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Facebook)을 통해서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요즘 페이스북을 열어 보면, 종교개혁은 이미 수백 번쯤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한국 교회를 향한 날 선 비판, 구조적 문제에 대한 통렬한 분석,

세습과 권력, 돈과 위선에 대한 고발이 연일 타임라인을 채운다.

댓글에는 공감의 이모티콘이 줄지어 달리고,

분노는 공유되고, 정의는 ‘좋아요’ 숫자로 증명된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이게 문제야.”

“이래서 한국 교회가 욕을 먹는 거지.”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많은 ‘개혁’이 매일같이 선언되는데, 교회는 그대로다.

공론장은 뜨겁고, 현장은 차갑다

 

페이스북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대개 개혁 성향이 강하다.

신학적으로 고민하고, 교회의 공공성을 말하며, 구조적 변화를 촉구한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진지하다.

나 역시 그 글들을 읽으며 때로는 깊이 공감하고,

때로는 속이 시원해진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우리가 비판하는 그 사람들,

교회를 망가뜨린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

기득권을 세습하고 구조를 고착시키는 그 사람들은

대개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임라인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긴 글을 끝까지 읽을 의지도, 관심도, 시간도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영향력의 계보와 기득권을 지키는 일이다.

 

나는 유학 시절 함께 공부하던 몇몇 동료들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교회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결국 세습을 택했다.

그들의 SNS 계정은 조용하다. 아니, 애초에 없다.

굳이 거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들의 세계는 온라인이 아니라, 이미 구축된 오프라인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페이스북에서 외쳐도,

그 소리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타임라인 안에서만 울린다.

 

우리는 서로의 분노를 확인하고, 서로의 정의를 재확인한다.

그러나 구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은 ‘좋아요’가 아니라 ‘침투’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페이스북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물론 그 시대에 SNS가 있었다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한 ‘비판의 확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장에 몸을 던진 사건이었다.

 

루터는 교회의 한복판에 서서 논쟁했고,

칼뱅은 도시 제네바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행정과 제도를 붙들었다.

종교개혁은 담론의 승리가 아니라, 공간의 재편이었다.

그들은 타임라인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강단과 교회 질서를 새롭게 했다.

 

종교개혁은 좋아요의 숫자 확보가 아니라, 위험의 감수였다.

 

문제는 ‘현장’이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페북에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성토하는 글만 써서는 절대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

공감은 형성될지 몰라도,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개혁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바른 교회를 세우고 싶은 사람들, 신학적으로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사람들, 그들이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의 벽이 등장한다.

 

기존 교회에 들어가면 갈등이 생긴다.

기득권 구조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사임하는 경우도 많다.

개척을 하려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

가족의 생계, 아이들의 교육, 현실의 숫자들이 신학적 이상을 압박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페이스북으로 돌아온다.

현실 대신 담론을 선택한다.

몸 대신 문장을 선택한다.

 

그러나 현장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역사는 언제나 ‘현장’을 통해 움직였다.

성육신은 하늘의 선언이 아니라, 땅의 침투였다.

하나님은 게시글을 올리지 않으셨다. 몸을 입으셨다.

 

교회 개혁도 마찬가지다.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작더라도, 느리더라도, 불편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개혁적인 공동체를 세우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거대한 혁명이 아니어도 된다.

작은 교회에서 투명한 재정을 시작하는 것,

설교에서 정치적 선동이 아닌 복음을 선포하는 것,

권위를 내려놓고 공동체적 리더십을 실험하는 것,

청년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이 ‘현장 개혁’이다.

 

페이스북은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침투의 계획이 필요하다.

 

나는 때때로 이런 상상을 한다.

페이스북에서 분노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10%만이라도 실제 교회 구조 속으로 들어가 변화를 시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장로로, 교사로, 부목사로, 평신도 리더로,

혹은 작은 개척 교회의 목사로, 또는 동역자로.

 

현장에 침투하려는 계획이 필요하다.

구조를 이해하고, 재정 흐름을 배우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옛 관행을 조금씩 밀어내는 전략.

 

개혁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인내의 설계다.

 

페북으로는 종교개혁을 이룰 수 없다.

 

페이스북은 필요하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그곳은 공론장이지만, 교회는 공간이다.

공감은 클릭으로 가능하지만, 개혁은 땀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타임라인 위에서 개혁을 꿈꾸어 왔다.

이제는 타임라인을 내려와야 한다.

 

현장으로 가야 한다.

현장에 들어가, 현장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작은 균열이 시작될 것이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개혁은 작은 균열을 내는 진지전(war of position)으로만 가능하다.

