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에게 고함]

1. 플라톤의 <국가> 제5권 470b를 옮겨본다. “내가 보기에, ‘전쟁’(polemos)과 ‘내분’(stasis)은 이름도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분쟁에 관렴됨으로써 실제로도 서로 다른 것을 뜻하는 것 같네. 내가 말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분쟁 가운데 하나는 동족 또는 친족끼리의 분쟁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과의 남남끼리의 분쟁일세. 우리는 그중 동족끼리의 분쟁은 ‘내분’이라고 부르고, 외국과의 분쟁은 ‘전쟁’이라고 부르네.” 

2. 플라톤은 동족끼리의 분쟁(내분)은 ‘언젠가는 화해할 사람들처럼 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잇는다. “그들은 선의에서 상대방이 절제를 지키게 해주려는 것이지, 상대방을 처벌하려고 예속시키거나 파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네. 그들은 정신 차리게 해주려는 자이지, 적군은 아니니까 말일세.”(471a)

3. 윤석열과 그 일당의 전술은 매우 교묘하다.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것을 통해 자기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비상입법회의를 만들어 세상을 자기들의 입맛대로 바꾸려 했다. 윤석열 일당이 벌인 행태는 분명 칼 슈미트가 이야기한 ‘예외상태’이다. 윤석열과 그 일당이 계속 주장하는 것은 대통령의 고유한 통치권이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은 비상계엄을 통해 ‘예외상태’를 만든 뒤, 자신의 고유한 통치권으로 국가적 위기를 종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4. 한 마디로, 윤석열과 그 일당은 위에서 진술한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을 획책한 것이다. 윤석열은 자신의 정적(민주당)을 동족으로 여기지 않고 ‘적’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과 그 일당은 상대방을 처벌하고 예속시키고 파괴하려 했다. 이것은 이미 구속된 계엄군 일당들에 대한 수사에서 파악된 것이다. 

5. 그런데, 지금, 내분을 넘어선 전쟁의 획책이 시민들에 의해 막히고 불법 비상계엄 사태의 가담자 전원이 구속되고, 자신도 탄핵을 당하고 구속 수사의 궁지에 몰리자 윤석열과 그 일당은 완전 새빨간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들고 있다. 그들은 분명 전쟁을 획책했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리자,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고, 플라톤의 부드러운 표현처럼 ‘내분’이었다고 말한다. 입법 기관에 총뿌리를 겨눈 것이 아니라 절제시켜 주고 정신 차리게 해주려는 ‘좋은 의도’였다고, 술수를 부리고 있다. 

6. 윤석열과 그 일당의 새빨간 거짓말 중 최고의 거짓말은 ‘다시는 비상계엄 선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만약, 이들의 술수에 넘어가 윤석열이 복권되면 윤석열은 반드시 더 치밀하게 준비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이다. 국가를 예외상태로 만들어 칼 슈미트가 이야기한 주권 권력을 휘두르려 들 것이다. 예외상태에서 헌법을 넘어서는 힘을 지니는 것은 대통령 자신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말이다. 

7. 이미 윤석열과 그 일당은 필사적이다. 추종자들의 사법부 침탈 사건이 그들의 필사적 전략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윤석열과 그 일당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보다 더 한 짓도 할 것이다. 지금, 대통령실이나 국민의 힘이 막후에서 윤석열을 살리기 위해서 별짓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아주아주 추악한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8. 민주당은 지금 플라톤처럼 느긋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윤석열과 그 일당은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을 죽이려 했는데, 그것이 마치 ‘내분’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면 절대 안된다. 다시 말해, 민주당은 윤석열과 그 일당을 ‘언젠가는 화해할 동족’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런 안일한 생각을 갖다가는 저들의 전쟁 획책에 넘어가 처벌받고 예속당하고 파괴될 것이다. 저들은 민주당(민주화세력)을 동지/동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저들에게 민주당은 없애버려야 할 ‘이방인들’일 뿐이다. 저들은 겉으로 자신들의 계엄선포가 ‘내분’인 것처럼 말하지만 저들이 벌인 계엄선포는 ‘전쟁’이다. 절대로 속아 넘어가면 안된다. 지금 사태는 언젠가 화해하게 될 불화가 아니다. 

