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야, 물러가라

 

1925년 7월, 미국 테네시주 데이턴(‌Dayton)에서 한 재판이 열렸다. 일명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Scopes Monkey Trial). 당시 테네시주는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버틀러 법’(Butler Act)을 통과시켰다. 이에 반발한 한 젊은 생물 교사, 존 스코프스(John Scopes)는 일부러 고등학생들에게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치고, 의도적으로 기소당했다. 이것은 ‘과학의 자유 vs. 종교적 검열’을 놓고 벌어진 상징적 퍼포먼스 재판이었고, 미국시민자유연합(ACLU)의 후원을 받으며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양측 변호인도 당시 최고의 인물들이었다. 기소 측은 세 번이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었다. 그는 신실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였고, 성경적 창조론을 앞세워 진화론을 강력히 반대했다. 반면 변호인으로 나선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는 당대 최고의 형사 변호사이자 진보 지식인이었다. 그는 조세 개혁과 토지 공개념을 주장한 ‘조지스트’(Georgist)였고, 자유주의와 인권의 대변자였다.

 

재판의 백미는 대로우가 브라이언을 증인석에 세운 장면이다. 대로우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조목조목 짚어 나간다. “브라이언 씨, 요나가 고래 뱃속에 삼일 있었다는 이야기를 믿습니까?” “네,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 그대로 믿습니다.” “지구가 6천 년 되었다고 보십니까?” “네, 그렇게 계산됩니다.”

 

이 장면은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가 이성을 거부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 결과 ‘기독교 = 반지성주의’라는 이미지가 사회에 깊이 각인되었다. 역사학자 마크 놀(Mark A. Noll)은 그의 고전 『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 1994)』에서 이 현상을 복음주의 신앙의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한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란, 비판적 사고를 경시하고, 학문적 탐구나 이성적 토론을 기피하며, 복잡한 현실에 대한 단순한 해석을 고집하는 태도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교회의 쇠퇴와 직결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신뢰를 잃고 있는 이유는 다양하다. 세속화, 과학기술의 발달, 폐쇄적 문화, 권위주의, 도덕적 실패, 정치적 편향, 혐오의 언어, 공동체의 약화, 진리 독점성 등. 이 모든 요소의 이면에는 ‘반지성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교회가 여전히 자기 안에만 갇혀 있을 때, 사람들은 교회를 시대착오적인 곳으로 느낀다. 과학의 발전 앞에서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신앙은 설득력을 잃는다. 비판을 ‘불순’이라 여기고, 토론 없는 일방적 권위를 유지할 때, 신앙은 더 이상 지적 삶의 동반자가 되지 못한다. 성 스캔들과 재정 비리 같은 도덕적 실패 역시 반지성주의의 결과다. 고백과 성찰 대신 감추고 방어하는 구조가 문제를 더 깊게 만든다. 여기에 정치적 편향이 더해져 교회가 복음이 아니라 특정 이념의 도구가 될 때, 신앙은 빛을 잃는다. 다양한 세계관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 “오직 우리만이 진리를 안다”는 식의 태도는 자칫 오만하게 읽힌다. 교회는 더 이상 타자와 대화하지 않고, 사랑과 환대보다는 정죄의 언어를 더 가까이 두고 있다. 이렇게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교회는 더 이상 사람들의 삶과 연결되지 못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앙은 성찰과 질문, 해석과 응답 속에서 자라온 전통이다. 신앙은 이성과 긴밀히 동행하고,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탐구의 여정이다. 교회는 다시, 묻고 토론하고 사유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쳐야 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으로. 반지성주의야, 물러가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5. 6. 28. 20:00

거대한 교회론
(요한계시록 14:1-5)

1. 신정국가
‘신정국가’: ‘신이 통치하는 국가’라는 개념은 사실 아시아인들에게는 조금 낯선 개념이다. 물론 이제는 서구 개념인 ‘신정국가’라는 용어와 사상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게 낯선 개념인 것은 여전하다. 신정국가 개념은 두 국가 개념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서구 사회는 오랫동안 세속국가와 신정국가(교회)가 공존했다. 두 권력이 갈등 관계에 있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다. 그러다, 사무엘 시대에 이르러, ‘왕’(세속권력)이 나타난다. 사무엘은 이러한 두 권력 체제(세속 권력과 신정 권력)의 위험성을 말한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왕’을 원한다. 

로마의 정치 체제를 보면, 신정일치 체제였다. 황제가 마치 신처럼 군림했다. 그것에 대한 폐해는 대단했다. 황제가 신처럼 숭배되면서, 차별과 배제와 폭력이 난무했다. 황제가 저지르는 신적 폭력 앞에 감히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다. 신적 폭력은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권력 또는 권위를 신에 투영해서 행사하려는 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신적 폭력만큼 합법적 폭력도 없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정치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읽어야, 요한계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2. 십사만사천
14장 1절을 보면, 요한이 본 새로운 환상이 묘사되어 있다.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서 있다.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명이 서 있다. 그런데, 그 십사만사천명에게는 아주 특별한 특징이 있다.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이런 이름을 이마에 새기고 다니지 않는다. 왜? 그러면 웃기니까.

