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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1.22 최고의 감사
  2. 2016.11.18 꽃과 벌
  3. 2016.11.17 들을 귀
  4. 2016.11.14 아들의 얼굴 1
  5. 2016.11.13 주님께 비스듬히 기대기를 간구하는 기도
  6. 2016.11.13 비스듬히
  7. 2016.11.12 그리스도의 얼굴
  8. 2016.11.09 인생
  9. 2016.11.09 기도
  10. 2016.11.09 성도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11. 2016.11.09 진(Gene) 1
  12. 2016.11.09 우리는 성도입니다 (만성절) 1
  13. 2016.11.0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4. 2016.11.01 엎드림을 간구하는 기도
  15. 2016.11.01 엎드림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22. 12:35

최고의 감사

(렘 23:1-6 / 23:33-43 / 1:15-20)

 

오늘은 추수감사절이기도 하지만, 교회력에 의하면 그리스도 왕 주일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왕 주일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교회력인데, 반기독교 정권이나 세속적 정부에 의해 핍박 받는 교회를 위하여 제정된 교회력이다.

 

이라고 하는 개념은 현대 헌법적 민주주의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1789714일에 촉발된 프랑스대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된 민주주의의 권력에 대한 기본 개념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을 받아들여 민주주의국가를 이룩한 나라에서는 더 이상 왕권의 개념은 없다.

 

민주주의의 개념이 발전되기 전의 왕권의 기본개념은 왕권 신수설이었다. , ‘왕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사상을 근간 삼아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대표적인 왕이 프랑스의 루이 14세이다. 그런데, 이것은 민주주의의 권력개념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개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은 대의제도와 선거제도를 통해 권력을 대표(President, 대통령)에게 양도한다. 대통령의 임무는 국민이 양도해준 권력으로 나라의 살림을 국가의 모든 국민이 만족하도록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 대통령은 국민을 섬기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헌법과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왕권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으로 고백하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 기독교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속적 왕권과 헷갈리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세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타락한 왕권이 아니라, 예레미야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는 우리의 공의이시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거룩한 왕권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공직을 잡긴 했으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직을 수행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그들은 이방 신 숭배를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우상숭배 방관 및 조장). 이게 전부가 아니다. 왕은 모든 사람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정의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정의 구현 실패). 그들은 자신의 삶이나 백성들의 삶 가운데서 의로운 삶을 보여주지 못했다(본이 되지 못했다, 성결 실패). 그들은 군사적, 정치적 수단으로 국토를 방어하는 데서 만 약간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백성들의 유익보다 자신의 이익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이 왕들은 백성들을 돌보는 데 게을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고 삼켜버렸다.

 

왕들이 자기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을 갖는 것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들었고,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자기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왕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23:5-6).

 

지도력의 부재로 인해 나라가 어려울 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악행을 저지르는 지도자는 심판하시고, 대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지도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우리가 어디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누가복음의 말씀은 이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약속의 말씀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고 고백한다. 예수는 다윗에게서 난 한 의로운 가지이다. 그를 통하여 유다와 이스라엘이 구원 받았고, 온 인류가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 예수의 이름은 바로 임마누엘’,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는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에서는 예수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가 등장한다. 해골(골고다 언덕)이라는 곳에 십자가가 세 개 세워진다. 예수님은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시고, 두 행악자 중 한 명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다른 한 명은 예수님의 왼편에 달린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던 관리들과 군인들은유대인의 왕이라 써 있는 패를 보면서 예수님을 희롱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메시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명도 예수님을 희롱했다. “네가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님의 왼편 행악자와 오른편 행악자 중 누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른다. 다만, 우리는 오른편 행악자가 구원 받았다고, 다른 말씀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와 대화한 이야기도 누가복음에만 나올 뿐이다.)

 

이들은 여전히 세속적 왕권의 틀에서 예수님의 왕권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힘의 구원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왕권의 개념은 로마 황제를 통해서 획득한 것이었다. 로마 황제는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고, 메시아로 불렸고, 왕으로 불렸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힘과 폭력에 의해서 성취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보며 예수도 로마 황제처럼 힘과 폭력에 의해서 자기들과 자기 자신을 구원할 것을 기대하고 요청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왕권은 그들이 생각한 힘과 폭력에 의한 왕권이 전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매달았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이유는 예수님의 양 옆에 달린 행악자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한 명의 행악자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23:41).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죄를 위한 죽음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의한 폭력적 죽음이 아니라, 죄의 폭력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죽음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누가복음 본문에서 확인한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를 이렇게 구원하신다. 행악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간구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은 그의 간구에 이렇게 응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어떤 어린 아이가 빵을 주워 먹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문제를 냈다고 한다. “다음 그림을 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그림 속의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5분간 그림을 보며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생각해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명쾌하게 대답한 아이의 답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같이 아픔을 해결해 주려 하고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될 것이다.” 정말 멋진 대답이다.

 

우리의 감사는 어떠한 감사인가? 생각해 보면, 우리의 감사는 다른 이와 비교해서, 비교 우위에 선 것에 대한 감사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심각한 경쟁사회이다. 그렇다 보니, 경쟁에서 이긴 것에 대한 감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어떤 교회의 감사헌금봉투에 적힌 내용이다. 1) “수습 잘 끝내고 정식 계약하게 하심 감사합니다.“ 2) “그 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LG트윈타워 통합물류 입찰에 주님의 회사인 당사를 선정케 해주신 나의 주님께 감사 또 감사 드립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 없는 자연스러운 감사이다. 그러나, 뒷면을 잠시 들여다보면 얼마나 심각한 감사인지 금방 알게 된다. 수습을 잘 끝내고 정식 계약을 하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나, 수습직원들이 이 사람 한 명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사람과의 경쟁에서 져서 정식 계약직을 얻지 못한 탈락자가 있을 것이다. 입찰 건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가 독점 입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경쟁회사를 물리치고 입찰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자기 회사는 입찰에 당선되어 좋겠지만, 입찰 경쟁에서 진 회사는 회사 운영이 힘들어졌을 것이다.