9. 현대 정치철학에서 ‘내분’(stasis)은 ‘내전’으로 번역하여 부른다. 플라톤은 동족들끼리 사우는 것을 애써 ‘내전/내분’이라고 축소시키려 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동족/형제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친구인 동시에 최악의 적이기 때문’이다. 동족끼리의 싸움인 ‘내전’은 이방인들과의 싸움인 ‘전쟁’보다 더 비참할 수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그 비참한 내전을 ‘사사기’에서 보았을 것이다. 기브아 사건으로 발발한 내전 말이다. 그 내전으로 베냐민 지파는 거의 멸망당할 뻔했다. 이 내전은 다른 이방인들과의 전쟁들보다 잔혹했다. 

10. 민주당은 윤석열과 그 일당들, 그리고 국힘의 헛발질로 반사이익을 얻어 정권을 손에 쥐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상대방의 실수로 득점하는 것은 실력이 아니다. 민주당은 현 시점에서 절대로 몸을 사려서는 안된다. 사생결단의 정신으로 윤석열과 그 일당들을 제압해야 한다. 지지율에 연연하다가는 오히려 역공을 당해 멸망당할 것이다. 윤석열과 그 일당들, 그리고 국힘당이 온갖 술수를 다 쓰는 것처럼, 민주당도 온갖 전략을 동원하여 저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전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11. 특별히 이재명 대표는 조기 대선을 치러 대통령이 되려는 욕심 자체를 버려야 한다. 안중근 의사처럼 적장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일념으로 윤석열을 무너뜨려야 한다.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인 국민들이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 이재명 대표는 대통령이 되어 봤자 야당과 적대적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생각만큼 국정 운영을 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자신의 사명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윤석열을 무너뜨리고 자신도 같이 죽겠다는 것에 두는 것이 낫다. 이것은 이재명 대표가 자신의 비호감 이미지를 극복하고 열렬한 지지자를 두루두루 얻는 최고의 방법이다. 아주 단순한 격언이 가장 필요한 때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12. 제발,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는 현재의 지지율에 연연하지 말기를 바란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온힘을 다해 윤석열 탄핵과 그 일당들의 척결에 쏟기를 바란다. 내일을 생각하는 순간, 내일은 없을 것이다. 

13. 민주 시민들도 이 상황을 지겹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계속해서 광장에 나가 윤석열 파면을 외쳐야 한다. 안 그러면, 그가 귀환하여 그의 통치를 받는 수모를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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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5. 1. 14. 07:25

처음 사랑을 회복하길 간구하는 기도
(요한계시록 2:1-7)

사랑과 권세의 주님,
주님은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이시며, 
동시에 우리와 동고동락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에베소 교회를 향한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수고와 인내를 아시고, 
우리의 신앙을 격려하시는 주님의 칭찬은 크신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주님 앞에 겸손히 고백합니다. 
정통을 지키려는 열심 속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희생하지는 않았는지, 
우리의 마음을 살펴 주시옵소서.
주님, 기억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며, 다시 사랑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처음에 가졌던 따뜻한 마음, 
서로를 향한 긍휼과 자비, 애틋하고 진실한 사랑을 회복하게 하시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공동체의 중심이 되게 하옵소서. 
정통을 지키는 일이 사랑을 잃게 하지 않도록,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만약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된다면, 
우리의 촛대가 옮겨질 것이라는 경고를 마음에 새깁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을 회복하는 승리자가 되게 하시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의 권세와 임재 가운데 오늘도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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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성을 지키려다 잃어버린 것

“여러분 모두는 진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어떠한 이단도 여러분 가운데 머물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진실되게 말하는 이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이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교부 이그나티우스의 칭찬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인내를 가지고 교회를 세우고 지켰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께 과분한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우리가 신앙 공동체로서 직면한 딜레마를 잘 보여줍니다. 에베소 교회는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악한 자들과 거짓 사도들에 맞서 싸웠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료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그들의 열정이 오히려 공동체 내 사랑의 유대를 약화시키고, 서로를 불신하며 배타적인 마음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속적 가치와 맞서기 위해 정통 신앙을 강조하지만, 때로는 그 열정이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거나 배제하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특정한 도덕적 기준이나 신앙적 규범을 앞세워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는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진 행위입니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사랑과 자비의 메시지이며, 인간이 가진 약함과 불완전함을 품으라는 초대입니다. 복음은 밀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끌어안는 행위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신 그리스도의 책망은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이슈)에 직면한 오늘날의 교회에도 유효합니다. “너는 네가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버렸다”는 말씀은 정통 신앙만을 강조하며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를 향한 경고입니다. 신앙의 열정이 이웃 사랑을 희생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웃 사랑은 단순히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태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약함과 필요를 이해하고, 사회적 편견과 혐오를 넘어서 그들을 품는 용기를 가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의 본성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정성 있는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촛대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회개하지 않고 이웃 사랑의 따뜻한 마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 문을 닫아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교회가 사회적 약자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과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에베소 교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생생한 도전입니다. 정통성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 만큼, 파격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부름 받은 이유이며,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역할을 다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선택이 교회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사랑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의 교회에 온기(따뜻한 마음)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1. 7. 12:54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간구하는 기도
(에스더 4:13-17)

