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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0.25 정체성을 간구하는 기도
  2. 2022.10.25 로마서 7. 바울과 나
기도문2022. 10. 25. 07:41

정체성을 간구하는 기도

(롬 1:1-7)

 

주님,

정체성이 흐려지는 이 시대에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특별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자로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확고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종으로, 사도로 소개합니다.

우리는 종입니까? 우리는 사도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연관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사명을 위해 부름받았습니까?

주님,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도록 도우소서.

그래야

우리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들고 빼앗아버리는 이 시대에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주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소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셨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모든 이들의 구원이 되시고 소망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0. 25. 07:39

바울과 나

(로마서 1:1-7)

 

1. 로마서의 첫 번째 단어는 ‘바울’이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바울, 종, 그리스도 예수 순으로 단어가 배열되어 있다. 한국어는 거꾸로 되어 있다. 바울은 지금 로마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교회와 친분이 없었다. 로마에 가본 적도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겸손을 보이는 것이다. 겸손과 더불어서 자기 자신의 역할(신분)을 명확하게 표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종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2. 종(둘로스)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천한 용어가 아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에서 말하는 종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바울이 말하는 종은 신학적 신분(하나님과 연관된 신분)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는 두 존재를 중재하는 중재자가 있다. 대표적으로, 모세가 있다. 일반적으로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때 그 중재자를 ‘종’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부를 때의 뉘앙스는 사회적 신분으로서의 노예계급을 나타내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자로서의 ‘종’을 말하는 것이다.

 

3.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사도’(아포스톨로스) 라는 용어를 쓴다. 사도는 ‘messenger’라는 뜻을 가진다. 뭔가(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울이 가지고 온 메시지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다. ‘복음’(유앙겔리온)은 기쁜 소식이나 기쁜 소식을 낳은 업적을 말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종, 사도, 복음에 잇대어서 소개를 한 뒤, 곧바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4. 하나님의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약속된 것이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사도직이 구약의 예언자들, 특히 이사야 선지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체적 역사 속에서 나타난 인물로 소개하려는 것이다.

 

5. 로마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로마교회의 구성원인 강한 자들(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의 긴장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이 구체적인 정황과 긴장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이 하는 말의 뜻은 산으로 간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다. 요즘 말로 개무시했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를 지닌 강한 자들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바울은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를 잇는 사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약한 자들의 구체적 역사) 역사의 맥락 가운데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쉽게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6. 복음은 근거 없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강한 자들이 업신여기고 있는 약한 자들의 구체적 역사 속에서 전해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약한 자들은 의기양양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약한 자들이 강한 자들을 향해 우월감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이 약한 자들만의 복음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강한 자들,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시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5-6절).

 

7. 복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와, 유대인(유대인의 역사)을 거쳐, 유대인이었던 예수 안에 나타났고, 사도들의 중재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 전체적인 과정은 은혜(카리스)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러면, 이방교회였던 로마교회가 가져야할 마음 가짐은 무엇이겠는가? 존중과 감사이다. 로마교회는 우선 사도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전해졌는지를 말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마음에 존중과 감사를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8. 복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복음이 믿음을 견인한다.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구원을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 가는 것’으로 자꾸 축소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구원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그냥 죽는 날 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 있는 순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물은 그게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그게 구원이다. 깨끗한 공기, 깨끗한 물, 맑은 하늘, 좋은 친구, 일할 수 있는 직장, 가족, 아름다운 자연 풍경, 이뿐 아니라 나의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좋은 말들, 이 모든 것이 구원이다. 즉,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9. 바울이 로마교회에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인사말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를 꼽으라고 하면, ‘믿어 순종하게 하다’를 꼽고 싶다.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 듯하면서도 모른다. 믿음에 대한 이해 중 가장 최악은 믿음을 ‘자기 확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욕망을 담아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데 익숙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욕망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의 욕망과 전혀 상관이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복음(은혜, 계시)에 대한 반응이다. 믿음에는 우리의 욕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복음)가 먼저 일으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10. 바울은 믿음을 순종(복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순종이나 복종이라는 말은 현대인에게 매우 거슬리는 용어이다. 한국어로 성경이 번역될 때 현재 한국사회와는 크게 다르게 그때는 유교적인 문화가 한국사회를 훨씬 깊게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의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순종(복종)은 위계질서 가운데서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보이는 반응을 뜻한다. 특별히,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복종)하는 것은 미덕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위계질서가 무너진 사회에서 순종(복종)이라는 말은 매우 위압감을 준다. 그래서 용어를 조금 변경할 필요가 있다. 순종(복종) 보다는 ‘존중’이라는 용어가 요즘 시대에 더 적합한 용어 같다.

 

11. 사실, 예전의 유교 문화, 위계질서가 확고한 문화에서 순종(복종)도 ‘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자녀가 부모를 ‘존중’하는 것은 순종(복종)하는 것이다. 종이 주인을 ‘존중’하는 것은 순종(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위계질서 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니, 용어를 고쳐, ‘존중’으로 쓰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즉, 믿음은 존중이다. (김근수, 로마서 주석 , 25쪽)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을 생각과 의지를 없애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이해가 안 되면, 무조건 믿으라.”는 말을 너무도 많이 들었다. 그렇다 보니, 믿음은 이성과 상관없는 몰지각한 행위로 오해 받기도 한다.

 

12. 아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존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생각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신앙은 상호 존중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하신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에게 복음을 주실 때, 우리를 무시한 상태에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존중해서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존중해서 받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중이 담겨 있다. 이 말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바라는 것은 ‘존중’이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교회 교우들이 바울 자신을 존중해 줄 것을 바랬다. 더불어, 바울은 로마교회 교우들이 복음을 존중하기를 바랬다. 그래야, 서로 업신여기고 비판하던 사이가 서로 존중하는 사이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13.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무례한 사람을 본다. 일방적으로 말하고,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본다. 이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믿음은 존중을 불러온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존중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존중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상호 존중이 없는 신앙은 매우 험악하고, 상호 존중이 없는 교회에는 평화가 없다. 로마교회가 딱 그랬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가 바른 믿음을 갖길 원했다. 즉,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이 서로 존중하길 원했다. 복음에 의하여, 서로 존중하게 될 때, 평화가 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14. 로마서를 읽으며, 우리는 바울의 자리에 ‘나’를 놓아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것과 같이, 로마교회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요 교회이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왜 교회를 다니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고, 교회를 다녀도 소속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토대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정체성이 약한 것은 토대가 약한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이 겪는 총체적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약물 의존이 많은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왜 사는 지 모르겠으니, 자기 정체성이 약해져 약물에 의존한다. 이것은 아주 큰 사회적 문제다.)

 

15.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가장 먼저, ‘바울’이라는 단어를 배치했다. 그리고 바울을 규정하는 용어로 종,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를 배치했다. 우리는 ‘나(내 이름을 배치하고)’ 그 다음에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어떠한 용어를 배치하겠는가? 바울이 자기 자신을 규정할 때, 종, 예수 그리스도, 사도 등의 용어를 이름 뒤에 배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복음을 온 마음으로 존중(믿음)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을 둘러싼 종과 사도의 정체성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존중할 것이고, 그 존중은 서로 존중하는 평화의 상태로 이끌 것이고, 그 복음을 전하는 자로 따로 구별되어 부름 받았다는 자기 정체성 안에서 삶을 재구성할 것이다.

 

16. 바울과 나.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도로 규정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누구로 규정하는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로 모인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과 똑 같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나는, 누구인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