이것은 상징이다. 이마에 이름이 새겨 있다는 것은 그 존재에게 ‘속했다’는 뜻이다. 속한다는 것은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다. 어떤 가문에 속해 있다. 그 가문의 보호를 받는다. 어느 국가에 속해 있다. 그 나라의 보호를 받는다. 아버지(하나님)와 아들(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다.

14,400은 666과 더불어 문제적 숫자이다. 크게 잘못 유통되어 사람들을 교묘히 속이는 숫자이다. 14,400이라는 숫자는 12 곱하기 12 곱하기 1,000이다. 12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고, 1,000은 많은 수를 상징한다. 여기에서 표현된 ’14,400명’은 짐승의 숭배자들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은 짐승의 표와는 달리, 즉 짐승(폭력을 저지르는 황제, 그래서 황제/체제의 폭력에 가담하는 짐승 같은 인간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속해 있는, 세례를 받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가장 우습게 만들고 왜곡하는 자들은 이러한 상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다. 14,400명만 구원 받는다고 말하는 것, 그 숫자에 포함되어야 구원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 숫자에 포함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이렇게 말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채근하고, 착취하는 인간들은 짐승 중의 짐승이다. 그러한 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고 깝치고, 그러한 저질 인간들,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현혹되어 삶을 빼앗긴 자들은 참으로 불쌍한 인생을 사는 자들이다. 제발, 현혹되지 말고, 혹시 그러한 짐승들에게 인생을 빼앗긴 자들이 있다면, 어서 빨리 탈출하라. 시온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14,400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그런 짐승들에게 저항하며, 자유와 사랑을 지킨다. 

3. 하늘 예배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
14장 2절은 하늘 예배의 장면을 묘사한다. 많은 물소리, 큰 우렛 소리 같은 것, 거문고 타는 자들이 연주가 등장한다. (거문고는 한국 정서에 맞게 번역한 것) 하늘 예배의 풍경이다. 이러한 풍경은 기독교에서 음악이 발전하고, 교회에서 음악이 중요하게 쓰일 수밖에 없는 배경들을 보여준다.

4. 새노래
14장 3절은 ‘음악’의 중요성을 더 부각시킨다. 하늘 예배의 예배자들은 보좌 앞과 네 생물, 그리고 이십사 장로들 앞에서 ‘새노래’를 부른다.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십사만사천명’(그리스도인 공동체)은 이 새노래를 배워야 한다. 이 새노래는 이미 요한계시록 5장 9-10절에 나와 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우리가 이 가삿말로 노래를 지어 예배 시간에 부르고 있지만, 여기서 ‘새노래’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 가삿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노래는 옛노래가 있었다는 뜻이다. 옛노래는 무엇일까? 로마 제국(황제)의 권력과 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로마 제국(황제)의 권력과 힘에 무릎 꿇고, 그들이 만들어 낸 가짜 평화에 순응하며, 그 세상을 노래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세계를 전복시키셨다. 힘과 폭력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자유와 사랑의 나라를 세우셨다. 

