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신앙2012. 2. 17. 02:40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에 있어서 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뜻


북방 국경 근방에 점을 잘 치는 늙은이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기르는 말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도망쳐 오랑캐들이 사는 국경 너머로 가버렸습니다
. 마을 사람들이 위로하고 동정하자 늙은이는 "이것이 또 무슨 복이 될는지 알겠소" 하고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 후 뜻밖에도 도망갔던 말이 오랑캐의 좋은 말을 한 필 끌고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축하해줬습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그것이 또 무슨 화가 될는지 알겠소" 하고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전부터 말 타기를 좋아하던 늙은이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들이 장애인이 된 데 대하여 위로하자 늙은이는 "그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하고 태연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 지 1년이 지난 후 오랑캐들이 대거하여 쳐들어왔습니다. 장정들이 활을 들고 싸움터에 나가 모두 전사하였는데 늙은이의 아들만은 다리가 병신이어서 부자가 모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회남자(
淮南子) –

 

우리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은혜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너무 인생을 무책임하게 사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새옹지마의 마음을 갖고 사는 건 우리 앞에는 언제나 희망이 놓여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모두 새옹지마처럼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새옹지마라는 말도 있지만, ‘엎친 데 덮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좋은 일이 계속되는 날도 있고, 나쁜 일이 계속되는 날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를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지금 당장은 지긋지긋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그 때가 그리운 법입니다. 그런데 이건 시간이 만들어주는 착각일 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그리워지는 법입니다. 그것이 어렵고 힘들었던 일이었을지라도 말이죠.

 

새옹지마와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은 좋아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산제물로 바쳐야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모리아 산으로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 수많은 갈등에 휩싸였을 겁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았다고 좋아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니요! 차라리 아들을 영영 못 낳았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던 데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끝에는 결국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입니다. 마지막이신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는데 서투릅니다. ‘제물은 어디에 있냐?’고 묻는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끝간데 모르는 갈등 속에서 대답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야말로 저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영혼의 탄식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의 인생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새옹지마와 같지만,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인생은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우리의 인생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붙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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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2. 5. 05:05

백중지세(伯仲之勢): 인물, 기량, 지식 등이 서로 비슷해 우열을 가릴 없다는


위나라 황제 조비는 '전론(
典論)'에서, ()나라의 대문장가인 부의와 반고 두 사람의 문장실력에 대해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뜻으로문인들이 서로를 경시하는 것은 예부터 그러하였다. 부의와 반고의 실력은 백중지간이었다. [文人相輕 自古而然 傅儀之於班固 伯仲之間耳]'라고 평했습니다. 백과 중은 본디 형제의 순서를 구별하여 부르던 말로 맏형을 백, 둘째를 중, 셋째를 숙(), 막내를 계()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백중은 형과 아우 또는 맏이와 둘째라는 뜻인데, 형제는 보통 외모나 품성이 매우 비슷하여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을 백중지간이라고 하였고 후에는 백중지세라는 말이 더 많이 쓰였습니다. -전론(典論)-

 

자본주의의 새로운 삶의 원리인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신자유주의 기본 원리는 무한경쟁입니다. 경쟁은 기본적으로 우열을 바탕으로 진행됩니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밑으로 내려갑니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원리입니다. 이게 사람이 사는 세상인지, TV에서만 보던 동물의 세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경쟁은 사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타락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같은 가치로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것은 더 귀하고, 어떤 것은 덜 귀한 것이 없습니다. 자연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 것도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인류 최초의 가정에서도 타락한 인간의 경쟁심이 살인을 불러왔습니다. 예배는 경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경쟁적으로 예배 드리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 그것입니다.

