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묵시는 현재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을 은밀히 해석하는 장치이다. 현재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을 '대놓고' 해석하면 권력자들에게 핍박을 받게 되므로, 사람들은 묵시라는 장치를 통해 불필요한 핍박을 피해 '은밀하게' 정치적 사건을 해석한다.

묵시는 역사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도와준다. 역사는 인간의 관점에서 서술되지만, 묵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묵시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두 개의 눈이 필요하다. 역사를 보는 눈, 그리고 묵시를 보는 눈. 즉 이 땅에서 돌아가는 정치적 상황을 보는 눈과 그 이면에 흐르는 진리/진실의 상황을 보는 눈이 그것이다.

성경은 묵시 장치를 아주 잘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다니엘서가 있고, 마가복음이 있고, 또한 요한계시록이 있다. 다니엘서의 묵시는 다른 두 성경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니엘서는 안티오쿠스 치하 그리스 법정에서 피고가 되어 핍박 받는 유대인들에 대한 묵시이다. 다니엘의 묵시 환상은 유대인들의 무죄를 입증할 '정의로운 더 높은 법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티오쿠스의 불의한 법정에 의해서 유죄로 선고 받았어도 유대인들은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묵시가 필요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나 싶다. 역사는 늘 권력자들의 횡포 때문에 정의가 왜곡되고 의인이 핍박을 받으며, 법정은 늘 권력자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그들만의 놀이터였다. 예로부터, 역사는 묵시를 필요로 했다. 묵시 없이 역사는 바르게 해석될 수 없었고, 묵시 없이 역사에 저항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묵시 없이 요즘 법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어떻게 직면할 수 있는가. 

한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권세자들 앞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은, 인자의 법정에서는 창피당할 일이다." 물론 반대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권세자들 앞에서 유죄를 받으면, 인자의 법정에서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권세자들의 법정에서 유죄를 받았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권세자들의 법정과 비교될 수 없는 진정으로 정의로운 더 높은 법정이 있다. 이런 묵시적 안목을 가진 자는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갈 것이다.

그대여, 힘을 내시라.

Posted by 장준식

[성장하고 돌아왔습니다]

호머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이우스가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겪은 일을 기록하고 있죠. 긴 여행을 마친 오디세우스는 여행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오디세이우스는 여행을 통해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영웅이 갖춰야 할 덕들을 모두 갖춘 인물로 거듭납니다. 여행은 오디세이우스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별히 바다에서 만난 사이렌과의 대결은 오디세이우스에게 절제와 인내의 덕을 안겨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이렌은 커피 업체 스타벅스의 상징이기도 하죠. 사이렌은 뱃사람들에게 큰 시련입니다. 그것을 물리친 뱃사람만이 진정한 뱃사람인 것이죠. 

여행은 참 신비롭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행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은 것이다”(The world is a book, and those who do not travel read only one page.). 사람은 여행을 통해 한 권을 책을 읽는 것만큼 깊은 사유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일 겁니다. 여행을 하지 않으면 겉도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겠구요.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괴테는 특히 이탈리아 여행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여행>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죠. 괴테는 여행을 통해 젊음을 되찾는 기쁨과 영혼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저의 이번 한국 여행이 딱 그랬습니다. 이번 한국 여행은 이전 여행과 달랐습니다. 성장한 느낌을 받았고, 세상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좀 더 또렷하게 찾은 것 같았습니다. 한 권의 책을 썼고, 그 책으로 인해 사람들을 만났고,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을 통해 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참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러 차례 강연을 통해서 가장 많이 한 말은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는 주제를 둘러싼 인문학/정치신학 이야기였습니다. ‘기후변화’는 화두일 뿐입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말, 제가 한 말이 다른 사람들의 말과 달랐던 가장 중요한 이유,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제 말이 귀를 기울여 주시고 공감해 주신 이유는 제가 기후변화를 자연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론의 문제로 보고, 그것을 인문학/정치신학으로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는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기후변화 문제는 인간을 깊이 관찰하고 돌아보고 재구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장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기후변화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지만, 결국 인간의 한 존재인 저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저는 인간이고,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참 가련한 존재입니다.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존재. 그것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더 진지한, 그리고 더 애정 어린 연구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성경도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가련함과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주 새로운 깨달음이기도 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는 무엇일까요?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이것은 곧 호모 사피엔스의 한 개체인 저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그 종에 속한 개개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우리에겐 어떤 가련함과 어떤 희망이 있는지, 깊은 사유를 통해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곧 대림절입니다. 파멸의 운명을 타고난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는 시간 밖에서 우리가 사는 시간 안으로 밀고 들어오시는 메시아의 구원일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희망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성육신: 여기 함께 있음(Presence)]
 
