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정치적 비전]
성경 서사(Narrative)의 토대: 출애굽
성경 서사(Narrative)의 토대는 출애굽이다. 성경에서 출애굽기는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출애굽기의 반복/변주라고 보면 된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정치적/윤리적 비전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정치적 비전은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Freedom from oppression.) 하나님의 윤리적 비전은 자유인으로서의 삶이다. (자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핵심: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이러한 정치적/윤리적 비전의 완성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자유와 사랑의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와 사랑의 화신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와 사랑으로 점철된다. 우리는 자유와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의 현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자유와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삶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애굽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사랑은커녕 미움과 다툼의 삶을 살고 있다. 나 자신의 내면을 봐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국가, 세계 전부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여주고(반복해서 보여주고/모든 성경은 출애굽기의 재현), 우리를 격려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받은 최고의 복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유와 사랑의 나라를 갈망하고, 그 나라를 이루어 가라고 권면하고 독려하고 힘을 준다.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자유와 사랑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삶의 궁극적인 비전이다. 이 비전을 위해서 인류가 하나될 때, 이 땅에 평화가 임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이야기
요한계시록 11장 15-19절은 일곱째 나팔을 불었을 때 발생한 일에 대한 기록이다. 여섯 번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침내 마지막 나팔인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진다. 그때 요한이 본 환상은 하늘 예배이다. 그 예배에서 울려 퍼진 선포는 다음과 같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15절) ‘세상 나라’는 로마 제국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세상 나라는 애굽과 같다. 자유와 사랑을 묵살하고 빼앗아 가는 나라. 모든 사람들은 노예 만드는 억압과 폭력의 나라/체제이다. 이 나라가 이제 그리스도의 나라(하나님 나라)로 바뀐다는 선포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정치적 비전이다. 이 정치적 비전은 교회의 비전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비전이기도 한다. 우리는 교회로 한 몸을 이루어 이 비전을 마음에 품고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두 증인의 사역 결과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 이것이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라. 이 구절은 이후 기독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유럽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유럽 사회의 주류 사상이 된 이후 유럽의 나라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언제나 세상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하나님 나라)와 충돌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비전은 종말론적 비전인 것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종말론적 비전이란 인간이 이루는 비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끝내시고(end) 이루시는 비전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하나님의 때에. 그래서 우리는 일곱째 나팔 이야기에 나오는 하늘의 예배를 지금 여기에서 매주일(주님의 날에)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 세상 나라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바꾸려고 과욕을 부리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폭력만 난무하게 된다. 그것이 유럽 기독교의 역사이다. 세상 나라를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하나님 나라로 바꾸려 하다가 오히려 폭력만 난무하게 된 역사 말이다. (지금도 ‘성시화 운동’이라는 레토릭으로 그 종교적 폭력의 역사가 반성 없이 반복되고 있다.)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졌을 때 드러난 정치적 비전은 여섯 번째 나팔 이야기의 마지막에 등장한 두 증인 이야기와 한 쌍을 이룬다. 일곱째 나팔 이야기의 정치적 비전은 두 증인이 행한 사역의 결과이다. 두 증인은 억압 체제를 전복시키고, 우상숭배자들(억압과 폭력의 체제를 만드는 인간들(짐승들)의 회개를 이끌어 내고, 그들이 이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끔 했다. 두 증인의 사역은 폭력의 역사를 끝내고 새시대를 도래하게 했다. 두 증인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나라(하나님 나라)가 임하는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 두 증인은 교회/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론의 정치적 차원을 분명하게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비전을 본다. 교회/그리스도인은 자유와 사랑을 갈망한다. 폭력의 역사를 끝내고 자유와 사랑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두 증인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두루마리 책을 먹었기 때문이다. 먹어서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사역을 이어서 감당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두루마리 책을 먹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비전
두루마리 책(성경)을 먹으면, 정치적 비전이 생긴다. 정치를 현실 정치에 참여해서 정당에 가입하고 국회에 입성하고, 대통령이 되고, 이런 것을 생각하면 안된다. 성경(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정치적 비전은 삶의 자리에서 발현되어야 한다. 정치는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내 마음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나를 수양하고, 가정을 잘 건사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면, 비로소 온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다. 나 자신에게서,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에서, 국가에서, 세계에서 발현되어야 한다. 자유와 사랑을 빼앗기지 말고, 빼앗지 말라. 혹시, 누군가가, 또는 어떤 단체가, 국가가 인간과 피조물의 자유와 사랑을 빼앗고 짓밟는 일이 있다면, 비판하고 저항하라. 핍박당하는 자들과 연대하라. 자유와 사랑. 나는 성경(요한계시록)의 정치적 비전을 사랑한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의 의미 (0) | 2025.04.17 |
---|---|
The Meaning of Resurrection (0) | 2025.04.17 |
왜 루터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했을까? (0) | 2025.04.09 |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악마적인 진짜 이유 (0) | 2025.04.06 |
막돼먹은 추노꾼들의 세상 (0) | 2025.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