 

경쟁이 들끓는 곳일수록 타락이 극심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고린도 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경쟁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 자신들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서로 줄을 세웠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무엇인지 조금만이라도 맛본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경쟁이라는 단어를 그의 사전에서 지워버리게 될 것입니다. 경쟁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만들어낸 타락한 행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백중지세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잘 난 사람이 없고, 모두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대로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야 할 형제자매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이 세상에 저항하십시오. 경쟁해서 이기려 들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요 계명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경쟁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이 천국입니다. 이 땅 위에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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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불급설(駟不及舌):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 / 소문은 빨리 퍼지니 말을 삼가라는 뜻


자공을 보고 극자성(
棘子成)이 어느날 물었습니다. "군자(君子)는 그 바탕만 있으면 되지 어찌해서 문()이 필요합니까?" 이 말을 듣고 자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안타깝다. 그대의 말은 군자답지만, ()도 혀에 미치지 못한다. 문이 질과 같고 질이 문과 같다면 호랑이 또는 표범의 가죽이 개나 양의 가죽과 같다는 것인가." 자공은 말 조심하라는 말로 극자성을 꾸짖었습니다.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

 

위의 자공의 가르침에서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질과 형식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 조심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는 고사성어는 번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에서는 본질과 형식의 문제는 내버려두고, 말조심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합니다.

 

어느 앞에는 “Beware of Dog”라는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개조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집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개가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금방 달려들듯이 위협적으로 짖어댑니다. 개조심이라는 팻말이 없었으면 아마도 까무러칠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입만 열면 까무러칠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정도라면 사람은 애초부터 주변에 “Beware of Mouth 말조심이라는 팻말을 달고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욕설과 험담이 나오는 사람에게는 다가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물려 죽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조심 대한 교훈은 어디에나 등장합니다. 성경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이 다른 가르침과는 달리 도덕적 가르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복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 성경에 말조심에 대한 교훈이 나온다는 사실은 말조심과 구원이 연관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야고보서 3장은 온통 말조심에 관한 교훈으로 가득 있습니다.

 

어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내면을 있습니다. 망원경으로는 우주를 내다볼 있고, 현미경으로는 입자를 들여다볼 있는 것처럼, 말은 사람의 마음을 보게 주는 도구입니다. ‘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 속담이 있지만,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에는 분명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제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다면, 야고보서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입에서 어떻게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있겠습니까? 심은 나고 심은 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할 있게 해주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 말이 어느 누구, 지극히 작은 하나를 실족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Beware of Mouth”, 서로 간에 말조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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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암귀(疑心暗鬼): 의심이 생기면 귀신이 생긴다는 뜻 / 의심이나 선입견으로 인한 판단착오를 비유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습니다. 도둑 맞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 중에서 이웃집 아이가 수상쩍었습니다. 그의 걸음걸이를 보아도 그렇고, 안색을 보아도 그렇고, 말투 또한 영락없는 도끼 도둑이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밭두렁에서 도끼를 찾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웃집 아이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그의 거동이 조금도 수상쩍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말은 의심생암귀(
疑心生暗鬼)” 입니다. -열자(列子) 설부편(說符篇)-

 

인간은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봅니다. 얼굴에 눈이 달린 게 아니라, 마음에 눈이 달린 것이지요. 우리는 살면서 있지도 않은 귀신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 내는지 모릅니다. 모두 마음 때문입니다. 의심이 생기거나, 두려움이 생기거나, 마음이 약해졌거나, 심지어는 상대를 너무 좋아해도 귀신이 생깁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처럼 간사하기도 하고 미련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정신착란이 오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사람은 신앙을 정신의 투사라고 깎아 내리기도 합니다. 마음이 있지도 않은 신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과 진실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면 의심암귀에 불과합니다. 이미 그 마음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 귀신이 들러 붙어있는 것뿐이니까요.