 

나를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우리의 왕이신가? 물론 힘과 폭력을 쓰는 로마 황제 같은 구세주와 왕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고, 우리를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분이 왕이 아니시다. 만약, 여러분 중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고,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분이 있다면 예수님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낸 문제 중에 이런 문제도 있었다. 1) “옆집 아주머니께서 사과를 주셨습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가요?” 답은, “감사합니다.”이다. 그러나, 한 초등학생은 이렇게 답을 적었다. “뭘 이런 걸 다~” 2)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답은, “우리를 낳아주셨으니까.”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 초등학생은 이렇게 답을 적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것은 요즘 사람들이 감사해야 할 것에 대하여 얼마나 온전히 감사하고 있지 못하며 사는지를 보여주는 풍자이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왜 감사하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이와 비교해서 내가 우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다른 이와 경쟁해서 내가 이겼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그러한 감사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감사는 아닌 것 같다.

 

온전히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를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교우위에서 떨어졌을 때, 경쟁에서 졌을 때, 우리는 어떠했는가? 그래서 감사한 적 있는가? 그럴 때 하나님께 감사하다며 감사헌금봉투에 감사의 이유를 적어 헌금을 드린 적이 있는가? 비교우위에 올라섰을 때, 경쟁에서 이겼을 때 감사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 비교우위에서 떨어졌을 때, 경쟁에서 졌을 때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무시당하고 핍박당하고 죽어도 괜찮다. 우리에겐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쩨쩨하게 우리를 남과의 비교우위에서 올라서게 하시고,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골로새서가 증언하고 있듯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모든 왕권들과 주권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보다 먼저 계신 분이고, 교회의 머리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고,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분이시다. , 주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감사이시다. 이 최고의 감사를 모르면서, 이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면서, 다른 감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최고의 감사이신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라는 찬양이 저절로 나올 것이지만,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감사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로 인해 일희일비(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은 일 있으면 막 감사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나쁜 일 있으면 절망했다)하며 감사를 모르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여호와 우리의 공의라는 이름의 왕을 주셨다. 그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왕이신 것을 고백하고 선포한다.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는 구원을 받겠고 평안히 살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감사 또 감사가 넘치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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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1. 18. 07:24

꽃과 벌

 

윙윙

어지럽다

더이상 허공을 날 수 없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비상착륙유도장치가 켜지고

난데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활주로를 살랑살랑

흔들어 놓는다

윙윙

메스껍다

활주로에

고꾸라지는 순간

목구멍까지 차오른

열병은 터지고

토사물이 쏟아져 나온다

비로소

꽃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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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7. 10:26

들을 귀

(마가복음 421-29)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의 비유가 나온다. 등불비유와 부지중에 자라는 씨 비유다. 앞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22절 말씀은 번역을 어렵게 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이것을 쉬운 말로 옮겨 보면 이런 뜻이다. “무엇이든지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무엇이든 감추어진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조금 역설적이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숨겨져 있는 것 같고, 감추어져 있는 것 같으나, 결국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 말씀은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경우를 말한다. 두 문장이 그것을 밝히고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리고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이다. ,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귀 없는 사람은 없다. 특별한 문제를 가지고 타고난 사람이 아닌 이상, 모두 귀가 있다. 그런데,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뜻이 무엇인가?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 안 된다. 쉬운 말로 옮기면 이런 말이다. “너희는 듣는 말을 새겨들으라. Take care what you listen to”. 우리의 일상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건성으로 듣는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듣더라도 새겨듣지 않는다.

 

기독교 전통의 영성훈련에 기도어린 경청(Prayful listening)”이라는 말이 있다. 영성가들이 한결 같이 강조하는 것은 영성훈련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자기의 마음과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 ‘기도어린 경청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기도하는 심정으로 듣는 것을 말한다. 기도어린 경청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자기의 자아를 죽이면서 듣는 것을 말한다. 기도어린 경청이란 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라기보다도, 타자가 오롯이 나에게로 다가 올 수 있도록 나의 전 존재를 온전히 개방하는 것을 말한다. <에큐메니안,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③> ‘기도어린 경청김오성 목사>

 

성경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기도어린 경청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그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지식에 예수님의 말씀을 비추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거부한다. ,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예수님께 온전히 개방하지 못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들음은 단순히 귀를 상대방의 입에 가져다 대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존재를 여는 행위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지금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그림을 보면서 설명하면 좀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음 그림은 Giovanni Battista Caracciolo(지오반니 바티스타 카라촐로)가 그린 <The Young Saint John in the Wilderness, 광야의 젊은 세례 요한>이다. (그림)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이로다”(1:29).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이것은 라틴어로 “Ecce Agnus Dei”(Behold the Lamb of God)라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젊은 세례 요한은 “Ecce Agnus Dei”라는 글자가 써 있는 지팡이를 발 앞에 내팽개치고,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원래 세례 요한의 영성은 이 한마디로 표현된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세례 요한의 손가락 또는 삶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그림에서는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이것은 배교나 다름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 그림을 보고 추적하기 쉽지 않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들음에서 멀어지면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의 세상에 갇혀 산다. 자기 자신의 세상에 갇혀 사는 자들은 정의와 평화, 사랑과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지 못하고, 그 나라가 자신의 삶에 임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그는 그렇게 멸망 당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그 나라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구원이 임한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비유는 부지중에 자라는 씨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부지불식 간에 씨에서 싹이 트고 이삭이 나고 곡식이 맺히는 것처럼 부지불식 간에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의 삶 속에서 임한다. 농부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싹이 자라고 열매가 맺는 것은 전적으로 땅의 힘에 달려 있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가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의 삶에 임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만을 사모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는 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우물 안 개구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그러나, 마음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삶 속에 임하는 소망을 꿈꾼다.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기도 하지만, 현재적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귀신을 내어쫓고, 죄를 사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나의 삶에 임하기를 소망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축귀와 용서, 그리고 치유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야 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는가? 예를 들어, 1) 암 병 환자는 암 병이 없는 몸을 기대할 것이다. 2) 마음이 아픈 자는 눈에 눈물 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3) 가난한 자(돈이 없어 고통 받는 자)는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할 것이다(돈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았으면 할 것이다). 4) 이런 저런 이유로 차별 받는 자들은 차별 없는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5)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는 죽어서라도 그 자식을 다시 만나기를 기대할 것이다. 6) 땀흘려 일군 농작물을 빼앗기는 가난한 농민에게는 자기가 땀흘려 일군 농작물을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고 가족들과 배부르게 먹는 것을 기대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하나님 나라, 물론 우리의 좁은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귀 있는 자만 그의 말씀을 듣고 이러한 소망을 품고 살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한다. 존재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고, 그 안에서 기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거라고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태도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기대를 품고 희망 가운데 사는 자와 자기 자신에게 갇혀 아무런 기대도 없고 희망을 갖지 못하는 자의 삶은 같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소망이 가득하길 바라신다. 소망이 가득한 삶, 생명이 가득한 삶의 첫 발걸음은 들을 귀를 갖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도어린 경청을 꼭 실천하고 실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부지중에 반드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각자의 삶 속에서 경험하며 사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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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1. 14. 16:47

