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은 없다

— 근대의 유령을 퇴치하고, 사건으로서의 복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개혁주의 또는 복음주의권 기독교인들과 소통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자주 듣게 된다. 나는 개혁주의자, 또는 복음주의자가 아니다 보니, 이 용어가 생경했다. 같은 기독교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이 그만큼 다양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는 어느 기독교 진영에 속하였더라도 그 위험성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이 글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밝히고 싶다. 혹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던 분이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틀을 통해서 기독교를 이해했던 분들은 이 글을 통해서 약간의 유익을 얻게 되길 바란다.

 

기독교 세계관. 누군가는 그것을 신앙의 골격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라 말하며, 누군가는 그것을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는 총체적 사유 체계처럼 제시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특정한 정치 이념과 정파적 충성을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유통한다. 이때 “기독교 세계관”은 더 이상 신앙교육의 보조 개념이 아니라, 현실을 분류하고 적과 동지를 가르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상징 자본이 된다. 나는 이 언어를 근본적으로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하겠다. “기독교 세계관은 없다.”

 

이 말은 기독교가 세상을 보는 눈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는 분명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을 가진다. 하지만 그 시선은 근대 철학이 만들어 놓은 의미의 “세계관”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하나의 폐쇄된 체계로 설명하는 총체적 사유가 아니라, 세계를 깨뜨리고 흔들고 다시 열어젖히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기독교는 체계(system)가 아니라 복음(Gospel)이고, 이론이 아니라 침입이며, 문명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돌발적인 자기 계시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은 기독교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를 길들이고 약화시키는 말이다.

 

1. “세계관”은 성경의 언어가 아니라 근대의 언어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세계관”이라는 말은 성경의 언어가 아니다. 초대교회의 언어도 아니다. 사도 바울의 언어도 아니고, 교부들의 중심 범주도 아니다. 이 말은 근대 유럽, 특히 독일 철학이 만들어 낸 개념이다. “세계관”(Weltanschauung)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포괄적 시야, 곧 세계 전체를 하나의 해석 틀 안에 넣으려는 근대적 사유의 형식이다. 이 말은 철학과 역사학의 문맥 속에서, 인간이 세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 속에서 부상했다. 여기서 이미 중요한 문제가 시작된다.


“세계관”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전체를 해석하고 정리하고 조직하려는 체계적 의지를 내포한다. 다시 말해, 세계관은 언제나 하나의 인식론적 질서이며, 곧 정치적 질서의 씨앗이 된다. 왜냐하면 세계를 이렇게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곧바로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 정치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사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공적 질서의 설계도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은 얼핏 경건하고 무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근대가 만든 거대한 장치 속으로 기독교를 끌어들이는 말이다. 이 말은 기독교를 복음의 자리에서 철학의 자리로, 계시의 자리에서 체계의 자리로, 제자의 자리에서 관리자와 설계자의 자리로 이동시킨다.

 

2. 이 근대의 언어는 어떤 경로로 기독교 안으로 들어왔는가

이 개념을 기독교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여온 대표적 인물은 아브라함 카이퍼다. 카이퍼는 1898년 프린스턴에서 행한 『칼빈주의 강연』에서 칼빈주의를 단지 교리 체계가 아니라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삶의 체계”(life-system) 또는 “삶의 시스템”으로 제시했다. 그의 논의는 종교, 정치, 과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삶 전체를 포괄하는 원리임을 강조했다.

 

카이퍼의 문제의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신앙을 교회당 안에만 가두는 경건주의를 비판했고, 그리스도의 주권이 삶 전체에 미친다는 점을 강하게 말하고자 했다. 특히 그의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 개념은 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환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영역의 고유한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그 모든 영역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있음을 선언하려는 시도였다. 이 대목은 지금도 유익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가 기독교를 “삶의 체계”로 말하는 순간, 복음은 점차 세계를 설명하고 사회를 조직하는 총체적 프로그램으로 변형될 가능성을 얻었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다”라는 고백은 복음의 선포인데, 이것이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적 정치 체계, 기독교적 학문 체계, 기독교적 문명 체계를 건설해야 한다”는 문장으로 옮겨가는 순간, 고백은 프로그램이 되고, 복음은 기획이 된다.

 

이후 헤르만 도예베르트는 이러한 흐름을 더 철학적으로 체계화했다. 그는 기독교적 사유의 근본 동기를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조로 설명하며, 기독교 철학과 학문이 독자적 출발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삼중 모티프는 이후 앨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1985)을 통해 북미 복음주의권에서 더욱 대중화되었다. 그의 개혁주의 철학은 “기독교적 학문”과 “기독교적 세계 해석”의 정당화를 위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흐름은 특히 북미에서 더 확산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관”은 교회 청년 교육, 기독교 대학, 문화 변혁 담론, 나아가 정치적 보수주의와 문화전쟁의 언어가 되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삶 전체와 연결하려는 선한 의도로 시작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보면, 이 개념은 기독교를 점점 더 하나의 총체적 문명 프로젝트로 오해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흘렀다.

 

3. 왜 “기독교 세계관”은 반복해서 정치 이데올로기로 변하는가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구조적 필연에 가깝다.

 

첫째,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체계이기 때문이다. 체계는 세계를 분류하고 위계화한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바람직하고 무엇이 위협적인지, 무엇이 질서이고 무엇이 혼란인지를 판별한다. 이 과정에서 세계관은 자연스럽게 정치적 판단의 장치가 된다. 세계관은 결국 “어떤 사회가 옳은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둘째, 세계관은 문명 프로젝트를 낳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하는 순간, 곧 “기독교적 사회”, “기독교적 국가”, “기독교적 법질서”, “기독교적 문화”라는 말이 따라온다. 여기서 복음은 증언이 아니라 건설 계획이 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아니라 문명 재건 본부가 된다.

 

셋째, 세계관은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늘 대립 구조를 만든다. 기독교적/비기독교적, 성경적/세속적, 우리/저들. 물론 기독교 신앙에도 분별은 있다. 그러나 복음의 분별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전선이 아니라 회개와 화해를 향한 부름이다. 반면 세계관의 분별은 매우 쉽게 문화전쟁의 논리로 이동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어느새 적을 색출하고 진영을 결집하는 정치적 기계가 된다.

 

넷째, 세계관은 권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를 “기독교적”으로 만들려면 결국 제도와 법과 권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계관 담론은 거의 필연적으로 정치와 결탁한다. 처음에는 가치의 언어였으나, 나중에는 선거의 언어가 되고, 입법의 언어가 되고, 국가 권력 장악의 언어가 된다. 이때 복음은 권력을 비판하는 말이 아니라 권력을 동원하는 말로 변질된다.

 

다섯째, 세계관은 종말론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중심은 인간이 건설하는 기독교 문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셔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다. 그런데 “기독교 세계관”은 자꾸 우리의 기획, 우리의 설계, 우리의 장악, 우리의 문화 형성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다. 하나님 나라의 급진적 미래성은 약해지고, 현재 질서를 재편하는 인간의 프로젝트가 중심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말론적 긴장을 잃고, 근대의 관리 이성에 종속된다.

 

4. “기독교 세계관”은 근대의 유령이다

나는 여기서 조금 더 거칠게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을 아무 비판 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근대의 기획에 사로잡혀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근대 철학이 만들어 놓은 총체성의 욕망, 문명 건설의 욕망, 질서 통제의 욕망, 정치 조직화의 욕망 속에서 사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은 대개 복음의 자유인이 아니라, 근대의 기획이 불러온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유령에 홀린 사람들이다.”

 

이 표현이 거칠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강력한 표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단순한 용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을 무엇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교회가 누구의 언어로 사고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세계관으로 바꾸는 순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근대적 이념 생산소가 된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사건이 아니라, 세계를 관리하려는 집단의 자기 확신 강화 의식으로 전락한다. 설교는 복음의 선포가 아니라 진영을 정당화하는 해설이 되고, 성도는 제자가 아니라 특정 프로젝트의 동원 자원으로 변한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현재 현실 교회에서 모두 목격되는 현상들이다. 이러한 일들이 교회를 사회적으로 무용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 세계관”은 단지 부정확한 말이 아니라, 교회를 길들이는 유령이다. 그것은 기독교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건으로부터 떼어내어, 근대적 총체성의 감옥 안에 가두려는 유령이다. 교회가 복음이 아니라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 교회의 민낯이다.

 

5. 기독교는 세계관이 아니라 사건이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본질은 체계가 아니다.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건.
그리고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지금도 세계의 주로 통치하신다는 사건.

 

기독교는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이다. 기독교는 세계를 조망하는 높은 탑이 아니라, 세계의 한복판으로 파고드는 하나님의 돌발적 침입이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체계가 아니라, 닫힌 현실을 찢고 들어오는 새 창조의 힘이다.