주님,
우리에게 비전과 지혜와 창조력을 주소서.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밝히 알게 하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힘 있게 하도록
인도하소서.
관심과 사랑과 헌신을 통해
주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주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거짓 선지자들과 탐욕스러운 장사꾼들이
주님 나라를 더럽히지 못하게
우리를 사용하소서.
참 기쁨과 소망을 주시는
아름다운 주의 말씀이
우리를 통하여 선포되게 하소서.
우리의 지혜와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AI와 목회: 기술철학 관점에서 바라보기

1. 매트릭스
Matrix라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Matrix는 가상공간(Cyber Space)이다. Matrix는미래의 인간과 미래의 로봇이 전쟁을 통해서 만들어낸 비극적인 가상공간이다. Matrix가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다. 때는 서기 2099년, 인간의 혹독한 착취에 못 견딘 로봇들은 인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로봇이 자신들이 착취 당하고 있고, 인간으로부터 노예 취급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로봇은 AI(Artificial Intelligent)라고 하는, 인간과 동일하게 작동하는 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봇과의 전쟁에서 밀리게 된 인간은 로봇의 에너지 원인 태양을 가리기 위해서 핵폭탄을 터뜨려 지구의 대기를 분진으로 덮어 버려 더 이상 지구에 태양빛이 비추지 못하게 만든다. 이에 에너지가 필요했던 로봇은 인간을 생포한 뒤, 인간의 생체에서 흐르고 있는 에너지를 흡수한 뒤, 죽여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수가 한정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체에서 뽑아낼 수 있는 에너지 또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봇은 Matrix라는 가상공간을 창조해 내게 된다. 이것은 생포한 인간들을 독립적 캡슐에 넣어, 기계장치로 연결한 뒤, 그들을 잠 재우고 현실이 아닌 Matrix라고 하는 가상공간에서 실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수의 인간에게서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뽑아 낼 수 있고, 인간의 수명이 다 하는 동안, 즉 일회적이 아닌 반 영구적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로봇에게 잡혀, Matrix라는 가상공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자신이 진짜 삶(real life)이 아니라 가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Matrix가 설정해 놓은 서기 1999년을 살고 있을 뿐이다. Matrix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또는 상대방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다. 그 질문은 Matrix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실제 세계로 나오게 되는, 로봇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경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 

2. AI의 출현
AI라는 용어는 1956년 다트머스 학회(Dartmouth Conference)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연구자들은 기계가 학습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컴퓨터 기계와 지능’이라는 논문을 통해 튜링 테스트를 제안하며, 지능을 측정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주춤하던 AI 연구는 1980년대에 인공 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s)로 부활했다. 퍼셉트론(Perceptron)과 다층 퍼셉트론(MLP)이 개발되었지만, 효율적인 학습 방법이 부족해 실제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그 이후, 1990년대 AI 연구는 자금 부족과 실적 부진으로 주춤했고, ‘AI 겨울’이라는 시절이 찾아왔다. 아무도 AI 연구에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 빅데이터와 계산 능력의 발전으로 AI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데이터 마이닝,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 등은 AI 연구에 활기를 띄게 만든다. 그러다 결국,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은 2006년 딥러닝(deep learning)의 핵심 기술인 ‘심층 신경망 학습(deep neural networks)’을 위한 효율적인 학습 방법, 특히 역전파(backpropagation) 알고리즘과 사전 학습(pre-training)을 제안했고, 이를 통해 이미지 인식, 음성 인식 등에서 AI가 인간 수준의 성능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공로로 제프리 힌턴은 인공신경망 연구의 선구자인 존 홉필드(John Joseph Hopfield)와 함께 올해(202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다. 노벨위원회가 AI 발전 기여자들에게 상을 수여했다는 것은 AI는 이제 영화에만 등장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류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힌턴은 계속해서 AI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강력한 규제를 주문해오고 있다. 