장기적 헤게모니 구축 전략이 필요하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더라도

주구장창 그 자리에서 작은 균열을 내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일은 부질없다.

스펙타클은 균열을 내지 못한다. 기득권이 되는 통로가 될 뿐이다.

 

종교개혁은 댓글 창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강단과 교회 회의실과 교회 재정 장부와 교육부 교실에서 일어난다.

 

페북을 통해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현장으로 들어간다면,

현장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작은 균열이라도 내겠다고 다짐하며 땀을 흘리면

그때부터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눈물을 삼키며 현장에서 ‘존버’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페이스북 #교회개혁 #존버목회 #현장 #그람시 #진지전 #스펙타클 #종교개혁

Posted by 장준식

요즘은 병원이 성전이고 의사가 사제다

— 생명관리정치와 교회의 재위치

 

1. 사제의 자리가 비었다

도시의 중심부에 무엇이 서 있는가를 보면, 그 시대가 무엇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다. 중세 유럽의 도시 한복판에는 대성당이 있었다. 마을의 시간은 종탑의 종소리로 흘렀고, 탄생과 죽음의 의미는 사제의 입을 통해 해석되었다. 사제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존재였고, 고통을 신학적 서사 안에서 의미화하는 자였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의 중심에는 대형 병원이 서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고통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대신 치료의 가능성을 묻는다. 죽음은 신학적 사건이 아니라 생물학적 실패가 되었고, 구원은 은총이 아니라 연명의 문제가 되었다. 고통을 해석하던 사제의 자리에 이제 의사가 앉아 있다. 이 자리 이동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이후 국가와 생명과학이 결합하면서 만들어낸 거대한 구조적 전환의 결과다.

 

2. 생명관리정치의 계보: 국가는 어떻게 생명을 통치하게 되었는가

이 전환을 가장 날카롭게 분석한 사상가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다. 푸코는 근대 권력의 본질이 ‘죽일 권리’에서 ‘살게 하고, 죽도록 내버려두는 권력’으로 변화했다고 진단했다. 그가 ‘생명권력(biopower)’이라 부른 이 새로운 권력 형태는 개인의 신체를 훈련하고 규율하는 ‘해부정치(anatomo-politics)’와, 출산율·사망률·질병·기대수명 등 인구 전체를 관리하는 ‘생명정치(biopolitics)’로 작동한다. 병원·학교·감옥은 이 생명관리의 핵심 제도적 장치다(『성의 역사』 제1권, 1976;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976 강의).

 

푸코의 스승이자 과학철학자인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은 이 전환의 인식론적 토대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저서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Le Normal et le pathologique, 1943/1966)에서 캉길렘은 ‘정상(normal)’이라는 범주가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규범임을 밝혔다. 의학은 치료 이전에 삶을 재단하는 잣대를 제공한다. 교회가 ‘죄/은혜’의 언어로 인간을 분류하던 자리에, 이제 ‘정상/비정상’, ‘건강/질병’의 의료적 언어가 들어선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푸코의 분석을 더욱 급진화한다.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 1995)에서 아감벤은 근대 정치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생물학적 생명(zoē)’ 자체를 직접 통치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시민은 점점 권리를 가진 인격이 아니라 연장 가능한 생명 단위로 환원되며, 병원은 치유의 공간이기 이전에 누가 살 가치가 있는지를 판정하는 ‘예외 상태’의 일상화된 공간이 된다. 여기서 의사는 치유자 이전에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는 준(準)사제로 기능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 현상을 인간 조건의 근본적 붕괴로 진단한다.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을 노동(labor)·작업(work)·행위(action)로 구분하면서, 현대 사회가 생존을 위한 노동에만 몰두하는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의 사회가 되었다고 경고했다. 정치의 목표가 ‘잘 사는 삶(eu zen)’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 자체가 될 때, 의미·책임·희생에 대한 물음은 사라지고, 오로지 생명의 연장만이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이 모든 흐름의 귀결을 가장 직설적으로 선언한다. 전직 가톨릭 사제이기도 했던 일리치는 『의료의 보복: 건강의 수탈』(Medical Nemesis: The Expropriation of Health, 1975)에서 현대 의료가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병원은 성전이고, 의사는 새로운 사제이며, 환자는 스스로 고통을 해석할 능력을 상실한 수동적 신자다. 일리치의 통찰은 섬뜩할 만큼 정확하다. 우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우리는 관리된다.

