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목회: 기술철학 관점에서 바라보기
1. 매트릭스
Matrix라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Matrix는 가상공간(Cyber Space)이다. Matrix는미래의 인간과 미래의 로봇이 전쟁을 통해서 만들어낸 비극적인 가상공간이다. Matrix가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다. 때는 서기 2099년, 인간의 혹독한 착취에 못 견딘 로봇들은 인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로봇이 자신들이 착취 당하고 있고, 인간으로부터 노예 취급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로봇은 AI(Artificial Intelligent)라고 하는, 인간과 동일하게 작동하는 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봇과의 전쟁에서 밀리게 된 인간은 로봇의 에너지 원인 태양을 가리기 위해서 핵폭탄을 터뜨려 지구의 대기를 분진으로 덮어 버려 더 이상 지구에 태양빛이 비추지 못하게 만든다. 이에 에너지가 필요했던 로봇은 인간을 생포한 뒤, 인간의 생체에서 흐르고 있는 에너지를 흡수한 뒤, 죽여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수가 한정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체에서 뽑아낼 수 있는 에너지 또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봇은 Matrix라는 가상공간을 창조해 내게 된다. 이것은 생포한 인간들을 독립적 캡슐에 넣어, 기계장치로 연결한 뒤, 그들을 잠 재우고 현실이 아닌 Matrix라고 하는 가상공간에서 실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수의 인간에게서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뽑아 낼 수 있고, 인간의 수명이 다 하는 동안, 즉 일회적이 아닌 반 영구적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로봇에게 잡혀, Matrix라는 가상공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자신이 진짜 삶(real life)이 아니라 가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Matrix가 설정해 놓은 서기 1999년을 살고 있을 뿐이다. Matrix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또는 상대방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다. 그 질문은 Matrix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실제 세계로 나오게 되는, 로봇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경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
2. AI의 출현
AI라는 용어는 1956년 다트머스 학회(Dartmouth Conference)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연구자들은 기계가 학습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컴퓨터 기계와 지능’이라는 논문을 통해 튜링 테스트를 제안하며, 지능을 측정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주춤하던 AI 연구는 1980년대에 인공 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s)로 부활했다. 퍼셉트론(Perceptron)과 다층 퍼셉트론(MLP)이 개발되었지만, 효율적인 학습 방법이 부족해 실제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그 이후, 1990년대 AI 연구는 자금 부족과 실적 부진으로 주춤했고, ‘AI 겨울’이라는 시절이 찾아왔다. 아무도 AI 연구에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 빅데이터와 계산 능력의 발전으로 AI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데이터 마이닝,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 등은 AI 연구에 활기를 띄게 만든다. 그러다 결국,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은 2006년 딥러닝(deep learning)의 핵심 기술인 ‘심층 신경망 학습(deep neural networks)’을 위한 효율적인 학습 방법, 특히 역전파(backpropagation) 알고리즘과 사전 학습(pre-training)을 제안했고, 이를 통해 이미지 인식, 음성 인식 등에서 AI가 인간 수준의 성능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공로로 제프리 힌턴은 인공신경망 연구의 선구자인 존 홉필드(John Joseph Hopfield)와 함께 올해(202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다. 노벨위원회가 AI 발전 기여자들에게 상을 수여했다는 것은 AI는 이제 영화에만 등장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류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힌턴은 계속해서 AI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강력한 규제를 주문해오고 있다.
3. 기술철학 1
기술철학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철학자는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이다. 그의 주저 <시간과 존재>에서 부분적으로 논의한 기술철학은 그 이후 출간한 <숲길>과 <기술에 대한 물음> 등에서 본격적인 논의로 발전한다.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을 표현하는 핵심 용어는 ‘역운’(Geschick)과 ‘기술세계-내 있음’이다. 역운은 인간이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인간은 기술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에게 있어 인간은 ‘기술세계-내 있음’의 존재이다. 기술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기술이 인간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기술(techne)을 시학(poesis)와 비교를 하는데, 시학이 존재자를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 속에 머물게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드러낸다면(예술작품의 기원), 기술은 모든 사물을 자신의 대상으로 만들다고 비판한다. 기술에 의해 대상화된 사물(인간 포함)은 주문과 생산을 위한 재료 또는 부품을 전락하고 만다. 이는 존재가 기술에 종속되는 사태이다.