 

칼 바르트가 나치 시대에 교회가 국가 이념과 지도자 원리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며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1934년 바르멘 선언은 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하며, 다른 권력이나 이념을 계시처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 선언은 교회가 국가의 종이 되는 것을 거부한 사건이었고, 그 핵심은 하나였다. 교회는 어떤 역사철학, 민족주의, 국가주의, 지도자 숭배에도 사로잡힐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멘 선언은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붙들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전복성이 있다. 복음은 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봉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우상적 체계를 깨뜨린다. 민족을 절대화하는 체계도 깨뜨리고, 국가를 절대화하는 체계도 깨뜨리며, 교회를 권력화하는 체계도 깨뜨린다. 기독교는 “세계를 이렇게 보라”는 닫힌 관점을 주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가 이미 뒤집혔다”는 소식을 전하는 신앙이다.

 

6. 사건으로서의 신앙은 왜 전복적인가

앞서 기독교는 체계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 사건의 본성을 더 깊이 물어야 한다.

 

사건은 체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체계는 정리하고 통제하려 한다. 사건은 침입하고 뒤흔든다. 기독교 신앙이 사건이라는 말은, 그것이 기존 질서의 연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종교 질서의 연장이 아니었고, 십자가는 제국 질서의 연장이 아니었으며, 부활은 죽음의 질서에 대한 순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세계가 상식이라고 여긴 것을 전복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복음은 근본적으로 반체계적이다. 물론 복음이 아무런 내용도 없고 아무런 고백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교리는 필요하다. 신학도 필요하다. 그러나 교리와 신학은 사건을 봉인하기 위한 체계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충성스러운 증언이어야 한다. 교리가 복음을 통제하는 순간, 교리는 우상이 된다. 신학이 하나님의 자유를 가두는 순간, 신학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사건으로서의 신앙은 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안정적으로 장악할 수 없는 하나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확실한 체계를 원한다. 우리가 가진 입장이 옳다고 증명해 주는 사유의 요새를 원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욕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우리의 이념과 습관과 권력 의지를 해체하며,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로 부른다.

 

7. 하나님 나라는 세계관이 아니라 통치다

여기서 우리는 더 정확한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기독교는 “세계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만든 전일적 해석 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가 설계하여 완성하는 문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셔서 열어 가시는 새 현실이다.

 

이 점이 결정적이다. 세계관은 대개 “내가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세계 안에서 무엇을 행하시는가”의 문제다. 세계관은 관점의 문제이고,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문제다. 세계관은 인식의 범주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기독교 세계관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는 철학 강의가 아니라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 혁명은 칼과 군대로 오는 혁명이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고 죄인을 용서하며 원수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나타나는 혁명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의 정치성도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비정치적인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의 정치성은 세계관을 앞세워 국가를 장악하려는 정치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모든 국가와 제도와 권력을 상대화하고 비판하는 정치성이다. 기독교는 권력을 축성하는 종교가 아니라, 모든 권력이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신앙이다.

 

8. 교회는 세계관 생산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징표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을 생산하고 주입하는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먼저 살아 보는 공동체다. 교회는 세상을 장악하는 본부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징표다. 교회가 세계관 담론에 과도하게 집착할수록 종종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성도는 복음의 제자이기보다 논객이 된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행위이기보다 문화전쟁의 결의를 다지는 의식이 된다. 성경 읽기는 하나님의 낯선 음성을 듣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가진 입장을 정당화하는 자료 찾기로 전락한다. 그리고 교회는 결국 십자가를 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진영을 재생산하는 기구가 된다.

 

그러나 교회는 원래 그런 곳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국가보다 크고, 민족보다 깊고, 이념보다 자유롭다. 교회가 자신을 세계관의 수호자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오히려 교회는 작아진다. 왜냐하면 복음의 우주적 크기를 근대의 이념적 틀 안에 가두기 때문이다.

 

9.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유령을 퇴치해야 한다

나는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대의 기획이 불러온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유령을 퇴치하는 일.

 

이 유령은 아주 경건한 얼굴로 다가온다. 삶 전체를 위한 신앙이라고 말한다. 성경적 가치라고 말한다. 문화를 변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종종 거기에는 근대적 체계 욕망, 질서 강박, 문명 관리 본능, 정치 권력 의지가 숨어 있다.

 

물론 삶 전체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고백은 옳다. 그러나 그 고백을 “세계관”이라는 근대의 틀로 번역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잃고, 성령의 자유를 잃고, 복음의 돌발성을 잃고, 십자가의 약함을 잃는다. 남는 것은 대개 잘 조직된 언어, 단정한 체계, 그리고 정치적 유용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기독교는 체계를 넘어선다. 기독교는 체계를 부수고, 체계를 심문하고, 체계를 상대화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유가 인간의 질서를 침범한 사건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므로 진짜 신학은 세계관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복음을 다시 복음으로 듣게 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10. 결론: 세계관이 아니라 복음으로 돌아가자

다시 말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없다.

 

있는 것은 복음이다.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다.
있는 것은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이다.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다.
있는 것은 성령의 자유다.

이 복음은 어떤 세계관으로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이 만든 해석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여신 새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을 지키겠다고 외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됨을 회복해야 한다. 정치적 동원 능력을 키우겠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다시 배워야 한다. 세계를 설명하는 언어를 정교하게 만들겠다고 집착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건 앞에 자신을 열어야 한다.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는 시대는 지나가야 한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해야 한다. 체계를 말하는 시대는 지나가야 한다. 이제는 사건을 말해야 한다. 근대의 유령을 붙들고 교회를 조직하는 시대는 지나가야 한다.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자유 앞에 다시 무릎 꿇어야 한다.

 

개혁주의자, 또는 복음주의자들이 가진 신앙의 열정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이들이 주창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교회를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갇히게 만든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교회가 시대를 초월한 ‘계시’의 전달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시대의 발목을 잡는 ‘꼴통’ 역할을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21세기인데, 아직도 중세 신학이나 근대의 기획에 포획된 상태에 머문다면, 교회는 세상에 어떠한 새로움이나 희망을 주지 못한다. 이것은 교회가 시대로부터 외면당하고 거부당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이 현상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그 어려움을 극복해 보겠다고 ‘기독교 세계관’의 틀 안에서 더 큰 열심을 내는 것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 뿐이다. 이러한 어리석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은하철도 999와 AI 시대의 인간론

 

어릴 때 주일 아침이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기다리던 시간이 있었다. 교회에 가기 전 잠깐 허락된 그 시간에 나는 늘 같은 기차를 탔다. 우주를 달리는 기차, 그리고 그 기차 안에서 만나는 소년과 신비로운 여인. 바로 은하철도 999였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이야기의 모든 세부가 아니라 한 장면의 정서다. 검은 옷을 입은 긴 금발의 여인 메텔이 창밖의 우주를 바라보고 있던 모습. 그녀는 아름다웠고,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신비를 품고 있었다. 어린 나는 그 이야기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기차가 어딘가 인간의 운명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느낌만은 막연하게 느꼈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거기에 담긴 철학은 깊다.  가난한 소년 테츠로(철이)는 죽지 않는 기계 인간이 되기 위해 우주 여행을 떠난다. 인간이 기계 몸을 가지면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세계에서, 가난한 인간들은 약하고 쉽게 죽는다. 테츠로 역시 어머니를 잃은 뒤 강해지기 위해 기계 인간이 되기를 꿈꾼다. 신비로운 여인 메텔은 그런 그에게 은하철도 티켓을 건네며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그러나 기차가 수많은 별을 지나가는 동안 테츠로는 깨닫기 시작한다. 기계 몸을 가진 존재들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떤 별에서는 인간성이 사라지고, 어떤 세계에서는 영원한 생명이 공허가 되어 버린다. 여행의 끝에서 그는 결국 중요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놀랍게도 지금 우리 시대의 질문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로봇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며, 이제는 물리적 몸을 가진 AI, 이른바 'Physical AI'의 시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술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첨단 AI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AI 도구를 활용해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과 오히려 AI에 의해 일자리를 잃는 사람 사이의 격차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은하철도 999에서 기계 몸을 가진 부유한 존재들과 여전히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인간들로 나뉘었던 그 세계가, 지금 우리 앞에서 다른 형태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기술은 평등을 약속하지만, 현실에서 기술은 언제나 새로운 불평등의 언어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은하철도 999가 던지는 더 깊은 질문은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테츠로가 여행을 통해 목격한 것은 기계 몸을 얻은 존재들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고통이었고, 눈물이었고, 서로를 향한 연민이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는 타인의 고통에도 무감해진다. 죽음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삶의 무게도 함께 사라진다. 테츠로는 결국 기계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약함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생명 안에서만 가능한 어떤 깊이를 선택한 것이다. 고통받을 수 있기에 사랑할 수 있고, 죽을 수 있기에 오늘이 소중한 그런 삶의 깊이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메텔이라는 인물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메텔은 단순히 테츠로를 인도하는 안내자가 아니다. 그녀는 기계 문명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인간의 따뜻함을 잊지 못하는 존재다. 어쩌면 그녀 자신이 기계와 인간 사이의 경계에 선 존재일 수 있다. 그녀의 슬픔은 거기서 온다. 기계 문명이 약속하는 영원을 알면서도 그것이 인간에게 진정한 구원이 아님을 아는 자의 슬픔. 어린 시절 내가 그녀에게서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은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완전함과 영원함 앞에서 오히려 깊어지는, 불완전한 존재를 향한 애도와 사랑.