 

3. 교회가 중심에서 밀려난 진짜 이유

이 계보를 따라가면, 교회가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유가 분명해진다. 교회가 무능해서 밀려난 것이 아니다. 국가가 생명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건강검진에서 연명치료까지, 국가는 시민의 생명 전체를 측정·기록·관리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 체계 안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종교적 언어는 ‘비효율적인 것’으로, 고통의 신학적 해석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중심부에서 퇴장당했다. 생명관리정치의 시대에 교회는 필연적으로 주변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이것이 정말로 몰락인가?

 

4. 주변부에 선 교회: 본래의 자리로의 귀환

여기서 우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에 선다. 교회가 중심부를 잃은 것을 안타까워하거나, 중심부에 있지 못하는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교회는 본래의 자리를 회복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은 성전의 중심부에 계시지 않았다. 병자·세리·죄인·여성·이방인의 곁에 계셨다.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변두리 갈릴래아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주변부에서 중심부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중심부의 권력이 은폐하는 것을 폭로하고, 중심부의 논리가 배제하는 자들을 불러 세우는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사건이었다.

 

정치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는 이 주변부의 신학을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이라는 개념으로 정초했다. 『역사와 사회 속의 신앙』(Faith in History and Society, 1977)에서 메츠는 고통받는 자들의 기억이야말로 승리자의 역사를 중단시키고 심문하는 비판적 힘이라고 주장한다. 병원이 관리하지 못하는 것, 국가가 기록하지 않는 것, 생명관리정치가 삭제하는 것 — 바로 고통의 의미, 죽음의 존엄, 희생의 가치에 대한 기억. 교회는 이 기억의 공동체로서 체제를 심문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 1964)에서 교회의 사명이 현존하는 체제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현실을 넘어서는 종말론적 상상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생존의 연장만을 최고선으로 삼는 사회에, 생존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종말론적 증언이다.

 

5. 생명관리정치 시대, 교회의 증언

그렇다면 생명관리정치의 시대에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회는 더 이상 생명을 관리하지 않는다. 생존을 절대화하지 않으며, 정상과 비정상을 판결하지 않는다. 대신 교회는 병원이 다루지 못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언제 멈추는 것이 존엄한가. 고통은 제거의 대상인가, 아니면 의미의 장소인가.

 

국가가 시민을 ‘관리되어야 할 생명’으로 환원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이라는 언어로 저항한다. 의료 체계가 ‘살 가치가 있는 생명’과 ‘연명의 비용 대비 효율이 낮은 생명’을 구분하려 할 때, 교회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존귀하다고 선언한다. 생명보다 큰 것 — 사랑, 희생, 책임,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6. 결론: 밀려남이 아니라 귀환이다

교회가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은 몰락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셨던 자리로의 귀환이다. 병원이 성전이 된 사회에서, 교회는 생명을 관리하는 자리가 아니라 생명이 왜 존귀한지를 묻는 자리에 서야 한다. 중심부에서 밀려난 교회를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주변부에 선 교회만이 중심부의 폭력을 드러내고, 중심부가 삭제한 질문을 복원할 수 있다.

 

주변부. 그곳이 예수께서 계셨던 자리이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자리이며, 교회가 서야 할 본래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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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중심이 아니어도 괜찮아

ㅡ 진짜 중심은 어디인가

 

모든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듯,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중심'을 향해 요동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화려한 불빛이 꺼지지 않는 곳, 목소리 큰 사람들이 모여 지도를 그리는 곳, 그리고 안전과 성공이 보장된 것만 같은 그 핵심부로 진입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합니다. 서울의 고층 빌딩 숲이든, 직장의 핵심 부서든, 혹은 누군가의 기억 속 가장 소중한 자리든, 우리는 그 '중심'에 서 있지 못할 때 형언할 수 없는 소외감과 불안을 느낍니다. 마치 주류에서 밀려난 듯한, 이제는 인생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듯한 그 쓸쓸한 기분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잔인한 공식을 주입합니다. 1등만을 기억하고, 성공한 인생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이런 악마 같은 세상의 논리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듭니다. "나는 지금 중심인가, 아니면 변방인가?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지워져도 상관없는 존재인가?"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그 '중심'은 과연 영원한 것일까요? 우리가 '가짜 중심'을 쫓느라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역설: 변방에서 시작되는 기록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역대기의 기록은 세상을 향해 아주 낯설고도 강력한 질문을 던집니다. 보통의 역사서가 승리자의 화려한 영웅담으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역대기는 예루살렘의 견고한 성벽 안쪽이 아니라 요단 동편이라는 '변방'의 이야기를 길게 나열합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중심이 아닌 경계선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성전과 멀었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피를 흘리며 방패막이가 되어야 했던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 '변방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불안을 이기지 못해 우상을 숭배했고, 결국 앗수르에 의해 가장 먼저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세상의 역사책이라면 수치스럽게 여기며 지워버렸을 그 실패자들의 이름을, 하나님은 역대기의 계보 속에 꼼꼼하게 새겨 넣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억법이 세상의 논리와 전혀 다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과나 위치를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 그 자체를 기억하십니다.