기술철학을 진지하게 논의한 또 한 명의 철학자로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있다. 엘륄은 평생 ‘기술 현상’을 연구한다. 엘륄은 기술 체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고, 기술 사회와 관련된 거짓된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았다. 엘륄은 ‘기술’이라는 키워드로 우리 사회 이면의 ‘숨겨진 논리’를 폭로한다.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현대사회를 포착하려고 시도했다.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산업 사회’라는 키워드로, 다니엘 벨(Daniel Bell)은 ‘후기 산업 사회’라는 키워드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소비 사회’라는 키워드로,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관리 소비 관료 사회’라는 키워드로, 마샬 맥루한(Marchall McLuhan)은 ‘대중매체’라는 키워드로, 기 드보르(Guy Dubord)는 ‘구경거리 사회’(스펙타클의 사회)라는 키워드로, 이들은 모두 현대사회의 현상과 숨겨진 논리를 폭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엘륄은 이 모든 사회 현상 이면에는 ‘기술’이 있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인간은 ‘기술세계-내 있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기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엘륄은 기술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그들이 겪은 시대적 상황 때문인 듯하다. 하이데거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엘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이들은 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이데거는 기술철학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기술과 인간은 대립관계에 있다. 하이데거가 우려하는 것은 기술이 인간 존재를 장악하여 인간과 함께 모든 사물을 착취하게 되는 것이다. 엘륄은 기술이 신성화되는 것을 우려한다. “우리를 굴종시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전이된 신성함이다”(The New Demons). 기술을 신성화시킨 인간은 기술이 부여하는 질서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기술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4. 기술철학 2
전후 세대인, 기술철학 2세대들은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기술철학 1세대인 하이데거나 엘륄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기술철학 1세대는 근대의 사고 틀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기술철학을 논했다면, 기술철학 2세대는 탈근대의 사고 틀 안에서 관계론적으로 기술철학을 논한다. 대표적으로,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존 로(John Law), 그리고 랭던 위너(Langdon Winner) 등이 있다. 이들은 인간과 기술이 맺는 훨씬 복잡해진 관계에 주목하여 기술철학을 논한다. 또한 인간중심적 사고를 중시했던 근대와는 달리 탈인간중심적 사고를 전개한다. 이는 이들로 하여금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를 낳게 했다.
하이데거가 기술을 ‘세계-내 존재’라는 차원에서 존재론적으로 사유했다면, ANT 그룹은 기술의 핵심을 관계론적으로 사유한다. 이 사고의 핵심에는 브루노 라투르가 있는데, 그는 주체와 객체로 구분해 온 서구 인식론을 전복시키고, 그 대신 ‘행위자’(actor)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물들의 관계를 사유한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기계, 동물, 문서, 돈, 건축물 등 다양한 사물들은 행위자의 위상을 갖는다. 이는 인간만이 행위자의 위상을 갖는다고 생각했던 근대 인간중심주의 사상을 뒤엎는 것이다. ‘행위자’의 위상을 획득한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서로 간에 연결망을 형성하여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 라투르가 한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론을 완전히 뒤틀어 놓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근대인은 부단히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여 주체가 객체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사유를 했다. 그러나 라투르는 근대의 인식론에 포착되지 않았던 ‘실재’를 말한다. 그것은 인간은 애초부터 기술과 같은 비인간과 잡종적(hybrid) 동맹을 부단히 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진술인데, 인간은 순수하게 인간 존재로만 존재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사물은 단순히 인간의 객체가 아니라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행위자(actor)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적이고 더 풍요롭게 사는 길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모든 사물과 상호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술철학 2세대들에게 기술은 인간이 매우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할 ‘동료’ 행위자인 것이다.
기술의 정치성을 논한 랭던 위너는 하이데거를 비롯한 고전적 기술철학자들이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에 붙들려 있다고 비판한다(자율적 테크놀러지와 정치철학). 고전적 기술철학자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술의 자율성은 결국 인간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우려했다. 랭던은 기술철학의 가치가 본질을 사유하는데 있지 않고 그것의 실천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 담론은 정치의 장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은 인간의 실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유전자조작이나, 기후변화 문제를 들 수 있다.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단순히 사실(과학)과 가치(정치)가 분화된 세계에서 파악할 수 없다. 통합적으로 사유해야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라투르는 현실정치에서 사물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대의민주주는 이제 인간뿐 아니라 사물들의 목소리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5. AI와 목회
AI는 현대 기술의 정점이다. AI의 개발자 힌턴이 그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고 있듯이, AI는 인류를 신의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는 동시에 인간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 앤서니 레반도프스키(Anthony Levandowski). 미래의 길(WOTF: Way of the Future)의 교주다. 이 교주는 AI를 통해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2015년 설립했고, 2017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팬데믹 기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았다,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종교는 AI를 예배한다. 교주 레반도프스키는 묻는다. “가장 똑똑한 인간보다 10억 배나 더 똑똑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 수 있냐?” AI를 신(God)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AI교는 벌써 수천명의 신도를 모았다.
AI와 목회는 단순히 목회에 AI를 어떻게 활용하여서 목회를 수월하게 하고, 교회를 부흥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의 목회는 더욱더 치열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AI 시대의 목회는 기술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할 것이냐, 아니면, 관계론적으로 사유할 것이냐에 대한 현실에 직면했다. 기술철학 2세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은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면, 즉 인간은 언제나 사물과 함께 하이브리드로 존재해 왔다면, AI 시대의 목회는 인간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AI 시대의 목회가 기술에 끌려가는 목회가 아니라 기술을 사유하고 기술과 관계론적으로 인간 존재를 새롭게 세워 나가려면 치열한 공부가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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