 

우리는 지금 기술이 약속하는 미래 앞에 서 있다. 그 미래는 분명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테츠로가 여행의 끝에서 물었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 질문은 이제 이렇게 바뀌어야 할지 모른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넘어서, 우리는 그것을 지켜낼 의지가 있는가. 효율과 최적화의 언어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비효율적이고 느리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방식을 끝까지 붙들 수 있는가. 은하철도 999가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결국 이것이 아닐까. 인간은 기계보다 약하다. 그러나 그 약함 속에서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다. 그리고 그 포기하지 않음이야말로, 어떤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존엄이라고 말이다.

Posted by 장준식

[지독한 오해와 오독]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異國少女)들,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 가난한 이웃사람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 모두 각자 고유한 언어로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말을 하고, 다른 말을 하고 있지만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 인생은 각자 고유한 언어를 가진 존재를 끊임없이 만나는 일이고, 인생의 성패는 그들의 언어를 얼마큼 이해했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그 사람의 언어를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도 없다. 오히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어 우리는 그 사람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존재보다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인생은 공부의 연속이다. 나와 다른 존재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의 언어를 공부해야 한다.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은 괴로움에 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언어를 일방적으로 말하는데 여념이 없다. 상대방은 당연히 나의 언어를 알아들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 중 가장 형편없는 믿음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폐기해야 할 믿음은 바로 이것이다. 나의 언어를 상대방은 절대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언어를 배우는 게 중요하다. 더불어 상대방에게 나의 언어를 가르쳐 주는 게 중요하다.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 이런 작업에 대한 실패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타인의 언어는커녕 나의 언어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나의 말만 쏟아놓았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나의 언어를 쓰고 있으니, 상대방이 나의 언어를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인간에게 공부란 언어를 배우는 것인 듯하다. 우선 나는 어떤 언어를 가지고 있는지, 내 언어의 속성과 특징은 무엇인지 면밀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상대방이 나의 언어를 알아들 수 있을지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상대방의 언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언어를 알아야 내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 안에서 상대방에게 말을 걸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말'이 언어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인간의 활동 모두가 언어다. 표정, 손짓, 발짓, 마음, 행동, 때로는 말하지 않는 침묵까지도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언어다. '말'이 의미를 전달하는데 가장 모자란 활동일 때도 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나의 존재 자체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여정인 듯싶다.

 

모든 존재는 각자 고유한 언어를 쓰기 때문에 오해는 피할 수 없다. 오독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시인의 말 대로, 거리에는 오독이 넘쳐난다. 그 오해와 오독이 우리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은 자비와 사랑을 요청한다. 자비와 사랑 없이는 오해와 오독이 생산해내는 수많은 고통을 참아내고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는 지독한 오해와 오독을 본다. 미사일이 푸른 하늘을 뒤덮고 비명소리가 고막을 찢어놓는 요즘, 자기의 언어, 그리고 타인의 언어를 전혀 공부하려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죄'라는 것을 본다. 각자의 언어만 늘어놓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맺는 죄악의 열매는 '죽음' 뿐이다. 그 진동하는 죽음의 냄새를 맡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시대의 존재들은 한없이 가엾고 슬프다. 나는 요즘 그냥 그 슬픔에 잠겨 있다.

 

Posted by 장준식

네 이웃을 네 몸을 위해 부려먹으라

ㅡ 애덤 커시의 『인류에 대한 대반란』 읽기

 

"객체지향 존재론은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장벽을 허물려 한다. 우리가 자신을 사람(person)이라고 이해하고 나머지를 모두 객체(object)라고 보는 방식을 버리고, 모든 사람 역시 하나의 사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애덤 커시, 『인류에 대한 대반란』, 47쪽)

 

위 인용문에서 '딜레마'는 인간 자신의 주관성(인간이 스스로를 주체(subject)로 생각한 것, 인간만이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것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기 위하여 스스로의 주체성을 극대화시킨 결과, 인간은 자신의 삶의 터전을 제 손으로 파괴하고, 존엄성을 지키지 못하는 몰락의 상황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인류는 몰락하고 있다. 적에 의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몰락하고 있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이러한 비극적 정황을 포괄적으로 담아내는 용어다.

 

현시대의 지성은 '근대'(modernity)를 사유한다. 근대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을 어떻게 형성했는가를 사유한다. 근대를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규정해 본다면, '근대는 주체의 탄생'이다. 이것은 처음에 굉장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인간이 비로소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근대 전까지만 해도 '인간' 존재는 미약했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압도당하면서 살았다. 거대한 동물에 비해 몸집과 힘이 미약했고, 대자연을 보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며 경외감에 사로잡혔고, '나는 누구일까'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신의 은총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근대는 이러한 인간의 자기 제약을 모두 깨뜨린 '사건'이다. 근대에 이르러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재해석하고 재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현시대의 지성은 바로 이 '주체의 탄생'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사유를 담아내는 용어가 바로 '인류세'이다.

 

인류세의 사유, 근대의 사유, 즉 '주체의 탄생'을 성경의 용어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근대의 주체는 성경을 살짝 뒤틀어버린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적 명령을 주체화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사랑의 극대화에 빠진다. 그래서 이러한 문장이 탄생한다. "네 이웃을 네 몸을 위해 부려먹으라." 우리는 온통 이 늪에 빠져 있다.

 

이 늪에 빠진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일단 죽여놓고 보자. 그래야 내 맘대로 먹을 수 있다. 삶아 먹든, 튀겨 먹든, 날것으로 먹든. 인간의 욕망은 이렇게 작동한다. 상대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내 맘대로 내 몸을 위해 부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다.

 

그런데 정말 더 큰 문제가 있다. 서로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서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자신이 어떠한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볼 메타인지도 함께 상실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네 이웃을 네 몸을 위해 부려먹으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시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 명령은 헤겔이 말한 '시대 정신'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시대 정신은 그만큼 잔인하고 포악하고 못됐다.

 

애덤 커시의 『인류에 대한 대반란』은 바로 이 메타인지의 회복을 돕는 치료제 같은 책이다. 이 책이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은 근대의 사고에 우리가 얼마나 깊이 묻혀 사는지다. 우리는 이미 근대라는 바다에 들어와 있다. 그렇다 보니, 물 바깥의 사고를 못한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사물 그 자체(things in themselves)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통해 구성된 어떤 것이다. 이렇게 주체는 심화되고, 사물(객체)은 상대화된다. 사물 그 자체를 알 수 없으니, 우리는 그냥 우리 마음대로 생각하고 우리 마음대로 처분한다. 커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객체지향 존재론'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틀을 제안한다. 주체와 객체의 장벽을 허물고, 인간 역시 하나의 사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 책에서 커시는 생태 철학자 티머시 모턴(Timothy Morton)의 책 『인류』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책의 부제는 '비인간 존재들과 연대'(Solidarity with Nonhuman People)이다. 우리 말로는 '비인간 존재'라고 옮겼지만, 영어로는 'Nonhuman People'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개 'people'이라는 용어를 '인간 존재'에게만 사용한다. 비인간 존재에게는 주로 'things'를 붙인다. 이런 생각은 근대의 특징이다. 근대에 비로소 인간 존재가 다른 존재에 비해 압도적으로 특별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인간 존재가 극대화된 것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창세기 이야기는 인간 창조의 이야기를 다룬다. 거기에 보면 명시적으로 나와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 진술은 근대에 이르러 증폭되어 해석된다. 인간의 주체성은 이 진술로 인해 정당화된다. 이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고, 인간을 둘러싼 모든 비인간 존재들은 인간의 번영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 인식된다. 이제 인간은 자신감 있게 비인간 존재들을 자신의 번영을 위해서 마음껏 써도 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것은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을 잘 지키는 자가 참된 신앙인이 된다. 인간은 폭주한다. 그 결과가 인류세다.

 

그러나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인간 주체의 폭주를 위한 면허증이 아니다. 바벨론의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저항이다. 바벨론 제국판 창세기라고 볼 수 있는 '에누마 엘리시'(Enūma Eliš)를 보면, 그들의 세계관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 수 있다. 에누마 엘리시에 의하면, 인간은 신들의 폭력 가운데 탄생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노예' 삼는 일은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그 폭력의 잔혹한 피해자였다. 그 폭력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이야기가 바로 구약성경의 창세기이다. 기본적으로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바벨론의 폭력에 맞선 하나님의 평화에 대한 이야기이지, 인간의 폭주를 허용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서 아직도 인간의 특별함을 사유하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여 비인간 존재들에 대하여 본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그들은 근대의 시대 정신에 사로잡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뒤틀어 '네 이웃을 네 몸을 위해 부려먹는' 일을 자신도 모르게 실천하고 있는 '비신앙인'일 수 있다.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실 테니 말이다.)