 

진짜 중심은 어디인가: 시선의 머묾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에 직면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중심은 어디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한 뜰이 정말 중심일까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그 통념을 뒤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종교 의식이 거행되는 성전 안에서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성전 밖, 소외되고 낮은 자들, 가난하고 마음이 찢긴 자들 곁에 계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하나님의 마음이 닿는 곳,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강림하는 바로 그 자리가 우주의 '진짜 중심'입니다. 세상이 "너는 이제 끝났다"라고 선고하며 밀어낸 그 변방이,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뜨겁게 일하는 핵심부가 됩니다.  세상이 중심이라 부르는 곳이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곳은 영적인 황무지에 불과하지만, 비록 척박한 광야라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린다면 그곳이야말로 온 세계의 중심인 것입니다.

 

십자가, 가장 처절한 변방에서 피어난 중심

이러한 '중심의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흉악한 죄인이 처형되는, 도시 밖 가장 낮은 곳, 즉 철저한 변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실패의 자리, 저주의 자리라고 부르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외로운 그 변방을 온 우주의 중심으로 바꾸셨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변방처럼 보였던 십자가가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구원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이 누구의 시선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중심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를 소모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미 '중심'으로 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확장하는 공동체로의 초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붙여왔던 세상의 이름표를 과감히 떼어내야 합니다. "실패자", "밀려난 사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꼬리표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소중한 백성이며, 그분의 생명책에 기록된 주인공들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는 세상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교 클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기억을 확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필요 없다고 지워버린 이름들을 다시 불러주고, 화려한 곳으로 달려가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기꺼이 외로운 이들이 서 있는 변방으로 걸어가는 공동체 말입니다. 실패한 이들을 비난하는 대신 그들을 하나님의 따뜻한 이야기 속으로 다시 초대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의 실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변방에서 피어나는 행복

사랑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어도 정말 괜찮습니다. 당신의 인생이 척박한 요단 동편의 광야 같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당신의 순위와 성적표를 보지만, 하나님은 당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끝까지 기억하십니다.

 

중심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실패했어도 결코 끝이 아닙니다. 당신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변방에서도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시선을 믿으며, 오늘 당신이 발을 딛고 선 그 낮은 자리에서부터 감사와 사랑의 향기를 피워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그곳이 바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진짜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시인의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의 전문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ㅡ부ㅡ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연세 인문학 아케이드에서 정현종 시인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인터뷰 내용 중, '어조'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조'라고 강조해 오신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조'는 화자/작가의 목소리다. 다른 말로 하면, 어조는 화자/작가의 태도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어조에 화자/작가의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담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수려한 글도 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 글은 쓰레기가 되기 십상이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이 아무리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져다 할지라도,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즉 사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결국 그 글은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 소음만 만들어 낼 뿐이다.

 

시인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를 낭독하고 해석하며, 이 시는 연애시가 아니라 대중들(중생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했다. 매지 캠퍼스에 강의 하러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그때의 버스 안 풍경을 담은 시라고 했다. 그때 그 중생들(대중들)의 삶에 흐르는 '사랑'을 포착해서 표현한 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건넸다. "마음이 사랑에 물들어 있을 때는 이렇게 보따리에 들어 있는 밤에서도 밤꽃이 핀다."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케이트 디카밀로 글, 배그램 이바툴린 그림)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손녀 애빌린이 밤마다 할머니(펠리그리나)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어느 날 밤 할머니가 애빌린에게 흑멧돼지로 변해버린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구애하는 남자들의 사랑을 모두 물리치고 숲으로 도망간 공주는 길을 잃고 헤매다 마녀의 집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마녀는 공주에게 질문한다. "넌 누구를 사랑하지?" 공주가 말한다.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자 마녀가 공주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날 실망시키는구나." 그리고 손을 들어 주문(파스피거리)을 외우자, 공주가 흑멧돼지로 변해버린다.