 

성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3). 지금 우리 눈 앞에 예수님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분을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겁니다.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 것 같아도, 속은 이미 여러 귀신으로 더럽혀져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내 마음이 만들어낸 예수를 믿고 있을 뿐이지,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죽었다 3일만에 부활하신 그 예수를 믿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이 중요한 겁니다. 신앙은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는 훈련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알아보는 훈련입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신앙은 의심암귀의 신앙이 됩니다. 의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우리 마음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신앙에 투영시키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귀신을 떨쳐 버리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마음이 만들어 내는 신앙에 사로잡히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신 신앙으로 마음을 무장하십시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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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무사(大公無私): 매우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


춘추시대 진평공이 기황양이라는 자에게 물었습니다. "남양현에 장 자리가 비어 있는데 누구를 보내는 것이 적당하겠는가?" 기황양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습니다. "해호를 보내면 반드시 훌륭하게 임무를 해낼 것입니다." 평공은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대는 해호와 원수지간이 아닌가? 어찌하여 해호를 추천하는 것인가?" 기황양이 대답했습니다. "공께서 물으신 것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에 관한 것이지, 해호가 제 원수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여 임명된 해호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얼마 후, 평공이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 조정에 자리가 하나 비어있는데, 누가 적임자인가?" 기황양은 대답했습니다. "기오가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공이 이상하다는 듯 여기며 반문했습니다. "기오는 그대의 아들이 아니오. 어찌 아들을 추천할 수 있겠소." "공께서는 누가 적임자인지를 물으신 것이지, 기오가 제 아들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은 아닙니다." 결국 기오는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십팔사략(
十八史略)-

 

우리는 공평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공평한 대접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거나, 공평하게 일을 처리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공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누구는 부모 잘 만나서 호강하고, 누구는 부모 잘못 만나서 불행한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공평을 내 마음에 흡족한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마음이 흡족하면 그것을 공평하다고 느낍니다. 도대체 공평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공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죄 없는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그게 어떻게 공평합니까?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공평하지 않습니다. 힘 없는 사람이, 죄 없는 사람이 무고하게 꺾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몫을 조금이라도 더 찾아보려고, 마음에 만족할 만큼 자기 몫을 지키지 위하여 세상을 향해 투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불평공하게, 그렇게 끝나버리지 않았습니다. 공평하지 못하게 죽은 예수님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공평하지 못하게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공평하지 못한 세상을 비웃으셨습니다. 공평치 못한 세상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공평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외에는 그런 자리가 없습니다.

 

공평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인지 깨달은 만큼 공평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인지 깨달은 만큼, 공평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담지 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공평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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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점정(畵龍點睛):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나라의 장승요(張僧繇) 금릉에 있는 안락사(安樂寺) 마리를 그렸는데 거기에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히 생각하여 까닭을 묻자 장승요는 눈동자를 그리면 용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용이 벽을 차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용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수형기(水衡記)-

 

신앙생활에서 화룡점정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신앙을 완성시키는 요소일까요? 사람들은 흔히, 말씀대로 사는 , 믿음의 행위가 화룡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신앙생활을 완성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여깁니다. 특별히 성경 책인 야고보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생각이 굉장한 설득력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건 야고보서를 잘못 읽고 있는 겁니다.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는 믿음보다 행위가 중요하다 것도 아니고, ‘행위가 절대적이다 것도 아니고, ‘믿음과 행위는 같은 값을 가진다 것도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길라잡이라고 있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서 믿음의 속성을 파악할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형상을 보이게끔 해주는 일종의 성례전(Sacraments)라고 있는 것이죠. 야고서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게끔 해주는 굉장히 중요한 성경입니다. 눈과 귀를 지니고 사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믿음을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우리의 눈과 귀로 있도록 만들어 것이죠.

 

신앙생활의 화룡점정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이 화룡점정이라는 뜻은 구원과 연결이 되는데, 용의 눈에 하나를 찍어 용이 살아 움직여 하늘로 올라가게 것처럼,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화룡점정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마음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원은 믿음으로 오는 것인데,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니까 결국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앙생활의 화룡점정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있는 것이죠.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존재를 기울여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 않는 신앙생활은 화룡점정이 아니므로 살아 움직여 지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들의 나라이지 죽은 자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화룡점정 해야 살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화룡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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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선사마(射人先射馬): 상대편을 쓰러뜨릴 때는 먼저 상대편의 힘이 되는 것을 무너뜨리라는 말 / 사람을 쏘려면 그의 말부터 쏜다