 

애덤 커시는 이렇게 말한다.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Solidarity with nonhuman people)는 그저 비인간 존재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동물, 식물, 돌, 폭포 같은 존재들이 세상 속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그 방식이 우리의 방식만큼이나 타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46쪽).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해서조차 비인간적으로 사유하고 대우하는 '인간 존재들'이 과연 '비인간 존재들'에 대하여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분명히 우리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성소수자들을 '비인간' 취급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유하는 이들이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라는 사유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동물신학'을 말했더니, 그런 게 성경 어디에 있느냐고, 성경적인 근거를 대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커시의 책은 바로 이 물음 앞에 우리를 세운다. 우리가 인간 존재들 사이의 연대조차 이루지 못하면서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를 말할 수 있는가.

 

인류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근대의 사유, 곧 인간중심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이려 하는 기술지상주의자들은 기술(technology)이 인류를 인류세의 위기에서 구원해 줄 거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렇게라도 인류가 구원받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근대가 가져온 가장 큰 문제는 '인간 존재들'과 '비인간 존재들' 사이의 '단절'(severing)이다.

 

교회는 이 깊은 '단절'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만 주구장창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단절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었다. 그것이 복음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극복한 그 복음, 그 화해 안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진력을 다해 살아야 한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 시대, 인류가 극복해야 할 '단절'은 무엇인가? 너무도 자명하다. "네 이웃을 네 몸을 위해 부려먹으라"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돌려놓는 것이다. 말씀과 현실 사이의 단절, 이 단절이 우리 삶의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는 인류가 극복해야 할 시급한 '단절'로 '인간 존재들'과 '비인간 존재들'의 단절을 말한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간만 'people'이 아니다. '비인간 존재들'도 'people'이다. 우리(Human Beings & Nonhuman Beings)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이다. 우리가 이러한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또는 '객체지향 신학'(Object-Oriented Theology)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인류는 인류세를 끝으로 이 땅에서의 여정을 마무리 짓게 될 것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6. 2. 27. 05:14

[비존재]

 

사라져간다

너도

나도

우리의 사랑도

 

잠시 걸터앉아

나눴던 이야기도

영영 잊혀지고

고왔던 숨결

힘, 위로, 설렘

마치 없었던 것처럼

아주 기억나지 않는,

아니

원래부터 그런 적 없던 것처럼

아무도 모르는

암흑 속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건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결코 기록된 적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독하는 세상은

가짜

 

진실을 아는 것은

너와 나,

그리고 신(God)뿐,

우리는 결국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비존재다

 

사라져간다

너도

나도

우리의 사랑도

 

안녕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실한

마지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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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야고보서 설교를 위한 서시

 

성경에서 가장 오용되고 있는 게 ‘요한계시록’이라면, 가장 핍박을 받아온 건 ‘야고보서’다. 야고보서를 핍박한 용어 중 가장 으뜸은 ‘지푸라기 서신’이다. 무려 마르틴 루터가 한 말이다. 4세기 아타나시우스를 통해 정경이 확정될 때 ‘겨우’ 정경에 포함되긴 했지만, 야고보서는 기독교 역사에서 ‘동네 북’이었다. 왜 그런 걸까?

 

바울 서신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초기 기독교 전통은 양분되어 있었다. 하나는 유대 기독교, 다른 하나는 이방인 기독교. 예수 사건은 유대 땅에서 발생했지만, 예수 운동은 유대 땅을 넘어 ‘땅끝’까지 전해졌다. 유대 땅을 넘나들던 이방인들이 그 도를 배워 전파하거나,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통해 예수 운동은 로마의 영토 곳곳에 전해졌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메시아 공동체는 유대 땅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때의 교회 지도자는 유대인이었다. 대표되는 사람은 바로 야고보의 저자로 알려진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다. 스캇 맥나이트는 그의 주석서에서 이런 말까지 한다. “나는 개신교 신자로서 로마 교황청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지는 않지만, ‘첫 번째 교황’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야고보를 택할 것이다”(35쪽).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발전한 메시아 공동체는 와해되고, 그 중심이 이방 교회로 옮겨갔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더 이상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수 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던 역사적 정황이 작용한 듯하다. 게다가 예수 운동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자, 율법 문제가 불거졌다. 이 상황은 사도행전에서도 다루어지는 이야기다. 유대인들은 ‘율법’(토라)을 금이야 옥이야 하지만, 이방인들에게 ‘율법’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 법전에 불과했다.  

 

헤게모니가 이방 지역으로 옮겨가자, 두 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하나는 유대교 전통과 이어진 기독교 문화는 점점 쇠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 속에서 유대인과 율법은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급기야 극단적인 상황을 발생시키기도 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출현한 것이다. 유대인 싫어!

 

이러한 상황은 야고보서에까지 불똥이 튀었다. 야고보서는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서신이었고, 바울 신학과 대척점에 서 있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어느 덧 이방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한 기독교 신학은 바울 서신을 바탕으로 도출된 신학을 기독교 신학의 ‘정통’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 신학과 다른 사상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성경은 배척되거나 바울 신학을 통해서 바울신학화 되어 다시 해석되었다. 급기야 이런 풍토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게까지 가닿았고, 루터는 야고보서를 향해 모진 말을 내뱉는다. “이 지푸라기 서신!”

 

이방 교회, 즉 라틴 신학(서방 신학)을 바탕으로 발전한 교회들에서는 여전히 바울 신학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바울 신학에 대한 연구서의 분량만 보더라도 그 위상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라틴 신학은 온통 바울 신학뿐이다. 바울의 고양된 기독론(High Christology)은 마치 기독교의 유일한 기독론으로 여겨져 왔으며, 여기서 벗어난 이야기들은 가치가 없는 것처럼 취급받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야고보서는 루터가 말하는 것처럼 ‘지푸라기 서신’이 아니며, 기독교 신학은 바울 신학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 뿐더러 야고보서는 바울 신학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라 바울 신학의 위험성과 오해를 바로잡아주는, 없어서는 안 될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보통 기독교인이 바울 서신과 야고보서를 대척점에 놓은 이유는 구원을 ‘믿음 대 행위’의 구조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말했고, 야고보는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 말했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유대교와 천주교를 향해 있기도 하다. 유대교의 율법은 행위 구원을 말하고, 천주교 또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 받는 것을 주장한다고 오해한다. 그러면서 오직 개신교만이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개신교만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개신교인들이 하고 있는 최악의 오해다. 이러한 오해는 그만 종식시키는 게 좋다. 나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야고보서의 말씀은 우리가 감당하기 쉽지 않다. 어떤 부유한 칠레 교회에서는 야고보서를 공개적으로 낭독했을 때 회중의 절반이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남미의 해방신학자 엘사 타메즈(Elsa Tamez)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고보서를 폭력과 착취로 고통받는 특정 국가의 기독교 공동체에 보낸다면, 정부 보안 기관에서 그것을 가로챌 가능성이 매우 클 것이다. 그 편지는 전복을 꾀하는 문서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다”(스캇 맥나이트, 야고보서 주석, 26쪽).

 

이 강력한 성경을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한 루터의 언급은 이제 잊는 게 좋다. 루터가 모든 면에서 권위를 인정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말한다. 21세기에 성서신학을 공부한 학생이 루터나 칼빈보다 몇 배는 더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권위 있는 자의 오독에 막혀 오해 속에 살 필요 없다. 권위 있는 자들의 안내 없이도 우리는 우리의 두 눈과 두 손으로 얼마든지 성경을 직접 읽고 판단할 수 있다. 야고보서를 직접 읽어 보면, 위에서 엘사 타메즈 교수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하나님, 메시아 신앙, 교회/공동체, 토라와 할라카, 구원, 믿음과 행위, 사회경제적 정의, 언어생활, 기도, 지혜, 종말론’ 등이다. 야고보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야고보가 이루고 싶었던 메시아 공동체는 ‘대안 공동체’이다. 다르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보면, 온통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일들 뿐이다. 야고보서는 그러한 것에 맞서, 다르게 살 권리와 지혜와 용기를 준다. 그렇다.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다. 사망에서 벗어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이렇게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야고보서의 그 감당하기 힘든 복음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 보자.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다!

Posted by 장준식

동굴에 갇힌 극우 세력

ㅡ 윤석열 1심 재판의 결과에 대한 극우 세력의 반응에 부쳐

 

1. 문제 제기: 인식의 위기와 공적 사실의 붕괴

어제(2026년 2월 19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재판에서 내란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고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죠. 이 판결은 단순한 형사 사건 판결이 아니고, 한국 사회의 헌정 질서가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를 증명하는 판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법원은 증거를 검토했고, 절차를 밟았으며, 판단을 내렸어요. 공화국(법치 국가)의 제도가 작동한 것이죠.

