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신앙2012. 8. 25. 05:43

청출어람(靑出於藍): []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 /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學不可以已]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靑取之於藍而靑於藍]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氷水爲之而寒於水].” 학문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므로 중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푸른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면학을 계속하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뜻인 '청출어람'이 나왔으며, '출람(出藍)'이란 말도 여기서 비롯된 말입니다.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

 

이건 학문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 신앙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 예수님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 당시의 영지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펼쳤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적어도 예수님보다 나은 존재는 아닐지라도 예수님과 똑 같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친 흔적들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입은 것처럼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그렇게 부활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논리이지요. 특별히 이 사상은 동양사상과 맞닿아 있기에 동양철학이나 동양신앙에 심취해 있는 자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사상입니다. 일찍이 동양사상(종교)신인합일(神人合一)”에 대한 목마름이 굉장했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음서를 들여다보면 예수의 부활은 그들에게 신인합일의 사건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죠.

 

굉장히 매력적인 관찰이긴 하나,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고 이단사설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절대로 예수님이 부활체로 거듭났던 것처럼 우리 인간이 땅에서 부활체로 거듭날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역사의 유일회적인 사건이지, 역사적으로 반복할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일컬어 구원사건이라고 평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일컬어 부활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분명하게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때를 가리킵니다. 때는 역사의 종말의 때이고 모든 만물이 새롭게 되는 때입니다. 부활이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창조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것을 선취 방식으로 우리(제자들)에게 보여진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을 안다는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우리도 입게 거라는 믿음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구원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청출어람 있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긴 하지만 그것이 지금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이루어진다면 이상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을 이유도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할 이유도 없겠죠.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해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모든 만물은 말할 없는 탄식 가운데 구원을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에 동참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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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렴치(破廉恥): 염치가 없어 도무지 부끄러움을 모름

 

염치(廉恥)는 청렴하고 수치를 아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파렴치하면 그 반대의 뜻으로 잘못을 범하고도 도무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관자(管子)의 목민편에 보면 나라를 버티게 하는 네 가지 덕목이 나옵니다. 예의염치(禮義廉恥, 예의, 정의, 청렴, 부끄러움을 아는 것)가 그것인데, 일명 사유(四維)라고도 합니다. 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유 중 하나가 없으면 나라가 기울게 되고, 둘이 없으면 위태롭게 되며, 셋이 없으면 뒤집어지고, 모두 없으면 그 나라는 파멸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곧 예의염치는 나라를 존재케 하는 매우 중요한 기본 덕목인 셈입니다. 후에 여기에다 효제충신(孝悌忠信) 네 덕목을 합쳐 팔덕(八德)이라 했습니다. 사유(四維)가 나라를 떠받치는 데 필요한 덕목이라면 팔덕(八德)은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네 가지 덕목인 셈입니다. 곧 사유팔덕(四維八德)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도덕률인 것이죠. - <관자(管子) 목민편(牧民篇)> -

 

염치 없이 왜 그래?”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너는 부끄러움도 없니?”라는 뜻입니다. 부끄러움(shame)은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입니다. 심리학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분야이며, 특별히 신학에서는 죄의 문제와 연관해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인간은 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까요? 어떻게 해서 부끄러움의 감정이 인간에게 형성되었을까요? 물론 이는 굉장히 복잡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어 여기에서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세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오기 전까지 인간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서로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부끄러움과 죄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대로 인간이 만약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간은 부끄러움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간은 죄를 지었고, 이제 부끄러움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이게 인간 실존이 지니고 있는 아픔이고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난다면 인간의 삶은 비극이겠죠. 하나님께서는 이 부끄러움을 역이용하셔서 구원 사건에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부끄러움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촉매제입니다. 부끄러움이 죄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죄사함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죄사함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기에, 부끄러움을 씻으려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전부터 기독교의 화해 예식에는 화해 당사자들의 부끄러움을 씻어주는 과정이 꼭 들어갔던 겁니다. 화해란 곧 부끄러움을 없애주는 과정입니다. 서로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때, 그때야 비로소 화해가 된 것이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화해를 모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모르기 때문에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는 이웃과의 화해를 모르기 때문에 이웃에게 손 내밀 줄도 모릅니다. 결국 그런 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부끄러움을 모른 채, 바로 그 부끄러움에 내버려져 멸망 당하고 마는 것이죠.