세속 권력은 힘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다스리지만, 하나님은 자유와 사랑을 사람들에게 주신다. 새노래는 하나님의 이러한 통치를 찬양하는 것이다.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폭력과 전쟁과 배제와 차별과 억압을 반대하고 거기에 저항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와 사랑으로 평화와 정의와 형제 사랑을 실천한다. 이것이 새노래이다. 새로 작곡해서 부르는 노래가 새노래가 아니다. 폭력과 전쟁과 배제와 차별과 억압을 반대하고 거기에 저항하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자유와 사랑에 힘입어, 생명과 평화와 정의와 형제 사랑이 넘치는 삶,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새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5. 조심해야 할 해석
14장 4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사람들’은 십사만사천명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두 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1) 십사만사천명은 남자들만을 가리킨다. 2) 여자와 성행위를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명백히 공부 안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질 안 좋은 사람이다. 이러한 구절은 나쁜 사람들의 해석에 의해, 여성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다. 그리고 남녀간의 성관계를 저급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생물학적 여자(여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로마의 여신, 또는 로마를 상징하는 “땅의 음녀들의 가증한 것들의 어미’(계 17:5-6)을 가리킨다. 여자와 더불어 더럽혀졌다는 뜻은 로마 제국의 우상 숭배적 체계, 즉 폭력과 혐오와 배제, 차별과 전쟁과 억압의 체제에 순응한 자들, 그러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순결한 자’는 그러한 체제에 물들지 않고 저항하면서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십사만사천명, 즉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러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6. 거대한 교회론
14장 4절 후반부와 5절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이것은 거대한 교회론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로 모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어떠한 세상을 꿈꾸는가 등을 말해주는 거대한 교회론이다. 여기서 거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의 지향점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어둠을 비추는 빛을 마음에 품은 자들이 모인 곳이고, 짠 맛을 내는 소금을 마음을 품은 자들이 모인 곳이다.  우리 안에 빛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어둠을 비추고 있는가. 그 빛이 얼마나 밝은 빛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은 빛은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우리 안에 소금이 있는가. 소금은 맛을 낸다. 지치고 힘들 때 소금 한 알을 입에 넣어보라. 입 안에서 맛이 돌고 생기가 돈다. 이러한 사람을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고 요한계시록은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에게 속한 자들, 그래서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이렇게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 세상이 어둡고,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에게 속해 있고, 새노래를 부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 안에 빛과 소금이 화수분처럼 솟아날 것이고, 그것을 삶에 지친 자들과 나누면서 좀 더 밝은 세상, 좀 더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이러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길벗이 된 여러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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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저항과 믿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고백으로 여긴다. 입술로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하고, 교리를 받아들이고,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그런 믿음의 정의에 뼈아픈 이의를 제기한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믿음은 ‘저항’이다. 단순한 동의나 고백이 아니라, 어떤 체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반대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한계시록의 믿음은 로마 제국의 질서에 대한 비폭력적이고 예언자적인 저항이다.

그 시대 로마 제국은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를 숭배하게 했다. 그 황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처럼 등장하며, 화려한 권력과 위용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그는 입으로는 ‘평화’를 말했지만, 그 평화는 검과 피로 유지되었다. 그가 세운 질서는 무고한 생명의 희생 위에 세워졌고, 약한 자의 고통 위에 번영을 노래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짐승, 곧 황제와 제국에 저항하라고 명한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는 찬양은 체제에 순응하고 복종한 자들의 탄식이며, “누가 능히 이와 싸우리요?”라는 말은 믿음 없는 자의 절망이다. 그러나 요한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짐승의 정체를 폭로하며, 싸우라고 말한다. 아니, 저항하라고 말한다.

그 저항이 바로 ‘믿음’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믿음이란, 황제의 권력에 무릎 꿇지 않는 것이다. 황제의 거짓 평화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짐승의 권세를 찬양하지 않는 것이다. 비폭력적인 인내로, 체제의 폭력을 견디며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믿음’과 얼마나 다른가. 통상적인 믿음은 내세의 평안과 구원을 보장받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믿음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믿음은 현재의 체제에 대한 급진적이고 영적인 대항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역사와 공동체의 정의를 갈망하는 신앙이다. 그렇기에 믿음은 고백이 아니라 ‘길’이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길. 그 길은 때로 외롭고, 고통스럽고, 때론 죽음의 위협 앞에 선다.

그러나 요한은 말한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10) 그 인내는 결코 침묵이나 체념이 아니다. 비폭력의 힘을 지닌 고요한 저항이고, 사랑의 방식으로 체제를 바꾸려는 성령의 전략이다. 믿음이란,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는 하나님의 선언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의를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다.그 어떤 이유로든 생명을 경시하거나, 그 권리를 짓밟는 자들과 싸우는 것이다. 그 싸움은 손에 무기를 쥐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 복음을 품는 일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보여주듯, 가장 깊은 저항은 사랑이며, 가장 강한 믿음은 자기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앞에는 짐승이 있다.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하는 미디어, 약자를 착취하는 자본의 논리, 혐오를 조장하며 질서를 세우는 이념들. 그 앞에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믿음은 여전히 고백이 아니라, 저항의 선택지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 안에 살아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되, 짐승에게 무릎 꿇지 않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신앙 회복은 ‘믿음의 정의’를 다시 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요한계시록이 새겨준 그 믿음, 곧 저항하는 믿음을 다시 품고 살아야 한다. 그 믿음이 우리를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세울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전쟁과 예배]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많은 경우, 예배는 마음의 위로를 얻고 현실의 고단함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쉼의 시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예배는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뜨거운 실재다. 예배는 낭만이 아니라 전쟁이다.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저항의 자리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여자’로 비유된 교회가 ‘용’으로 상징되는 악의 세력과 맞서고 있다. 이 여자는 하늘의 별과 해와 달을 몸에 두른 영광스러운 존재지만, 동시에 산고에 시달리는 해산하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고통 중에 진통하고, 박해 속에 울부짖는 교회의 모습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궁극의 악한 세력을 상징하며, 하늘에서 쫓겨난 뒤 여자를 끝까지 괴롭힌다.