이는 두보(
杜甫)의 시 '전출새(前出塞)' 에서 나온 말입니다.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을 쏘려면 먼저 타고 있는 말을 쏘고[射人先射馬], 적을 사로잡으려면 먼저 적의 왕을 사로잡으라[擒敵先擒王]. 사람을 죽이는 것도 또한 한계가 있고[殺人亦有限], 나라를 세우면 스스로 국경이 있다[立國自有疆]." 두보가 사인선사마에서 주장하는 것은 전쟁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죄 없는 백성들을 잘 보호하자는, 즉 인간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자는 뜻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의미가 변해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대편이 의지하거나 버티고 있는 대상을 먼저 쓰러뜨리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 두보(杜甫)의 시 '전출새(前出塞)' –

 

이 고사성어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가 참 좋습니다. 전쟁을 하더라도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특별히 인간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자 했던 시인 두보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물론 전쟁은 이 땅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 중의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생명입니다. 생명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아마도 생명이란 하나님을 닮아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이 신비한 것처럼, 생명도 신비한 것이죠. 그래서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만큼 존중 받아 마땅합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제 1의 사상도 결국 생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일컬어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하나님께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생명에서 멀어진 상태를 일컬어 라고 부릅니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속성 중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숨을 쉬고 살고 있다 해서 생명을 지닌 존재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쉼 쉬는 일일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 같지 않기도 합니다. 생명이 쉼 쉬기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숨 쉬는 일에만 몰두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살아 있다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한 참 부족해 보입니다. 숨 쉬며 살고 있는 우리는 생명을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모르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생명이란 늘 우리에게 낯익은 것 같지만 매일 낯설게 다가옵니다. 바로 하나님처럼 말이죠. 생명의 신비는 종말에나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드러난 참생명의 세계에서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생명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온 맘 다해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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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1. 12. 24. 00:10

삼고초려(三顧草廬):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 / 사람을 맞이함에 있어 진심으로 예를 다함


후한 말엽
, 유비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
軍師, 전략가)가 없어 늘 조조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어느 날 유비는 은사(隱士)인 사마휘에게 군사로 복룡(伏龍)과 봉추(鳳雛)를 천거 받게 되어 제갈량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선물을 가득 싣고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습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습니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 길에 나섰습니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유비는 그 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나라의 조조, 오나라의 손권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었습니다. -삼국지(三國志) 촉지 제갈량전(蜀志 諸葛亮專)-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뭔가 아쉬운 사람이 먼저 행동에 나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뭔가 절실하게 원하면 그것 자체가 에너지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구원이 그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왜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지 모릅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왜 우물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적으로 설명하면,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인간의 실존을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인간의 이러한 상태가 표현됩니다. 기계가 인간을 인질로 잡아 매트릭스에 가두어놓고 에너지를 인간에게서 빼앗아 쓸 때도 인간은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에 갇힌 것도 모르고 자신이 거기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사실 또한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누군가 와서 알려주던지 구원해 주지 않으면, 우물 안 개구리나 동굴 속의 인간이나 매트릭스 속의 인간이나 모두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아쉬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입니다. 그래서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일컬어 은혜라고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삼고초려 없이, 우리는 모두 멸망 받을 죄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삼고초려의 최고봉이고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삼고초려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날마다 성전의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고 당신의 비밀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삼고초려로 구원 받은 우리들, 이제 하나님께 삼고초려로 보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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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탐탐(虎視眈眈):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다는 말 / 어떤 일에 대비하여 방심하지 않고 기회를 노린다는 뜻


