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2. 11. 21. 12:48

불편한 감사를 기억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행 3:1-10)

 

우리에게 감사를 주시는 주님,

이렇게 감사절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감사를 넘치게 하신 은혜를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가 된 듯합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우리가 마냥 눈을 감고

감사를 고백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주님, 이 감사절에

감사의 눈물이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눈을 뜨게 도와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들과 문제들을

보게 하시고, 그러한 이유들과 문제들을 보듬어 안게 하시며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에서 온전한 감사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온힘을 다해 감사를 나누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인간 존재만 생각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을 두 눈으로 보게 하시고

우리가 온전한 감사로 나아가려면 비인간 존재에게도

우리의 감사를 나누어야만 한다는 이 새로운 현실에 마음을 쓰게 하옵소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감사만큼

이웃의 입에서, 대지의 입에서도 감사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감사를 나누게 하시고,

모든 존재가 감사할 때까지 우리의 감사는 불편한 감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의 감사가 흘러 넘쳐 모든 이들이 감사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십자가 위에서 감사를 풍성하게 부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21. 12:46

불편한 감사

(사도행전 3:1-10)

 

1. 지난 달 들은 AP 뉴스 중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뉴스가 있습니다. 2019년도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했을 때 미군에 의해 부모와 형제들을 모두 잃은 아기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몇 달 후 적십자에서 그 아기의 친척들을 찾아내 그 아기를 친척 집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들을 모르게 미 해병 대원인 아무개(Joshua Mast)가 그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법원에 입양 신청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2021년도에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작전 때 그 아기와 가족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그 아무개 해병 대원은 도왔습니다.

 

2. 미국에 도착한 그 아기와 가족들은 아프간 난민을 위한 이주 센터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그 아기를 데려갔습니다. 이유를 몰랐던 그 아기의 가족들은 나중에 미해병 대원이 그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아기의 가족들은 당황했습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아이를 입양하고 데려가는 것은 ‘유괴’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병대원 부부는 이 일에 대해서 이런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면서, 아이를 구하기 위해 훌륭하게 행동했던 것일 뿐입니다. We’ve acted admirably to save the baby, keeping with our Christian beliefs.”

 

3. 이 기사를 읽고/듣고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미군 부부는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하여,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훌륭한 일이었다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것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목숨이 죽은 것은 무엇이고, 그 아이가 부모를 잃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전쟁 고아를 입양해서 데려다 키우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일으킨 것에 대하여 회개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미국 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을까요? 아무튼, 이 기사를 접하고 오랫동안 깊은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 감사절을 맞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냥 감사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어딘가 마음이 좀 불편합니다. 각 교회마다 풍성한 과일과 곡식으로 강단을 꾸미고 그것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올라오지만,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게 정말 풍성한가를 돌아보면, 왠지 우리의 현실을 왜곡하고 속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설사, 부자들이나 부자 나라들에서는 아직까지 먹거리가 풍성하여 별 걱정 없이 감사절을 보낼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나, 우리가 알다시피, 기후변화 때문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고 있고, 수많은 동물과 어류, 식물들이 멸종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이렇게 마냥 ‘감사’를 남발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5. ‘불편한 감사.’ 미국의 부통령을 지냈던 엘 고어가 『불편한 진실Inconvenient Truth』라는 책을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2006년입니다. 16년 전입니다. 이 책은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 고어가 말하는 ‘기후변화’의 진실을 듣고 불편해했습니다. 마음도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받아들이면 몸과 삶 자체가 매우 불편해지기 때문에, 기후변화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불편한 감정을 자아낼 뿐이었습니다. 살던 대로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죠. ‘불편한 감사’는 바로 여기에서 가져온 용어입니다. 감사절을 맞아 마냥 감사하고 싶은데, 우리의 감사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마냥 감사하기에는 세상살이가 너무 척박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돌아와 남원 사또의 악행을 밝히면서, 이런 시를 지어 내놓습니다.

 

金樽美酒 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

玉盤佳肴 萬姓膏(옥반가효 만성고)

燭淚落時 民淚落(촉루락시 민루락)

歌聲高處 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

금 술통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 접시의 좋은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구나

 

7.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면서부터 저는 이몽룡의 이 시가 자연이 인간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쓴 시처럼 느껴졌습니다.

