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Facebook)을 통해서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요즘 페이스북을 열어 보면, 종교개혁은 이미 수백 번쯤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한국 교회를 향한 날 선 비판, 구조적 문제에 대한 통렬한 분석,
세습과 권력, 돈과 위선에 대한 고발이 연일 타임라인을 채운다.
댓글에는 공감의 이모티콘이 줄지어 달리고,
분노는 공유되고, 정의는 ‘좋아요’ 숫자로 증명된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이게 문제야.”
“이래서 한국 교회가 욕을 먹는 거지.”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많은 ‘개혁’이 매일같이 선언되는데, 교회는 그대로다.
공론장은 뜨겁고, 현장은 차갑다
페이스북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대개 개혁 성향이 강하다.
신학적으로 고민하고, 교회의 공공성을 말하며, 구조적 변화를 촉구한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진지하다.
나 역시 그 글들을 읽으며 때로는 깊이 공감하고,
때로는 속이 시원해진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우리가 비판하는 그 사람들,
교회를 망가뜨린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
기득권을 세습하고 구조를 고착시키는 그 사람들은
대개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임라인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긴 글을 끝까지 읽을 의지도, 관심도, 시간도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영향력의 계보와 기득권을 지키는 일이다.
나는 유학 시절 함께 공부하던 몇몇 동료들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교회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결국 세습을 택했다.
그들의 SNS 계정은 조용하다. 아니, 애초에 없다.
굳이 거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들의 세계는 온라인이 아니라, 이미 구축된 오프라인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페이스북에서 외쳐도,
그 소리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타임라인 안에서만 울린다.
우리는 서로의 분노를 확인하고, 서로의 정의를 재확인한다.
그러나 구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은 ‘좋아요’가 아니라 ‘침투’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페이스북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물론 그 시대에 SNS가 있었다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한 ‘비판의 확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장에 몸을 던진 사건이었다.
루터는 교회의 한복판에 서서 논쟁했고,
칼뱅은 도시 제네바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행정과 제도를 붙들었다.
종교개혁은 담론의 승리가 아니라, 공간의 재편이었다.
그들은 타임라인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강단과 교회 질서를 새롭게 했다.
종교개혁은 좋아요의 숫자 확보가 아니라, 위험의 감수였다.
문제는 ‘현장’이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페북에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성토하는 글만 써서는 절대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
공감은 형성될지 몰라도,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개혁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바른 교회를 세우고 싶은 사람들, 신학적으로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사람들, 그들이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의 벽이 등장한다.
기존 교회에 들어가면 갈등이 생긴다.
기득권 구조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사임하는 경우도 많다.
개척을 하려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
가족의 생계, 아이들의 교육, 현실의 숫자들이 신학적 이상을 압박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페이스북으로 돌아온다.
현실 대신 담론을 선택한다.
몸 대신 문장을 선택한다.
그러나 현장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역사는 언제나 ‘현장’을 통해 움직였다.
성육신은 하늘의 선언이 아니라, 땅의 침투였다.
하나님은 게시글을 올리지 않으셨다. 몸을 입으셨다.
교회 개혁도 마찬가지다.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작더라도, 느리더라도, 불편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개혁적인 공동체를 세우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거대한 혁명이 아니어도 된다.
작은 교회에서 투명한 재정을 시작하는 것,
설교에서 정치적 선동이 아닌 복음을 선포하는 것,
권위를 내려놓고 공동체적 리더십을 실험하는 것,
청년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이 ‘현장 개혁’이다.
페이스북은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침투의 계획이 필요하다.
나는 때때로 이런 상상을 한다.
페이스북에서 분노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10%만이라도 실제 교회 구조 속으로 들어가 변화를 시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장로로, 교사로, 부목사로, 평신도 리더로,
혹은 작은 개척 교회의 목사로, 또는 동역자로.
현장에 침투하려는 계획이 필요하다.
구조를 이해하고, 재정 흐름을 배우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옛 관행을 조금씩 밀어내는 전략.
개혁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인내의 설계다.
페북으로는 종교개혁을 이룰 수 없다.
페이스북은 필요하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그곳은 공론장이지만, 교회는 공간이다.
공감은 클릭으로 가능하지만, 개혁은 땀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타임라인 위에서 개혁을 꿈꾸어 왔다.
이제는 타임라인을 내려와야 한다.
현장으로 가야 한다.
현장에 들어가, 현장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작은 균열이 시작될 것이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개혁은 작은 균열을 내는 진지전(war of position)으로만 가능하다.
장기적 헤게모니 구축 전략이 필요하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더라도
주구장창 그 자리에서 작은 균열을 내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일은 부질없다.
스펙타클은 균열을 내지 못한다. 기득권이 되는 통로가 될 뿐이다.
종교개혁은 댓글 창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강단과 교회 회의실과 교회 재정 장부와 교육부 교실에서 일어난다.
페북을 통해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현장으로 들어간다면,
현장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작은 균열이라도 내겠다고 다짐하며 땀을 흘리면
그때부터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눈물을 삼키며 현장에서 ‘존버’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페이스북 #교회개혁 #존버목회 #현장 #그람시 #진지전 #스펙타클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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