 

파렴치한 사람은 인간 사회에서도 외면 당하지만, 더 심각한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께도 외면 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좀 알고 사는 게 좋습니다. ‘염치있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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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탄(風樹之嘆): 바람과 나무의 탄식이란 말 /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자식의 슬픔이란 뜻

 

공자가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던 어느 날, 몹시 슬피 울고 있는 고어(皐魚)라는 사람이 있어 우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저에게는 세가지 한()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부를 한답시고 집을 떠났다가 고향에 돌아가 보니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둘째는 저의 경륜을 받아들이려는 군주를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셋째는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와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고어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아무리 나무가 조용히 있고 싶어도 불어온 바람이 멎지 않으니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樹欲靜而風不止). 마찬가지로 자식이 효도를 다하려고 해도 그때까지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子欲養而親不待).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는 뵙지 못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저는 이제 이대로 서서 말라 죽으려고 합니다.' - 논어(論語) –

 

한국은 오랜 세월 유교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에 대한 생각이 남다릅니다. 어느 한 체계가 종교의 기능을 하려면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성리학이 유교를 뒷받침 해주는 주된 이론입니다. 그것 때문에 유교는 한국에서 오랜 세월 종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죠. 유교가 종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가 유교의 가르침대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종교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항하거나 거부 할 수 없죠. 그 가르침을 따르던지 아니면 죽던지 둘 중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한국이 오랜 세월 유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이유는 왕정제도 때문입니다. 유교만큼 왕정제도를 잘 떠받쳐 주는 사상도 드뭅니다. 왕정제도와 나란히 가는 가부장적인 문화를 지탱하기 위해서 유교는 금상첨화입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라는 가르침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과 깨우침을 준 스승과 낳아주신 아버지의 권위는 유교에 의해서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거기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자식의 슬픔은 단순히 후회와 한탄이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죄책입니다. 구원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아들은 효도를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 받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철저하게 지키도록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구원이 조상의 돌보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옛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 또는 다른 종교나 샤머니즘에서 생각하는 구원은 기독교의 그것과 많이 다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존재론적이고 종말론적이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 또는 샤머니즘에서 생각하는 구원은 기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무병장수하면서 잘 먹고 잘 사는 정도이지요. 구원의 관심이 이 땅에서의 복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유교의 관점에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조상의 도움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조상님들을 신처럼 잘 모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기독교에서 말하는 의 개념은 이것과 매우 다릅니다. 십계명의 제 5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 그것은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그러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바로 아는 관점에서 부모의 공경이 필수적이라는 뜻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배우라는 겁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이긴 하나 신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자녀와 똑같이 하나님을 공경해야 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에게도 자녀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라고 가르칩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서라면 부모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가르침까지 주십니다. 물론 이는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살이, 윤리, 도덕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기독교인은 모두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겁니다.

 

효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부모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복 내려 주시는 존재여서가 아니라, 효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는 효도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고, 효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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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입가경(漸入佳境): 경치나 문장, 사건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됨

 

남경에 있던 승려들이 와관사(瓦棺寺)를 짓기로 했을 때, 돈이 모자라 헌금자를 모으기로 했으나 몇 달을 노력해도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초라해 보이는 20세의 청년이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백만전을 내겠소. 그러니 절이 완공되거든 알려 주시오.' 절이 완공되자 그 청년은 불당의 벽에다 유마힐(維摩詰)의 불상을 그렸습니다. 뛰어난 필치로 얼마나 정교하게 그렸던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삽시간에 알려져 이를 보러 오는 이들의 보시가 금세 백만전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이 바로고개지였습니다.