드디어,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었다.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어로 읽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 한강은 시인으로 먼저 데뷔하고, 다음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한강 작품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presence’(프레즌스)가 아닐까? 여기 함께 있음. 인간의 고통과 상처를 보듬으며, 거기에 그들과 함께 있음. 이것이 한강 작품의 특징이자, 그의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서는 방식이고,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고, 결국 노벨상을 품에 안긴 원동력일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있다. ‘교회 밖 그리스도인’이라고 옮길 수 있는 용어다. 교회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특별히 문학책), 그런 경험을 종종한다. 이 작가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마치 교회를 다니는 사람보다 더 그리스도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강 작가가 딱 그렇다. 그의 작품에는 성육신의 감성이 흐른다. <채식주의자>는 고통 받는 여성과 함께 하는 작품이고, <소년이 온다>는 5.18 민주화항쟁을 겪으며 아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하는 작품이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에서 아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하는 작품이다. 즉, 역사를 초월해 있는 게 아니라, 역사 안으로 들어와 역사 속에서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한 작품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 우리는 어느새 이런 ‘역사’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신 것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사건의 핵심은 성육신 사건이다. 성육신 사건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성육신 사건은 ‘presence’(프레즌스), 즉 ‘여기 함께 있음’의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교리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하며 안 된다. 성육신 사건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성육신 사건’(빌 2:1-11)에 대하여 진술하는 이유는 서로 평화롭게 잘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이다. 자기 일을 잘 돌보고, 다른 이들의 일을 잘 돌보아, 나 자신의 인생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살게 만들어 주는 삶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육신의 원리이다. 다른 말로, ‘presence’(프레즌스), ‘여기 함께 있음’이다. 내가 나의 일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상태는 presence이다. 다른 말로, mindfulness라고 할 수 있다. 마음과 육신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잘 하지 못한다. 이게 잘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한다. 염려란 마음과 몸이 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니까, 우리는 염려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잘 돌보는 것도 성육신의 원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presence’(프레즌스)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음이다.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인가. 나랑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그 자리 함께 있어 주는 것 자체가 기쁨을 두배로 만들어 주고, 슬픔을 반으로 줄여준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탄 이유는 그의 작품은 ‘여기 함께 있음’을 실천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아픔을 당한 이들과 함께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섬기고 따르는 이유는 그가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쁨 가운데 거하는 복된 인생을 사는 길도 여기에 있다. 나 자신의 ‘여기 있음’을 생각하라. 몸과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염려하지 않고, 내 삶을 잘 꾸려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라. 다른 이의 아픔/고통과 함께 하라. 거기에 있어 주라. 아무 것도 안 해도, 그냥 ‘여기 함께 있음’을 통해서 아주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다. 이렇게 성육신의 은혜가 우리 삶의 원리요 방편이 되어 모두가 따스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4. 10. 12. 05:20

[믿음]

 

누구를 믿는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일이야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큰 상처를 남기지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믿을 인간이 없다는 것이야

인간인 내가 인간을 못 믿는다는 사실만큼

슬픈 일이 세상엔 없지

 

인간들은 말이야

스스로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신이라는 것을 믿어

아주 기괴한 일이지

 

인간들이 신 앞에서 하는 일은

슬픈 심장을 꺼내 닦는 일이야

그게 얼마나 장엄한지

인간은 자기 눈물로 그 심장을 닦지

 

나는 말야 이런 꿈을 꾸곤 해

태어나지 않는 꿈

하늘을 날다 추락하는 꿈

이 꿈들은 말 못하는 간절한 소망 같지

 

내 눈 앞에 있는 너

인간의 형상을 입은 너

너에게 묻고 싶어

너를 정말 믿어도 될까

 

믿지 마, 믿어도 돼

믿지 마, 믿어도 돼

마치 파도처럼 출렁이는 너,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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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침략하거나 빼앗지 않고 이슬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신박한 방법]

 

포비아(phobia/혐오) 중, 이슬람 포비아가 있다. 특별히, 개신교인들, 그 중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은 이슬람 포비아가 심하다. 복음주의자들은 이슬람을 복음화시켜야 한다는 '사명' 아래 이슬람 국가로 많은 선교사들을 '비밀리'에 파송한다. 선교사의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N국 선교사'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서도 이슬람 선교가 활발하다. 교단에서 이슬람 연구소 같은 선교 단체를 두는 이유는 이슬람을 연구하여 그들과 잘 지내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들을 연구하여 그들에게 파고들어 개종시키기 위함이다. 이는 마치 근대 과학이 자연을 연구하여 자연이랑 잘 지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려고 한 것과 같다.

