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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22. 11. 1. 03:53

성인(聖人/Saint)과 성인(成人/Grown-Up)

(로마서 1:8-17)

 

1. 종교개혁 505주년을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 그리고 성인들(Saints)의 삶을 기억하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된 것을 기뻐하는 만성절 주일에 로마서를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성절 전야제 때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에 도화선이 되었던 로마서 1장 17절이 포함된 본문을 살피는 것은 더더욱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인들에게 만성절은 우리의 신앙과 삶, 그리고 이 세상의 일들을 두루두루 살피기에 참 좋은 날입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오늘, 로마서의 이 본문을 살펴보게 됐네요.)

 

2.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교회에 써서 보냈지만,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읽어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우선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는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한 것과, 둘째는,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원하다.”는 말입니다. 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원래 복음은 부끄러운 것일까요?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길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3.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지 않은 복음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말을 하지만, 그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바울 당시 로마인들에게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로마의 십자가 형을 받은 예수와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사람은 로마에 거역하는 무리였습니다. 로마인들은 높은 지위를 갈구했고, 모든 것은 로마가 가진 군사력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로마 사회는 굉장히 정치적인 사회였습니다.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는 굉장히 정치적인 언어입니다. 그렇다 보니, 굉장히 수사적인 언어이기도 합니다. (기회 있으면 아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면 정말 좋습니다.)

 

4. 그러니까, 로마교회에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이 굉장히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혹시라도, 마음에 거리낌이 있을 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본인들의 신앙에 대하여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고 격려하는 말인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게 좀 이해가 안 가는 말입니다. 로마교회는 이미 복음을 들어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복음을 또 전한다고 하는 것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대개 ‘복음을 전한다(흔히, ‘전도’라고 말합니다만)’고 했을 때, ‘회심자를 얻기 위한 행위’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안 믿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행위, 그래서 교회 나오게 하는 것’을 ‘복음 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복음을 이렇게 좁은 의미로 생각하는 데 익숙한 이들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5.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삶의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심을 할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상이 요구하고 원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은 복음을 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를 다니면서 여전히 로마인들이 갈망했던 삶의 방식, 즉 높은 지위를 갈구해서 그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수많은 정치적 술수를 쓰고 사람을 죽이고 차별하는 행위를 하거나, 군사력(힘)에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은 복음을 들은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좀더 논의 좁혀서 얘기하면, 예수를 믿고 로마교회를 세운 로마교회 구성원들이 여전히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로 갈려서(분열되어서) 서로 업신여기고 판단하면서 불화하는 삶을 사는 것은 복음을 실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7. 몇 절 안 되는 구절이지만, 우리는 바울의 진술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첫째, 우리는 우정을 배웁니다. 9절과 10절을 보면,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한 우정을 드러내고 갈망합니다. 바울은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우정이란 이런 것이죠. 상대방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이것뿐만이 아니라,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받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꼭 대면하여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우정은 이런 것입니다. 상대방을 기도 안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며, 만나고 싶어하는 것. 우리 교우들 간에도 이러한 우정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8. 둘째로, 바울에게서 우리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에서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11절에 보면,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만나서 악한 일을 꾸미고 남을 험담하는 것은 우정이 아닙니다. 우정을 나눈 사람들은 만나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줍니다. 우리 나라 말로 ‘신령한 은사(spiritual gift)’로 번역되어 있어 그 뜻이 모호한데,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우정을 나누는 우리들 사이에 있는 만남 가운데 서로가 서로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선물을 줄 수 있는 인격과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9.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나서 ‘신령한 은사’, 즉 그들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을 나누어 주고 싶었습니다. 로마교회의 정황에서 이 선물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자명합니다. 우리는 이미 바울이 로마교회에 주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지 15장에서 확인했습니다. 한 마디로, “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는 선물을 받으면, 로마교회는 더 강건해집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로 나뉘어 서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를 받아들인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는 것이죠.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선물이 가득하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10. 셋째로, 바울은 11절에서 로마교회 사이에 있는 ‘신뢰’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우리 나라 말로는 ‘너희와 나의 믿음’이라고 번역했지만, 여기에서의 믿음은 ‘faith’의 의미보다는 ‘trust’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신뢰(trust)가 있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바로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신뢰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위로가 됩니다. 신뢰라는 것은 이런 것이죠. ‘저 사람은 나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를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을 거야. 언제나 내 곁에서 큰 힘이 되어줄 거야.’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 내 곁을 떠날지 모르는 사이, 관계가 조마조마한 사이 간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나는 너와 함께 할 거야. 그러니 걱정마.’ 이러한 싸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11. 넷째로, 우리는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basic life attitude)를 배웁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오페일레테스)라.” 영어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I am under obligation both to Greeks and to barbarians, both to the wise and to the foolish.” ‘헬라인이나 야만인,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뜻입니다. 의미를 더 확대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라는 뜻입니다. “I am under obligation”이라는 말, 나는 빚진 자”라는 말은 복음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12. 만성절(All Saints Day)은 기독교의 성인을 기리는 날입니다. 특별히 켈트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기독교는 켈트족의 문화인 샴하인을 받아들였는데, 그날 켈트족은 죽은 조상들의 혼을 달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 문화에 착안하여, 기독교는 신앙을 지키다 죽은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로 삼았습니다. 할로윈은 ‘만성절 전야’라는 뜻입니다. 할로윈은 매우 영적인 날입니다. 할로윈은 매우 경건한 날입니다. 순교자를 기억하고, 또한 좀 더 축일을 확대하여, 기독교의 성인을 기억하면서, 그들처럼 우리도 성스러운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러한 날이 루터의 종교개혁 시대에는 면죄부를 파는 날로 타락하여 바로 이날 루터는 반박문을 내었던 것이죠. 좋은 문화가 아니라 그 문화를 타락시키는 무리들이 나쁜 것이죠.

