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0'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2.10.20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이 지닌 문제점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이 지닌 문제점]

어거스틴은 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일한 교부 신학자이다. 어거스틴이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그의 신학이 라틴신학의 기초가 되었을 뿐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루터를 거쳐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앙 세계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학과 개신교 신학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개신교 신학은 라틴 신학에 뿌리는 두고 있다. 1세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 출신 수도사였다. 그의 사상에는 어거스틴의 신학이 스며 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카파도키아 교부들로 대표되는 그리스 신학 전통과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신학은 혁명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지고의 원리를 본질(ousia)이 아니라 본체(hypostasis)이며,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위격(person)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삼위일체의 위격을 중요시하며 삼위일체의 경륜을 삼위일체 신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경륜을 중시하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가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역사적 구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즉, 삼위일체의 역사는 창조와 구원과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관계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러한 역사적 구원의 사역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고,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장이다. 이는 정치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은 위격이나 실체보다 본질이나 본체에 더 관심을 둔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에 관심을 덜 두게 만들 뿐만 아니라 위격의 역동성이나 위격의 구분을 필요없게 만든다. 게다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은 심리학에 관심을 둔다. 어거스틴은 인간 영혼에 하나님의 흔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 영혼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영혼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 외부의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자연스럽게 역사적 구원의 경륜을 소홀히 하게 되며 정치신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은 그냥 자신의 영혼 안에 새겨진 삼위일체의 흔적을 통해서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라쿠나는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을 비판한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에 대한 심리학적 유비가 부적절한 이유는 그것이 심리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심리학과 인간학이 개인의 영혼에 초점을 두는 경향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이다. 위로 향하는 여정인 내면을 향한 여정을 통해 영혼은 영혼 자신을 추구하면서 영혼의 하나님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혼은 영혼이 갖는 사회적 관계들과 상관없는 영혼 자신을 인식하며,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상관없는 하나님을 인식한다." (LaCugna, <God For US>, 103)

이것은 현대 신앙인들에게 정말 큰 문제가 된다. 심리학의 발달과 그것과 신앙을 접목하는 일이 잦아지고 견고해지면서 신앙인들은 개인의 내면으로 빠져들어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을 바라보지 못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그냥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신앙인을 생산해 낼 뿐, 역사에 동참하는 공동체적인 신앙, 즉 정치신학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인은 무력하고, 기독교 교회는 비역사적이다.

어거스틴이 지금까지, 아니 지금 더 중요하게 유통되는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신앙인을 유통해야만 부흥할 수 있는 '기업형/자본주의형 교회'가 택한 생존 전략이 아닌가 싶다. 개인의 내면에 대한 집중은 거대한 자기를 만들어낸다. 이 거대한 자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데까지 이른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신앙은 곧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고, 현대인의 교회는 '신들의 만찬'이 된다.

물론 어거스틴이 자신의 사상이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식으로 유용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신학사상을 전개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 깊이 도취되었던 것과 자신의 회심의 과정 속에서 겪은 심리적 변화를 면밀히 추적하면서 신학을 전개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인간 영혼에 놓인 삼위일체의 흔적을 추적하며 삼위일체론을 진술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특별히 라틴신학의 역사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의 신학은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는 나쁜 의도를 가진 자들에 의해서 잘못 사용될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현대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은 없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의미하는 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 위험성을 알리는 것 밖에는 없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나쁜 게 아니라, 그의 신학을 자신의 불의를 정당화시키는 데 활용하는 이들이 나쁜 것이다. 특별히 개인의 극대화를 통해서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은 개인의 극대화와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시키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인간 영혼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어거스틴의 심리학적 유비는 인간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려는 진지한 신앙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라쿠나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개인주의적인 해석으로 흐르면 안된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의 경륜과 상관없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으로 흐르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 새겨진 흔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구원의 경륜 없이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집중하는 일보다 타자에게 집중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하고, 역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이 정치신학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역사는 하나님 나라와 거꾸로 가고 있는데, 자기 자신의 영혼구원, 만족에만 갇혀 있어 역사의 불의에 저항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인의 자기 기만이고 직무 유기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훈맹정음  (0) 2022.11.05
반려견과 동물신학과 리추얼  (0) 2022.10.27
기도를 한 번 바꾸어 보세요  (0) 2022.10.19
종말론 사무소  (0) 2022.10.14
두 가지 공부법  (0) 2022.10.0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