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3'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22.03.13 강의의 한 구절
  2. 2022.03.13 무위의 공동체
  3. 2022.03.13 세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
  4. 2022.03.13 일기장으로부터
  5. 2022.03.13 자유
  6. 2022.03.13 자유를 간구하는 기도
  7. 2022.03.13 자유

[강의의 한 구절]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한다.

 

"개혁파가 도덕적 정의만으로 승부하려고 하는 것에 반해서 보수 우파들은 동원하지 않는 전략전술이 없습니다. 엄청난 기만과 정보를 동원합니다. 기묘사화 때도 훈구파들이 잎사귀에다 꿀물로 주초위왕이라고 쓰고 벌레가 파먹게 해서 그걸 임금한테 갖다 보이게 했다고 합니다. 개혁 사림의 가치가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 내자 훈구 척신들은 재빨리 개혁 이미지 속으로 피신합니다. 변신에 능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노론 세력들이 지금까지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군사정권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보수 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배후에 외세의 압도적 지원을 업고 있는 것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영복, <강의>, 329-393쪽)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며 개혁의 토대를 마련하고 싶은 사람은 <강의>의 22장 '피라미드 해체'를 꼭 읽어보았으면 한다. 그곳에서 신영복 선생이 제시하고 있는 개혁의 토대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중앙에서 지방으로

2) 정치 투쟁에서 사상 투쟁으로

3)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사회개혁은 하루 아침에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루 아침의 혁명은 또다른 기득권을 낳을 뿐이다. 사회개혁은 교육처럼 백년지대계의 전략으로 가야한다. 무엇보다 정치 투쟁에서 사상 투쟁으로의 전환이 중요하다. "사회 변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상 투쟁은 그 투쟁을 견인해 나갈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382쪽).

 

정치철학 관점에서 기독교 사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있는 나로서 안타까운 점은 무엇보다 기독교 사상은 사상 투쟁을 견인해 나갈 주체가 충분히 되고도 남는 사상과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 변혁은 커녕 사회 변혁의 걸림돌을 넘어 사회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한탄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사회 변혁의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시대가 어려울수록 더 열심히, 더 깊게, 더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 나부터 그리하려 한다.

Posted by 장준식

[무위의 공동체]

 

현대철학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종말론적이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이나 장 뤽 낭시의 무위 개념은 모두 나의 눈에는 기독교의 종말론 개념처럼 보인다.

 

노장사상이라고 알려진 '무위' 개념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비협조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고정되고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정확히 기독교의 종말론적 태도와 일치한다.

 

장 뤽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이 세계에 갇혀 있지 않은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한다. 그것이 무위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어떤 관념적 틀이나 제도적, 또는 사회적, 집단적 틀에 갇혀 있다. 갇혀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틀을 고정되고 완성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순응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장 뤽 낭시는 이러한 태도를 거부한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도 따지고 보면 낭시의 생각과 같은 맥락에 있다. 왜 해체가 필요한가?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관념적, 제도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등 모든 틀들은 고정되고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잠정의 세상이지 완성의 세상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종말론에 담긴 생각이다. 종말론은 이 세상을 잠정적인 것으로, 즉 고정되거나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낭시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교회는 무위의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의무를 지닌 것이다.

 

혐오와 배제, 그리고 폭력이 왜 발생하는가?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 하려는 욕망이다. 자신의 육체성(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성)이 절대이고 고정되고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지는 필연적으로 혐오와 배제, 그리고 폭력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현실성에 묻힌 자는 그 현실에 숨막혀 죽거나 그 현실성이 전부인 양 그 현실을 우상처럼 받들어 모시며 살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자기 현실에 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온갖 협박과 술수를 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지옥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우리는 종말론적 태도를 견지해야만 한다. 이 세상은 잠정적인 세상이지 종결된 세상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 파묻히지 말아야 하며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 세상을 현실에 이루어내기 위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한 무위의 인간, 무위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주고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현실이나 미래에 실현되어야 한다고 가정되는 모든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지평을 넘어서는 계획/기획/프로그램의, 관념으로 동일화될 수 있는 모든 구도의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의 근거가 드러난다는 것이며, 그 근거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이미 결정된 사회나 결정되어야 할 사회로부터 돌아서는, '위험하고도 급진적인' 박탈과 비움의 움직임, 즉 무위의 움직임이 반드시 요청된다는 것이다"(<무위의 공동체>, 263쪽, 옮긴이의 해설 중).