 

金樽美酒 千木血(금준미주 천목혈)

玉盤佳肴 萬膏(옥반가효 만수고)

燭淚落時 淚落(촉루락시 지루락)

歌聲高處 聲高(가성고처 풍성고)

금 술통의 좋은 술은 천 나무의 피요

옥 접시의 좋은 안주는 만 동물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대지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바람wind) 소리 높구나

 

8. 땅이 우리처럼 말을 한다면, 강단에 풍성하게 쌓인 과일들과 곡식들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할까요? 풍성한 결실을 내서 참으로 감사하구나, 할까요? 인간들의 탐욕을 욕하면서 자기들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면서 재배한 과일들과 곡식들을 향해서 위와 같은 시 한 수를 지어 날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매우 불편합니다. 땅이 내는 소산에서 감사 소리가 아니라 원망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백성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며 변 사또처럼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풍성함을 서로 나누는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대지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식탁만 풍성하게 하는 사악한 인간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9. 본문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줍니다. (지금도 그러는 유대인들이 있지만) 성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오전 9시,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 구 시’란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관습에 따라, 오후 3시에 성전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이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간 것은 하루이틀 했던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아 거듭난 후에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매번 가던 성전이었고, 매번 드나들던 길이었는데, 예전에는 거기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들의 눈에 이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기적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에게만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발생한 것이죠.

 

10.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할 때 성령이 임재하여 성령 충만하게 된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는 무엇보다도 ‘감사’가 넘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평소 눈에 별로 들어오지도 않았고, 별로 관심도 없었던 성전 미문의 걸인에게 눈이 갔다는 겁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든,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3-4절).

 

11. 감사(thanksgiving)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감사란,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감사가 넘쳤습니다. 성전으로 향하던 그들의 발걸음은 무엇보다도 감사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감사가 참된 감사였던 것은 그들이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눈이 가려져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들의 눈이 뜨여져 구걸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걸하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12.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도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감사를 나누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자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 몇 푼 정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준 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보행장애자였던 그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누어준 ‘감사’ 덕분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비굴하게 먹고 살지 않아도 되고, 이제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됐습니다.

 

13. 저는 이렇게 다시 보행할 수 있게 된 이 사람의 인생이 정말 궁금합니다. 제가 소질 있는 작가라면 이 사람의 일생을 다룬 소설을 하나 써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다시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게 된 것을 잘 활용하여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꾸몄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움직이지 못하고 구걸하면서 사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못된 사람이 되었을까요? 저는 이 사람이 자신이 받은 감사를 다른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받은 감사는 보통 감사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감사는 또다른 참된 감사를 낳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까요.

 

14.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감사가 온전한 감사가 되려면, 우리는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감사하기 어려운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우리의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모든 사람이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 불편한 감사, 유보된 감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구원을 얻기까지 우리의 감사는 불편한 감사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모두’는 더 이상 인간 존재만 가리키는 것이 되지 못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대지가, 땅이, 자연이 우리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신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인간 존재만이 아니라, 이 대지가, 땅이, 자연이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 존재와 더불어 비인간 존재에게도 우리의 감사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15. 참된 감사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의 감사를 보행장애인에게 흘려보냈던 것처럼, 감사는 흘러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보행장애인도 고침을 받은 후, 자신이 받은 감사를 흘려보냈을 것입니다. 자신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도록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도록 어려운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불편한 사람이 없도록, 감사가 계속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가 함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감사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가리지 말고, 눈을 떠서, 우리가 주님께 받은 감사를 열심히 흘려 보내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눈이 뜨여지기를 소망합니다. 소망하지 않아도, 우리가 참된 감사 가운데 있다면, 베드로와 요한처럼 눈이 뜨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받은 감사를 흘려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에 머물지 않도록, 인간 존재에게, 그리고 비인간 존재(동물, 식물, 자연)에게 선한 일을 하십시오. 친절하게 대해주고, 망가뜨리지 말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5. 기후변화와 제자도

 

“차이를 만들어 낼 유일한 변화는 인간의 가슴을 변화시키는 것이다”(피터 셍지, Peter Senge). 일생 동안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을 덧붙입니다. 결국 우리가 일생 동안 해야 할 여행 중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발까지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진 ‘제자도’라는 말이 그 뜻을 담고 있으니까요. 제자도란 제자가 가야할 길을 가리키는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a follower of Christ)의 길이란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기후교회』는 제자도를 묻습니다.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기후교회, 161쪽). 제자도는 매우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개념을 빌려 제자도를 표현한다면, 제자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liquid)’입니다. 제자도는 한 시대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따라 바뀝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자 했던 신앙의 선조들은 모두 자기 시대의 문제를 못 본 척하지 않고 끌어 안고 씨름했습니다. 멀리는 로마제국의 멸망의 지켜보면서 기독교 신학을 탐구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고, 가까이는 나치의 포학에 맞서 제자도를 고민했던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들, 특히 바르트나 본회퍼가 그러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김교신이나 다석 유영모 같은 분들이 일제시대와 영적위기에 맞서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자도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면한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죠.