 

고개지(顧愷之)는 중국 동진시대 명화가로 서예의 왕희지와 함께 당시 예림의 쌍벽을 이뤘습니다. 그는 다재다능한 화가였으며 여기에다 독특한 인품으로 사안(謝安)은 그를 '천지개벽 이래 최고의 인물'이라고 했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삼절 (三絶:畵絶(화절). 才絶(재절). 痴絶(치절))이라고 불렀습니다. 痴絶(치절)은 그의 독특한 기행(奇行)과 유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사탕수수를 즐겨 먹었는데 늘 가느다란 가지부터 먼저 씹어 먹었습니다. 사실 사탕수수는 뿌리 부분으로 내려갈수록 단 맛이 더한 법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묻자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그야 점점 갈수록 단맛이 나기 때문이지(漸入佳境).'  - <진서(晉書) 고개지(顧愷之)> -

 

복음서의 저자들은 최고의 작가들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글에 담아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점입가경의 고수들입니다. 복음서를 한 번 보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1 1절부터 차근차근, 처음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읽어보십시오. 복음서 저자가 그려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숨죽여 따라가 보십시오. 그야말로 점입가경입니다.

 

복음서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대한 일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증언하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눈물나는 클라이맥스가 있고, 기막힌 반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구나 생각하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눈물나는 클라이맥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고, 기막힌 반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것만큼 드라마틱한 드라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복음서의 아류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우리가 TV에서 보는 드라마는 이것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더 드라마틱하고 더 큰 반전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우리의 현실이라기 보다,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픽션에 불과합니다.

 

복음서는 그와 같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픽션이 아니고, 그렇다고 논픽션도 아니고, 그야말로 진리입니다. 픽션은 꾸며낸 이야기고, 논픽션은 우리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존재를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의 증언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드라마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러한 복음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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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득수(蛟龍得水): 교룡이 물을 얻는다는 말 / 좋은 기회를 얻는 것을 비유한다

 

북조 후위의 무제 때 양나라를 공격하려고 이충이 병사를 선발하는데, 낮은 계급의 양대안이란 사람이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충이 자신에게 별관심을 주지 않자 양대안은 자신의 재주를 보이겠다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빨리 달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충은 그의 재주를 보고는 감탄하며 그를 군주의 관병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양대안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으스대며 함께 지내던 동료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나는 교룡이 물을 얻은 것과 같이 됐다. 이제부터는 너희들과 같은 대열에 서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얼마 뒤 통군으로 승진했으며, 여러 싸움을 통해 공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 <북사(北史) 양대안전(楊大眼傳)> -

 

하루에 두 번 바닷길이 열린다는 신비의 섬 제부도. 기독교인이라면 거기에 가서 그 옛날 모세가 홍해를 가르던 성경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아직까지도 모세가 어떻게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켰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다가 갈라졌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여호수아서 3장에 기록된 요단 강물이 갈라진 일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법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건넙니다. 법궤를 어깨에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물을 밟자 강물이 멈춰 섰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그들이 앞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벌이게 될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징표로 삼았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요단 강물이 갈라진 사건은 절묘한 타이밍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봄철이 되면 요단강이 범람을 하는데 강한 물줄기 때문에 절벽이 규칙적으로 깎이고 일부는 떨어져 나가 일시적으로 강을 막는 둑이 형성되어 강물이 막히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라고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저자도 참으로 대단한 영성의 소유자입니다.

