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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4.15 백부장의 고백 - 고난주간 금요일
  2. 2017.04.15 이 잔을 마시라 - 고난주간 목요일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5. 05:08

백부장의 고백

마가복음 15:34-41

(고난주간 금요일)

 

우리는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부른다. 사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God’s Day라고 부른 것이 그렇게 바뀌었다는 설도 있고, 실제로 ‘Good Friday’라고 불러서 그것이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죽임 당하신 금요일을 ‘Bad Friday’라고 부르지 않고, ‘Good Friday’이라고 부르기를 원한다.

 

이것이 사실 상식적인 생각은 아니다. 남의 죽음을 놓아두고 좋다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무병장수하다가 별세한 노인의 죽음을 호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죽음을 놓아두고 잘 죽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예수님은 무병장수로 죽은 경우도 아니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대로 예수님은 한창 나이(33)이 죽었다. 그것도 그 당시 가장 끔찍한 처형 방법이라고 알려진 십자가 처형에 의해서 죽임 당했다. 이러한 비참한 죽음을 놓아두고, ‘좋은 날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왜 예수님이 죽임 당한 날을 ‘Good’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마가복음은 성금요일에 일어난 예수의 죽음 사건을 정확하게 세 시간 단위로 구분하여 이야기 한다. 오전 6시부터 오전 9시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까지.

 

첫 번째 세 시간(오전 6시부터 9시까지)에 일어난 일은 빌라도에 의한 심문과 군중들의 바라바 석방 요구,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적인 명패를 붙인 후 로마병사들이 예수님을 능욕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오르는 길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강제로 십자가를 진 것이다.

 

두 번째 세 시간(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에 일어난 일은 예수님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세운 일, 병사들이 예수님을 옷을 나누어 가진 일, 그리고 두 강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일,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양 옆의 강도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일이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일반 범죄인에게 적용된 처형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반역한 자에게 가해지던 처형이었다. 예수님의 양 옆에서 함께 처형된 강도는 남의 물건을 훔친 죄를 지은 자들이 아니다. ‘강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레이스떼스는 보통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던 게릴라 전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마지막 일주일> 255).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식적인 죄명은 명패에 써 붙인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이었다.

 

세 번째 세 시간(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에 일어난 일은 온 땅에 어둠이 덮인 일이다. 어둠은 비탄과 심판을 동시에 상징한다. 어둠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지만, 우주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마지막 일주일> 258). 그러므로, 우리에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충분히 묵상할 여유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주적 죽음이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큰 죽음은 없다. 오늘 하루쯤은 일상에 파묻혀 그리스도의 죽음조차 묵상할 시간 없다고 핑계를 대기보다는 일상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죽음을 묵상하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네 번째 세 시간(오후 3시부터 오후 6시까지)에 일어난 일은 예수님의 죽음과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한 장례이다. 오후 3시에, 예수님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부르짖는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시편 22편의 말씀이다. 왜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시편 22편의 말씀을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을까? (시편 22편에 대한 해석은 <마지막 일주일>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시편 22편은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시편 22편을 보면, 엄청난 고통과 강한 적개심을 경험하는 어떤 사람을 묘사한다. 고난 당하는 그 사람은 그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유를 욥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어왔던 하나님에 의해 버림 받았다고 느낀다. 그는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신뢰해 왔지만 이제 극한 상황에서 멸시를 당하고 조롱을 당한다. 시편의 화자가 어떻게 부르짖는지 보자.