 

제자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신앙인은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이 물었던 질문을 동일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회퍼가 그 질문을 한 문장으로 아주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Wer ist Christus für uns heute?” 우리는 ‘오늘’을 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기후교회』는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러한 일들에 맞선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주목하는 것은 지난 2세기 동안 발생한 화석연료의 추출과 그것을 이용한 물질적 성장입니다. 화석연료의 사용과 물질적 성장의 추구가 가져온 결과는 풍요만이 아니고 기후변화를 동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에 풍요를 가져오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멸망시킨다면, 이것만큼 모순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스무센의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에 나온 진술을 이용해 짐 안탈 목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신앙인들로서 우리도 인간의 경제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굴러가는 것을 곁에서 가만히 서서 지켜볼 수는 없다”(기후교회, 164쪽). 지난 2백년 동안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인류가 행한 일은 경제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경제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굴러간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총기사고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일 같이 총기사고가 나서 무고한 생명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총기규제를 하지 않습니다. 모두 돈 때문입니다. 총기 사고로 인하여 일 년에 수만 명씩 죽어 나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생태학적 비용(새명이 죽어 나가는 일)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총기구매와 사용이 허가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모든 생태학적 비용을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병리적 현상입니다. 병입니다. 병(disease).

 

지난 2백 년간 인류 역사에서 발생한 근대화(modernity)는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는 근대화의 시대였습니다. 경제가 블랙홀이 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그리고 종교도 모두 경제를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세운 사회는 ‘물질적 소비’위에 세워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가치 있고 도덕적이고 미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성장. 소비. 발전. 중독, 과잉, 편리, 무시, 자기중심.” 인류는 오로지 이것들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소비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으면, 중독되지 않으면, 과잉되지 않으면, 편리하지 않으면, 무시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성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이 문제인 이유는 ‘삶’을, ‘생명’을, ‘생태’를 지속적이지 못하게 합니다. 삶은 지치고, 생명은 끊어지고, 생태는 망가지고 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자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제자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인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살아가신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셨을까요? 생명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장과 소비, 발전과 중독, 과잉과 편리, 무시와 자기중심에 사로잡혀 삶을 지치게 만들고, 생명을 끊어지게 하며, 생태를 망가뜨리는 길을 걸어가셨을까요? 그럴리 만무합니다(It’s absolutely not!).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난 2백년 동안의 제자도라는 것이 경제성장과 맞물려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이라는 용어에 매몰되어 ‘제자도란 성장을 일구는 것’인 양, 우리도 모르게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제자도를 실행해 온 듯합니다. 『기후교회』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으며, 제자도를 재설정하기를 촉구합니다. 성장 대신에 탄력성을, 소비 대신에 협력을, 발전 대신에 지혜를, 중독 대신에 균형을, 과잉 대신에 적당함을, 편리 대신에 비전을, 무시 대신에 책임성을, 그리고 자기 중심적 두려움 대신에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제자도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제시된 제자도를 한 마디로 줄여서 다시 설명하면, 오늘 우리에게 제자도란 체제 변화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난 2백 년간 인류는 화석연료 사용과 경제성장 추구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에 심하게 중독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고 부호 탑 10 가운데 3개가 에너지 사업과 관련 있습니다. 미국의 코흐 인더스트리스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가문, 인도의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가 그것입니다. 쓰고 나면 다시 재생할 수 없는 화석연료 대신에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경제를 구성하는 체제를 우리는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요? 『대지의 선물』에서 웬델 베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이웃의 삶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유산을 경멸하는 것은 모순이다”(기후교회, 191쪽).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제자도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유산’을 경멸하는 것은 겉으로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이웃을 욕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이나 제자도가 아니라 기만이고 사기입니다.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의 제자도는 기존의 제자도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는 여전히 개인구원, 영혼구원만 외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예배, 설교, 기도, 선교, 친교, 봉사의 측면에서 기존의 제자도와 어우러진 새로운 제자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로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가슴은, 우리의 발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