이 장면은 환상이 아니다. 소아시아의 초대교회들처럼 오늘의 교회도 여전히 악의 세력과 대면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삶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족과의 갈등, 교회 안의 분열, 사회의 부정의, 내면의 상처와 유혹들… 이 모든 것들이 용의 발톱이며 숨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 답은 예배다.


요한계시록은 전쟁과 예배를 교차시키며 보여준다. 하늘에서는 미가엘이 용과 전쟁을 벌이고, 그 직후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를 찬양하는 예배가 울려 퍼진다. 이 예배는 단순한 찬양이 아니다. 이 예배는 제국의 언어를 뒤집는 저항의 노래다. '구원, 능력, 나라, 권세'—이 네 단어는 본래 로마 제국의 언어였다. 황제의 선전 문구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하나님과 어린양께 돌리며 제국을 무너뜨리는 반전의 노래로 바꾼다.

예배는 이렇게 불의한 세상, 억압적 질서에 맞서는 교회의 무기다. 단지 아름다운 음악과 위로의 메시지로 끝나는 감성적 시간이 아니라, 현실의 한복판에서 드려지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교회당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울려 퍼지는 종교 행사가 아니다. 예배는 매주 반복되는 리추얼이 아니라, 삶의 전장에 나가기 위한 하늘의 군수 지원소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전쟁의 현실을 자각하고, 진리를 분별하며, 용기와 위로와 공동체의 힘을 얻는다.

그래서 예배는 '시간 떼우기'가 아니다. 예배는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생존의 길이며, 해방의 길이며, 승리의 길이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예배의 깊이를 기억하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더 뜨겁고, 더 진실하고, 더 하늘을 닮아가도록 노력하자.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 되며, 기도가 우리의 저항이 될 때,
우리는 이 전쟁 같은 삶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견뎌낼 수 있다.

예배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주님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Posted by 장준식

[한국 경제와 교회가 막장으로 가는 이유]

김수행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책을 번역해야지 하면서도 선뜻 착수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악법 '국가보안법' 때문이었다. 번역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던 중 1988년 9월 이론과실천사의 대표가 [자본론]의 일부를 번역해 출간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는데, 이것이 또한 나의 작업을 지연시키기도 했다."(1989년 초판 번역자의 말)

"나는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1989년 초판 번역자의 말)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필두로 발전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은 한 마디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이다. 문제는 고전파 경제학이 자본주의 이면에 흐르는 노동 착취는 보지 못하고, 그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상품생산과 교환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전파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자연적인 것'으로 미화했다.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이기심마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킬 거라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다. 

마르크스의 예언자적 시선(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교묘히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능력)은 자본주의 체제가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착취'에 머문다.  노동이 상품처럼 사고 팔리는 현실이, 사실은 노동자의 삶 자체를 소모하고 착취하는 구조임을 고발한다. 마르크스의 눈에 자본주의는 '자연적이고 자유로운 체제'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폭력적인 체제였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유 거래'는 사실 비대칭적 권력 관계(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팔아야만 하는)를 은폐한다고 비판했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말하고 싶은 것의 요지는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착취의 체계이고, 고전파 경제학은 그 착취를 자연스럽고 포장한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계시적이고 구원적인 체제가 아니고 기득권자들(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착취와 억압의 체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유', 또는 '자율'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마치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속인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막장으로 간 이유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가 받아들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김수행이 말한 것처럼, 마르크스 이론은 '빨갱이' 딱지가 붙어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통되지 못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던진 화두를 붙들고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 감추어진 면,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들을 충분히 살펴보지 못한 채, 그것이 경제 체제의 전부인 것처럼 신봉했다는 데 있다. 한국 교회는 이와 발맞추어 나가며, 자본주의 체제에 축성을 더하고, 자본주의가 마치 하나님이 뜻하신 경제 체제인 것처럼 신학적 지원을 했다. 

교회가 역사적 폭력 체제인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현재로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마땅히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그래도 마르크스가 예언자적 시선으로 자본주의 체제 이면에 있는 착취와 폭력의 어둠은 감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될 것이고, 야수 같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인간은 생명을 계속 잃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을 계속 파헤치고, 그것에 희생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두운 면을 밝음으로 채우도록 체제를 계속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일에 교회가 앞장서지 않는다면, 누가 앞장서겠는가? 생명을 사랑하는 주님께서 생명을 헤치는 야수 자본주의를 그냥 놓아둘 리 없다.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비판한 이유는 그 당시 서구 교회가 자본주의 체제에 축성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수 자본주의에 물려서 거반 죽게 된 이들에게 그저 '아편'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폭력 체제에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한 축이 된 교회를 비판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와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 김수행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던 것을 다시 여기에 적는다. "나는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아직도 '빨갱이' 프레임에 갇혀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자본주의에 자신이 착취당하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더러,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부를 증진시키고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의 목을 은근슬쩍 조르며 협박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협박으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쾌락'으로 느끼는 듯하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병리적 마조히스트들(피학적 인간들/폭력을 당하고 있는 건데 이건 '쾌락'이라고 착각하는 인간들)이 가득하다.  