아들의 얼굴

 

어둠의 결을 따라 고이 잠든

아들의 얼굴에

점이 하나 둘 들어와 박힌다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일까

 

아버지는 어릴적

내 얼굴에 난 점을 센 적이 있다

 

네 얼굴은 밤하늘과 같다고

네 점은 별이라고

 

명랑한 눈을 지그시 감은

아들의 얼굴은 초롱하다

 

아홉 해 동안

아들의 얼굴에 네 개의 별이 떴으니

북두칠성을 보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북극성처럼 분명한

아버지의 아들이건만

 

아들의 숨소리는

별을 데리러 먼 데를 여행하고 있는

우주선 같다

 

잘자라 우리 아들

아버지 눈동자에 박힌 별이여

저물지 않는 샛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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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3. 18:11

주님께 비스듬히 기대기를 간구하는 기도

(21:5-19)

 

주여, 주께 비스듬히 기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가 기대어 있는 생명의 토대가 흔들려

우리의 삶도 흔들리고 있나이다.

살아가려면 기대어야 할 것이 많은

연약한 생명이오나,

오직 우리가 영원히 기댈 수 있는 것은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주님 밖에 없사오니

주께 비스듬히 기댄 우리를 밀어내지 마시고

우리를 주의 영원한 생명으로 품어 주옵소서.

생명을 위협하는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며

때로는 혼란스럽고

때로는 겁에 질리지만

주의 약속을 말씀을 굳게 붙잡고

거짓 선지자들의 허황된 유혹을 물리치며

영원한 생명의 토대이신 주께

살포시 비스듬히 기대오니,

주여,

그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여 주옵소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주여,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인내하고 또 인내하겠사오니,

우리의 영혼을 평온케 하시고

생명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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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3. 18:02

비스듬히

(누가복음 21:5-19)


비스듬히

/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1. 생명은 강인하기도 하지만 연약하다. 생명에는 강인함과 연약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존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기대는 것이 많다.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도 실은 땅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이고,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이다. 땅이 흔들리면 나무도 흔들리고, 허공이 흔들리면 나무도 흔들린다. 기대고 있는 것이 삐끗하면 생명도 삐끗한다. 그래서 생명은 연약하다.

 

2. 살면서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참 그렇다. 어느 날은 좋다가도 어느 날은 흐리다. 그럴 때면 마음이 변덕스럽고, 신앙이 변덕스러운 것 같아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믿는 자라면 언제나 맑은 날만 가득해야 하는데, 흐린 날이 오면 믿음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가하고 의심이 들기도 한다.

 

3.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을 목격하고 박해를 경험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사역 중이었고, 특별히 헤롯성전을 중심으로 막바지 사역이 한창 중이었다.

 

4.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5).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성전이라 불렸다. 헤롯성전은 로마 황제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은 헤롯대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지은 어머어마한 규모의 성전이었다.

 

5. 헤롯이 그토록 성전 건축에 공을 들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직 정치적 목적만이 존재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평생 적으로 생각했던, 에돔(이두매) 출신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정치술로 로마의 유력한 정치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그 세력을 등에 업고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6. 헤롯성전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서쪽 벽만 남아 있는 상태다. 현재 예루살렘에서 빛나고 있는 건물은 무슬림 사원(바위 사원)이다. 헤롯성전은 바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예언했듯이, 서기 70년경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무너뜨려졌다. 이것은 참으로 허무한 일이었다. 헤롯성전은 BC 20 년경 공사가 시작되어, AD 63 년경 공사가 완료될 정도로 공사 기간이 80여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완성한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7. 헤롯성전은 오늘 말씀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성전 외부 뜰은 한꺼번에 40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고, 그 치장이 아름다울 데 그지 없었다. 사실 BC 20년에 시작된 외부 공사는 9년만에 끝났지만, 내부 공사 때문에 공사 기간이 80 여 년이나 흘렀던 것이다.

 