 

1996년, 저명한 미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1993)을 비판하며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헌팅턴을 세계를 9개의 문명권으로 나누고, 그 문명들이 충돌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는 후쿠야마가 소련 붕괴 이후 민주주의의 승리와 시장경제의 판정승을 선언하며 투쟁의 역사가 종말을 고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의 목소리였다.

 

특별히 헌팅턴은 서구 문명(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을 우려했다. 실제로 두 문명 간의 출동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슬람 문명이 서구 문명과 충돌을 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이슬람 문명을 키운 것은 팔할이 서구 문명(기독교 문명)이라는 것이다.

 

서구 문명은 자본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핵심은 '화석 연료'에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화석 연료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들은 거의 이슬람 문명권에 있는 나라들이다. 서구 자본주의 문명은 화석 연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로 인해 서구 문명의 국가들은 화석 연료를 손쉽고 값싸게 얻기 위해 중동 지역의 정치적/경제적 개입과 협력에 열을 올렸다.

 

우리는 흔히 중동의 머니를 오일 머니라 한다. 오일 머니가 가진 파워는 대단하다. 그 오일 머니가 이슬람 문명을 키웠다. 오일 머니가 손을 뻗치는 곳에는 이슬람교가 함께 들어갔다. 결국, 오일 머니를 통해 이슬람 문명을 키우고, 그로 인해 이슬람교의 확장을 도운 것은 다름 아닌 화석 연료를 기반한 자본주의 체제를 발전시킨 서구 문명(기독교 문명)이다.

 

기후변화의 직접 원인은 대기 중에 과도하게 축적된 탄소 때문이다. 탄소는 주로 화석 연료에서 배출된다. 그래서 기후변화를 멈추고, 지속적인 인류의 생존을 이끌려면, 탄소 배출을 멈추어야 한다. 이 말은, 더 이상 화석 연료에 기반한 경제가 아닌, 재생가능한 에너지 기반의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전환을 가장 두려워 하는 집단은 두 개다. 하나는 화석 연료 기반의 자본주의 체제를 이끌어온 서구의 기업들과 화석 연료를 공급한 당사자인 중동의 나라들이다.

 

기후학자 마이클 만(Michael Mann)은 <신 기후대전>(The New Climate War)에서 기후변화를 맞은 우리들의 주적이 누구인지를 적시한다. 그들은 바로 전쟁경제체제와 화석 연료 기반의 시장자본주의 체제를 이끄는 기업들과 나라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웬만해선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상 가장 큰 권력과 자본을 가졌기 때문이다. 만수르가 얼마나 부자인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기 위해 전담 회계사를 둘 정도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세기의 부자 존 록펠러도 화석 연료 사업을 통해 돈을 번 인물이다. 그의 별명은 '석유왕'이었다.

 

이슬람 포비아가 심한 복음주의자들이 이슬람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신박한 방법이 있다. 바로, 기후변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화석 연료 퇴출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경제가 화석 연료 기반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도록 힘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일 머니가 더이상 축적되지 않을 것이고, 머니 없는 이슬람 세력은 자연스럽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괜히 몸숨 걸고 이스람 국가에 들어가 선교를 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고, 이것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이슬람을 붕괴시킬 수 있는 아주 신박하고 평화로운 전략이다.

 

그러니 복음주의자들이여. 괜히 이슬람 포비아에 휩싸이지 말고, 괜히 이슬람을 연구한다고 힘들이지 말고, 괜히 연구해서 그들의 세상에 침투하여 그들을 복음화시켜 보겠다고 소란을 피우지 말고,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화석 연료 퇴출 운동을 벌여 보시라. 그러면, 아주 평화롭게, 그리고 아주 효과적으로 당신들이 원하는 바, 이슬람 세력은 약화될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신박한 아이디어가 부디, 그대들의 마음에 가 닿기를!