 

우리는 흔히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말합니다. 준비된 자가 되기까지 뼈를 깎는 노력이 없으면 그 모든 일이 허사가 됩니다. 어쩌면 기회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이 열심히 노력을 해서 기회를 얻어 위대한 일을 해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고 자화자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보다 더 중요한 건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당신의 선한 손으로 도와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좋은 기회를 얻을 때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나를 감추고 그분을 더 드러냅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마다 그 일을 행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이 높여지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주님의 뜻 가운데 있고, 그분의 섭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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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 /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뜻

 

춘추시대 말엽, ()나라 헌공은 괵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통과국인 우나라 우공에게 통과허락을 요청했습니다. 우나라의 현인 궁지기(宮之寄)는 헌공의 속셈을 알고 우왕에게 이렇게 간언했습니다.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오라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괵나라와 우나라의 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결코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뇌물에 눈이 어두워진 우왕은 그럴리 없다고 듣지 않았습니다. 궁지기는 후환이 두려워 '우리나라는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과 함께 우나라를 떠났습니다. 진나라는 궁지기의 예견대로 그 해 말 괵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정복하고 우왕을 사로잡았습니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들이 즐비합니다. 긍극적으로는 음양의 조화로 그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순망치한한 관계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관계는 말씀과 기도의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 없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는 특별히 기독교에만 있는 의식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지니고 있는 의식입니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종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샤머니즘조차도 기도 의식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인간이 절대적인 존재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의식인 셈이죠.

 

그렇다면 타종교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말씀이라는 겁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드리지 않는 기도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건 종교의 보편적인 의식에 불과합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드리는 기도란 내 머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그리고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드리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한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기도는 비로소 나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 소원을 이루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거룩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있는 곳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주 만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존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기도해서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할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는 기도는 무엇을 이루어낼지 분명하게 압니다. 하나님은 참된 생명이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기도는 분명 생명을 일구어 낼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떼어놓지 마십시오. 서로 한 데 어울리게 하십시오. 생명이 피어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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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6. 2. 00:19

사해형제(四海兄弟) : 사해 즉 천하의 모든 사람이 다 자기 형제이다

 

공자의 제자 사마우(司馬牛)의 형 환퇴는 잔인하고 무도하여 한때 공자를 죽이려고도 하였고 송나라에서 모반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도망갔습니다. 사마우는 슬퍼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있지만 나는 형제를 잃고 외톨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자 자하(子夏)가 이렇게 그를 위로했습니다. ‘죽고 사는 것, 그리고 부귀는 모두 하늘에 달려있다. 군자에게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다 형제다. 그러므로 군자는 형제가 없다고 해서 걱정하지는 않는다.' –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 –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한창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시며 완악한 유대인들의 마음을 향해 경고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그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어리둥절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12:50). 

 

겉으로 보기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혈육을 부인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좋게 이해해 보려고 해도 별로 좋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정하시는 분이 어떻게 인류를 사랑한 구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절대로 당신의 가족을 홀대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의미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가족의 범위를 우주적으로 넓히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 사랑을 외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의 가족 외에는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죠. 자기 가족만 챙기고 다른 사람들은 남몰라 하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포괄적입니다.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포괄적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익과 능력의 범위 내에서만 베풀 수 있는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 범위가 기껏해야 나를 벗어나 우리의 가족 정도밖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물론 그것도 굉장한 일이긴 합니다. 가족을 통해서 자기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교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족을 넘어 우주적으로 사랑을 베풀라고 요청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십자가 사랑은 가족 구원이 아니라 우주적인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구원하는 능력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러한 능력 가운데서 구원 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사역의 범위를 우주적으로 넓힐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다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기준으로 형제자매의 범위를 설정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모든 만물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형제자매의 범위를 정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의 형제자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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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5. 26. 01:28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 /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다

 

공자는 자신의 도가 한 가지 원리로 꿰뚫어져 있다고 제자인 증자(曾子)에게 말했는데 증자는 그 한 가지 원리라는 것이 '()' 즉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과 '서()' 즉 자기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봐서 남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한편 다른 관점에서는 그 원리가 '()'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초지일관(初志一貫)'이나 '일관(一貫)되다'에서 보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한 번에 끝까지'라는 뜻으로 변형되어 쓰이기도 합니다. -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 이인편(里仁篇)'

 

