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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0.14 종말론 사무소

[종말론 사무소]

 

김항은 그의 책에서 ‘종말론 사무소’를 연다. 그것을 열며 김항이 주목한 것은 김소진의 소설들이다. 요절한 작가 김소진은 여러 단편소설들을 통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 아래 감추어진 인간의 소외 문제를 다룬다. 내 눈을 끈 것은 그의 소설 <개흘레꾼>이다.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 오늘도 밤늦도록 개들이 짖었다.” 이것은 분명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따라한 것이다. “아비는 종이었다.”

 

김항의 분석에 따르면, 김소진의 개흘레꾼과 서정주의 종은 그 결이 다르다. 종은 주인과 대립관계에 있는 존재이지만, 개흘레꾼은 주인과 종이라는 이항대립적 관계 안에도 들지 못하는, 사회의 이물질에 불과하다. 역사는 언제나 착취와 피착취, 체제 대 반체제의 변증법적 대립 속에서 발전해왔다. 착취자가 되든, 피착취자가 되든,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든,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이 되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역사적 변증법적 대립 관계 속의 구성원으로 삶을 산다. 소외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주인이 되든 노예가 되든 투쟁한다. 그리고 그 투쟁에는 반드시 승자나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소진은 <개흘레꾼>에서 승자에도 패자에도 낄 수 없는 한 인간의 쓸쓸한 삶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한 쓸쓸한 인생을 대표하는 인물이 개흘레꾼인 셈이다. 조르조 아감벤이 ‘예외상태’라는 용어를 통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한나 아렌트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치적인 삶’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정치적인 삶이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개흘레꾼이 발생하고 있으며, 예외상태를 만드는 자들과 사람들에게서 정치적인 삶을 빼앗으려는 자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에 대해서 아주 면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언서도 그렇고, 복음서도 그렇고, 모두 역사적 변증법적 대립 관계의 구성원 바깥으로 밀려난 ‘개흘레꾼’ 같은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모세오경에 나타난 율법정신도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누군가를 정죄하고 벌하기 위해서 주어진 게 아니라, 법 바깥으로 밀려나는 이들이 없도록, 법 바깥으로 밀려나 ‘개흘레꾼’ 같은 신세에 처해져서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는 율법의 완성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의 십자가는 아무도 예외상태에 처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본인이 예외상태에 처해져서 그 예외상태에 있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신다. 그래서 그의 구원은 모든 이들의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 땅 위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그대로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종말론 사무소’이다. 요즘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혼란과 위험에 처한 우리들의 삶을 생각하면, 종말론 사무소로서 교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개흘레꾼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개흘레꾼이 존재하지 않도록, 예외상태에 처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예상상태에 놓인 이들이 없도록, 정치적인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그리고 정치적인 삶을 빼앗긴 이들을 다시 정치적인 삶으로 회복하도록, 교회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