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띄워야 하는 승부수: 시대정신]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

 

예수와 바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저항과 해체의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와 바울의 저항은 아주 물리적인 저항이었다. 특별히, 제국과 제국신학이라는 물리적 현상이 저항의 대상이었다. 예수와 바울은 제국과 제국신학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나라(하나님 나라)와 신학을 구현하고자 했다.

 

제국과 제국신학은 중심부 사상이다. 힘 있는 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생산한다. 예수와 바울이 주목한 것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주변부의 주체-되기였다. 어떻게 하면,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삶을 다시 회복시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였다.

 

역사는 제국과 제국신학의 발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아주 교묘하게 중심부를 강화시켰고,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들을 아주 교묘하게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착취하지 않는 것처럼 착취하는 기만술을 발전시켰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체제'이다. 신자유주의는 마치 아무도 통치하지 않고, 아무도 착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자기 착취'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평할 외부상대가 없어 자책만 하다 결국 저항하지도 해체하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살아간다.

 

역사는 제국과 제국신학의 발전만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저항과 해체의 발전도 함께 있었다. 예수의 정신은 죽지 않는다. 예수와 바울의 저항과 해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단순히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시대 정신이다. 왜냐하면, 제국과 제국신학은 이전보다 거대하고 교묘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이다.

 

경제적/정치적 양극화, 통제 불가능한 과학기술 시대, 기후변화의 위기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라는 종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범주에 들어서고 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점점 '주체'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의 주체를 빼앗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존엄성을 말살시키고 있다. 이것을 인격 자살이라 부르고 싶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를 등에 업은 제국주의가 있다. 우리 시대의 메타내러티브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고, 모든 공간과 시간을 시장화시켜, 모든 존재를 자본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과 같다. 인류 역사에서 요즘 시대만큼 '자유'가 넘친 적이 없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류 역사에서 요즘 시대만큼 '착취'가 넘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는 자유로운 노예가 득실대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자유'에 취해 있지만, 실상은 그들이 모두 '노예'라는 사실이다. 자유에 취해 있다보니, 자신이 노예인줄 모르고 산다. 이것은 절묘한 제국신학이다.

 

이러한 제국신학에 저항한 선지자들이 있다. 마르크스가 있고, 벤야민이 있고, 푸코가 있고, 바디우가 있고, 아감벤이 있고, 지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제국신학에 저항한 선지자들이다. 이들 외에, 제국신학에 극렬하게 저항한 선지자로 기 드보르가 있다. 나는 기 드보르가 쓴 <스펙타클의 사회>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선지자들이 더 있다.

 

이들은 모두 주체를 교묘하게 무너뜨리는 제국과 제국신학에 저항한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제국신학을 해체하여 빼앗기고 무너진 주체를 다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신학을 제시한 이들이다. 교회는 때로 이들이 교회 안에 있지 않고, 교회 밖에 있다고 이방인 취급하거나 이교도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얼마나 제국과 제국신학에 물들었고, 그들과 한 편인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식 복음주의를 싫어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대중화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자본주의에 축성식을 벌인 형국과 같다. 그래서 미국식 복음주의는 중심부, 큰 것, 힘 센 것에만 관심을 둘 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체-되기 또는 자신들의 주체를 강화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 아무 것도 아닌 것들, 주변주로 밀려난 것들의 주체-되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주체-되기를 막는다. 그들을 악마화시켜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는다.

 

기후변화의 시대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변화를 인간이 맞닥뜨리게 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변화(change)라는 말보다 전환(transition)이라는 말을 쓴다.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변화가 발생하면 단순히 변화에 적응하는 정도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체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으면 전환을 감당할 수 없다. 즉, 전환이 발생하면, 주체의 전환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현대의 주체는 자본주의-주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인류세(Anthropocene)는 자본세(Capitalocene)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들, 경제적/정치적 양극화, 통제할 수 없는 과학기술 시대, 기후변화, 난민 문제, 홈리스 문제, 총기 문제, 약물 중독 문제, 국제 분쟁 문제 등은 모두 인류가 자본주의-주체로 빚어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주체가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낸다.