 

그러나 판결 이후 올라오는 뉴스를 보면 지지 집단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판결 자체를 거부하고 있어요.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오염되었다고 주장했고, 공개적으로 확인된 행위들마저 내란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죠. 사법부를 향한 온갖 욕설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귀연 판사는 오래 살겠어요. 극우세력으로부터, 그리고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내긴 것에 의아해하는 시민들로부터, 양쪽에서 욕을 이렇게 많이 먹고 있으니 말이죠.)

 

저는 이 현상을 단순히 패배한 정치 세력의 불만으로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극우 현상’은 더 깊은 무언가를 드러내 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바로 공통의 사실 기반(shared epistemic ground)의 붕괴입니다.

 

‘윤석열 내란 재판의 판결’이라는 동일한 사건을 보면서 한쪽은 일단 재판부가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내란이라고 규정하여 무기징역을 내린 것에는 안도하면서도 헌정 수호를 완전히 회복했다고 인정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게 많은 반면, 다른 쪽은 재판 결과를 아예 인정하지 않으면서 헌정 질서 자체가 음모의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윤석열 변호인단은 사법 시스템 자체를 믿을 수 없기에 항소 자체를 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서 판결 자체를 부정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동일한 판결을 두고 한쪽은 법치의 승리를 말하고, 다른 쪽은 사법 쿠데타를 말하는 것이죠. 이것은 단순한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인식론적 분열입니다. 두 집단이 공유하는 사실의 지평 자체가 무너진 것이죠.

 

저는 정치 철학적, 신학적 자원을 동원하여 이 현상을 조금 분석해 보려 합니다. 그냥, 제 의견이에요. 그냥 참고만 해주세요. 특히 플라톤의 인식론 ㅡ 억견(doxa/독사)과 인식(epistēmē/에피스테메)의 구분 ㅡ 과 신플라톤주의의 영혼론을 기본 틀로 삼되, 한나 아렌트, 위르겐 하버마스, 조르조 아감벤의 정치철학을 경유하여 현상을 다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회복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지금도 분노와 불안 속에 서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화해의 말을 건네고자 합니다.

 

2. 플라톤: doxa와 epistēmē의 존재론적 구조

플라톤은 『국가』에서 인식의 문제를 존재의 문제와 분리하지 않아요. 인식은 단순히 정보를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어느 층위에 접촉하고 있느냐의 문제라고 본 것이죠. ‘doxa’(억견, 혹은 의견)는 생성과 변화의 세계, 곧 감각의 영역에 대한 인식을 뜻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고 완전히 옳은 것도 아닌, 중간적 인식입니다. 반면 ‘epistēmē’(앎, 혹은 지식)는 불변하는 존재의 영역에 대한 인식이며, 참된 실재에 접촉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단순히 인식론적 위계가 아니라 존재론적 위계를 반영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굴의 비유’는 이 구조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동굴 안의 죄수들은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실재로 믿죠. 그들이 어리석거나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해 매우 정교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림자가 다음에 올지 예측하고, 어떤 그림자가 더 큰지 비교하며, 그림자의 이름을 붙입니다. 문제는 능력의 결핍이 아니라 방향의 고착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그들의 시선은 처음부터 벽을 향해 고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확증 편향, 막 이런 용어가 떠오르시죠?)

 

플라톤이 동굴 밖으로 나가는 과정을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periagōgē’(영혼의 전환)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에요. 전환은 새로운 정보를 수신하는 일이 아니에요. 그것은 영혼 전체가 다른 방향을 향하는 일이죠.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여기서 ‘회개’(메타노이아)를 떠올리실거에요.) 더 많은 그림자를 보여준다고 해서 전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동굴 밖의 빛을 보여준다고 해서 즉각적인 전환이 일어나지도 않죠. 처음에 밖으로 나온 죄수는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다시 동굴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이 구조는 오늘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윤석열 지지자들에게 더 많은 사실을 제시하고, 더 강력한 증거를 보여주고, 더 정교한 논리를 펼쳐도 그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들의 인식 체계 자체가 특정한 방향으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정말 답답하죠.) 판결을 거부하는 것은 사실 판단의 실패가 아니라, 존재론적 정체성의 방어인 것이죠. 그들에게 이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 전체가 재편되는 위협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동굴 밖의 빛이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이 현상에 대한 올바른 진단은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그들이 무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진심이에요. 전한길을 보세요. 진심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들은 자신의 세계 안에서 일관되게 사고를 합니다. 문제는 그 세계 자체가 왜곡된 기반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죠. doxa가 epistēmē를 대체한 상태(억견이 인식을 대체한 상태), 그림자가 실재로 오인된 상태, 이것이 인식론적 폐쇄의 본질입니다.

 

3.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분산과 회귀의 구조

신플라톤주의 시대를 연 플로티누스는 존재를 일자(The One)로부터의 유출(emanation)과 그것으로의 회귀(return)라는 이중 운동으로 이해합니다. 모든 존재는 일자로부터 흘러나왔으며,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내적 충동을 지닌다고 가르쳤죠. (기독교에서도 이런 가르침이 있죠. 우리가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는 가르침 말이죠. 따지고 보면, 그런 생각은 기독교 신학이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생긴 생각들이에요.) 인간 영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물질적 세계에 지나치게 깊이 몰입할 때 (이 상태를 플로티누스는 분산(dispersion)이라 부르죠), 영혼은 자신의 근원과의 연결을 잃어버립니다. 이 상태에서의 인식은 감정, 욕망, 집단 정체성에 의해 구조화됩니다. 논리적 추론 자체가 왜곡된 전제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비합리적이지만 내부에서는 완전히 합리적으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인식론적 폐쇄의 신플라톤주의적 해석입니다. 극단적 정치 집단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분산된 의식이 자신의 방식으로 체계화된 결과라는 겁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내적 정합성(internal coherence)을 지니고 있어요. 그래서 이들은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잘못을 느끼지 못해요. 쉽게 말해,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는 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그 정합성이 분산된 의식의 구조물이라는 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플로티누스에게 회귀는 논리적 설득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에요. 회귀는 논증이 아니라 내적 정렬(alignment)의 사건입니다. 영혼이 자신의 분산 상태를 인식하고, 더 깊은 실재를 향해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은 외부에서 강제할 수 없고, 오직 내부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기독교인들은 ‘회개’ 또는 ‘회심’ 사건을 떠올리실텐데요. 회개는 강제할 수 없어요. 성령의 역사라고 믿죠. 이것도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영향이에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 통찰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어요. 인식론적으로 폐쇄된 집단을 설득하려는 모든 노력은, 그 방식이 논쟁이든 조롱이든 강요든, 대개 실패하기 마련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분산된 의식에 외부 정보를 주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에요. 회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논쟁이 아니라, 영혼이 자신의 분산 상태를 비추어볼 수 있는 공간, 즉 조용한 성찰, 신뢰 관계, 공동체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에요.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교회 공동체가 더 중요한 시대에요. 물론 교회들이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해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묻는 분들에게는 좋은 인사이트를 제공할 겁니다.

 

4. 정치철학적 확장

1) 한나 아렌트: 공통 세계의 붕괴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분석에서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하고 있어요. 전체주의가 가능해지는 조건은 단순히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이 아니라, 공통 세계(common world)의 붕괴에요. 공통 세계란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동일한 사실에 대해 공유할 수 있는 지평이다. 이 공통 세계가 무너질 때, 정치적 판단은 불가능해집니다. 판단은 언제나 공유된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죠.

 

아렌트가 특히 주목한 것은 사실(fact)과 의견(opinion)의 관계에요. 민주주의적 공론장에서 의견의 다양성은 건강한 겁니다. 그러나 사실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될 때, 즉,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합의조차 없을 때 공론장은 기능을 잃는다고 말합니다. 아렌트는 이것을 "사실적 진실(factual truth)의 정치화"라고 불렀어요. 사실이 정치적 편의에 따라 재구성될 때, 정치 공동체는 공통의 기반을 잃고 각자의 허구 속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죠.

 

오늘의 한국 상황(미국 상황도 다르지 않은데요)은 아렌트의 진단을 정확히 예증합니다. 내란의 구체적 행위들(비상계엄 선포, 국회 봉쇄 시도, 선거 관리 기관 장악 명령)은 공개된 사실이죠. 그러나 이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그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느냐 아니냐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의견 차이가 아니라, 공통 세계의 붕괴입니다. 아렌트적 의미에서, 이 상태는 민주주의의 위기의 전조입니다. 아휴, 정말 위험한 상황인 거에요.