 

무위의 움직임이 많아지고 깊어지는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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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세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세습을 목회자의 윤리적 문제로 분리하여 비난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지 교회세습 문제 자체를 해결하지 못한다.

 

자본문맥(모든 것이 성장 발전해야 한다, 증식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교회세습은 목회자가 행하는 자본축적의 마지막 단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세습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본문맥에 갇혀버린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구조적인 문제는 개인의 윤리에 호소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세습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연구가 필요하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성과 신앙을 해치는지를 반성해서 자본문맥에서 자유한 탈자본의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후기 근대사회를 살고 있는 모든 인류의 과제이기도 하다. 교회가 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지도자의 위치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구조적 반성이 없다면 교회세습은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고, 윤리적 비난은 교회를 갈등으로만 밀어넣을 뿐 아무런 해결도 하지 못할 것이다.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참새한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라고 다그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참새가 다니는 길에 방앗간을 놓지 않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주조된 소비적, 소유적 인간이 어떻게 교회세습의 유혹을 뿌리치겠는가. 교회세습은 소비와 소유 욕망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절정을 맛보고 싶어한다. 우리는 하나도 자유롭지 못한 노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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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일기장으로부터]

 

2014년 8월 10일 (일) 흐림 국지적 소나기

 

소설가 유순하 씨의 기사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는 "평생 주변인으로 살아왔다"고 토로했다. 에세이 서언에선 “갈 데 없는 몽상가였지만 그것이 나의 생애였고, 그래서 미치거나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자족감마저 느끼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 이 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게 부끄러운 시대를 맞아 '주변인'이라는 정체성이 그에게 사명을 일깨우고 이끌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주류와 주변인. 누구나 주류에 속해 살고 싶어한다. 주변인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주류에 속해 산다는 것은 유순하 씨의 말대로 부끄러운 시대가 되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 <비유의 위력>을 보면, 마가복음의 비유를 분석하면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마가의 복음을 도전하는 비유로 읽을 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름 있는 사람보다 이름 없는 사람을 칭송하는 것은 기독교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면서 마가복음이 도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기독교 내에 지도자들의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주위를 환기시킨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름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대로 권력과 권위와 리더십을 행사한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는가!"(263쪽).

 

그렇지 않은가? 교회 밖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서도 소위 주류에 속해 있다고 생각되는 목회자들의 행태를 보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렴치처럼 보인다. 교회를 세습하고, 비자금을 조성하고, 스캔들을 일으키고, 복음을 장사치처럼 팔아먹고, 욕망의 노예처럼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인다.

 

이 땅에서 주류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그러니 차라리 유순하 씨처럼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양심을 지키며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길이 아닐까?

 

'주변인'이란 말, 낯설지만 낯설지 않게 마음에 와 닿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14년 8월 10일에 쓴 일기다.

 

요즘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그냥 나의 지난 세월에 대한 기록(일기장)을 들춰 보게 됐다. 그때의 묵상처럼, 요즘은 정말 '주류'의 타락이 너무 심해서 주류에 속해 산다는 것 자체가 타락 그 자체가 되었다. 주변인으로 사는 게 속시원하고 의롭고 이로운 시대다. 주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것은 '나는 타락하고 싶다. 나는 타락하는 것을 욕망한다'라고 외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처럼, 변방이 창조의 공간이므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변방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오히려 잘 사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의 왜곡된 시선을 까발린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을 '스스로 추방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을 보는 안목을 조금 가진 사람(지식인)이라면 사이드의 말처럼 '스스로 추방하는 사람'으로 살아, 변방으로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며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말고 세상의 변혁을 위해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한 삶 아닐까.