 

나는 쏟아진 물처럼 기운이 빠져 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졌습니다. 나의 마음이 촛물처럼 녹아내려,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의 입은 옹기처럼 말라 버렸고, 나의 혀는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매장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가 나를 에워싸고 내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 셀 수 있을 만큼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원수들도 나를 보고 즐거워합니다. (시편 22:14-17)

 

그런 다음에는 시편의 분위기가 변한다. 전반부의 절망적인 고통과 괴로운 버림받음이 후반부에서는 구원과 보호에 대한 감사의 기도로 바뀐다. 이 두 부분들이 결합되어 고통과 구원의 시, 즉 처음에는 고난을 당해 부르짖다 후에는 하나님에 의해 정당함이 입증되는 고난 받는 의인에 대한 시가 탄생한다. ,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시편 22편의 말씀을 연결시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은 이 세상의 권력에 의해 정죄되었지만, 하나님에 의해 그 정당함이 입증된 의로운 사람의 고난과 죽음이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두 가지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일어난다. 하나는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폭으로 찢어진 것과 다른 하나는 백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성전의 휘장은 성전의 가장 깊은 곳인 지성소와 다른 곳을 구분하는 휘장이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특별한 장소였다. 그곳은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일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의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뜻이다.

 

또한, 백부장은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백부장에게 주님과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섬기는 로마황제였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다. 이것은 굉장한 고백이다. 세상의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혁명과도 같은 고백이다.

 

성금요일,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나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죽음이 나에게 어떤 죽음인지를 진지하게 묵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묵상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의 입을 빌려 묻는다. 백부장의 고백처럼, 우리도 참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가?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고 있는가?

 

렇다면, 1922년도에 Rhea F. Miller 부인에 의해 쓰여졌지만, 1946년 이후 줄곧 빌리 그레이엄 전도팀과 함께 전도여행을 다니면서미국의 사랑 받는 복음 가수(America’s beloved gospel singer)’로 유명한 George Beverly Shea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의 찬송이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기를 소망한다. 이 찬송이 오늘 하루 여러분의 입술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I’d rather have Jesus than silver or gold; I’d rather be His than have riches untold;

I’d rather have Jesus than houses or lands; I’d rather be led by His nail-pierced hand

금이나 은보다 난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엄청난 부를 가지는 것보다 오히려 주님의 것이 되고 싶다네. 큰 집들과 넓은 땅을 가지는 것보다 난 주님을 가지고 싶다네. 오히려 주님의 못자국 난 손으로 이끌림을 받으려네.

<Refrain>Than to be the king of a vast domain, or be held in sin’s dread sway;

I’d rather have Jesus than anything. This world affords today.   

<후렴> 넓은 영토를 지닌 왕이 되는 것보다, 끔직한 죄악의 힘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난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이 세상은 오늘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5. 05:06

이 잔을 마시라

마가복음 14:12-16

(고난주간 목요일)


예수님의 마지막 목요일은 극적인 사건으로 가득 찬 날이었다. 목요일에는 세 개의 사건이 크게 놓여 있다. 유월절 만찬, 겟세마네 기도, 그리고 당국에 의한 체포이다. 이 세 개의 사건에 놓인 아픔은 네 가지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고,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부인을 당하고, 나머지 제자들에 의해 버림을 당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당시 권력자들에 의해 사형 선고를 당한다. 한 인간으로서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겹쳐 있다.

 

우리는 흔히 고난주간 중에서 목요일과 금요일 앞에 자를 붙여, 성목요일(Maundy Thursday)과 성금요일(Good Friday)이라 부른다. 성목요일은 세족 목요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마가복음에는 세족식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요한복음 전승에서 온 이야기이다.

 

목요일에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몇 가지 다른 관점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전한다. 첫째, 두 복음서는 날짜 계산이 다르다. 마가는 만찬을 벌인 날이 유월절이라고 말하는 반면, 요한에게 목요일(만찬 한 날)은 유월절 전날이다. 요한은 특별한 신학적 이유를 가지고 날짜를 다르게 계산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가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으로 보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둘째, 두 복음서는 모인 일(만찬)에 대하여 분량의 차이를 보인다. 마가복음은 14 17~25절까지, 9절에 걸쳐 전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13장에서 17절까지, 5장에 걸쳐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만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긴 설교(고별설교)가 실려 있다.