주역
64괘중에 ''라는 괘가 있는데 아래턱을 가리키는 말로 기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괘형은 두 양이 위아래로 있고 마음이 가운데 끼어 있는 형상으로 마치 사람이 입을 벌린 모습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괘덕으로 보더라도 이것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의 몸이 길러진다는 뜻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괘의 효사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꾸로 길러지는 것도 길하다. 호시탐탐하여 그 욕심을 좇아가면 허물이 없다.” 이괘는 인간 세상의 계급에 비유한다면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르는 위치인 대신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혼자의 힘으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백성들을 기르는 일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몸조차도 추스르기 어렵습니다. 천자와 백성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사람이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것처럼 하여 위엄을 갖추고 행동한다면 아랫사람들 또한 그를 받들게 될 것입니다. -주역(
周易) 경문(經文)-

 

긴장을 늦출 때 사고가 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이 긴장을 늦추는 일 없이 평생 살 수 있습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일찍 죽게 될 겁니다. ‘호시탐탐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긴장을 늦추지 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이는 것, 즉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행동 거지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 위엄과 존귀 가운데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안에 살고 계신 주님의 음성에 눈을 부릅뜨고 귀기울이고,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거나 실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않기 위해서 눈을 부릅떠야 합니다. 세상이 준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귀한 이름입니다. 귀한 이름은 귀한 줄 알고 귀하게 보존해야 귀해지는 겁니다. 눈을 부릅뜨고 삽시다. 눈을 부릅뜨는 건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뜻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긴장을 늦추지 말고, 세상에 대하여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세상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될 것입니다. ‘호시탐탐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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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용지묘(運用之妙) : 모든 것을 운용하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


여진족이 세운
나라 대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와 송나라 수도 개봉을 함락시켰습니다. 황제 휘종과 그 아들 흠종 그리고 황후 고관들이 사로잡혀 북방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로써 송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것입니다. 이 때까지의 9 168년간을 北宋(북송)이라 하고 흠종의 동생인 고종이 강남으로 난을 피해 항주에 도읍하여 송나라를 이은 후부터 남송이라고 합니다. 이때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금나라에 항전한 사람이 宗澤(종택)이었습니다. 그의 휘하에 악비(岳飛)라고 하는 젊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농민 출신이었지만 힘이 장사에다 지혜까지 갖춘 자였습니다. 어느 날 종택이 악비가 세운 계획을 보고 말했습니다. “자네는 용맹과 재능은 있으나 군의 진영을 짜는 방식이 조금 약한 것 같네.” 그러자 악비는 기죽지 않고 말했습니다. '진을 친 후에 싸운다는 것은 병법의 기본상식입니다. 그러나 운용의 묘는 자기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運用之妙在一心).” 악비는 이 말대로 금나라와 싸워 큰공을 세우고 명장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전쟁에서는 병법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기와 임전 자세도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송사(宋史) 악비전(岳飛傳)-

 

사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내켜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 말씀도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언 4:24).”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믿어야지 손과 발이 믿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손과 발()은 예배 당에 와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는 법입니다. 육체는 내 마음과 따로 놀 수 있어도, 마음은 육체와 절대로 따로 놀 수 없습니다. 로마서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0). 마음이 믿어야 입술에서도 올바른 고백이 나오는 법입니다. 입술은 허튼 소리를 할 수 있어도, 마음은 허튼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복음서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마음 내키는 일을 하십시오. 주의 일을 하는데 마음 내켜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지켜 달라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마음이 합한 일을 해야 선한 열매가 열립니다. 마음이 합한 일을 해야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끼칠 수 있습니다.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은 하면 탈이 납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서 주의 일을 합시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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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담병(紙上談兵): 종이 위에서 병법을 말한다는 뜻 / 이론에만 밝을 뿐 실제적인 지식은 없는 경우


