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7'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2.10.07 두 가지 공부법
  2. 2022.10.07 갈증이며 선물인

[두 가지 공부법]

 

1. 체제 순응적 공부법

2. 체제 변혁적 공부법

 

자기계발서는 대개 체제 순응적 공부법이다. '자기계발'이라는 말이 붙어서 뭔가 자신을 진일보시키는 공부 같지만, 실상 자기계발은 존재의 진보 보다는 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지향한다. 체제에 자기를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해야한다. 그래야 체제 안에서 성공할 수 있고,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계발을 위해 에너지를 쓴다. 그런데, 체제 순응적 공부를 하다보면 결국 만나게 되는 문제는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과 '번아웃'이다. 자기계발은 체제가 자신을 착취하기 좋은 상태로 자기의 존재를 내어주는 것과 같다.

 

소위 '인문학 공부'를 자기계발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인문학을 잘못 유용하는 일이다. 인문학 공부는 자기계발과는 달리 체제 변혁적 공부법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인문학 공부가 별로 쓸모없다는 인식을 한다. 그건 정말 오해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손해다. 인문학 공부는 자기계발이 아니라 존재의 진보를 가져온다. 존재의 진보는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인문학 공부는 필연적으로 체제 변혁을 요구한다. 체제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나에게 맞추어 재구성한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문학 공부를 자기계발의 도구로만 쓰라고 강요할 뿐이다. 인문학 공부를 체제 변혁적 공부로 하면 체제는 공격당하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체제가 교묘히 퍼뜨리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속지 말아야 한다. 체제는 언제나 보수적이다. 존재의 복종을 요구하지 존재의 진보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체제는 인문학 공부를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프로파간다에 속아 인문학 공부를 하지 않는다. 아주 단순한 생각 때문이다. 인문학 공부가 당장 먹고사는 데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체제가 심어주는 거짓말이다.

 

체제 순응적 공부법과 체제 변혁적 공부법은 둘 다 필요하다. 체제에 대해서 반대만 할 수는 없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제 순응적 공부와 체제 변혁적 공부는 4대 6 정도로 하면 좋다. 먹고 사는 것을 무시할 수 없으니 체제 순응적 공부를 4정도 하고, 체제가 존재에 가하는 폭력에 저항하고 체제를 변혁하여 존재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번아웃에 도달하게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체제 변혁적 공부를 6정도 해야한다.

 

체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견고하고 힘이 세다. 그래서 체제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체제 변혁적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 그러나 인문학 공부를 자기계발로 하는 사람은 체제에 더 큰 희생양이 될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은 무지의 안개가 되어 체제를 더 공고히 할 수 있다. 배운 사람의 무지는 못 배운 사람의 무지보다 더 큰 혼란과 파괴를 가져온다.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도 체제 변혁의 힘이 솟구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의 존재가 체제 순응적 존재로 완전히 전락했다는 신호이다. 물론, 체제 순응적 존재로 깊이 빠져든 사람은 이것을 아예 모르겠지만 말이다.

 

체제 변혁적 공부법에 대해서 자각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인문학 공부는 자기 존재를 고상하게 만들기 위한 지적 장식품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두 발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며,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결단하게 이끌어주는 실천의 문제이다. 인문학 무용론을 은근슬쩍 퍼뜨려 체제의 안정을 꿰하려드는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속지 말기를! 자신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고, 또 그만큼 타자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그래서 체제 순응적 공부보다 체제 변혁적 공부에 마음을 더 많이 쓰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Posted by 장준식

[갈증이며 선물인]

 

정현종 시인의 시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갈증이며 샘물인'이다. 물론 그것도 내가 말하려는 것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성경의 언어를 쓰자면, 샘물보다 선물이 좋은 은유 같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교를 알아가면 갈수록, 부족한 나의 존재만 드러난다. 존재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내 존재가 너무 부족해서 목마르다.

 

공부도 하고, 실제 목회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해 보기도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목회를 하면할수록 드러나는 것은 '나의 부족함', 갈증뿐이다.

 

이 갈증을 내가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갈증을 채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뿐인 듯싶다. 그래서 갈증 안에 있는 존재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이다. 삶은 선물이다.

 

로완 윌리엄의 이 말은 사실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되새겨야 할 것은 교회는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바울을 읽다. 130).

 

정말 그런 것같다. 교회는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회는 가능하다. 교회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우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성취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그저 참여할 뿐이다. 우리가 무슨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할 뿐이다.

 

갈증의 존재,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선물로만 우리는 갈증을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그냥 선물이다. 나는 시방, 우물가의 그 사람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