‘천자문(千字文)은 한자를 “하늘 천()에서부터 “어조사 야()까지 천 개의 한자를 익히기 쉽도록 잘 배열 해놓았습니다.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해서 '언재호야(焉哉乎也)'의 어조사로 끝나는데, 자연 현상부터 인륜 도덕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글귀를 수록하여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자문을 ‘일이관지’ 하는 원리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약 39, 신약 27권 해서,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66권을 ‘일이관지’ 하고 있는 원리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인생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시작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늙어 죽는 것에까지 걸쳐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일이관지’ 하고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분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처럼 낮고 낮은 땅에 오셔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신 것일까요? 무슨 원리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일이관지’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한 가지로 묶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너무도 모르는 것이 바로 그 원리 입니다. 궁금하신가요?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틀림 없이 동의하실 겁니다.

 

천자문을 관통하는 원리도, 성경을 관통하는 원리도,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는 원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관통하는 원리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리도 모두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천자문을 외면서 우리는 생명의 원리를 깨달아 가고,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거기에서 참된 생명을 발견하고, 우리의 인생도 생명을 향한 갈구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그 자체이시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리 또한 생명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참된 생명을 찾아 떠나는 여행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명이 손에 안 잡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생명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아와 참된 생명이신, 생명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귀면 사귈수록 생명이 손에 잡힐 겁니다. 정말입니다. 참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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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지탄(望洋之歎):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감탄한다는 말 / 남의 위대함을 보고 자신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한다

 

먼 옛날 황하에 하백(河伯)이라는 강의 신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늙은 자라가 해 뜨는 쪽에 있는 북해(北海)가 훨씬 크다고 말했습니다. 하백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가을이 오자 황하는 연일 쏟아지는 비로 몇 배 더 넓어졌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늙은 자라의 말이 생각나서 북해를 한번 보기로 하고 강을 따라 갔습니다. 하백이 북해에 이르자 그곳의 해신인 약()이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넓은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은 이제까지 세상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북해의 신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였구려. 대해(大海)를 모르면 그대는 식견이 낮은 신으로 끝나 버려 사물의 도리도 모를 뻔했소. 그러나 이제 그대는 거기서 벗어난 것이오' -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 -

 

식견이 좁은 사람을 일컬어 우물 안 개구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은 식견이 좁은 것과 관련이 매우 많습니다. 알지 못하면 가만히라도 있어야 하는데, 식견이 좁은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인 양 우겨댄다는 겁니다. 이는 단순히 교육수준의 높고 낮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마음이 열려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식견이 좁은 사람의 예로 바리새인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공부를 적지 않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율법의 전문가들입니다. 이들의 율법해석과 율법지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모든 관리들도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을 따라 일을 처리해야만 그 권위를 인정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식견이 생각보다 높고 크지 못하다는 것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율법의 끝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메시아의 오심과 동시에 끝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고자 노력하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자 노력한 이유도 오실 메시아를 흠없고 티없는 가운데 맞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오실 메시아를 맞이한다는 것은 오실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율법이 대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하나님 나라인 예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는커녕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결국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율법대로 살아낸 이유가 바로 메시아 때문인데, 그 메시아를 손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니 이는 손수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들은 결국 율법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살지 못하고, 그저 율법의 닫힌 세계에만 살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살았다면,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했을 때, 즉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오셨을 때 그를 메시아로 알아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식견이 좁았기 때문입니다. 식견이 좁았던 바리새인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보였고, 이는 교만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진리에 대하여 몸과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 날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정적입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확정된 진리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깨어 기도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만이 우리의 식견을 넓히는 일이요, 교만해지지 않은 길이요, 구원을 놓치지 않을 유일한 방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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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불음도천수(渴不飮盜泉水): 목이 말라도 '도천'(도둑의 ) 물은 마시지 않는다 / 아무리 가난해도 나쁜 짓으로 돈을 벌지는 않는다

 