8.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유대인 신앙의 특징은 성전신앙이다. 그들은 성전에 기대어 살았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성전과 관련된 민족의 크나큰 아픔이 있었다. 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민족적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았다. 그런데, 그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9.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이미 그것을 한 차례 경험한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도 어떠한 재해가 임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10. 2004년도에 인도양에서 쓰나미(지진해일)가 발생하여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지에서 23만 여 명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한국의 어느 설교자는 그 사건을 우상이 판 치는 동남아시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2005년도 뉴올리언즈를 덮쳤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뉴올리언즈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교한 미국과 오스트리엘리아의 설교자도 있었다. 이렇듯, 기독교인들은 자연재해든, 질병이든, 개인이나 가정에 나쁜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11. 재해가 발생하면, (신앙인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불안해지는 법이다. 마음이 극도로 약해지고, 정신적인 패닉이 온다. 거짓 선지자는 그 틈을 파고 든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거짓 선지자를 섣부르게 따라 나선 것 때문에 더 심한 멸망의 길을 걷는다. (요즘 한국사회의 최고 핫 이슈인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다. 엄마 아버지를 잃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박근혜에게 교묘하게 다가선 것이 최태민이라는 사람이고, 그의 거짓 예언에 속아 더 심한 멸망의 길을 걸은 사람이 박근혜이다. 자신만 망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12. <유대 전쟁사>를 쓴 유대인 출신의 유명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헤롯성전이 로마의 침략을 받기 전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전쟁의 소문에 불안해 하던 유대인들에게 그 거짓 선지자들은 성전으로 피신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 성전으로 몸을 피했다가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단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유대인들의 슬픈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13.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8). 재해 뿐만이 아니라, 신변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또는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또는 욕망이 생기면 사람들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법이다. 사탄, 또는 사기꾼들, 또는 거짓 선지자들은 그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마음을 적당한 타이밍에 꿰차고 들어오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14. 대한민국에서 점집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강남이다. 욕심 많은 부자들의 욕망 때문이다. 점집이 가장 잘 되는 시기는 법조인들(,검사)의 승진 심사를 앞둔 시점과 입시를 앞둔 시점이다. 그리고 점집을 간절하게 찾는 모든 사람들은 신변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한 사람들이다.

(한국 다녀와서 표정이 밝아진 어느 교인의 이야기 목사님, 점쟁이가 그러는데, 내년부터 좋은 일이 있을 거래요~).

 

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자연재해나, 신변에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는 못된 습관부터 버려야 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님으로 신실하게 섬겼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신변에 일어나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6. 오늘 말씀은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매우 아포칼립틱(묵시적, 무시무시한 언어)하게 전하고 있다. 우선, 성전이 무너진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가 있으리라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고 말한다.

 

1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게 심판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너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러한 일이 발생하거든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라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

 

18. 그렇다. 우리의 주변, 또는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때로는 이해 안 되는 힘들고 어려운 일’, 우리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일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증거가 되는 일이다. 우리는 그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 두려워 하거나 무서워 하거나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나쁜 일(안 좋은 일, 힘든 일)이 생겨도 두려워하거나, 거짓 선지자들을 따라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불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려움은 내가 믿는 바를 증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19.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박해는 불평의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믿는 바를 증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당하며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간절히 믿는 데 왜 이러한 박해를 당하게 하세요?’라고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박해 앞에서 그들이 믿는 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어떤 것에 기댄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 우리가 매일 같이 경험하는 세상은 악하고 불의하다. 한국의 정치상황이나, 미국의 정치상황, 이렇게 크고 거창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의하고 악한 것들로 즐비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심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계신데,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해? 세상 살기 정말 힘드네. 먹고 살기 왜 이렇게 힘드냐!”

 

21.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기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 ‘왜 하나님이 계신데, 이렇게 세상이 악해?’가 아니라, ‘세상은 이렇게 악하지만, 하나님이 계셔서 다행이야가 우리의 희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22.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는 실제로 어디에 생명을 기대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 정치? 가족? ? (건강)? 순실이?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것들이다.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헤롯성전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졌다. 임금과 집권자들이 박해자로 어느 순간 돌아설지 모른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우리를 죽이고 넘겨 준다.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더군다나,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순실이도 구속되고 말았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생명을 기대어 살고 있는가?

 

23.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말 못할 어려움을 안고 산다. 그것 때문에 실제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산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새로운 힘과 소망을 얻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현재 삶의 자리에서 겪는 어려움이 여러분에게 도리어 여러분이 믿는 바에 대한 증거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4.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1-4).

 

25. 오늘 말씀도 같은 것을 증거하고 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9). 환난(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들) 중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 방법은 인내하는 것이다. 이 인내는 무조건 아무 생각 없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한 인내이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는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위에서 살펴본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서,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26. 특별히, 로마서의 말씀 중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에서 우리 말로 연단으로 번역된 것은 영어로 ‘character’이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는 ‘character’를 만들어 낸다. ‘Character’는 우리 말로 성격, 성품, 인격, 신분등의 뜻을 갖는다. , 어떻게 인내하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 성품, 인격, 신분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하며 인내하는 그리스도의 성격, 성품, 인격, 신분은 분명 소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을 기대어 살지 않고,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생명을 기대어 살기 때문이다.

 

27. 내가 좋아하는 폴란드의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쉼보르스카의 시 <지도>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 잔인한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허용치 않으니까.”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라고 한다. 삶의 마지막,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세상을 들여다 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 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삶의 회한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인생의 굴곡과 질곡이 없는 이들에게서 나올 수 없는 고백이다.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

 

28. 우리는 날마다 '잔인한 진실'을 마주하며 산다. 너무 잔인해서 어떤 이는 눈을 감아버리고, 어떤 이는 딴청을 피우고, 어떤 이는 스스로 생명을 마감하기도 한다. 혹시, '잔인한 진실' 때문에 삶이 힘들고 어렵거든 쉼보르스카처럼 지도를 펼쳐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가 이 시의 다른 곳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듯이, 세상은 사실 별개 아닐 수 있으니까. "밀림은 나무 몇 그루로 표시되어 있어 그 속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29. 혹시, 삶의 현실 앞에서 여러 가지 일로 (사업(직장) 때문에, 가정 때문에, 자녀 때문에, 질병 때문에, 정치 때문에, 또는 순실이 때문에)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건너고 있는 분이 있다면, 삶의 지도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눈 앞에 펼쳐놓기 바란다. 그리고 그분께 살포시 비스듬히기대어 보시라.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토대이신 우리 주님께서 비스듬히기대어 있는 바로 당신(여러분)에게 위로와 사랑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속삭여 주실 것이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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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11. 12. 14:33

그리스도의 얼굴

 

우리는 서로 보지 않는 게 좋아요.

내 얼굴은 내 노래를 반영하지 않아요.

나는 손가락조차 휘어져 있죠.

당신은 나를 감당할 수 없을 거에요.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태초부터 인류의 눈은

가장 타락했기 때문이죠.