 

13. 우리는 왜 어떠한 사람을 ‘성인(聖人/Saint)’이라고 부릅니까? 그들의 삶이 바울이 말하는 ‘빚진 자’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무슨 ‘obligation(의무)’이 있는 사람처럼 이웃의 삶과 세상을 돌봤습니다. 사람들과 진실한 우정을 나누었고, 물심양면으로 상대방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을 나누어 주었고, 신뢰를 잃지 않았고, 누구든지 자신의 형제자매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산 사람들을 ‘성인(Saint)’라고 부릅니다. 할로윈은 귀신 분장을 하고 먹고 마시고 춤 추며 소비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도 성인들(Saints)처럼 ‘빚진 자’의 삶을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날입니다.

 

14. 한국어의 성인이라는 말의 의미가 가진 두 가지의 뜻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한국어의 성인은 ‘성인(聖人/Saint)’이 되기도 하지만, ‘성인(成人/grown-up)이 되기도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한국인이었다면 이 두 가지의 의미를 통해서 자신의 신학사상을 전개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만인제사장설’은 마르틴 루터의 신학으로부터 온 용어입니다. ‘만인제사장설’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인(Saints)이다’라는 뜻입니다. 만성절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성인(순교자를 비롯한,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인(Saint)이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즉, 어른(grown-up)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철 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철 든다는 것’은 ‘성인(Saint)가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성인(grown-up)이 된다는 것은 ‘빚진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We are under obligation to everything!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성인이 되기까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들로부터 빚을 졌습니다. 스스로, 아무런 도움없이, 이렇게 성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5. 한자어인 ‘성인(成人/grown-up)’의 뜻도 사실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성인(成人)이란 ‘인간됨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좀 철없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좀 되라!’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좀 덜 된 사람들에게 인간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지위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동양인의 사고에서 동물로 표현하는 욕은 최고의 모욕적인 욕입니다. (요즘에는 개들이 아주 존중받는 사회이기 때문에 ‘개새끼’라는 욕은 좀 의미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참 이상한 것은 반려견을 키우며 반려견을 애지중지하는 사람도 욕을 할 때는 ‘개새끼’라는 욕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반려견을 존중하면 적어도 ‘개’가 들어가는 욕은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럼, 요즘에는 사람들이 하도 형편없으니, ‘사람 새끼’라고 하거나, 사람 중에 형편없는 인간을 지칭하면서, ‘ooo같은 새끼’라고 하면 좋은 욕이 될까요?)

 

16. 아무튼, 우리는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인이 ‘성인(saint)’이든, ‘성인(grown-up)’이든, 사람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 용어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고, 이는 로마서의 언어, 바울의 언어로 하면, ‘빚진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 또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사람’이라는 뜻을 훨씬 넘어서는 ‘빚진 자가 되는 것’, 즉,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It’s time to grow up!” 보통 어른들이 철없은 아이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철 좀 들어라! / 어른이 좀 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grow up(성장해서)’해서 ‘grown-up(어른)’이 된다는 뜻입니다.

 

17. 로마교회 성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빚진 자처럼 살아간다면, 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나 서로 업신여기고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진 자가 되어 서로를 잘 섬길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일이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태도이고, 로마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빚진 자’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행복합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의무를 가진 자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즉 우리는 “We are under obligation both to human beings and to nature.”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성인(saint 또는 grown-up)의 태도이고 삶입니다.

 

18. 종교개혁 505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그리고 성인들을 기억하며 성인들처럼 경건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우리의 삶이 로마서의 고백처럼, ‘빚진 자’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