도천(盜泉)은 산동성 동북쪽에 있는 샘입니다. ()나라 육사형(陸士衡)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천의 물은 마시지 않겠네. 아무리 더워도 악목(惡木) 그늘에서 쉬지 않겠네'라고 고결한 선비의 정신을 읊었습니다. 한편 공자는 해가 질 무렵에 승모(勝母)라는 마을에 이르렀지만 어머니를 이긴다는 그 마을 명칭이 마음에 걸려 거기 묵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도천이란 샘을 지날 때도 목이 말랐지만 눈길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 '설원(說苑) 설총(說叢)' –

 

요즘은 이런 꼬장꼬장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도둑의 물이면 어떻고 어머니를 이기는 마을이면 어떠하냐, 내 마른 목을 채우는 게 먼저고, 내 피곤한 몸을 쉬게 하는 게 중요하지, 이런 마음이 판을 칩니다. ‘모도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우세인 세상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승리의 깃발을 들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형편의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난 척할 수 없습니다. 나 혼자만 의로운 척할 수 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대충 넘어가야 맘 편하고 몸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 혼자만 잘해서는 소용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이 어떠하든 나 혼자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린 생각이요 더 나아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중 스탠리 하우어워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If we want to change 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썩은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 하면 된다고 의지력을 기르는 것은 얼마 오래가지 못합니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 즉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혼탁한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에 젖은 독야청청한 인물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흐름을 바꾸는 일은 절대로 혼자서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겁니다. 한 몸을 이루어 함께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가라고 말이죠.

 

그런데 요즘 교회는 한 몸을 이루어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 몸을 이루어 세상 속에 뛰어들어 광란의 파티를 즐기고 있는 듯 합니다. 앞다투어 수천억 원이 드는 건물을 짓는다든지, 안면몰수하고 담임목사직을 세습한다든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치권과 결탁하여 여론몰이를 한다든지, 도둑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어머니를 이기는 마을에서 잠을 청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허무하면서도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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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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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불기(君子不器) :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 참된 인물은 편협하지 않다

 

공자가 한 말로 군자란 그 크기가 물건을 담는 데 불과한 그런 그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군자는 아닙니다. 지식과 아울러서 인격도 동시에 갖추고 덕을 실천하는 참된 인물이 군자입니다. 오기와 아집, 편견과 독선을 부리는 그런 편협한 사람은 결코 군자가 아닙니다. 융통성이 풍부하고 포용력이 많은 인물이 참된 인물인 것입니다. 성인군자라고 할 때 성인이나 군자나 모두 참된 인물을 말합니다. -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성인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인군자라는 말은 인간에게 쓰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성인군자로 표현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본 사람이면,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은 이 세상의 여느 성인군자중 한 사람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은 인류를 위한 구원 사건이 되는 겁니다. 구원은 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가능한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에게서 참된 종말론적 구원을 보았다는 것이죠. 그러한 거룩한 무리인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성인군자같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그릇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걸쳐 산상수훈을 설교하십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의, 그들보다 나은 의를 강조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의 그릇이 어떻게 그들과 달라야 하는지 율법을 재해석하시면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드러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위의 고사성어에 비추어 들여다보면, 결국 그리스도인은 지식과 아울러 인격도 동시에 갖추고 덕을 실천하면서 사는군자 같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해주고 있은 성경구절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1)입니다.

 

오기와 아집, 편견과 독선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능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뜻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이용하려 들 뿐입니다. 그러나 융통성이 풍부하고 포용력이 많은군자 같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종말론적 구원을 맛본 사람들이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참된 복된 인생임을 알고 그렇게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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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남(圖南): 붕새가 날개를 펴고 남명(南冥)으로 날아가려고 한다는 뜻으로, 웅대한 일을 계획하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북해(北海)에 곤()이라는 고기가 있다. 그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고기가 화해서 붕()이라는 새가 된다. 붕새의 등은 그 길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새가 한번 날아 오르게 되면 그 날개는 하늘을 덮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새는 바다에 물결이 일기 시작하면 남쪽 바다로 옮겨가려 한다. 남쪽 바다는 천연의 못이다.” - 장자(莊子) –

 