내가 보고 싶으면

차라리 어린왕자를 떠올려 봐요.

어린왕자가 당신에게

상자 하나를 건네 줄 거에요.

그 안은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죠.

그 안에 내 얼굴이 들어 있어요.

, 이제 마음껏 상상해 보아요.

그게 바로 나에요.

우리,

그렇게 영원히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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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11. 9. 04:14

인생

 

세월은 가고

붙잡아 둘 수 없어

하늘을 쳐다보니

닭 쫓던 개 신세구나

만물은 돌고 돌아

영겁을 이어가는 것 같으나

떨어진 잎새 들여다보니

이들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구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야속하여

고개를 떨구는데

바람은 저만치 뒹굴며

한량처럼

세월을 까먹고 있구나

그림자만

발걸음을 따라오니

담장 아래를 서성이며

갈 데 없는 것이

별과 별 사이를 헤매는

외계인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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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11. 9. 03:36

기도


멈춥니다 

무릎을 꿉니다

눈을 감습니다

고개를 숙입니다

입을 다뭅니다

겨드랑이를 엽니다

칼을 꺼냅니다

허공을 자릅니다

피를 받아 마십니다

토해냅니다

미친듯이 웃습니다

우스워집니다

미안해집니다

속상해집니다

뜨거워집니다

꿈을 꿉니다

눈을 뜹니다

고개를 듭니다

입을 엽니다

손을 흔듭니다

두 손을 모읍니다

붉은 혀를 훔칩니다

무릎을 폅니다

비틀거립니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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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16. 11. 9. 03:20

성도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하박국 2:4)

 

주여, 우리는 성도이니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가 충만한 성도이니이다.

주의 인자(헤세드)가 우리를 구원하셨사오니

우리 안에 주의 인자가 가득하나이다.

신실하시고 변함 없으신 주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직 죄악이 가득한

온 세상에 드러났으니,

우리가 어찌 주를 보지 못했다고

부인할 수 있으리이까.

우리는 지복(Visio beatifica)에 이른 성도이오니

성도답게

인자(헤세드)를 세상에 드러내며

주의 거룩한 백성으로

빛을 발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1. 9. 03:05

(Gene)

 

너는 히스토리다

동시에 히스테리다

너는 모두 우성은 아니지만

너는 모두 현상이다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새겨진다

너의 안식은 쉼이 아니라

진화다

너는 같은 사건을 두 번 겪지 않아도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

너는 용서가 아니라

트라우마다

영원성은 네 안에서 탄생한다

죽은 사람이 네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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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9. 02:55

우리는 성도입니다

(하박국 2:1-4)

 

교회력이라는 게 있다.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25번째 주일이기도 하지만, ‘만성절(All Saints Sunday)’이기도 하다. 교회력은 단순히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1:23).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다른 것이 충만해서는 안 된다. 오직, 교회는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한국에는 차례라는 풍습이 있다. 고조부까지 4대의 신주를 모셔 놓고,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려 드리는 풍습이다. 차례를 지내는 과정 중 합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조상님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참사자들(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제청 밖으로 나가고 문을 닫거나, 제상 앞에 병풍을 가린 후 모두 엎드린다. 그러면 조상님들이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조상님들께 차례를 지내는 이유는 조상님들의 영혼을 잘 달래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야 조상님들이 살아 있는 자손들의 만사를 잘 돌봐주어 모든 일이 형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제사는 한 달에 두 번, 초하루와 보름에 드렸고,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 때마다 드렸다. 물론 요즘은 명절 때만 차례를 드리는 풍습으로 바뀌었지만, 옛날에 종갓집 며느리는 제사상 준비하느라 인생을 모두 보낼 정도였다.

 

우리 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문명이든 돌아가신 조상들에 대한 예법이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켈트어 문화권(오늘날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지역)에서 지켰던 삼하인(Samhain)이 그것이다. 고대 켈트인들의 달력에 의하면, 새해는 111일에 시작한다. 그리고 새해를 시작하면서 어둠의 6개월이 전개되는데, 바로 이 때 영적인 존재들이 땅으로 내려와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조상의 영혼이 다시 집을 찾아오는 날이라고도 생각했다. 이들이 심술을 부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막아낼 방법들도 고안해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1031일날 지키는 할로윈의 유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말이 할로윈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할로윈 데이할렐루야 데이’ (우리교회에서는 Saints Night)라고 바꿔 부르며 그날을 지킨다. 그런데, ‘할로윈은 세속적인 언어가 아니고 매우 기독교적인 용어이다. 켈트어로 할로우(Hallow)성인(Saint)을 가리킨다. 여기에 전야라는 뜻의 ‘eve’가 붙어서 할로윈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로윈이란 크리스마스 이브처럼 무엇인가를 기리는 날의 전야제라는 뜻을 담고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전야제를 갖는다. 분위기가 최고조다. 할로윈은 성인들을 기리는 전야제를 갖는다. 물론 전야제이기 때문에 분위기 최고이다.

 

기독교인들은 켈트족에게 복음을 전한 뒤, 영적인 존재나 죽은 조상들을 기리는 삼하인이라는 풍습을 받아들여, 그날을 기독교의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로 삼아 할로윈을 만들었다. 그것이 7세기와 8세기에 걸쳐서 생겨난 기독교의 전통인 만성절(All Saints Day)’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만성절 예배를 드리며 그와 연관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워낙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켈트문화와 연관된 기독교 전통이다 보니, 한국교회에는 생소한 기독교 절기일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미국에 살고 있다 보니, 한인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할로윈 데이를 맞아 사람들이 기괴한 데코레이션과 기괴한 분장을 하는 것은, 그날의 분위기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유령 또는 우리 말로 귀신을 표현할 때 우리는 흔히 기괴한 상상을 하게 된다. 기괴한 분장과 함께 각 집을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을 말하는 것은, ‘맛 있는 거 주지 않으면 장난칠거야라고 하는 것인데, ‘영혼을 달래주지 않으면 네 인생에 장난칠거야라는 영적인 존재의 위협이 담겨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미신적인 요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재미로 그렇게 할 뿐이다.