 

흑멧돼지로 변해버린 공주는 마녀의 집을 뛰쳐나와 숲 속으로 도망치는데, 마침 공주를 찾던 왕의 부하들이 흑멧돼지를 발견했고, 즉시 총으로 쏴 흑멧돼지를 잡아 성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요리사가 흑멧돼지 배를 갈랐는데, 그 뱃속에서 공주가 삼켰던 구애 남성의 반지를 발견한다. 요리사는 요리하는 내내 그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 이야기는 그냥 여기서 끝난다. 그러자, 애빌린은 화가 나서 할머니에게 묻는다. "끝이라고요?... 너무 빨리 끝나 버렸잖아요. 그리고 그 후로 행복하게 살지 않잖아요." 할머니는 손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어디 대답해 보렴.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날 수 있겠니?"

 

정현종 시인은 말한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역설적 표현이라고. 사랑은 그만큼 귀한 것이고, 사랑은 보따리 안에서도 밤꽃을 피우게 하고, 사랑은 죽은 것도 살려내는 것이라고. 그렇다. 애빌린의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날 수 있을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 눈 앞에 있어도 그것을 망치기 십상이다. 사랑만 있으면 아무리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은 피어난다.

 

그러므로,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조'이듯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사물(타자)에 대한 태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영어 성경은 '마음'을 'attitude'(태도)로 번역한다. 바울은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의 마음은 다름 아닌, 사물을 대하는 '태도'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윤동주가 스쳐지나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이 땅의 창궐하는 악과 고통을 하루 속히 멈춰 주시길,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국가는 없다]

 

성경의 메시지를 정치신학적으로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게 아닐까? “국가는 없다.” 성경은 저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철저히 이 땅에 대한 이야기다. 국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경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 성경을 들여다보면, 성경 해석은 산으로 간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왕에 대한 부정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국가에 대한 부정이다. 왕과 국가는 그저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우상일 뿐이다. 사람들은 반대로 이야기한다. 하나님이나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상상력이 빚은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왕, 눈에 보이는 국가, 바로 그것이 상상력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왕이 구원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국가가 구원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부정한다. 왕과 국가는 구원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구원하신다.

 

인간의 삶에 가장 영향을 깊게 미치는 것은 국가이다. 국가는 상상력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상상력의 존재인지를 알려준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상상력의 존재인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성경은 인간의 상상력을 해체한다. 성경은 국가라는 상상력을 더 정교하게 만들거나, 더 선하게 다듬는 데 관심이 없다. 성경은 그 상상력 자체를 무너뜨린다. “너희가 그렇게 절대적이라 믿는 그것은, 사실 절대가 아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치적 급진성이다.

 

정치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국가는 언제나 ‘가장 강력한 허구’로 작동해 왔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국가를 자연상태의 공포를 잠재우는 거대한 인공물로 묘사했다. 인간은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관리하기 위해 절대 권력을 상상하고 위임한다. 국가는 인간의 생존 본능이 만들어낸 상상력의 결정체다. 그러나 홉스가 간과한 것이 있다. 두려움을 관리하는 상상력은, 동시에 새로운 두려움을 끊임없이 생산한다는 사실이다. 국가는 안전을 약속하지만, 그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더 큰 폭력과 복종을 요구한다.

 

이 지점에서 성경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왜 너희는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는가?” 성경은 두려움을 전제로 질서를 구축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이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고 말한다. 출애굽 이야기는 단순한 종교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서사다. 바로는 질서와 안정을 제공하는 국가 권력이었고, 이스라엘은 그 질서 속에서 생존했지만 동시에 말살당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질서를 개선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질서에서 빠져나오게 하신다. 성경의 구원은 체제 개혁이 아니라 탈출이다.

 

이 점에서 성경은 근대 정치철학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칼 슈미트는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말했다. 국가는 위기 상황에서 법을 중단하고 폭력을 정당화함으로써 자신의 주권을 증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 역시 ‘예외’를 말하지만, 그 방향이 정반대라는 점이다. 성경에서 예외는 주권자의 폭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다. 안식일, 희년, 용서, 탕감은 모두 국가 질서의 정상 작동을 중단시키는 예외들이다. 그러나 그 예외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다.

 

“국가는 없다”는 말은 국가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는 고백이다. 성경은 국가를 상대화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를 둔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또 하나의 이상 국가가 아니다. 영토도 없고, 군대도 없고, 조세 제도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관계의 질서이며,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헌법이나 제도를 말하지 않고, 비유를 말한다. 씨앗, 누룩, 잃은 양, 탕자의 이야기. 이것들은 모두 국가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다.