전국시대 조
(
)나라에 조괄(趙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유명한 대장 조사(趙奢)였으며, 조사의 그늘에 있으면서 수많은 병법서를 읽어 병법에 능통했습니다. 그런데 조사는 아들에게 병권을 조금도 이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조사의 아내는 어찌하여 아들을 홀대하느냐고 묻자, 조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대를 다스리는 것은 국가의 존망과 관련된 일이거늘, 그 놈은 이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으니, 만일 그에게 병권을 주면 조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오.” 그 후에 조사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진()나라가 공격해 오자, 조정에서는 마땅한 인물을 고르다가 결국 조괄을 대장으로 삼았습니다. 조괄의 어머니는 조정으로 달려가 조괄은 대장의 그릇이 못되니 철회해 달라고 간청했고, 그 당시 재상이던 인상여(藺相如)도 간언했으나 효왕(孝王)은 듣지 않았습니다. 조괄은 자신만만하게 싸움에 나섰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고, 그의 군대 역시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사기(史記) 염파 인상여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신앙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된 상황을 말합니다. 안다는 것은 아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행함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신앙)는 죽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제자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 같았지만 결국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이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후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 그들은 온전히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목숨을 세상에 기꺼이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 자신에게는 예수님을 알아볼 능력이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니면서 아는 척 하며 세상에 나섰다가는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맙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아는 능력을 간구하십시오.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오늘도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달음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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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부실(華而不實): 사람이나 사물이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알맹이가 없음을 비유한 말

 

춘추시기, ()나라 대신 양처보(陽處父)는 위()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나라 영성의 한 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집 주인 영은 양처보의 당당한 모습과 비범한 행동을 보고 그와 함께 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양처보의 동의를 얻은 후, 영은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를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영은 온() 땅에 이르자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영의 아내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에 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다만 사납고 강한 성질로만 처세하고,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속으로는 덕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원망을 집중시키고 있소(且華而不實, 怨之所聚也). 이러한 사람을 따른다면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지도 못하고 이익은커녕, 도리어 그의 재난에 관련될 것을 두려워했소. 그래서 나는 그를 떠나 돌아 온 것이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우리 눈이라는 것이 믿을 게 못됩니다. 눈이 전해주는 정보만 따라갔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죠. 그러나 사람은 일반적으로 눈이 즐거워야 마음이 즐겁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이 세상은 모두 눈이 즐거워하는 것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혈안입니다. TV와 인터넷 등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그 현상은 더 두드러졌습니다. 눈이 즐겁지 않으면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의 속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TV이나 인터넷 대중매체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잘 디자인된 것들만 나옵니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 즉 눈이 즐거운 아름다움이 참된 아름다움일까요? 물론 거기에서 자유로운 현대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눈이 즐거우면 마음이 즐겁고, 눈 따라 마음도 가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움이 정말 그런 거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절대로 현대인에게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2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원래의 모습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미화(美化) 되긴 했지만, 십자가는 결코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눈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의미를 결코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사과가 아닙니다. 우리를 유혹해서 타락하게 만드는 거짓 조형물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의 외침이 서린 진리의 표상입니다.

 

십자가에서 참된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결코 이 세상에서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만 따라가지 않습니다. 겉모양보다는 알맹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겉모양에 신경 쓰고 거기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보다는 알맹이를 영글게 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합니다. 얼굴이 고운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시고, 마음이 고운 사람이 되십시오. 얼굴은 아무리 고와도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으나, 마음이 고우면 흐르는 시간이 벗이 됩니다. 이것을 요즘 시대의 미의 원리 또는 성형술의 보편성의 측면에서 이해하지 마십시오. 진리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맘몬신(돈신), 즉 두 주인을 한꺼번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선상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는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된 겁니다. 십자가의 순리를 따르는 아름다운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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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십가(駑馬十駕): 둔한 말이 열흘 동안 수레를 끌고 다닌다라는 뜻 / 이는 곧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함

 