 

할로윈(만성절)도 성탄절처럼 세속화되었다. 할로윈을 맞아 장사치들은 한 몫 챙기려는 마음만 있지, 할로윈(만성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와 관련된 프랙티스(practice)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할로윈을 단순히 재미로만 보낼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의미에 충실해서 기독교의 성인을 기리는 엄숙함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에 휩쓸리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을 거슬러 신앙의 가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성인의 규정은 기독교 전통(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마다 다르다. 우리는 개신교회이기 때문에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성인(Saint)’ 또는 성도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만성절을 지킬 때에 과거와 현재의 모든 크리스천들을 기념한다.

 

감리교 전통에서는 성인(聖人)들뿐 아니라 그 교회에서 돌아가신 분들 역시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로 지키기도 한다. 할로윈으로부터 시작되는 만성절은 이 땅을 걸어간 믿음의 선조들, 지금도 순교의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성도의 삶을 기념하며 격려하는 날이다.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성도라고 부른다. ‘성도라는 말에는 신실한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성도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말이다. 구약의 언어(히브리어)로 이들을 하시딤(hasidim)’이라고 부르는데, 하시딤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헤세드(hesed)’에서 왔다. 헤세드는 영어로 ‘steadfast love’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인자라고 번역한다. ‘성도(Saint, 하시딤)’란 인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물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뜻인데, 특별히 인자(헤세드)’의 성품을 닮는 것이다.

 

인자란 신실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실신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실하고 변함없으신 사랑을 궁극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그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향한 우리의 믿음이 신실하고 변함없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성경에서는 신실하고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의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도를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을 일컫고, 의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성인)’의인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성도의인과 다른 차원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 알아, 요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보편적인 성도의인의 의미와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의 거리감을 좁혀나가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지복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지복이란 궁극적인 복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인간에게 궁극적인 복이란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은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지복을 받은 사람들로 묘사된다. 모세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 사무엘도 엘리의 문하생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신약시대로 넘어와서 구약의 성도의인의 개념은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성도의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본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고백했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성도의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 즉 성도답게, 의인답게 살았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 보자.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성도의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는 하나님의 직접 대면한, 즉 예수를 믿는 성도의인의 삶과 많은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 같다. 다른 것이 세속화가 아니라, 이것이 가장 궁극적이고 가슴 아픈 세속화이다.

 

22. 이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신앙은 귀신놀이가 아니다. 신앙은 교양도 아니다. 죽은 조상님들에게 차례 지내는 것 같은 미신적인 풍습도 아니다. 신앙은 신적인 존재를 통하여 세속적 이익을 취해보려는 얄팍한 처세술도 아니다. 신앙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려는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즉 인자를 경험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생명의 몸짓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행위이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또는 의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성도란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자한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신실하고 변함없는 삶을 사는 존재이다.

 

만성절 주일(All Saints Sunday)을 맞아,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성도(Saint)’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실하고 변함없으신, 즉 인자하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내가 얼마나 실제적으로 느끼고 깨닫는가가 다를 뿐이지,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복, ‘지복을 받은 사람이다.

 

못 봤는데, 봤다고 우기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봤는데 본 줄도 모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다.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어리석은 자로 살면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3b). 그리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복된 자이므로, 복된 인생을 살아야 한다.

 

만성절 주일(All Saints Sunday)’을 지키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지복이 다시 한 번 넘치길 축원한다. 우리는 만성절을 맞아 서로가 서로를 축하해 주고, 복을 빌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성도의 삶이, ‘의인의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자. “우리는 성도입니다.” “당신을 축복합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복된 인생을 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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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3. 17:0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비유 - 수수께끼)

(마가복음 4:1-20)


지금까지 (3장까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주로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이적을 통해서 전해졌다. 그것 때문에 바알세불 논쟁까지 벌어졌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음해하는 세력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수하로 몰아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왜 어떤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거부하는 것일까? 이제 예수님은 치유와 이적을 넘어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다.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비유의 말씀이다. 이 첫 번째 비유는 앞으로 전개되는 예수님의 가르침, 특별히 비유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제 역할을 한다. 비유(parable)는 감추는 효과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비유의 중요한 기능은 기존의 지식과 전통을 전복(뒤집어 엎는 것)시키는 것이다.

 

비유는 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를 해도 부족한, 심원한 주제이다. <비유의 위력>이나 <어두운 간격>, 이런 책을 함께 읽으며 공부하면 참 좋은데, 그게 쉽지 않다 (적당한 때에 기회가 있을 것이다). 비유는 Metaphor(은유)Narrative(이야기)가 합쳐진 형태의 이야기이다. , 뭔가 감추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말해서, 그것이 드러나고, 전복시키는 문학 형식이다.

 

비유는 일종의 수수께끼와 같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수수께끼의 일종이다. 우리는 어릴 적에 친구들과 수수께끼를 하며 놀았다. 아이들 세계에서는 수수께끼가 가벼운 놀이일지 몰라도, 실제 인생에서 수수께끼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담보한 지식과 무지사이의 투쟁이다.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비극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비극작품을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인간의 머리를 한 사자인 스핑크스를 만난다. 테베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스핑크스와 한 판 겨루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었다.

 

스핑크스는 테베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이와 같은 수수께끼를 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오후에는 두 발로 걷다가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 이 수수께끼의 답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이 수수께끼를 맞히면 목숨을 건지게 되고, 이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수수께끼는 인생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쥐고 있는 중요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이렇게 답한다. “사람이다. 어려서는 네 손과 네 발로 기어다니며, 어른이 되어서는 두 다리로 걸어다니고, 늙어서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대한 정답을 말했다. 그 순간 스핑크스는 스스로 죽고, 오이디푸스는 안전하게 테베에 입성하게 된다.