 

2) 하버마스: 의사소통 합리성의 위기

위르겐 하버마스는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공론장(public sphere)에서의 합리적 의사소통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진정한 의사소통은 강제 없이, 오직 더 나은 논거의 힘(the force of the better argument)에 의해 합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죠. 이 이상적 담론 상황에서는 모든 참여자가 동등하게 발언할 수 있고, 어떤 주장도 원칙적으로 검토의 대상이 되며, 합의는 권력이 아닌 논리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러나 인식론적 폐쇄가 심화될 때, 공론장의 성격 자체가 변합니다. 상호 설득의 장이 아니라, 집단 결속(in-group solidarity)의 장으로 전락하죠. 이 상태에서 논거는 공유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집단의 정서적 연대를 강화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사실 여부가 아니라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판단 기준이 됩니다. 이때 사법부의 판결도, 언론의 보도도, 학자들의 분석도 모두 "그들 편"의 음모로 읽히는 것이죠.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이것은 의사소통 합리성의 위기입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 절차의 반복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을 통한 공적 의사 결정의 과정이에요. 이 과정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죠. 선거는 있지만 공론은 없는, 절차는 있지만 숙의는 없는 상태. 이것이 하버마스가 경고하는 민주주의의 내부 붕괴입니다.

 

더 나아가, 하버마스의 진단은 소셜 미디어 환경이 이 위기를 어떻게 가속화하는지를 이해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알고리즘은 합리적 논거보다 감정적 반응을 증폭시켜요. 필터 버블은 다양한 관점의 접촉을 차단하죠. 이 환경에서 공론장은 파편화되고, 각 집단은 자신만의 인식론적 우주 속에 폐쇄되고 맙니다. 이것은 기술적 문제인 동시에 정치적 문제이며, 문화적 위기의 표현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정치적 양분의 극단적 상황은 소셜 미디어가 발달된 후에 발생한 일이에요.  그 이전에도 물론 의견 차이가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견해 문제 때문에 결혼할 때 정치적 성향을 묻지 않았죠. 친구 사이에 의절하는 상황도 없었구요. 부모님이랑 싸울 일도 별로 없었잖아요. 다양한 정치 의견을 지녔어도 신앙생활을 한 교회에서 함께 하는데 별 문제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분열도 이런 분열이 없습니다.

 

3) 아감벤: 예외 상태의 정치

조르조 아감벤은 현대 정치가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를 상시화함으로써 작동한다고 분석하고 있어요. 예외 상태란 법질서의 효력이 정지되는 상황을 말해요. 원래 예외는 비상사태, 곧 일시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러나 아감벤이 보기에, 현대 정치에서 예외는 점점 ‘정상’이 되어가고 있는 거에요. 비상이 일상화되고, 위기가 상시화되며, 예외가 규칙이 되는 겁니다. 비정상의 일상화 현상인 것이죠. 이렇게 예외 상태에 처해진 존재를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고 불러요. 호모 사케르에게는 폭력이 가해져도 처벌 받지 않죠. 나쁜 권력자들은 폭력을 마음대로 가하려고 사람들을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거에요.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아감벤의 분석을 섬뜩할 정도로 정확히 예증합니다.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헌정 질서 자체를 정지시킨다는 논리, 이것이 예외 상태의 정치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적들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고 그들에게 폭력을 가해도 처벌 받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겁니다. 정말 나쁘죠? 비상계엄이 성공했으면, 체포된 정치인들과 저항하는 국민들은 호모 사케르로서 무차별 폭력에 노출되었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지지자들이 이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들에게 내란은 헌정 질서를 위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호하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예외가 정상으로 전환된 겁니다. 제정신들이 아닌 거죠.

 

아감벤의 통찰은 더 어두운 함의를 갖고 있어요. 예외 상태의 정치는 법적 판단 자체를 무력화합니다. 법원의 판결이 "적법"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순간, 어떤 판단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법치의 기반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인 거에요. 민주주의가 법의 지배(rule of law)에 기반한다면, 이 부정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죠. 누가 정말 반국가 세력인지, 참 어이가 없죠.

 

5. 신학적 적용: 죄, 회심, 그리고 교회의 사명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왜곡된 인식을 단순한 무지나 오류로 이해하지 않아요.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자기 중심성(curvatura in se ipsum), 즉, 자기 자신 안으로 구부러진 존재로 파악합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진리를 원리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외면한다고 말하죠. 죄는 정보의 결핍이 아니라, 관계의 왜곡인 거에요.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진리와의 관계가 모두 자기 중심성 안에서 굴절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죄인 거죠.

 

이 신학적 진단은 플라톤의 인식론과 공명합니다. 동굴에 갇힌 죄수처럼, 죄에 사로잡힌 인간은 자신이 그림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림자가 실재처럼 보이고, 빛은 위협처럼 느껴지죠. 따라서 회복, 신학적으로는 회개/회심(metanoia)은 더 많은 정보를 주입하는 일이 아니에요. 그것은 존재의 방향 전환이며, 빛에 노출되는 사건입니다. 플라톤의 periagōgē(영혼의 전환)와 기독교의 metanoia(회개/회심)는 이 점에서 구조적으로 평행합니다. 둘 다 외부에서 강제될 수 없으며, 둘 다 깊은 내적 변화를 수반하고, 둘 다 고통을 동반하는 과정이죠. 이처럼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은 공명하는 점이 많아요.

 

이 신학적 틀 안에서, 극단적 정치주의의 인식론적 폐쇄는 단순히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문제라고도 볼 수 있어요.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복종, 사실보다 집단 정체성을 우선시하는 태도, 타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세계를 보호하려는 충동, 이것들은 자기 중심성의 정치적 표현인 거에요. 구원의 은총이 자기 중심성을 깨뜨리고 타자를 향해 영혼을 열어놓는 것처럼, 정치적 회복도 자신의 세계를 넘어 공통 세계로 나아가는 운동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교회의 역할은 권력의 편에 서는 것도, 특정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중심 권력을 차지하는 기관이 아니라, 진실을 증언하는 주변부 공동체(marginal community of witness)에요. 교회는 태생부터 주변부 공동체였어요.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중심부로 들어가면 안되는 거에요. 월터 브루그만이 말하듯, 예언자적 상상력은 지배 의식에 대한 애도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에너지를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교회는 공통 세계의 붕괴를 애도하면서, 동시에 공통 세계의 회복 가능성을 증언해야 합니다. 성경이 이런 일을 하고 있죠. 교회는 이러한 예언자적 전통을 결코 포기하면 안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교회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요. 첫째, 진실을 증언하는 거에요. 사실을 사실로 말하고, 왜곡을 왜곡으로 명명하는 것, 이것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예언자적 의무죠. 물론 이렇게 하려면, 위에서 말한 대로 ‘인식’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겠죠. 우선 목회자들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공부 많이 해야 합니다. 둘째, 화해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에요. 인식론적으로 분열된 집단들이 함께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해요. 논쟁이 아니라 경청이 가능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죠. 이것이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자원이에요. 로마서를 읽어보세요. 바울은 계속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거에요. (제가 조만간 내려는 ‘로마서’에 대한 책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나중에 꼭 한 번 읽어 주세요.) 셋째, 희망을 구현하는 일이에요. 공통 세계는 자동으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내로운 실천과 신뢰의 재건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교회는 그 실천의 공동체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이 시대에 교회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지 알 수 있어요. 물론, 반대로 이 시대의 교회들이 얼마나 어긋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여실히 드러나고요.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좀 더 힘을 내시면 좋겠습니다!

 

6. 억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지금도 분노와 불안 속에 서 있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즉, 아직도 윤석열을 지지하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 글이 그분들에게 읽힐지는 모르지만요.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말해보려 해요.

 

여러분이 느끼는 상실감과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익숙했던 질서가 흔들리며,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부정될 때, 인간은 붙잡을 것을 찾습니다. 강한 지도자, 단순한 설명, 명확한 적, 이것들이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적인 반응이에요. 플라톤이 이미 알았듯이, 동굴 안의 죄수들에게 그림자는 실재입니다. 그 실재를 빼앗기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조금 기억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여러분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판결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여러분의 존엄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당신의 삶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변화는 배신이 아니라 성장입니다. 의심은 약함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동굴 밖으로 나오는 일이 처음에는 눈이 부시고 낯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넓은 세계로의 초대입니다.

 

다수의 건전한 시민들은 여러분을 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을 원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남겨 두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나지 않았습니다. 최근의 상황을 보면, 공통 세계는 무너졌지만,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그 작업은 누군가의 굴복이 아니라, 모두의 회복을 요구합니다.

 

분노를 조금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확신을 잠시 내려놓고 질문을 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 것들이 여러분을 흔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빛은 위협이 아닙니다. 그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돕고 싶습니다. 내미는 손을 뿌리치지 말고 살포시 잡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함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7. 결론: 인식론적 위기와 민주주의의 미래

저는 윤석열 1심 판결에 대한 극우 세력의 반응을 단순한 정치적 불만이나 패자의 저항으로 읽는 것을 거부하고, 더 깊은 인식론적/철학적/신학적 분석을 해보았습니다. 플라톤의 틀에서 이것은 억견(doxa)의 동굴에 갇힌 영혼의 문제입니다. 신플라톤주의의 틀에서는 분산된 의식이 자신을 체계화한 결과입니다. 아렌트의 틀에서는 공통 세계의 붕괴입니다. 하버마스의 틀에서는 의사소통 합리성의 위기입니다. 아감벤의 틀에서는 예외 상태의 정치가 내면화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틀에서는 자기 중심성이 집단화된 형태입니다. 어떤 틀에서 보든,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이 다층적 분석이 가리키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인식론적 폐쇄는 논증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영혼의 전환이 가능한 공간, 공통 세계를 재건하려는 인내로운 실천, 그리고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자원을 권력의 지지가 아니라, 진실의 증언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점을 깊이 반성해 보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는 선거 기계가 아니잖아요. 민주주의는 공통의 세계를 전제하는 삶의 방식이잖아요. 그 공통 세계는 저절로 유지되지 않잖아요. 공통 세계는 용기 있는 증언, 인내로운 경청, 그리고 회복을 향한 끝없는 노력에 의해서만 지속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니, 이제 동굴에서 좀 나오게 되면 좋겠습니다. 제발! 주여, 도우소서.