3. 기술철학 1
기술철학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철학자는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이다. 그의 주저 <시간과 존재>에서 부분적으로 논의한 기술철학은 그 이후 출간한 <숲길>과 <기술에 대한 물음> 등에서 본격적인 논의로 발전한다.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을 표현하는 핵심 용어는 ‘역운’(Geschick)과 ‘기술세계-내 있음’이다. 역운은 인간이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인간은 기술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에게 있어 인간은 ‘기술세계-내 있음’의 존재이다. 기술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기술이 인간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기술(techne)을 시학(poesis)와 비교를 하는데, 시학이 존재자를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 속에 머물게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드러낸다면(예술작품의 기원), 기술은 모든 사물을 자신의 대상으로 만들다고 비판한다. 기술에 의해 대상화된 사물(인간 포함)은 주문과 생산을 위한 재료 또는 부품을 전락하고 만다. 이는 존재가 기술에 종속되는 사태이다. 

기술철학을 진지하게 논의한 또 한 명의 철학자로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있다. 엘륄은 평생 ‘기술 현상’을 연구한다. 엘륄은 기술 체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고, 기술 사회와 관련된 거짓된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았다. 엘륄은 ‘기술’이라는 키워드로 우리 사회 이면의 ‘숨겨진 논리’를 폭로한다.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현대사회를 포착하려고 시도했다.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산업 사회’라는 키워드로, 다니엘 벨(Daniel Bell)은 ‘후기 산업 사회’라는 키워드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소비 사회’라는 키워드로,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관리 소비 관료 사회’라는 키워드로, 마샬 맥루한(Marchall McLuhan)은 ‘대중매체’라는 키워드로, 기 드보르(Guy Dubord)는 ‘구경거리 사회’(스펙타클의 사회)라는 키워드로, 이들은 모두 현대사회의 현상과 숨겨진 논리를 폭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엘륄은 이 모든 사회 현상 이면에는 ‘기술’이 있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인간은 ‘기술세계-내 있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기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엘륄은 기술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그들이 겪은 시대적 상황 때문인 듯하다. 하이데거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엘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이들은 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이데거는 기술철학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기술과 인간은 대립관계에 있다. 하이데거가 우려하는 것은 기술이 인간 존재를 장악하여 인간과 함께 모든 사물을 착취하게 되는 것이다. 엘륄은 기술이 신성화되는 것을 우려한다. “우리를 굴종시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전이된 신성함이다”(The New Demons). 기술을 신성화시킨 인간은 기술이 부여하는 질서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기술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4. 기술철학 2
전후 세대인, 기술철학 2세대들은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기술철학 1세대인 하이데거나 엘륄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기술철학 1세대는 근대의 사고 틀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기술철학을 논했다면, 기술철학 2세대는 탈근대의 사고 틀 안에서 관계론적으로 기술철학을 논한다. 대표적으로,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존 로(John Law), 그리고 랭던 위너(Langdon Winner) 등이 있다. 이들은 인간과 기술이 맺는 훨씬 복잡해진 관계에 주목하여 기술철학을 논한다. 또한 인간중심적 사고를 중시했던 근대와는 달리 탈인간중심적 사고를 전개한다. 이는 이들로 하여금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를 낳게 했다. 

하이데거가 기술을 ‘세계-내 존재’라는 차원에서 존재론적으로 사유했다면, ANT 그룹은 기술의 핵심을 관계론적으로 사유한다. 이 사고의 핵심에는 브루노 라투르가 있는데, 그는 주체와 객체로 구분해 온 서구 인식론을 전복시키고, 그 대신 ‘행위자’(actor)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물들의 관계를 사유한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기계, 동물, 문서, 돈, 건축물 등 다양한 사물들은 행위자의 위상을 갖는다. 이는 인간만이 행위자의 위상을 갖는다고 생각했던 근대 인간중심주의 사상을 뒤엎는 것이다. ‘행위자’의 위상을 획득한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서로 간에 연결망을 형성하여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 라투르가 한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론을 완전히 뒤틀어 놓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근대인은 부단히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여 주체가 객체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사유를 했다. 그러나 라투르는 근대의 인식론에 포착되지 않았던 ‘실재’를 말한다. 그것은 인간은 애초부터 기술과 같은 비인간과 잡종적(hybrid) 동맹을 부단히 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진술인데, 인간은 순수하게 인간 존재로만 존재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사물은 단순히 인간의 객체가 아니라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행위자(actor)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적이고 더 풍요롭게 사는 길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모든 사물과 상호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술철학 2세대들에게 기술은 인간이 매우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할 ‘동료’ 행위자인 것이다. 