우리를 구원하는 손은 오직 주님만이 내밀어 주신다.

Posted by 장준식

조희대 대법원장의 판결에 부쳐
― 나쁘거나, 공부를 안 하거나

오늘날 한국 정부에는 나쁘거나, 공부를 하지 않는 보수 세력만 득실대는 듯하다. 어제 있었던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재판은 명백한 정치 개입이며,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한국 사회를 후퇴시키는 몰염치한 행위였다.

윤석열 일당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특히 이들의 정치 행위를 보면,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결정주의(decisionism)'에 깊이 갇혀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슈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별'로 보고, 위기 상황에서는 국가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사상은 전체주의와 나치즘을 낳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윤석열 정권은 마치 이 과거의 사고방식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듯하다.

현대 정치철학은 칼 슈미트의 통찰, 즉 정치는 갈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계승했지만, 그가 제안한 '결정주의'를 넘어섰다. 현대 정치철학자들, 특히 샹탈 무페(Chantal Mouffe)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갈등을 죽음과 생존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대신,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샹탈 무페는 '경합주의(agonism)'를 주장한다. 무페 역시 전통적 자유주의가 꿈꾸던 합리적 합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녀는 갈등을 폭력이나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제도화된 규칙 안에서 정당한 경쟁(adversary)을 통해 표출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갈등은 억압하거나 소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관리되고 제도화되어야 할 현실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다중(multitude)'을 강조한다. 그는 국가 권력에 주권이 집중되는 것을 비판하며, 제국적 자본에 맞서 다양한 주체성의 집합이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권은 탈취하거나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의 통찰처럼 정치는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다. 이를 부정하는 정치철학자는 없다. 그러나 이 적대를 다루는 방식이 문제다. 슈미트는 강력한 주권이 갈등을 통제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축소와 자유·인권의 심각한 제한을 초래한다.

내가 윤석열 정권을 비판하는 핵심도 바로 여기 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나 조희대 대법원장의 판결은, 갈등을 제도적 경합이나 시민 다중의 자율적 해결에 맡기지 않고, 국가 권력이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정리하려는 결정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는 현대 정치철학이 비판하고 넘어선 정치모델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정치적 갈등은 무페가 말한 것처럼 경합의 방식으로, 그리고 네그리가 강조한 것처럼 다중의 자발적 창조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국가 권력은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겨야 한다. 그래야 현대 민주주의는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어제 조희대 대법원장이 내린 판결은 경합도 다중도 무시한 채, 국가 권력이 모든 것을 교통정리하겠다는 권위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는 민주주의의 쇠퇴이자, 명백한 정치적 폭력이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도, 정치적 판결을 내린 조희대도 현대 정치철학이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면, 애초부터 나쁜 의도를 품고 정치에 뛰어든 자들이거나.

이 시점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주권자 개개인의 정치적 행동이다. 제도적 경합을 방해하고 다중의 자율성을 억압하려는 세력에 대해 시민은 저항해야 한다. 주권자 개개인이 힘을 모아 다중을 형성하고, 새로운 주권을 창조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많은 발전을 이루어왔다. 시민들의 정치 의식 또한 깊어지고 진보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려는 수구세력의 정치 공작에 더 이상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시민이 들고 일어설 것이다. 국민이 이길 것이다. 내란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고 민주 정권이 회복될 때까지, 우리 모두는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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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요한계시록의 정치적 비전]  