 

여기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신국론』에서 두 개의 도성을 말한다. 하나는 자기 사랑에 기초한 땅의 도성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사랑에 기초한 하늘의 도성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도성이 공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역사 속에 뒤섞여 존재한다는 점이다. 국가는 언제든 하나님 나라를 가장한 우상이 될 수 있고, 교회 또한 국가의 논리를 내면화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묻는다. “너희는 누구를 왕으로 섬기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국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국가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미세하고 더 깊숙이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여권, 계좌, 신용 점수, 알고리즘, 데이터. 국가는 더 이상 깃발과 군복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 새로운 형태의 국가는 우리에게 묻지 않는다. 조용히 계산하고, 분류하고, 배제한다. 그렇기에 “국가는 없다”는 성경의 선언은 오늘 더욱 절실하다. 그것은 무정부주의의 구호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지막 저항의 언어다.

 

성경은 국가를 없애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에게 구원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왕에게 무릎 꿇지 말라고 말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로 살아보라고 초대한다. 이 초대 앞에서 신앙은 사적인 위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삶의 질서를 다시 선택하는 정치적 결단이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정치란, 누가 더 강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두려워하며 사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

[AI 민주주의]

 

AI 쓰나미가 닥쳤다. 이제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이 쓰나미를 맞이하고 있는 방식이다. AI 기술은 민주적 가치와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의 토대를 잠식할 수 있는 위험 또한 내포하고 있다. 결국 핵심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다. 기술을 만들어 낸 것도 인간이고, 그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인간이며, 그 사용의 결과와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 역시 인간이다. 기술은 중립적인 도구처럼 보이지만, 그 기술을 어떤 인간이, 어떤 가치 위에서, 어떤 권력 구조 안에서 사용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나는 AI 기술이 위협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보의 편향이라고 생각한다. AI는 에코 체임버와 필터 버블이라는 구조를 강화한다. 에코 체임버 효과란 밀폐된 반향실에서 자신의 목소리만 되돌아와 증폭되는 현상이다. 자기 목소리만 들리고, 타인의 목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이게 되고, 사고의 편향은 더욱 공고해진다. 필터 버블 효과 역시 마찬가지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보고 싶어 할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제공하고, 그 바깥의 세계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 결국 AI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더해 AI 기술은 정보의 왜곡과 가짜 뉴스의 생산을 극도로 용이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가짜를 현실로 믿게 만든다. 마치 영지주의가 다시 강림한 것 같다. 가짜를 진실로 믿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논증도, 설득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관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정신 병리라 할 수 있다.

 

AI 기술이 만들어 내는 이 세계를 영지주의의 강림에 빗대는 이유는 그 구조가 놀라울 만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인간 사이의 차등을 정당화한다는 데 있다. 세상은 영지를 깨달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뉜다. 영지를 깨달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자신을 이미 이 세계를 초월한 존재로 인식하며, 우월감과 선택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간다. 반면 아직 깨닫지 못한 자들은 무지한 존재,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 순간 관계는 더 이상 동등하지 않다. 가르치는 자와 계몽되어야 할 자,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아야 할 자라는 비대칭적 구조가 고착된다. 대개 영지주의적 기독교 구원론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정통 기독교가 그토록 경계했던 영지주의의 유령은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기독교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 신앙의 작동 방식이 이 영지주의적 구조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AI 기술은 이러한 영지주의적 사고를 더욱 강화한다. 왜곡된 정보와 가짜 뉴스를 접한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자신만이 깨달은 ‘영지’로 오인한다. 그 확신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 현상은 지금 한국 사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AI 기술이 손을 뻗은 거의 모든 사회에서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극우적 정치 세력이 빠르게 확산되는 현상의 이면에는 이러한 인식 구조의 변화가 깔려 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문제를 넘어, 인간이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붕괴되고 있다는 신호다.

 

