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띄워야 하는 승부수: 시대정신]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
예수와 바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저항과 해체의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와 바울의 저항은 아주 물리적인 저항이었다. 특별히, 제국과 제국신학이라는 물리적 현상이 저항의 대상이었다. 예수와 바울은 제국과 제국신학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나라(하나님 나라)와 신학을 구현하고자 했다.
제국과 제국신학은 중심부 사상이다. 힘 있는 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생산한다. 예수와 바울이 주목한 것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주변부의 주체-되기였다. 어떻게 하면,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삶을 다시 회복시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였다.
역사는 제국과 제국신학의 발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아주 교묘하게 중심부를 강화시켰고,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들을 아주 교묘하게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착취하지 않는 것처럼 착취하는 기만술을 발전시켰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체제'이다. 신자유주의는 마치 아무도 통치하지 않고, 아무도 착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자기 착취'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평할 외부상대가 없어 자책만 하다 결국 저항하지도 해체하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살아간다.
역사는 제국과 제국신학의 발전만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저항과 해체의 발전도 함께 있었다. 예수의 정신은 죽지 않는다. 예수와 바울의 저항과 해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단순히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시대 정신이다. 왜냐하면, 제국과 제국신학은 이전보다 거대하고 교묘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이다.
경제적/정치적 양극화, 통제 불가능한 과학기술 시대, 기후변화의 위기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라는 종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범주에 들어서고 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점점 '주체'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의 주체를 빼앗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존엄성을 말살시키고 있다. 이것을 인격 자살이라 부르고 싶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를 등에 업은 제국주의가 있다. 우리 시대의 메타내러티브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고, 모든 공간과 시간을 시장화시켜, 모든 존재를 자본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과 같다. 인류 역사에서 요즘 시대만큼 '자유'가 넘친 적이 없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류 역사에서 요즘 시대만큼 '착취'가 넘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는 자유로운 노예가 득실대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자유'에 취해 있지만, 실상은 그들이 모두 '노예'라는 사실이다. 자유에 취해 있다보니, 자신이 노예인줄 모르고 산다. 이것은 절묘한 제국신학이다.
이러한 제국신학에 저항한 선지자들이 있다. 마르크스가 있고, 벤야민이 있고, 푸코가 있고, 바디우가 있고, 아감벤이 있고, 지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제국신학에 저항한 선지자들이다. 이들 외에, 제국신학에 극렬하게 저항한 선지자로 기 드보르가 있다. 나는 기 드보르가 쓴 <스펙타클의 사회>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선지자들이 더 있다.
이들은 모두 주체를 교묘하게 무너뜨리는 제국과 제국신학에 저항한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제국신학을 해체하여 빼앗기고 무너진 주체를 다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신학을 제시한 이들이다. 교회는 때로 이들이 교회 안에 있지 않고, 교회 밖에 있다고 이방인 취급하거나 이교도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얼마나 제국과 제국신학에 물들었고, 그들과 한 편인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식 복음주의를 싫어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대중화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자본주의에 축성식을 벌인 형국과 같다. 그래서 미국식 복음주의는 중심부, 큰 것, 힘 센 것에만 관심을 둘 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체-되기 또는 자신들의 주체를 강화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 아무 것도 아닌 것들, 주변주로 밀려난 것들의 주체-되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주체-되기를 막는다. 그들을 악마화시켜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는다.
기후변화의 시대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변화를 인간이 맞닥뜨리게 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변화(change)라는 말보다 전환(transition)이라는 말을 쓴다.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변화가 발생하면 단순히 변화에 적응하는 정도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체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으면 전환을 감당할 수 없다. 즉, 전환이 발생하면, 주체의 전환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현대의 주체는 자본주의-주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인류세(Anthropocene)는 자본세(Capitalocene)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들, 경제적/정치적 양극화, 통제할 수 없는 과학기술 시대, 기후변화, 난민 문제, 홈리스 문제, 총기 문제, 약물 중독 문제, 국제 분쟁 문제 등은 모두 인류가 자본주의-주체로 빚어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주체가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낸다.
혹자는 이것을 인간의 죄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굉장히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인류가 맞닥뜨리는 문제를 자꾸 관념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 또한 그동안 교회가 얼마나 제국과 제국신학에 물들었고, 그들과 한 패가 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기독교는 유물론을 자꾸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물질/현실을 악한 것으로 보고, 영/이데아를 이상으로 보는 플라톤 철학에 오랫동안 기대어 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니체가 이런 말을 했겠는가. "기독교는 플라톤 철학의 대중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념론 신학이 아니라, 유물론 신학이다.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에서 간파했듯이, 아렌트가 지구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을 천명했듯이, 위에서 언급한 우리 시대의 선지자들이 유물론자들이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 천국의 신학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의 신학이다. 물질인 몸과 물질인 지구가, 즉 인간의 조건인 물질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그 존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21세기, 각 종 위기 앞에서, 무엇보다 기후위기 앞에서 교회가 띄워야 할 승부수, 시대정신은, 예수와 바울이 이미 그랬듯이, 저항과 해체의 정신이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주체-되기 프로젝트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교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범주에 들어섰다. 주체-되기 프로젝트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이야기이다.
그동안 교회가 제국과 제국신학에 봉사하는 동안, 교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는 주변부로 밀려나버렸다. 자본이 황제가 되고, 자본주의가 제국이 되고, 자본이 메시아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교회의 시대정신은 분명 자본주의와의 생사를 건 한 판을 벌여야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영국 틴데일 기후변화센터의 케빈 앤더슨의 보고에 따르면, 2050년에 90억 명에 이른 인류가 2100년까지 섭씨 4도 상승하면, 5억 명 정도만 살아남는다. 이는 지금보다 훨씬 악화된 대기오염뿐 아니라, 살인적인 폭염, 가뭄, 태풍, 홍수, 식량난, 식수난, 기후 전쟁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경고, 11쪽)
상황이 이런데, 교회가 '죽어서 천국 가는' 지구 탈출법을 가르치는 데만 그친다면, 어느 시점에서 교회는 인류와 함께 소멸되고 말 것이다. 교회의 시대정신은 이런 물리적 위협에 맞서 이 문제를 일으킨 근본원인을 파헤치고, 그것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교회에는 철저한 유물론적 사유와 신학이 필요하다. 지구의 구원 없이 인간의 구원은 없다. 자본주의-주체에 맞서, 그것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여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급진적-주체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기후변화를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 기후변화를 통해 인간 주체가 새롭게 형성되어 더 평화로운 세상이 임하게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