 

구약성경 중 사시기에도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수수께끼를 둘러싼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삼손 이야기이다. 삼손은 블레셋의 딤나 여인과의 결혼 잔치에서 잔치 자리에 함께 한 30여명의 친구들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그러면서 자기가 낸 수수께끼를 맞히면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삼손은 반대로 수수께끼를 못 맞히면 똑 같은 것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한다. 삼손이 그들에게 낸 수수께끼는 이런 것이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불행하게도 아무도 삼손이 낸 수수께끼를 못 맞힌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블레셋 여인인 삼손의 아내(딤나 여인)를 협박하여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올 것을 요구한다. 삼손의 아내는 울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달라고 삼손에게 구걸하고, 삼손은 가엾은 마음에 그 답을 아내에게 알려준다.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낸 블레셋 친구들은 잔치가 끝나기 전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이 답을 들은 삼손은 자신이 아내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하여 아스글론에 내려가 블레셋 사람 30명을 쳐죽이고, 그들에게 옷을 빼앗아 수수께끼의 답을 맞춘 블레셋 친구들에게 주고, 또한 그 블레셋 아내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수수께끼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고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중요한 삶의 질문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러한 기능을 한다. ,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내시는 것이다. 그것을 맞히면 천국에 들어가지만, 그것을 못 맞히면 천국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1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수수께끼와 같다. 수수께끼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온전히 반응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오늘 말씀 중, 12절 말씀은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는 말씀이다. 잘못 이해하면 매우 배타적인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특별히 한국말 성경은 이것을 조금 애매모호하게, 잘못 번역한 듯싶다. 영어성경을 보면 12절 말씀이 전하고 싶은 뜻이 좀 더 잘 드러난다.

 

So that while seeing, they may see and not perceive,

and while hearing, they may hear and not understand,

otherwise they might return and be forgiven. (NASB)

 

They may indeed look, but not perceive,

and may indeed listen, but not understand;

so that they may not turn again and be forgiven. (NRSV)

 

한국어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매우 배타적인 진술로 들린다. 사람들이 구원 받지 못하게 하도록 알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12절 말씀의 뜻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풀어서 설명하면, ‘그들이 보았어도 인식을 하지 못하고, 들었어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들이 보고 인식했다면, 들은 뒤 이해했다면, 그들은 분명 돌아와서 용서를 받았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중요한 것은 만약 우리가 보았다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고, 들었다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이다. 탕자는 아버지와 함께 한 집에서 살 때 아버지의 사랑을 보았으면서도 인식하지 못했고 들었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뿌리치고 자신의 재산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났다. 그런데, 그는 먼 나라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을 때, 불현듯 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하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은 회개와 더불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이전과는 다른 인식과 이해를 가지고 아버지의 사랑을 보고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흥미와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 ‘구원 받느냐 아니냐의 중차대한 기로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식(perceive)하고 이해(understand)하는 일은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짓는다. 예수님의 사역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처럼,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인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곁은 떠나고 아버지 집을 떠난다. 그러나, 인식하고 이해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남아 있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일상생활(신앙생활,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상생활이 곧 신앙생활이다)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수수께끼를 잘 풀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수께끼에 시험에 들면 안 된다. 그것은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혀 결국 테베에 입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수수께끼를 잘 풀어 생명을 얻어야 한다. 생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시험에 들어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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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1. 1. 14:31

엎드림을 간구하는 기도

(7:1-10)

 

주여, 엎드리게 하옵소서.

아이 성 패배의 아픔이 쓰라리고 부끄럽더라도

고개를 쳐들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 앞에서 엎드려

주의 선하심을 간구하게 하옵소서.

여호수아가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된 것은

그가 전쟁에 능한 용사이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스승 모세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주 앞에 엎드린 것 때문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외적인 전투에서 아무리 큰 승리를 거두었어도

내적인 전투에서 패배하면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러운 쇳소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이 마음이 오직 주를 향하여 엎드린

겸손한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주 앞에 엎드리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꺼이 엎드린 우리에게도

찬란하게 임하게 되는 줄 믿사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 14:30

엎드림

(여호수아 7:1-10)


오늘 말씀은 여리고 성 전투에 이은 아이 성 전투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 전투와 아이 성 전투 이야기는 동전의 양면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라는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여리고 성 전투는 이 노래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여호수아 성을 쳤네 여리고 여리고 여리고

여호수아 성을 쳤네 여리고 성이 무너졌도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여리고 성 주위를 돌았고, 마지막 7일 째 7곱 바퀴를 돈 뒤, 나팔 소리가 나면 모든 백성이 큰 함성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 7일째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다음 세 가지였다.

 

1)    제사장들의 나팔 부는 소리가 들리면 큰 소리로 외치라

2)    라합과 그 가족을 살려주라

3)    전리품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다’ (헤렘법)

 

외양적으로 보면, 여리고 성 전투는 완벽한 것처럼 보인다. 여리고 성 전투를 전하고 있는 6장 말씀은 이렇게 끝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6:27).

 

그런데, 아이 성 전투를 전하고 있는 7장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아직 아이 성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아이 성 전투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사실, 이 부분은 스토리 기법의 전문 용어로 서스펜스라고 한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사용되는 기법인데, 이야기 속 등장인물 중 적어도 한 명 이상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관객에게 누설될 때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서 서스펜스가 형성된다. 이는 모두가 감춰져 있는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인식) 서스펜스가 발생하여 스토리에 몰입한 관객들은 가슴 졸이며 지켜보도록 만드는 강력한 도구다.

 

영화 감독 중, 서스펜스의 대가로 불리는 이가 있다. 알프레도 히치콕이다. 히치콕이 어느 강연에서 서스팬스와 서프라이즈의 차이를 명쾌하게 설명하여 정의 내린 적이 있다. 우리가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앉아 있는 식탁 밑에 폭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갑자기 쾅 하고 폭탄이 터지면 관객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이것은 서프라이즈다. 아무도 모르다가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스펜스는 이와 다르다. 누군가 폭탄을 설치하는 장면을 관객들에게 미리 보여 주었다면, 관객들은 폭탄이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사소한 장면에도 몰입하게 된다. [김정희,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 52쪽]

 

아이 성 전투 이야기를 다 안다고 생각하며 설렁설렁 말씀을 듣지 말고, 서스펜스 기법에 몰두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말씀을 들어보시라. 특별히 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품는 게 중요하다. 왜 아이 성 전투는 이렇게 허무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아이 성 전투는 여리고 성 전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여리고 성 전투나 아이 성 전투를 비교해 보면, 정탐하는 것은 똑같다. 오늘 2절 말씀도 보면, 아이 성 전투는 정탐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2).