순자의 수신편에는,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하지만, 둔한 말일지라도 열흘 동안 달려 간다면 이를 따를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則亦及之矣)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반 걸음이라도 쉬지 않으면 절룩거리며 가는 자라도 천리를 갈 수 있고, 흙을 쌓는데도 멈추지 않고 쌓아나가면 언덕이나 산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노마(駑馬)란 걸음이 느린 말을 가리키며, 재능이 없고 무능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말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하루 동안의 노정(路程)을 일가(一駕)라 하니, 십가(十駕)란 곧 열흘간의 노정을 말합니다. 이는 곧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 –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재주 없는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어느 정도까지 따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능을 지닌 사람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더디게 성장하는 나를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하루 만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를 노마가 열흘 동안 달려서 따라간다 한들, 그것이 노마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뱁새가 황새 좇아가다가는 가랑이만 찢어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자꾸 그런 것을 요구합니다
. 앞서 가는 사람을 따라가야 거기에 무슨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것에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각자의 교유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남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속도를 찾고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 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우쭐대지 말아야 합니다. 노마는 하루에 백리 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얼마나 성실하게 가느냐이지, 나에게 주어진 길이 아닌데 남 따라서 그 길을 달려가느라 괜한 고생하는 건 미련한 짓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자신의 속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빨리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속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빨리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별로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빨리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은 방향이 올바를 때 효과를 내는 것이지, 방향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 열심 때문에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됩니다. 올바른 방향을 향해 알맞은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주신 은혜대로만 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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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포지구(楊布之狗): 양포라는 사람의 개 / 겉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달라진 걸로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양주(
楊朱)의 아우 양포(楊布)가 아침에 나갈 때 흰옷을 입고 나갔었는데, 돌아올 때는 비가 오기 때문에 흰옷을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들어왔습니다그러자 집에 기르고 있는 개가 낯선 사람으로 알고 마구 짖어댔습니다. 양포가 화가 나서 지니고 있던 지팡이로 개를 때리려 하자 형 양주가 그것을 보고 양포를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개를 탓하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일 너의 개가 조금 전에 희게 하고 나갔다가 까맣게 해 가지고 들어오면 너는 이상하게 생각지 않겠느냐?" –한비자(韓非子)

 

이 고사성어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다니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적 사건이 세상에서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기적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사건은 그야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지만, 예수님의 이적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징표였습니다.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이적을 베푸시면서 놀라운 능력과 힘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힘도 없이 초라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보고 매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을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더냐!”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당장 내려와 봐라!”

 

십자가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옷은 흰 옷에서 검은 옷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전파하는 흰옷이 벗겨지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검은 옷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절망과 실망에 사로잡혀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겉 모양이 달라졌다고 속 모양까지 달라진 것으로 착각한 것이죠.

 

우리 인간은 겉 모양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죄성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사람들이 골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 속에서 좌절해야 할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끝이 형편 없어 보이는 십자가일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무엇이 생명의 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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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9. 15. 02:20

금슬상화(琴瑟相和): 거문고와 비파가 서로 잘 화합한다 / 부부 사이가 매우 좋다


시경 소아
(
小雅) 상체편(常棣篇)은 집안의 화합을 노래한 시인데 거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처자(妻子)가 매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妻子好合]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는 것과 같으며 [如鼓琴瑟] 형제가 모두 한 집에 모여 [兄弟歸翕] 화목하고 즐겁기만 하다  [和樂且湛]”. 그리고 부부 사이를 금슬이라고 하는 것은 시경 국풍(國風) 관저편(關雎篇)에 나오는 '얌전한 처녀를 아내로 맞아 [窈窕淑女] 거문고와 비파(금슬)를 타며 사이좋게 지낸다 [琴瑟友之]'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 시경 소아(小雅) 상체편(常棣篇) –

 

그리스도인에게 어떠한 관계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윤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입니다. 우리의 존재 근거는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또한 그것을 따르는 것이죠.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 방식은 그야말로 금슬상화입니다.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가장 좋은 예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존재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형상을 닮은 교회에 분쟁이나 분열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서 벗어났는지를 말해줄 뿐, 교회의 존재 방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형상을 회복해 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관계든 금슬상화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부부관계든, 부모자식관계든, 친구관계든, 교회공동체관계든, 어느 관계든 원리는 똑같습니다. 화목이란 일치된 마음에서 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면 우리의 삶은 언제든지 화목합니다. 서로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십자가 아래 모여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화목을 이루어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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