 6개 정도이다. 1)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 2) Anger 화를 내는 것의 문제 3) 자기 손으로 일하라 그리고 그것으로 남을 도우라 (도둑질 하지 말고 / 남의 것 가로채지 말고) 4) 선한 말을 통해 은혜를 끼치라 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6) 서로 용서하라

 

여기서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위의 윤리적 행동들이 새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된 이들의 필연적인 삶의 형태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말씀의 제목과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새 사람은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새 사람은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선물이며 과제’인 새 사람을 입고 이 세상에서 씨름한다.

 

정현종 시인의 <갈증이며 샘물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여기서 ‘너’를 ‘새 사람’으로 바꾸어서 다시 읽어 보자.

 

‘새 사람’은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새 사람’은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새 사람’은 내 속에서 샘솟는다

 

2천년 전, 에베소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스스로 많이 물었을 것이다. 에베소라고 하는 도시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것도 지금 시대와 판이하게 다르게, 완전 마이너리티(소수자)로서 에베소 지역에 횡행하던 종교관습과 도덕적 타락에 저항하며 온갖 불이익과 핍박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물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복음을 붙들고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도 있을 것이고, 평생 고민 속에서 어정쩡하게 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처음에는 복음을 붙들고 살다가 나중에는 에베소 지역의 관습과 문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 시대, 21세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새 사람’을 이미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선물’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법이다. 선물은 감사인 동시에 과제이기도 하다.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새 사람’을 입은 윤리적 삶에 대한 이야기로 좁혀서 이야기 해보자. 바울은 여섯 가지의 윤리적 삶을 말하고 있다. 1)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 2) Anger 화를 내는 것의 문제 3) 자기 손으로 일하라 그리고 그것으로 남을 도우라 (도둑질 하지 말고 / 남의 것 가로채지 말고) 4) 선한 말을 통해 은혜를 끼치라 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6) 서로 용서하라

 

이 목록을 현재 내 삶의 정황, 그리고 우리 시대로 가져와서 보면, 현재 내가 잘 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윤리적 지침에서만 머물 수 없다. 왜냐하면, 에베소교회에 주어진 윤리적 지침들은 그들 시대에 필요한 윤리적 지침들이었고, 우리 시대에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윤리적 지침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윤리적 지침들은 보편성을 갖는다. 아직도 우리의 삶에 유효한 윤리적 지침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윤리적 지침들은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다. 삶의 자리와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생명에 머무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변하지 않는 선물이다. 선물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과제가 주어진다.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삶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박노해 시인이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다시

ㅡ 박노해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새 사람’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박노해의 시를 이렇게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리스도인 속에 들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시작된다

 

다시

그리스도인만이 희망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많은 어려운 문제들과 마주 서 있다. 경제적 불평등의 위기, 너무 심각하다. 최근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앞다투어 우주여행 비즈니스를 론칭(launching)했다. 그들을 향한 미국 시민들의 여론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로 간 베이조스(아마존 창업자)를 다시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구호까지 내걸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억만장사가 된 것은 모두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는 악한 경제구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우주여행에 돈을 쓰기보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아마존 노동자들에게, 또는 지구 상에서 현재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에 돈을 쓰면 좋을 텐데, 아랑곳하지 않고 일반 사람들은 꿈도 못 꿀 값비싼 우주여행 비즈니스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그런 것이다.

 

지금 시대는 ‘기후위기’에 대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기후위기 다큐멘터리 <Breaking Boundaries>에 보면, 그 다큐의 주인공 스웨덴 과학자 Johan Rockström이 이런 말을 한다. “30년 전부터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다.” 여기서 ‘아무도’는 일반 사람들이라기 보다 정부들/관료들이다. 기후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는 이제 재앙을 돌이킬 수 없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지났다고 말한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예레미야가 떠올랐다. 기후과학자 Johan Rockström은 예레미야와 동일한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도 바벨론과의 국제정치적 위기 앞에서 남유다 왕국의 왕과 고관들에게 위기를 설파하며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를 예언했다. 그러나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예레미야의 입을 막으려고 그들 구덩이에 던지고 협박했다. 그러나, 어떤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남유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기후위기가 무서운 것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듯이 기후변화 때문에 홍수가 발생하고, 산불이 일어나고, 가뭄이 발생하는 등 자연재해를 유발시키기 때문만이 아니다. 기후위기가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급격하게 식량위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다 수온이 높아져 바다 생물이 줄어들고, 가뭄 때문에 농작물을 생산해 낼 수 없게 된다. 결국 인간이 맞닥뜨리게 될 가장 무서운 위기는 홍수, 산불,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아니라 식량의 부족사태를 경험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이렇게 저렇게 극복할 수 있지만, 식량이 부족해지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을 잃게 된다.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성 포위 이야기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일(오늘은 네 자식 잡아먹고, 내일은 내 자식 잡아먹고)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될지 모른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식량폭동이 발생하면, 개인의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끔찍한 총기 참사들이 걷잡을 수 없게 번질 것이다. (총 사야겠다!)

 

에베소 지역에 세워진 교회,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한 몸이 되어 세워진 에베소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해 ‘새 사람’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들은 그 과제를 안고 열심히 살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들과 동일하게 복음을 통해 ‘새 사람’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과제가 주어졌다. 그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구체적으로 다르지만, 그 본질에서는 같다.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삶을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삶으로 바꿀 것인가? 이런 저런 말을 하기 보다, 마지막으로 박노해 시인의 <나 하나의 혁명>이라는 시를 보면서, 우리의 과제를 갈무리 해보려 한다.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서는 것

이 지구 위 60억 인류 모두가 나처럼 먹고 쓰고 생활한다면

이 세상이 당장 좋아질 거라고

떳떳이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

 

내가 먼저 적게 벌고 나눠 쓰면서

덜 해치고 덜 죄짓는 맑아진 얼굴로

모두 나처럼만 살면 좋은 세상이 되고

푸른 지구 푸른 미래가 살아난다고

내가 먼저 변화된 삶을 살아 내는 것

 

그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다

그것이 희망의 모든 것이다

그것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천지간 나 하나 바로 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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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