우리가 마주한 세계는 이제 AI 민주주의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다. AI 기술의 발전과 적용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대신 갈라놓고 있지는 않은지, 인간을 효율과 수치로 환원하여 착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특정 집단이나 기업, 혹은 특정 국가에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어떤 나라가 기술을 무기로 삼아 제국주의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미 진행 중인 이 흐름을 직시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감시하지 않으면 멈추고, 저항하지 않으면 붕괴된다. AI 시대의 민주주의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의 역할은 분명하다. 교회는 AI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를 외면하지 말고, 오히려 그 논의를 생산적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피상적인 신앙 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구조를 바꾸는 힘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손과 발로, 몸으로 뛰며 AI 시대에 다시 돌아온 영지주의의 유령을 분별하고 몰아내야 한다. AI 기술에 매혹되어 현실을 상실한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계몽’하려 들기보다,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서서 현실을 다시 붙잡도록 돕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AI 기술을 배우고 활용하여 목회를 더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 AI 시대의 목회는 아니다. AI 기술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정치적·영적 파장이 무엇인지를 깊이 공부하고,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없도록 돌보는 것이 AI 시대의 목회다. 교회는 효율의 언어가 아니라 책임의 언어를, 성공의 언어가 아니라 돌봄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세상은 어둡고, 할 일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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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영화관에 가지 않고 집에서 편안한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는 일 자체가 살짝 귀찮아졌다. 더군다나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하는 몸이 되면서, 영화관에 두 시간 넘게 꼼짝없이 앉아 영화를 보는 일은 예전만큼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자연스럽게 집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대홍수. 제목만 보면, 단순한 재난 영화 같지만, 이 영화는 예상과는 달리 단순한 재난 영화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AI 시대를 사유하는 영화였다. 대홍수라는 재난 설정이 자칫 이 영화가 AI 시대를 사유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가릴 수 있으나, 재난은 설정일 뿐 그 내용은 AI 시대의 인류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침 『AI와 정치철학』이라는 책을 읽고 있던 터라 이 영화에 더 눈길이 갔다. 책의 서문은 AI 기술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제시한다. 하나는 AI의 순기능과 긍정적 가능성에 주목하며, 인간이 질병과 죽음 같은 근본적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유토피아적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AI의 역기능을 강조하며, AI가 인간의 영역을 잠식하고 결국 인간을 통제하거나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관점이다. 저자는 이 두 관점 모두의 위험을 지적한다. 낙관은 위험을 외면할 수 있고, 비관은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정진화, 2025).

 

영화 속에서는 소행성 충돌로 인해 지구에 대홍수의 재난이 닥치고,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이 재난이 닥친 시점은 이미 AI 기술이 상당히 발전한 시대다. 다만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AI에 ‘감성 지능’이 장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화는 인간의 감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AI의 시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갈등을 따라간다. 흥미로운 점은, AI가 포착한 인간 감성의 정점이 ‘모성애’라는 사실이다.

 

『AI와 정치철학』의 ‘AI와 인간의 활동’ 장에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활동 개념을 불러온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적 활동이고, 작업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세계에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활동이며, 행위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활동이다. 특별히 행위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타인의 인정과 응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AI의 활동과 인간의 활동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저자의 말처럼, “타인과의 감정을 교류하며 소통하는 행위는 여전히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7쪽).

 

AI의 최종 목표는 인간의 감성 지능을 장착하는 것이 될 것이다. AI는 인간의 뇌를 모방한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AI는 결국 인간의 감정을 모방한 ‘인공감정’을 장착하려고 할 것이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포착한 인간 감정의 정점이 ‘모성애’라는 것은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인공감정’ 논의에 하나의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AI가 ‘인공감정’을 장착하게 되면, 아렌트가 말한 ‘행위’(action) 또한 AI가 수행할 수 있는 활동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가진 고유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AI는 인간보다 노동을 더 잘 할 것이고, AI는 인간보다 작업을 더 잘 할 것이며, AI는 결국 인간보다 행위를 잘 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의미일까?

 

이 영화는 AI에 대한 두 관점 중 어느 하나에 쉽게 서지 않는다. 다만 재난이라는 디스토피아적 현실 속에서도 인류를 구원하는 서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 가능성 쪽에 조금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AI가 ‘인공감정’을 장착하고 나면, ‘인공영성’을 장착하려 들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미래의 목회는 인간들을 위한 목회를 넘어 AI를 위한 목회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아마도, AI는 인간보다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을까. AI는 인간보다 노동, 작업, 행위를 훨씬 더 잘하니까. 기묘한 세상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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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AI 시대의 정체성 신학

 

AI가 인간보다 우리를 더 잘 파악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에서 멈추는지, 어떤 언어에 반응하는지를 스스로 알기 전에 플랫폼이 먼저 안다. 이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보다, “나는 어떻게 불리고 있는가?”를 더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송길영은 그의 시대예보 3부작, 〈핵개인의 시대〉, 〈호명사회〉, 〈경량문명의 탄생〉에서 이 전환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그리고 나는 이 분석이 신학의 언어로 다시 호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사회진단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AI 시대를 관통하는 정체성 신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핵개인의 시대>는 공동체가 붕괴된 자리에서 탄생한 고립된 자아를 보여준다. 과거 우리는 소속을 통해 존재를 확인했다. “나는 누구의 아들이다”, “나는 이 교회 사람이다”라는 말은 정체성의 토대였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홀로 생존 전략을 설계해야 하는 존재, 이른바 핵개인(核個人)으로 남겨진다. 연대의 언어는 사라지고, “내가 나답게 살고 있는가”만이 기준이 된다. 이 질문은 해방처럼 보이지만, 실은 혹독한 자기관리 시대의 서막이다. 나를 증명해줄 공동체가 사라진 자리, 인간은 더 치열하게 자신을 포장하고 설명해야 한다.