 

동굴 밖으로 나온 자의 의무는 혼자 빛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가 다른 이들의 손을 잡는 것이에요. 저는 그것이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왕의 역할이며,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섬기는 지도자(servant leader)의 역할이며, 오늘의 시민사회가 감당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나 나는 동굴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메타인지의 촉각을 곤두 세우고, 동굴 밖으로 나와 빛을 경험하고, 그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는 자들의 손을 잡아 주려고 합니다. 함께 하시겠어요?!

 

 

 

 

Posted by 장준식

[페이스북(Facebook)을 통해서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요즘 페이스북을 열어 보면, 종교개혁은 이미 수백 번쯤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한국 교회를 향한 날 선 비판, 구조적 문제에 대한 통렬한 분석,

세습과 권력, 돈과 위선에 대한 고발이 연일 타임라인을 채운다.

댓글에는 공감의 이모티콘이 줄지어 달리고,

분노는 공유되고, 정의는 ‘좋아요’ 숫자로 증명된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이게 문제야.”

“이래서 한국 교회가 욕을 먹는 거지.”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많은 ‘개혁’이 매일같이 선언되는데, 교회는 그대로다.

공론장은 뜨겁고, 현장은 차갑다

 

페이스북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대개 개혁 성향이 강하다.

신학적으로 고민하고, 교회의 공공성을 말하며, 구조적 변화를 촉구한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진지하다.

나 역시 그 글들을 읽으며 때로는 깊이 공감하고,

때로는 속이 시원해진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우리가 비판하는 그 사람들,

교회를 망가뜨린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

기득권을 세습하고 구조를 고착시키는 그 사람들은

대개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임라인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긴 글을 끝까지 읽을 의지도, 관심도, 시간도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영향력의 계보와 기득권을 지키는 일이다.

 

나는 유학 시절 함께 공부하던 몇몇 동료들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교회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결국 세습을 택했다.

그들의 SNS 계정은 조용하다. 아니, 애초에 없다.

굳이 거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들의 세계는 온라인이 아니라, 이미 구축된 오프라인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페이스북에서 외쳐도,

그 소리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타임라인 안에서만 울린다.

 

우리는 서로의 분노를 확인하고, 서로의 정의를 재확인한다.

그러나 구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은 ‘좋아요’가 아니라 ‘침투’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페이스북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물론 그 시대에 SNS가 있었다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한 ‘비판의 확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장에 몸을 던진 사건이었다.

 

루터는 교회의 한복판에 서서 논쟁했고,

칼뱅은 도시 제네바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행정과 제도를 붙들었다.

종교개혁은 담론의 승리가 아니라, 공간의 재편이었다.

그들은 타임라인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강단과 교회 질서를 새롭게 했다.

 

종교개혁은 좋아요의 숫자 확보가 아니라, 위험의 감수였다.

 

문제는 ‘현장’이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페북에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성토하는 글만 써서는 절대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

공감은 형성될지 몰라도,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개혁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바른 교회를 세우고 싶은 사람들, 신학적으로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사람들, 그들이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의 벽이 등장한다.

 

기존 교회에 들어가면 갈등이 생긴다.

기득권 구조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사임하는 경우도 많다.

개척을 하려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

가족의 생계, 아이들의 교육, 현실의 숫자들이 신학적 이상을 압박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페이스북으로 돌아온다.

현실 대신 담론을 선택한다.

몸 대신 문장을 선택한다.

 

그러나 현장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역사는 언제나 ‘현장’을 통해 움직였다.

성육신은 하늘의 선언이 아니라, 땅의 침투였다.

하나님은 게시글을 올리지 않으셨다. 몸을 입으셨다.

 

교회 개혁도 마찬가지다.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작더라도, 느리더라도, 불편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개혁적인 공동체를 세우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거대한 혁명이 아니어도 된다.

작은 교회에서 투명한 재정을 시작하는 것,

설교에서 정치적 선동이 아닌 복음을 선포하는 것,

권위를 내려놓고 공동체적 리더십을 실험하는 것,

청년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이 ‘현장 개혁’이다.

 

페이스북은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침투의 계획이 필요하다.

 

나는 때때로 이런 상상을 한다.

페이스북에서 분노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10%만이라도 실제 교회 구조 속으로 들어가 변화를 시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장로로, 교사로, 부목사로, 평신도 리더로,

혹은 작은 개척 교회의 목사로, 또는 동역자로.

 

현장에 침투하려는 계획이 필요하다.

구조를 이해하고, 재정 흐름을 배우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옛 관행을 조금씩 밀어내는 전략.

 

개혁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인내의 설계다.

 

페북으로는 종교개혁을 이룰 수 없다.

 

페이스북은 필요하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그곳은 공론장이지만, 교회는 공간이다.

공감은 클릭으로 가능하지만, 개혁은 땀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타임라인 위에서 개혁을 꿈꾸어 왔다.

이제는 타임라인을 내려와야 한다.

 

현장으로 가야 한다.

현장에 들어가, 현장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작은 균열이 시작될 것이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개혁은 작은 균열을 내는 진지전(war of position)으로만 가능하다.

장기적 헤게모니 구축 전략이 필요하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더라도

주구장창 그 자리에서 작은 균열을 내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일은 부질없다.

스펙타클은 균열을 내지 못한다. 기득권이 되는 통로가 될 뿐이다.

 

종교개혁은 댓글 창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강단과 교회 회의실과 교회 재정 장부와 교육부 교실에서 일어난다.

 

페북을 통해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현장으로 들어간다면,

현장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작은 균열이라도 내겠다고 다짐하며 땀을 흘리면

그때부터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눈물을 삼키며 현장에서 ‘존버’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페이스북 #교회개혁 #존버목회 #현장 #그람시 #진지전 #스펙타클 #종교개혁

Posted by 장준식

요즘은 병원이 성전이고 의사가 사제다

— 생명관리정치와 교회의 재위치

 

1. 사제의 자리가 비었다

도시의 중심부에 무엇이 서 있는가를 보면, 그 시대가 무엇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다. 중세 유럽의 도시 한복판에는 대성당이 있었다. 마을의 시간은 종탑의 종소리로 흘렀고, 탄생과 죽음의 의미는 사제의 입을 통해 해석되었다. 사제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존재였고, 고통을 신학적 서사 안에서 의미화하는 자였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의 중심에는 대형 병원이 서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고통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대신 치료의 가능성을 묻는다. 죽음은 신학적 사건이 아니라 생물학적 실패가 되었고, 구원은 은총이 아니라 연명의 문제가 되었다. 고통을 해석하던 사제의 자리에 이제 의사가 앉아 있다. 이 자리 이동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이후 국가와 생명과학이 결합하면서 만들어낸 거대한 구조적 전환의 결과다.

 

2. 생명관리정치의 계보: 국가는 어떻게 생명을 통치하게 되었는가

이 전환을 가장 날카롭게 분석한 사상가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다. 푸코는 근대 권력의 본질이 ‘죽일 권리’에서 ‘살게 하고, 죽도록 내버려두는 권력’으로 변화했다고 진단했다. 그가 ‘생명권력(biopower)’이라 부른 이 새로운 권력 형태는 개인의 신체를 훈련하고 규율하는 ‘해부정치(anatomo-politics)’와, 출산율·사망률·질병·기대수명 등 인구 전체를 관리하는 ‘생명정치(biopolitics)’로 작동한다. 병원·학교·감옥은 이 생명관리의 핵심 제도적 장치다(『성의 역사』 제1권, 1976;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976 강의).