 

그런데, 명확히 다른 것이 있다. 아이 성 정탐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 여리고 성 정탐은 매우 어려웠다. 정탐꾼들이 죽을 뻔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생 라합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 아이 성 정탐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정탐하면서 어떤 일이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매우 순조로웠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이 형통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 일도 안 일어 나는 것이 형통인가?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서 그 일 때문에 힘들어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형통인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혹시 그 사건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 어떤 사건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불행한 일이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바라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사건의 연속이다.

 

아이 성 전투의 다른 점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없다는 것이다. 여리고 성을 치르기 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6:2).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령을 주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시고,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며 명령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백성은 여호수아의 음성을 들었다. 그런데, 아이 성 전투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아이 성 전투에서는 정탐꾼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고, 여호수아는 그 말을 따른다. 정탐꾼과 여호수아의 음성만 있을 뿐, 하나님의 음성이 전혀 없다.

 

2016818, 인생의 중요한 사건을 놓아두고 기도하던 중 내가 쓴 짤막한 글이다.

 

일이 잘 안 되어서 고통 받는 것보다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하느라 고통 받는 것이 훨씬,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낫다. 일이 잘 안 되어 받는 고통은 아픔을 주지만, 기도하느라 받는 고통은 기쁨을 준다. 기도의 고통은 치유하는 능력과 감추어진 것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온전해질 수 있고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자기를 굴복시켜 기도의 자리에서 고통 받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만 몰랐지, 7 1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아이 성 전투에 임한 성경의 독자들은 모두 아이 성 전투의 결과를 짐작했다. 결국 아이 성 전투는 패배로 끝난다. 너무 허무하게 끝난다. 정탐꾼의 말대로 3천 명의 군사만 올려 보냈다가 별다른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36명의 전사자만 낸 채 허무하게 패배하고 만다. 그 허무한 전투의 패배로 인해, 여리고 성의 승리의 기쁨은 온 데 간데 없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큰 슬픔에 빠지고 만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5).

 

이에, 여호수아는 절망에 빠져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6-8).

 

여리고 성 이야기와 아이 성 이야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 전투는 외적인 전투의 이야기이고, 아이 성 전투는 내적인 전투의 이야기이다. 외적인 전투(여리고 성)를 아무리 잘해도, 내적인 전투(아이 성)에서 무너지면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사랑하는 여러분, 큰 일, 위대한 일을 이루려 하지 말고, 이 마음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시는 데 전력을 다 하시라. 큰 일, 위대한 일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헤렘법을 지키는 것이다. ,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아간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헤렘법)이다. 아이 성 전투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 패배 뒤에, 하나님께 엎드린다’. 엎드리는 것은 기도의 자세이다. 민수기서에 보면 모세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모세의 제자 여호수아는 모세에게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 배웠던 것 같다. 문제가 발생하니까 여호수아도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린다.

 

엎드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슨 일을 하기 전의 엎드림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엎드림이다. 둘 다 중요하다. 그런데 무엇이 더 어려운 것 같은가?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런데, 신앙의 선조 여호수아의 위대함은 패배 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는 데 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잘 되기 위한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일이 잘 되지 않아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일이 잘 되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반발심이 일어나 하나님을 욕하고 부인한다. 엎드리기는커녕 고개를 쳐든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계획처럼, 또는 기도한 대로 일이 잘 되지 않거든, 당황하거나 분노하지 마시고, 여호수아처럼 다시 한 번 엎드려 보시라.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에 엎드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1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왜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벌써, 앞으로의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지 이 한 마디를 통해 예상이 되지 않는가?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엎드리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기도는 고통의 자리이다. 쉽지 않다.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엎드리는 일, 기도하는 고통의 자리로 오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일이 잘 안 되어서 고통 받는 것보다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하느라 고통 받는 것이 훨씬,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낫다. 일이 잘 안 되어 받는 고통은 아픔과 부끄러움을 주지만, 기도하느라 받는 고통은 기쁨과 승리를 준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요즘 개신교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개혁개혁을 외친다. 그러나, 개혁은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다. 외적인 전투(여리고 성 전투)에서 아무리 승리했어도, 내적인 전투(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울리는 꾕과리에 불과하다. 시끄럽기만 하지 열매가 없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일을 앞두고(십자가) 엎드리는 일, 기도의 고통의 자리로 들어서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셨다. 그랬더니,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패배)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승리를 온 몸으로 안으셨다. 이제 우리가 여호수아서 8장에서 보게 되겠지만(이것이 궁금하신 분들은 토요일 새벽기도에 나오시라!), 기도의 고통의 자리로 기꺼이 들어간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아이 성의 큰 승리’, 부활의 승리를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부활의 승리는 믿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크고 위대한 일은 우리 주님께서 이루어주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크고 위대한 일이 아니라,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오직, 주님께만 마음을 두라.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엎드린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며 우리와 함께 부활하실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기에, 오늘도 주 앞에 엎드린다.

 

엎드림을 간구하는 기도

 

주여, 엎드리게 하옵소서.

아이 성 패배의 아픔이 쓰라리고 부끄럽더라도

고개를 쳐들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 앞에서 엎드려

주의 선하심을 간구하게 하옵소서.

여호수아가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된 것은

그가 전쟁에 능한 용사이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스승 모세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주 앞에 엎드린 것 때문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외적인 전투에서 아무리 큰 승리를 거두었어도

내적인 전투에서 패배하면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러운 쇳소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이 마음이 오직 주를 향하여 엎드린

겸손한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주 앞에 엎드리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꺼이 엎드린 우리에게도

찬란하게 임하게 되는 줄 믿사옵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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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