 

실로, 변방의 사람들(주변인)과 연대가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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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자유]

 

"자유롭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야 한다... 자유는 도망치기 위해 터널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유란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

 

제임스 K. A. 스미스는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따라 현대 실존주의 철학이 제시한 '자유'에 대한 개념을 반박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유에 대하여 '자기 결정으로서의 자유(freedom as self-determination)' 밖에는 다른 자유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에게 자유란 "선으로 간주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실존주의자들이 주조해낸 이러한 류의 자유에 대하여 강력하게 제동을 건다. 그에 의하면,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그러한 자유를 꿈꾸고, 그러한 자유를 추구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 도시로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러한 류의 자유는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더 절망스러운 것은 하나님 조차 잃어버리게 하는 거짓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은 자유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자기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자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이러한 세속 자유를 하나님이 주신 자유라고 착각하며, 거리낌 없이 '자기 결정권으로서의 자유'를 주장하고 실행하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나 자신의 결정, 나 자신의 자유에 대하여 왈가왈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내 맘대로'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현대의 '자기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은 현대 실존주의 철학, 특별히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으로부터 발생한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유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자유의 개념을 내면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제임스 스미스는 일그러져버린 자유의 개념을 되살리기 위하여 어거스틴의 영적 순례를 면밀히 살피면서, 그리고 ‘실존주의자들 사이의 그리스도인이었던’ 가브리엘 마르셀의 통찰을 빌어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러한 통찰을 안겨준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야 한다… 자유는 도망치기 위해 터널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유란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떠나는 여정>, 119쪽).

 

나는 무엇보다 제임스 스미스가 인용한 시몬 베유(Simone Weil)의 친구 귀스타브 티봉(Gustave Thibon)의 지혜가 마음에 와 닿았다. 자유에 대한, 정말 지혜로운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에 함께 귀 기울이기 원하는 마음을 담아 좀 길지만 인용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당신은 속박을 당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당신은 탈출을 꿈꿉니다. 하지만 신기루를 경계하십시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도망치거나 달아나지 마십시오. 대신 당신에게 주어진 좁은 공간을 파고들어 가십시오. 당신은 거기서 하나님과 모든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평선에서 떠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본질(substance) 안에 잠들어 계십니다. 허영은 달아나지만 사랑은 파고들어 갑니다. 당신이 자신에게서 달아난다면 당신의 감옥이 당신과 함께 달릴 것이며 당신이 달아나는 그 바람 때문에 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 안으로 깊이 내려간다면 그것(감옥)은 낙원 안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있는 자리를 떠나 먼 곳에 갈 필요 없다. 자유는 내 안에 있다. 자유를 원한다면 멀리 달아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으로 깊이 파고 들면 된다. 나의 저 깊은 곳 안에 계신 주님을 향하여!

 

(9-20-2021에 쓴 글. 늦은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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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3. 13. 00:40

자유를 간구하는 기도

(출 14:15-31)

 

주님,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자기를 사랑하라고 자기를 예배하라고 외치는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정신이 팔리는 사이

우리의 참 사랑과 참 예배는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실상 우리는 자유를 빼앗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것을 모르고, 마치 자유롭게 사는 것처럼 착각 속에서 삽니다.

주님,

주님께로 나아가 주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우리 삶의 홍해들을 갈라 주옵소서.

그곳을 건너 주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자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와 주님을 예배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을 감지하게 하시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있는 것에서부터 벗어나

주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와서 참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세상이 아무리 살기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와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유한 사람이니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예배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이 자유를 빼앗지 못하도록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옵소서.

우리는 주님만을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3. 13. 00:39

자유

(출애굽기 14:15-31)

 

1. 출애굽기에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모세가 나일강에서 건짐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가는 장면,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 열 가지의 아주 스펙터클한 재앙,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 모세가 부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장면 등 출애굽기에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즐비하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홍해를 건너는 장면일 것이다.

 

2.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십계>는 1956년 작품이다. 아주 어릴 때,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엄마, 아버지와 함께 충무로에 있는 대한극장으로 <십계>를 보러 갔던 적이 있다.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였을 것이다. 그때 어린이의 눈에 들어온 두 개의 장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은 홍해를 가르는 장면과 십계명을 들고 있는 모세의 장면이다. 홍해가 갈라질 때, ‘와~’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 다시 보면, 촬영기법이 변변치 않았던 때의 영화라 허술하기 짝이 없다. (찰턴 헤스턴은 또다른 대작 <벤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벤허>는 지금 봐도 재밌는 영화다. 얼마 전 <벤허>를 리메이크 했는데, 원작만 못해서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3. 우리는 이성과 과학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홍해가 갈리는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보면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아니면 지어낸 이야기인지를 먼저 따지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논쟁만 발생하고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해석해 왔지만, 현재 성경을 읽은 보편적인 방식은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이다. 문학은 이야기를 만들어 진실을 전하는 예술 양식이다. 이야기에는 체험과 허구가 공존한다. 핵심은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고, 그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진실(진리)이 무엇이냐이다.