성경 서사(Narrative)의 토대: 출애굽
성경 서사(Narrative)의 토대는 출애굽이다. 성경에서 출애굽기는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출애굽기의 반복/변주라고 보면 된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정치적/윤리적 비전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정치적 비전은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Freedom from oppression.) 하나님의 윤리적 비전은 자유인으로서의 삶이다. (자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핵심: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이러한 정치적/윤리적 비전의 완성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자유와 사랑의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와 사랑의 화신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와 사랑으로 점철된다. 우리는 자유와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의 현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자유와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삶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애굽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사랑은커녕 미움과 다툼의 삶을 살고 있다. 나 자신의 내면을 봐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국가, 세계 전부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여주고(반복해서 보여주고/모든 성경은 출애굽기의 재현), 우리를 격려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받은 최고의 복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유와 사랑의 나라를 갈망하고, 그 나라를 이루어 가라고 권면하고 독려하고 힘을 준다.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자유와 사랑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삶의 궁극적인 비전이다. 이 비전을 위해서 인류가 하나될 때, 이 땅에 평화가 임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이야기
요한계시록 11장 15-19절은 일곱째 나팔을 불었을 때 발생한 일에 대한 기록이다. 여섯 번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침내 마지막 나팔인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진다. 그때 요한이 본 환상은 하늘 예배이다. 그 예배에서 울려 퍼진 선포는 다음과 같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15절) ‘세상 나라’는 로마 제국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세상 나라는 애굽과 같다. 자유와 사랑을 묵살하고 빼앗아 가는 나라. 모든 사람들은 노예 만드는 억압과 폭력의 나라/체제이다. 이 나라가 이제 그리스도의 나라(하나님 나라)로 바뀐다는 선포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정치적 비전이다. 이 정치적 비전은 교회의 비전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비전이기도 한다. 우리는 교회로 한 몸을 이루어 이 비전을 마음에 품고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두 증인의 사역 결과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 이것이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라. 이 구절은 이후 기독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유럽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유럽 사회의 주류 사상이 된 이후 유럽의 나라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언제나 세상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하나님 나라)와 충돌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비전은 종말론적 비전인 것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종말론적 비전이란 인간이 이루는 비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끝내시고(end) 이루시는 비전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하나님의 때에. 그래서 우리는 일곱째 나팔 이야기에 나오는 하늘의 예배를 지금 여기에서 매주일(주님의 날에)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 세상 나라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바꾸려고 과욕을 부리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폭력만 난무하게 된다. 그것이 유럽 기독교의 역사이다. 세상 나라를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하나님 나라로 바꾸려 하다가 오히려 폭력만 난무하게 된 역사 말이다. (지금도 ‘성시화 운동’이라는 레토릭으로 그 종교적 폭력의 역사가 반성 없이 반복되고 있다.)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졌을 때 드러난 정치적 비전은 여섯 번째 나팔 이야기의 마지막에 등장한 두 증인 이야기와 한 쌍을 이룬다. 일곱째 나팔 이야기의 정치적 비전은 두 증인이 행한 사역의 결과이다. 두 증인은 억압 체제를 전복시키고, 우상숭배자들(억압과 폭력의 체제를 만드는 인간들(짐승들)의 회개를 이끌어 내고, 그들이 이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끔 했다. 두 증인의 사역은 폭력의 역사를 끝내고 새시대를 도래하게 했다. 두 증인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나라(하나님 나라)가 임하는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 두 증인은 교회/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론의 정치적 차원을 분명하게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비전을 본다. 교회/그리스도인은 자유와 사랑을 갈망한다. 폭력의 역사를 끝내고 자유와 사랑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두 증인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두루마리 책을 먹었기 때문이다. 먹어서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사역을 이어서 감당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두루마리 책을 먹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비전
두루마리 책(성경)을 먹으면, 정치적 비전이 생긴다. 정치를 현실 정치에 참여해서 정당에 가입하고 국회에 입성하고, 대통령이 되고, 이런 것을 생각하면 안된다. 성경(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정치적 비전은 삶의 자리에서 발현되어야 한다. 정치는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내 마음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나를 수양하고, 가정을 잘 건사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면, 비로소 온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다. 나 자신에게서,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에서, 국가에서, 세계에서 발현되어야 한다. 자유와 사랑을 빼앗기지 말고, 빼앗지 말라. 혹시, 누군가가, 또는 어떤 단체가, 국가가 인간과 피조물의 자유와 사랑을 빼앗고 짓밟는 일이 있다면, 비판하고 저항하라. 핍박당하는 자들과 연대하라. 자유와 사랑. 나는 성경(요한계시록)의 정치적 비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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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미]

부활을 과학적 자연법칙에 반하는 초자연적인 일의 발생으로 말하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이다. 신앙은 초자연적으로 발생한 일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을 자꾸 이런 식으로 설명하니까, 과학과 대치되는 꼴통 소리를 듣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구원인가? '예수 부활하셨다'는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과학적 선언'이 아니다. 성경은 과학과 대결하지 않는다. 2000년 전, 즉 고대 사회는 과학과 대치되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말하지 않는다. 

과학의 시대, 즉 계몽주의 이후 기독교 신앙은 자꾸 과학과 대치되는 방향으로 가려고 들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과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들고, 부활의 의미를 초자연적 관점에서 설명하려 들었다. 창조와 부활을 과학적 시각에서 설명하려 들면, 기독교 신앙은 산으로 간다. 과학 시대에 비추어 기독교 신앙은 과학에 반하는 꼴통이 될 수밖에 없다. 