 

푸코의 스승이자 과학철학자인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은 이 전환의 인식론적 토대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저서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Le Normal et le pathologique, 1943/1966)에서 캉길렘은 ‘정상(normal)’이라는 범주가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규범임을 밝혔다. 의학은 치료 이전에 삶을 재단하는 잣대를 제공한다. 교회가 ‘죄/은혜’의 언어로 인간을 분류하던 자리에, 이제 ‘정상/비정상’, ‘건강/질병’의 의료적 언어가 들어선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푸코의 분석을 더욱 급진화한다.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 1995)에서 아감벤은 근대 정치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생물학적 생명(zoē)’ 자체를 직접 통치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시민은 점점 권리를 가진 인격이 아니라 연장 가능한 생명 단위로 환원되며, 병원은 치유의 공간이기 이전에 누가 살 가치가 있는지를 판정하는 ‘예외 상태’의 일상화된 공간이 된다. 여기서 의사는 치유자 이전에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는 준(準)사제로 기능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 현상을 인간 조건의 근본적 붕괴로 진단한다.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을 노동(labor)·작업(work)·행위(action)로 구분하면서, 현대 사회가 생존을 위한 노동에만 몰두하는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의 사회가 되었다고 경고했다. 정치의 목표가 ‘잘 사는 삶(eu zen)’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 자체가 될 때, 의미·책임·희생에 대한 물음은 사라지고, 오로지 생명의 연장만이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이 모든 흐름의 귀결을 가장 직설적으로 선언한다. 전직 가톨릭 사제이기도 했던 일리치는 『의료의 보복: 건강의 수탈』(Medical Nemesis: The Expropriation of Health, 1975)에서 현대 의료가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병원은 성전이고, 의사는 새로운 사제이며, 환자는 스스로 고통을 해석할 능력을 상실한 수동적 신자다. 일리치의 통찰은 섬뜩할 만큼 정확하다. 우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우리는 관리된다.

 

3. 교회가 중심에서 밀려난 진짜 이유

이 계보를 따라가면, 교회가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유가 분명해진다. 교회가 무능해서 밀려난 것이 아니다. 국가가 생명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건강검진에서 연명치료까지, 국가는 시민의 생명 전체를 측정·기록·관리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 체계 안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종교적 언어는 ‘비효율적인 것’으로, 고통의 신학적 해석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중심부에서 퇴장당했다. 생명관리정치의 시대에 교회는 필연적으로 주변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이것이 정말로 몰락인가?

 

4. 주변부에 선 교회: 본래의 자리로의 귀환

여기서 우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에 선다. 교회가 중심부를 잃은 것을 안타까워하거나, 중심부에 있지 못하는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교회는 본래의 자리를 회복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은 성전의 중심부에 계시지 않았다. 병자·세리·죄인·여성·이방인의 곁에 계셨다.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변두리 갈릴래아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주변부에서 중심부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중심부의 권력이 은폐하는 것을 폭로하고, 중심부의 논리가 배제하는 자들을 불러 세우는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사건이었다.

 

정치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는 이 주변부의 신학을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이라는 개념으로 정초했다. 『역사와 사회 속의 신앙』(Faith in History and Society, 1977)에서 메츠는 고통받는 자들의 기억이야말로 승리자의 역사를 중단시키고 심문하는 비판적 힘이라고 주장한다. 병원이 관리하지 못하는 것, 국가가 기록하지 않는 것, 생명관리정치가 삭제하는 것 — 바로 고통의 의미, 죽음의 존엄, 희생의 가치에 대한 기억. 교회는 이 기억의 공동체로서 체제를 심문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 1964)에서 교회의 사명이 현존하는 체제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현실을 넘어서는 종말론적 상상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생존의 연장만을 최고선으로 삼는 사회에, 생존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종말론적 증언이다.

 

5. 생명관리정치 시대, 교회의 증언

그렇다면 생명관리정치의 시대에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회는 더 이상 생명을 관리하지 않는다. 생존을 절대화하지 않으며, 정상과 비정상을 판결하지 않는다. 대신 교회는 병원이 다루지 못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언제 멈추는 것이 존엄한가. 고통은 제거의 대상인가, 아니면 의미의 장소인가.

 

국가가 시민을 ‘관리되어야 할 생명’으로 환원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이라는 언어로 저항한다. 의료 체계가 ‘살 가치가 있는 생명’과 ‘연명의 비용 대비 효율이 낮은 생명’을 구분하려 할 때, 교회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존귀하다고 선언한다. 생명보다 큰 것 — 사랑, 희생, 책임,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6. 결론: 밀려남이 아니라 귀환이다

교회가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은 몰락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셨던 자리로의 귀환이다. 병원이 성전이 된 사회에서, 교회는 생명을 관리하는 자리가 아니라 생명이 왜 존귀한지를 묻는 자리에 서야 한다. 중심부에서 밀려난 교회를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주변부에 선 교회만이 중심부의 폭력을 드러내고, 중심부가 삭제한 질문을 복원할 수 있다.

 

주변부. 그곳이 예수께서 계셨던 자리이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자리이며, 교회가 서야 할 본래의 자리다.

 

 

#사제에서의사로 #생명관리정치 #바이오폴리틱스 #병원이성전이된시대 #교회와정치신학 #주변부의신학 #중심을비판하는교회 #푸코와생명권력 #아감벤과벌거벗은생명 #몸의정치 #의료의성전화 #현대도시의권력 #하나님나라의전복 #주변부에서오는복음

Posted by 장준식

중심이 아니어도 괜찮아

ㅡ 진짜 중심은 어디인가

 

모든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듯,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중심'을 향해 요동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화려한 불빛이 꺼지지 않는 곳, 목소리 큰 사람들이 모여 지도를 그리는 곳, 그리고 안전과 성공이 보장된 것만 같은 그 핵심부로 진입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합니다. 서울의 고층 빌딩 숲이든, 직장의 핵심 부서든, 혹은 누군가의 기억 속 가장 소중한 자리든, 우리는 그 '중심'에 서 있지 못할 때 형언할 수 없는 소외감과 불안을 느낍니다. 마치 주류에서 밀려난 듯한, 이제는 인생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듯한 그 쓸쓸한 기분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잔인한 공식을 주입합니다. 1등만을 기억하고, 성공한 인생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이런 악마 같은 세상의 논리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듭니다. "나는 지금 중심인가, 아니면 변방인가?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지워져도 상관없는 존재인가?"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그 '중심'은 과연 영원한 것일까요? 우리가 '가짜 중심'을 쫓느라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역설: 변방에서 시작되는 기록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역대기의 기록은 세상을 향해 아주 낯설고도 강력한 질문을 던집니다. 보통의 역사서가 승리자의 화려한 영웅담으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역대기는 예루살렘의 견고한 성벽 안쪽이 아니라 요단 동편이라는 '변방'의 이야기를 길게 나열합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중심이 아닌 경계선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성전과 멀었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피를 흘리며 방패막이가 되어야 했던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 '변방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불안을 이기지 못해 우상을 숭배했고, 결국 앗수르에 의해 가장 먼저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세상의 역사책이라면 수치스럽게 여기며 지워버렸을 그 실패자들의 이름을, 하나님은 역대기의 계보 속에 꼼꼼하게 새겨 넣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억법이 세상의 논리와 전혀 다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과나 위치를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 그 자체를 기억하십니다.

 

진짜 중심은 어디인가: 시선의 머묾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에 직면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중심은 어디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한 뜰이 정말 중심일까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그 통념을 뒤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종교 의식이 거행되는 성전 안에서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성전 밖, 소외되고 낮은 자들, 가난하고 마음이 찢긴 자들 곁에 계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하나님의 마음이 닿는 곳,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강림하는 바로 그 자리가 우주의 '진짜 중심'입니다. 세상이 "너는 이제 끝났다"라고 선고하며 밀어낸 그 변방이,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뜨겁게 일하는 핵심부가 됩니다.  세상이 중심이라 부르는 곳이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곳은 영적인 황무지에 불과하지만, 비록 척박한 광야라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린다면 그곳이야말로 온 세계의 중심인 것입니다.

 

십자가, 가장 처절한 변방에서 피어난 중심

이러한 '중심의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흉악한 죄인이 처형되는, 도시 밖 가장 낮은 곳, 즉 철저한 변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실패의 자리, 저주의 자리라고 부르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외로운 그 변방을 온 우주의 중심으로 바꾸셨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변방처럼 보였던 십자가가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구원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이 누구의 시선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중심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를 소모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미 '중심'으로 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확장하는 공동체로의 초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붙여왔던 세상의 이름표를 과감히 떼어내야 합니다. "실패자", "밀려난 사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꼬리표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소중한 백성이며, 그분의 생명책에 기록된 주인공들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는 세상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교 클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기억을 확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필요 없다고 지워버린 이름들을 다시 불러주고, 화려한 곳으로 달려가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기꺼이 외로운 이들이 서 있는 변방으로 걸어가는 공동체 말입니다. 실패한 이들을 비난하는 대신 그들을 하나님의 따뜻한 이야기 속으로 다시 초대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의 실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변방에서 피어나는 행복

사랑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어도 정말 괜찮습니다. 당신의 인생이 척박한 요단 동편의 광야 같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당신의 순위와 성적표를 보지만, 하나님은 당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끝까지 기억하십니다.

 

중심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실패했어도 결코 끝이 아닙니다. 당신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변방에서도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시선을 믿으며, 오늘 당신이 발을 딛고 선 그 낮은 자리에서부터 감사와 사랑의 향기를 피워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그곳이 바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진짜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