 

혹자는 이것을 인간의 죄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굉장히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인류가 맞닥뜨리는 문제를 자꾸 관념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 또한 그동안 교회가 얼마나 제국과 제국신학에 물들었고, 그들과 한 패가 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기독교는 유물론을 자꾸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물질/현실을 악한 것으로 보고, 영/이데아를 이상으로 보는 플라톤 철학에 오랫동안 기대어 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니체가 이런 말을 했겠는가. "기독교는 플라톤 철학의 대중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념론 신학이 아니라, 유물론 신학이다.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에서 간파했듯이, 아렌트가 지구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을 천명했듯이, 위에서 언급한 우리 시대의 선지자들이 유물론자들이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 천국의 신학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의 신학이다. 물질인 몸과 물질인 지구가, 즉 인간의 조건인 물질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그 존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21세기, 각 종 위기 앞에서, 무엇보다 기후위기 앞에서 교회가 띄워야 할 승부수, 시대정신은, 예수와 바울이 이미 그랬듯이, 저항과 해체의 정신이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주체-되기 프로젝트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교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범주에 들어섰다. 주체-되기 프로젝트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이야기이다.

 

그동안 교회가 제국과 제국신학에 봉사하는 동안, 교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는 주변부로 밀려나버렸다. 자본이 황제가 되고, 자본주의가 제국이 되고, 자본이 메시아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교회의 시대정신은 분명 자본주의와의 생사를 건 한 판을 벌여야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영국 틴데일 기후변화센터의 케빈 앤더슨의 보고에 따르면, 2050년에 90억 명에 이른 인류가 2100년까지 섭씨 4도 상승하면, 5억 명 정도만 살아남는다. 이는 지금보다 훨씬 악화된 대기오염뿐 아니라, 살인적인 폭염, 가뭄, 태풍, 홍수, 식량난, 식수난, 기후 전쟁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경고, 11쪽)

 

상황이 이런데, 교회가 '죽어서 천국 가는' 지구 탈출법을 가르치는 데만 그친다면, 어느 시점에서 교회는 인류와 함께 소멸되고 말 것이다. 교회의 시대정신은 이런 물리적 위협에 맞서 이 문제를 일으킨 근본원인을 파헤치고, 그것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교회에는 철저한 유물론적 사유와 신학이 필요하다. 지구의 구원 없이 인간의 구원은 없다. 자본주의-주체에 맞서, 그것에 저항하며 그것을 해체하여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급진적-주체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기후변화를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 “기후변화는 기후가 변화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주는 진리 사건이다.” 기후변화를 통해 인간 주체가 새롭게 형성되어 더 평화로운 세상이 임하게 되길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무위(無爲)의 존재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라는 책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지를 간결한 필치와 깊은 사유를 통해 펼쳐 보여줍니다. 우리는 피곤합니다. 사람들은 ‘피곤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피곤할까요? 한병철은 우리가 경험하는 피곤의 뒷면에는 ‘긍정의 과잉’이 있다고 진단합니다.

 

긍정의 과잉.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던져봅니다. 정말 모두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나요? 긍정 과잉의 사회, 즉 피로사회에서는 ‘할 수 없다’는 부정어가 금기시됩니다. 긍정성 이면에는 성과주의(meritocracy)가 존재합니다. 성과를 많이 내는 사람에게는 보상을 해주고, 성과를 못 내는 사람에게는 ‘루저’(실패자)라는 낙인을 찍습니다. 사람들은 루저의 낙인을 받지 않기 위해 긍정의 힘으로 성과를 내기 위해 영혼까지 갈아 넣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피곤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아주 교묘한 통치술입니다. 군부독재, 또는 권위주의 체제 시절에는 ‘규율사회’로서 ‘해서는 안된다’는 부정의 방식으로 국민을 통제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해 보면, 하면 안 되는 것이 참 많았습니다. 두발도 규정이 있었고, 귀가 시간도 정해져 있었고(통금시간), 해외 여행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체제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유롭습니다.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성과사회’로 ‘할 수 있다’는 자기 착취를 유발합니다. 외부의 세력이 성과를 내도록 착취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착취합니다. 성과를 못 내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책임이 됩니다. 그 결과 요즘 사람들은 피로가 극에 달하고, 우울증 등 신경성 질환 환자가 많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묘합니다.