부활의 의미는 전혀 과학을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활의 의미는 매우 정치적이다. 기독교 신앙은 '정치'와 대결한다. 과학과 대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활의 의미는 정치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부활은 인간에게 삶의 태도를 가르쳐 준다. 아주 절절한 가르침이다. 부활은 우리에게 절대로 주저 앉지 말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삶(현실)은 우리를 굴복시키고 주저 앉혀 삶을 후퇴시키려는 못된 유무형의 '정치적' 세력들이 득세한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사자와 호랑이, 치타 같은 포식자들은 끊임없이 소나 가젤 같은 피식자들에게 달려든다. 피식자들은 포식자들에게 맞서 싸우지만 맘 먹고 달려든 포식자들에게 잡아 먹히기 일쑤다. 포식자들과 피식자들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포식자들은 피식자들을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반대로 피식자들은 안 넘어지려고, 주저 앉지 안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포식자들의 횡포를 피식자들이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 앉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부활의 의미는 세상의 악에게 지지 말고 끝까지 싸워 이기라는, 주저 앉지 말라는, 삶을 절대로 후퇴시키지 말라는 하나님의 위로와 이끄심이다. 주저 앉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주저 앉으면 생명은 끝장나고 만다. 

부활은 생명의 절대적 긍정이다. 생명에 손대는 자는 악하다.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다. 그러니, 포식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피식자로 전락하지도 말고, 모든 생명이 서로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주는 생명 그 자체로 존재하라는 결연한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 과학에 대치되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믿으라는 넌센스적인 강요가 아니라,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부활을 믿는다고,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래서 나는 천국을 가게 됐다고 기뻐하면서, 삶에서 포식자가 되어 피식자를 짓밟고 살아가면서 피식자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한다면, 그런 사람은 결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고사하고 인간일 수 없다.

부활의 의미는 분명하다. 
생명을 해치는 것에 저항하라.
생명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부활의 의미는 정치적이다.
"저항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Posted by 장준식

[The Meaning of Resurrection]

Speaking of resurrection as a supernatural event that defies the laws of nature distorts its true meaning. 

Faith is not about believing in something that happened supernaturally. When Christianity is constantly

explained in this way, it ends up being ridiculed as anti-scientific nonsense.

Is faith—and salvationㅡ really about believing that a supernatural event happened? The declaration

that “Jesus has risen” is not a scientific claim about a paranormal phenomenon.

Scripture does not confront science. Two thousand years ago, in ancient society,

the Christian faith was not described in opposition to science.

Since the Enlightenment, the age of science, Christianity has increasingly attempted to define itself in ways 

that oppose scientific reasoning. People try to explain the creation story in Genesis through scientific frameworks 

or define the resurrection in supernatural terms. But when creation and resurrection are interpreted 

through a scientific lens, Christian faith loses its way. In the modern scientific age, 

faith is reduced to absurdity when it tries to oppose science.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does not involve science at all. On the contrary, 

it is deeply political. Christian faith is not a confrontation with science but with politics, 

so the resurrection must be understood in political terms.

Resurrection teaches us an attitude toward lifeㅡ an intensely powerful lesson.

It tells us never to give in, never to collapse. In life (reality), wicked “political” forces try to oppress, subdue,

and diminish us.

In the animal world, predators like lions, tigers, and cheetahs constantly pursue prey like cows and gazelles. 

The prey fight back but often get caught by the predators, who attack with full intent. When the battle begins, 

predators try desperately to bring down their prey, while the prey struggle not to fall, stay on their feet, or collapse. Everything ends there if the prey gives in to the predators’ tyranny and falls.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is God’s comfort and guidance to never yield to the world's evil, fight to the end, 

and never retreat in life. If you collapse, it’s over. If you give in, life is over.

Resurrection is the absolute affirmation of life. Whoever harms life is evil. Life is more precious than the whole 

world. Therefore, we are called not to become predators, nor to live as helpless prey, but to exist as life itself—life that enriches the lives of others.

Believing in the resurrection is not believing in a supernatural event or nonsense that opposes science. Instead, 

it is to respond to God’s calling to cherish and protect life.

Suppose someone claims t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and calls themselves a Christian, rejoicing in their supposed 

ticket to heaven, but lives as a predator trampling the weak, causing tears of blood in the eyes of the vulnerable. 

In that case, such a person can never be considered a faithful Christian. Such a person is not only no Christian—they have forfeited what it means to be truly human.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is clear: Resist all that harms life. Love life as your own body. 

The resurrection is political.
“Resist. And love.”

Posted by 장준식

[왜 루터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했을까?]

루터의 농민혁명에 대한 대응에 대하여 질문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을 조금 보충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의 페이퍼를 쓰면 좋은 주제인 듯해요. 왜 루터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했을까?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나 해방신학자들 중에는 농민혁명을 지지하지 않은 루터를 두고 "민중의 배신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때의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 루터의 입장을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의 농민들은 혁명을 일으키면서 12개의 성명서(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을 내겁니다.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 그 당시 농민들의 울분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농민들은 두 집단으로부터 억압을 당하는데, 하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입니다. 이중고를 겪은 것이죠. 요즘엔 교회가 억압하는 단체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정부에 대응하는 수퍼 파워 단체(중세 때는 교회)가 없어서, 현대 사회는 국가(정부)가 망나니처럼 칼을 휘두르는 형국이죠.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국가(정부)의 대응체로 반드시 자리매기매야 합니다. 이것은 저의 정치신학적 주장이기도 합니다.