기독교에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에 대한 교리가 있습니다. 이는 의화(義化, Justification)와 영화(榮化, Glorification)의 중간 단계인데, 사실 편의상 단계를 구분해 놓은 것일 뿐, 실제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 단계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이신칭의의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이 바로 믿음의 순간인데, 그 순간 우리는 의로운 사람으로 일컬음을 받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정말 의로워져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신칭의란 풀어서 설명하면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수동적인 상태입니다. 자연적으로, 저절로 또는 내 힘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의로움이 덧입혀 진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칭의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 유명한 명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위의 고사성어에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이므로 북해의 곤이라는 물고기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만큼, 인간의 존재는 그 귀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너무도 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창작물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물건 자체가 귀하기 보다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명성 때문에 그 사람이 만든 물건도 귀하게 취급 받지 않습니까?

 

곤이라는 물고기가 화해서(변해서) 붕이라는 새가 되는 것처럼,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화해서(변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곤이 변하여 붕이 되어 웅대한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인으로 변하여 웅대한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과정 없이 곤이 붕으로 변하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원대하고 웅대한 일을 이루어드리는 하늘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이루는 웅대한 일들은 모두 이 땅 위에서 썩어질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웅대한 일을 이루고 싶다면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화되지 않으면,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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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규천(以管窺天):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다 / 좁은 소견으로 사물을 살펴 보았자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없다


춘추시대 말기에 훗날 의성(
醫聖)으로 일컬어지는 편작(扁鵲)이 괵이라는 나라에 갔을 때였습니다. 마침 병을 앓다가 죽은 태자의 병과 상태를 보고는 편작은 태자를 소생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궁정의사가 어이없어 하며 무책임하다고 하자 편작은 탄식을 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의술은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며(以管窺天)' 좁은 틈새로 무늬를 보는 것과 같소." 잠시 뜸을 들였다가 편작은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이 내 말을 정 믿지 못하겠다면 다시 한번 태자를 살펴보시오. 그의 귀가 울고 코가 벌름거리는 소리가 들려올게요. 그리고 양쪽 사타구니를 쓰다듬다가 음부에 손이 닿으면 그곳은 아직 따뜻할 것이오." 다시 진찰해본 결과 편작의 말이 맞았고 괵나라 임금은 편작에게 매달렸습니다. 편작이 침을 놓자 태자는 소생했고 치료를 더하자 20일 후에는 일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편작이 죽은 사람도 소생시킬 수 있다고 말하자 편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 게 아니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고친 것뿐이오" -사기(史記)-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을 넓혀가도 우리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천체 물리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 힘들 듯,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우리 인간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면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인간은 조금 아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부풀려 말하려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 간의 싸움도 결국 누가 좀 더 많이 알고 있느냐의 싸움이고 그것 때문에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전까지 인간은 이관규천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듭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일도 결국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능력은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는 수준이기 때문에 열린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고, 내가 아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자세로 상대방의 의견과 생각을 존중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진리가 밝히 드러나는 종말의 때까지 우리는 그러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때까지, 즉 종말의 때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정적입니다. 특별히 우리 인간의 손과 입과 생각을 거치는 것은 언제든지 왜곡되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참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스스로 진리를 드러내셨지만, 그것이 인간의 손을 거치고 제도화되면서 왜곡되고 타락하는 현상을 겪었습니다. 진리를 그대로 인식하고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최대한 진리를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보존하고 전하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무기 삼아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진리 자체로 드러나고 전해지는 날까지, 즉 종말의 때까지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마음을 활짝 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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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3. 15. 23:49

창해일속(滄海一粟): 푸른 바닷속에 있는 좁쌀 한 톨이라는 뜻 /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함