 

이런 21세기의 비극적 풍경 속에서 사실상 신앙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습니다. 신앙은 성과를 내느라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고,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착취하는 ‘체제’를 간파할 수 있게 해주며, 더 이상 피곤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해주고, 실제로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다른 비극을 경험합니다. 신앙이 가장 중요한 시대에 신앙이 가장 배척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성과를 내기 위한 조건은 오직 몸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을 만들기 위해 헬스장(Fitness)에는 열심히 가도, 영혼을 위한 신앙은 등한시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몸을 위한 스프는 먹어도, 영혼을 위한 스프는 잘 먹지 않는 시대에 삽니다.

 

피로사회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성과를 내느라 몸과 영혼을 모두 망가뜨리는 자기 착취를 멈추고 평안에 이를 수 있을까요? 한병철은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깊은 심심함’이나 장자의 ‘무용지용’의 철학을 제시합니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하지 않을 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쓸모없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교묘한 자기 착취의 메커니즘에 저항할 것을 주문합니다. 즉, 한병철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갈망합니다. 무위의 존재. 없이 존재하는 존재. 나의 바깥 것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나의 바깥 것을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존재. 이런 존재를 갈망합니다. 한병철은 철학자라 철학적으로 새로운 주체를 제시했지만,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신앙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무위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착취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는, 그러면서 서로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주는 존재. 신앙만이 이런 존재를 빚어내리라, 저는 믿습니다. 신앙을, 지키세요.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9. 17. 10:37

숨 쉴 공간을 간구하는 기도

(요 8:1-11)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

그래서 우리에게 숨 쉴 공간을 열어주시는 주님.

주님의 그 은혜 덕분에 우리가 숨 쉬며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덧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숨 쉴 공간을 열어주지 못하고

숨 막히게 하며 삽니다.

좀 모른 척하고, 좀 내버려 두면 좋은데

우리는 너무 아는 게 많고 너무 할 줄 아는 게 많아

이리 참견 저리 참견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하지 못하면

화가 납니다.

하지만 말씀을 통해 다시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모든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며 살아갑니다.

존중과 기다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우리의 삶을 모두 조화롭게 더 행복해질 것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께 받은 절대적인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그 은혜로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의 소중한 이들에게

숨 쉴 공간을 열어주는

은혜롭고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영원한 숨을 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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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9. 15. 08:47

[바울과 아볼로: 사역의 상호보완적 역할]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의 사역을 통해 신약 교회 성장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역은 각각 개척과 양육의 역할을 맡으며 고린도 교회의 기초를 세우고 그 기초 위에서 교회를 강화시켰습니다. 서로 다른 방식과 배경을 가진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초대 교회에 있어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는 교회의 발전에 있어 다양한 은사와 역할이 필요함을 잘 보여줍니다.

 

1. 선교 여행의 교차점: 바울의 고린도 사역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그의 제2차 전도여행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아가야 지방 수도로, 다양한 문화와 철학이 융합된 대도시였으며, 상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사역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10절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구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바울이 직면한 상황을 반영합니다. 사도행전은 이 장면을 통해 바울이 심리적 압박과 신체적 위험을 동시에 겪었음을 암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사역을 완수하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통해 단순한 전도뿐 아니라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은 행위(행 18:18)는 그가 나실인의 서원을 완수했음을 상징합니다. 민수기 6장에 따르면, 나실인의 서원은 일정 기간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이며, 서원이 끝난 후 머리를 깎는 것은 서원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 사역에 대한 특별한 서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서원을 신실하게 지키며 그곳에서의 사명을 완수했음을 시사합니다.

 

2. 서원의 의미와 성경적 배경

바울의 서원은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여러 인물들의 서원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벧엘에서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며 하나님께 서원을 드리고(창 28:20-22),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통해 사무엘을 낳았습니다(삼상 1:11). 이러한 서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거나 중요한 사역을 수행할 때 드리는 헌신의 상징으로 작용했습니다.

 

서원이 단순한 약속을 넘어서는 깊은 신앙적 헌신의 표현임을 고려할 때, 바울의 서원 역시 고린도 사역에서 그가 느꼈던 깊은 책임감과 사명 의식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서원의 신중함을 강조하는 다른 예로, 입다의 서원이 있습니다(삿 11:30-31).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달라는 서원을 드렸으나, 그 결과 딸을 제물로 바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서원이 얼마나 진지한 약속인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러한 서원의 전통을 신실하게 따르며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감당했고, 그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그의 헌신과 사역의 열매로 세워졌습니다.