12개의 성명서를 보면, 재미난 것이 있습니다. 첫째 성명서가 목회자에 대한 것입니다. 영어 번역문을 옮겨보겠습니다. "We humbly ask and request-in accordance with our unanimous will and desire-that in the future, the entire community have the power and authority to choose and appoint a pastor. We also want the power to depose him, if he acts improperly." 

요지는 교인들이 목사를 선택하는 권리를 가지고, 파면시키는 권리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민주적이죠. "윤석열을 파면한다."처럼, "전광훈을 파면한다." "손현보를 파면한다." 이런 것을 요구한 것이죠. 이런 것을 보면, 국가가 교회보다 더 민주적인 공동체가 된 듯합니다. 교회가 정말 분발해야 합니다. 

농민들의 성명서를 보면, 이렇게 교회 권력의 부당함에 대한 이야기부터, 정부 권력의 부당함에 이르기까지, 이 두 집단이 농민을 어떻게 착취하고 억압하는지를 간략히 보여주면서, 이 부당한 법들을 고쳐줄 것을, 그래서 농민의 삶을 해방시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서 진술합니다.

농민혁명 성명서가 성서를 근거 삼아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교회와 정부의 비난의 화살이 루터로 향했던 모양입니다. "농민들이 이렇게 성서를 근거로 깝치는 것은 너(루터) 때문이야!" 그래서 루터는 농민혁명에 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죠. 그래서 루터는 "Admonition to Peace: A Reply to 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라는 글을 씁니다. 

루터는 이 글을 통해서, 농민도 달래고, 교회와 정부도 달래서 두 세력 간에 평화 협정을 맺기 원했습니다. 

루터가 농민혁명을 반대했다는 인상을 주는 이유는 다음 네 가지 정도의 루터 입장 때문입니다.
1) 질서와 권위에 대한 루터의 신학적 입장
ㅡ 루터는 세속 권위(정부/지배자들Lords)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대한 폭력적 저항은 옳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2) 농민들의 요구가 '복음'을 이용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
ㅡ 위에서 보았듯이, 농민들의 12개 성명서는 성경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특별히, 루터가 가르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루터가 보기에 농민들의 요구는 복음을 빙자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루터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보면, 농민들의 요구는 정당합니다.) 
3) 루터의 점진적 개혁 사상
ㅡ 루터는 급진적 개혁을 원치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대개 이러한 경향을 지닙니다.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 개혁, 그리고 사회의 개혁보다는 인간 내면의 개혁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ㅡ 스펙타클의 사회를 공부할 때, 마르크스와 바쿠닌, 프루동의 비교를 떠올려 보시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마르크스는 점진적 개혁을 원했습니다. 국가의 필요성을 주장했고요. 그러나, 바쿠닌은 국가 폐지를 요구하고 즉각적, 급진적 개혁을 원했습니다. 루터는 마르크스와 결을 같이 하고, 토마스 뮌처는 바쿠닌과 결을 같이 합니다. 
4) 귀족의 비호
ㅡ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에 종교 권력의 횡포를 피하기 위하여 세속 권력(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비호를 받습니다. 
ㅡ 그리고, 루터는 농민 출신이 아니라 사제 출신입니다. 
ㅡ 루터는 기본적으로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에 friendly 할 수밖에 없는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루터의 뿌리이죠.

루터가 무작정 농민혁명을 비판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나름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만 나무란 것도 아닙니다. Admonition to Peace에 보면, "To the Princes and Lords"를 꾸짖는 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To the Peasants"의 성명서에 응답합니다. 

루터는 16세기 인물입니다. 시대적 한계를 분명히 지니고 있습니다. 농민혁명이 발생한 것에 루터는 매우 당황한듯합니다. 자신의 성서해석,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이 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 사태로 번진 것에 대하여 루터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분노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Admonition to Peace라는 글을 통해 권자들과 농민들과의 화해를 이끌려 했던 것이죠. 

500년이 지난 현대 민주주의 관점에서 루터를 보면 루터가 매우 보수적일 수 있지만, 16세기 독일 사회의 정황을 생각해 보면, 루터는 매우 급진적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농민들이 내건 12개의 짧은 성명서를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독일의 이러한 전통에서 마르크스 같은 인물이 나오고,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가 나온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역사의 발전 같습니다. 

역사가 퇴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의 공부가 귀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