기술의 정치성을 논한 랭던 위너는 하이데거를 비롯한 고전적 기술철학자들이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에 붙들려 있다고 비판한다(자율적 테크놀러지와 정치철학). 고전적 기술철학자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술의 자율성은 결국 인간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우려했다. 랭던은 기술철학의 가치가 본질을 사유하는데 있지 않고 그것의 실천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 담론은 정치의 장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은 인간의 실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유전자조작이나, 기후변화 문제를 들 수 있다.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단순히 사실(과학)과 가치(정치)가 분화된 세계에서 파악할 수 없다. 통합적으로 사유해야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라투르는 현실정치에서 사물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대의민주주는 이제 인간뿐 아니라 사물들의 목소리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5. AI와 목회
AI는 현대 기술의 정점이다. AI의 개발자 힌턴이 그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고 있듯이, AI는 인류를 신의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는 동시에 인간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 앤서니 레반도프스키(Anthony Levandowski). 미래의 길(WOTF: Way of the Future)의 교주다. 이 교주는 AI를 통해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2015년 설립했고, 2017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팬데믹 기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았다,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종교는 AI를 예배한다. 교주 레반도프스키는 묻는다. “가장 똑똑한 인간보다 10억 배나 더 똑똑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 수 있냐?” AI를 신(God)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AI교는 벌써 수천명의 신도를 모았다.

AI와 목회는 단순히 목회에 AI를 어떻게 활용하여서 목회를 수월하게 하고, 교회를 부흥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의 목회는 더욱더 치열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AI 시대의 목회는 기술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할 것이냐, 아니면, 관계론적으로 사유할 것이냐에 대한 현실에 직면했다. 기술철학 2세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은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면, 즉 인간은 언제나 사물과 함께 하이브리드로 존재해 왔다면, AI 시대의 목회는 인간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AI 시대의 목회가 기술에 끌려가는 목회가 아니라 기술을 사유하고 기술과 관계론적으로 인간 존재를 새롭게 세워 나가려면 치열한 공부가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34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을 위한 기도: 기억 기도
(마태복음 2:13-18)

주님,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을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으십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일로 그 일에 동참합니다.
무고하게 희생되는 자들이 없어야 할 텐데,
세상은 여전히 슬프고 아픕니다.
주님,
우리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주님께 올려드리오니,
주여,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고,
아픔이 변하여 복이 되게 하옵소서.
그 어떤 어둠도 물리쳐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31

작은 자에게 소금을 주게 되길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9:33-50)

주님,
모두 첫째가 되려고 
작은 자를 희생시키고 밝고 올라서기 바쁜 세상에서
이렇게 따뜻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큰 자인 것 같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작은 자입니다.
큰 자가 되려는 중독에 빠져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합니다.
정말로 큰 자가 되려거든
작은 자에게 소금을 주라고,
작은 자를 영접하고 잘 섬기라는 이 전복적인 말씀에
고개를 숙입니다.
내가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철부지, 
작은 자라는 깨달음을 얻게 하셨사오니
주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중독된 것을 끊어내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작은 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사오니,
주님,
우리의 보살핌을 약간만 받아도
삶이 회복되고 평안을 되찾을 작은 자를 영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소금을 두게 하시고,
그 소금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의 삶이 평화롭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소금을 주셔서
부패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29

사랑 받는 자로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9:2~13)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다’라고 불러주시는 주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사랑 받는 사람으로서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오직 사랑에서 나오며
그 사랑은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줄 믿습니다.
주님,
고통이 우리의 삶을 짓누를 때마다,
주저 앉고 싶을 때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에게 사랑을 속삭여 주소서.
사랑 받는 존귀한 자 답게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뒤따르게 하소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26

존귀한 자로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9:2~13)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다’라고 불러주시는 주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사랑 받는 사람으로서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오직 사랑에서 나오며
그 사랑은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줄 믿습니다.
주님,
고통이 우리의 삶을 짓누를 때마다,
주저 앉고 싶을 때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에게 사랑을 속삭여 주소서.
사랑 받는 존귀한 자 답게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뒤따르게 하소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2. 31. 10:25

제자도의 핵심을 대면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8:27-38)

주님,
제자도의 핵심을 다시 한 번 마주칩니다.
우리는 이제껏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지만,
제자도의 핵심을 용기 있게 대면한 적이 없는 듯합니다.
대면한 적이 있더라도
어느덧 세상 풍파에 휩쓸려
제자도가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그냥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담긴 제자도의 핵심을 보여주셨사오니,
우리가 다시 한 번 용기 있게
제자도의 핵심을 직면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삶을 내어드리는 결단이 있게 하옵소서.
그럴 때 우리는 참 생명을 얻을 것이요
교회의 회복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따르다 우리가 죽더라도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고
신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