 

3. 아볼로의 등장: 학자이자 겸손한 사역자

아볼로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끝난 직후 에베소에서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은 아볼로를 “말에 능하고 성경에 능통한 자”로 묘사하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헬레니즘 문화와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철학과 유대 신앙이 결합된 도시로, 아볼로는 그곳에서 학문적 깊이를 쌓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설교자이자 교사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세계에서 학문과 철학의 중심지로, 헬레니즘과 유대교가 융합된 독특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옮긴 ‘70인역 성경’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합니다. 아볼로는 이러한 배경을 통해 헬라 문화와 유대 신앙을 모두 깊이 이해한 학자였고,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처음에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지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게 되었습니다(행 18:26). 아볼로가 학문적으로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르던 것을 겸손히 배우고 받아들인 점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줍니다. 아볼로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고린도 교회로 파송되어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고, 고린도 교회에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4. 아볼로의 고린도 사역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중요한 사역을 감당했으며, 그가 그곳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나중에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파'가 생긴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교회 내 분파 문제를 다루며 자신과 아볼로 사이의 연합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자신을 ‘심는 자’로, 아볼로를 ‘물 주는 자’로 묘사하며, 이 둘의 역할이 상호보완적임을 설명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잘하게 하셨나니.”

 

사도행전은 바울의 이 비유를 통해, 초기 교회의 사역이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협력과 헌신으로 가능하다는 중요한 교훈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개척자로서의 역할을 했고, 아볼로는 그 교회를 양육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이 씨를 뿌렸다면, 아볼로는 그 씨가 자라도록 물을 준 것입니다. 이러한 협력은 교회의 성장이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모든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5. 바울과 아볼로의 상호보완적 사역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은 고린도 교회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처음으로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명을 감당했고, 아볼로는 그 교회를 양육하고 더욱 견고하게 세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협력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불같은 열정과 결단력을 가지고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개척자였고, 아볼로는 따뜻한 인내심으로 그 교회를 돌보고 양육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를 통해, 교회의 성장에는 다양한 은사와 역할이 필요하며, 그 모든 역할이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고 강조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아볼로의 헌신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상호보완적 역할은 오늘날 교회에서 여러 교우들이 각기 다른 은사와 사명을 가지고 협력하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모델을 제공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잘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

 

이 말씀은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그들의 사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상호보완적 협력의 상징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명을 감당했고, 아볼로는 그 교회를 양육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들의 사역은 오늘날 교회에 있어 다양한 은사와 역할이 필요함을 일깨워 주며,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각각의 은사가 연합할 때 교회가 온전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들의 각기 다른 역할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다양한 사람들의 헌신과 협력을 통해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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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민주주의/자본주의 시대의 신앙]

 

‘개인’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생겨난 개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도요.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개인’이라든지 ‘마음’이라든지, 이런 개념이 사람들에게 별로 없었어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보다 큰 존재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자식은 부모에게 묶여 있고, 가족은 집안에 묶여 있었죠. 집안은 더 큰 공동체에 묶여 있었고, 결국 가장 높은 곳으로 가면, ‘임금’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없고, 언제나 존재는 나보다 더 큰 존재에 묶여 있는, 그래서 개인이라는 개념과 마음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죠.

 

개인주의 사회와 ‘내 마음’이 중요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위에서 설명한 이야기가 선뜻 이해되지 않을 겁니다. 시대가 바뀐 탓이죠. 시대가 바뀌면 그 이전 시대는 전혀 인식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시대가 전부인 것이죠. 개인과 마음이 발명되기 전, 인간은 세상이 그냥 그런 줄 알고 살았습니다. 임금님, 또는 집안의 뜻이 곧 내 뜻이었고, 임금님, 또는 집안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었죠. 다른 뜻과 마음을 품는 것 자체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그래서, ‘군사부일체’(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말이 사회의 규율로 엄격하게 작동했습니다.

 

근대(modernity)에는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개벽을 한 것이죠. 무엇보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마음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내’가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죠. 나는 더 이상 임금님의 뜻을 따를 필요도 없고, 집안의 마음이 곧 내마음이 아니어도 된 것이에요. 나라는 존재, 나의 마음이 자율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상황을 통틀어서, 자율성(autonomy)라고 합니다. 근대에 비로소 자율적인 개인의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이후, 사회의 모든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 개념이 발전되고, 자본주의라는 경제 개념이 발전되었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개인’ 그리고 ‘마음’이라는 것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발전할 수 없는 개념들입니다. 민주주의는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예전에는 왕정 체제와 귀족 체제가 사회의 근간이었죠. 그때는 개인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인과 마음의 발명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됐죠. 민주주의는 개인과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정치를 거기에 맞춥니다. 그래서 한 개인이 투표권을 갖게 됩니다. 그 투표권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투표를 하죠. 이제 정치는 한 개개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에요.