 

4. 출애굽기라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진실(진리)은 무엇일까? 특별히 그 중에서도 홍해가 갈리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진실은 무엇일까? 이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출애굽기 전체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부르셨고, 왜 모세를 애굽으로 들여보내셨는가? 모세가 애굽에 들어가서 애굽의 바로(이집트 왕)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출애굽기 3장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출 3:18).

 

5.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우리는 대개 출애굽의 목적을 고통받는 히브리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구원해 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목적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목적이고 출애굽의 일차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리고 홍해가 갈리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한 일은 ‘그들이 나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게 하는 것’이었다.

 

6. 인간은 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다. 성경은 매순간 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 출애굽기도 다르지 않다. 출애굽기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은 이것이다.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다!” 예배의 다른 말은 사랑이다. 이것은 이렇게 바꾸어 부를 수 있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을 일컬어 ‘예전적 동물’이라 부른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며 궁극적인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뜻이다”(<습관이 영성이다> 33쪽).

 

7. 인간에게 사랑은 중력과도 같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그 사랑하는 것 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이라는 것이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실천과 연습이 필요하다. 올바른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실천과 연습이 필요하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에게 부족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실천과 연습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실천과 연습을 행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에 의해서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통제 받고 있었다.

 

8. 홍해가 왜 갈라져야 했을까? 하나님께서 애굽 왕에게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허락하라’였다. 그런데, 애굽 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못하도록 막아 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막아 설 수 없다. 홍해의 갈라짐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9.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다. 노예란 무엇인가? 남이 시키는 걸 하는 사람이다. 남이 시키는 걸 하다 보면 인간은 그것이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처럼 자신이 사랑해서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병리현상이 있다. 인질(피해자)이 납치범(가해자)에게 동조하고 감화되어 납치범(가해자)의 행위에 동조하거나 납치범(가해자)을 변호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는 기획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남이 원하고 시키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도록 속이는 것이다.

 

10. 자유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다. 자유인은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걸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유인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내가 사랑하고 싶은 걸 사랑하고,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자유하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불쌍하고 애처롭다.

 

11. 홍해의 갈라짐은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안겨주었다. 그 자유는 단순히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억압된 삶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실천하고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12. 이스라엘에게 출애굽기의 여정, 홍해를 건넌 뒤 광야에서의 삶은 예배하는 인간으로서의 삶,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실천하고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사랑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예배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예배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사랑해’라는 말을 평소에 안 하던 부부는 어느 순간에 누군가에 의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서로 해보세요’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없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끔 잘 인도해야 하는 이유도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 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3. 인간에게 자유의 바로미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홍해가 수만 가지 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작게는 피곤해서부터 크게는 미움 때문에 못 나온다. 반대로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들은 크게 기뻐해야 한다. 내가 참 자유를 누리고 있구나! 나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한 사람이구나!

 

14. 인간이란 예배하는 존재이다. 인간이란 사랑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무엇을 예배하고 있는가.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기록하며 맨 처음 하나님을 찬양한 뒤, 곧바로 이런 고백을 한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15.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자유한 게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자유한 게 아니다. 좋은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잘 수 있어서 자유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살 때 돈도 없었고, 맛있는 음식도 못 먹었고, 좋은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천막에서 잤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끼니를 때웠고, 물이 없어 고생했고, 가진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만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16.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들, 이것 하나만은 꼭 알고 기뻐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자유를 얻은 자이다. 자유만큼 좋은 게 어디 있나. 우리의 몸과 마음을 헛된 것에 빼앗기지 않고,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품에 안겨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그 자유를 나만 누리지 말고, 내 사랑하는 가족들, 형제자매, 친구들, 그리고 자유가 없어 늘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힘껏 나누어 주자.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두 손을 높이 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막고 있는 홍해를 갈라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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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