북송
(
北宋)의 명문장가 소식(蘇軾:소동파)은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으로 산문과 시에 뛰어났습니다. 그가 지은 적벽부(赤壁賦)는 천하에 다시 없는 명문입니다. 두 편으로 된 이 부()는 그가 황주(黃州)로 귀양갔을 때 지은 것으로 모든 세상사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신선에 기탁하여 그리고 있습니다. “‥‥그대와 나는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면서 물고기와 새우들과 짝하고, 고라니, 사슴들과 벗하고 있다. 작은 배를 타고 술바가지와 술동이를 들어 술을 서로 권하니, 우리의 인생이 하루살이처럼 짧고 우리 몸은 푸른 바닷속에 있는 한 톨 좁쌀(滄海一粟)같구나. , 우리의 삶이란 너무도 짧구나. 어찌하여 장강(長江)처럼 다함이 없는가?” 여기서 바로 '滄海一粟'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이 말에는 무한한 우주 속에 미미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무상함도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벽부(赤壁賦)-


이 고사성어는 성경에 등장하는
겨자씨를 생각나게 합니다. 좁쌀보다 더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우리 인생의 무게가 좁쌀보다 작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생살이에서 우리는 교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무게가 겨자씨보다 작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앙생활에서 우쭐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생살이가 좁쌀보다 크다 생각하고,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보다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려는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송우혜 씨가 쓴
<윤동주 평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크리스천 중에서도 돈도, 별 명망도 없기에 어떠한 세상 아래서도 별 위험이 없는 계층의 사람들이 남아서 교회를 지켰다. 그러고 보면 때론 없다는 것역시 하나의 힘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없는 것’, ‘작은 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있는 것’, ‘큰 것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큰 자로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영혼까지도 팔아 먹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없는 것’, ‘작은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약 세상이 주는 유혹인 있는 것’, ‘큰 자에 관심을 가지셨다면 골고다 언덕길은 걸어가지도 않으셨을 뿐더러 십자가는 한 낱 흉악한 처형 도구에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없는 것’,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기에 본인 스스로 없는 자’, ‘작은 자가 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는 모습이 이럴진대
,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있는 것’, ‘큰 자에서만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할 뿐, ‘없는 것’, ‘작은 자에게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저주스러운 것으로 부끄러워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겉으로는 십자가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그것을 경멸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푸른 바다 속에 있는 좁쌀 한 톨만하다고 해서 억울하거나 서글플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온 우주보다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의 존귀함은 교만하게 높아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낮아지는 데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새로운 창조의 때에는 모든 만물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되리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에 우리의 존재를 맡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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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3. 6. 10:27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 意自見):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스스로 보인다는 말 /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후한 헌제(獻帝) 때 동우(董遇)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유달리 학문하는 것을 즐거워하여 항상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녔습니다. 젊어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해 집안이 가난했지만, 불평없이 초야에 숨어 독서에 힘을 쏟았습니다. 나이 들어서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어, 학문을 좋아하는 헌제가 그를 불러 경서(經書)를 강론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강론을 들은 헌제는 그의 풍모에 반하여 곧 그를 발탁,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삼고 관리와 학생들에게 경서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동우의 명성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그의 문하에는 제자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게 배우기보다는 스스로 책을 읽고 또 읽어 보게.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된다네." - 삼국지 위지 왕숙전 주 (三國志 魏志 王肅傳 ) –

 

박사(博士)는 여러 가지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한 가지를 깊게 아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깊게 알려면 여러 가지를 두루두루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박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박사는 스스로 공부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사는 독립된 연구기관이나 마찬가지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죠.

 

스스로 뜻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무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면 스스로 뜻을 깨닫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법입니다. 책을 백 번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뜻을 깨닫기 위해서 무단한 노력을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은 진리에 드디어 손발을 담그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죠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에 손과 발을 담그기 위해서, 그래서 그 진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그 진리 안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 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이지만, 그것이 은혜인지 깨닫는 진리에 다가서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질문도 없이 의문도 없이, 그냥 앵무새처럼, 시계추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의미 없이 무의미한 말을 늘어놓으며 왔다 갔다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에겐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진리에 타는 목마름으로 은혜와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갑시다. 그것이 우리가 덧입고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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