 

자본주의는 개인과 마음의 개념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경제 체제입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망(마음)에 철저하게 기댄 경제 체제에요. 자본(돈)은 개인의 욕망을 채워주는 매직이죠. 개인은 자본을 가진 만큼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욕망은 밑도 끝도 없죠. 그래서 인간은 그 밑도 끝도 없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본(돈)을 갈망합니다. 누구나 욕망의 크기는 똑같습니다. 무한대이죠. 그러나 사람마다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한계는 다릅니다. 자본이 많은 사람은 욕망을 더 많이 채울 수 있고, 자본이 없는 사람은 욕망을 조금 밖에 채우지 못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욕망의 크기가 아니라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곧 계급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자본(돈)을 욕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높은 계급이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이죠. 그래야 인간다운 삶,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자본주의는 이렇게 철저한 인간학입니다.

 

인간이 자율성을 가지게 된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율성이 인간을 정말로 자유롭게 만드는데 쓰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비참한 현실로 몰아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이 부분에서 인간의 죄성(罪性)이 드러나는 듯합니다. 좋은 것을 좋게 쓰지 못하고, 좋은 것을 악하게 쓰게 되는 현실 말이죠. 민주주의는 좋은 것인데, 개인의 마음에 들어야 하기에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갈 위험성이 너무 크고(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자본주의는 자아실현을 위해서 귀하게 쓰일 수 있는 요소가 있는데, 결국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부추겨 인간 자신을 망칠 뿐만 아니라 결국 지구를 망쳐놓게 됐으니까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결국 인간이 문제인 것이죠. 좋은 것을 좋게 쓰지 못하는 인간의 그 말할 수 없는 부족함.

 

신앙이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는 분들에게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의 중요성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신앙은 액셀러레이터(가속기)가 아니라 브레이크입니다. 신앙을 가속기로 사용하려는 사람, 또는 그렇게 사용하라고 부추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또한 악한 사람입니다. 특히나 근대의 개인과 마음의 개념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은 브레이크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자율성을 컨트롤 해줍니다. 신앙은 인간의 욕망을 한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게 해주고, 욕망이라는 전차를 멈추어 세우는 브레이크 역할을 해줍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앙이라는 브레이크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성을 붙잡아주고, 나도 모르게 무지막지한 파괴행위에 동참하는 일을 멈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근대는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인간은 그 안에 타서 자동차를 멋지게 운전합니다. 그런데, 만약 쌩쌩 달리는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달릴 때는 기분 좋고 멋지지만, 정작 멈추어야 할 긴급 상황이 오면, 그리고 설정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브레이크가 없어 멈출 수 없다면, 자동차를 탄 인간은 비명을 지르며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 ‘절규’가 떠오르네요. 뭉크의 절규가 바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탄 우리들의 절규인 것이죠. 그 절규를 멈추어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을 잘 사용해 보세요. 개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데 사용해 보세요. 인간의 마음은 사실 그 어떤 것으로도 다스리기 쉽지 않습니다. 아주 압도적인 거대한 힘이 필요하죠. 그런데, 그 거대한 힘이 강압적이거나 강제적이면 안 됩니다. 바람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옷을 벗게 할 따스함이 필요합니다. 그 거대한 힘, 그러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힘, 없는듯 있는 힘, 없이 존재하는 힘, 그래서 개인을 뭉개지 않고,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힘, 자율을 진정한 자율로 작동하게 만들어 주는 힘, 그게 바로 하나님이시겠죠. 그런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일 것입니다.

 

신앙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만큼 신앙이 중요한 시대가 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앙이 가장 중요한 시대에 신앙이 가장 무시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아우성과 탄식 소리만 들립니다. 사람들이 많이 아픕니다. 자기의 마음을 허탄한 것에 맡깁니다. 악순환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신앙을 귀하게 생각하고, 신앙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전파하는 사람은 정금보다 귀합니다. 이 글을 읽고,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이 귀한 신앙을 어떻게서든 한 명에게라도 더 전달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당신은 정말 보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