 

셋째, 두 복음서는 그 날 일어난 일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마가는 만찬을 통해 요즘 우리가 성만찬으로 부르는 의식이 행해진 것을 말한다. 그 만찬의 핵심은 이 말로 집약된다. “이것은 내 몸이고, 이것은 내 피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이야기를 전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목요일을 세족 목요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목요일을 영어로 ‘Maundy’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그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Maundy’명령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새로운 계명을 가리킨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34).

 

유월절 만찬은 두 명의 제자에 의해 은밀하게 준비된다. 비밀리에 준비된 이유는 가룟 유다 때문이다. 그가 만찬 장소를 미리 알면 안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유월절 식사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식사가 마칠 때까지 유대의 방해가 있으면 안 된다. 유월절 만찬은 세 가지의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1) 그들은 유월절 음식을 함께 먹었다. 2) 예수님은 임박한 배신에 대해 말한다. 3)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에 그의 임박한 죽음과 관계된 의미를 부여한다.

 

그 당시 공동식사는 하나의 문화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동식사는 그 당시 보편적인 공동식사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과 버림 받은 자들과 함께 식사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평등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함께 식사 함으로써 상대방을 나의 형제로, 자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다가 빵과 포도주는 실제 빵과 포도주로서 한끼의 식사를 의미한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이었다. 먹을 게 없어서 고통 받고, 빚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이 그 당시 서민들의 애환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요점도 이것이다. 떡과 물고기가 기적적으로 많아진 것이 요점이 아니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눔을 통해서 배고픈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우리도 그러한가? 우리도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고동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가?

 

유월절 만찬이 끝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자리를 옮긴다. 예수님은 어두 컴컴한 그곳에서 체포된다. 그만큼 가룟 유다와 유대와 로마의 당국자들이 하는 짓이 어두운 짓인 것을 알 수 있다. 죄악은 모두 어두운 데서 일어나는 법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를 통하여 그 잔을 마시기로 결단하셨을 그 때,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군사들은 들이닥치고, 제자들은 도망친다.

 

목요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제자)과 거짓 그리스도인(제자)에 대한 분별의 눈을 가지게 된다. 만찬은 일종의 예배의식이다. 거기에는 말씀(요한복음-고별설교)과 성례전(이는 내 살이요, 내 피다)이 있다. 그 자리에 제자들은 함께 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겟세마네까지 갔다. 그곳은 기도의 자리였다. 제자들은 예배의 자리에 이어, 기도의 자리까지 함께 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마시기로 한 잔을 함께 마시지 못하고, 도망친다. , 그들은 십자가까지는 함께 못 갔다. 이 지점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제자)과 거짓 그리스도인(제자)가 갈리는 지점이다.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자. 우리도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에는 예수님과 함께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마신 그 잔을 함께 마시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했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에 앉혀 앉혀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느냐?”

 

우리는 이것 때문에, 부활절까지 밀고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잔을 마실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온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을 꼭 거쳐야 한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예배와 기도의 자리까지 밖에 못 갔던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이 잔을 마시고, 십자가의 길을 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제자동의 완성은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넘어, 예수님과 함께 이 잔을 마시는 데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가 된다.

 

마가복음 자체는 AD 66-74년 경 유대땅에 있었던 대환란 기간 동안 가혹한 박해를 당했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진 성경책이다. 박해를 당하면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처럼 이 잔을 마시고 끝까지 예수님을 붙든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잔을 마시지 못하고 베드로처럼, 그리고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배교) 친 사람들도 있었다.

 

복음서는 예수를 닮은 사람들에게는 찬사이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닮은 사람들에게는 회개와 용서의 희망을 안겨주는 위안이 되었다. 가장 큰 죄는 예수를 부인하거나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면 언제든지 용서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의 상실이다.

 

지금 당장은 예수님처럼이 잔을 마시는 것에 실패했을 지라도, 절망에 빠질 필요 없다. 우리는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의 능력을 입어 예수님처럼 이 잔을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할 때 우리에게 온전한 구원이 임함을 잊지 말고, ‘이 잔을 마시라는 주님의 요청에 아멘으로 믿음으로 화답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