 

<호명사회>는 이 고립된 개인 위에 떠 있는 새로운 불안을 이야기한다. 플랫폼은 끊임없이 우리를 호출한다. 알림, 태그, 추천, 노출.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호명되지 못하는 자는 곧 삭제된 자와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지 않고 자신을 업데이트한다. 정체성은 더 이상 고백이나 내면의 신념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반응 횟수와 호출 빈도로 측정된다. 존재의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나는 불리고 있는가? 아니면 잊혀지고 있는가?”

 

<경량문명의 탄생>은 이 불안이 만들어낸 생존 방식을 기술한다. 인간은 이제 무거운 관계를 감당할 에너지가 없다. 깊이 있는 신념, 책임이 따르는 만남, 오래 지속되는 헌신은 모두 부담이 된다. 속도와 유연성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스킵 가능한 관계, 가볍게 머물다 떠날 수 있는 연결, 그것이 현대인의 이상적 관계 형태가 되었다. 정체성은 더 이상 뿌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인터페이스가 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신학은 다시 말해야 한다. AI가 호출하는 정체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내는 정체성. 플랫폼의 반응 알고리즘이 아니라, 성찬의 기억에서 확인되는 정체성. 나는 이것을 ‘AI 시대의 정체성 신학’, 혹은 ‘성체성 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성찬(Eucharist)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너는 내 몸이다”라는 비가역적 호명의 자리다. 플랫폼의 호명은 언제든 철회될 수 있고, 알고리즘의 관심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성찬의 호명은 다르다. “이는 너를 위하는 내 몸이니,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이 선언 속에서 인간은 다시 존재한다. 데이터가 나를 정의하기 전에, 기억이 나를 소환한다. 그 기억은 기록된 코드가 아니라, 몸을 나누는 기억, 관계를 되살리는 기억이다.

 

AI는 우리를 매끄러운 프로필로 만들지만, 성찬은 우리를 상처 입었으나 기억된 몸으로 부른다. 플랫폼은 우리에게 가벼운 연결을 제안하지만, 성찬은 함께 먹는 행위로 관계를 다시 물질화한다. AI 시대의 정체성 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정체성은 데이터가 아니라, 기억된 몸이다.”

 

핵개인의 고립을 넘어,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학. 호명사회의 불안을 넘어, “너는 경쟁적으로 불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신학. 경량문명의 피로를 넘어, “관계는 가벼울 수 없으며, 사랑은 반드시 무게를 가진다”고 말해줄 수 있는 신학. 나는 이것이 포스트-플랫폼 시대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언어라고 믿는다.


AI가 우리를 분류하기 전에, 성찬이 우리를 기억하게 하라. 플랫폼이 우리를 태그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다는 사실을 다시 선언하게 하라. 이것이 바로 AI 시대의 정체성 신학, 그리고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성체의 시대’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12. 12. 07:59

거함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4:1-21)

 

생명의 주님,

오늘 우리에게 "거함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거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하시고,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흔들릴 때,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참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

우리의 사랑이 메말라갈 때,

다시 성령으로 우리를 채우셔서

다시금 사랑하고, 다시금 생명을 품게 하소서.

이제, 주님과 함께 거하는 삶,

주님 안에서 뿌리내린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거하는 자에게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

우리의 하루하루에 흘러 넘치게 하게 하시고,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주님의 생명과 사랑을 전하며

거할 만한 사람,

거할 만한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 몸과 마음의 거처가 되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12. 12. 07:56

아낌없이 주는 환대의 삶을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2:1-8)

 

우리를 환대의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

마리아는 환대했지만

유다는 불평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다의 불평이 합리적인 것 같지만,

주의 말씀을 통해

마리아가 행한 환대의 깊이를 깨닫습니다.

주님,

우리도 마리아처럼

아낌없이 주는 환대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은혜를

온 몸으로 껴안는 삶입니다.

환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이 온통 부활의 은총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의 기쁨과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